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 3.0 - 김광수 소장이 풀어쓰는 새시대 경제학
김광수 지음 / 더난출판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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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수경제연구소]에서 발간한 <2011 글로벌 리포트>와 <프리라이더>를 읽고 난 후 본격적으로 연구소의 간행물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두 권의 책을 모두 읽으면서 '가진 자의 경제학'이나 '권력의 경제학'이 아닌 '가지지 못한 자의 경제학'과 '변화의 경제학'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지난 2000년 처음 연구소를 설립하고 지금까지 소장을 엮임하고 있는 김광수소장이 지난 2009년에 발간한 것이다. 연구소 설립 이후 여기저기 언론에 실었던 글과 연구소의 경제시평 중에서 자신의 경제학을 독자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특히,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속에는 IMF 이후의 한국경제에 대한 저자의 솔직한 평가와 노무현/이명박 정부의 경제철학과 정책에 대한 진솔한 비판이 담겨있다. 
 
2009년 현재 한국경제의 뿌리깊은 문제점은 무엇인가?
- 정부 관료/정치인의 무능과 무지/도덕적 해이,
- 고용의 불안정성(비정규직이 50% 전후), 
- 차상위 소득이하의 잠재적 빈곤층 증가일로(전체 1,590만 가구 중 30%),
- 첨단미래산업 투자 부진,
- 부동산 버블 붕괴 조짐,
- 임대주택 공급부족으로 전세/임차난,
- IMF 이후 빈부격차 확대,
- GDP 중 비생산적 건설업 비중 과다,
- 무리한 저금리/고환율 정책(수출대기업만 이익),
- 학력과잉 & 공급과잉의 대학
- 검찰/법원의 보수화, 재벌 기득권화
- 한탕주의, 투기주의 극성
- 정치 무관심
 
이승만 독재의 붕괴 이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까지 35년간 이어진 군사독재이자 개발독재 체제가 마감한 이후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와 염원을 안고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태어났다. 하지만, 국민들과 개혁세력을 기반으로 설립한 두 정부는 일부 정치외교부분에서 성과를 이루었지만, 세계경제의 시대의 흐름과 사회문화의 흐름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여 경제부분에서 근본적인 변화와 개혁을 이루어내지 못했고 실책을 거듭했다. 그 과정은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그 결과는 그대로 이승만 이래 한국정치사에서 가장 최악의 정권인 이명박 정부의 탄생을 가져오게 만들었다.
 
2012년에는 국회의원 총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진행된다. 벌써부터 여기저기서 국회의원 후보로 나서기 위한 분주한 동작들이 보이고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기 위한 암중모색과 권력투쟁이 진행 중이다. 정당 안팎에서는 반이명박, 반한나라당의 선거연합을 바라는 각계각층의 희망을 담아내기 위해 모임과 협의체가 구성되고 있다. 2011년을 전후로 국내외에서 이명박정부의 밀실인사, 회전문인사, 군사정권식 정책과 통치, 언론통제, 일방정치, 소통 불능, 무능 외교, 부정부패의 결과가 동시다발로 터져나오고 있다. 일부 언론과 사람들의 우려처럼 레임덕이 조기에 발생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우울하고 안타깝다. 조기 레임덕이 이명박과 한나라당의 반대 정치가들에게는 환영할만 한 일이겠지만, 국가적인 입장과 중산층/서민들의 입장에서는 혼란스러운 정책집행과 공무원들의 부정부패가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권과 야권 일각에서 2012년 총선과 대선 모두 한나라당이 패배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한 이명박정부였던 만큼 절대적으로 부패할 수 밖에 없어 민심을 잃었기 때문임을 모두가 알고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를 경험해 본 결과 한나라당의 패배가 국민들의 승리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점을 되새겨야 한다.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조직이나 세력이 정권을 교체하게 되면 또 다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측면에서 불확실한 개혁이 진행되다가 중단될 것이고 새로운 정권측에서는 재벌과 보수언론, 부정부패한 검찰과 공무원에게 놀림빵만 당하다가 시간만 보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하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제대로 준비하는 과정이 없는 정권교체는 교체되지 않은 것만 못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그 시작은 지난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가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 엄정하게 평가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두 번의 정권교체에서 진행된 정책의 공과를 구분하여 잘한 부분을 다시 되살리고 잘못한 부분을 미리 대비하는 것이다.
 
이 책은 그동안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특히, 한국경제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분석하고 어떤 방향으로 경제정책이 나가야 할지에 대해...  한국경제에 대해 수 많은 책들이 나와있는 가운데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교훈을 찾아야 할지 깊게 심사숙고하는 데 있어 이 책과 [김광수경제연구소]의 여러 책들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저자의 결론은 장기적으로 현재의 정치경제 주도세력을 과감하게 교체해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은 일회적인 선거로 인한 정권교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철학과 정책을 지닌 세력과 조직을 구성하고 그들이 소통하고 대안을 세우고 정책을 수립하여 중산층/서민과 함께해야 함을 의미한다. 즉, 한나라당 뿐 아니라 기존 야당의 부정부패한 정치/경제인들 역시 물갈이를 해야 한다. 말 뿐이 아니라 진정한 행동으로 사리사욕을 버리고 국민을 위하는 사람들을 모아야 한다. 그 과정을 위해 모두가 해야 할 일은 '참여'하는 것이다. 참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낼 수 없다. 
 
[ 2011년 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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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1-04-06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허술한 서재에 놀러와주셔서 고마워여 ^^

잘 보고 갑니다 ^^
 
홀로 사는 즐거움
법정(法頂) 지음 / 샘터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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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산골에는 / 산울림 영감이 / 바위에 앉아 / 나같이 이나 잡고 / 홀로 살더라." 
 
2003년 서울 길상사와 '맑고 향기롭게' 관련 직책과 업무에서도 모두 떠나고 난 후, 스님은 강원도 오두막에 온전히 칩거한다. 수행자로서의 자신의 삶과 정진에 집중하시면서 우주와 자연의 진리를 거듭 탐색하신 것... 
 
스님은 이 책에서 '홀로 사는 삶'을 중심으로 자신의 생활과 생각을 펼쳐보인다. 특히 홀로 사는 사람은 남은 세월이 다할 때까지 자기 관리에 철저해야 함을 역설하신다. 꽃처럼 피어나는 것이 젊음만은 아니며, 나이를 먹을수록 한결같이 삶을 가꾸고 관리하면서 새롭게 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스님으로서는 이러한 새로움이 생활 뿐 아니라 자신의 말과 글도 마찬가지로 새롭게 나타나야 함을 의미한다.
 
홀로 산다는 것이 스님처럼 수도자나 수행자만의 삶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부부나 형제, 가족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각자 혼자인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스스로가 온전하게 홀로 사는 삶이 가능할 때만이 우리는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순간, 하루의 삶에 최선을 다하면서 매일매일 삶을 돌아고 낡은 생각과 관행에서 벗어나야만이 어제와 다른 오늘, 그리고 오늘과 다른 내일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일본에서는 엄청난 쓰나미로 인해 수 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 십만명이 삶의 터전을 빼앗겼다. 거기에 더하여 원자력발전소가 차례로 문제가 되면서 '체르노빌'의 악몽이 재현되는 상황이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비는 것 말고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일본이 군사 제국주의자로 한반도를 침탈하여 무고한 생명과 자산을 앗아갔고 전후에도 재일 조선인을 차별해 왔다는 사실은 잠시 접어두고 슬픔에 잠겨있는 일본인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와 손길을 내미는 것이 진정한 인간성일 것이다. 그리고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라고 자부해왔음에도 지구의 작은 몸부림에도 그렇게 커다란 상처를 받을 수 밖에 없음을 볼 때,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지금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에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일본에 덮친 쓰나미의 위력과 피해를 보면서 20세기 이후 지구상에서 확대일로에 있는 현대문명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전기문명의 전지구적인 확대와 소비의 확대가 가져온 것이 원자력 발전이고 얼핏 간편하고 효율적으로 보이는 원자력 발전소는 인류에게 잠재적인 원자폭탄인 셈이고 자연의 변동에 무기력할 뿐이다. 더 크고 더 많고 더 빠르고 더 높은 것이 반드시 인류에게 좋은 일만은 아닐 것이다. 아니 후손들까지 고려하여 오랜 기간을 내다볼 때, 더 크고 많고 빠르고 높은 것은 결국 미래의 자원을 현재로 앞당기는 것이고 쓰레기와 비극과 폐해를 미래로 떠넘기는 것이 될 것이다.
 
여러 권 스님의 저서를 읽었는데 이 책은 배움과 깨달음이 다른 책만큼은 되지 않았다. 이런 느낌은 아마도 여러 권의 책에 비슷한 스님의 생활과 생각, 철학과 말씀이 담겨있기 때문에 내가 익숙해서 그럴 수도 있고 거칠고 힘든 사부대중의 삶에서 많이 떨어져 있는 스님의 생활이 못마땅해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스님의 말씀처럼,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진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서로 위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삶이 가치있는 삶이라면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스님이 말하는 홀로 있다는 말의 의미는 외떨어져 혼자 사는 단순한 의미만은 아니다. 홀로 있음의 진정한 의미를 이야기하면서 스님은 명상가 토마스 머튼의 말을 인용한다. 즉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다’는 가르침이다. 인간은 누군가와 같이 있을 때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다. 홀로 있다는 것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순수하며 자유롭고,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서 당당하게 있는 것이다. 결국 홀로 있다는 말은 개체의 사회성을 내포한다. 또한 인간은 본래 전체적인 존재임을 강조하며, 부분이 아닌 전체로서 존재할 때 그의 삶에도 생기와 탄력과 건강함이 생긴다고 알려준다. 결국 홀로 사는 즐거움도 여기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내가 스님처럼 홀로 사는 즐거움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지금은 즐거움보다 고독함과 게으름이 더 많다...^^
 
 <아름다운 마무리>와 <산방한담>,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오두막 편지>, <산에는 꽃이 피네>, <서있는 사람들>, <무소유>, <버리고 떠나기>에 이어 아홉 번째 법정스님의 저서를 읽었다. 이 책은 <오두막 편지> 이후 2004년까지 스님의 삶과 생활, 그리고 생각을 모은 것이다.
 
[ 2011년 3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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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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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경험한 두 가지 상반된 삶의 현장이 있다.
하나. 며칠 전 내가 회원으로 가입해있는 [나눔문화]라는 단체의 총회에 참석했다. 회원으로 가입한 지 얼마되지 않았고 오프라인 모임에도 처음 참석한 것이기에 조용히 사무실에 찾아가서 저녁식사(그 단체에서 진행하는 텃밭의 채소로 만든 반찬이 나왔다)를 대접받고 총회가 진행되었다. 단체가 설립된지 10년이나 되었지만,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지 않고 언론 홍보도 시도하지 않은채 회원들의 회비만으로 운영되는 신선한(?) 시민단체였다. 내가 특별하게 경험한 것은 총회와 총회 후 강연(우희종교수) 후 단체의 연구원 25명(대다수가 20~30대)이 회원들에게 인사하는 자리였다. 단체 사무차장의 소개로 "연구원들의 평균 월급이 104만원"이라고 들었지만, 그 연구원들은 모두가 자연스럽게 웃는 얼굴과 활기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적은 월급에도 불구하고 발랄함과 희망을 가지고 움직이는 모습에서 직업과 노동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읽어낼 수 있었다.
 
둘. 최근 어떤 중소기업에서 그 단체와 비슷한 숫자의 직원들을 상대로 고용재계약을 체결하는 사람에게 전해들은 이야기였다. 최근의 경제위기를 반영하듯이 그 회사는 재작년에 비해 작년에 매출이 급감(손익은 손실상태)하였고 지난 달 구조조정을 하지 않는 대신에 전체 직원에 대한 '연봉동결'을 결정한 상태였다. 직원들은 월급은 최저가 1백몇십만원이고 최고는 3백만원이 넘는다. 평균 월급은 200만원이 조금 넘는다. 면담을 하다보니 직원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급여가 작다고 생각했고 경제상황이 어려워서 이직을 못하고 참고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결국 한 두명은 연봉인상이 좌절된데 항의하여 퇴사하였고 한 명은 고용재계약 체결을 보류) 처음 회사에서 '연봉동결'을 결정하면서 한 두 명에 대한 연봉인상 가능성을 제시하였으나 직원들의 대표자격을 가지고 있던 직원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전원 동결'을 선택했다. '사다리 걷어차기'란 말이 언듯 떠오르는 장면이었다.
 
두 가지 모습에서 나는 상반되는 세계관과 행복감을 느꼈다. 그것은, 최저 생계비에 턱없이 모자라는 월급임에도 인간이란 무엇이고 사회란 무엇이고 노동과 직업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꾸준히 고민하고 논의하고 그것을 개선시키기 위해 실천하는 젊은이들과 어느 정도의 급여에서도 자신이 듣고 배운 한정된 지식을 이용하여 하루, 한 달 앞만 보고 달려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이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 중소기업의 직원들은 세상을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고 휴식과 여유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고된 노동을 감수하고 있다.(다행인 것은, 그래도 그들 중 일부는 자신만의 작고 소박한 목표를 세워놓고 긍정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직업과 노동의 차이나 조직의 성격의 차이로 말미암아 직원들의 가치관과 행복감이 달라질 수도 있다. 한쪽은 자본의 논리가 적용되는 주식회사이고 한쪽은 자본의 논리를 거부하는 시민단체다. 그럼에도 그런 설명은 그것이 차이를 설명해줄 수는 있지만 삶과 행복과 희망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그 단체와 회사의 직원들의 현재 차이는 목표와 목적, 사람과 방식의 차이일 것이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고 생각하는 만큼 느끼는 것이고 움직이는 것 만큼 얻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은 나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사람을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 중 하나가 철학이고 사람이 느끼도록 만드는 것 중 하나가 시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다음 주 공부모임 교재다. 
 
저자는 제1편 [기쁨의 연대], 네그리와 박노해를 시작으로 21명의 한국 시인들의 시구를 통해 21명의 현대 철학자들(그중 20명이 해외 학자)이 21세기에 고민하는 철학의 소재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이전의 저서 <철학, 삶을 만나다>에서 "철학은 삶을 낯설게 만드는 기술"이라고 정의한 바 있는데, 이 책을 통해서 시와 철학이 인간에서 있어서 동일한 주제, 즉 인문학적 성찰이 일상적 세계를 동요시키고 낯선 세계를 도래시키는 힘을 가지도록 하기 위하여 글을 쓴 것이라고 말한다. 시와 같은 예술이나 철학과 같은 인문학의 궁극적인 목적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인생과 세상의 '희노애락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전혀 다르다고 생각해 온 시와 철학을 책 한 권에 묶어내는 저자와 출판사의 저작 & 편집 솜씨가 일품이다. 
 
저자는 [네그리와 박노해]를 통해 민중이 아닌 다중의 논리가 필요함을, [비트겐슈타인과 기형도]를 통해 언어에는 뼈가 있음을, [아렌트와 김남주]를 통해 인간의 사유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임을, [알튀세르와 강은교]를 통해 삶의 우발성과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바타이유와 박정대]를 통해 인간적인 에로티즘의 비밀을, [벤야민과 유하]를 통해 자본주의의 소비 논리와 유혹을, [레비나스와 원재훈]을 통해 무한으로서의 타자와 기다림의 신비를, [니체와 황동규]를 통해 망각의 지혜를, [푸코와 김수영]을 통해 미시정치학의 경향과 자발적 복종의 무서움을, [고진과 도종환]을 통해 대화의 재발견과 타자로서의 비약이 지닌 신비를, [하이데거와 김춘수]를 통해 존재와 인간 사이의 관계를, [들뢰즈와 최두석]을 통해 마주침과 주름의 논리를, [샤르트르와 최영미]를 통해 애무와 섹스의 비밀을, [아도르노와 최명란]을 통해 작고 상처받기 쉬운 것들과 교환 불가능성에 대한 통찰을, [데리다와 오규원]을 통해 죽음과 삶의 관계, 해탈을 위한 해체론을, [아감벰과 한하운]을 통해 미래 정치철학의 화두와 생명정치의 무서움을, [메를로-퐁티와 정현종]을 통해 육화된 마음과 사랑과 고독의 진실을, [리오타르와 이상]을 통해 포스트모더니즘의 논리를, [바디우와 황지우]를 통해 사랑의 내적 구조를, [호네트와 박찬일]을 통해 인정에 목마른 인간과 인정투쟁의 심리학을, [박동환과 김준태]를 통해 한국인의 사유의 가능성을 펼쳐 보인다.
 
덕분에 전혀 몰랐던 한국 시인들의 시와 느낌으로 다가오는 몇몇 시구를 만났고 현대의 철학자들이 고민하고 탐구하는 주제와 철학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기형도시인의 [소리의 뼈]와 유하 시인의 [오징어], 김수영시인의 [하... 그림자가 없다] 등을 통해 새롭게 알고 싶은 시인, 읽고 싶은 시집을 소개받은 셈이고 오랜만에 박노해시인의 <사람만이 희망이다>와 김남주시인의 <사랑의 무기>도 다시 읽고 싶어졌다. 비트겐슈타인, 알튀세르, 푸코, 니체, 샤르트르, 하이데거의 작품을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된 현대 철학자인 네그리, 아렌트, 벤야민 등의 철학세계도 기회가 되면 접하고 싶다.
 
이름있는 많은 시인들의 시 구절과 더불어 책 속에는 인문학적 고찰을 위해 다양한 에피소드와 비유, 음악과 노래까지 나타나기 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지루하지도 않았다. 책을 덮고 난 후, 저자의 발간 의도대로 현대 철학이 다루고 있는 소재들과 논의하는 주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책의 부제처럼 '한국 시인의 시를 통해 현대 철학의 풍경을 바라본' 셈이다. 500쪽도 되지 않는 책 속에 42명의 철학자와 시인이 등장하니 책을 읽는 중간 중간에 책 속에 나타나 있는 몇 명의 철학자나 시인의 작품을 읽고 싶다는 욕심이 나기도 했다. 그리고 시구에서 주제를 뽑아내는 과정과 각 철학자들의 사상을 규정하고 설명하는 저자의 글에 따라갈 수 밖에 없었음에도 저자가 적절한 비유와 사례를 적용하면서 쉬운 용어와 개념을 사용하였기에 읽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저자가 훌률한 철학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자가 독자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저술가로 발전할 가능성은 높아보인다.
 
독자들이 시인의 문학 세계를 한 구절의 시구를 통해, 그리고 철학자의 세계관을 그의 저작 중의 몇 개의 문단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따라서 저자가 많은 시집을 읽어보고 비교,연구해본 후에 21개의 시구를 선정한 것에 대해, 그리고 현대철학을 전공하는 저자가 소개하는 현대 철학자들의 세계관을 소개, 설명한 것에 대해서 내가 이렇다 저렇다 할 수는 없다. 내가 저자만큼 그 시인들의 시집을 읽어본 적도, 비교하거나 연구한 적도 없고 철학자들의 저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몇 가지 시인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 구체적으로 동의하기 어렵기 때문에 책 전체의 설명에 대해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저자는 박노해시인의 시집 <사람만이 희망이다>에 들어 있는 시구 [인다라의 구슬] 한 편으로 박노해시인이 민중을 벗어던지고 '다중'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단정짓는데 이것은 박노해시인의 시 세계와 세계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다시 읽어보고 최신 시집인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읽어보면, 박노해시인이 시집의 제목을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정한 이유가 1990년대까지 한국의 지성계를 휩쓴 이념이나 노선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 즉 '민중'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디라의 구슬]은 시인이 바라보는 사람과 삶에 대한 관심이 매우 폭넓어졌음을 말해주는 것이고 사람(민중)을 중심으로 여러 종교와 철학을 재해석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시와 철학이 독자들에게 어렵게 다가오는 것이 비슈켄스타인의 표현을 빌려 사실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라고 단언한다. 나도 최근 몇 십년 만에 시집을 몇 권 읽기 시작했고 철학적인 서적들도 읽어왔지만, 저자의 말에 선뜻 동의하기는 어렵다. 내 생각으로는 시와 철학이 어렵게 다가오는 것은 이해와 의지의 문제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우리의 생활과 문화에서 나타나는 문제이지 않을까 싶다. 어려서부터도 그렇고 학교를 다닐 때에도 가정, 학교, 사회생활에서 우리 모두가 문학이나 문화와는 거리가 멀고 입시교육, 정치경제, 경쟁, 영상음악 등을 주로 접해 왔지 않은가...  
 
[ 2011년 2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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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도주의는 전쟁으로 치닫는가? - 그들이 세계를 돕는 이유
카너 폴리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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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은 <인도적 개입>과 더불어 오늘 공부모임 교재 2권 중 다른 하나다. 저자는 실제 현장에서 일하는 인도주의 활동가로서, 국제앰네스티와 유엔난민기구(UNHCR) 등 각종 인권단체와 인도주의 기구에서 근무하면서 코소보, 아프가니스탄, 콜롬비아,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우간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지에서 활동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199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분쟁지역에 대한 인도주의적 무력 개입과 정치적 목적을 둘러싼 논란의 배경, 그리고 구호 활동가들이 겪는 아이러니한 현실과 그 이면에 존재하는 문제의 핵심에 대한 것이다. 저자는 1948년 유엔이 설립된 이후, 1970년대부터 조심스럽게 이루어지던 인도주의 활동이 정치적 의도와 '천부적 인권'을 이유로 하여 '정치적 인도주의'로 확대되고 있으며, 결국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애초의 선한 취지는 사라지고 인도주의 자체가 사방에서 비난받는 상황에 대해 공론화시키기 위해 이 책을 발간한 것이다. 즉, "국제관계에 있어서 인도주의의 영향력은 분명히 증가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학문적인 검증은 거의 뒤따르지 않으며, 여전히 근거 없는 통념과 오해가 난무한다."(p.35)하는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함인 것이다.
 
한국 역시 '정치적 인도주의'와 무관할 수 없다. 1999년 3월 ‘국군부대의 동티모르 다국적군 파병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해, 그 해 10월부터 4년간 한국의 상록수부대는 인도네시아 동티모르의 평화 유지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한국도 국제사회의 한 일원으로 인도주의적 개입에 동참해오고 있다(2007년에는 레바논 Blue Line에 대한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고, 2010년 2월에는 아프가니스탄의 2차 파병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세계 평화를 위한 강대국의 인도주의 활동은, 우리나라에서 국군을 파견하기 훨씬 오래 전부터 이미 구호품 전달과 집짓기, 농사짓기의 차원을 넘어섰다. 갓 태어난 아기를 위해 털모자를 짜거나 식빵 모양의 저금통에 동전을 채워 보내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굶어죽는 아이’에 관한 문제와 ‘총칼을 든 반란군’에 관한 문제가 서로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지만, 사실 이 두 이미지는 같은 장소, 같은 상황에서 벌어지는 똑같은 문제이다.
 
자연재해나 내전, 전쟁이나 학살 등의 이유로 위험에 처한 제3세계 나라를 위해 국제적십자사, 국경없는의사회, 국제엠네스티, 유엔난민기구, 기아추방행동, 옥스팜 등의 인도주의 NGO는 일찍부터 유엔이나, 나토, 이유, 또는 서구 강대국보다 한 발 앞서 인도주의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1990년 들어 일부 인권단체들이 인도주의 활동에 뛰어들었고 기존의 인도주의 단체와 더불어 서구 강대국과 유엔(UN), 나토(NATO), 이유(EU) 내에서 홍보활동을 강화하고 정치적 압력을 강화하여 보다 ‘직접적이고 명쾌한 해답’을 주고 싶어 했고, 그리하여 일찌감치 구호품보다는 ‘군대’를 파견하는 일에 관심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정치에 중립적이었던 인도주의가 정치적 색깔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인간이 향유해야 한다고 믿는 인권과 내정간섭의 소지가 있는 국제사회의 개입이 교묘히 결합한 것이다.
 
인권단체는 "보편적인 인권 존중의 원리를 강조하는 한편 인권을 개개인이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로 정의한다. 인권운동가들은 인권 증진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특정 정치적 입장을 옹호하는 개입론자라 할 수 있다." 인도주의 NGO 또한 "보편적인 기준에 따라 행동하되 '전쟁의 규칙'이라고도 일컫는 제네바협약에 우선적으로 그 근거를 둔다. 이들 역시 전쟁이나 자연재해 상황에 직접 개입해 구호활동을 벌인다는 점에서 개입주의자라 할 수 있으니 원활한 현장접근을 위해 전통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다. 이들은 사회가 어떻게 통치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거시적 비전을 지니지 않으며, 특정 범주의 사람들을 한시적으로 돕는 일에 스스로를 한정시킨다." (p.16) 그런데 이 두가지 유형의 운동이 그동안 서로 가까워지면서 어느 순간부터 '정치적 인도주의'라 일컫는 관념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1960년대 말 비아프라 분쟁에서 그 조짐이 보인 인도주의의 정치화는 1990년대 보스니아 전쟁과 르완다 집단학살 사건을 거치며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이어, 코소보 전쟁을 전환점으로 거치며 911 테러 후 미국과 영국의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점령으로 절정을 맞기에 이른다. 그렇지만 코소보 사태에서는 개입 시기도 놓치고 부적절하게 개입하면서 인종청소를 막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난민을 증가시키고 민간시설만 폭격하였고 르완다 집단학살사건에서는 소극적으로 개입하는 바람에 내전이 장기화되고 민간인의 피해만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에서는 '인도주의를 빌미로 한 군사적 침공'이 발생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더욱 나쁜 상황은 '정치적 인도주의'로 전개됨에 따라 NGO 조직이 유엔이나 나토의 군대이 협력하는 상황이 늘어나는데 그것은 신변을 안전하게 하는 긍정적인 결과 뿐 아니라 NGO 활동의 순수성이 현지 주민들에게 의심받게 된다.
 
실제 현장에 가장 접근해 있었던 저자가 보기에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인도주의를 빙자하여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경우에는 대부분 '정치적 인도주의 단체'들과 서국 정치가들이 거짓 정보와 과대 여론조작을 통하여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무력 개입을 진행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NGO 활동가로서 저자는 인도주의 단체의 한계와 현실적인 조건도 인정한다. 보통의 인도주의 단체는 후원자들의 후원금으로만 운영되기 때문에 비인도적 사태가 발생할 경우 후원금을 받아내기 위해 어느 정도 위기를 과장하고 사태를 크게 홍보할 수 밖에 없는 경우도 발생한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소말리아, 코소보,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아프카니스탄 등의 인도적 활동 사례를 면밀하게 검토, 분석한 후 자신을 비롯하여 분쟁지역에서 활동하는 인도주의 활동가들에게 딜레마를 안겨주는 세 가지 이슈를 다룬다. 그것은 구제와 보호의 문제, 정의와 평화의 문제, 그리고 인도주의 기구의 책임성 문제다.
 
저자는 결론으로, "인도주의 기구들이 전반적으로 정치적 행동에서 생기는 문제점들을 해소할 일관된 방안을 아직 마련하지 못한 상태"라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앞으로 "개입이라는 이슈에 대하여 훨씬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접근방법을 고안하는 일이 인도주의가 풀어내야 할 난제"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도적 개입이 "그 대상이 되는 사회에 일정한 해악을 끼치게 마련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필요악'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군사적 개입은 더 심한 불안정성을 초래하고 점령자와 피점령자에게 큰 비용을 치르게 하기 때문에 최대한 자제해야 함"을 역설한다.
 
더욱이 세계는 "서구 자유주의가 수출용으로 포장한 '인권' 개념만이 유일한 인권 개념은 아니라는 점부터 인정하고 이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오늘날 "부와 권력의 불균형으로 세상에 발생하는 불의를 성토하는 논의의 내부에 인간의 존엄성, 개인의 자유, 자결권 존중 등의 개념을 어떤 식으로 자리매김할 지에 관해서도 폭넓은 대화가 필요하다."며, "극심한 빈곤을 퇴치하려면 경제성장도 필요하지만 빈곤과 불평등이 분쟁과 인도적 위기를 일으키는 최대의 원인이라는 점에서 인권단체와 인도주의 기구는 경제정의를 주장해야 할 중대한 임무를 갖는다"는 의미심장한 결론도 내리고 있다.
 
전세계의 인도주의 활동가들은 '인도주의'가 해답만이 아니라 '문제의 일부'라는 점을 알고 있다. 
 
<인도적 개입>과 더불어 이 책을 읽으면서 인도주의 단체와 유엔의 개입이 정치경제군사적인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언제나 미국 극우보수파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입김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이라크 침공이나 아프카니스탄 침공, 그리고 리비아 무력개입은 당연히 후자의 목적으로 일으킨 전쟁이고 향후 무력 개입의 당사자와 개입을 받은 국가의 국민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이다.
 
조금 아쉬운 것은 저자가 책의 제목 <왜 인도주의는 전쟁으로 치닫는가?>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한 것 같다. 책 속의 마지막 장의 제목도 <수출용 인권은 어떻게 전쟁으로 치닫는가]인데 이 또한 저자의 결론을 찾을 수가 없다. 내가 찾지 못하는 것인지, 저자의 문제의식일 뿐인지, 내가 독서의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인지 헷갈린다...ㅋ
 
나도 앞으로 좀 더 국제적인 인도주의 활동과 단체에 대해 알아야 할 것 같다. 
가능하면 어느 정도 시간을 할애하여  활동도 하고...^^ 
  
* 책 속의 문장
- 인도주의는 이제 수십억 달러 규모의 산업으로 성장했다. 유엔과 엔지오는 이른바 ‘복합적 위기상황’이 발생하면 특정 로고가 박힌 티셔츠를 입고 같은 로고가 그려진 자동차를 타고 현장에 제일 먼저 달려가 지원사업을 펼친다. … 오늘날 대다수의 영·미 구호기구는 자신들의 운영프로그램에 지원된 기금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상당 규모의 미디어 담당부서를 갖추고 있다. 구호기구에 고용된 언론 담당관과 로비스트들은 특정 위기를 강조해 세인의 관심과 양심을 자극하고 “돕기 위해 뭔가 행동하도록” 유도한다. ‘정치적 인도주의’는 대다수 구호기구의 운영체계 내에 이렇게 제도화되어 갔다.(p. 29)

- 인도주의 활동가들은 구호 제공에 관하여 ‘갖다 주기만 하면 끝’이라는 식의 태도를 늘 경계하면서도 종합적인 평가와 프로그램들의 광범위한 영향에 관한 평가의 중요성을 현명하게 지적했다. 존 포세트 같은 인물은 바로 이런 측면이야말로 “서비스 제공은 효율적이어도 인권문제는 어떻게 다뤄야 좋을지 모르는” 사기업체에 비해 인도주의 비정부기구가 경쟁력을 갖는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원조는 단순히 부족함을 충족하는 행위가 아닌 수혜자의 권리를 인정하는 과정의 일부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관념을 많은 인도주의 활동가들이 수용했다.(p. 55)

- '인도적 개입’이라는 용어는-구호활동에서부터 군사력 사용에 이르기까지-다양한 행위를 포함한다. 한 국가, 여러 국가, 혹은 기타 단체가 긴박한 위험에 처하거나 극심한 고통을 겪는 이들을 구호하려는 목적으로 ‘인도적 개입’을 통해 타국의 내정에 간섭한다. 인도적 개입이라는 용어 사용을 타국의 영토 및 주권을 침범하는 정치적·군사적 활동에 한정하는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인도주의 활동가들은 이 용어를 중립적인 구호활동 말고는 다른 일에 사용하기를 꺼린다. 그 두 가지가 분명히 구분되는 것 같아도 현장 활동을 하다보면 차이점이 흐려지곤 한다.(p. 67)

- 국제사회는 코소보 문제를 인권문제라 믿고 있었지만 이는 사실 주권과 영토에 관한 분쟁이었다. 나토의 개입은 전쟁범죄와 인종청소를 방지하기는커녕 오히려 극적으로 증가시켰다. 유엔은 인권과 법치를 보장하는 다민족사회의 건설을 위해 효과적인 임시행정기구를 설치하겠노라고 약속했지만 오늘날 코소보는 부정부패가 창궐하고 국제원조에만 의지하는 단일민족사회가 되고 말았다.(p. 119)

- 2008년 3월 인도주의 기구들이 공동 발표한 보고서는 아프가니스탄에 약속된 원조금 200억 달러 가운데 100억 달러가 미지급되었고 도착한 금액 가운데 40퍼센트는 컨설팅 비용으로 소비되거나 영리기업의 호주머니로 돌아갔다고 밝혔다. 그보다 몇 개월 전에는 옥스팜 보고서가 지방재건팀 구호활동의 비효율성과 낭비를 지적했다. 원조국들은 필요나 효과를 예상해 원조금을 배분하기보다는 서구 병사들이 살해되지 않도록 지역 주민의 협조를 매수할 수 있는 곳에 원조금을 퍼주었다. 반군진압 전략과 인도주의 활동을 너무 긴밀히 연결시킴으로써 초래된 부작용이었다.(p. 151)

- 나토의 코소보 개입이 인도주의적이라는 설명은 민간인의 고통을 멈추는 것이 개입의 기본 목적이었다는 점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공습으로는 민간인을 직접 보호하는 일이 불가능하며 오직 지상군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실제로 인권감시인이 철수하자마자 민간인의 안전이 취약해졌고 이로 인해 집단살해가 급속하게 늘어났다. 나토 전략가들은 사태가 그렇게 발전할 가능성을 미리부터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작전에 관한 주요 결정은 인도주의가 아니라 정치적 고려를 기반으로 내려졌다.(p. 192)
 
[ 2011년 4월 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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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적 개입 - 정의로운 무력행사는 가능한가
모가미 도시키 지음, 조진구 옮김 / 소화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내일 공부모임 교재 중 하나다. 지난 번 공부모임에서 참석자들이 최근 리비아 민주혁명 과정에서 서구 국가들이 유엔의 결의 없이 임의로 리비아 내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현상에 대해 우려하면서 서구 국가들이 명분으로 내세우는 '인도주의'에 대해 공부하기로 한 것이다.
 
국제법의 권위자인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냉전 후 무고한 시민들이 대량으로 죽어 가는 내전이나 민족분쟁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제기했다고 지적하며, 어떤 한 국가에서 죄없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비인도적 상황이나 심각한 인권침해가 발생했을 때, 무력행사 이외에 다른 수단이 없을 경우 국제 사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문제 삼아 여러 사례와 함께 전반적인 내용을 다룬다.  저자는 1999년 NATO군에 의한 유고 폭격 이후 각광을 받게 된 '인도적 개입'이라는 중요한 과제를 국제법의 시점에서 다각도로 분석하였다.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폭격 자체는 인도적 개입의 모델 케이스로 간주하기 어렵다. 코소보 자치주에서 반인도적 행위가 벌어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취한 수단(폭격), 절차(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무시), 얻은 결과(박해의 순환) 등 어느 것을 보아도 의문이 남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러 증언과 자료를 통해 폭격 전후에  코소보에서 세르비아 군대 및 민병대에 의한 알바니아계 민간인 학살, 학대 뿐 아니라 코소보 민병대에 의한 세르비아계 민간인 학살, 학대로 동시에 존재했다는 것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인도적 개입'의 공통적인 정의는,
첫째. 극도의 인권침해 또는 인도에 대한 죄라고 부를 수 있는 심각한 박해가 있을 것.
둘째. 해당국 정부가 그러한 박해를 자행하고 있거나 주민간의 박해를 멈추게 할 의사와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을 것.
셋째. 개입하는 것은 통상 다른 국가 또는 복수의 국가일 것. 복수의 국가에는 나토와 같은 군사동맹도 포함 된다'
넷째. ‘개입’은 통상 군사력을 사용한 ‘무력개입’일 것(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나 무력을 사용할 경우가 첨예한 문제가 된다)  (p.22) 
'인도적 개입'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합법적이라고 해도 어떠한 종류나 형태의 인도적 개입이 합법적인가"와 "합법적일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을 적극적으로 행사해야 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인도적 개입'이 유엔 차원에서 타당성을 결여하는 것은 주로 법적인 이유에서다. 즉 '인도적 개입'이라고 하면 무력행사를 수반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유엔헌장 상 무력행사를 수반하는 유엔활동은 ‘강제행동’(유엔헌장 제7장 특히 제39조와 제42조)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것은 ‘개입’과는 다른 합법성이 분명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엔의 경우, 유엔군은 존재하지 않지만 평화유지활동을 위한 '평화유지군'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 설치되었다. 평화유지활동의 경우 병력의 전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국가의 동의에 입각하고 있어 상대의 의사에 반할 경우에도 행해지는 강제행동이나 개입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또한 무력행사에도 많은 제약이 있으며 대상국에 명령할 권한도 없다. 평화유지군이 아닌 군사활동은 원칙적, 대체적으로 유엔의 동의를 받기 어렵고 국제법에 저촉되기 마련이다.
 
유엔 헌장 제2조4항에는 국제 관계에서 무력행사 또는 무력에 의한 위협의 금지 & 다른 나라의 '영토보전 또는 정치적 독립'을 존중해야 함을 명시적으로 정의한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파괴력 자체가 세계에 교훈을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인도적 개입'과 관련해서는 2차 세계대전 직전에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면서 내세운 명분이 '인도적 개입'이었고 그 외에도 다수의 국가간 침공행위가 '인도적 개입'이라는 이유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저자는 '인도적 개입'을 명분으로 한 또 다른 침탈행위로 1983년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을 예로 들고 있다.
 
'인도적 개입'의 정당성을 따지기 어려운 여러가지 사례로는 1971년 동파키스탄(지금의 방글라데시)에 대한 인도의 무력개입, 1978년 캄보디아에 대한 베트남의 개입, 1979년 우간다에 대한 탄자니아의 개입 등을 들 수 있다.
 
그동안 유엔은 소말리아, 르완다, 그리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기아와 살육이 발생하였을 때 대응을 요청받고 평화유지활동을 했다. 하지만 미묘한 형태로 행해진 활동이기 때문에 제약도 많았다. 세 경우 모두 문제점을 남긴 사례이기는 하지만 조금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유엔에 의한 ‘구호 활동의 과잉과 과소’라고 요약할 수 있다. 
저자는 소말리아의 경우, 유엔이 과잉개입하여 내전을 확대한 후 마무리하지 못하고 평화유지군이 철수할 수 밖에 없었고 르완다의 경우, 유엔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여 내전 및 민병대에 의한 학살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유엔은 유고연방의 인종청소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고 스레브레니차에서는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음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여 인종청소의 학살을 막아내지 못했다.
 
서구 국가들이 자주 내세우는 개념 중에 '정전(正戰)'이 있다. '정전'이란 말 그대로 정당한 전쟁이며 적극적으로 싸워야 할 전쟁이다. 무력을 기본으로 하여 세계질서를 구축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싸워야 할 정당한 전쟁을 설정하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엄격한 조건을 붙일 필요가 있다. 그것은 특정 국가의 판단에 의해 행해져서는 안 되며 국제사회, 즉 유엔의 총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공격하는 상대방이 아무리 ‘악’해도 통상의 전쟁과는 달리 상대방을 정복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공격하는 대상이나 수단은 매우 제한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권을 침해당하고 구호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자신이 그러한 방법으로 구호를 받고 싶어 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나 아프카니스탄 침공, 그리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리비아 개입은 모두 불법적이고 부당한 것이다. 이미 유엔과 학자들은 이라크나 아프카니스탄 침공은 인도적 목적이 아니라 특정한 국가들의 정치경제군사적 목적이 중요했음을 인정한다.

만약 비인도적 상황에서 ‘주권보다 인권’을 주장할 경우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은 어떻게 인권(생명에 대한 권리·평화에 대한 권리·식량에 대한 권리·가족생활의 권리 등)을 보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해당국의 주권을 일축하며 죄 없는 시민들을 말려들게 할 가능성을 내재하면서 징벌적인 무력 공격을 하는 것 자체는 아닌 것이다. 저자는 극도의 비인도적 상황에서 주권은 제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해당 국가가 보호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타국 또는 국제기구 혹은 다양한 인간집단이 보호하고 구호하려고 할 때 그것을 방해할 권리를 해당 국가는 갖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만 그러하다. 인도주의 단체가 임의로 피해 민간인을 구제,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예외로 인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특정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적지않은 인도주의 단체의 '인도적 개입' 역시 많은 학자나 전문가들에게 그 동기에 있어 의혹을 받고 있다.)
 
저자의 결론은 국제사회가 '인도적 개입'을 이유로 하여 타국에 무력으로 개입하는 것에 대해 필요성, 수단, 절차, 결과를 모두 감안하여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력에 의한 개입 이전에 유엔과 국제사회는 실제 비인도적 상황에 처한 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NGO 등 민간단체의 역할을 적극 장려, 활용해야 하고 유엔은 평화유지군 등 인도적 활동을 지원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저자는 궁극적으로는 '예방적 개입'을 주장한다. 이는 "해당국의 인권침를 비난하고 인권조약의 비준과 실행을 촉구하며 인권을 침해하는 책임자를 법에 따라 처벌하는 것"을 말한다. 사후적으로는 무력개입보다 평화유지군 파견을 통해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 책을 읽고나니 미국이나 일본, 한국 주류언론의 시각이 아닌 유엔과 국제법 전문가의 시각에서 '인도적 개입'에 대한 관점과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물 안의 개구리'의 시각을 벗어났다고 해야 할까... 내가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이번 리비아 내전에 서구 국가들이 무력으로 개입하는 행위를 자신있게 반대할 수 있다는 것.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무력으로 개입하는 것은 인도적인 정당성도 없고 국제법적인 절차와 명분도 없을 뿐이다. 십중팔구 리비아 내의 종족 간 내전을 확대시킬 것이고 그 과정에서 수 많은 죄없는 민간인들의 피해만 엄청나게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라크, 아프카니스탄에 이어 리비아에 대한 무력개입은 이후 미국, 영국, 프랑스에 우호적이지 않은 국가, 또는 상황이 오면 또 다시 그들은 타국에 무력으로 개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 2011년 4월 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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