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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을 폭격하고 있는 미공군의 B-29 폭격기)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전개됐던 한국전쟁(Korean War)은 참으로 끔찍하고도 처참한 전쟁이었다남북을 합쳐 수십만의 병사가 사망했고, 3만 6,000명 이상의 미군과 20만 이상의 중국군이 전사했다민간인 사망자는 남한과 북한을 합쳐 최소 150만에 달하며많게는 300만에 달하는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3년간 전개되었던 이 전쟁은 남북한 전역을 초토화시켰고민중들의 삶도 피폐하게 만들었다이 전쟁을 파괴적인 전쟁 그리고 대량살상적인 전쟁으로 변모시킨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미군의 무차별 폭격 때문이었다.

 

한국전쟁 초기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는 북한이 침략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즉각적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했다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은 너무나 즉각적이었는데전쟁 초기부터 미군 전투기와 폭격기가 일부지역을 폭격하기에 이르렀다미공군은 유엔군과 한국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을 당시연합군에게 막강한 화력을 지원했다이는 인천상륙작전에서도 마찬가지였고한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을 하던 시점에서도 마찬가지였다또한 미군의 폭격은 1950년 10월 25일에 참전한 중공군에게도 공포를 안겨주었으며이것은 중공군이 주간보다는 야간에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인민군과 중공군이 반격하여 다시 전쟁이 원점으로 돌아온 시점에도 미공군의 폭격은 끊이지 않았다폭격은 1951년 휴전회담이 시작되는 시점에도 지속됐고사실상 휴전협정이 체결되는 시점까지 지속됐다심지어 북한지역 뿐만 아니라 심양이나 단동과 같은 중국 영토에도 미공군의 폭격이 있었다쉽게 말해 전쟁 당시 북한은 미공군의 폭격을 3년 동안이나 경험했다고 할 수 있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북한 지역)

 

폭격은 참으로 끔찍했다이 분야를 깊게 연구한 김태우 교수의 저서 <폭격>에 따르면 당시 미공군은 평양원산흥남함흥청진나진성진 등의 대도시들을 주로 폭격했다그 이유는 적의 병력과 물자가 전선으로 못 가도록 적 후방의 교통중심지와 도로 및 철도 그리고 병력 이동로 및 숙소 등에 폭격 전쟁 수행의지를 꺾기 위함이었다쉽게 말해 전략폭격을 한 것이다물론 이것은 말이 전략폭격이었다. 1950년 7월 6일과 13일에 있었던 원산폭격은 그 피해는 민간인 거주지역으로 대량 확산된 양상을 보였다. 7월 13일에 있던 폭격으로만 원산에서 1,249명의 민간인이 희생됐고그 가운데 195명은 여성이었고, 125명은 어린이였으며, 122명은 노인이었다미군의 폭격을 초기에 받았던 항구도시 원산은 1953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폭격에 시달렸다.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을 대량으로 학살했던 미군의 폭격은 북한 북부지역에 있는 신의주에서도 발생했다중공군이 전쟁에 참가한지 2주정도가 되던 1950년 11월 8일 미공군은 신의주를 폭격했었다당시 미군 소속 항공기 100대가 신의주를 집중 폭격했다이 폭격은 신의주를 향한 최초의 공중폭격이었는데당일 폭격으로 총 3017호에 달하는 공공건물들 가운데 2,100호가 파괴됐다또한 1만 1,000호 이상의 일반 주택들 가운데 680호가 파괴되었다. 11월 8일에 있던 폭격으로 최소 5,000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사망했고그중 4,000명 이상이 여성과 어린이들이었다최근에 출판된 김태우 교수의 <냉전의 마녀들>에는 북한지역을 조사했던 국제여맹의 대화를 담고 있는데그 내용을 인용하겠다.

 

“ “전쟁 전에는 어디에 사셨죠?” 누군가가 물었다.

 

이 부근에 살았어요.” 그녀는 흑갈색의 빈 공터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방 세개의 제대로 된 집이었는데모두 불타버렸어요그 안에 있는 것들까지 모두” 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우리는 운이 좋아요.”

 

운이 좋다고요?” 누군가 큰 소리로 물었다그녀는 미소를 지었다심중을 알 수 없는 깊은 눈에 따스함이 서렸다. “남편과 아이들이 모주 온전하잖아요화재를 피해 달아날 때 비행기들이 기총소사를 했어요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었죠하지만 우리는 운이 좋았어요정말 행운이었죠.”

 

이 여성 외에도 많은 신의주 시민들이 소이탄 폭격으로 당시의 저공 기총소사(strafing)에 대해 증언했다조사위원들은 이 기총소사로 인해 신의주 시내 전반이 더욱 철저하게 불타버린 것으로 파악했다.”

 

출처냉전의 마녀들 p.151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에 따르면 미공군은 1950년 6월 29일부터 휴전 발효 1분 전까지 끊임없이 폭격을 했는데이 전쟁 기간에 이북 지역에 투하된 폭탄은 총 47만 6천 톤이라고 한다브루스 커밍스가 쓴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에 따르면 미공군은 전쟁기간 동안 총 63만 5,000톤의 폭탄을 투하했는데여기에 추가적으로 3만 2,557톤의 네이팜 폭탄도 추가되어 총 66만 5,000톤에 달하는 폭탄을 한국전쟁에서 투하했다태평양 전쟁 당시 미공군의 폭격으로 일본의 60개 도시가 43% 수준으로 파괴되었던 반면 북한의 도시와 마을의 파괴 정도는 40~90%까지로 추산된다고 한다.

(마을 지역에 투하된 네이팜 폭탄)

 

1952년 당시 매슈 리지웨이를 이어 유엔군 사령관이 된 마크 클라크는 그해 6월부터 북한에 대한 맹렬한 폭격을 게시했다이때 북한의 수풍댐이 연속공격을 받아 북한은 전력의 90%를 잃었고, 7월에는 평양공습이 하루에 1,254회에 달했다고 한다당시 북한의 평양 방송은 7,000명이라고 보도했었다미공군의 이 공습은 효과적인 폭격 성과를 만들기 위해 중국 국경도 침범했었으며항공모함 4척과 500대 이상의 항공기가 동원됐다당시 파괴된 수풍댐에는 900톤에 달하는 폭탄이 투하됐다.

 

한국전쟁 당시 미공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총 100만 명에 달하는 북한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이것보다 더 많이 전사자를 추정하는 통계도 있다이런 3년간의 폭격으로 북한의 도시들은 말 그대로 초토화 됐다또한 민간인 사망자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으며미공군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공습에 사용한 폭탄보다 3배나 많은 양의 폭탄을 북한 폭격에 사용했다미공군의 폭격으로 북한의 22개 주요 도시 중에서 18개의 도시는 초소한 50%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미공군의 폭격을 지휘했던 커티스 르메이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었다.

 

우리는 남한과 북한 양쪽에서 도시란 도시는 거의 다 불태워버렸어요.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들을 죽였고 700만 명 이상을 고향에서 내몰아서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더 많은 비극이 일어나게 된 거죠.

 

출처폭력적인 미국의 세기 p.73~74

(가족을 잃고 애타게 울고 있는 북한 여성)

 

이처럼 북한을 향한 미공군의 폭격은 참으로 무자비하고 잔혹했다그러나 여기서 절대로 잊어선 안 되는 사실이 있다그것은 바로 이런 미공군의 폭격이 단순히 북한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서울수복 이후 대한민국 공보처 통계국이 작성한 자료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부터 9월 28일까지 서울의 지역별 사망자와 부상자 수를 공중폭격과 총포격 등 원인별로 조사한 결과공중폭격이 4,250명이 나왔다서울 용산에서만 미군의 폭격으로 1,587명이 사망했고, 7월 16일의 경우 미군의 B-29 폭격기 47대가 225kg짜리 파괴폭탄 1,504발을 철도공장과 차량철로 등에 투하했다고 한다그 외에도 미공군의 폭격은 지리산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도 빈번히 발생했고당연히 이런 초토화 작전 과정에서 있던 폭격으로 인근 지역 민간인 피해자들도 속출했었다안재성 작가가 쓴 <이현상 평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김태우 교수의 신간 <냉전의 마녀들>)

 

재귀열은 남부군뿐 아니라 한반도 곳곳에서 막대한 인명을 앗아가고 있었다미국산 세균은 북한 지역에도 대대적으로 살포되어 중공군은 물론지료약을 구할 수 없는 수많은 민간인들이 죽어갔다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전남지역에서도 많은 민간인이 죽었다 한반도를 신무기 시험장으로 삼은 미국은 소형 핵탄두나 다름없는 네이팜탄과 세균무기를 마음껏 사용하고 있었다.

 

출처이현상 평전 p.386

 

이처럼 한국전쟁 당시 미공군의 폭격은 남한과 북한을 가리지 않고 일어났다고 할 수 있으며전쟁에서 무수히 많은 민간인 피해와 살상을 야기했다따라서 한국전쟁에서 미공군의 무차별 폭격이라는 주제는 절대로 제외할 수 없으며한국전쟁을 제대로 알기 위해선 반드시 알아야할 주제이다.

 

참고문헌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김성보 기광서웅진지식하우스, 2004

 

이현상 평전안재성실천문학사, 2007

 

폭격김태우창비, 2013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와다 하루끼(), 남기정(), 창비, 2014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브루스 커밍스(), 조행복(), 현실문화, 2017


『폭력적인 미국의 세기』, 존 다우어(저), 정소영(역), 창비, 2018

 

냉전의 마녀들김태우창비, 202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김동원 안광획 이정훈(공저), 4.27시대,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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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1-08-25 2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근 본 KBS다큐영상에서도 인천상륙작전 직전에 일본에서 제조한 네이팜탄으로 월미도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영상을 봤습니다. 브루스 커밍스의 책은 읽지 못했지만 이런 내용이 있다니 놀랍네요.
 

알라딘 친구 여러분! 드디어 제가 책 한권 출판하게 됐습니다. 널리 알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http://mlkorea.org/v3/?p=10681

 

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출간 예정

 

김남기 저 | 어깨걸고 | 전국노동자정치협회 발행

 

오늘날 반공주의는 곧 숭미주의와 연결됩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에 만연한 반공주의는 미국을 아름다운 국가, 착한 제국, 정의의 사도 쯤으로 인식하여 미국을 우상 숭배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책은 콜럼버스의 미국 상륙과 원주민 학살에서부터 남미·아시아·아프리카 침략, 이라크·리비아·아프가니스탄 침공 등 미국이 전 세계 침략자, 학살자라는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곧 출간 예정인 이 책 출간을 위해 사전 후원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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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1-08-23 1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NamGiKim 2021-08-23 10:4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널리 알려주시길.ㅎㅎㅎㅎㅎㅎㅎㅎ

겨울호랑이 2021-08-23 1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NamGiKim 2021-08-23 14:1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널리 알려주세요.^^ ㅎㅎㅎㅎㅎㅎ

초란공 2021-08-23 14: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NamGiKim 2021-08-24 11:25   좋아요 1 | URL
지금 확인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널리 알려주시길.ㅎㅎㅎㅎㅎㅎ
 

(이 글은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업적을 요약한 글입니다.)

 

소련의 지도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은 서방 사회에서 가장 많은 비판 내지는 비난을 받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서방의 주류학계를 포함하여 스탈린에 대한 대부분의 시각은 잔혹한 독재자 혹은 학살자라는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당장 유튜브에 가서 스탈린만 검색하더라도 숙청’, ‘학살과 같은 수식어가 항상 붙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스탈린에 대해 심층적으로 이해한 것이라기보다는 서방의 전통주의적인 시각이 투영된 느낌이 강하다. 스탈린이라는 인물은 단순히 그런 것으로만은 해석하기에는 복잡한 인물이며, 단순히 악인으로만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서방이나 국내에서 내리는 평가와는 달리, 스탈린이 통치했던 러시아나 과거 구소련 연방에서 내리는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인 것 보다는 긍정적인 시각이 제법 적지 않다. 물론 1932년에서 1933년에 대기근을 겪었던 우크라이나나 1940년 소련 영토로 편입되었던 발트3국의 경우는 다르지만, 대체로 그가 부정할 수 없는 공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업적은 무엇일까? 나는 스탈린의 업적으로 크게 3가지를 보고 있다.

 

1. 공업화의 성공

 

러시아 현대사를 보면, 러시아는 19세기부터 산업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서구 유럽국가들에 비해 많이 낙후된 국가였다. 1905년 러일전쟁과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러시아 제국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흔들렸는데, 이것은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졌다. 1차 세계대전으로 경제상황이 열악했던 레닌의 혁명 정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을 받았고 적백내전을 치러야 했다. 그 결과 혁명 러시아 정부는 소비에트 연방 즉 소련을 탄생시켰지만, 경제적으로 상황이 더 안 좋아졌다. 이에 따라 1921년부터는 네프(NEP)라 하는 신경제정책을 실행하여 경제상황을 일정부분 회복했으나. 공업화라는 과제가 남아있었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한 이후 볼셰비키에게는 공업화라는 과제가 남았고 이 과제를 실행한 사람이 바로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1929년부터 제1차 경제개발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소련의 경제를 회복시키고 빠른 속도로 건설했다. 이 과정에서 무상의료와 무상복지와 같은 노동자 위주의 정책도 실행되었으며, 이는 서구 사회에도 영향을 주었다. 당시 스탈린의 소련은 1929년 미국발 경제 대공황 속에서도 생산력이 상승하고 경제가 발전했으며, 일부 미국인들이 소련에 와서 취업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공업화 시기 소련의 경제지표는 자신들 기준으로 연 20%이상의 성장률을 보였는데, 서방의 통계로도 연 14~15%의 성장률이었다. 그 과정에서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일부지역에서 대기근이 발생했는데, 사실 이것은 의도적인 학살이 아닌 자연재해에 가까운 참사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공업화 도중에 단행된 집산화는 이후 소련 경제의 높은 식량생산률과 농업생산률의 근간이 됐다. 확실한 건, 이 공업화를 통해 소련은 1930년대 당시 경제 규모로만 세계 2위였으며. 이런 과정속에서 무상의료 무상복지, 사적소유 철폐와 같은 진보적인 성과물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다.

 

2. 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

 

공업화가 진행되는 와중에 스탈린은 군의 현대화도 추진했다. 이를 통해 소련은 탱크와 장갑차 중심의 기계화된 대규모 병력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소련이 미국과 군사적으로 경쟁할 수 있던 토대가 되었다. 물론 1936년 스페인 내전이나 1938년 노몬한 전투에서는 큰 효력을 못 보았고, 1939년 이른바 겨울전쟁에서도 붉은 군대는 열악한 측면이 있었다. 1941년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을 당시에도 소련군은 초기에 후퇴를 거듭했고, 수십만의 병사가 독일군의 포로로 붙잡히는 신세이기도 했다.

 

초기 전화에서 소련군이 밀렸지만, 스탈린은 1941년 모스크바 전투와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3년 쿠르스크 전투 등에서 독일군을 패퇴시키는데 큰 공로를 세웠다. 무엇보다 그의 연설과 노력을 통해 수많은 소련민중이 조국을 방위하겠다는 일념으로 파시즘에 맞서 싸웠고, 그는 주코프나 바실렙스키 등과 같은 인물들과 잘 타협하여 이들이 군사적 지휘를 잘 할 수 있도록 지도력을 보였다.

 

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은 2,700만이라는 엄청난 희생을 치렀지만, 이 참혹한 전쟁을 끝내고 소련을 승리로 이끌었던 지도자는 바로 스탈린이었다. 물론 수많은 인민의 희생이 있었지만, 영국의 역사학자 제프리 로버츠(Geoffrey Roberts) 교수의 주장처럼 스탈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유능했던 전시 지도자였다. 스탈린의 군대는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를 시작으로 바그라티온 작전과 동유럽 해방 그리고 베를린 전투까지 승리에 승리를 거듭했고, 이것은 19458월 만주진격 작전에서 불과 1주일 만에 만주와 중국 일부, 사할린, 한반도 북부를 해방시키는 혁혁한 군사적 성과를 만들어 냈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3. 냉전시기 국제적인 사회주의 세력의 상징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간의 냉전은 내전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는데, 스탈린은 당시 사회주의권에서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일각에서는 소련이 당시 혁명을 지원하지 않았던 것처럼 얘기하지만, 지원을 아예 안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이 개입한 그리스 내전만 하더라도 지원이 많지는 않았지만, 소련은 불가리아 국경을 통해서 물자를 지원했고, 중국 국공내전에서도 마오쩌둥의 홍군에게 지원했다. 1950년 일어난 한국전쟁의 경우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적잖은 무기와 물자를 지원받았다.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고 있던 베트남의 호치민 정부의 경우 크게 지원을 받지는 못했으나, 1950년에 들어서 소련으로부터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받았고, 그 시점부터 중국을 통해서 소련의 물자지원도 크지는 않지만 분명히 있었다. 당시 적잖은 사회주의 세력들이 소련에서 혁명과 공업화가 성공한 것을 보고,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맞서는 투쟁을 전개했다. 중국이나 북한 베트남 그 외의 라틴아메리카의 좌파세력들이 그러했다. 1970년 국민투표로 정권을 잡은 칠레의 아옌데만 하더라도, 1953년 스탈린이 죽었을 당시, “스탈린은 인류의 진보와 휴머니즘을 위해 투쟁한 상징이라고 극찬했을 정도였다.

 

일각에서는 냉전시기 소련이 동유럽 국가를 위성국화 했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 할지라도, 동유럽 국가의 사회주의 체제 건설은 단순히 소련의 영향 때문만은 아니었으며, 소련이 그 국가들에 군대를 주둔시켰던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시즘과의 투쟁에서 얻은 전유물이라는 개념으로 봐야 한다. 동유럽에 있던 좌파세력들이 소련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자체적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려 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고, 이들이 행동한 이유에는 스탈린이 건설한 소련 사회의 진보적 가치의 영향력도 있었다는 사실도 잊어선 안 된다.

 

그리고 이런 과정속에서 소련은 빠르게 전후재건에 나서서 1947년에는 배급제를 영국보다 7년이나 앞서서 폐지했고, 제국주의 국가 미국과 경쟁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지금까지 스탈린의 업적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보았다. 나는 이러한 점이 스탈린의 가장 큰 업적 세 가지라고 생각하며, 이러한 이유에서 스탈린이 분명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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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 4 17일 캄보디아는 폴포트(Pol Pot)가 지휘하는 크메르 루주(Khmer Rouge)에 의해 통일됐다베트남에서 통일되기 2주전의 일이었다캄보디아에서 폴포트가 정권을 잡은 이후크메르 루주는 캄보디아의 도시를 없애고 원시적인 사회를 창조하는 계획을 시행했는데이것이 바로 킬링필드(Killing Field)였다당시 폴포트는 킬링필드로 거의 100만 가까이 되는 캄보디아인을 학살했는데이 학살은 이후 250만에서 300만을 죽인 것으로 다소 과장되기도 했다문제는 크메르 루주의 정책에 있었으며최소 80만 명에서 많게는 150만 명을 죽인 이 학살은 1978년 베트남 정규 군대가 캄보디아로 진입하며 친베트남 정권을 세우면서 막을 내렸다.

(론놀의 사진)

 

킬링필드는 이후 영화로도 만들어져, 1980년대 전두환 정권 시기 다소 반공주의적인 요소로 한국 사회에서 이용되기도 했었다그런 이유가 어찌됐든 폴포트의 사회적인 조치는 킬링필드라는 학살을 불러왔고이는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도 강한 비판을 받았다폴포트와 크메르 루주는 소름끼치는 학살을 4년 동안 했다특히 S-21로 알려진 뚜옹슬랑 같은 감옥에서는 소름끼치는 행위들이 자행됐다이랬기에 대다수의 캄보디아인은 폴포트에 대한 강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다반공주의자들의 경우 폴포트가 학살을 자행한 것에 대해선 강한 비판을 하지만정작 폴포트가 어떻게 정권을 잡았는지에 대해선 관심조차 없다따라서 오늘은 폴포트가 정권을 잡게 된 캄보디아 현대사의 배경인 론놀의 친미 쿠데타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캄보디아에서 나온 론놀 스템프)

 

1960년대 동남아시아는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Vietnam War)으로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캄보디아의 지도자가 된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는 냉전 초기 이승만과 같은 강력한 반공주의 정책을 유지했었고이는 캄보디아 사회주의 운동이 정부로부터 탄압받았던 결정적인 이유였다당시 탄압 받았던 이들 중에는 프랑스 유학파 출신인 살롯사르 즉 폴포트도 존재했다. 1950년대 당시 강력한 반공주의 정책을 유지했던 시아누크는 1960년대 들어 노선을 전환했는데그것은 바로 제3세계(The Third World) 노선이었다이 과정에서 시아누크는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과도 좋은 관계를 형성했을 정도였다.

(캄보디아 침공을 주장하는 미국의 닉슨 대통령)

 

1960년 남베트남에서 자생적으로 베트콩이 창설되면서북베트남의 호치민 정부는 이들에게 물자지원에 나섰는데이들의 호치민 루트 즉 호치민 트레일은 라오스와 캄보디아에도 연결이 되었었다당시 시아누크는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캄보디아에 비밀리에 주둔하는 것을 허용했는데이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이 캄보디아 인근 지역까지 군사작전을 전개하는 계기를 제공했다그리고 이런 과정 속에서 캄보디아 사회주의자들이 세력을 넓혀 나갔다이렇게 되자 1960년대 후반 크메르 루주는 캄보디아의 여러 지방을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침공 당시 미국이 캄보디아를 폭격한 지역과 범위)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당시 시아누크는 제3세계 노선을 걸으며캄보디아 내의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의 주둔을 암묵적으로 허용했다. 1968년 구정 공세 이후 등장한 미국의 닉슨 정부는 베트남에서의 철군을 주장하면서베트콩에 대한 소탕을 강화했다이런 과정에서 미국의 닉슨 정부는 캄보디아 내의 친미 쿠테타와 침공을 준비했다당시 캄보디아의 우익 세력들은 국회를 장악했고, 1970년 3월 미국의 지원을 받아 론 놀(Ron Nol)의 지원 아래 시아누크 체제를 전복하고 이른바 친미성향의 크메르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로부터 2개월 뒤 미국의 닉슨 정부는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동원하여 캄보디아를 침공했다이 과정에서 캄보디아 정부군은 3만 5,000명의 규모에서 3년 만에 20만 명으로 증가했지만미군 B-52의 폭격은 캄보디아를 초토화 시켰다미국은 1969년부터 1973년까지 캄보디아를 폭격했는데이 과정에서 최소 50만의 민간인이 죽었다이것이 바로 제1차 킬링필드였다이렇게 되자 캄보디아 민중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론 놀 정권을 증오하게 됐고역으로 크메르 루주와 사아누크를 의장 겸 국가원수로 추대한 FUNK(캄푸치아민족연합왕실정부)를 지원했다.

(폴포트)

 

이렇게 되자 론 놀 정권은 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크메르 루주와의 전쟁에서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이 과정에서 크메르 루주에 대한 지지는 확산됐고결국 1975년 4월 1일 지도자 론 놀은 인도네시아를 통해 미국으로 망명했고그로부터 2주 뒤인 4월 17일 크메르 루주가 프놈펜을 장악하면서 캄보디아 내전은 폴포트의 승리로 끝났다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75년 폴포트가 정권을 장악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에는 미국의 친미 쿠데타와 침공 그리고 무차별 융단 폭격이 자리잡고 있다이러한 점에서 폴포트는 미국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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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의 학살을 요약한 것입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저지른 학살은 그 규모나 범위 면에서 상상을 초월했다워싱턴DC에 가면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한 58,000명의 미군 전사자 이름이 적힌 비석을 볼 수가 있지만당시 베트남 민중이 치러야 했던 희생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수준이었다. 1995년 베트남측의 추정에 따르면 이 전쟁에서 총 500만이 죽었는데, 100만 명이 군인이고 400만 명이 민간인이었다확실하게 조사된 것은 없지만이 전쟁을 계획했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는 380만 명의 베트남인이 죽었다고 주장했으며베트남 전쟁의 미국의 명백한 실수 및 과오였음을 인정했다대다수의 추정으로는 대략 남북베트남 민간인이 200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움직이는 것은 모든 쏴죽여라, 닉 터스가 쓴 저서다.)

 

이 전쟁에서 최소 200만에서 500만에 달하는 베트남인이 희생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이러한 학살극의 중심에는 바로 미국이 있었다특히나 B-52를 포함한 최신식 무기를 동원한 무차별 폭격과 고엽제 살포 그리고 수색과 섬멸 작전에서의 민간인 사살 등으로 상당히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특히나 베트콩만 하더라도 농민군에 가까운 존재였기에 미국은 사실상 민간인과 군인이 구분되지 않는 상황에서 전쟁을 치렀다미국의 민간인 학살의 대표적인 예시로는 1970년 닉슨의 캄보디아 침공이 있는데이 캄보디아에서만 50만에서 80만의 민간인이 미국의 융단폭격과 고엽제 투하로 학살당했다.

(베트남 미국의 홀로코스트,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주연으로 출연한 마틴 쉰이 제작한 다큐멘터리다.)

 

미국은 수년간 북베트남과 호치민루트베트남 중부고원지대를 포함한 남베트남 전역을 무차별 폭격했는데통계의 출처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중부고원지대에서의 폭격으로 산악부족들을 포함하여 최소 2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정확한 통계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켄 번즈(Ken Burns)가 제작한 PBS 베트남 전쟁 시리즈 5화를 보면흑인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이 연설을 하는 장면에선 반전 시위대의 피켓에 베트남 어린이 100만 명 부상 25만 명 사망이라고 나와있다북베트남과 남베트남에서의 대량 폭격에 의한 학살로 죽은 민간인은 최소 200만이 넘는다 할 수 있으며바로 베트남 전쟁의 잔학성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미군의 융단폭격, 미국의 폭격은 무수히 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만들었다.)

 

미군 폭격에 의한 학살로 최소 100만에서 200만 그리고 300만에 달하는 민간인이 죽었다고 할 수 있는데고엽제에 의한 학살도 만만치 않았다미국은 케네디 행정부때부터 디엠정부의 베트콩 소탕작전을 지원하면서 네이팜탄과 고엽제 살포를 실행했다. 1961년부터 1971년까지 대략 10년간 남베트남과 호치민 루트라오스캄보디아에 대량의 고엽제가 투하되었다총 7300만 리터의 맹독성 고엽제가 투하됐다주로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라는 고엽제였는데베트남 인민 1인당 2.7kg 달하는 다이옥신을 퍼부은 셈이다고엽제 투하로 최소 50만 명이 사망했으며, 400만 명이 넘는 베트남 민간인이 극심한 피해를 봤다.

(베트남 밀림에 살포되고 있는 고엽제, 미국은 남베트남 전역을 고엽제로 색칠하여 무수히 많은 민간인에게 피해를 줬다.)

 

미국의 학살은 군사작전 과정에서도 벌어졌다일각에서는 1968년에 윌리엄 캘리 중위(William Calley)가 저지른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이 미군 개인의 일탈이나 유일한 학살이라 주장하는데이는 사실이 아니다미라이 학살은 엄밀히 4시간 동안 꽝응아이성에 있는 손미마을과 미케 마을에서 30명의 미군에 의해 벌어진 학살이었고군에 의애 철저히 베트콩 사살로 은폐 당했던 사건이다미라이 학살로 총 504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는데이중 1/10은 영유아였고대다수는 노인여자아이들이었다또한 적잖은 여성들이 학살 전에 미군에게 강간당했다이런 학살은 사실 브루스 커밍스가 한국전쟁 책 관련 인터뷰에서 주장했듯이베트남 전역에서 발생한 일이었다심지어 당시 주월미군 총사령관이던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William Westmoreland) 또한 민간인도 베트콩으로 간주하는 전략을 추구했었다.

(1968년 미라이 학살 관련 사진, 미군은 미라이에서 총 504명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런 학살은 베트남 전쟁 당시 전반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미국의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인 닉 터스(Nick Turse)는 2013년에 출간한 자신의 책 Kill Anything That Moves: The Real American War in Vietnam이라는 책에서 미라이 학살 사건 외에도 최소 100건 혹은 그 이상의 학살 사건이 있었다고 주장했다친미성향의 역사학자이자 한때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을 지지했던 권터 루이(Guenter Lewy)는 자신의 책 America in Vietnam에서 미군의 바디 카운트(Body Count)로 최소 22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측했다또한 미군의 수색 작전 중 하나인 초고속 작전(Operation Speedy Express)에서는 15,000명의 베트콩을 사살한 것으로 간주되었는데이 중 7,000명에서 10,000명 가까이가 민간인이었다쉽게 말해 이런 민간인 살상은 미군이 동원한 헬기 사격과 폭격자유사격지대에서의 기관총 및 소총사격에 의해 발생했다.

 

지금까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언급했다많은 사람들이 다소 외면하는 사실인데엄밀히 따졌을 때 미국이 전쟁에서 적으로 규정한 베트콩은 1960년 대다수의 민간인들이 응오딘지엠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결성한 단체였다로빈 윌리엄스(Robin Williams)가 주연을 맡은 영화 <굿모닝 베트남(Good Morning Vietnam)>에서는 루이스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의 ‘What a Wonderful World’가 나오며미국이 수렁에 빠진 모습을 보여준다이 장면 중 하나에는 미군 혹은 남베트남군으로 추정되는 군인이 베트콩으로 추정되는 민간인을 체포하여 재판도 없이 총살하는 것으로 나온다실제로 남베트남 내부에서 이러한 일은 자주 일어났었다그 외에도 고문 및 강제구금과 같은 여러 범죄행위들이 일어났다이것은 미국과 그의 하수인인 남베트남 정부에 의해 일어났다따라서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일방적인 학살극이라 봐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

 

미국대외정책론촘스키임채정일월서각, 1985

 

America in Vietnam, Guenter Lewy, Oxford University Press, 1978

 

Kill Anything That Moves: The Real American War in Vietnam, Nick Turse, Picador, 2013

 

Vietnam: American Holocaust(2008, Documentary), Martin Sheen, Linux Beach Productions, 2008

 

The Vietnam War, Ken Burns, PBS,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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