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1 | 22 | 23 | 2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영의 자리
고민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0에서 1로 변모하는 과정은 설레면서 우울하다.

곧 1이 되겠지만 아직은 아니므로 0에 가까운 자신을 체감하게 된다.

첫 출근 날에는 0.0000001쯤 되는 기분이었다."

예전에 천문대에서 진행하는 1박2일 캠프를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도 지금과 같은 5월 언젠가였던거 같은데... 망원경을 보며 처음으로 하늘을 가까이 보고 있다는 설레임이 지금도 기억난다. 별자리를 보던때는 당연히 밤인데다 산중턱이었으므로 꽤 쌀쌀했음에도 별자리를 설명하던 강사가 그런 말을 했었다. 별은 추운 계절에 훨씬 잘 보인다고, 여름이 되어갈수록 수증기가 하늘에 많아져서 별이 잘 안 보인다고... 그때 생각했었다. 여름이라는 계절은 강렬한 햇빛때문에도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지만 밤에 별도 잘 못보는 계절이었구나... 이 소설을 읽으며 그때 그 여름의 수증기가 생각났다. 책속의 계절이 여름이기도 했지만, 별을 아무리 찾아도 가리고 감춰버린다는 하늘의 그 여름수증기처럼 이 소설은 뿌연 안개속을 걷고 있는 느낌으로 읽게 되는 소설이라서... 너무나 뿌옇고 뿌옇고 뿌얘서 영이 무엇인지 영의 자리가 어디인지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건지 온통 뿌얘서 아무것도 명확하게 보이질 않았다.

무엇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게을렀던 건 아니다. 남들만큼은 노력했다고 믿었는데 부족했던 걸까. 더 노력한다고 달라지기는 할까. 살아온 날보다 살아야 할 날들이 더 하찮아 보였다. 평소와 다른 선택을 하게 되는 건 그런 순간일 것이다. 달라질 거라고 믿거나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믿거나. 나는 후자였다. (p. 12)

'나'는 얼마전 실직을 했다. 여기저기 이력서를 보냈으나 생각보다 취업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살던 원룸에서 집주인이 나가달라고 해서 급하게 이사를 하느라 연락도 잘 안하는 본가에 손을 벌려야 했다. '넌더리가 났다. (p. 12)' 그래서 한 약국에서 모집하는 전산원 알바 자리 면접에 나갔다. 그어떤 학력이나 이력이나 나이나 성별이나 아무조건도 따지지 않는 단순업무 알바 자리에.

-유령이 또 왔네.

-네?

-유령이라고.

-유, 뭐요?

-몇 번을 말해.

약사가 나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유령이라니까. (p. 19)

-유령이 뭔데요?

-유령이 유령이지 뭐겠어.

-핼러윈에 사탕 받는 유령이요?

-그건 유령으로 분장한 사람이고

-진짜 유령이요?

-그렇다니까.

-제가요?

-원래 유령은 자기가 유령인지 몰라.

-유령은 죽은 사람이잖아요. 저는 살아 있는데요.

-산 사람도 유령이 될 수 있어. (p. 20)

약사는 대뜸 '나'를 유령이라고 한다. '나'는 별다른 의구심을 갖지 않고 그냥 그런가보다 한다. 소설에서 내내 이 '유령'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소설을 다 읽고나서도 이 '유령'이 뭔지 나는 알수 없었다. 취준생 이라던가 백수 라던가 경력단절 이라던가 사회부적응자 라던가 여하튼 변변한 직업을 갖지 못하고 아직 젊다면 젊은 30대의 나이에 모아놓은 것이 없거나 혹은 빚에 허덕이며 알바나 소소한 일회성 일자리들로 근근이 살아가는 존재, 그러니까 사회의 중심에서 튕겨나왔으나 그 언저리를 떠돌고 있는 존재를 '유령'이라고 칭한것 같긴 한데 희미한 짐작일뿐이다.

해를 정면으로 볼 때처럼 이마가 간질간질 했다. 광반사 재채기 증후군이라는 이름을 알기 전까지는 내가 과민하다고 생각했었다. 어떤 증세에 이름이 붙었다는 건 유의미한 통계가 생겼다는 뜻이다. 나 혼자만의 경험이 아니고 드문 일도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혜가 가르쳐준 건 그런 것들이었다. 나는 숨 쉬는 법부터 다시 배운 기분이 들었다. 혜를 만나기 전에는 아마 물고기였을지도 모른다. 이별이 진행되는 지금 도로 물고기가 되어버렸는지도. 할 말이 목구멍 안에 고인 채 빠져나오지 못했다. 재채기를 하기 전에 그만 고개를 숙였다. (p. 57)

'나'와 혜는 이별한 것 같다. 하지만 어떤 관계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약국에는 김약사 말고 '나'보다 먼저 들어온 조가 있다. 조 역시 유령이다. 조 역시 누군가와 이별중인것 같다.

최저 임금으로는 미래를 꿈꾸기 어려웠다. 아직 서른이라고 해도 살아내는 당사자에게는 인생의 끝자락이다. 상상력이 고갈되었는지 막다른 길 너머를 그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벌써 길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아직과 벌써 사이에는 넓은 해협이 있었다. 안개가 자욱한 바다에서 홀로 헤매는 기분이 들 때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달고나 먹을래요?

조는 요즘 매일같이 토토를 했다. (p. 92)

새로운 취향을 만드는 데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조는 노력이 유발하는 피로를 감당할 여력이 없어 보였다. 나도 요즘 무거운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지난 몇 해를 훨씬 바쁘게 살았는데 그때보다 더 지치는 기분이었다. 일을 배우느르 그렇다는 핑계도 슬슬 약효가 떨어지고 있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좋을지 생각하는 일조차 피곤했다. 그나마 무엇이라도 되었으니, 유령이기는 하지만, 다행인 걸까. (p. 97)

'나'는 시간이 나면 SNS를 둘러보며 시간을 때운다. 조는 그런 '나'를 보며 자신은 그런 걸 잘 모른다고 유투브나 가끔 본다며 나이들수록 익숙한 것만 찾게 된다고 말한다. 아직과 벌써 사이에는 얼마나 넓은 해협이 있는 걸까, 누군가에게는 해협이 아니라 그저 졸졸졸 흐르는 작은 시냇물 같을 수도 있을까. 상상력이 고갈되고 무엇을 해도 피곤한 상태 일종의 번아웃 상태가 유령인 걸까. 유령이 된 것도 무엇이 되긴 된 것일까. '나'는 유령이 된 것을 즐기고 있는 걸까.

혜를 집에 데려다준 뒤로 단단한 기둥 같았던 사람이 연약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부식된 면이 바스러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원하는 자리에 머물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자리를 옮겨 앉는 순간 어긋난 틀을 메우지 못한 채 자꾸 벌어지기만 했다. 관계가 허물어지는 소리는 짧은 알림음과 긴 적요의 반복이었다. 매일 주고받던 메시지가 점차 길을 잃었다. 나는 짐이 되지 않는 기쁨과 짐이 될 수 없는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p. 130)

'나'에게 혜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주기적으로 네일아트를 바꾸고 패셔너블한 차림을 하면서 자신을 가꾸고 영화나 전시회등을 꾸준히 관람함으로써 취향을 가꾸고 정치뉴스와 커뮤니티 활동에 열성적으로 댓을 달거나 모임에 나가는 등 삶의 모든 면에 주도적인 사람으로 늘 '나'에게 깨우침과 깨달음을 주는 존재였다. 그러던 어느날 만취한 혜를 집에 데려다주면서 '나'는 보았다. '현관에 재활용 쓰레기가 아무렇게 쌓여 있었고 주위에 양념이 묻은 플라스틱 그릇이 흩어져 있었다. 바닥에는 벗어놓은 스타킹이 머리카락 뭉치와 뒤엉켜 있었다. 쓰러져 있는 빈 술병에도 먼지가 앉았다. 싱크대에 시퍼렇게 곰팡이가 슨 귤이 보였다. 개수대 거름망에 음식물 쓰레기가 가득 차 있었다. 화장대 위에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인 화장품이 수십 개 늘어서 있었다. 몇 개는 뚜껑을 열어놓아 내용물이 말라붙었다. (중략) 나는 현관으로 돌아가 발에 묻은 먼지 덩어리를 비벼서 떨어뜨리고 신발을 신었다. 문을 닫자 도어록 잠기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p. 129)'

어머니는 아버지와 다투고 나면 꼭 나에게 와서 하소연했다. 한때는 어머니와 같은 나라의 주민이라고 생각했다. 귀담아듣고 연민했으며 언젠가 상황이 나아지리라 믿었다. 몇 년쯤 똑같은 얘기를 반복해서 들은 뒤에야 어머니에게 딸이란 약국에서 구입하기 쉬운 약과 같다는 걸 알았다. 수시로 복용해도 병세의 원인이 다른 데 있었기에 차도는 없었다. 그저 진통제에 불과했던 약의 역할을 거부했더니 어머니의 한탄은 비난응로 바뀌었다. 나는 점차 침묵을 모국어처럼 사용했다. (p. 135)

참 이상스러우면서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세상엔 행복한 가족이 별로 없다는 거다. 소설을 읽으면 크고 작은 문제로 가족은 늘 껄끄러운 관계이고 뉴스를 보면 크고 작은 문제로 가족은 늘 폭력적인 관계다. 그런데 가족이란 단어가 풍기는 느낌은 가족이란 단어에 대해 배울때의 기억은 너무 다르지 않은가? 그러고보니 어쩌면 자라는동안은 너무 이상적으로만 배워서 어른이 되어 현실에 내팽개쳐졌을때 그토록 많이들 유령이 되는 것일까...

이제까지 쌓아온 것들을 전부 무너뜨린 경험이 나에게도 있었다. 숨 쉬는 법을 모르던 물고기는 숨 쉬는 법을 잊은 물고기가 되었다. 바다는 여전히 푸르고 거대했다. 끝났다거나, 실패했다거나, 돌이킬 수 없다는 말보다는 유령이 되었다고 하는 편이 나았다. (p. 146)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숨을 쉰다. 사람은 들숨날숨으로 숨을 쉬고 물고기는 아가미로 숨을 쉰다. 하지만 들숨날숨만 숨을 쉬는 거라고 말할 수 있다면 물고기는 애초에 숨을 쉬는 법을 모르는 거다. 하지만 살아 있고 들숨날숨으로 숨을 쉬지 않아도 살아 있음으로 들숨날숨으로 숨쉬는 법을 잊어도 살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유령이 되었다. 유령은 숨을 쉬지 않는데...'나'는 살아 있는데... 살아있다고 말하기 보다는 유령이 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았다는 것일까...

아픔에 대한 공감은 고통을 나누어 받는 일이다. 처음에는 감당할 만하지만 점차 가슴에 파랗게 멍이 든다. 나는 진통제를 복용하듯이 덕질을 했다. 아이돌, 배우, 유투버, 캐릭터 상품 등등 좋아하는 감정에 한 발이라도 걸치면 전부 덕질의 계끼가 되었다. 돈이 들기는 했지만, 원래 사원이 있던 시절부터 치료에는 대가가 필요했다. (p. 173)

엄마는 딸이 듣거나말거나 하소연하는 것이 진통제가 되었다면 딸은 덕질에 돈을 쓰는 것이 진통제가 되었다. 하지만 진통제는 먹을수록 내성이 생긴다. 효과가 없어지면 더 쎄게 먹어야 한다. 그렇게 진통제를 늘려나가는 것에도 한계가 있고... 그래서 '나'는 유령이 되었다는 것일까...

스물다섯 해보다 지난 다섯 해를 더 치열하게 살았다. 나는 성실하게 하루를 파쇄해갔다. 무언가는 변하고, 무언가는 변하지 않은 채 그렇게 구부러져 0이 되었다. (p. 198)

0이 된 것이 유령이 되었다는 것일까...

조에 비해 내가 겪는 비극은 흔하디흔하고 산개되어 있었다. 하나씩 짚어 말하면 평범한 일상으로 보인다는 점이 비극이었다. 차라리 혜를 만나지 않았다면 더 편했을지 모른다. 나는 달라졌는데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그대로여다. 서른이라는 섬에 얼마나 지쳐서 도달했던가. 유령이 되는 건 외로움에 대한 저항이 실패하는 과정이었다. (p. 218)

'나'는 몇달만에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달라졌는데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그대로' 라는 것을. 그래서 그 모든 그대로인 것들에게로 돌아가기로 했다. 갑자기. 약국을 그만두고 취업을 했으며 덕질을 시작하고 커뮤니티에 공지된 집회에 나갔다. 외로움에 대한 저항에 실패하여 유령이 되기를 이제 거절한 것으로 보이는 '나'의 모습과 '유령이 되는 건 외로움에 대한 저항이 실패하는 과정'이라는 말이 상치되어 이제 어느정도 '유령'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내머릿속은 또다시 뒤죽박죽이 되었다.

강의가 끝나면 뿔뿔이 흩어져 다시 만나지 않겠지만 비슷한 취향을 공유하는 동안은 더없이 가깝게 느껴질 이들이었다. 강의가 끝나면 또 무언가를 배워보고 싶었다. (p. 241)

불분명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나로서는 소설을 읽는 내내 어떻게든 줄거리를 정리해보려고 유령이 무엇인지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며 읽은 소설이었다. 하지만 이름도 직업도 커뮤니티의 활동과 혜와의 관계등 '나'의 삶은 온통 희뿌연 안개에 가려져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결국 0이 무엇인지 유령이 무엇인지 그래서 영의 자리가 어디인지 나는 결국 찾지 못한채 마지막 페이지를 덮어야 했다.

아직 1이 되지 못한 세상의 모든 0에게 바치는 조용한 응원, 고민실 첫 장편소설 『영의 자리』 한국문학의 새로운 발견, 고민실 첫 장편소설! 이라는 책소개와 “세상은 유령이 살기에 더 적합한 구조로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덤덤하고 세밀하게 일상을 관조하는 유령의 글쓰기 라는 출판사 서평을 통해 이 책은 내가 설명할 수 없는 미학적 소설로 평가될 수도 있겠구나 라고 생각한다. 그렇게보면 그럴수도 있겠구나, 다들 그렇게들 살고 있으니 너무 아등바등하지 말라는 응원의 글이 될수도 있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뿌연 안개속을 걷는 사람들에게 혼자가 아니라고 그렇게 안개속을 걷는 사람들이 많아요 라고 알려주는 이 소설이 그렇게 유령의 글로 위안을 줄수도 있겠구나 싶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함께 안개속을 걷는 것보다 안개를 걷어낼 뚜렷한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좀더 구체적인 응원을 느낄 수 있는 소설이 더 취향저격인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0과 1사이 어딘가에서 부유하는 삶에 대한 관조또한 필요하다고도 생각한다. 그 관조의 시선에서 이 소설과 비슷한 관점에서든 다른 관점에서든 0의 자리와 1의 자리에 대해 늘 생각해보게 될 것 같다. 나는 0과 1사이 어디쯤일까... 0.0000001 쯤은 되려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들의 부엌
김지혜 지음 / 팩토리나인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마음이 쉬어가는 곳, 여기는 '소양리 북스 키친'입니다.

책읽기를 즐겨하는 사람이라면 나만의 서점 나만의 북스테이를 꿈꿔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게다가 내가 읽은 책을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까지 함께 한다면? 그야말로 꿈이다꿈... 그 꿈을 실현시킨 사람이 있다. 비록 소설속에서나마 ^^

책으로 가득한 공간에 맞는 이름을 고민하던 중, 책마다 감도는 문장의 맛이 있고 그 맛 또한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이 생각났다. 각각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추천해 주듯 책을 추천해주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힐링이 되듯 책을 읽으며, 마음을 쉬어가는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북스 키친'이라고 이름 붙이게 되었다. 맛있는 책 냄새가 폴폴 풍겨서 사람들이 모이고, 숨겨왔던 마음을 꺼내어 보여주고 위로하고 격려받는 공간이 되길 바랐다. 마침내, 유진의 허리케인 회오리는 잠잠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세계에 입장한 상태였다. (p. 12~13)

유진은 선배와 스타트업 회사를 열심히 준비했고 또 성공시켰다. 하지만 현실은 역시 녹록치 않았고 회사를 정리하고 여행하던 중 우연히 소양리에 들렀을 때 땅을 사게 됐다. 그 땅에 새로운 건물을 올렸고 '북스 키친'이라 이름 붙였다. 산속 평화로운 분위기와 책들이 주는 안정감과 맛있는 음식이 주는 넉넉함까지... 그야말로 꿈의 공간이 탄생했다. 이 공간에 제일 처음 발을 들인 사람은, 유진이 산 땅에 있던 한옥의 주인할머니 손녀인 다인이었다. 다인은 '다이앤'으로 알려진 싱어송라이터 탑스타였다.

가수가 디는 건 어렸을 때부터의 꿈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고 보긴 어려웠다. 다인은 자신만의 음악 스타일과 대화 방식으로 대중들에게 다가갔고, 그게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언젠가부터 다이앤은 대중의 애장품이 되었을 뿐이었다. (p.23)

할머니의 한옥이 다른 곳으로 팔리고 그 땅도 팔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인은 할머니와의 추억이 어린 소양리로 향했다. 티비속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고 진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인지도 모르겠고 너무 유명해져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옴짝달짝 못하게 된 지금, 자신을 스타가 아닌 그저 손녀로 대해주던 할머니의 따스함이 그리웠다. 그렇게 찾아간 곳에 역시 할머니와 할머니의 집은 없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따스한 '북스 키친'이 들어서 있었다.

직장 생활 4년 차인 나윤은 쳇바퀴 같은 회사 생활에 점점 익숙해짐과 동시에 질려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회사에 크게 문제는 없었다. 나윤이 다니는 회사는 좋은 프로그램과 복지 제도가 많은 IT회사이다. 하지만 나윤은 요즘 들어 매사에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이 회사에서 자신의 역량을 모두 발휘하고 온 마음을 바치고 싶지가 않았다. 다들 얘기하는 슬펌프가 온 것 같았다. (p. 61)

나윤에겐 대학생때 맺어진 4총사가 있었다. 지금은 각자의 길에서 열심히 사회생활 하느라 연락이 뜸해졌지만 생각만 해도 마음이 든든해지고 만나기만 하면 수다가 끊이지 않는 친구들... 그중 3년 가까이 연락이 없던 시우가 펜션스텝으로 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친구들은 갑작스런 여행을 출발했다.

지금 소희는 재판 연구원 3년 과정을 끝내고 서초동의 작은 로펌에서 변호사로 근무한 지 3년째였다. 내년이면 판사 지원이 가능한 '법조 경력 7년'을 채우게 된다. 내년 가을에 판사 자리에 지원해서 내후년 봄부터는 법복을 입는 것이 계획이었다. '서른네 살 판사, 최소희'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듯 일정한 속도로 정해진 순서에 도달할 당연한 미래라고 생각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p. 96)

소희는 타고난 머리에 노력까지 더해져서 지금까지 어려움 없이 자신의 커리어를 획득해 왔다. 늘 1등이었고 우수한 능력을 인정받아왔다. 그랬던 소희에게 뜻밖에도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고 소희는 급정지했다.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봤다. 이대로는 안되었다. 소희가 한달동안의 휴가를 쓸 곳으로 정한 곳이 '소양리 북스 키친'이었다. 이곳에서 어릴때 소희에게 상상력을 자극시켰던 <오즈의 마법사>를 새롭게 만났다.

마리는 복잡하고 계산적이고 이해되지 않는 모습투성이었지만, 지훈은 마리의 진짜 모습을 알았다. 겁이 많고, 혼자 있을 때만 몰래 울고, 평범해지기만을 소망하던 아이의 모습을... (p. 144)

북스 키친에서 처음 야외 결혼식을 진행하던 날, 지훈은 마리 모르게 이벤트를 준비한다. 어릴때 친구였으나 사춘기 시절 갑작스레 떠나고 연락두절됐던 마리가 지훈의 연구소에 파견나와 다시 만났을 때 지훈은 이번엔 꼭 마리에게 솔직하게 마음을 전하고 함께 있자고 말하고 싶었다. 그동안 들었던 마리에 대한 소문은 지훈에게 의미 없없다. 지훈은 마리에게 <가재가 노래하는 곳> 이라는 책을 소개한다. 하지만 마리는...

삶은 빛나는 것들로 가득한 화려한 쇼핑몰 같았고, 손을 뻗으면 원하는 것은 대개 쉽게 잡혔다. 그럭저럭 성적이 나와서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수혁은 아버지가 자신을 성에 차지 않아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수혁이 인생에서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존재는 아버지였다. (p. 172)

수혁은 재벌가의 아들이었고 어렵지 않은 인생을 누려왔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자신의 꿈을 잃었고 자신의 지위는 흔들렸다. 그 와중에 유일한 지지자였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하루하루 버티던 수혁은 출근길에 무작정 핸들을 돌렸다. 그렇게 달려 주차한 낯선 곳에서 따듯한 사람들을 만났다. 향긋한 커피와 향긋한 책과 함께....그곳에서 책이 진통제라고 말하는 한 사람을 만났다.

때로는 그리움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있는 거라고 유진은 생각했다. 때로는 그리움이 풍기는 은은한 감정에 기댈 때가 있다. 때로는 그리운 마음이 눈송이처럼 그 사람에게도 내려서, 그도 문득 유진을 떠올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현실에서는 각자 다른 공간에서 각자의 일을 하지만, 그리운 마음속에서는 언제나 만난다. 그런 그리운 마음들이 쌓이고 쌓여 이야기의 물줄기를 이루는 것인지도 모른다...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유진이 벌떡 일어났다. 세상 어색한 표정을 한 얼굴이 소양리 북스 키친에 들어서고 있었다. (p. 216)

지나고나서야 깨달았지만 스타트업을 준비하고 성공시키기까지의 몇년 동안 미친듯 일만 하던 유진은 그때 자신이 번아웃 상태인지 몰랐다. 자신과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선배와 날선 대립을 하며 가시돋친 말들을 퍼부었던 자신의 모습이 이제야 부끄럽게 기억되곤 했다. 그런 유진에게 오랜만에 선배가 찾아왔다.

"옛날에 할아버지가 원두를 직접 갈아서 커피를 만들어주신 적이 있거든요. 제가 대학생 되던 해였는데, 할아버지는 저한테 막걸리보다 커피를 먼저 가르쳐 주셨죠. 할아버지가 그랬어요. 인생이 쓴 물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겠지만, 쓰디쓴 순간에도 깊은 맛이 있다는 걸 기억하라고요. 커피를 처음 마실 때는 무슨 맛으로 먹는지 도통 이해가 안 가도, 정성스레 끓인 커피 한잔의 맛을 알고 나면 쓴맛 속에 감춰진 비밀 같은 인생의 묘미가 있다는 걸 알게 될 거라고요" (p. 273~274)

인생의 쓴맛은 소주에서만 배우는 건줄 알았더니 커피에서도 배울 수 있는 거였다!

'소양리 북스 키친'의 사계절을 읽으며 그 동안 왔다가는 사람들의 사연을 읽다보면 왜 소주가 아니라 커피에서 인생의 쓴맛을 배울 수 있는건지 깨닫게 된다. 책이랑 소주는 좀 안어울리지 않나? 책에는 역시 커피지! ㅎㅎㅎ

계절별 정취와 책속의 책들 그리고 그 책들에 온 마음으로 공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정말이지 너무 부러워서 당장에라도 '소양리 북스 키친'에 찾아가고 싶어진다. 하지만 여기는 꿈에나 그릴 수 있는 곳, 소설에서라도 만날 수 있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언젠가 나도 어딘가 있을 이런곳을 찾아내고 싶다고 나도 언젠가 이런 곳에 머물고 싶다고 다시금 꿈을 품어본다. '소양리 북스 키친'만큼은 아니더라도 북스테이하는 곳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조만간 멋진 곳을 꼭 찾아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컬러愛 물들다 - 이야기로 읽는 다채로운 색채의 세상
밥 햄블리 지음, 최진선 옮김 / 리드리드출판(한국능률협회)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야기로 읽는 다채로운 색채의 세상

모든 색에는 이야기가 있다! 맞는 말이다. 사람의 눈은 다양한 색을 구별하고 그 색깔별로 다양한 이미지를 인지한다. 따라서 색에 대해 알아두면 의외로 큰 도움을 받게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표지에 쓰여진 것처럼 '최고의 전략은 색이다' 라는 것을 배울 수 있는 내용들은 아니다. 그저 미술을 몰라도 패션을 몰라도 색이야기는 궁금할 수 있고 흥미롭게 읽힌다. 따라서 '알아두면 쓸모있는 여러가지 색에 얽힌 상식' 이라는 뒷표지의 문장이 적절한 책이었다.

자연의 색이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 일상에 깃든 색에서 받는 자극은 우리를 환상과 신비의 세계로 데려간다. 이 책에는 그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부비새가 푸른 발로 상대를 어떻게 유혹하는지, 영화에서 색감이 왜 중요한지, 상징적으로 쓰이는 색의 의미는 무엇인지 등 색깔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알아두면 쓸모있는 유용한 이야기로 엮었다. (p. 17)

이 책은 그렇게 색들과 관련된 이야기로 엮인 책이다. 차례를 보면, 빨강-색을 향한 열정 / 노랑-10년을 정의하다 / 파랑-영감의 원천 / 주황-같은 색깔 다른 세계 / 보라색-숭고한 대의 / 녹색-불편한 진실 이라고 다른 소제목들에 비해 크게 쓰여져 있어서 이 색깔별로 묶인 이야기들인가 하는 생각이 들수도 있지만 아니다. 색깔들에 대한 이야기는 딱히 어떤 주제로 묶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이 색 이야기를 하다가 저 색 이야기를 하다가 한다. 앞에서 다루었던 색도 뒤에선 다른 내용으로 다시 다루어지기도 한다. 따라서 이 책은 그저 자유롭게 마음편히 쉽게 읽으면 된다.

그렇게 읽다보면 때로는 당연스런 이야기들도 있고 새로운 이야기들도 있다. 물론 새로운 이야기들이 더 재미있게 읽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케냐 에서 농장들이 매로부터 닭을 지키기 위한 방법은 닭을 보라색으로 칠하는 것이다 라든지, 패스트푸드점에 적용되고 있는 '케첩 머스터드 이론' 이라든지, 머미브라운 이라는 색에는 실제 이집트 미라의 가루가 들어갔다든지, 푸른 바닷가재도 찜통에 들어가면 빨갛게 된다든지, 극장의 의자가 빨강색인 이유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색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통해 다른 분야의 이야기들을 곁들여 알게 되기도 한다. 세계의 국기 중엔 보라색이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던지 튤립의 원산지는 터키라든지 하는 것들 등. 무엇보다 가끔 등장하는 '색의 어원' 이야기가 신선했다.

번역서이지만 책의 원제가 무엇인지 알수 없는 이 책을 읽고 갑자기 색에 대한 감정이 愛로 물들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색의 의미라던가 그 느낌과 그 영향력 이라던가 여하튼 색에 대해 무언가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내려놓는다면 미용실에 앉아 잡지읽는 기분으로 휘리릭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책이었다. 또 모를일이지 않는가? 이렇게 잡다한 색에 대한 상식도 언젠가 어디선가 아주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지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브람스의 밤과 고흐의 별 - 39인의 예술가를 통해 본 클래식과 미술 이야기
김희경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명화와 클래식, 예술가와 우리 삶을 잇는 39가지 이야기

'세기의 걸작을 남긴 음과 색의 마술사들, 삶은 그들에게도

때론 관대하고, 때론 혹독했다'

소위 예술이라 하는 것들은 비싸다 어렵다 하지만 끊임없이 유혹하고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예술을 욕망하는 것이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게 하는 가장 큰 차이점이 아닐까. 그래서 비싸고 어려운 것들을 싸고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들엔 늘 호기심이 생긴다. 가질 수 없어도 즐길 수는 있다고 생각하면서.

클래식, 미술과 친구가 되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예술가들의 삶과 철학 속으로 성큼 걸어들어가는 겁니다. 이 선택은 저 스스로에게 큰 도움이 됐던 것 같습니다.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최대한 많이 접하고 이해하려 하며 다양한 것을 느끼게 됐습니다. (p. 5) 그렇게 절친이 된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더 많은 분에게 소개하기 위해 책을 쓰게 됐습니다. 이 책에선 총 11개 장에 걸쳐 39명의 예술가들을 소개합니다. (p. 6) 그렇게 이들의 이야기를 경유하다 보면 범접할 수 없을 것만 같던 엄청난 거장 예술가들이 한층 가깝게 느껴지실 겁니다. (p. 8) -프롤로그 中-

사람과 사람이 친해지는 데에도 서로의 사연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것 만큼 좋은 것이 없다. 몰랐던 그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몰랐던 그사람의 허술함을 보았을때 딱딱한 관계는 한층 물렁해지고 그제야 소통은 가능해진다. 예술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예술이 어렵다면 예술가의 삶을 알고 사람 대 사람으로 소통하면 예술작품 또한 한결 편안하게 다가온다고.

전문가의 어려운 옹어들이 아니라 신문기자로서 갈고닦여진 문장들이 쉽게 읽히기에 그러한 저자의 제안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39명의 예술가들은 클래식의 거장들과 명화의 거장들이고 장르별로 구분되었다기 보다는 저자의 감상느낌별로 구분되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파격적인 예술가들, 감각적 예술가들, 늘 새롭게 변신하는 예살가들, 집념의 예술가들 등등 때로는 명화가 때로는 음악이 책장밖으로 튀어나온다. 미술의 경우 작품명을 검색하면 그림을 볼 수 있을 것이고, 음악의 경우엔 QR코드로 직접 들을 수 있게 덧붙여 놓아서 책을 읽다 중간중간 작품감상을 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책속에 유명한 예술작품들이 넘쳐나지만 그 작품을 만든 예술가들의 삶에 좀더 초점을 맞춘 글이다 보니 읽다보면 예술작품들에 대해 배운다기 보다는 예술가들을 좀더 인간적으로 느끼게 된다.예술가들의 사연을 읽으며 세상엔 정말 사연없는 사람은 한명도 없나보다 싶고, 예술가들의 친구와 스승 그리고 연인들을 보며 아 이렇게 연결되는 관계들이 있었구나 싶어 새로웠다.

'가슴속에 1만 권의 책이 들어 있어야 그것이 흘러넘쳐 그림과 글씨가 된다' 추사 김정희(1786~1856)선생의 말씀입니다. 비단 그림뿐 아니라 음악도 마찬가지죠. 예술가는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지식과 경험을 쌓고 폭풍 같은 고뇌를 거듭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한데 어우러지고 흘러넘쳐야 그만의 독창적인 시선이 만들어지는데요, 음악과 그림은 그렇게 구현된 세계의 결정체입니다. 많은 예술가와 친구가 되고, 또 이들의 작품과 가까워진다는 건 그 무한하고 영원한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안에서 즐겁게 놀다 보면 예술가들 각자의 가슴속에 있던 1만 권의 책,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다양한 감정들과 마주하게 되겠죠. 부디 이 책이 독자 여러분께 그 길로 들어서는 안내서가 됐길 바랍니다. (p. 327~328) -에필로그 中-

예술사조며 시대적 흐름이며 작품의 상징 등 예술이 주는 어려운 모든 것들을 벗어나 쉽고 간단하게 이름들을 알아가고 싶다면 이 책이 유용할 것이다. 예술가가 언제 태어나 어떤 기법을 익혔으며 예술작품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어느 사조에 속하는지 등등 아무것도 몰라도 괜찮다. 화가의 이름 작품 두어가지를 알아두면 언젠가 다른 책 혹은 전시장 포스터에 갑자기 눈길이 갈수도 있을 것이고, 음악가의 이름 클래식 한두곡 정도를 들어두면 티비광고에서 갑자기 아~이곡은!하며 알아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술이 아무리 비싸고 어려워도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사람이 먼저다. 사람을 알고 예술을 보면 예술도 사람답게 다가오지 않을까. ㅎㅎㅎ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의 쓰레기는 재활용되지 않았다 - 재활용 시스템의 모순과 불평등, 그리고 친환경이라는 거짓말
미카엘라 르 뫼르 지음, 구영옥 옮김 / 풀빛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재활용이라는 위안'에 가려진 플라스틱 재활용의 실체,

그리고 쓰레기 식민주의를 파헤친 인류학자의 '플라스틱 마을'르포

저자는 인류학 박사로 엑스-마르세유대학에서 사회학 및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2011년부터 폐기물, 플라스틱 재료, 재활용에 대해 연구중이라고 한다. 그 과정에서 베트남의 민 카이 마을을 알게 됐고 방문하여 '플라스틱 마을'의 실체를 확인하게 됐다. 저자는 그곳에서 '재활용의 신화'가 어떻게 형성되고 무너지는지를 깨달았다. 이 책의 원제는 'Le Mythe du Recyclage' 재활용의 신화 이다.

이 작고 얇은 책은 르포처럼 읽히는 글이긴한데 주제와 결과가 명확히 정리되는 글은 아니었다. 본문에 비해 오히려 추천사에서 그 내용을 더 쉽게 확인할 수 있었는데, '재활용 쓰레기 처리 시스템과 흐름의 진실을 추적한 책이다. 저자는 재활요잉라는 '신화'에 담긴 모순과 부조리, 긜고 거짓말을 폭로한다. 그럼으로써 쓰레기 재활용을 둘러싼 우리의 고정관념과 허위의식을 전복한다.' 라며 탐사보고서 로서의 이 책의 가치를 높이고 '우리는 재활용 표시가 붙은 상품을 구입하며 지구의 자원을 과도하게 소비한 행동에 용서를 구하지만, 생각과 달리 재활용은 지구를 구하기에 역부족이고 가난한 사람들의 희생을 너무 많이 요구한다.' 라며 깨져버린 신화에 대한 메세지를 전달하지만, 이러한 정돈된 추천사가 없었다면 본문읽기로는 확실한 깨달음을 쉽게 찾아내지 못할 것 같은 서술방식과 문장들이어서 좀 아쉬웠다.

멀고도 가까운 이 베트남 마을에서 재료의 여정과 포장재, 비닐봉투 등 물건의 삶에 관한 나의 연구를 토대로 쓴 이 글을 통해 이곳과 다른 곳을 연결하고, 인간이든 아니든 우리가 다른 존재들과 멀고도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시팓. 그래서 일상의 경험에 대해 반향을 일으키고 쓰레기, 재활용 그리고 플라스틱과 우리의 일상적 관계를 살피고자 한다. (p. 24)

결과적으로 저자는 베트남의 민 카이 마을에 대한 현장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으로 위와 같은 살펴보는 시선을 독자 스스로 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재활용 쓰레기를 나름 철저하게? 분리수거 하면서 뿌듯함을 느끼거나 환경에 대한 미안함을 덜어내곤 한다. 하지만 그 쓰레기들이 정말 재활용되고 있는 것이 맞을까?

거시적으로 모든 재활용 시스템을 살펴볼 순 없지만 베트남의 민 카이 마을 한곳을 세세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재활용에 대한 기대는 허상이고 거품이었음이 드러난다.

세계의 재활용 쓰레기들은 자국에서 처리되지 않고 타국으로 수출된다. 그 쓰레기들을 수입하는 나라들은 대부분 가난한 나라들이다. 그 나라들에는 쓰레기 마을이 있다. 쓰레기 마을에서는 온갖 악취와 더러움 속에 쓰레기산을 헤집으며 다시 쓰레기를 골라내고 그중 일부가 재활용품으로 재생되지만 그 사용처 또한 그 쓰레기마을에서 순환될 따름이다. 쓰레기를 버린 나라들에서는 깨끗한 원재료로 깨끗한 재활용 봉투를 만들어 재활용하지 않고 그저 버린다면 그 쓰레기를 받은 나라들에서는 더러운 원재료로 믿을 수 없는 재활용 봉투를 만들어 나름 재사용하지만 그 사이 환경과 건강은 빠른 속도로 나빠지고 있으므로 그것이 과연 재활용인 것인지 의문을 갖게 만든다고나 할까. 그 대표적 예시가 플라스틱 마을이라 불리는 민 카이 였다.

결국 재활용의 문제는 환경의 문제라기 보다는 정치의 문제였고 불평등의 문제였다. 누군가의 친환경을 위해 누군가의 환경은 철저히 파괴되고 있었다. 지금은 서로 연관없어 보이는 그 장소들이 사람들이 과연 계속 연결되지 않을거라 장담할 수 있을까? 바닷물은 돌고돌고 대기는 돌고돌고 전염병도 돌고도는데?!

현재의 재활용 시스템은 전혀 친환경적이지 않았다. 지금 내 눈앞에서 더러운 쓰레기가 사라진다고 해서 내가 계속 깨끗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 과신하지 말자. 어차피 모두 지구에서 살고 있다. 내가 버리고 더럽힌 것은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명심하자. 재활용이 진정 재활용이라는 단어에 어울릴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도록 우리는 좀더 신경써야 할 것이다.

ps. 프랑스와 영국은 오랜 역사에서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다. 대부분 서로 앙숙인 관계라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프랑스학자인 저자는 민 카이 마을에서 찾은 쓰레기들 중에서 유독 영국과 아일랜드의 것을 콕 집어내고 친환경적이지 않은 재활용업체들 중에서 유독 영국 기업을 콕 집어낸다. 험담을 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세계의 쓰레기와 세계의 모순적 기업들 중에서 유독 영국것을 예로 든 것은 인류학자라는 저자의 직업에서 갖춰야할 중립성이 조금은 흔들려 보여 아쉬웠다. 또한 르포라면 상세한 르포로, 프로가 아니라면 좀더 확실한 연구데이터로 논리를 세워 전개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자신이 눈으로 본것 베트남 사람들을 몇명 만나 대화를 나눈 것으로 넌즈시 읊조리고 있는 이 책은 너무 모호한 내용이라 '쓰레기 식민주의'라는 거대한 모순을 파헤쳤다거나 제대로 드러내주지 못한 것 같아서 이또한 아쉬웠다.

재활용 시스템의 모순과 불평등, 그리고 친환경이라는 거짓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1 | 22 | 23 | 2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