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 근처에는 제법 큰 규모의 시립도서관이 있습니다.  어쩌다 여유 시간이 생기면 딱히 할 일을 찾지 못하는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그보다 더 좋은 놀이공간도 없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와 비교하면 요즘의 도서관은 시설도 좋고 장서 규모도 놀랄 정도이지요.  몇 년째 그곳을 뻔질나게 드나들다 보니 도서관 직원들뿐만 아니라 나와 비슷한 취향의 단골 이용자들 얼굴도 이제는 제법 눈에 익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도서관 로비를 들어서는 순간부터 인사를 받거나 인사를 하게 됩니다.

 

어제도 나는 한참이나 늦은 시각에 도서관에 들렀습니다.  찢어지거나 구겨지지 않은 일상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금간 데 없이 매끈한 시간을 파노라마 영화처럼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느낌표의 아랫점을 정성스레 찍는 일처럼 자연스런 일상이었습니다.  어두침침한 로비를 지나 도서관 2층으로 향하는 모퉁이를 막 돌아서려는데 공중전화 앞에 서있던 한 여인으로부터 인사를 받았습니다.

 

희미한 조명 아래서 얼굴을 확인하는 데만 한참이 걸렸습니다.  도서관의 식당 아저씨와 애기를 나누는 도중에 서너 번쯤 얼굴을 마주친 적이 있는, 학생인지 아가씨인지 잘 알지 못하는 그 여자와 나는  한두 번쯤 멀리서 인사를 하던 그런 사이였습니다, 우리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저만치 멀어지려는데 아가씨도 바삐 전화를 끊고 내 뒤를 좇아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2층 열람실에서 책 한 권을 빌리고 3층 휴게실을 둘러보려는데 그 아가씨와 다시 마주쳤습니다.

 

휴게실에는 혼자서 서성이던 그녀와 원탁에 둘러 앉은 서너 명의 아줌마들이 보였습니다.  "여자친구 있어요?"  그녀의 뜬금없는 질문에 그 대상이 나라는 사실도 미처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각자의 얼굴에 고정되었던 아줌마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로 건너왔습니다.  나는 그때 어색한 상황을 모면하려 애쓰면서 살짝 미소를 띄웠던 것 같아요.  그 상황은 마치 상영시간이 훌쩍 지난 영화관 안에서 지정된 좌석을 찾느라 기웃대는 것처럼 낯설고 어색했습니다.

 

나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고, 조명이 꺼진 계단을 통해 건물 밖으로 나왔습니다.  가는 봄비가 소리도 없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등나무 벤치에 앉아 담배를 한 개비 피워 물었을 때 그 아가씨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대답을 꼭 들어야겠다는 표정으로 "여자친구 있어요?" 똑 같은 질문을 재차 물었습니다.  "아니, 없는데요.  왜요?"   감색 후드티와 비슷한 색깔의 스키니진을 입은, 등에는 군청색 백팩을 맨 그 아가씨는 "나도 남자친구 없는데..."가늘게 말하며 어둠 속으로 흩어졌습니다.

 

한쪽 눈에 약간의 사시 기가 있는, 정상인에 비해 조금쯤 지능이 낮다고 들었던 그 아가씨는 이 봄 살구꽃처럼 다른 사람의 사랑이 궁금했었나 봅니다.  어쩌면 그녀는 보풀거리는 꿈이 자랄 나이를 지나 목련꽃처럼 순결한 사랑을 할 나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추위가 한켜씩 벗겨질 때마다 색깔을 달리하던 나무들이 사랑처럼 빨간 꽃망울을 터뜨리려나 봅니다.  오늘 아침에는 수줍게 핀 목련을 보았습니다.  꿈처럼 순결한 봄입니다.  누구의 가슴엔들 사랑이 움트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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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오랫동안 베스트 셀러에 올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인기 없기로 유명한 인문학 도서가 그토록 인기를 끌었던 것에 대하여 다들 놀라고 의아해 했었죠.  혹자는 우리나라의 비윤리적이고 도덕적이지 못한 정치사회 현실이 상승작용을 하여 그랬다고도 하고, 혹자는 자기만족을 위한 인테리어 소품용으로 적합한 책이라서 그랬다고도 하였습니다.  아무튼 이 책을 구입했던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 구매 동기를 물어본 것도 아니니 나로서는 어느 것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책을 읽음으로써 정의에 대한 우리의 통념은 더 혼란스러워지고 더 불확실한 어떤 것으로 바뀌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정의란 "예쁘다"고 시도 때도 없이 칭찬하는 연인의 거짓말처럼 자주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시장의 좌판에 널부러진 고등어처럼 자주 보거나 만져볼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정의에 대하여 확고하고도 명확한, 어느 누구도 공감할 수 있는 절대적이고도 객관적인 단 하나의 그 무엇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실체도 없고 자주 겪어본 것도 아닌 정의가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학습되고 전파되는 것일까요?  실체도 없는 정의에 대하여 우리는 실제적이고도 완전히 객관적인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힘들어 보입니다.  오히려 정의(正義)를 규정하는 일에 쓸데없이 집착하기보다는 '정의는 어떻게 전파되는가?' 하는 질문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는 정의가 혹은 다른 누군가가 생각하는 정의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느냐에 따라 정의(正義)의 개념이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이런 것입니다.  국정원의 어느 직원이 증거를 조작하여 한 사람을 간첩으로 몰았어도 그 행위의 정당성을 잘만 포장하여 선전한다면 그것은 곧 정의로운 행동으로 인식된다는 것입니다.  또는 많은 범법행위를 저질렀어도 '과거에는 다 그랬고 앞으로는 나라를 위해 힘쓰겠다'고 말하면 그것으로 그는 정의로운 사람으로 재탄생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과 같지요?  그렇습니다.  잘 포장된 불의(또는 그렇게 인식되는)는 예수님이 부활하듯 정의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따로 없다구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정의를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주지시키고 전파하려 노력했는가 되돌아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와 우리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가 생각하는 정의가 서로 다르다면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전파하기 위한 본인 스스로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정의든 애국이든 보이지 않는 실체는 다 그런 것입니다.  자신의 노력이 따르지 않는 정의는 불의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결국 정의는 홍보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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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한 외국인을 만나 함께 차를 마시며 꽤 긴 시간 동안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캐나다에서 한국에 온 지 5년이 되었다는 그녀는 우리나라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비록 한국어를 잘 구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이런저런 애기가 오가다가 딱히 할 말도 생각이 나지 않아 구태의연한 질문을 하게 되었는데 그녀의 답변이 놀라웠습니다.  외국인을 만났을 때 우리가 흔히 하는 질문으로서 "한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그런 취지의 질문이었습니다.

 

그녀의 답변을 요약하면 이런 것이었습니다.  한국 사회는 불안이 만연(spread of anxiety)한 사회라는 것과 한국 정부와 정치인들은 국민들에게 불안을 판매하고 조장하는 듯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불안을 판매함으로써 자신들의 이득을 취한다는 것이죠.  가장 크게는 전쟁의 가능성에 대한 불안, 노후의 삶에 대한 불안, 경쟁에서 자신이 뒤처지는 것에 대한 불안, 외모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하는 염려, 건강과 질병에 대한 지나친 걱정, 돈에 대한 지나친 집착 등 그녀가 나에게 말했던 것은 우리나라 사회 전반에 대한 광범위한 지적이었습니다.

 

한국에 머문 기간이 그리 긴 것도 아닌데 그녀는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알 수 있었을까요?  그녀는 자신이 한국인의 불안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아주 우연한 일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날 필요한 책을 사려고 동네의 한 서점에 들렀는데 베스트 셀러 코너에 꽂혀 있는 책들이 어떤 종류의 책인지 궁금하여 서점 주인에게 물어보았답니다.  그 책들의 대부분이 '행복'을 주제로 쓰여진 것이라는 서점주인의 대답에 그녀는 무척이나 놀랐다고 했습니다.  행복을 주제로 쓴 책들은 대부분 다분히 철학적이어서 읽기도 어렵거니와 캐나다 사람들에게는 별 관심도 없는 주제였기 때문이랍니다.

 

'왜 한국인들은 행복에 대해 그토록 관심이 많을까?'하는 궁금증이 한국 사회 전체에 대한 호기심으로 증폭되었을 뿐이라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그녀의 결론은 어떤 목적으로든 '불안'을 파는 국가는 '나쁜 국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불안을 판매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수익을 창출한다는 것이죠.  게다가 '불안'을 수요하는(또는 구매하는) 국민은 구매를 거부할 권리마저 허용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언론을 통한 일방적 강요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녀의 지적에 반론을 펼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내게 들려주었던 것은 우리나라의 부끄러운 현실, 추한 자화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한 명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근거도 없는 '불안'을 수요하는, 교육만 많이 받은 일개 무지렁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요즘 TV 뉴스에서는 각 방송사 공히 곧 있을 지방자치선거 보도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불안'을 판매함으로써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려고 하지는 않는지 의심하고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 자신에 대해 외국인보다 더 아는 게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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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lph 2014-03-16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적절하고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그런대 왜 우리나라가 유난히 그럴까요? 실제로 불안 요소가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실제로 전쟁의 워험은 우리는 잘 못느끼지만,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군요. 무었보다도 워낙 짧은 기간동안 사회가 급변하다보니,, 모두가 불안을 느낄 수 밖에 없지 않은가 합니다. 불안 마켓팅이 현대사회, 자본주의 의 특징이기도 하구요. 무었보다도 다른사람..예르 들어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인느데는.. 불안감을 조장하는게 가장 효과적이죠.. 실제로 우리사회가 불안한 사회라는 생각도 듭니다.

마립간 2014-03-17 10:18   좋아요 0 | URL
건강 검진이 대중화된 것도 암공포증(cancer-phobia)를 부축인 면이 있죠. 그렇게 불안이 일반화되어 있는 상황이 의료인에 좋은 것만도 아닌데요.

꼼쥐 2014-03-18 21:52   좋아요 0 | URL
저랑 대화를 나누었던 분은 그렇게 말하더군요.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 불안을 미끼로 소비자를 유혹하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그에 대한 정부의 규제도 존재한다고 말이죠. 한국에서는 이를 외면할 뿐만 아니라 조장하는 측면이 강하고 북한과의 전쟁 가능성에 대한 불안도 일부러 키우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말이죠.

qualia 2014-03-17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 사회가 실제로 불안한 사회인 것은 사실이죠.

그것도 아주 지극히 불안해서 어디 한 군데 잘못 건드리면 즉각 터져버릴 듯한...

그런데 문제는 이 불안한 사회의 불안을 제거하려고 노력하기는커녕 더욱 더 증폭시켜 정치적/경제적/권력적 지배체제를 더욱 더 확고히 하려는 집단/세력이 있다는 것이죠.

분석/비판은커녕 한국의 식자층이 놀고 먹구 있으니까, 울나라 사람도 아닌 외국 일반인이 저렇게 나서서 비판하는 것입니다.

책 100권을 읽으면 뭐하죠? 울나라 지식인들...


꼼쥐 2014-03-18 21:55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워낙 만성적인 불안 사회에 살다 보니 어제 지하철역 폭발물 해프닝도 예사로 보이지 않더라구요. 이건 뭐 숫제 양치기 소년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21세기에 이런 국가가 있다는 것도 신기하고 그렇습니다.

마립간 2014-03-18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쥐님, 처음 댓글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안녕하세요.

위에 댓글을 다신 두 분은 우리 나라가 불안 사회라고 판단하십니다. 그런 사회에 속한 일원으로서 좀 더 합리적 행동을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꼼쥐 2014-03-18 21:5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마립간 님.
제 생각에는 어떤 불안에 대해 무작정 불안해 할 것이 아니라 확실한 근거를 찾아보는 게 순서겠지요. 언론이나 정부에서는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막연한 불안을 부추기는 경우가 허다하니까요. 게다가 그런 위험요소나 불안요소가 있다면 정부가 먼저 해결하고 국민들은 안심시키는 게 정부의 역할 아닐까요?

무지개분수 2014-03-23 0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 생각에는 외국인에게 비친 한국의 불안감은 비정상적으로 보여지겠지만, 한국은 정말 불안속에서 성장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리고 현재도 불안한 요소들이 너무 많이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와 단순비교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특히 캐나다 처럼 땅 넓고 자원많고, 복지 시스템이 잘 되어 있는 나라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여건에 있기 때문이죠. 남북한 문제, 고령화문제등의 내부적인 부분과 대외적으로 미국, 중국, 일본 등과의 외교적인 문제도 캐나다와는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내부적으로 지나친 경쟁의식이 불러 일으키는 불안도 더 문제가 되는 것 같아요. 남이 하면 나도 해야 하는 것... 서양은 그런면에서 한국보다 덜 심하기 때문에 각자의 인생을 즐기면서 살 수 있는 것 같아요.
자라나는 세대들의 교육에 있어서 스스로의 자신의 삶의 스타일을 찾고 만들어 나가는 것부터 연습해야 할 것 같아요.

Ralph 2014-03-23 18:19   좋아요 0 | URL
오히려 불안하지 않다면 비정상적일 겁니다. 현재도 휴전중이고, 작은땅에 인구는 많고.. 갑작스런 사회 변화.. 불안한게 정상인데.. 오히려 불안하지 않은 것 처럼 사는 것인지도.. 굳이 우리 사회가 불안을 부추인다기보다는 .. 당연히있는 불안을 영리한 사람들이 나름대로 적절히 이용하고있다고 해야 할지.. 아뭍튼 정신 바짝차려야 살아갈 수있는 사회인것만은 사실인듯합니다.

꼼쥐 2014-03-26 14:20   좋아요 0 | URL
국가 간에 불안의 정도를 절대적 기준으로 평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나라마다 사정이 있고, 환경이 다르니까요. 그리고 때로는 적당한 긴장감이 삶에 활력이 되기도 하고 말이죠. 다만 우리나라에 만연한 불안을 더욱 부채질하고 조장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이죠. 국가의 책임은 불안을 조장하기보다는 불안을 해결하여 국민을 안심시키는 것이 아닐까요? 불안 요소가 있으면 그 해결책을 내놓고 국민을 안심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없던 불안감도 일부러 만들어내고 있으니...

Ralph 2014-03-29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가가 개인보다 더 도덕적?이기를 바라는 맘이야있지만.. 현실은 그럴리도, 그럴수도 없는 상황인듯합니다.

꼼쥐 2014-04-01 16:04   좋아요 0 | URL
제도가 잘 갖추어진 나라라면 그 시스템 속에 있는 공직자는 어떤 도덕심이나 윤리의식을 따지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도덕적인 공직자가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나라는 시스템의 부재로 인해 편법과 불법이 판을 치는 건 아닌가 싶어요.
 

비가 내렸습니다.

가문 들녘을 적시는 단비였습니다.  우산을 쓰고 나서니 '싸르르 싸르르' 키 위에서 콩을 까부르는 소리가 납니다.  문득 떠오른 시는 그 옛날 교과서에서 배웠던 이수복의 <봄비> 한 구절이었습니다.

 

봄  비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랭이 타오르것다.

 

빗길을 천천히 걷노라니 세상은 온통 풍요롭습니다.  또한 고요합니다.

가로등의 여린 불빛으로도 얼어붙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다 녹일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집 근처에 이르러서야 '도서관에서 시집이라도 한 권 빌려 올 걸'하는 후회가 들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지나고 나서야 후회하는 것처럼 이 짧은 계절이 다 지나고 난 후 가버린 계절을 아쉬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칼 비테의 공부의 즐거움>을 마저 읽어야 할까 봅니다.

어쩌면 빗소리에 취하여 읽어야 할 책마저 까맣게 잊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괜찮다 싶습니다.  물웅덩이에 파문처럼 일던 물동그라미를 밤새 생각한들 또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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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공부에 대한 관심이 부쩍 많아졌다.  그렇다고 무슨 자격증 획득이나 자기계발을 위한 영어회화 등 목적이 있는 공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공부에 관련된 책에 눈길이 간다는 것일 뿐 실제적으로 무엇을 계획하고 실천하는 것은 아니다.  황농문 교수의 <공부하는 힘>은 다 읽고 리뷰도 올렸지만 그 외에도 '칙센트미하이의 몰입(flow)', 마리아 코니코바의 '생각의 재구성' 등 전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던 책들을 딴에는 열심히(?) 읽고 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또래의 사람들은 20년 이상을 공부하는 데 시간과 열정을 소비했음에도 자신이 최종적으로 공부에 재능이 있는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하는 데 있어 지금도 여전히 주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장장 20년 이상을 공부했음에도 말이다.  인간의 수명을 80년으로 가정할 때 인생의 1/4을 하나의 활동에만 헌신했음에도 그 활동에 있어 자신의 능력이 적합한지 그렇지 않은지 전혀 알 수 없다면 우리는 인생에 있어 도대체 무엇을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최종적인 판단을 유보한 채 주저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학창시절 자발적 노력이 부족하여 자신의 재능을 스스로 판단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획득하지 못하였거나 공부에 재능이 없다고 판단할 만한 충분한 정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존심 상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일종의 자기기만적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공부에 대한 재능의 유무와 직업 선택의 적절성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보여진다.  내가 어렸을 때 남학생들의 대부분은 직업과 관련된 자신의 꿈이 판,검사나 변호사, 혹은 의사와 같은 소위 '사'자가 들어간 직업을 선호했고, 여학생들은 '현모양처'가 꿈이라는 대답이 많았다.  세상에, 현모양처가 꿈이라니!  요즘 학생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대답이 아닌가.

 

아무튼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자신이 갖게 되는 직업은 공부에 대한 재능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를테면 부모의 경제적 능력, 부모의 교육 정도, 인맥, 사회적 압력(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선택을 강요하는), 시대적 환경, 기타의 배경 등)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예컨대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환경이라는 거대한 홍수에 떠밀려 잠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자신도 알지 못하는 낯선 곳에서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한마디로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채 직업인이 된다는 얘기다.  학생 신분에서 사회인으로의 갑작스러운 점프.

 

공부와는 조금쯤 멀어질 만한 나이에 공부에 관심을 두는 것도 생뚱맞다는 생각이 든다.  학창시절에도 그랬고 나는 지금도 여전히 공부가 재밌는 걸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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