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가리키는 나뭇잎 화살표를 따라 이십여 분쯤 올라가면 내가 매일 아침 몸을 푸는 체육공원이 나온다. 말하자면 나는 매일 아침 바람을 등지고 산을 오르는 셈인데, 그럴 때마다 바람은 마치 가기 싫어 하며 뻗대는 아이의 등을 강제로 떠밀며 재촉하는 어른인 양 여겨진다. 나는 앞발을 딛고 뻗대는 세살배기 아이인 양 여겨지고 말이다. 기온이 영하로 곤두박질 친 날은 바람이 더러 싫을 때도 있지만 슬슬 꾀가 나는 겨울철에는 바람이 등을 밀어줄 때가 더 좋다. 심심하지도 않고, 힘도 덜 드는 것처럼 느껴지고...

오늘 아침에는 등에 와닿는 바람의 기운을 느끼지도 못할 정도의 약한 바람이 불었다. 나무에 붙은 메마른 나뭇잎이 그저 서걱거리며 흔들리는 모습에서 '아, 바람이 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이따금 내 발자국 소리에 놀란 산꿩이 푸드덕 날아올랐고, 나도 덩달아 놀라 하늘을 보면 손톱 모양의 그믐달이 둥실 솟아 있었다. 걸음은 다시 새벽의 어둠과 고요 속으로 향한다.

시의 예산이 부족한 건지, 아니면 우선순위에서 한참이나 밀린 탓인지 오래된 운동기구는 새로 교체하기보다는 숫제 톱으로 잘라버렸다. 밑동이 심하게 흔들리던 철봉과 평행봉은 베어진 채 스산한 모습으로 누워 있다. 내가 운동을 하는 새벽 시간에 마주치는 사람은 고작 두서너 명. 겨울에는 다들 게으름을 피우는 건지, 운동을 아예 접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사람도 없는 어둠 속에서 홀로 운동을 하고 있는 나를 볼 때면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이토록 열성인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 자신이 극성스럽게만 여겨지는 것이다. 어차피 때가 되면 죽을 몸, 남들처럼 좀 더 편안히 있다가 가도 될 텐데... 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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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12-09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ㅡ참 ...아예 철거한 것도 아니고 ..잘라서 간다고요?
민원이라도 ...극성이 아닌 스스로 돌봄이죠.
그게 멋지고요..
잘 ㅡ건강하게 죽는 법 ㅡ^^

꼼쥐 2015-12-10 18:20   좋아요 1 | URL
철봉과 평행봉은 나무 밑동이 썩어서 위험했었는데 교체할 생각은 없는지 그냥 잘라놓기만 했더라구요.
새벽 어둠 속에서 혼자 운동을 하고 있노라면 문득 `이게 뭐하는 짓인가?`하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어요. 나도 모르게.

[그장소] 2015-12-10 20:00   좋아요 0 | URL
뭐 ㅡ타인을 위해 하는것이 아니고 스스로를 위해 하는건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드셨담 ㅡ체크를 좀 해보세요 ㅡ어째서 메너리즘에 빠지는가..고?!
자기 만족도가 높아야한다고 보거든요.저는..
누가 봐주는 게 아니기 때문에...
꼼쥐님은 그 건강하고 맑은 정신으로 스스로를 잘
컨트롤하는 노후를 원하세요..제가 보기에는..
그래서 존경스럽고..멋지다고 여겨요.
잘사는건 잘 죽는것과 같다는 걸 얼마나 알까요..
그걸 하고 계신거죠..^^
그냥 그렇단 생각입니다.

아 ㅡ철봉과 평행봉이 철근아닌 나무 ㅡ자연 썩기를...흠..그래도 누가 걸려 넘어지기라도 함
어쩌려고..심을때 박아둔 콘크리트 파내는게
아까운모양이죠...그 예산 들이기가..ㅎㅎㅎ

꼼쥐 2015-12-13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명이란 건 제가 어찌할 수 없는 거라는 걸 잘 알기에 운동을 하여 건강을 지킨다 한들 불의의 사고로 죽지 말라는 법이 없을 텐데... 하는 생각이 이따금 드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다 부질없어 보이기도 하구요. 학창시절부터 매일 아침 해온 운동인데 이제는 지겨운 생각도 들고 그렇습니다.

보통은 나무기둥의 밑동이 썩지 않도록 쇠로 만들어진 캡을 씌우던데 그것을 안 씌운 기둥을 땅에 박아 놓아서 이제는 다 썩어버린 것이죠. 그것을 보고 저는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어요. 캡을 씌운 기둥은 가격은 높지만 오래 갈 테니 업자들 먹고 살으라고 일부러 담당 공무원이 그렇게 한 게 아닐까 하고 말이죠. 아니면 뇌물을 먹고 그렇게 하는 걸 눈감아 줬거나.
 
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매주 금요일이면 항상 '이번 주말에 뭔가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하는 막연한 기대 또는 환상 속에서 하루를 보내게 된다. 아무런 주말 계획도 세우지 않은 내게 그런 특별한 일이 생길 리 만무하지만 판타지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부작용인지 아니면 선천적으로 오컬트 성향을 타고 태어난 까닭인지 지금껏 나는 지난 주와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한 주말을 수없이 보내왔으면서도 금요일이면 번번이 그런 생각에 빠져들곤 한다. 병이라면 병이다. 그것도 치료약이 없는 불치의 병이 아닐 수 없다. 오늘도 괜한 환상에 빠져들까봐 '에라, 12월에 읽을 에세이나 골라보자' 작정을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김영하의 산문 삼부작 '보다 - 말하다 - 읽다' 중 단 한 권이라도 읽었던 사람이라면 작가 김영하를 새로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을 줄 안다. 나도 그 중 한 사람이다. '보다'와 '말하다'를 읽으면서 '김영하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독자와 작가의 관계에서 발견된(또는 상상된) 예전의 김영하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한 사람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다. 삼부작의 마지막인 '읽다'라고 읽지 않을 이유가 없다.

 

 

 

 

 

 

 

작가 로맹 가리만큼 후세의 작가와 독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작가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전투기 조종사, 성공한 소설가, 영화감독 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었기 때문에 하는 얘기가 아니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한 인간이 그의 삶에서 겪을 수 있는 다양한 경험과 그것을 통해 얻어진 다양한 사유를 자신의 작품 속에서 생생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을 읽고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였던지...

 

 

 

 

 

 

 

 

아나운서 손미나가 아닌 작가 손미나로 인식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스페인, 너는 자유다'를 읽었을 때였다. 드문드문 드러나는 어색한 문장, 작가는 그 책에서 아마추어 작가의 티를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보여준 솔직함은 작가로서의 자질을 믿어 의심치 않도록 했다. 유명인의 타이틀을 지녔던 사람으로서 솔직함은 가장 큰 걸림돌이 아닐 수 없는데 말이다. 비록 그녀가 쓴 소설 '누가 미모자를 그렸나'는 기대에 못 미치는 작품이었지만 소설가가 아닌 에세이스트로서 그녀의 자질을 믿기에 이 책에 기대를 걸어 본다.

 

 

 

 

 

모 방송국에서 방영하는 '응답하라 1988'은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는 모양이다. TV 드라마를 그닥 선호하지 않는 나로서는 먼 나라 얘기처럼 들리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따금 그 시절이 아련히 떠오를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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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쓰자면 맞춤법
박태하 지음 / 엑스북스(xbooks)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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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하고 어려운 맞춤법 책이라는 인식이 바뀌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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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반양장)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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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 핑계를 대고 달아나던 습관이 사라질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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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이 정말 오긴 오는군요. 안 올 줄 알았거나, 오는 데 한참이나 걸릴 줄 알았는데 말이지요. '연말연시'라는 말이 실감나는 요즘입니다. 모임도 잦고, 여기 저기 불려다니다 보면 본의 아니게 이런저런 실수도 잦아지게 마련이지요. 일 년에 할 실수를 이맘때에 모두 몰아서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술을 못 마시는 까닭에 다른 사람의 실수를 그저 참아주거나 술에 만취하여 아무 일도 아닌 일로 실랑이를 벌이는 둘 사이의 시비를 잘 중재하는 역할이 주어진 임무라면 임무인데 이런 식으로 몇몇 모임에 참석하다 보면 녹초가 되곤 하지요. 술에 취한 사람들은 간혹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멍멍이에 빙의되기 때문에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도 종종 목격하게 되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그런 모임에서는 별의별 일들이 다 벌어지는지라 없던 오해도 쌓이고, 새로운 갈등도 생겨나지만, 항상 그런 부정적인 일들만 있는 것도 아닌 듯합니다. 아무 기대도 없이 참석했던 모임에서 간절히 보고 싶었던 사람을 우연히 만나기도 하고, 술기운을 빌어 원수 대하듯 하던 사람과 어색한 화해를 시도하게도 됩니다. 그리고 각종 인사말들이 안주처럼 술좌석을 오가게 되지요. 술잔이 몇 순배 도는 것처럼 인사말도 그렇게 돌고 도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보다 인사말이 더 먼저 취하는지 발음을 도통 알알들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러서야 사람들은 하나둘 집생각이 나나 봅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도 그 즈음이지요.

 

저는 이따금 아무것도 아닌 짧은 인사말에 눈물이 왈칵 솟을 때가 있다는 것을 밝히지 않을 수 없군요. 정말 그렇습니다. 제가 혹 눈물이 너무 많아 평소에도 시도 때도 없이 질질 짜는 사람이 아닌가 의심하는 분이 있다면 결단코 오해입니다. 저는 웬만한 일로는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는, 어찌 보면 냉정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몇 년 동안 소식도 듣지 못했던 사람으로부터 '잘 지냈어?'와 같은 평범한 인사말이 아닌, 밑도 끝도 없이 '얼마나 힘들었어?' 물어올 때, 저는 대답에 앞서 눈물부터 왈칵 솟는 걸 보면 '사는 게 힘든 거구나'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연말연시에 들었던 짧지만 감동적인 인사말이 있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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