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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존 톨랜드의 저서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2에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작성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전개양상은 엄밀히 따지자면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중심이 된 추축국과 미국·영국·소련·중국·프랑스 등이 중심이 된 연합국의 전쟁이었다추축국 안에도 헝가리나 루마니아 그리고 불가리아 등에서 차출된 그 나라 병력들이 있었지만그래도 역사적인 맥락에서 독일의 동맹세력으로써 알려진 이는 바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이탈리아일 것이다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추축국(Axis Power)은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중심적인 나라들이었다그러나 일본은 지구반대편에 있었고지정학적인 부분에서 나치독일의 동맹국은 사실상 이탈리아 밖에 없었다.

(무솔리니와 히틀러,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파시스트 선배다. 물론 1930년대 히틀러의 독일이 성장하고 군사력을 발휘하면서 그 위치는 히틀러가 더 앞서게 됐다.)

 

그러나 독일의 동맹국인 이탈리아는 군사적인 측면에서 매우 무능력한 군대였다2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의 침략은 거의 다 실패를 맞보아서 독일군의 지원을 받아 유지하는 신세였다대표적으로 이탈리아의 알바니아와 그리스 침공은 이탈리아군의 무능력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또한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군은 게릴라전을 전개하던 티토의 빨치산에게도 연전연패를 맞보았다북아프리카전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이탈리아군은 영국군에게도 계속 패배를 맞보았다.

(오토 슈코르체니, 히틀러가 아끼던 군인으로 ss친위대 소속이었다. ss에 있으면서 여러 특수작전을 전개했었다.)

 

이처럼 이탈리아군은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서 독일군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독일군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던 형편이었다북아프리카 전투가 지속되고 있던 1942년과 1943년 이탈리아는 영미 연합군의 대대적인 폭격을 받고 있었다거기다 독일의 롬멜 장군이 투입됐던 북아프리카 전투도 1943년 5월에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그로부터 2개월 뒤인 7월 연합군은 이른바 허스키 작전(Operation Huskey)을 감행하여 시칠리아 섬에 상륙했다.

 

1943년 7월 24일 연합군이 이탈리아 본토에 위협을 가하자 이탈리아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포함한 국가 파시스트당 내부에서도 무솔리니를 축출하려고 했다결국 왕에게 사임 요청을 받은 무솔리니는 실각했고피에트로 바돌리오 원수를 행정수반으로 임명됐다이탈리아의 지도자가 된 바돌리오는 두 달 뒤인 1943년 9월 8일 연합국과 휴전협정을 맺었다.

(무솔리니를 구출하기 위해 투입된 특공대, 여기에는 독일 공수부대인 팔슈름 야거도 투입됐다.)

 

당연히 무솔리니는 체포되었다체포된 무솔리니는 로마에서 161km 떨어진 아펜니노 산맥의 높은 봉우리인 그란사소 꼭대기 부근의 한 호텔에 감금되어 있었다거기다 연합군은 이탈리아 수도 로마를 향해 진격해 나갔다따라서 히틀러는 비록 도움은 안 되는 인물 무솔리니를 구출하기로 결심한다이것은 아돌프 히틀러 입장에서도 이 선택지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고그렇게 해서라도 연합군의 진격을 막아야 했다.

(무솔리니가 감금되어 있던 호텔과 인근 지역 위치)

 

무솔리니 구출작전을 위해 히틀러는 SS친위대 대위인 오토 슈코르체니(Otto Skorzeny)를 불렀다그는 키 190cm인 인물로 특수작전에 매우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오토 슈코르체니 휘하의 특공대가 편성되었다이 특공대는 독일 공수부대인 팔슈름 야거 출신들이었다히틀러의 명령을 받은 오토 슈코르체니와 107명의 특공대는 9월 12일 일요일 오후 1시 글라이더에 오라 이륙했고무솔리니가 감금되어 있던 곳에 착륙했다글라이더에서 나온 독일 군인 4~5명이 기관총을 설치하였고슈코르체니의 글라이더는 호텔에서 18m도 안 되는 거리에 착륙했다슈코르체니의 부대원들은 저항하는 경비병력을 쓰러뜨리고 무솔리니가 있는 방문을 열고 그를 구출했다.

(호텔 근처에 착륙했던 독일 특공대의 글라이더)

 

무솔리니를 만난 오토 슈코르체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그것은 지도자가 나를 보냈다당신은 이제 자유다였다이를 들은 무솔리니는 슈코르체니를 껴안았다고 한다또한 무솔리니는 나의 친구 아돌프 히틀러가 나를 버리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서 특공대원들에게 엄청난 감사의 표시를 했다고 한다무솔리니를 구출한 특공대원들은 목초지 경사면에서 겨우 안전하게 착륙한 피젤러슈토르히 소형 비행기에 올랐고이륙 과정에서 불가피할 추락의 위험이 있었지만비행기는 이륙했다.

(교전을 치르며 호텔 진입을 시도하는 독일 특공대)

 

구출된 무솔리니는 9월 14일 아침 일찍 동프로이센으로 향하여 히틀러를 만났고매우 고맙다는 표시를 히틀러에게 했다이 작전을 성공시킨 오토 슈코르체니는 영원히 히틀러가 아끼는 군인이 되었다거기다 무솔리니가 구출되자 독일인의 사기가 올랐다물론 히틀러가 그를 구출한 것은 연합군의 진격을 막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따라서 구출된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북부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즉 살로 공화국을 수립했다.

(구출되어 비행기에 오른 무솔리니, 오토 슈코르체니와 함께 찍었다.)

 

그러나 살로 공화국은 군대가 그리 많지 않았다따라서 이탈리아 전선에서 연합군에 맞서 싸웠던 대부분의 군대는 독일군이었다거기다 1941년에 점령되었던 유고슬라비아에선 티토가 이끄는 빨치산이 무솔리니의 권력 공백기를 틈타서 유고슬라비아 내에 있던 이탈리아군 거점 지역들을 단숨에 접수해버렸다따라서 거기서도 나치 독일은 이탈리아군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 놓였었다결국 살로 공화국은 제대로 된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독일 꼭두각시 노릇(그 이전부터도 사실상 꼭두각시였지만)을 하다가 1945년 4월 25일 공식적으로 사라졌다그리고 무솔리니도 이탈리아 빨치산 유격대에 체포되어 총살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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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당시 일본의 만주 침략도)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20분경펑톈 시 외곽 북쪽으로 7.5km 떨어진 류타오후에서 뤼순과 펑톈 그리고 창춘을 연결하는 만주철도를 달리던 특급열차는 달리던 중 폭음을 듣게 됐다다행히 폭발에도 불구하고 열차는 파괴되지 않았고제 갈 길을 달렸다같은 시각 철도 주변에는 일본 관동군 독립수비대 제2대대 제3중대 소속의 공병들이 숨어 있었고이들은 동북군이 만철 철로를 파괴했다고 본부에 보고했다그 시각 보고를 받은 이타가키 세이시로 대좌는 관동군 사령관의 명의를 제멋대로 사칭하여 일본군 제2대대와 제5대대에게 펑톈 교외에 있는 장학량 휘하의 동북군을 일제히 공격하라고 명령했다이렇게 해서 일본군과 중국군간의 전투가 시작됐다이것이 바로 1931년에 일어난 일본의 만주사변이었다.

 

지난 1920년대의 일본은 중국 대륙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긴 했지만중국 대륙의 영토를 대상으로 침략전쟁을 본격화 하지는 못했다그러나 1931년의 일본은 비록 만주이긴 해도 중국 대륙을 본격적으로 침략해 나갔다이것은 1937년에 일어날 중일전쟁의 시발점이기도 했다몇몇 학자들은 일본의 만주침략이 본격적으로 군국주의로 나가는 방향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도대체 왜 일본은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킨 것일까?

(검은 화요일,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검은 화요일은 미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경제 공황을 불러 일으켰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 일본은 1923년 관동대지진을 겪으면서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일본 정부는 기업의 도산 사태를 막기 위해 진재어음을 발행하는 것으로 수습하는 것 같았다그러나 1927년에 이르러 일본의 만성적 불황은 금융공황으로 비화됐고가까스로 수습하기에 이르렀다그러나 1929년 만성적 공황을 수습하기가 무섭게 다른 일이 일어났다바로 그해 10월 뉴욕 주식시장의 폭락으로 인해 세계 대공황이 시작된 것이다.

 

검은 화요일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경제 대공황은 세계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특히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독일의 경우 1924년부터 경제를 회복시켜 나갔지만, 1929년 미국에서 경제 대공황이 시작되자직격타를 맞았다일본 또한 경제 대공황으로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았다경제 대공황으로 수출 시장이 축소되고공업 생산이 급감했다이것은 일본의 임금 하락과 실업 증가로 나타났으며사회적 불안이 가중되었다여기서 일본이 선택한 노선이 바로 팽창정책이었다.

(만주사변 당시 중국 선양에 입성한 일본군과 기병대)

 

사실 일본은 1910년 조선을 합병한 이후부터 만주 지역을 독점 하고자 했다. 1912년과 1916년 그리고 장작림 폭사사건에서 비롯된 1928년의 사건은 일본의 만몽 자치운동을 사주하려는 계획의 결과였다즉 일본은 예전부터 만주지역을 탐내고 있었던 것이다거기다 미국발 경제 대공황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창설된 국제연맹의 힘을 약화시키거나 국제연맹으로 하여금 아시아 문제를 무관심하게 만들었다따라서 일본인 만주침략을 가속하 하기 위한 내적 혹은 외적 조건들이 갖추어졌던 것이다.

(만주사변 당시 일본군 소총 대대)

 

1931년 9월 18일 밤에 철도가 폭파되면서 일본의 만주 침략이 시작됐다다음 날인 19일에는 관동군에서 조선군 사령부에도 전보를 보내어 신속한 병력 증파를 요청하였고대략 4천 명으로 구성된 조선군과 2개 비행중대가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입했다또한 펑톈을 방어하는 동북군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240mm 중포를 앞세운 관동군의 공격 앞에 중국군은 패주했다이후 주요 정부 청사를 비롯해 펑톈 항공국병기창동대영이 잇따라 함락되면서 20일 새벽까지 펑톈 성 전역이 일본 관동군의 수중에 들어갔고그날 관동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은 장춘도 함락됐다그 다음 날인 21일에는 지린 성이 아무런 저항 없이 일본군에게 점령됐다이렇게 해서 광대한 남만주 지역이 거의 2~3일 만에 일본군 수중으로 들어갔다.

(만주에서 진공중인 일본군 관동군 소속 육군 부대)


(1931년 9월 19일 새벽 장학량 군대를 공격해서 펑톈 성을 장악한 것을 환호하는 일본 관동군)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이는 전 세계적으로 큰 반응을 일으켰다하지만 국제연맹은 무능함만 드러냈다거기다 미국은 이해관계에 눈이 멀어 일본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고과거 일본과 동맹 관계를 맺었던 영국도 일본편을 들었다어쨌든 일본에 대한 국제연맹의 제재는 전혀 없었다만주를 점령한 일본군은 이 기세를 몰아 1932년 1월 3일에 진저우를, 2월 5일에는 하얼빈을 점령했고만주 전체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당시 만주에 주둔하던 장학량은 국민당의 장제스 밑에서 있었는데상당히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상하이 사변 당시 방어진지에서 전투중인 중국 국민당군)


(상하이에 입성한 일본군 89식 전차)

 

1931년 만주를 손쉽게 장악했던 일본은 1932년 만주 전역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중국 본토에서도 전투를 전개했는데그것이 바로 상하이 사변이었다당시 일본은 상하이에서 전쟁을 일으켜 중국과 국제사회의 이목을 만주에서 상하이로 집중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렇게 해서 만주 전역을 장악하겠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상하이와 앙쯔강 일대에 배치된 해군력을 강화했다항공모함을 포함한 군함들을 그곳에 증파했고상하이 지역에 일본군 병력을 증원했다또한 장제스도 그곳에 병력을 배치했고이렇게 되면서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해졌다.

(상하이 사변 당시 독일제 트럭을 타고 시내오 진입한 일본군)


(상하이 사변에서 승리를 거두고 환호하는 일본군들)

 

전투는 1932년 1월 28일에 일어났다당시 중국군은 3만 3,5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던 반면일본군은 6천 명에 불과했다그러나 일본군은 30척의 군함과 최소 40대 이상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야포와 장갑차 수십 대를 보유하고 있었다즉 화력이나 제공권에서 중국군을 훨씬 압도했던 것이다양측의 전투는 매우 치열해졌고초기에 일본군이 중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지만이는 실패로 끝이 났다. 2월 9일에는 일본군 또한 본국으로부터 병력 지원을 요청했고, 2월 24일에 일본군 2개 사단이 증원되면서 점차 승기를 잡았다. 1932년 3월 1일 네 번째 총공격에서 중국군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고, 2일 뒤인 3월 3일 양측은 정전에 합의하게 된다.

(2020년에 만들어진 중국 영화 800, 제1차 상하이 전투 당시의 전투를 다룬 영화다.)

 

상하이 전투는 매우 치열했다. 2달간 전개됐던 이 전쟁에서 양측의 사상자는 적지 않았다군함 80척과 항공기 300대를 투입했던 일본군은 3,091명의 사상자가 나왔던 반면 중국군은 1만 4,326명이 나왔다고 한다이후에도 일본군은 국지적인 충돌을 계속 이어나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목표 자체는 만주지역 점령과 만주국 수립에 있었기에 전투 이전의 상태로 복귀하는 선에서 국제적인 합의를 봤다상하이 사변 이후 일본은 이를 승전으로 홍보했다.

(만주국 초대 내각)


(만주국 괴뢰 황제 푸이)


(1932년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상해사변 승전 기념식)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국제 공동 조계에 있는 홍커우 공원에서는 일본군의 전승행사가 열렸다그리고 그 전승행사에선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을 비롯해시께미스 마모루 등을 포함한 7명의 일본측 대표들이 누군가가 투하한 폭탄에 의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끄는 백범 김구가 계획했던 윤봉길 의거였다비록 상하이 전투에서 장제스는 패배한 입장이었지만윤봉길의 폭탄 투척 사건을 듣고이에 감동을 받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대대적으로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상해사변 승전 기념식에서 터진 폭탄, 이 폭탄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인 윤봉길이 던진 것이었다.)


(윤봉길,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물통 폭탄을 던진 윤봉길은 이후 체포되어 처형된다. 이것은 임시정부 주석이던 백범 김구가 계획했던 일이었고, 이 일을 계기로 임정은 장제스의 지원을 받게 된다.)


(윤봉길의 유서)

 

상하이 사변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일본은 1932년 3월 1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내세워 이른바 만주국이라는 꼭두각시 국가를 만들었다따라서 일본은 본인들이 목표했던 것을 만주사변과 상하이 사변을 통해 성공적으로 이루어 냈다상하이 사변 당시 일본은 국제적인 반대에 시달렸는데이에 아랑곳 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그리고 1933년 3월 27일에는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기에 이른다같은 해 지구 반대편에서는 또 다른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독일에선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거기다 히틀러의 파시즘적 형제인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미 정권을 장악한 상태였다세계 경제 대공황과 일본의 만주 침략과 시작된 1930년대는 암흑의 터널을 통해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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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1-02-21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주국에 대하 쓰신 글을 보니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푸이가 떠오르네요^^

NamGiKim 2021-02-21 14:41   좋아요 0 | URL
푸이를 보살펴주던 중국 공산당 출신의 인물이 있었죠. 나중에 문혁으로 죽게 되지만ㅠㅡㅠ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이 말은 1848년에 출간된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에 나오는 내용이다. 당시 나온 공산당 선언은 전 세계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고, 특히나 사회운동과 식민지 해방 투쟁 그리고 19세기와 20세기 역사에 미친 여파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당시 이 책을 쓴 사람은 독일인으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카를 마르크스는 19세기에 태어난 사람이지만, 그의 저서들은 특히나 20세기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또한 21세기에도 그의 사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남아있다. 따라서 오늘은 공산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카를 마르크스의 생애를 얘기해볼까 한다.

 

카를 마르크스는 181855일 독일 트리어에서 태어났다. 마르크스의 부친은 트리어 고등법원의 수석 변호사였고, 모친은 전형적인 현모양처였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사실상 빈약하다. 183012살이 된 마르크스는 트리어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거기서 라틴어에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언어적 재능은 후에 그의 능통한 다개국어 실력에서도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1835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마르크스는 우수한 성적을 바탕으로 본 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대학 초기 사치와 술에 빠져 살았었고, 1년 뒤인 183610월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 학업을 계속했다. 베를린 대학으로 편입한 마르크스는 전공을 철학으로 바꿨고, 이것은 마르크스 인생에 있어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통일되지 못한 독일에선 지식인들에게 헤겔 철학이 인기를 끌었고, 마르크스 또한 헤겔 철학에 심취하여 청년헤겔파(Young Hegelians)에 가입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헤겔 철학에 막대한 영향을 받았는데 그것이 바로 변증법(辨證法, dialectic)’이었다. 철학적 명제인 변증법은 이후 마르크스 철학에 있어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필수적인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청년헤겔파에서 활동했을 당시 마르크스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끌었고, 1841년 우수한 성적으로 베를린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한 23살의 마르크스는 대학시절의 급진주의적 성향을 되살려 반정부 성향의 신문사인 라인신문(Rheinische Zeitung)’에서 일했다. 여기서 날카로운 문체와 독창적인 견해가 돋보여 많은 독자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그 결과 마르크스는 184210월 신문사의 주주들에 의해 편집장 자리에 올랐다. 편집장 자리에 오른 마르크스는 다른 문제에 보다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19세기 산업혁명 당시 도시에 나타나던 민중들의 삶이었다. 이 시기부터 마르크스는 민중의 힘겨운 삶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며, 관련 글들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라인신문의 판매량은 800부에서 3,400부로 급증했다.

 

마르크스가 편집장으로 있는 라인신문의 영향력이 프로이센 사회 전체로 확대되어 가자, 1843년 정부는 신문사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1843119일 프로이센 내각은 사회의 물의를 일으키는라인신문을 폐간하기로 의결하고 두 달 뒤인 317일에 폐간시켜 버렸다. 몇 달 후 마르크스는 유럽 노동 운동의 중심인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고, 이곳에서 그 유명한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라는 글을 발표했다. 마르크스는 이 글에서 노동 계급을 통해 착취의 제도를 뒤엎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자는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여기서 마르크스는 평생 동지 한명을 만나는데 그가 바로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물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예전에 마르크스가 라인신문에서 일할 때 만난 적이 있었지만, 혁명 동지로써 발전하게 된 것은 이 시기부터였다. 두 번째 만남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혁명 동지로써 함께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파리 노동자 집회에 참석하고, 파리에 머무는 노동운동가를 직접 만나기도 했었다. 또한 그러한 과정 속에서 그들은 같이 신성 가족(The Holy Family)’를 함께 집필했다. 1845년 프로이센 정부의 압력을 받은 프랑스 정부는 마르크스를 프랑스에서 추방했고, 그해 23일 마르크스는 프랑스를 떠나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로 갔다.

 

당시 마르크스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혁명 동지인 엥겔스의 재정적 후원을 아낌없이 해줬다. 이것은 엥겔스가 부르주아의 아들 즉 현재 기준으로 대재벌의 아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경제적으로 힘들던 마르크스를 돕기 위해 엥겔스는 몸소 직접 브뤼셀로 와서 마르크스를 도와줬다. 이러던 과정속에서 그들은 또 다른 저서를 집필했고, 이것은 두 번째 공동저서였다. 그것이 바로 독일 이데올로기(The German Ideology)’였다.

 

1847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국제 노동 조직인 정의자 동맹에 가입했다. 정의자 동맹은 두 사람의 제의로 이름을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바꿨으며,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여, 다 함께 일어나라.”라는 새로운 구호를 내세우기에 이르렀다. 184711월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 동맹이 영국에서 개최한 제2차 대표대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18482월 제2차 대표대회에서 했던 얘기들이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그 책이 바로 그 유명한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집필한 위대한 저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1848년은 안타깝게도 프랑스 혁명이 실패하는 좌절의 해이기도 했다.

 

또한 그 이후의 마르크스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무엇보다 경제적인 부분에서 순탄치 않았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엥겔스의 도움에 매우 의존했다. 1848년부터 대략 10여년간 엥겔스는 마르크스에게 당시 기준으로 모두 3,000 파운드를 보내 주었다. 물론 마르크스가 엥겔스에게 도를 넘는 행위를 한 적도 있었다. 계속되는 재정 지원에서 그는 엥겔스의 부친상에도 위로보단 재정적인 지원을 대놓고 요구하는 모습을 보여 엥겔스를 매우 화나게 만들었다.

 

1867914일 마르크스는 또 한 번 세계적인 정치·경제·철학을 아우르는 서적을 집필했다. 그 책이 바로 자본론(Das Kapital)’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총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본론은 1867년에 마르크스가 쓴 1권이 있고, 나머지 2권과 3권은 그의 혁명 동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집필을 마쳤다. 물론 마르크스도 2권과 3권을 공동으로 집필했지만, 안타깝게도 집필 도중 사망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마르크스의 건강은 악화되었고, 특히나 아들과 딸까지 세상을 떠나며 그의 상심은 커져만 갔다. 그러던 1883314일 마르크스는 런던 자택에서 외롭게 세상을 떠났다. 향년 64세였다. 사후 마르크스는 런던 하이게이트에 있는 묘에 묻혔다.

 

카를 마르크스는 19세기 역사를 통틀어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한 철학자아자, 경제학자 그리고 사상가였다. 그가 섭렵한 분야는 정치·철학·역사·과학·가정·인종·언어·경제를 아울렀다. 그의 철학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관념론을 뛰어넘는 유물론에 있었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정치경제학적인 측면에서 변증법적으로 분석한 자본론은 현재까지도 자본주의 경제학 분석에 있어 명확한 시각을 제시해주며 고전으로서 계속 읽히고 있다. 모든 역사를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투쟁과 타협 그리고 갈등의 시각으로 해석한 계급투쟁적 시각은 역사학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그 외에도 마르크스는 여러 분야에서 많은 분석을 내놓았다. 쉽게 말해 그 당시 기준으로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했다고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위대한 혁명가이자 사상가였으며, 철학자이자 정치경제학자였다. 사회주의가 과거의 유물 취급받는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도 마르크스의 이름이 많은 이들에게 각인되고, 그의 저서가 계속 읽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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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1-02-13 0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잘 봤습니다! 다음은 엥겔스도 기대하겠습니다..ㅋㅋㅋ

NamGiKim 2021-02-13 01:19   좋아요 1 | URL
잘 보셨다니. 감사합니다. 마르크스 전기를 읽지 않아서 좀 정리하면서 새로 공부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엥겔스도 이 정도 분량으로 나중에 정리해보죠.
 

베트남 전쟁을 반공 이데올로기적으로 보는 이들은 파블로프의 개들이다!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 독립전쟁 혹은 베트남 민족해방전쟁으로 봐야한다. 미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선 베트남 인민들의 전인민적 항쟁말이다. 미제는 제네바 협정에 조인하기가 무섭게 남베트남에 응오딘지엠이라는 미제국의 앞잡이를 세웠고, 총선을 거부하며 독립운동 세력들에게 야수적인 범죄를 저질렀다.

이들에게 있에 독립운동가들은 공산주의자였으며, 처형ㆍ구금ㆍ체포의 대상이었다. 이들은 고문단이라는 이름으로 제국주의 침략 군대를 증강했으며, 네이팜 폭탄 투하와 고엽제 살포 전략촌 건설과 같은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또한 비밀리에 파견된 특수부대들은 북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의 영토에 잠입하여 이른바 침략행위를 일삼았다. 당연히 이런 과정에서 인명피해는 공산주의자 소탕 따위로 미화됐다.

1964년 미제국주의자들과 사이공 괴뢰세력들은 자신들의 침략행위 정당화 하기위해 북베트남의 영해에 침범하여 남베트남의 특수부대를 상륙시켰고, 구축함의 어뢰공격을 조작하였다. 이것이 통킹만 사건이었고, 통킹만 사건은 사전에 미제가 계획한 자작극이었다.

더 나아가 미제는 1965년 2월 플레이쿠에 있는 미군 특수부대 기지가 공격당했다는 구실을 들어 이른바 북폭에 나섰고, 남북베트남 전역을 네이팜 폭탄과 소이탄으로 초토화 시키는 야수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은 히틀러 파시스트도당이 저지른 만행과 맞먹는 수준이었으며, 미제국주의자들의 반인륜적인 전쟁범죄였다. 공격하는 시설들이 거의다 학교, 병원, 요양시설, 고아원, 협동농장, 공장같은 민간시설이었기에, 이것은 계획적인 학살이었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은 침략자 미제에 맞선 호치민의 민족해방전쟁이었으며, 미제가 끌어들린 한국과 오스트레일리아 등은 부도덕한 침략전쟁을 자행했던 것이다. 이러한 본질적인 사실조차 무시하는 이들은 역사공부를 안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오로지 이승만식 친미반공주의가 머리에 박힌 파블로프의 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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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0년에 출간된 소병국 교수의 동남아시아사에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됐습니다최근에 미얀마에서 쿠데타가 일어나고 아웅산 수치의 복권을 통한 민주주의의 열망이 불타오르고 있습니다그런 상황이라 한 번 아웅산 수치의 아버지가 어떠한 인물인지 알아보는 것도 좋겠다는 차원에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19세기 당시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보면 태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들이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식민 지배를 받은 역사다현재 미얀마라고 불리는 버마 또한 19세기 중반부터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이것도 영국령 인도제국으로서 병합 당했으며, 19세기 중후반 영국의 식민지배가 강화되면서 이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이 거세졌다. 1900년대부터 버마에서는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1930년대에 접어들었을 무렵 미국발 경제 대공황으로 인한 영향과 더불어 민족주의 운동이 다소 괴격해지기도 했었다. 1915년 영국령 버마에서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는데그가 바로 아웅산(Aung San)이었다.

(아웅산, 그는 버마의 독립영웅으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최근에 쿠데타로 체포된 아웅산 수치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버마 독립을 위해 영국을 방문했을 당시의 사진이다.)

 

버마 건국의 아버지로 유명한 아웅산은 1932년 양곤대학에 들어가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인물이다그 또한 마르크스주의에 영향을 받았고, 1939년 1월 31일 버마공산당을 창설하여 민족해방활동을 이끌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이 동남아시아에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당시 동남아시아에 있던 독립운동 세력들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해방자로 받아들이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었다.(물론 베트남의 호치민의 경우는 시작부터 항일투쟁을 했지만.) 버마의 독립영웅 아웅산 또한 마찬가지였다그들은 일본의 도움을 받아 BIA라는 독자적인 단체 및 군대를 만들었다.

(BIA 깃발을 흔들고 있는 버마 시민들과 버마군인들, 아웅산을 비롯한 이들은 당시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짓던 일본을 해방자로 맞이했다. 물론 그것은 크나큰 실책이었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그러자 일본의 지원을 받아 독립을 이루고자 했던아웅산과 BIA는 일본의 버마 침공을 도왔다. 1942년 3월 일본은 버마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고그해 7월에는 버마 전역이 일본에게 넘어갔다물론 일본의 지원을 받았던 BIA의 규모는 1942년 3월에는 1만 명이었지만 4개월 뒤에는 2만 3000명에 이르렀다물론 일본 군정은 BIA를 해산하고 아웅산을 총사령관으로 소수 정예인 버마방위군(BDA)를 창설해 감시와 통제에 들어갔다.

 

이와 더불어 일본은 카렌족과 같이 영국 식민지 시절 분할통치로써 이용된 소수민족들을 이용하여 본인들의 통치를 강화했으며버마의 대중종교인 불교의 유물들을 가져가기도 했다또한 일본군의 점령으로 버마인들의 생활이 전반적으로 처참해졌으며, ‘죽음의 철도라 불리는 콰이강 교량 건설과 같은 일들을 저질렀다또한 이 과정에서 항만이나 교통시설 등 대부분의 기반시설이 파괴되어 버마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으며일본은 화폐 개혁을 통해 일본 화폐를 쓰도록 강요하고 이를 어길 시에는 고문을 가하게 했다이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심화됐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태평양 전쟁의 전황은 일본에게 불리해져 갔고, 1942년 일본의 잔인한 점령이 시작되자 아웅산은 이른바 버마 독립을 위한 독립투쟁에 나섰다이 과정에서 아웅산은 일본과 맞서 싸울 연합전선 구축에 노력을 쏟아 부었다그는 버마의 좌파 독립운동 단체인 공산당과 민중혁명당하고 손을 잡았다이렇게 연합한 이들은 1944년 자유와 독립을 위해서는 파시스트 일본을 몰아내야 한다는 강령을 채택했다버마 내 반파시스트기구가 결성된 것이다반파시스트기구는 일본의 패망이 임박하자 아웅산을 국군 총사령관으로 내세웠고일본 파시스트 정권을 완전히 몰아내고자 했다또한 이들은 버마 내에서 무장봉기를 준비했으며, 1945년 3월 27일 대대적인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1942년 수도 양곤에 입성한 버마 독립군, 당시는 일본군에 의해 군대가 사라지기 전이었다.)

 

1945년 5월 3일 영국 인도연합군이 버마의 수도 양공을 탈환했다당시 아웅산이 이끌던 반파시스트기구는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즉각 독립할 것을 기대했다당연하게도 전 지배자인 제국주의 영국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따라서 양측의 전쟁은 불가피한 것으로 기정사실화 되었다당시 영국은 아웅산이 주도하는 반파시스트기구의 후신인 반파시스트인민자유연맹을 해산하려고 했다이런 과정속에서 아웅산은 영국과 담판을 벌여 버마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다.

 

1946년부터 아웅산은 버마의 독립을 논하기 위해 영국과의 협상을 시작했다이러한 영국과의 협상과정에서 이슈가 되었던 것은 독립된 버마가 영국연방에 남는가 하는 문제였다. 1947년초부터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고, 1월 13~27일 아웅산은 영국 수상 클레멘트 애틀리의 초대로 런던에서 독립 회담에 참석했다이 회담의 결과로 다음과 같은 합의 사항이 버마에 발표되었다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버마는 1년 내에 독립을 달성할 것이며독립 버마가 영연방에 남을지는 스스로 결정한다. 1947년 4월 의회 선거를 실시하고 5월에 의회가 개원하며과도기에는 각료회의가 정부 기능을 한다변방의 소수민족들이 새 버마에 합류할지는 스스로 결정한다.”

 

귀국한 이후 아웅산은 1947년 2월 12일부터 버마의 일부 소수민족 지도자들을 만나 협상을 시도했으며이들과의 통합 협상에서 성공을 이끌었다다만 최대 소수민족인 카렌족의 경우는 달랐지만대다수의 소수민족과의 합의를 본 것은 사실이었다선거는 예정대로 치루어졌다아웅산의 조직은 210석 중 204석을 얻어 압승했다이로써 반파시스트인민자유연맹은 정통성을 확보했고새로 구성된 의회에서 헌법을 제정했다또한 영국연방에 가입하지 않고신생 독립 국가를 수립하는 안을 의결했다그러나 버마의 완전한 독립을 앞두던 1947년 7월 19일 그는 각료 회의실에서 암살당했다그의 나의 32세였고아이러니 하게도 해방 이후 좌우합작운동을 이끌었던 여운형이 괴한의 총탄에 암살당한 날이기도 했다.

(현재 버마에 있는 아웅산 동상, 그는 지금까지도 버마에서 독립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1947년 9월 24일 새 정부의 제헌의회가 새 헌법을 채택했고, 10월 17일에는 영국과 협의한 협정서를 바탕으로 작성된 독립 문서에 서명했다아울러 버마-영국 간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고영국은 버마의 부채 4000만 달러를 탕감해주었다. 12월 영국 의회가 독립 문서를 비준했다. 1948년 1월 4일 버마는 드디어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른다하지만 아웅산 암살 뒤 탄생한 독립국가 버마에서는 영국과의 협의과정에서 서방의 지원을 받기 위해 탄압받았던 공산당과 카렌족과 같은 소수민족들이 무장투쟁을 벌이면서 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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