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역할 - 장하준이 제시하는 '우리 모두를 위한 발전과 진보의 경제학'
장하준 지음, 황해선, 이종태 옮김 / 부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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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때 도덕과 사회를 배우면서 배웠던 표어가 "요람에서 무덤까지"였다. 아마도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 사회복지가 잘 된 유럽의 선진국들을 예로 들면서 궁극적으로 우리 나라는 "요람에서부터 무덤까지" 모든 것들을 국가가 책임지는 방향으로 나아가야할 것이라는 원대한 포부를 밝힌 적이 있다. 지금와서 생각해본다면 우리나라 경제 규모에 비하여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고, 다분히 표를 의식한 포퓰리즘적인 성격이 강한 주먹구구식 정책이었지만 당시에 그 말이 참 멋있다고 느꼈다. 어린 나이였지만 국가가 나서서 국민의 삶을 책임진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바뀌어 가기 시작하더니 노무현 전대통령은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발언을 하셨고, 이명박 대통령께서는 프렌들리비지니스의 삶을 사시고 계시다. 초기 자본주의의 경찰 국가를 표방하면서 모든 것을 민영화하는 것이 세금을 줄이는 길이요, 효율적인 방안이라고 말한다. 국영기업은 부패의 온상이요, 이것을 바로 잡지 않으면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는 이밖에 안되니 빨리 민영화해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과 정책들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수도와 건보까지 그 대상에 오르내리지 않았던가? 한전은 이미 국영기업인지 민영기업인지 헷갈리기 시작한 단계에 와있다. 세계화를 주장하면서 시장의 논리에 모든 것을 맡기면 합리적으로 사회가 돌아갈 것이라는 시장 지상주의를 연일 복음처럼 외쳐대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말이 맞을까?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면 합리적이 되는가?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하여 정면으로 반박하는 책이다.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면 사회가 합리적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시장을 옹호하는 경제학자들 가운데에서도 극우의 사람들이나 주장하는 것이지 실제로 많은 경제학자들은 국가의 개입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장은 만능이 아니며 완전무결한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장은 인간이 고안해낸 제도일 뿐이다.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친기업의 입장에 서서 국민의 이익을 기업의 사익으로 바꾸어 버리는 이들이라고 장하준 교수는 단적으로 말한다. 

  왜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면 안되는가? 첫째 기업은 국가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고안해낸 제도이기 때문에 그 안에 모순과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시장 과열시 중복투자와 이로 인해 발생하는 매몰비용이라는 손실을 견제라는 기능은 시장 스스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 시장만능주의는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며, 시장만능주의를 옹호하는 사람은 공익을 사익으로 훔쳐가는 좀도둑일뿐이다. 대체로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어느 정도 용인해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화는 말도 안되는 논리이며 역사상 경제 발전을 이룩한 많은 국가들은 시장만능주의가 아니라 국가 개입주의를 채택했었음을 실례를 들어 설명한다. 아마 현재 기업가들이 싫어하는 경제학자 중에 장하준과 우석훈이 들어가지 않을까? 

  내가 보기에 장하준의 논리는 박정희 시대에 이미 우리가 겪어 본 논리이다. 우리나라 국민들 중 어느 정도 나이드신 분들은 박정희 대통령를 이 나라를 가난에서 구원해낸 구원자로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퇴보는 둘째치고 오늘날 한국의 경제의 기틀이 그 시기에 어느 정도 형성된 것은 사실이다. 그 당시 시장에 대한 국가의 역할이 무엇이었는가? 개입과 계획 경제가 아니었던가? 매번 기업이 도산될 위기에 국민의 혈세로 공적자금을 투자하여 기업을 살리는 것이 누구이던가? 시장인가? 국가인가? 위기의 순간에 기업이 매달리고 구조 요청을 외치는 곳이 어디인가? 시장인가? 국가인가? 국가가 시장에 개입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는 아예 성립이 불가능한 주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국가의 개입을 부정하고 불공정한 것으로 몰아가는가? 공익을 도적질하여서라도 사익을 최대화하기 위해서이다. 제2 롯데 월드 건설, 민영화, 대운하 건설 등에서 공익과 사익이 부딪히는 순간 기업이 무엇을 택하는지 살펴보라. 그들이 무슨 주장을 하는지 살펴보라. 그러면서도 기간 시설 건설이나 돈을 내야 할 때가 오면 국가의 개입을 주장하는 것이 시장 옹호자들의 논리가 아니던가?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이 불온서적에 들어갔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 책은 나쁜 사마리아인보다 더 직설적이고 더 적나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불온 서적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제목이 점잖고 그 내용이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 친기업의 시대에 꼭 읽어볼 책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작심하고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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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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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한비야?  

  나에게 있어서 그녀는 처음에는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를 정도로 무관심한 이름이었다. 조금 그에 대하여 알아가게 될 즘 그저 책으로만 알게된 등산개? 그러나 그 한비야의 이야기를 꿈이있는 교회 목사님의 "즐거운 인생"이라는 영화 설교를 통하여 알게 되었다. 이 책에도 기록되어 있는 케냐 안과 의사와의 에피소드가 바로 그것이다. 

  월드비전에서 일을 할지 말지 결정을 하게 될 즘에 케냐의 긴급 구호 현장에서 만난 안과 의사에게 이해되지 않아서 그녀거 물었다고 한다. 여기와서 있는 그 시간에 병원을 운영하면 더 큰 돈을 벌텐데 왜 여기 와 있냐는 물음에 그 의사가 이렇게 말했단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과 재능을 돈 버는 데에만 쓰는 건 너무 아깝잖아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일이 내 가슴을 몹시 뛰게 하기 때문이예요." 이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그 후로 긴급 구호의 현장 어디에나 긴급히 달려가는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나에게 가슴뛰는 일은 무엇일까? 청년을 담당하고 매일 만나는 청년 담당 목사로서, 과연 나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청년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은 무엇일까?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러나 때론 그것이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찌들어서 그것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한비야는 너무나 부러운 대상이다. 자기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축복일 것이다. 

  한비야의 그 생활이 부러워서 이 책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푹 빠져버렸다. 실리의 계산이 아닌 사랑의 모습으로 인종과 종교를 초월하여 이곳저곳으로 뛰어 다니는 그녀의 열정과,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긴급구호 현장의 난민들의 슬픔들은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럼 나는? 내가 할 일은 무엇이냐?" 참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든 책이며,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책이다. 현실의 부조리 대문에 불편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한 후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을 감당하지 않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내가 너무 가식적인 것 같아서 불편하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한번 심각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큰 결정을 내렸다. 유니세프 후원금을 1만원 더하여 3만원을 내기로 한 것이다. 작년부터 꾸준히 해오고 있는데 여기에 1만원을 더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매우 큰 일이다. 이 1만원이 어떤 이에게는 생명을 다투는 큰 물질일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도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꽤 커다란 부분이다. 그러나 내 것을 포기하지 못하면서 무슨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겠다는 당돌한 생각을 하는 것이냐라는 생각에 포기한다. 조금만 덜먹으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인종과 종교를 떠나서 누구에게나 살아갈 권리가 있다. 삶의 문제, 생존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그 생존이 나에게는 매우 쉽게 허락이 되어 있지만 세상에는 그 생존의 문제 대문에 오늘 하루도 벼랑끝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와 가장 가가운 피붙이가 죽었음에도 살아 있기 때문에 그 삶의 끈을 놓지 않고 아둥바둥 살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구차하다고, 꼭 그렇게까지 살아야 하는가 반문하겠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사실만으로도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삶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들을 향해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냐? 그들이 삶의 끈을 놓지 않도록 응원해 주고 내게 있는 것은 조금만이라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의 삶을 한번 돌아보고 깊이 성찰하게 만드는 책이다. 

  먼 훗날 아니, 5~10년이 지나고 나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고 고백하고 싶다. 그 사랑이 나를 여기까지 끌어 왔노라고 고백하면서 살고 싶다. 마지막으로 설교를 준비하다가 읽은 책의 구절을 인용하고 마치려고 한다. 

   "가난한 사람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 하나님은 기도 이상의 것을 나에게서 찾으신다." 

  내가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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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세상의 권력을 말하다 2 촘스키, 세상의 권력을 말하다
노암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시대의창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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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돌발영상 고정화면> 

  작년 7월 경 YTN의 사장이 구본흥씨로 바뀌었다. 언론 통제라는 온갖 비판에도 불구하고 사측은 주주회의를 강행했고 구본흥씨를 사장으로 인선했다. 많은 기자들이 반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까만 양복을 입으신 분들을 앞에 모셔 놓고 AT필드(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그 AT필드)를 쳐가면서 사장 인선을 마쳐버렸다. 그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면서 AT필드(Asloute Terror Field)가 저것이구나 생각을 했다. 주주총회를 지켜보면서 언론의 독립을 외치던 기자들과 노조들에게 주주총회 자리는 절대적인 공포의 장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무력감으로 당을 쳤을 것이며, 믿었던 선배들의 꺾여진 기자 정신에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 모든 울분 때문일까 주저앉아 서럽게 우는 젊은 기자들의 모습이 눈에 밟혔고 그들의 아픔에 어느 정도 공감이 갔다. 

  구본흔 사장으로 YTN의 사장이 교체되면서 그런 생각을 해봤다. 조만간 돌발 영상이 사라지겠는걸? PD수첩이라든지 2580이라든지 시사 프로그램들이 사라질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심심치 않게 들렸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 그런 생각도 들었다. 설마 가장 인기 있는 코너를 없애지는 않겠지? 본인은 뉴스채널을 YTN만 고수했으며 그 이유는 전적으로 돌발영상 때문이었다. 얼마 시간이 흐르지 않아 돌발영상은 자리를 감추었고, 나는 텔레비전 채널을 MBN으로 고정시켜 버렸다. 왜냐고? 팝콘영상 때문이다. 기자의 편집이 최소한도로 들어가 현장의 모습을 날 것 그대로 전해 주는 것이 돌발영상과 팝콘영상의 매력이 아니었던가? 아마 MBN의 팝콘 영상마저 사라져버린다면 나는 뉴스채널을 그다지 관심있게 보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개콘보다 더 재미있었던 돌발영상이 폐지되고 난 후 왜 그렇게도 언론탄압이라는 말을 썼었는지 알 것 같았다. YTN의 뉴스를 가만히 살펴보면서 묘하게 지금까지와는 핀트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몇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대놓고 정부 편을 들지 않지만, 묘하게 촛불집회에 관하여 부정적인 뉘앙스를 던지는 말들을 자주 사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런 답답한 마음을 품고 있던 가운데 촘스키의 책을 읽게 되었다. 1권은 며칠에 걸려서 읽었지만 2권은 단숨에 읽어 내렸다. 언론에 대한 그의 생각이, 민주주의와 기업과 정권에 대한 그의 생각이 내 가슴에 막혔던 체증들과 의문들을 다 풀어 주는 것 같았다. 물론 그의 이야기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상당히 과격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부분도 물론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그의 이야기과 생각은 그의 이름값을 할만했다. 

  촘스키는 미국을 중심으로 정부와 기업과 언론의 검은 카르텔에 관하여 이미 지적한바 있다. 이에 대해서 궁금하다면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시대의 창"라는 책을 보길 권한다. 촘스키는 지금 우리가 민주주의라 생각하는 것들은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닌 손상되고 변질된 민주주의라고 단언한다. 그저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믿고 있을 따름이지 실제적인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고 한다. 오히려 지금 정치체제는 귀족주의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과거의 귀족 대신에 지금은 기업과 자본가들이 그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다르달까? 과거에는 혈통에 의하여 엘리트와 비엘리트가 구분지어졌지만 지금은 자본에 의하여 엘리트돠 비엘리트가 구분지어 진다고 말하는 그의 주장은 충분히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  

  어찌되었던 촘스키는 기업과 이를 지원하는 정부(사실상 기업과 정부는 한통속일 뿐이다. 사익을 대놓고 추구하느냐 공익으로 포장해서 챙기느냐의 차이만 있을뿐이지)는 현대 기술의 총아인 언론을 이용하여 국민을 세뇌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세뇌라는 말이 과격하다면 달래고 있다고 할까? 아니면 전체를 보지 못하게 일부만 보여주면서 자기들이 정해놓은 방향으로 여론이 몰리도록 통제하고 있다고 할까? 왜 이렇게 군사력과 물리력이라는 단순하면서도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방법을 두고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매커니즘을 사용하는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만큼 더 효과적이며 그 효과가 거의 반영구적이기 때문이다.  

  촘스키는 그 예로 지금까지 미국이 사용해왔던 과거의 정책들을 들고 있다. 베트남, 니카라과, 브라질, 멕시코, 라오스, 칠레, 이스라엘, 그리고 한국 등등 이러한 예들은 수도 없이 많다. 가장 최근에 일어난 일이라면 이라크를 들 수 있을 것이며, 조만간 북한과 이란도 그 예에 들어가지 않을까? 미국은 항상 민주주의를 대의 명분으로 내세운다.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세우기 위해서라면 민가에 폭격을 하는 것도 허용이 된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면 어린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는 것쯤이야 감수할 수 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지라도 타협해서는 안된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면 국미느이 투표에 의해서 선출된 지도자마저도 쿠데타를 통하여 갈아치워야 한다. 이것이 미국이 말하는 민주주의다. 이것이 미국이 세계에 뿌려놓은 민주주의의 실체이다. 그러나 이게 정말 민주주의인가? 이것이 정말 대중을 위한 민주주의인가, 아니면 엘리트를 위한 민주주의인가? 그 대답은 누가 봐도 뻔하다. 다국적 기업을 위해 일하는 민주주의, 헤지펀드를 위해 압력을 행사하는 민주주의, 이것이 미국식 민주주의의 현실이 아니던가? 이러한 현실을 언론을 통하여 교묘하게 조작한다. 거짓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결코 전체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이러한 조작에 사람들은 쉽게 넘어간다. 그리고 언론이 선전하는 민주주의에 박수갈채를 보낸다. 그것들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자기에데 돌아올 것이 뻔한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한국의 사회체제는 어느새 삼각형에서 마름모를 지나 팔자형으로 이행하고 있다. 이것은 비단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이미 제3세계에서는 실행이 완료 되었으며, 한국은 이미 많이 진행이 되었고, 미국마저도 거의 완성이 되어가고 있다. 세계 금융위기는 이 현상을 부추기는 촉매제 역할을 할뿐이다. 금융위기라고 하지만 위기는 중산층까지의 위기이지 상층의 위기는 아니다. 위기를 딛고 상층으로 올라가는 중산층은 기회가 될 것이지만 대다수의 중산층은 하층으로 곤두박질칠 수밖에 없다. 시스템이 그렇다. 이것을 바꾸려면 촘스키는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직적인 움직임을 엘리트들은 원하지 않기 때문에 언론을 통하여 방해한다. 여기에 속지 말고 비판적인 시선을 가지고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이것이 촘스키가 말하는 세상의 권력이다. 

  도킨스의 저서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에서 제목을 따왔다. 신 망상이 더 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만들어진 미국식 민주주의가 되었것, 미국식 민주주의의 망상이 되었건 이대로 간다면 대안은 없다. 그저 비정치적인 모습을 가장한 권력의 포기만이 있을 뿐이다. 요즘 대한 민국을 해석하고 이해하고 대안을 세우는데 가장 필요한 책이 아닐까? 부디 미국식 민주주의가 만병통치라는 과대망상에서 우리가 깨어 나길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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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세상의 권력을 말하다 1
노암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시대의창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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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촘스키는 좌파다.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며 본인 스스로도 자신은 좌파라고 선언한다. 촘스키는 본인이 좌파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좌"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북한을 떠올리며 빨갱이 타도를 외치는 우리 나라에서는 감히 상상도 못하는 일이기에 부러울 뿐이다. MIT의 석좌 교수를 지내고 있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석학이요 어찌 보면 기득권자인데 그의 생각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행동하길 원한다. 그리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미국 정부에게 있어서 촘스키만큼 골치 아픈 존재는 없을 것이다. 존재감이면 존재감, 명예면 명예, 명성이면 명성 그 어느것하나 빠지지 않는 사람이 미행정부를 날카롭게 비판하니 말이다.  

  행동하는 양심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그의 책을 읽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다. 인터뷰집이라 그렇게 딱딱하지 않다. 그렇다고 가볍지 않다. 세계의 모든 사건들을 다 망라하고 있어서 그의 생각과 말을 전부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신문을 빠짐없이 읽어야 하며, 기업과 권력의 관계, 국제조직의 동향과 세계의 전쟁에가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렇게 힘들고 번잡스럽고 어려운 과정을 감내하고 난 다음 그의 책을 접하는 순간 우리는 신문 기사의 행간을 읽어낼 수 있게 된다. 조중동을 애독하며 오직 그것만이 진실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가는 한국의 많은 이들에게 나는 촘스키를 기꺼이 권해주고 싶다.  

  첫번째 인터뷰의 원제는 "The Common Good"이다. 공공선이라고 번역할 수 있으려나? 공공선이란 "개인이 아닌 국가나 민족, 인류를 위한 선"이락 사전에 정의 되어 있다. 공공선에 관한 촘스키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현재 사회에서는 공공의 선이라는 것은 말만 남아 있는 상황이란다. 실제 공공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존재한다고 언론이 믿게 만들뿐이다. 우리는 언론의 말을 듣고 그저 공공선이 존재하는구나 착각하면서 살고 있을 뿐이란다. 이 사회에 남아 있는 것은 공공선이 아닌 기업이나 권력을 위한 선이라는 것이다. 권력과 기업이 결탁하여 자기들의 이익을 얻어내고 이렇게 얻어진 이익을 창출해내기 위한 결손은 국민들이 감당하고 있으며, 기업들은 언론을 통하여 이것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 촘스키의 생각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내린 분석인데 묘하게도 이 분석이 한국에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얼마전 이슈가 되었던 종부세 환급에 관한 법률이 딱 그예이다. 

   노무현 정부가 어떤 정부였는지에 대하여 많은 이견들이 존재한다. 나는 노무현 정부가 흔히 이야기하는 좌파 정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무현 정부는 철저하게 우익 정부이다. 어쩌다가 빨갱이 정부로 몰리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아마도 한나라당이 아니라서 그럴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해 왔던 정책들은 철저하게 기업의 이익을 보장하고, 민족주의적인 패권을 확립하는데 그 목표를 두고 있다. 이런 노무현 정부의 정책 중에 그래도 내가 생각하기에 공공선을 위하여 구색이나마 갖추었구나 생각하는 것이 바로 종부세이다. 종부세에 관해 반대하는 것은 참 이기적이란 생각이 든다. 종부세는 결국 형평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종부세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폐지가 되었다. 그리고 과도하게 걷은 종부세를 환급해 주겠단다. 국민들의 세금으로 말이다. 그러면서도 미안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당하다. 국민적인 합의를 거치지 않은 세금을 걷는 것은 구시대적인 발상이란다. 그런데 말이다. 종부세 환급에 관하여 국민적인 합의를 본인들은 거쳤는지 묻고 싶다. 건설자본과 그렇게 밀착되어 있는 이명박 정부가, 고소영 강부자 내각이라 이름하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한나라당이 종부세를 환급해야 한다는 정책을 밀어 붙인 것이 도대체 수상쩍다. 누구를 위한 환급인가? 

  한나라당에서 환급받은 세금이 700만원이란다. 도무지 이 말을 우리더러 믿으란 말이가? 더군다나 그것을 불우이웃 돕기를 위하여 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종부세 환급이 한두푼도 아니고 국민의 세금으로 재원을 마련했다고 한다. 나라 살림 살이야 뻔한 것이고 분명히 환급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려면 깎이는 부분도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종부세 환급을 위하여 깍인 부분이 어디인지 아는가? 아동복지, 사회 복지를 위한 재정이다. 그럼 정리를 해보자. 재산이 6억이상인 사람이 냈던 종부세를 환급해 주기 위하여 밥 한끼 목먹는 아이들을 돕기 위한 기금을 없애버린다는 것이 과연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분명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결과가 그렇지 않는가?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는 맞는가? 가연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은 공공선에 대한 개념은 가지고 있는가? 

  이 사태에 대하여 언론이 무엇이라 말하는가? 조중동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잘하는 짓이라고. 헌재의 판결도 난 것이고 적법한 절차를 통해서 지금까지 잘못되어 왔던 일들을 바로 잡은 것이라고 말한다. 일견 맞는 말 같다. 그러나 여기에서 촘스키가 말한 권력과 기업과 언론의 관계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자. 촘스키는 펜타곤과 기업과 언론의 관계를 말한다. 펜타곤을 통하여 미국민의 세금으로 군수기업을 먹여살린다. 군수 물자를 만드는 기업의 주머니를 국민의 세금으로 채워준다. 언론은 이를 은폐한다. 사실을 100% 보여주지 않고 일부만 보여주면서 국민으로 하여금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게 만든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국민은 철저하게 배제된다. 이게 촘스키가 말하는 공공선이 결손되는 과정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들어보자.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기업을 건설 기업으로 바꿔놓기만 하면 된다. 권력은 국민의 세금으로 건설기업 및 대기업의 주머니를 채워준다. 이들과 한편인 조중동의 재벌 언론들은 이 사실을 은폐한다. 물론 없는 말을 꾸며내지 않는다. 다만 진실을 100% 다 보여주지 않을 뿐이다. 국민은 언론에 속아 이 말을 그대로 믿는다. 이 과정에서 국민은 철저하게 배제된다. 무엇이 다른가? 전혀 다를 것이 없다. 

  결국 종부세 환원은 공공선이 아닌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책일 뿐이다. 단지 우리는 이것이 공공선을 위한 일이라 속고 있을 뿐이다. 지금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대체로 이렇다. 이런 시선으로 사회를 살펴보라. 놀랍도록 날카로운 촘스키의 지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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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과 도쿄대 1 - 현대 일본을 형성한 두 개의 중심축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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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천황과 도쿄대라는 두 가지 단어는 일본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단어이다. 그러나 이 두 단어를 가지고 일본 현대사를 날카롭게 서술할 수 있다는 것은 작가의 능력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두번 놀란다. 첫번째는 자국의 현대사를 이렇게 날카롭게 인식하고 서술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일본의 그것과 한국의 그것이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는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그런 과정을 밟았다는 것이고, 그 기간이 일본에 비하여 훨씬 짧았다는 정도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일본에게 있어서 천황과 도쿄대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한국인인 나에게 있어서 일본이란 나라 자체가 거부감의 대명사이기 때문에 천황이라는 말과 도쿄대라는 말은 가급적이면 언급하고 싶지 않은 단어들이다. 게다가 "텐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카미카제식 공격을 감행했던 황군의 모습은 나로 하여금 천황이라는 말에 대하여 더욱 반발심을 갖게 만들었다.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경험이 있는 한국인에게 천황은 일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천황에 대한 존중도 없고, 경외도 없고, 오직 원수를 대하듯이 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일본 사람에게 있어서 천황이란 대단한 존재감을 풍긴다. 우리가 단군을 우리 나라의 국조로 여기듯이 일본에게 있어서 천황은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신이다. 그 어떤 부당한 권력에도 정당성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인물이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한가? 일본이 사분오열하여 오랜세월 전란을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힘과 명분이다. 명본의 최고점은 천황이며 이것은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천황가 자체가 힘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천황은 철저하게 약자이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한국에 왕가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한국에서 왕가란 힘으로 나라를 취하면서 시작되고, 그 힘을 잃었을 때 왕조가 교체된다. 일본은 천황이 아닌 막부가 그런 역할을 감당했다. 이게 천황이 오늘까지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천황이 명분의 최고봉이라면 도쿄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도쿄대는 간판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딸 수 있는 간판의 초고봉이 도쿄대가 아닐까? 물론 간판이라 함은 실력이 아니라는 말이다. 도쿄생이 최고의 실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착각을 하는 시스템 가운데에서만 작동하게 되는 간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가 도쿄대생들을 찻잔이라고 부른 것이다.  

  한국에서는 어떤가? 한국에는 물론 천황이라는 명분은 없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은 다른 면분이 있다. 그것은 반공이다.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씌운다면 모든 것이 무사통과이다. 교호에서도, 정치에서도, 심지어는 경제에서도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우리 국민들을 하나로 모으는 커다란 힘을 발휘한다. 이 힘이 얼마나 거대한가? 대통령마저도 탄핵할 정도로 대단하다. 어디로 보나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노무현 대통령을 빨갱이요 좌파로 몰아서 오늘날까지 우려먹고 이쓴 것을 보면 대한민국에서 반공은 천황 노릇을 하고 있다. 그럼 도쿄대는 무엇인가? 서울대이다. 서울대느 그 태생부터 도쿄대와 같은 맥락에서 시작되었다. 경성제대가 서울대의 전신임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던가? 실력은 둘째 치고 한국에서 달 수 있는 최고의 간판이 서울대 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거칠지만 이런 구도로 이 책을 읽고 한국 사회에 대입한다면 너무나 흡사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더군다가 학교에서 주도하여 관료를 키우는 것이 도쿄대의 가장 큰 목표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수한 인적 자원을 길러낸다는 서울대의 이념이, 각계 각층에 포진하고 있는 서울대 인맥이 도쿄대의 인맥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좌와 우의 개념조차 국익을 추구하는 태도에 따라 갈린다는 것까지 어쩜 그리 똑같은지. 서울대 출신들의 좌냐 우냐라는 것 또한 국익, 좀더 자세히 말하면 전체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것임은 두말하면 잔소리 일 것이다. 

  두서없이 썼다. 아직 2권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한번 읽어보라.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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