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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첫 문장 -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세계문학의 명장면
윤성근 지음 / MY(흐름출판) / 2015년 7월
평점 :
원했던 대상이 어느 순간 '짠!' 하고 나타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무작정 걷게 될 때가 있다. 예컨대 최근에 헤어진 연인이라든가 허기를 달래줄 맛집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의 어디쯤에선가 마술처럼 짜잔 등장할 거라는 헛된 기대감 말이다. 그런 기대감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처음'이나 '첫'이라는 단어가 앞에 붙었을 때이다. 첫사랑, 첫 데이트 장소, 첫키스 등등. 우리를 마술의 세계로 이끄는 이러한 것들이 현재라는 시공간에서는 영원히 사라져 과거의 영역으로 흘러 들어갔을 때 우리가 느끼는 상실감이 크면 클수록 그때의 기분을 되살릴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은 더욱 증폭되고, 머릿속 상상의 영역을 밝히는 촛불이 하나둘 불이 켜지고, 우리는 그 불빛을 쫓아 막연히 걷게 되는 것이다.
독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한 권의 책을 마저 다 읽어내는 데 필요한 마음의 준비는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의 마음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여정이 사뭇 즐거울 것이라는 기대감,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안온한 잠자리가 마련되었을 거라는 기대감은 나그네로 하여금 쉽게 첫발을 내딛도록 한다. 그러나 힘든 여정이 될 거라는 예상은 나그네의 발길을 주저앉히기도 한다. 소설의 첫 페이지를 마주하는 독자 역시 막연한 기대감으로 들뜨기도 하고, 두려운 나머지 다음 페이지를 열어볼 엄두를 내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면 좋은 첫 문장은 무언가? 내 기준에서 좋은 첫 문장은, 우선 미스터리한 느낌이 있어야 한다. 공포영화에나 나올 법한 그런 서늘한 분위기가 아니라, '도대체 이렇게 첫 시작을 떼면 다음은 어떻게 이어갈지 궁금해지는 걸?'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묘한 느낌이면 좋다. 더불어 소설을 다 읽고 난 다음에도 첫 문장이 의미하는 것이 알쏭달쏭하게 만들어야 한다." (p.39)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주인이자 에세이스트인 윤성근은 자신의 책 <내가 사랑한 첫 문장>에 위와 같이 썼다. 까다롭기 짝이 없는 주문이다. 소설을 읽는 독자로서의 저자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까다로워서야 어디 소설 한 편을 쓰겠다고 감히 앞으로 나서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 것이다. 다독가로도 유명한 저자에게 있어 소설의 첫 문장이 주는 감동과 짜릿한 희열이 어떤 것인지 나와 같은 일반독자는 감히 짐작도 하기 어렵지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어렴풋한 느낌은 내게도 있고, 소설을 사랑하는 다른 많은 독자들에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로 시작되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기억하고 있다. 멋진 문장이었고, 인상적인 출발이었다. 독자는 왠지 모를 쓸쓸함과 허전함을 안고 먼 길을 떠날 준비를 한다.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다. 소설 속으로 뚫고 들어가 주인공 '기 롤랑'의 어깨를 토닥여줘야 할 듯한 분위기. 소설은 그렇게 독자를 안내한다.
<내가 사랑한 첫 문장>에서 저자가 소개하는 책은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비롯하여 스물세 권이나 된다. 물론 적다면 적은 숫자이지만 자신의 기억 속에서 소설의 첫 문장을 도대체 몇 권이나 발견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결코 적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일일이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이상의 '날개',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사데크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비둘기',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 허먼 멜빌의 '모비 딕',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조르주 페렉의 '인생 사용법',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이 그것이다. 어떤가. 이것들 중 읽어본 것도 있을 테고 어떤 것은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보기만 한 책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에 의해 첫 문장이 아름다운 소설로 뽑혀진 소설이라고 하니 왠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가.
'그래, 이곳으로 사람들은 살기 위해 온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곳에 와서 죽어가는 것 같다.'로 시작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소설 <말테의 수기>를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릴케는 고독한 예언자 말테의 입을 빌려 대도시의 비극을 알리는 소리 없는 외침을 이렇게 시작한다. "사람들은……이곳에 와서 죽어가는 것 같다."(9쪽) 그리고 자신의 예감을 확신하는 일화를 이어가는데, 이 암울한 시대를 각종 냄새와 갖가지 소음들로 채워놓다가 문득 정적이 흐르는 순간을 포착한다." (p.345)
독서의 계절 가을이다. 어느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듯 들뜬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소설 한 권이 옆에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리고 그 소설의 첫 문장을 기억한다는 건 또 얼마나 짜릿한 일인가.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의 마음으로 이 가을에 소설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