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효정 님의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는 서울의 모 대학에서 강사(講士; 정치철학)로 노동하다 해직된 후 복직 투쟁을 벌이고 있는 저자의 이론적, 현실적 입장을 제시한 책이다.

현재 저자는 국회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다.
돋보이는 점은 부당 해직 당한 저자 자신의 처지를 밝히는 과정이 기업화하고 신자유주의화한 우리 대학의 전반적 현실을 여실히 드러내는 장(場)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의 해직은 ‘돈이 안 되는‘ 인문학 축소 또는 폐지와 맞물리는 현상이다. 물론 대학은 저자가 말했듯 정치, 교육, 노동, 학생, 교수 등이 없는 곳이다.

저자는 대학의 출발지인 유럽에서 성직자와 관료 및 귀족들을 양성하는 제도권 대학들은 대부분 산속 수도원에 있었던 반면 그 성스러운 캠퍼스를 박차고 나와서 철학과 법학 같은 세속의 학문을 커리큘럼으로 삼고 자유학예를 중심으로 가르치는 대학들은 도시의 거리와 장터 광장 옆에 자리 잡았다고 말한다.

대학은 아고라 또는 포럼(정치적 광장) 역할을 해아 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인문학을 비판과 저항의 학문으로 정의한다. 이 정의는 인문학이 중산층의 지적(知的), 문화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속물주의적 교양으로 전락한 면이 있다고 본 그의 다른 정의와 짝을 이룬다.

이 정의는 지난 2011년 나온 이진경, 최진석 등 여러 필자들의 ‘불온한 인문학’이란 책의 논지와 맥을 같이 한다.

그들에 의하면 우리의 인문학은 두루두루 듣기 좋고 무난하게 소비되고 있다. 가벼운 유행 차원에서 소비되고 고급스러움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불온한 인문학’의 필자들은 익숙하고 안온한 삶에 낯설고 날선 감각, 우리 자신을 베고 다치게 함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삶의 형태와 강제로 맞부딪히게 만드는 과정에 불온한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는 말을 했다.

여러 논의를 다 제쳐두고 나는 인문학이란 이름이 아무 데나 사용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나는 “비판과 저항”(채효정)도 힘들고 “이전과는 다른 삶의 형태와 강제로 맞부딪하는 것”(‘불온한 인문학’ 필자들)도 어렵고 그저 솔직히 지적 허영을 위해 (통합적인 의미의) 인문학이란 말 대신 구체적으로 개별 학문들 가령 사안에 따라 정신분석학을, 역사학을, 문화예술을, 주역을, 시를, 자연과학을 배우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할 수 있다.

민중신학을, 마르크시즘을 배우던 때가 그립고 그 시절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뭉텅뭉텅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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