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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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비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는 한 남자로부터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떠났다.  그후 그 남자가 그녀를 따라왔던가?  그가 복수를 꾀했던가?  아니다.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p.144)

 

우리가 밀란 쿤데라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른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근엄한 표정을 유지한 채, 어린 시절의 유희를 한동안 즐길 수 있도록 한다는 데 있다.  아무런 다른 도구도 없이, 또는 같이 놀아줄 친구도 한 명 없이 이런 일이 어찌 가능할까, 싶지만은 밀란 쿤데라는 독자의 이런 의심을 미리 알아채기라도 했었다는 듯 그의 책을 집어드는 순간 그런 의심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게 만든다.  예컨대 그의 책은 어린 아이들이 지칠 줄 모르고 빠져들던 장난감 블록이나 이제 막 이성에 눈 뜬 사춘기 소년의 눈에 비친 아릿한 소녀의 잔상과 같은 구실을 하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작품이 갖는 이런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가 기록한 문장들은 비존재에 대한 세심한 관찰(우리가 사유 혹은 사색이라 일컫는)을 통하여 얻어진 최종 결과물처럼 보여지는데, 이러한 비존재(예컨대 영혼, 사랑, 동정심, 우정, 우연 등)에 대한 작가의 탐구는 우리가 소설이 소설로서 유지되기 위해 필수불가결하다고 믿어왔던 몇몇 요소들(이를테면 주인공의 성격이나 외양, 주인공 상호간의 관계맺기에 있어서의 인과관계 등)을 그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교묘히 숨겨놓음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마치 그것들이 하찮은 것, 또는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도록 한다.  이를 통하여 작가는 비존재에 대한 독자의 생각을 환기시키고, 독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작가의 의도에 동참하게 된다.

 

"토마스는 <한 번은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문장에서 태어났다.  테레사는 뱃속이 편치 않을 때 나는 꾸르륵 소리에서 태어났다."    (p.9)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보여졌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집시들이 커피잔 바닥에서 커피 가루가 그린 형상을 통해 의미를 읽듯이, 우리는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p.59)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베토벤의 음악, 역에서의 죽음)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시킨다."    (p.63)

 

"극단적인 것은 그것을 넘어서면 생명이 끝나는 경게선의 표시이며, 정치와 마찬가지로 에술에 있어서 극단주의에 대한 열정은 죽음에 대한 위장된 욕망이다."    (p.111)

 

"애교란 무엇인가?  그것은 딱히 그 가능성의 실현을 보장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성적 접촉이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p.165)

 

이러한 문장들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 씌었더라면 그의 작품은 감히 소설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생뚱맞은 그 무엇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어쩌면 하루키의 성향과 대척점의 위치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철학적이기는 하지만 세상을 비꼬는 듯한 미셸 푸코나 미셸 트루니에의 작품과도 사뭇 다르다.  밀란 쿤데라는 비존재에 대하여 심각할 정도로 진지하다.

 

"이미 말했듯 소설의 인물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처럼 어머니의 육체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의 상황, 문장, 그리고 작가가 생각하기에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거나, 본질적인 것은 언급되지 않았던, 근본적 인간 가능성의 씨앗을 품고 있는 메타포에서 태어난다. (---중략) 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내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들 모두를 사랑하며 동시에 그 모두가 한결같이 나를 두렵게 한다.  (---중략)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 속에서 인간적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    (p.254~p.255)

 

이런 까닭에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소설 이외의 또 다른 기능, 이를테면 끝없는 상상과 추론을 요구하는 놀이로서의 기능, 장난감으로부터 한참이나 멀어진 어른들에게 사색의 도구로써 기능하는 셈이다.  하여,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스토리의 전개에 집중할 필요 없이 하시라도 소설의 어떤 쪽을 펴고 사색의 유희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때로는 한 문장만으로도 하루 온종일 깊은 생각에 잠길 수 있게 한다. 

 

"여자는 분노에 찬 영혼을 부르는 목소리에 저항하지 않는다.  남자는 자기 목소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영혼의 여자에게 저항하지 않는다."    (p.185)

 

"<자아>의 유일성은 다름아닌 인간 존재가 상상하지 못하는 부분에 숨겨져 있다.  인간은 모든 존재에 있어서 동일한 것, 자신에게 공통적인 것만 상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개별적 <자아>란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이고 따라서 미리 짐작도 계산도 할 수 없는 것이며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베일을 벗기고 발견하고 타인으로부터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p.228~p.229)

 

"뇌 속에는 시적 기억이라 일컬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지대가 존재하여 우리를 매료시키고, 감동시키고, 우리의 삶에 아름다움을 주는 것을 기록하는 모양이다.  토마스가 테레사를 알고 난 뒤부터 어떤 여자도 그의 뇌 속에 있는 이 지대에 아주 사소한 흔적조차도 남길 권리가 없었다."    (p.239)     

 

우리가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어떤 현상이나 실체를 아주 세밀하게 묘사함으로써 전혀 딴 생각을 할 수 없도록 하는 소설이 있는가 하면, 문장이 추구하는 바가 우리의 외부 현실과는 동떨어진, 실재하지 않는 비존재를 끝없이 서술함으로써 독자의 상상력과 추론을 요구하는 소설이 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어쩌면 독자의 상상력과 추론이 덧붙여짐으로써 한 권의 완전한 소설로 재탄생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밀란 쿤데라는 소설이 갖추어야 할 기본 골격만 제시할 뿐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오로지 독자의 몫으로 남겨진 셈이다.

 

"안개 속을 헤치고 두 사람을 싣고 갔던 비행기 속에서처럼 그녀는 지금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이란 우리는 마지막 역에 있다라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는 함께 있다라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p.358)

 

설을 하루 앞둔 오늘 침묵처럼 겨울비가 내렸다.  나는 정말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시도 때도 없이 읽었고, 하도 여러 번 펼쳐 봐서 책의 모서리가 다 닳아버렸지만 리뷰를 쓰는 일만큼은 여전히 미루고 싶다.  내가 처음으로 이 책을 읽었을 때의 순수가 세월의 갈피에 닳고 또 닳아 퇴색되다가 끝내 이 리뷰와 함께 사라질 것만 같아서 두렵다.  침묵처럼, 슬픔처럼 겨울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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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목적어 - 세상 사람들이 뽑은 가장 소중한 단어 50
정철 지음 / 리더스북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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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이맘때쯤에 비하면 밤이 딱 내 손바닥 길이만큼 짧아졌구나,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밤은 시나브로 제 길이를 조금씩 조금씩 줄여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머릿속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침 산행길에서였습니다.  짙은 어둠이 깔린 산을 오를 때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침 여섯 시는 이른 시각이었고, 어둠 속의 숲은 제 모습을 감춘 채 그저 고요 속에 잠들어 있었으니까요.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불현듯 어둠이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내게 갑작스러운 밝음이었습니다.  마치 다 익은 감이 뚝하고 떨어지듯 내 앞에 펼쳐진 하루의 아침은 생경한 풍경이었습니다.  생에 처음으로 맞는 아침처럼 말입니다.  나는 그 느닷없음에 잠시 망연하였습니다.

 

아침의 느낌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습니다.  그런 느낌을 품은 채 정철의 <인생의 목적어>를 읽었습니다.  밝음 속에서 또렷하던 숲의 나무와 꽁지를 까딱거리며 밝게 우짖던 까치의 모습처럼 낱글자 하나하나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카피라이터인 작가에게 글자는 그토록 느닷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작가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신선한 느낌은 나만의 것이었을까요?  아무튼 저는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식이다.  엄마나 아빠가 아닌 사람은 있지만 자식이 아닌 사람은 없다.  우리는 안다.  자식들은 안다.  거의 모든 부모의 인생의 목적어가 바로 자식이라는 것을."    (p.244)

 

카피라이터는 분명 한 글자 한 글자의 낱말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들이 쓰는 카피는 유려한 문장보다는 톡톡 튀는 발상과 일상의 권역에서 벗어난 낱말들의 생경한 배열을 추구하는, 하여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쉬 잊혀지지 않게 하려는, 소망을 담은 그들의 기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갈고 닦았으면 낱글자 하나하나에서 저토록 반짝이는 윤기가 날까요?

 

"달래 준다 해서 달이다.  어두운 곳에 사는 외로운 사람들을 따뜻한 빛으로 달래 준다 해서 달이다.  달동네란 달이 유난히 가까이 내려오는 동네, 달빛을 누구보다 환하게 받는 동네라는 뜻일 것이다.  지구 밖에 사는 달도 이렇게 어두운 곳을 향하는데 지구 위에 사는 당신의 시선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시선을 조금만 돌려 아프고 슬프고 외로운 사람들을 바라볼 생각은 없는가."    (p.322)

 

설문을 통하여 찾았다는 인생의 목적어.  설문에 대답했던 수천 명의 사람들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50개의 인생의 목적어가 이 한 권의 책 안에 담겨있었습니다.  누구든 이 단어들을 주제로 한 권의 책을 엮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 정철만큼 새롭게 바라볼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저 비슷비슷한 의미의 나열은 달력에 적힌 하루하루의 의미 없는 숫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내가 느꼈던 오늘의 아침은 그 달력에서 폴짝 뛰어 나온 살아있는 아침이었습니다.  모름지기 글이란, 좋은 책이란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믿는다,가 잘 안 되면 믿어 준다,로 시작해 보세요.

믿어 준다,가 얼마 후엔 믿는다,로 바뀝니다."     (p.143)

 

언젠가 박경리 작가는 말하셨습니다.  "왜 쓰는가?" 하는 질문은 "왜 사는가?" 하는 질문과 같은 것이라고 말이죠.  한 작가의 글에서 독자가 느낄 수 있는 따뜻함의 정도와 색의 질감은 천차만별일 듯합니다.  단순히 글이 딱딱하거나 화려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글 속에 담겨진 작가의 마음이 문제겠지요.  '글'이란 결국 '그를 향한 마음'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정철 작가의 독자를 향한 마음은 봄이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들었던 까치의 울음 소리가 여직 생생합니다.  좋은 소식이 오시려나 봅니다.  소한, 대한도 다 지나고 이제는 봄이 멀지 않았습니다.  작년 겨울에 비하면 올 겨울은 너무도 허술했던 겨울이었을까요?  아니면 아직 도착하지 않은 동장군을 제가 미처 보지 못한 탓일까요?  봄처럼 포근했던 오늘, 나는 정철 작가의 책을 읽으며 내가 느꼈던 따뜻한 온기를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습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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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4-01-25 13:26   좋아요 0 | URL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꼼쥐 2014-01-30 17:2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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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위하여 - 여자가 알아야 할 남자 이야기
김형경 지음 / 창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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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학에는 극단값이론(extreme value theory)이라는 게 있다. 통계학에서 가장 유명한 이론이 정규분포이론이라면, 극단값이론은 반대로 특이한 이상현상(보통 분포상 outlier라고 불리는)의 발생패턴을 연구한다. 몇 년 전에 출간되었던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블랙 스완>은 이 이론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극단값이란 결국 과거의 경험으로는 그 존재 가능성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일반적인 기대 영역 바깥에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존재할 가능성을 과거의 경험으로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실재하는 관측값이라고 할지라도 특이값이 존재하는 경우 모집단의 성향을 왜곡시킬 수 있으므로 보정평균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우리나라 전체 국민의 가구별 평균 소득을 추정하기 위한 표본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가장 가난한 누군가를 포함시켰다면 그 평균값은 우리나라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예는 실생활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정부에서 발표하는 물가지수와 내가 느끼는 체감지수도 그런 것 중에 하나이다.  결국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표본을 설정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를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심리학이나 인문학에서 통계학을 이용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이 책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남자의 심리에 대하여 작가는 '극단의 왕국((Extrimistan)'에서나 존재할 법한 어떤 남성을 관찰함으로써 세계의 모든 남성이 그런 것인 양 추정하고 있지나 않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책의 전체 내용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나 프로이트와 자끄 라캉의 이론을 설명할 때에는 작가의 경험이나 작가 자신이 읽었던 책을 인용함으로써 독자의 흥미를 끌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저자의 생각이나 추측 혹은 인용에서 비롯된 '세계 모든 남성이 다 이렇다'는 일반화의 오류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 없었다.  저자도 물론 독자의(특히 남성 독자의) 이와 같은 불편한 심기를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그럼에도, 남자들의 심리에 대한 책을 쓰는 일은 주저되었다.  몇 가지 편견 때문이었다.  남자들은 심리의 시옷 자도 듣기 싫어한다는 게 첫번째 편견이었다.  심리 이야기를 쓰게 되면 남자들의 이상화된 자기 이미지 밑에 숨겨둔 아프고, 슬프고, 찌질한 이야기들을 들추게 될 텐데, 그 점에 불편을 느낀 남자들이 책을 집어던질 것이라는 게 두번째 편견이었다.  세번째 편견은 남자들이 결국 분노하여, 내가 이 남성 중심 사회에서 추방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p.4~p.5) 

 

나도 한때 여자들의 심리를 몹시 궁금해 했던 시기가 있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면서도 교양과목으로 국문학과 과목이었던 문예비평론을 들었을 때였다.  취업과 안정된 미래를 꿈꾸며 웬만해서는 한눈을 팔지 않는 경제학과 학생들과는 달리 무척이나 한가롭고 자유로워 보였던, (때에 따라서는)방탕해 보이기까지 한 국문과 학생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는 그때 아주 잠깐 소설을 쓰는 작가를 꿈꾸기도 했었다.  그러나 공부 외에는 이렇다 할 경험이 전무했던 나였기에 '여자들은 이럴 때 어떻게 행동할까?'하는 물음 앞에서는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여자들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이다.  그 후로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은 접었지만 여자들의 심리가 궁금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남자들의 심리가 대학시절의 나처럼 단순한 궁금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오히려 나는 편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의 시각은 다소 편협되고 공격적인, 이를 테면 페미니스트의 시각에서 기술되었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내 생각과는 크게 벗어난 대목에서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심리학이나 정신분석에 있어 지적 소양을 갖추지도 못한 내가 저자의 주장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저자의 경험이나 일부 도서를 바탕으로 전 세계 남성으로까지 일반화시킨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이 책을 쓴 저자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태초로부터 이질적인 성격의 두 집단인 남성과 여성이 같은 사회에서 상호 신뢰 및 배려를 기반으로 협력하여 살라는 의무를 부여받았으니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  저자는 분명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앎'으로써 더 많이 이해하고 협력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이 글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서로에 대하여 아무리 많은 지식을 습득한다 할지라도 이성의 한계는 감정의 굴레에 쉽게 굴복되고 만다는 점이다.  결국 인간은(남자든 여자든) 겪으면서 체득하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는 얘기다.  죽을 때까지 지겹게 싸우고 지지고 볶아도 서로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적을 것이라고 믿는다.  다만 서로에 대하여 증오하지 않도록 기도하는 수밖에...

 

"남녀가 사이좋게 지내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인류의 처음부터 남녀는 필요한 부분을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불편한 것들을 투사해왔으므로, 그래도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닌 듯 보인다.  개인들이 사적인 관계에서 잘 지내는 길에는 명백히 검증된 방법이 있다.  그 방식을 더 큰 단위로 확장시켜 적용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또 순진한 환상을 꽃피워본다."    (p.326~p.327)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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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이런 생각이 든다.

딱히 어떤 이유에서라기보다 우연성에 기인한 한 사건(우연의 발현이자 삶의 한 조각)은 마치 수많은 우연을 싣고 이제 막 플랫폼에 진입하는 열차의 감속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은 대개 우연이 우연으로 존재하는 한 자신의 삶과 그것들을 굳이 결부시키려들지 않지만(혹은 우연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 우연이 모여 어떤 질량으로 환원될 때 사람들은 비로소 그 존재를 재삼재사 깨닫곤 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개입되는 것은 스트레스이다.  스트레스는 마치 어떤 사건(우연의 결합체)을 구성하기 위한 촉매제처럼 보이는데 그 느낌은 대략 이렇다.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스트레스는 우리가 마치 깊은 수조에 거꾸로 매달린 채 수조의 물이 서서히 차오를 때 느껴지는 육체의 감각과 유사하다.  먼저 머리가 잠기고, 어깨, 가슴, 몸통, 무릎, 발, 급기야 발바닥까지 완전히 잠기면 우리는 깊은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때로는 우연을 사건으로 결합하던 스트레스가 그 우연 속에 스며든 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발현된 사건이 종결되고 또 다른 우연이 새로운 사건을 준비할 때면 숨겨졌던 스트레스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듯 여지없이 우리의 몸을 깊은 무력감 속으로 끌고간다.  밀란 쿤데라는 무력증 뒤에 오는 죽음에의 유혹을 현기증이라 했다.  동일한 높이에서의 행진에서 벗어나 가장 높은 곳으로 상승하려는 욕구와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지려는 욕구 중 어느 것이 더 강한 것일까?  스트레스는 상승의 욕구보다는 추락의 욕구를 증가시킨다.

 

간혹 심한 스트레스는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동시에 지배하기도 한다.  깊은 무기력증으로 인도하는 이러한 스트레스는 우리 몸의 세포 곳곳에 스며들어 육체적으로 옴짝달싹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세포를 파괴함으로써 스트레스의 결박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게 한다.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고 했던 밀란 쿤데라의 말은 그 결말이 어떠하냐의 기준에서 했던 말은 아닌 듯하다.  그 결말이 해피엔딩이든, 또는 비극적 결말이든 그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이 바라는 바대로 아름답게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결국 운명이라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어떤 결말, 혹은 사건을 향해 알 수 없는 우연들이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결합할 뿐이다.  스트레스라는 촉매제와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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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병문안을 다녀왔습니다.

친구는 당뇨 합병증으로 몇 년째 병원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병문안 날짜를 차일피일 미루던 나는 그마저도 핑계를 댈 수 없는 처지에 이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친구는 괴사가 진행되는 한 쪽 발의 절단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 일정이 다음주로 정해졌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더럭 겁이 났던 것입니다.

 

초췌해진 친구의 얼굴을 오래도록 지켜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까지는 건강에 별 문제가 없는 나로서는 아픈 친구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 또는 의례적인 요식행위인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던 것입니다.  검게 변한 발가락에서는 살 썩는 냄새가 나는 듯했습니다.  끔찍했습니다.

 

병실 한쪽에서는 방학을 맞은 친구의 아들이 보조침대에 앉아 스마트폰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아빠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말입니다.  빠르게 움직이는 손가락과 눈동자는 세상 어느 것에도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다는 것을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알 수 없는 서글픔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문득, 세상의 종말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병실의 풍경이 그 전조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문명은 육체를 파괴하는 쪽으로 발전해왔고, 미래의 문명은 영혼을 파괴하는 쪽으로 발전하겠구나'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생각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급속도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온 현대 문명은 주로 육체의 편리에 국한된 것이었습니다.  자동차와 각종 전자제품 등은 우리 주변에서 이제는 너무도 흔한 것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화공약품 덩어리로 변질된 각종 식재료는 또 어떻습니까?

 

인간 육체의 파괴는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구의 발달은 이제 그 정점에 다다른 듯 보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탐욕은 브레이크가 없습니다.  각종 매스 미디어의 발달은 이제 스마트폰으로 진화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아주 쉽게 잠식당하도록 고안된 것이지요.  육체를 파괴하도록 설계된 과거의 문명은 그나마 의학의 발달과 아직은 건재한 영혼으로 인해 생명마저 파괴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파괴는 무엇으로 막을 수 있을까요?

문명의 발전은 파괴와 무엇에서 다른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발전은 파괴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요?  과거에는 육체를, 미래에는 영혼을 파괴하는 쪽으로 문명은 '발전'하고 있습니다.  아니, '파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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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4-01-10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래의 문명은 영혼을 파괴하는 쪽으로 발전하리라는 암울한 전망을 결코 한 귀로 듣고 흘리질 못하겠군요. 연초에 어떤 신문을 보니 '총균쇠'의 저자인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더라구요. 이대로 가다가는 지구별이 50년도 못 버틴다구요.

꼼쥐 2014-01-12 20:47   좋아요 0 | URL
저도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육체를 파괴하는 일은 비교적 오래 걸렸지만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일과 그로 인한 지구 전체의 파괴는 가속화되리라는 생각이 들어요. 끔찍한 일이지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