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바다의 기별"
중에서 -김훈)
보이지 않는 사랑과, 보이지 않는 꿈을 품고, 보이지 않는 시간을 걸어,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나아갈 제, 실체가 없는 추억이 지번도
없는 어느 곳에 켜켜이 쌓이는 동안, 종국에는 보이지 않는 죽음이 내 그림자와 동행하는 것, 그것이 삶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두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온 몸으로 뜨겁고 차가운 것을 구별하며, 달고 쓴 것을 느끼고, 고소하고 역겨운 냄새에 전율하고, 크고 작은 소리에 민감했던 나의
실존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보이지 않는 미움에 보이지 않는 말로 다투고, 보이지 않는 지식과 보이지 않는 부를 탐내며, 보이지 않는 명예와 보이지 않는 권력을
시기하며, 보이지 않는 증오를 키워가는 것, 그것이 삶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 삶의 팔 할은 관념이었다.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살았던 팔 할의 삶을 죽어 육신이 스러진 후에 찾을 수 있을까? 그때는 보이는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을
느끼고, 매만질 수 있는 실체를 매만지면서, 오롯이 실존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살아서 하지 못했던 실존의 삶을. 진정 관념의 안개 속으로
사라진 내 실존을 죽어 관념만 남은 세상에서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내 시선의 망막 위로 먼 미래의 희망이 기척도 없이 너울대던 날, 내 기억의 깊은 계곡에선 메마른 시간들이 우수수 흩날렸다. 기신기신
살아온 내 삶의 팔 할은 관념이었다.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과 모든, 참혹한 결핍들을 모조리 사랑이라고 부른다.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바다의 기별" 중에서 -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