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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도주의는 전쟁으로 치닫는가? - 그들이 세계를 돕는 이유
카너 폴리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인도적 개입>과 더불어 오늘 공부모임 교재 2권 중 다른 하나다. 저자는 실제 현장에서 일하는 인도주의 활동가로서, 국제앰네스티와 유엔난민기구(UNHCR) 등 각종 인권단체와 인도주의 기구에서 근무하면서 코소보, 아프가니스탄, 콜롬비아,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우간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지에서 활동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199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분쟁지역에 대한 인도주의적 무력 개입과 정치적 목적을 둘러싼 논란의 배경, 그리고 구호 활동가들이 겪는 아이러니한 현실과 그 이면에 존재하는 문제의 핵심에 대한 것이다. 저자는 1948년 유엔이 설립된 이후, 1970년대부터 조심스럽게 이루어지던 인도주의 활동이 정치적 의도와 '천부적 인권'을 이유로 하여 '정치적 인도주의'로 확대되고 있으며, 결국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애초의 선한 취지는 사라지고 인도주의 자체가 사방에서 비난받는 상황에 대해 공론화시키기 위해 이 책을 발간한 것이다. 즉, "국제관계에 있어서 인도주의의 영향력은 분명히 증가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학문적인 검증은 거의 뒤따르지 않으며, 여전히 근거 없는 통념과 오해가 난무한다."(p.35)하는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함인 것이다.
한국 역시 '정치적 인도주의'와 무관할 수 없다. 1999년 3월 ‘국군부대의 동티모르 다국적군 파병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해, 그 해 10월부터 4년간 한국의 상록수부대는 인도네시아 동티모르의 평화 유지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한국도 국제사회의 한 일원으로 인도주의적 개입에 동참해오고 있다(2007년에는 레바논 Blue Line에 대한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고, 2010년 2월에는 아프가니스탄의 2차 파병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세계 평화를 위한 강대국의 인도주의 활동은, 우리나라에서 국군을 파견하기 훨씬 오래 전부터 이미 구호품 전달과 집짓기, 농사짓기의 차원을 넘어섰다. 갓 태어난 아기를 위해 털모자를 짜거나 식빵 모양의 저금통에 동전을 채워 보내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굶어죽는 아이’에 관한 문제와 ‘총칼을 든 반란군’에 관한 문제가 서로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지만, 사실 이 두 이미지는 같은 장소, 같은 상황에서 벌어지는 똑같은 문제이다.
자연재해나 내전, 전쟁이나 학살 등의 이유로 위험에 처한 제3세계 나라를 위해 국제적십자사, 국경없는의사회, 국제엠네스티, 유엔난민기구, 기아추방행동, 옥스팜 등의 인도주의 NGO는 일찍부터 유엔이나, 나토, 이유, 또는 서구 강대국보다 한 발 앞서 인도주의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1990년 들어 일부 인권단체들이 인도주의 활동에 뛰어들었고 기존의 인도주의 단체와 더불어 서구 강대국과 유엔(UN), 나토(NATO), 이유(EU) 내에서 홍보활동을 강화하고 정치적 압력을 강화하여 보다 ‘직접적이고 명쾌한 해답’을 주고 싶어 했고, 그리하여 일찌감치 구호품보다는 ‘군대’를 파견하는 일에 관심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정치에 중립적이었던 인도주의가 정치적 색깔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인간이 향유해야 한다고 믿는 인권과 내정간섭의 소지가 있는 국제사회의 개입이 교묘히 결합한 것이다.
인권단체는 "보편적인 인권 존중의 원리를 강조하는 한편 인권을 개개인이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로 정의한다. 인권운동가들은 인권 증진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특정 정치적 입장을 옹호하는 개입론자라 할 수 있다." 인도주의 NGO 또한 "보편적인 기준에 따라 행동하되 '전쟁의 규칙'이라고도 일컫는 제네바협약에 우선적으로 그 근거를 둔다. 이들 역시 전쟁이나 자연재해 상황에 직접 개입해 구호활동을 벌인다는 점에서 개입주의자라 할 수 있으니 원활한 현장접근을 위해 전통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다. 이들은 사회가 어떻게 통치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거시적 비전을 지니지 않으며, 특정 범주의 사람들을 한시적으로 돕는 일에 스스로를 한정시킨다." (p.16) 그런데 이 두가지 유형의 운동이 그동안 서로 가까워지면서 어느 순간부터 '정치적 인도주의'라 일컫는 관념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1960년대 말 비아프라 분쟁에서 그 조짐이 보인 인도주의의 정치화는 1990년대 보스니아 전쟁과 르완다 집단학살 사건을 거치며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이어, 코소보 전쟁을 전환점으로 거치며 911 테러 후 미국과 영국의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점령으로 절정을 맞기에 이른다. 그렇지만 코소보 사태에서는 개입 시기도 놓치고 부적절하게 개입하면서 인종청소를 막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난민을 증가시키고 민간시설만 폭격하였고 르완다 집단학살사건에서는 소극적으로 개입하는 바람에 내전이 장기화되고 민간인의 피해만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에서는 '인도주의를 빌미로 한 군사적 침공'이 발생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더욱 나쁜 상황은 '정치적 인도주의'로 전개됨에 따라 NGO 조직이 유엔이나 나토의 군대이 협력하는 상황이 늘어나는데 그것은 신변을 안전하게 하는 긍정적인 결과 뿐 아니라 NGO 활동의 순수성이 현지 주민들에게 의심받게 된다.
실제 현장에 가장 접근해 있었던 저자가 보기에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인도주의를 빙자하여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경우에는 대부분 '정치적 인도주의 단체'들과 서국 정치가들이 거짓 정보와 과대 여론조작을 통하여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무력 개입을 진행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NGO 활동가로서 저자는 인도주의 단체의 한계와 현실적인 조건도 인정한다. 보통의 인도주의 단체는 후원자들의 후원금으로만 운영되기 때문에 비인도적 사태가 발생할 경우 후원금을 받아내기 위해 어느 정도 위기를 과장하고 사태를 크게 홍보할 수 밖에 없는 경우도 발생한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소말리아, 코소보,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아프카니스탄 등의 인도적 활동 사례를 면밀하게 검토, 분석한 후 자신을 비롯하여 분쟁지역에서 활동하는 인도주의 활동가들에게 딜레마를 안겨주는 세 가지 이슈를 다룬다. 그것은 구제와 보호의 문제, 정의와 평화의 문제, 그리고 인도주의 기구의 책임성 문제다.
저자는 결론으로, "인도주의 기구들이 전반적으로 정치적 행동에서 생기는 문제점들을 해소할 일관된 방안을 아직 마련하지 못한 상태"라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앞으로 "개입이라는 이슈에 대하여 훨씬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접근방법을 고안하는 일이 인도주의가 풀어내야 할 난제"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도적 개입이 "그 대상이 되는 사회에 일정한 해악을 끼치게 마련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필요악'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군사적 개입은 더 심한 불안정성을 초래하고 점령자와 피점령자에게 큰 비용을 치르게 하기 때문에 최대한 자제해야 함"을 역설한다.
더욱이 세계는 "서구 자유주의가 수출용으로 포장한 '인권' 개념만이 유일한 인권 개념은 아니라는 점부터 인정하고 이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오늘날 "부와 권력의 불균형으로 세상에 발생하는 불의를 성토하는 논의의 내부에 인간의 존엄성, 개인의 자유, 자결권 존중 등의 개념을 어떤 식으로 자리매김할 지에 관해서도 폭넓은 대화가 필요하다."며, "극심한 빈곤을 퇴치하려면 경제성장도 필요하지만 빈곤과 불평등이 분쟁과 인도적 위기를 일으키는 최대의 원인이라는 점에서 인권단체와 인도주의 기구는 경제정의를 주장해야 할 중대한 임무를 갖는다"는 의미심장한 결론도 내리고 있다.
전세계의 인도주의 활동가들은 '인도주의'가 해답만이 아니라 '문제의 일부'라는 점을 알고 있다.
<인도적 개입>과 더불어 이 책을 읽으면서 인도주의 단체와 유엔의 개입이 정치경제군사적인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언제나 미국 극우보수파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입김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이라크 침공이나 아프카니스탄 침공, 그리고 리비아 무력개입은 당연히 후자의 목적으로 일으킨 전쟁이고 향후 무력 개입의 당사자와 개입을 받은 국가의 국민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이다.
조금 아쉬운 것은 저자가 책의 제목 <왜 인도주의는 전쟁으로 치닫는가?>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한 것 같다. 책 속의 마지막 장의 제목도 <수출용 인권은 어떻게 전쟁으로 치닫는가]인데 이 또한 저자의 결론을 찾을 수가 없다. 내가 찾지 못하는 것인지, 저자의 문제의식일 뿐인지, 내가 독서의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인지 헷갈린다...ㅋ
나도 앞으로 좀 더 국제적인 인도주의 활동과 단체에 대해 알아야 할 것 같다.
가능하면 어느 정도 시간을 할애하여 활동도 하고...^^
* 책 속의 문장
- 인도주의는 이제 수십억 달러 규모의 산업으로 성장했다. 유엔과 엔지오는 이른바 ‘복합적 위기상황’이 발생하면 특정 로고가 박힌 티셔츠를 입고 같은 로고가 그려진 자동차를 타고 현장에 제일 먼저 달려가 지원사업을 펼친다. … 오늘날 대다수의 영·미 구호기구는 자신들의 운영프로그램에 지원된 기금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상당 규모의 미디어 담당부서를 갖추고 있다. 구호기구에 고용된 언론 담당관과 로비스트들은 특정 위기를 강조해 세인의 관심과 양심을 자극하고 “돕기 위해 뭔가 행동하도록” 유도한다. ‘정치적 인도주의’는 대다수 구호기구의 운영체계 내에 이렇게 제도화되어 갔다.(p. 29)
- 인도주의 활동가들은 구호 제공에 관하여 ‘갖다 주기만 하면 끝’이라는 식의 태도를 늘 경계하면서도 종합적인 평가와 프로그램들의 광범위한 영향에 관한 평가의 중요성을 현명하게 지적했다. 존 포세트 같은 인물은 바로 이런 측면이야말로 “서비스 제공은 효율적이어도 인권문제는 어떻게 다뤄야 좋을지 모르는” 사기업체에 비해 인도주의 비정부기구가 경쟁력을 갖는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원조는 단순히 부족함을 충족하는 행위가 아닌 수혜자의 권리를 인정하는 과정의 일부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관념을 많은 인도주의 활동가들이 수용했다.(p. 55)
- '인도적 개입’이라는 용어는-구호활동에서부터 군사력 사용에 이르기까지-다양한 행위를 포함한다. 한 국가, 여러 국가, 혹은 기타 단체가 긴박한 위험에 처하거나 극심한 고통을 겪는 이들을 구호하려는 목적으로 ‘인도적 개입’을 통해 타국의 내정에 간섭한다. 인도적 개입이라는 용어 사용을 타국의 영토 및 주권을 침범하는 정치적·군사적 활동에 한정하는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인도주의 활동가들은 이 용어를 중립적인 구호활동 말고는 다른 일에 사용하기를 꺼린다. 그 두 가지가 분명히 구분되는 것 같아도 현장 활동을 하다보면 차이점이 흐려지곤 한다.(p. 67)
- 국제사회는 코소보 문제를 인권문제라 믿고 있었지만 이는 사실 주권과 영토에 관한 분쟁이었다. 나토의 개입은 전쟁범죄와 인종청소를 방지하기는커녕 오히려 극적으로 증가시켰다. 유엔은 인권과 법치를 보장하는 다민족사회의 건설을 위해 효과적인 임시행정기구를 설치하겠노라고 약속했지만 오늘날 코소보는 부정부패가 창궐하고 국제원조에만 의지하는 단일민족사회가 되고 말았다.(p. 119)
- 2008년 3월 인도주의 기구들이 공동 발표한 보고서는 아프가니스탄에 약속된 원조금 200억 달러 가운데 100억 달러가 미지급되었고 도착한 금액 가운데 40퍼센트는 컨설팅 비용으로 소비되거나 영리기업의 호주머니로 돌아갔다고 밝혔다. 그보다 몇 개월 전에는 옥스팜 보고서가 지방재건팀 구호활동의 비효율성과 낭비를 지적했다. 원조국들은 필요나 효과를 예상해 원조금을 배분하기보다는 서구 병사들이 살해되지 않도록 지역 주민의 협조를 매수할 수 있는 곳에 원조금을 퍼주었다. 반군진압 전략과 인도주의 활동을 너무 긴밀히 연결시킴으로써 초래된 부작용이었다.(p. 151)
- 나토의 코소보 개입이 인도주의적이라는 설명은 민간인의 고통을 멈추는 것이 개입의 기본 목적이었다는 점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공습으로는 민간인을 직접 보호하는 일이 불가능하며 오직 지상군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실제로 인권감시인이 철수하자마자 민간인의 안전이 취약해졌고 이로 인해 집단살해가 급속하게 늘어났다. 나토 전략가들은 사태가 그렇게 발전할 가능성을 미리부터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작전에 관한 주요 결정은 인도주의가 아니라 정치적 고려를 기반으로 내려졌다.(p. 192)
[ 2011년 4월 5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