채효정 님의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는 서울의 모 대학에서 강사(講士; 정치철학)로 노동하다 해직된 후 복직 투쟁을 벌이고 있는 저자의 이론적, 현실적 입장을 제시한 책이다.

현재 저자는 국회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다.
돋보이는 점은 부당 해직 당한 저자 자신의 처지를 밝히는 과정이 기업화하고 신자유주의화한 우리 대학의 전반적 현실을 여실히 드러내는 장(場)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의 해직은 ‘돈이 안 되는‘ 인문학 축소 또는 폐지와 맞물리는 현상이다. 물론 대학은 저자가 말했듯 정치, 교육, 노동, 학생, 교수 등이 없는 곳이다.

저자는 대학의 출발지인 유럽에서 성직자와 관료 및 귀족들을 양성하는 제도권 대학들은 대부분 산속 수도원에 있었던 반면 그 성스러운 캠퍼스를 박차고 나와서 철학과 법학 같은 세속의 학문을 커리큘럼으로 삼고 자유학예를 중심으로 가르치는 대학들은 도시의 거리와 장터 광장 옆에 자리 잡았다고 말한다.

대학은 아고라 또는 포럼(정치적 광장) 역할을 해아 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인문학을 비판과 저항의 학문으로 정의한다. 이 정의는 인문학이 중산층의 지적(知的), 문화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속물주의적 교양으로 전락한 면이 있다고 본 그의 다른 정의와 짝을 이룬다.

이 정의는 지난 2011년 나온 이진경, 최진석 등 여러 필자들의 ‘불온한 인문학’이란 책의 논지와 맥을 같이 한다.

그들에 의하면 우리의 인문학은 두루두루 듣기 좋고 무난하게 소비되고 있다. 가벼운 유행 차원에서 소비되고 고급스러움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불온한 인문학’의 필자들은 익숙하고 안온한 삶에 낯설고 날선 감각, 우리 자신을 베고 다치게 함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삶의 형태와 강제로 맞부딪히게 만드는 과정에 불온한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는 말을 했다.

여러 논의를 다 제쳐두고 나는 인문학이란 이름이 아무 데나 사용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나는 “비판과 저항”(채효정)도 힘들고 “이전과는 다른 삶의 형태와 강제로 맞부딪하는 것”(‘불온한 인문학’ 필자들)도 어렵고 그저 솔직히 지적 허영을 위해 (통합적인 의미의) 인문학이란 말 대신 구체적으로 개별 학문들 가령 사안에 따라 정신분석학을, 역사학을, 문화예술을, 주역을, 시를, 자연과학을 배우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할 수 있다.

민중신학을, 마르크시즘을 배우던 때가 그립고 그 시절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뭉텅뭉텅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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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 빼앗긴 자들을 위한 탈환의 정치학
채효정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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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은 누구의 것인가는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해직 강사 채효정의 책이다. 이 책은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지만 교원도 아니고 노동하지만 노동자도 아닌 대학 강사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저자는 우리는 가장 손쉽게 절감할 수 있는 비용이었고 가장 효율적으로 평가 지표를 높일 수 있는 수단이었다.”(15 페이지)고 말한다.

 

저자는 교육자성과 노동자성이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프레임은 교사든 교수든 강사든 교육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 깨뜨려야 한다고 말한다.(19 페이지)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학교가 선생님을 해고하면 우리가 당신에게 강의를 요청하겠다.”는 누군가의 주권적 제안으로 20161026일부터 1214일까지 매주 수요일 강의실 밖 잔디밭에서 진행한 열린 강좌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저자는 이 책을 (대학 당국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자신의 불철저함에 대한) 반성문이라 말한다. 저자는 University의 어원을 예로 들며 자급하고 자립할 수 있는 단위를 가지고 그 안에서 공동체의 자치를 이루어 가는 모든 곳을 나라라고 정의(28 페이지)한 뒤 이곳이 정치의 장이 아닌 것 같지만 반드시 정치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공간이기에(31, 32 페이지) 대학은 나라이고 하나의 작은 폴리스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32 페이지)

 

저자는 대학을 대학으로 존재하게 하려면 대학으로서라고 할 수 있는 활동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33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대학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저자는 대학에서 쫓겨난 자신의 처지가 학생들의 머지않은 미래라고 말한다. 정치철학자인 저자는 그에 맞게 고대 민주정에서 민주주의를 이루는 세 요소를 언급하며 대학과 기업의 차이를 논한다.

 

대학은 기업이 아니라 대학다워야 한다는 취지에서다.(이소노미아, 이세고리아, 이소크라티아가 그것이다. 이소노미아는 법 앞에서의 평등이고 이세고리아는 똑같이 발언할 수 있는 권리이고 이소크라티아는 동등한 힘을 갖는 것을 말한다.) 저자는 책임지는 사람들이 결정하는 것이 민주주의라 말한다.(39 페이지)

 

저자는 비전임 교수가 전임 교수보다 훨씬 많고 비전임 교수 중에서 시간 강사가 차지하는 비율이 60퍼센트를 차지하는데 강의를 개설하거나 배정할 때 실제 강의를 담당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묻지 않는 것은 민주주의적이지 않다고 말한다.(41 페이지)

 

박정희 정권이 비판적인 지식인들과 젊은 소장 학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법을 개정하고 강사들을 교원에서 제외시켰음을 상기시키며 저자는 21세기 대학은 엔클로저, 젠트리피케이션 등이 일어나는 장소로 정의한다. 우리나라 사립대학은 국민의 세금인 공공 자원이 투입되기에 공공재이다.(엔클로저는 대학을 사유재로 봉쇄하는 것이다.)

 

대학은 모두의 것이다. 우리의 대학, 우리의 공화국을 자본으로부터, 국가로부터, 소수의 지배로부터 구해 내는 일이 필요하다.(49 페이지) 저자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이 만드는 정치 체제를 민주주의로 정의한다.(53 페이지) 저자는 민주주의를 시민의 정치가 아닌 노동자의 정치로 정의한다.(56 페이지)

 

저자는 인문학을 철학, 역사, 문학, 예술, 과학, 실천 등 다방면의 길을 통한 인간의 자기 해명과 자기 인식으로 정의한다.(57 페이지) 저자는 2() 노동 없는 대학에서 노동()에 적대적인 사회 환경을 문제삼는다. 대학 역시 노동()에 적대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시수라는 말이 있다. 이는 1학점에 대해 인정하는 강의 노동 시간을 말한다.

 

시수당 51,000원의 강사료를 받는 경우를 보자. 시수에 대한 노동 시간을 계산할 때 통상 3을 곱한다. 1학점 강의를 할 때 사전 사후 강의 시간이 앞뒤로 최소 한 시간씩은 더 들 것이기 때문이다. 1 시수는 대략 세 시간 노동으로 인정받는 셈이니 51,000원 나누기 3을 하면 시급은 17,000원으로 계산된다.

 

그런데 대학 교원으로서 강사는 강의 뿐 아니라 연구를 하고 학생도 만나는데 연구에도 시간이 들고 학생 상담 지도에도 시간이 든다. 1 시수당 아홉 시간의 노동 시간이 소모되는 것이다. 그렇게 계산하면 시간당 5,600원을 받는 것이니 최저 임금보다 못한 노동의 대가를 받는 것이다.

 

저자는 독재자의 반대편에 섰다고 민주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민중의 편에 서야 민주주의자가 되는 것이고 노동자 의식을 가지고 노동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들 때 민주공화국이 되는 것이다.(70 페이지) 저자는 뒤로는 이권을 챙기면서 박근혜, 최순실의 나라에서 잘 살았던 사람들이, 노동자들이 감옥에 갇혀 가며, 한 농민은 쓰러져 죽으면서까지 정권을 때려눕혀 놓으니까 죽은 개 위에 올라 타 민주주의자인 척하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3강에서 저자는 1987년 민주 대항쟁과 2016년 촛불 집회를 대비하며 투쟁 현장에서 학생들(사회화된 집단으로서의 대학생)이 사라진 원인을 분석한다.(1987년에는 매일 데모를 했다. 2016년에는 평일에는 일하고 주말에만 시위했다. 학생들도 학교에 가지 않으면 학사 경고 받지만 단체로 가지 않으면 자를 수 없다.)

 

저자에 의하면 과거에는 등록금을 교육에 대한 대가로 생각했지만 오늘날은 등록금을 상품 구매 형식으로 생각하는 변화를 이야기한다.(등록금으로 학점을 사고 학위를 사는 것이다.)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도 어떻게 보면 학생들을 으쓱하게 만드는 브랜드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93 페이지)

 

교육이 상품 구매 행위로 이루어짐으로써 학생이 소비자가 되면 고육의 주체이자 정치적 주체로서의 학생 존재가 사라진다.(94 페이지) 학교는 학생을 돈으로 보고 학생은 자신이 낸 돈 만큼 가져가겠다고 하는 관계에서는 참된 교육도 우정의 관계도 성립할 수 없다.(95 페이지) 권리를 이익으로 환원하고 개인화하는 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적 극단적 개인주의를 통해 공동체를 파괴하는 길이다.(105, 106 페이지)

 

저자는 취업의 대안을 창업으로 설정한 현실을 비판하며 1인 기업체의 사장이란 것이 실은 자기 회사의 노동자인데 기업가와 노동자라는 이중적 존재를 하나의 몸 안에 체현한 이들에게 노동자라는 것은 쏙 빼고 사장님만 강조하는 비정상을 지적한다.(114 페이지) 대학에는 다시 대학생이 필요하다. 이 사회도 다시 대학생을 필요로 한다.

 

대학생들이 먼저 대학 안에서 싸워야 한다. 학생 사회가 해체되면 대학에서 사회의 공공성을 위해 싸울 수 있는 단위가 해체되는 것이고 전체 사회로 볼 때도 결정적으로 불리하다.(120 페이지) 4강 교수 없는 대학에서 저자는 지식인을 단지 자기 전공 분야에 대해서만 지식을 가진 기술직 전문가가 아니라 총체적이고 통찰적인 앎, 전일적인 앎을 갖춘 사람으로 정의한다.(125 페이지)

 

저자는 교수와 학생이 편의점 점원과 손님처럼 만나고 헤어지는 관계가 된 지 꽤 오래인 것 같다고 지적한다.(132 페이지) 저자는 대학 교수가 하는 일 가운데 어느 것이 우선 순위인지 묻는다. 연구 강의 사회실천이 아니라 강의 연구 사회실천의 순서이다. 저자에 의하면 교수는 존재론적으로 정의상 강의하는 사람이다. 학문과 지식의 시작은 교육이고 그 교육의 시작은 말이다.

 

배움이 서로 배움인 것은 서로 마주 보고 선 사람이니 가능한 것이다.(135 페이지) 강의는 항상 연구를 수반한다.(137 페이지) 그런데 오래 통합되어 있던 연구와 강의 사이에 언제부터인가 분절이 생기기 시작했다.(138 페이지) 연구중심대학은 소련으로부터 스푸트니크 쇼크를 당한 미국이 군산학 복합체 연구 단위를 중심으로 우주 개발, 군비 확장 등을 위해 국가가 나섬으로써 비롯된 제도이다.

 

이 시스템은 엄청난 대학 관료 시스템을 낳았다. 대학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죽은 것은 학진(학술진흥재단) 체제와 더불어서이다. 학진은 1981년 교수들의 연구비 지원을 위해 교육부 산하기관으로 출범했다. 문제는 학진이 거대 권력이 되었다는 점이다. 권력과 지식 엘리트들은 공생관계가 되었다. 대학에서 가장 많이 지원되는 분야는 곧 가장 많은 자본이 투자되는 시장 영역이다.(155 페이지)

 

]저자는 대학을 공공재로 생각한다면 오히려 국가 예산을 시장성이 없지만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분야에 지원해야 한다고 말한다.(155 페이지) 지금 대학은 더 큰 프로젝트를 따오는 교수들이 금권을 얻고 발언권을 얻는 구조가 되어 돈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상황을 맞고 있다. 돈에 길들여진 것이다. 상상력이 빈곤해진 것이다. 돈의 노예가 되면 연구의 자율성은 포기될 수 밖에 없다.

 

산학협력과정에서 교수들은 외부적으로는 업자이고 내부적으로는 관료화된다.(158 페이지) 저자는 교육과 학문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시급하다고 말한다. 연구 결과물을 만인이 볼 수 있도록 공개해야 한다고 말한다.(160 페이지) 저자는 우리가 알아볼 수 있게 교육과 학문 연구 결과물을 민중의 언어, 시민의 언어, 일반의 안어로 번역하는 과정까지를 국가 서비스로 제공해야 한다고 말한다.(160, 161 페이지)

 

피해는 만인이 보고 이익은 특정한 사람들이 챙기면서 불상사가 나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테크노크라시를 해체해야 한다. 연구 결과물에 대해 강력하게 책임지는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161 페이지) 저자는 입학 성적이 대학 교육의 결과가 아닌데 그 성적이 대학 서열화의 기초가 되는 것을 모순으로 선언한다.(171 페이지)

 

저자는 공공성의 원리가 깨지면 대학 교육은 공동체를 위한 교육이 아니라 개인들이 자신에 대해 투자하는 행위가 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174 페이지) 대학 교수의 임금이 교사보다 높은 이유를 그들이 그만큼 오랜 교육 기간 동안 금전적, 시간적으로 투자했기 때문이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교육을 공동체 교육이 아닌 개인의 자본 취득 과정으로 이해할 때만 가능하다.(174 페이지)

 

저자를 통해 우리는 백화점의 인문 교양 센터와 차별성이 없는 대학 교양 교육 과정이란 인문학 앵벌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식의 인문학 붐은 좋지 않다. 인문학의 대중화는 인문학의 상품화와 다르지 않다.(184 페이지) 오늘날의 인문학은 달콤한 사탕발림으로 중산층의 지적, 문화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속물주의적 교양으로 전락한 면이 있다.(185 페이지)

 

저자의 글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인문학의 생명은 저항성과 비판정신임을 확인한다.(187 페이지) 저자는 대학을 정치의 장소로 본다.(202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성직자와 관료, 귀족들을 양성하는 제도권 대학들이 대부분 산속 수도원에 있었던 반면 그 성스러운 캠퍼스를 박치고 나와서 철학과 법학 같은 세속의 학문을 커리큘럼으로 삼고 자유학예를 중심으로 가르치는 대학들은 도시의 거리와 장터 광장 옆에 자리 잡았다.

 

대학이란 공간은 사회의 아고라, 포럼 역할을 해야 한다.(204 페이지) 모두의 일인 공공 사안을 민주적으로 처리하는 민주 공화국인 대학에는 반드시 정치(대학 구성원들 전체가 의견을 모으고 이 대학이 나아갈 좌표를 함께 결정하고 결정한 것을 함께 나누는 것)가 있어야 한다.(205 페이지)

 

우려할 것은 통치가 정치를 대신하는 현상이다. 정치의 시작은 해결할 수 있는 권위자에게 답을 구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머리를 맞대고 동그랗게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213 페이지) 시민은 도시민(都市民)도 아니고 신민(臣民)도 아니다, 시민은 정치적 존재이다. 국민은 정치적 존재가 아니지만 시민은 정치적 존재이다. 그래서 시민에게는 거부권이 있다.(223 페이지)

 

시민이 된다는 것은 정치적 주체가 된다는 것이고 그것은 누구의 편이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226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중립은 절대 민주주의가 아니다. 아테네에서 민주정이 처음 탄생했을 때 솔론이라는 사람이 민주의 요구를 받아서 정리한 개혁안이 있는데 그 내용에는 내란이 있었을 때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지킨 사람은 시민권을 박탈한다는 규정이 있다.

 

이 이야기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솔론편에 나온다.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지켜보다가 이기는 놈의 편을 들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227 페이지) 저자는 편()과 선(), 두 가지만 기억하라고 말한다. 정치적 주체가 되는 것은 누구의 편이 되는 것이고 선을 넘지 않으면 끝내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235 페이지)

 

주인 없는 대학은 정치 없는 대학이라는 말이기도 하다.(238 페이지) 저자는 마지막 강인 대학의 탈환에서 너의 집권은 나의 실권, 나의 집권은 너의 실권으로 보지 말 것을 제안한다. 저자는 더 많은 사람들의 것이 되도록 권력의 지형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전제하며 어떻게 힘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그리고 그 힘을 어떻게 나누어 가질 것인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 힘을 제대로 쓸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탈환 전략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277 페이지)

 

공학적으로 생각하면 힘은 어디서 어디로 이동할 뿐 커지거나 줄어듣는 것이 아니다. 정치의 세계에서는 힘은 이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생기기도 한다. 저자는 2016, 2017년의 촛불이 정치 세력화하지 않았다고, 촛불은 정치의식이라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광장의 촛불이 자기 동네, 자기 회사, 자기 공장, 자기 학교로 돌아왔을 때 그 100만의 힘으로 작은 박근혜들을 제압할 수 없었다는 이유에서이다.(283 페이지)

 

중요한 것은 개인으로서는 절대로 정치적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287 페이지)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거론하며 40년 전 이야기로부터 우리의 시대는 얼마나 멀리 와 있는 것인가, 묻는다.(295 페이지)

 

저자는 사적 이익을 위한 투쟁처럼 보일까봐 빼앗긴 것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처음에는 교과 개편 재검토와 강사 처우 개선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자신의 강의는 포기할 수도 있다는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자기 이야기는 하지 않고 신자유주의, 대학 교육과 제도 문제, 시간 강사 제도의 부당함 등 객관적인 부분에 집중할수록 공허해졌다고 말한다.

 

저자는 생존권 투쟁이라는 것을 정치, 사회적 구조를 바꾸려는 근본적 투쟁으로 보지 않고 오직 먹고 살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경제적 투쟁으로만 보는 관점이 정당한지 묻는다.(300 페이지) 저자는 밥그릇 싸움은 저차원적이고 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하는 투쟁은 고차원적이냐고 묻는다.

 

저자는 밥그릇 싸움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민주주의 투쟁이라 정의한다. 밥 한 그릇에 담긴 것은 배불릴 양식만이 아니라 삶을 지킬 주권과 존엄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전히 자신은 이 대학의 철거민, 난민, 몫이 없는 자로 서 있지만 또한 싸우는 사람으로 서 있다고 말한다.(306 페이지)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20176월 출간된 책이다. 내가 이 책을 구입해 읽은 것은 출간일로부터 7개월이 지난 최근에서이다. 그 이후 저자의 투쟁에 결실은 없었던 것 같다. 그의 페이스북에는 여전히 피켓을 들고 선 저자의 사진이 실려 있다. 지금도 그는 국회 앞에서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나는 그의 페이스북에 이런 댓글을 달았다. <선생님,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잘 읽었습니다. 정말 많이 (선생님의 주장에) 공감하며, (대학 당국의 무책임하고 뻔뻔한 대응에) 분개하며 읽었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우리의 실상, 대학의 구조적 모순, 정치와 민주주의 등 근본적인 개념에 이르기까지... 특별히 힘이 되어 드리지 못하고 상투적이지만 힘 내시라는 말만 하게 됩니다.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진경의 불온한 인문학을 읽은 이래 인문학의 본령을 비판정신과 저항이라 표현한 책을 만난 것이 소득이다. 요즘 인문학이란 말을 불편해 하는 나에게는 시의적절한 이론적 뒷받침이 되어 감사하다. 달콤한 사탕발림으로 중산층의 지적, 문화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속물주의적 교양으로 전락한 인문학과 차별성을 두기 위해 깊이 읽고 많이 생각하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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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1년 나온 김정란 교수의 영혼의 역사와 전직 대학 강사 채효정 님의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2017년 627일 출간)를 함께 읽고 있다. 전자는 시 비평집이고 후자는 오늘날 위기에 처한 대학의 실상을 파헤친 사회과학서이다.

 

후자는 문제를 파헤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설득력 있고 래디컬한 대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두 책은 다루는 대상도 다르고 스타일도 많이 다르다. 그런데 각기 본령은 아니지만 꽤 시사적인 공통의 주제라 할 만한 것이 눈에 띈다.

 

바로 언어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오래 전 나는 언어에 대한 보르헤스의 다음과 같은 말에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글은 남고 말은 흐른다는 격언은 말이 하루살이처럼 덧없이 사라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에 비해 글이 항구적이며 죽어 있다는 의미인 것.

 

반면 말은 빠르고 가벼운 것. 플라톤의 말처럼 '빠르고 신성한 것'이다. 흥미로운 일이지만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은 모두 말로 가르친 스승들이었다.”.. 보르헤스의 이 말은 글과 말의 차이를 논한 말이다.

 

그런데 전기한 두 책에서 나는 보르헤스의 말보다 더 현실적이며 유용한 구절을 만났다. “에피메테우스는 안전하고 깔끔하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늘 틀릴 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다. 그는 늘 어느 정도 무지하다. 그러나 그 무지가 사실은 문학이라는 기계를 작동시킨다..”(’영혼의 역사‘ 10 페이지)

 

프로메테우스는 어원을 통해 보면 먼저 말(생각)하는 사람이다. 에피메테우스는 나중에 말(생각)하는 사람이다. 둘은 신화에 나오는 형제이다. 김정란 교수는 이런 말을 한다. “(좋은 비평가)는 말하고 있는 자신보다 침묵하고 있는 텍스트가 언제나 존재론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프로메테우스 뒤를 쫓아가는 에피메테우스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비어 있는 중심‘ 7 페이지) 김정란 교수가 말하는 프로메테우스 즉 먼저 말(생각)하는 사람은 시인, 소설가 등이고 에피메테우스 즉 나중에 말(생각)하는 사람은 시나 소설을 읽고 분석하는 비평가를 말한다.

 

채효정 님의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프로페서(교수)는 앞에서 말하는 사람이라는. 이 책에서 저자는 교수가 수행하는 일의 중요도를 묻는다. 연구 강의 사회 실천의 순이 아니라 강의 연구 사회 실천이라는 것이 저자의 논지이다.

 

저자의 논지인 즉 연구자보다 교육자가 먼저라는 것이다. 보르헤스가 플라톤을 말하며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예수, 석가, 공자..)을 이야기 한 것처럼 채효정 님은 공자, 맹자. 소크라테스, 플라톤을 이야기한다.

 

강의와 연구를 결국 같은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둘은 상당히 다르다. 강의록을 책으로 펴내는 것과 연구 결과를 책으로 펴내는 것의 차이를 알면 둘의 차이를 알 수 있다.

 

강의는 항상 소통적일 수 밖에 없지만 연구는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서 하는 것이기에 독백적이다.(135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홉스, 로크 등은 귀족의 가정 교사였던 바 말이 글이 되고 그것이 책이 된 것이다.

 

독일은 다르지만 대학 교수였던 칸트가 쓴 순수이성비판은 혼자 연구해서 쓴 책이 아니고 대학에서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푸코의 책들도 대부분 강의록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하이데거도 마찬가지였다.(136 페이지)

 

아주 특수한(예외적인) 경우로 망명자 신세인 탓에 대학 도서관에 처박혀 외롭게 책을 쓸 수 밖에 없었던 마르크스와 레닌이 있다.(135 페이지) 보르헤스가 말은 빠르고 가벼운 것. 플라톤의 말처럼 '빠르고 신성한 것'이라 말한 것처럼 채효정 님은 말이 항상 먼저 있는것이라 말한다.

 

김정란 교수의 비어 있는 중심도 좋지만 채효정 님의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는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내가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사회과학도 이렇게 정교하고 치열한 만큼 재미 있고 현실적인 만큼 이상적일 줄 몰랐다.

 

효용이 다른 사상을 비교하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겠지만 나는 논어(論語)가 논언(論言)이 아닌 이유가 어()는 상대를 전제로 한 말이고 언()은 혼자 하는 말이기에 그렇다는 말을 기억한다. 이 해명은 채효정 님의 책에 비하면 많이 싱겁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어()는 강의나 교육, ()은 연구나 독서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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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 궁궐문화원 전문 해설사 36기 동기들은 국립 민속박물관에서 월례 모임을 갖는다.

지난 2016년 10월부터 2017년 1월까지 함께 공부한 뒤 지금은 각자 영역에서 다들 열심히 해설하고 공부하고 살고 있다.

우리는 수업과 필기시험, 시연 등을 모두 마치고 수료식을 가진 직후인 2017년 2월부터 한 달에 한번씩 모였다.

그간 한성백제박물관, 남양주 실학박물관, 동구릉, 창덕궁 후원, 백범기념관 등에서 만나 해설 듣고 때로 해설도 하고 식사하고 서로 안부를 묻고 즐거운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 해 마지막 모임일인 12월 20일에는 잠실의 이** 님 집에서 송년회를 가졌다. 지난 해 모든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한 네 회원에 상장과 부상(문화상품권)을 포상하는 자축 행사도 가졌다.

서울과 인근 경기도에 박물관, 능, 궁궐 등이 많다. 수원 화성도 이야기되었고 전주 경기전도 이야기되었었다.

이제 새롭고 의미 있는 모임장소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 10시 50분 집결을 위해 아침(8시 30분) 집을 나선다는 이야기를 톡에 올렸다.

그러자 한 동기가 가장 멀리서 혹한에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일찍 집을 나선 나를 생각해서라도 참석하겠다고 해 기분을 좋게 해주었다.

오늘은 전체 13명 중 여섯 명만이 참석하는 소모임이 될 것이다. 바빠서(특히 해설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면 아쉽지만 축하할 일이고 일정상 여유가 있어 참석하면 반가운 일이다.

학문으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서로의 인덕을 돕는다는 이문회우 이우보인(以文會友 以友輔仁)의 의미가 딱 들어맞는 모임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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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幽明)을 달리했다는 바른 표현 대신 운명(運命)을 달리했다는 바르지 않은 표현을 한 신문 기사 밑에 삼가 고인의 명복(冥福)을 빈다는 댓글이 이어진 것을 보았다.

34세라는 너무 젊은 나이에 운명(殞命)한 한 연예인을 보며 나는 어떤 댓글도 달지 않았다.

명복이란 말이 낯설고 애매하게 느껴져 애도(哀悼)한다는 표현을 하는데 문득 그 표현이 상투적으로 느껴져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다.

이승의 밝은 세상[明]을 떠나 저승의 어두운 세상[幽]으로 떠나는 것 즉 유명을 달리하는 것은 현실을 접고 가능성으로 존재했던 죽음을 구현(具顯; 어떤 내용을 구체적 사실로 나타나게 하는 것)하는 것이다.

존재의 일부였던 죽음이 전체가 된 것이다.

구현이란 말은 선승(禪僧)과 같은 삶을 살다가 간 프랑스의 시인, 사상가 조에 부스케(1897 - 1950)를 생각하게 한다.

조숙한 문학청년이었던 부스케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척추 부상을 입고 죽을 때까지 삼십년을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그는 ˝나는 내 속에서 커가는 거대한 존재의 상처다. 또 내가 그의 실추를 구현하게 될 조금 더 큰 인간의 의식˝(‘달몰이‘ 19 페이지)이란 말을 했다.

이 말은 ˝내 상처는 나 이전에 존재했고 나는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태어났다˝(이정우 지음 ‘삶 죽음 운명‘ 111 페이지)는 출처 불명의 그의 다른 말을 이해하는 데 유용히다.

˝그대는 무엇을 구현하기 위해 사는가?˝ 부스케가 아니 내 안의 진정한 내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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