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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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경험한 두 가지 상반된 삶의 현장이 있다.
하나. 며칠 전 내가 회원으로 가입해있는 [나눔문화]라는 단체의 총회에 참석했다. 회원으로 가입한 지 얼마되지 않았고 오프라인 모임에도 처음 참석한 것이기에 조용히 사무실에 찾아가서 저녁식사(그 단체에서 진행하는 텃밭의 채소로 만든 반찬이 나왔다)를 대접받고 총회가 진행되었다. 단체가 설립된지 10년이나 되었지만,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지 않고 언론 홍보도 시도하지 않은채 회원들의 회비만으로 운영되는 신선한(?) 시민단체였다. 내가 특별하게 경험한 것은 총회와 총회 후 강연(우희종교수) 후 단체의 연구원 25명(대다수가 20~30대)이 회원들에게 인사하는 자리였다. 단체 사무차장의 소개로 "연구원들의 평균 월급이 104만원"이라고 들었지만, 그 연구원들은 모두가 자연스럽게 웃는 얼굴과 활기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적은 월급에도 불구하고 발랄함과 희망을 가지고 움직이는 모습에서 직업과 노동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읽어낼 수 있었다.
 
둘. 최근 어떤 중소기업에서 그 단체와 비슷한 숫자의 직원들을 상대로 고용재계약을 체결하는 사람에게 전해들은 이야기였다. 최근의 경제위기를 반영하듯이 그 회사는 재작년에 비해 작년에 매출이 급감(손익은 손실상태)하였고 지난 달 구조조정을 하지 않는 대신에 전체 직원에 대한 '연봉동결'을 결정한 상태였다. 직원들은 월급은 최저가 1백몇십만원이고 최고는 3백만원이 넘는다. 평균 월급은 200만원이 조금 넘는다. 면담을 하다보니 직원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급여가 작다고 생각했고 경제상황이 어려워서 이직을 못하고 참고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결국 한 두명은 연봉인상이 좌절된데 항의하여 퇴사하였고 한 명은 고용재계약 체결을 보류) 처음 회사에서 '연봉동결'을 결정하면서 한 두 명에 대한 연봉인상 가능성을 제시하였으나 직원들의 대표자격을 가지고 있던 직원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전원 동결'을 선택했다. '사다리 걷어차기'란 말이 언듯 떠오르는 장면이었다.
 
두 가지 모습에서 나는 상반되는 세계관과 행복감을 느꼈다. 그것은, 최저 생계비에 턱없이 모자라는 월급임에도 인간이란 무엇이고 사회란 무엇이고 노동과 직업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꾸준히 고민하고 논의하고 그것을 개선시키기 위해 실천하는 젊은이들과 어느 정도의 급여에서도 자신이 듣고 배운 한정된 지식을 이용하여 하루, 한 달 앞만 보고 달려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이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 중소기업의 직원들은 세상을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고 휴식과 여유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고된 노동을 감수하고 있다.(다행인 것은, 그래도 그들 중 일부는 자신만의 작고 소박한 목표를 세워놓고 긍정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직업과 노동의 차이나 조직의 성격의 차이로 말미암아 직원들의 가치관과 행복감이 달라질 수도 있다. 한쪽은 자본의 논리가 적용되는 주식회사이고 한쪽은 자본의 논리를 거부하는 시민단체다. 그럼에도 그런 설명은 그것이 차이를 설명해줄 수는 있지만 삶과 행복과 희망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그 단체와 회사의 직원들의 현재 차이는 목표와 목적, 사람과 방식의 차이일 것이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고 생각하는 만큼 느끼는 것이고 움직이는 것 만큼 얻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은 나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사람을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 중 하나가 철학이고 사람이 느끼도록 만드는 것 중 하나가 시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다음 주 공부모임 교재다. 
 
저자는 제1편 [기쁨의 연대], 네그리와 박노해를 시작으로 21명의 한국 시인들의 시구를 통해 21명의 현대 철학자들(그중 20명이 해외 학자)이 21세기에 고민하는 철학의 소재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이전의 저서 <철학, 삶을 만나다>에서 "철학은 삶을 낯설게 만드는 기술"이라고 정의한 바 있는데, 이 책을 통해서 시와 철학이 인간에서 있어서 동일한 주제, 즉 인문학적 성찰이 일상적 세계를 동요시키고 낯선 세계를 도래시키는 힘을 가지도록 하기 위하여 글을 쓴 것이라고 말한다. 시와 같은 예술이나 철학과 같은 인문학의 궁극적인 목적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인생과 세상의 '희노애락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전혀 다르다고 생각해 온 시와 철학을 책 한 권에 묶어내는 저자와 출판사의 저작 & 편집 솜씨가 일품이다. 
 
저자는 [네그리와 박노해]를 통해 민중이 아닌 다중의 논리가 필요함을, [비트겐슈타인과 기형도]를 통해 언어에는 뼈가 있음을, [아렌트와 김남주]를 통해 인간의 사유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임을, [알튀세르와 강은교]를 통해 삶의 우발성과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바타이유와 박정대]를 통해 인간적인 에로티즘의 비밀을, [벤야민과 유하]를 통해 자본주의의 소비 논리와 유혹을, [레비나스와 원재훈]을 통해 무한으로서의 타자와 기다림의 신비를, [니체와 황동규]를 통해 망각의 지혜를, [푸코와 김수영]을 통해 미시정치학의 경향과 자발적 복종의 무서움을, [고진과 도종환]을 통해 대화의 재발견과 타자로서의 비약이 지닌 신비를, [하이데거와 김춘수]를 통해 존재와 인간 사이의 관계를, [들뢰즈와 최두석]을 통해 마주침과 주름의 논리를, [샤르트르와 최영미]를 통해 애무와 섹스의 비밀을, [아도르노와 최명란]을 통해 작고 상처받기 쉬운 것들과 교환 불가능성에 대한 통찰을, [데리다와 오규원]을 통해 죽음과 삶의 관계, 해탈을 위한 해체론을, [아감벰과 한하운]을 통해 미래 정치철학의 화두와 생명정치의 무서움을, [메를로-퐁티와 정현종]을 통해 육화된 마음과 사랑과 고독의 진실을, [리오타르와 이상]을 통해 포스트모더니즘의 논리를, [바디우와 황지우]를 통해 사랑의 내적 구조를, [호네트와 박찬일]을 통해 인정에 목마른 인간과 인정투쟁의 심리학을, [박동환과 김준태]를 통해 한국인의 사유의 가능성을 펼쳐 보인다.
 
덕분에 전혀 몰랐던 한국 시인들의 시와 느낌으로 다가오는 몇몇 시구를 만났고 현대의 철학자들이 고민하고 탐구하는 주제와 철학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기형도시인의 [소리의 뼈]와 유하 시인의 [오징어], 김수영시인의 [하... 그림자가 없다] 등을 통해 새롭게 알고 싶은 시인, 읽고 싶은 시집을 소개받은 셈이고 오랜만에 박노해시인의 <사람만이 희망이다>와 김남주시인의 <사랑의 무기>도 다시 읽고 싶어졌다. 비트겐슈타인, 알튀세르, 푸코, 니체, 샤르트르, 하이데거의 작품을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된 현대 철학자인 네그리, 아렌트, 벤야민 등의 철학세계도 기회가 되면 접하고 싶다.
 
이름있는 많은 시인들의 시 구절과 더불어 책 속에는 인문학적 고찰을 위해 다양한 에피소드와 비유, 음악과 노래까지 나타나기 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지루하지도 않았다. 책을 덮고 난 후, 저자의 발간 의도대로 현대 철학이 다루고 있는 소재들과 논의하는 주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책의 부제처럼 '한국 시인의 시를 통해 현대 철학의 풍경을 바라본' 셈이다. 500쪽도 되지 않는 책 속에 42명의 철학자와 시인이 등장하니 책을 읽는 중간 중간에 책 속에 나타나 있는 몇 명의 철학자나 시인의 작품을 읽고 싶다는 욕심이 나기도 했다. 그리고 시구에서 주제를 뽑아내는 과정과 각 철학자들의 사상을 규정하고 설명하는 저자의 글에 따라갈 수 밖에 없었음에도 저자가 적절한 비유와 사례를 적용하면서 쉬운 용어와 개념을 사용하였기에 읽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저자가 훌률한 철학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자가 독자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저술가로 발전할 가능성은 높아보인다.
 
독자들이 시인의 문학 세계를 한 구절의 시구를 통해, 그리고 철학자의 세계관을 그의 저작 중의 몇 개의 문단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따라서 저자가 많은 시집을 읽어보고 비교,연구해본 후에 21개의 시구를 선정한 것에 대해, 그리고 현대철학을 전공하는 저자가 소개하는 현대 철학자들의 세계관을 소개, 설명한 것에 대해서 내가 이렇다 저렇다 할 수는 없다. 내가 저자만큼 그 시인들의 시집을 읽어본 적도, 비교하거나 연구한 적도 없고 철학자들의 저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몇 가지 시인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 구체적으로 동의하기 어렵기 때문에 책 전체의 설명에 대해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저자는 박노해시인의 시집 <사람만이 희망이다>에 들어 있는 시구 [인다라의 구슬] 한 편으로 박노해시인이 민중을 벗어던지고 '다중'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단정짓는데 이것은 박노해시인의 시 세계와 세계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다시 읽어보고 최신 시집인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읽어보면, 박노해시인이 시집의 제목을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정한 이유가 1990년대까지 한국의 지성계를 휩쓴 이념이나 노선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 즉 '민중'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디라의 구슬]은 시인이 바라보는 사람과 삶에 대한 관심이 매우 폭넓어졌음을 말해주는 것이고 사람(민중)을 중심으로 여러 종교와 철학을 재해석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시와 철학이 독자들에게 어렵게 다가오는 것이 비슈켄스타인의 표현을 빌려 사실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라고 단언한다. 나도 최근 몇 십년 만에 시집을 몇 권 읽기 시작했고 철학적인 서적들도 읽어왔지만, 저자의 말에 선뜻 동의하기는 어렵다. 내 생각으로는 시와 철학이 어렵게 다가오는 것은 이해와 의지의 문제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우리의 생활과 문화에서 나타나는 문제이지 않을까 싶다. 어려서부터도 그렇고 학교를 다닐 때에도 가정, 학교, 사회생활에서 우리 모두가 문학이나 문화와는 거리가 멀고 입시교육, 정치경제, 경쟁, 영상음악 등을 주로 접해 왔지 않은가...  
 
[ 2011년 2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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