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공부 - 우리가 평생 풀지 못한 마음의 숙제 EBS CLASS ⓔ
최광현 지음 / EBS BOOKS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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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타인,

가족의 숲을 지나 나를 사랑하는 마음의 여정

"상처는 혼자 자라지 않는다"

아무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한

세상 모든 가족을 위한 마음 수업

최광현 저자의 책을 좋아한다. <가족의 두 얼굴> <가족의 발견> <나는 내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를 읽었었는데 다른 심리서들처럼 두루뭉술하지 않고 정확한 문제점을 짚어 주면서 동시에 내 잘못이 아니라고 확 내 편을 들어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멀쩡해 보이는 집이라고 해도 세상에 알고 보면 사연 하나 없는 집 없다고 하지 않는가. 행복한 가정이라고 늘 행복하기만 한 것도 아니고 불행한 가족이라고 늘 불행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게 인생이고 삶이지만 간혹 너무 큰 상처를 입었을 때는 도움이 필요하다. 최광현 저자의 책은 그런 도움 중 하나로 무척 유용하다.

놀랍게도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큰 상처는 대부분 가족 사이에서 발생합니다. 얼핏 생각하면 상처는 가족 바깥에서 벌어질 것 같지만 의외로 상처가 처음 태어나는 근원지가 바로 가족인 것입니다. (p. 8) 우리 가족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설령 우리 가족은 완벽하고 아무 문제없다고 한다면 사실 그게 더 염려스럽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끝없는 갈등과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끝없는 문제가 오더라도 그것을 해결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p. 17)

세상에 공부할게 참 많은데... 가족도 공부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친밀한 것처럼 여겨지는 가족이지만 어차피 나 말고는 모두 타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나'와 같을 수는 없다. 내 마음은 '나'만 잘 안다. 아니, 내 마음을 '나'도 잘 몰라서 더 문제인 시대이기도 하다;;;

이 책은 총 3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대해, 부부 사이에 대해, 세대 갈등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이면서도 일상에서 접하는 왠만한 관계갈등 문제를 두루 포함하고 있어서 편안하면서도 부담스럽지 않게 읽기 좋은 책이었다.

부모와 자녀사이의 갈등에 대해서는 부모의 성장배경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는 상처가 유전자보다 강하게 대물림된다고 표현한다. 그 대물림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나에게 부모의 어떤 상처가 이어졌는지 살펴 봐야 한다. 모녀 지간이 친구일 수도 있지만 중독사이가 될 수도 있고 부자 지간이 서먹함을 넘어 위해한 관계가 될 수도 있다. 가족관계에서 누군가를 희생양 삼아 끝없는 삼각관계를 돌아가면서 괴로워질 수도 있고 그러다 독립하지 못한 관계는 서로에게 상처가 될 뿐이다. 저자는 부모와 갈등관계가 심각해 졌을 때일수록 '나'를 '내'가 지켜줄 것을 강조한다.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 관대함이 무엇보다 나에게 필요하다고, 나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가족에게 상처받은 모든 사람이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첫걸음이라고. (p. 126)' 말한다. 나만 생각하는 이기심과는 다르다. 그동안 돌보지 못한 '나'를 돌아보는 것이 가족문제에서 벗어나는 첫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일뿐.

부부에 대해 저자는 '나와 가장 닮은 타인' 이라고 표현한다. 부부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 같지만 실상은 여섯 사람이 얼키고 설킨 관계다. 양가의 부모님에게서 각자 어떤 상처를 물려 받았고 양가의 부모님이 서로의 부부지간에 어떤 갈등을 겪고 있는 지에 따라 현재의 '내'옆에 있는 배우자 와의 사이가 크게 달라지곤 한다. 내 옆에 있는 이가 '벽'이 될지 '문'이 될지 또한 '내'가 그 갈등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이다. '내가 존중하지 않았는데, 내가 힘들 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줄 사람은 없다. (p. 178)' 라고 저자는 말한다. 역지사지에는 새치기를 하는게 더 좋을 것 같다.

세대 갈등에 대해서는 현재의 20대 젊은 층을 이해할 수 있는 말들을 많이 해주고 있다. 각 세대별로 각자의 성장하던 사회적 배경이 달랐다. 지금의 20대는 그 어느때보다 '불안감'을 많이 느끼는 세대라고 한다. 풍요롭게 자란 세대라고 폄하하면 그들의 분노를 이해할 수 없다. 세대간의 갈등 또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므로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왜 그토록 불안에 떠는지 그 아픔을 공감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부모와 자녀,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에 도사린 긴장과 갈등을 풀 수 잇는 유일한 해결책은 서로의 세계를 인정하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음 세대의 시간이 건네는 목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p. 258)' 라고 저자는 말한다. 젊은 세대를 공감하기에 앞서 간섭이 아닌 순수한 호기심을 가져보아야 할 것 같다.

상처받은 사람은 내면의 옷장이 쏟아진 것입니다. 아무리 지난 시간을 잊고 오늘을 살다가도 예기치 않은 상처가 찾아오면 마음 깊이 쌓아놓은 옷장이 갑자기 쓰러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급한 마음에 옷장을 일으키고 흩어진 옷가지를 대충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문을 닫아버립니다. 겉으로 보면 괜찮아 보이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옷장 안에 그대로 뒤엉켜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대충 집어넣었던 옷장의 옷들이 떠오릅니다. 다시 문을 열고 하나하나 꺼내 버릴 것은 버리고 갤 것은 개면서 정리하고 싶지만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 중에서 내면에 뒤얽힌 감정의 찌꺼기를 정리하고 문을 닫는 '직면'이 가장 힘든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상처받은 사람은 결국 어지러운 옷장을 외면한 채 또 다른 내일을 살아갑니다. 어린 시절 겪은 상처는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내면에 쏟아진 옷장을 대충 묻어두고 외면하지 말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상처와 마주보아야 합니다. 문을 닫아건 과거의 상처와 만나고 치유하고 회복하는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핵심은 내게 상처를 주었던 가족이나 주변 사람을 용서고 화해하는 게 아닙니다. 바로 상처받은 '나' 자신을 존중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가해자에게 분노와 원망을 쏟아내는 게 아니라 무기력하게 상처를 떠안을 수밖에 없던 나약한 자기 자신을 보둠어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수치스러워 하지 않고, 따뜻한 손을 내미는 순간 비로소 진정한 화해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p. 263~264)

내 마음의 옷장 상태는 어떤지 가만히 들여다 보자. 왠만큼 혼자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으면 참 다행이다. 하지만 엄두가 안 난다면, 할 수는 있겠는데 버거워서 미루게만 된다면 정리 도우미를 불러보자. 혼자 할 수 있을 것 같더라도 좀더 자~알 해보고 싶다면 정리 도우미를 가볍게 부르자. 저자의 조언이 기꺼이 도우미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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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아니라 몸이다 -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몸의 지식력
사이먼 로버츠 지음, 조은경 옮김 / 소소의책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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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몸의 지식력

지능이나 지식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뇌라던가 생각이라던가 여하튼 유형의 머리속 무형의 어떤 능력을 연결짓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일상에서 때때로 몸이 먼저 반응했다 라든가 몸이 기억하고 있다 라는 식의 표현을 하기도 한다. 생각과 몸은 다른 능력인가? 어쩌다 하나의 신체에서 이렇게 따로따로 능력이 구분되었나? 그러다 또 어쩌다 하나의 능력에만 꽂혀서 AI로 까지 이어지게 되었나? 그렇게 인간의 뇌가 AI로 대체될 수 있나? 이 책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나름의 답을 제시하고 있는 책이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얻게 되는 체화된 지식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몸이 지능을 형성하고 보유하는 데 어떻게 중요한지, 오로지 정신에서 지능이 비롯되고 정신 안에만 존재한다는 생각에 반대하는 견해를 철학자, 신경과학자, 인지과학자, 로봇 연구가, 인공지능 전문가 들이 어떤 식으로 발전시키고 구체화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체화된 지식은 신체 그 자체가 지식을 습득, 보유하고 사용할 수 있다는 관점을 견지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가 알게 될 때 몸은 단순히 뇌를 감싸는 도구가 아니라 지성의 근원이라는 생각을 이해하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 (p. 15) -서문 중-

지성이라고 했을때 우리는 대부분 뇌의 능력이라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뇌 뿐만 아니라 몸도 그러한 능력이 있음을 주장한다. '인공지능AI에 열광하는 요즘의 흐름은 알고리즘을 돌리는 수많은 서버가 인간의 지성을 재현하거나, 심지어 능가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반영하고 있다. (p. 21)'며 지능이 오롯이 뇌에 있다는 생각에 대해 비판을 시사한다. 또한 '이제는 지식 습득에서 몸이 하는 역할을 무시하는 풍조를 멈추고 뇌와 몸이 어떻게 결합되어 우리가 인간의 지능으로 간주하는 것을 만들어내는지 탐색해볼 시간이다. (p. 21)' 라며 그동안 간과되어 왔던 몸의 지식에 대해 강조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THE POWER OF NOT THINKING '생각하지 않는 것의 힘'이 되었다. 그렇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뇌의 능력을 무시하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동안 뇌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시되어 왔던 몸의 능력에 대해 이제 다시금 집중해볼 때가 되지 않았나 말해보는 것이다. AI시대가 될수록 더욱더 몸에, 인간의 신체능력에.

참고로, 이 책의 서문은 굉장히 상세한 편인데 책을 다 읽고 나니 [서문]의 내용이 다~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문이라기 보다 거의 본문 요약에 가깝다. 그러니 본문을 읽으며 좀 이해가 어려웠다 싶은 사람은 서문을 다시한번 정독하는 것이 이 책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싶다.

17세기 유럽에서 우주와 천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말할 때는 기계론적 사고에 입각한 설명이 압도적이었다. 우주가 작동하고 행성이 이동하는 것을 기계론적 원칙에 따라 설명한 것이다. (p. 34) 이 당시의 해부학적·철학적 사고에 의하면 타고난 몸도 외부의 힘에 지시를 받아서 움직인다. 그리고 인간의 신체는 정신을 관장하는 영혼이 있기 때문에 작동한다. 즉 영혼이 몸에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중략) 데카르트는 인간을 구성하는 두 가지의 '본질'을 구분했다. 먼저 비물질적으로 사고하는 능동적인 영혼 또는 정신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물질적이고 사고하지 않는 수동적인 몸이 있다. (p. 35) 이 시각에서 데카르트는 과학이 데이터 수집과 분석의 과정이라는 입장을 정립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과학적 방법은 18세기 유럽 사회를 왕성한 과학적·정치적·철학적 담론의 시대로 이끈 계몽주의의 핵심이다. (중략) 이성의 시대는 지식을 취득하는 수단이 정신임을 확실히 했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몸을 단순히 가볍게 여기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양하고자 한다. (중략) 데카르트의 정신-몸 이원론이 중요성을 띠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단순히 소수만 이해하는 17세기의 개념에 그치지 않았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데에 정신과 몸이 작동하는 각기 다른 역할에 대한 데카르트의 시각은 지속적인 유산을 남겼다. (p. 40) 우리는 뇌를 신성시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p. 41) 빅데이터의 출현과 분석은 경험에 의거해 세상을 바라보기보다는 객관적 시선에 의지하는 과학적 실행의 또다른 사례다. 빅데이터 분석은 정신과 몸을 구분하는 데 근거한 지능공학이다. (p. 53)

과학이 발전해온 방향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관점이었다. 신앙의 시대에서 이성의 시대로 넘어오고 그렇게 계몽된 인간이 발달시켜온 철학과 과학에 있어서 지금의 AI로 귀결되기까지 데카르트의 철학이 그토록 큰 영향을 끼쳐왔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몸을 천시하고 수동적으로 보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시 신앙적 사고관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던 것도 같은데 그러한 시각이 인간의 다른 능력보다도 뇌의 능력에 천착하게 했고 그렇게 다른 그 어떤 인공적 능력보다 AI가 먼저 태동하게 된 것이라니.. 그렇다면 이성의 시대에 접어들었을 때 인간의 다른 능력에 초집중하게 됐었다면 AI가 아닌 다른 4차산업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었겠구나... 신선한대?!

서구의 주류 교육은 사고의 자동화와 뇌를 컴퓨터에 비유하는 개념을 영속화 시키는 정신-몸 이원론에 사로잡혀 있다. 아이들은 시각, 소리, 촉감, 냄새, 그리고 맛과 같은 감각으로 세상을 이해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런 감각은 교육과정이 진행될수록 더욱더 경시되고 있다. 실용적 지식보다 학문이 우월하다는 생각이 오랫동안 서구의 교육체계를 암묵적으로 지배해왔다. (p. 63)

우리네 교육 또한 서구의 교육체계를 거의 그대로 가져온 것이므로 정신-몸 이원론에서 우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어렸을 적에야 오감교육이니 뭐니 하지만 초등학교만 들어가도 체험학습들마저 박물관에 전시관에 이어지게 되고 그러다 입시를 앞두게 되면 체육시간은 고작 일주일에 한 타임뿐이게 된다. 수명은 길어지는데 우리의 몸은 점점 약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요즘 아이들이 체격은 커졌지만 체력은 나빠졌다고 하지 않나. 그렇게 뇌만 잘 돌아가면 뭐하나? 몸이 안 움직인다면!

데카르트가 남긴 유명한 격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정신을 가장 중요시했다면, 메를로 퐁티는 간결하게, '나에게는 몸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알 수 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몸은 메를로 퐁티의 인식과 지식 이론에 핵심을 차지한다. 메를로 퐁티는 이전 시대를 지배했던 고차원적 형태의 논리적 지능이 정신에 위치한다는 아이디어를 따라가지 않고 우리의 사고는 몸에 의지하고 몸의 안내를 받는다고 주장했다. (p. 71)

저자는 이성의 시대를 열었던 데카르트에 맞서 메를리 퐁티를 내세우며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그렇게 총3부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2부와 3부는 그 새로운 관점을 설득시키는 내용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의 설득은 아주 완벽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신체적 경험'을 몸의 지식으로서 강조하지만 그러한 경험치 또한 데이터로서 뇌에 쌓이기 마련이고 그렇게 뇌의 판단은 여전히 신체에 영향을 미친다. '경험'을 강조할 수록 그게 결국 '데이터'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경험치보다는 무의식적 신체반응에 대해 좀더 증거들을 탄탄히 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의 감각을 중요시하는 내용들을 읽다보니, 로봇과 AI로 점쳐지는 미래에 대해 의외로 인간의 신체적 능력이 더 중요할 수 있겠구나 라는 깨달음을 준 것은 중요한 포인트 였다.

가장 심오한 사실은 인간의 체화 작업이 우리가 어떻게 이처럼 의미로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내고 이해하는가의 핵심에 자리한다는 것이다. 기계와 인공지능이 세상을 영원히 바꿀 것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하지만 인간의 체화 능력이 우리의 지능을 복제하기 힘들게 만든다는 데 위안을 얻어야 한다. 몸을 무시하기보다는 기뻐하고 축하해야 한다. 우리가 가진 초능력이니 마음껏 즐기고 기뻐하자. (p. 294)

AI는 인간의 뇌보다 우월하다. 더 빨리 더 정확히 계산하고 판단한다. 하지만 행복이나 만족, 사랑 같은 감정이나 수없는 연습 끝에 머릿속에서 순서를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알아서 수영을 하고 자전거를 타고 춤을 추는 신체화된 능력은 로봇이나 인공지능이 어떻게 따라할 수 없는 분야이다. 그러니 인공적 뇌가 발달할수록 인간은 이러한 감정적 신체적 능력을 가진것만으로도 초능력을 가졌다고 여겨지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몸뚱아리 하나 가진 인간이 우월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시대가 온다는 것은 아니다. 지능과 지식이 대세인 시대에 뇌의 능력은 가장 우월한 능력임에는 분명하다. 다만 뇌의 능력만이 다가 아니라는 위안을 찾고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인간의 뇌말고 인간의 신체를 똑같이 구현해내는 일은 어렵다는 점에서 자존감을 챙겨볼수도 있지 않나 라고 말해보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을 소개하며 '비즈니스 영역에서 거의 20년간 일했지만 나는 여전히 스스로를 인류학자라고 생각한다. (p. 295)' 라고 표현한다. 이 문장에서야 아차차 싶어서 책날개에 있는 저자약력을 다시 읽어 보았다. '선도적인 비즈니스 인류학자' 라... 나도 모르게 '인류학자'에 방점을 찍고 이 책을 읽은 건데 사실 이 책은 저자의 '비즈니스' 경험에 더 영향을 받은 책이었다. 그러니 썩 그럴듯한 저자의 주장에 빠져들다가도 갸웃하게 되고 학문적인가 싶다가도 갸웃하게 되어서 결국 저자의 주장은 하나의 의견으로 참고하게 될 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뇌와 몸의 역할에 대한 통념에 맞선 저자의 의견은 꽤 근사했다. 우리는 모두 평범한 인간이지만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평범한 초능력자'가 될 수 있다. 인공지능이 발달할수록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몸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할지도 모르겠다. 머리가 아니라 몸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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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열쇠 - 역사에서 지워진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이야기
브라이언 무라레스쿠 지음, 박중서 옮김, 한동일 감수 / 흐름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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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지워진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이야기

원제 THE IMMORTALITY KEY : THE SECRET HISTORY OF THE RELIGION WITH NO NAME 는 '불멸의 열쇠: 이름 없는 종교의 비밀 역사' 로 번역된다. 책의 제목이 원제에 충실하다는 점에서부터 마음에 든 책이었다. 700여 페이지가 넘는 벽돌책이었지만 의외로 술술 읽히는 책이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다만, 두괄식 서술에 익숙한 독자라면 아마 나보다 더 쉽게 이해해가며 읽을 것 같은데, 나는 종합적 결론으로 마무리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라 새록새록 등장하는 자료들을 처음 주제에 매번 연결시켜야 하는 것이 살짝 어려웠다는 점을 미리 말해둔다.

저자의 직업은 변호사이지만 (비록 전문교수는 아니라 할지라도)고전학자이기도 하다. 이 방대하고 엄청난 책은 라틴어, 그리스어, 산스크리트어 등의 고대어부터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까지 독해가 가능한 저자였기에 나올 수 있는 책이었다. 이 탁월한 언어적 능력만으로도 왠만한 대학강단의 고전학 교수는 명함도 못내밀 능력이 아닐까 싶다. 또한 이 책의 감수를 맡은 분이 한동일 님이다. 신뢰도 면에서도 만족스러운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는 독실한 로마가톨릭 가정에서 자랐고 현재의 종교도 가톨릭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책은 가톨릭에 정면으로 맞서는 책이기도 하다. 저자는 한 번도 환각제를 경험한 적이 없지만 이 책의 가장 큰 주제는 환각제이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저자가 자신의 주관적 요소를 떠나 최대한 객관적으로 무엇보다 학문적으로 탐구한 과정을 이 책이 담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존스홉킨스 연구진이 발표한 [신의 알약]이라는 기사였고, 1954년 올더스 헉슬리가 발표한 <지각의 문>이라는 책은 과거에서의 미래를 알아챌 수 있게 했으며, 1978년에 출간된 <엘레우시스로 가는 길 : 신비제의 비밀을 파헤치다> 라는 책은 직접적인 지도가 되어 주었다. 이 책의 주제를 두괄식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서양문명의 근원이자 세계 최대 종교인 그리스도교의 출발에 고대부터 내려오는 환각제를 통한 비의(秘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교 공인 이후 여성과 약물탄압의 배경에 대해서 차근차근 밝혀내고 있기도 하다.

지난 여러 해 동안 나는 역사에서 가장 잘 지켜진 비밀의 바닥까지 한 번에 확실히 도달하기 위해 그리스, 독일,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서양 문명과 그리스도교의 탄생에 환각의 신비가 필수적이었다면 그 증거는 어디에 있을까? 나는 햇빛을 거의 못 보는 귀중한 유물들을 지키는 정부 장관, 큐레이터, 기록 보관원 들과 나란히 앉아보았다. 또 우리 선조들의 의례적 약물 사용에 대한 신선한 증거를 발굴해 최첨단 장비로 분석하는 현장 및 실험실의 발굴자, 고고식물학자, 고고화학자 들을 갖가지 질문으로 괴롭혀 보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고전학자, 역사학자, 성서학자 들과 시간을 넘나들며 여행해보았다. 이 조사를 통해 나는 지금으로부터 12년 전만 해도 예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결론에 다다랐다. 그리스와 그리도교 신비제의 핵심에는 환각 성분 맥주와 포도주가 있었다는 증거뿐 아니라 종교 당국이 이를 억압했다는 증거도 있었다. (P. 61)

종교가 생겨나기 이전의 시대에도 종교는 있었다. 우리가 이름붙이지 않았다해서 그것이 종교가 아닐 수는 없었다. 저자는 '이름 없는 종교'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이름 없는 종교'에서 지금의 종교들이 탄생했음을 과학적으로 하나하나 밝혀나간다. 저자는 엘레우시스로 향하는 길에서 더 과거의 괴페클리 테페로 올라갔다가 중세의 마녀로 내려오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이어져온 그 '이름 없는 종교'를 추적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환영과 환각과 기적은 수시로 출몰한다. 하지만 그 환영과 환각과 기적은 굉장히 과학적이었다. 갈래는 크게 두 갈래길이 있었다. 맥주와 포도주. 그리고 그 환각성 맥주와 환각성 포도주를 만든 것은 여성이었다.

여성과 약물.

이 두 가지는 2,000년 동안 교회 입장에서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그리하여 내가 지금 지하 묘지에서 목격한 것처럼 양쪽 모두 신앙의 기원에서 몰상식하게 지워지고 말았다. (P. 481)

디오니소스와 예수가 그 경험을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려 했지만 그 전통은 오래가지 않았다. 저 위에서는 그리스 관료들이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스 신비주의자는 자신들이 속한 '죽은 자의 도시'에 남아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의 원래 여사제들이 당한 것처럼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는 그런 사람들이 전혀 존재한 적 없었던 척할 수 있었다. (P. 510)

이 방대하고 오묘한 책은 탄탄한 추적과정과 과학적 증거들을 담고 있으면서 너무나 새로운 내용들이기에 평소 습관대로 포스트잇을 붙이고 정리하려던 나의 목표는 이뤄질 수 없었다. 포스트잇을 붙인 곳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내용 정리를 할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 그저 이 책을 직접 읽어봐야 한다고 강력하게 추천할 따름이다. 아주아주 간단히 정리하자면 '환각제가 서양 문명을 건립한 계몽으로 가는 지름길인데, 처음에는 엘레우시스 신비제에서 그러했고, 나중에는 디오니소스 신비제에서 그러했다. 또한 초기 그리도교는 이 전통을 고대 그리스인에게서 물려받아 중세와 르네상스의 마녀에게 물려주었다. 바티칸은 그리스도교인에게서 지복직관을 빼앗기 위해 본래 환각성 성만찬을 반복적으로 억압했는데 처음에는 유럽에서 그러했고, 나중에는 가톨릭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를 식민지화하면서 세계 전역에서 그러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전 지구적인 음모론이었다. (P. 583~584)' 라고 할 수 있겠다. 고대의 맥주와 포도주는 지금 우리가 아는 그런 맥주와 포도주가 아니었다. 약초에 대한 지식은 네안데르탈인때도 있었고 오히려 거대종교 탄생이후 사라져온 셈이었다. 환각제가 주는 무아지경은 개개인에게 직접적인 영적 경험을 주었고 거대종교는 자신들의 필요성을 위협하는 이 직관적 방법을 원치 않았다. (내가 직접 신을 경험할 수 있다면 신을 대리하는 종교인들이 과연 필요할까?) 그리스도교는 비의에 힘을 입어 짧은 시간내에 확산될 수 있었으나 자리를 잡자마자 이 '이름 없는 종교'와의 전쟁을 해왔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신비제가 돌아왔다. 존스홉킨스 환각제 연구진의 '실로시빈' 연구를 통해.

농업이 먼저가 아니라 종교가 먼저일 수 있다는 논리를 증명시키는 중인 쾨페클리 테페에서

어떻게 그렇게 짧시간 융성한 문화발달을 이루었는지 신기한 고대그리스의 신전에서

고대 페니키아와 포카이아인들의 발자취가 남은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캄파냐 유적에서

예수가 탄생한 마을과 그가 행한 기적들과 바오로의 편지글이 담긴 성경에서

익숙하다고 여겼던 신화와 유물과 유적에서 채 지워지지 않은 흔적들이 우리에게 비밀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비밀은 놀라웠고 이 책은 그 비밀의 문을 열어젖히는 열쇠를 건네준다.

궁금하다면 어서 이 열쇠를 받아들고 책을 펼쳐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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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브 (반양장) 창비청소년문학 111
단요 지음 / 창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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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기억을 깨워 줄게"

2057년 서울, 잠든 과거를 찾아 떠나는 여정

가제본 서평단으로 당첨되어 대본집 형태로 읽은 소설인데 서평을 쓰려고 보니 책이 등록되어 있어 작가이름을 알게 됐다. 단요 였구나... 처음 보는 작가 이름이다. 살짝 검색을 해봤는데 다른 작품도 수상이력도 경력도 아무것도 조회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차피 작가가 누군지 모르고 읽은 작품이니 상관없긴 하다. 창비가 소설Y시리즈의 다섯번째 책으로 정한 작품이었고 읽어보니 그럴만한 작품이었다.

선반 사이를 헤매던 선율은 어느 큐브 앞에서 멈춰 섰다. 헬멧이 쏘아내는 주홍빛 조명이 두터운 플라스틱의 결을 따라 흘렀다. 그 너머로 웅크려 앉은 사람의 윤곽이 보이더니 얼굴이 뚜렷해졌다. 흰 티셔츠를 입은 소녀였다. (p. 12~13)

때는 미래시대, 3차대전으로 세계 곳곳은 파괴되었고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전부 녹아버려서 서울을 비롯한 대부분의 지역이 물에 잠겼다. 산꼭대기나 높은 건물꼭대기처럼 물 위에 드러난 곳에 그나마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 많은 아이들이 물꾼으로 자랐다. 물꾼은 잠수해서 예전에 도시라 불리던 곳들을 뒤져 쓸만한 것들을 찾아냈다. 선율은 물꾼이었고 어느날 멀쩡하게 보존중인 기계인간을 찾아냈다.

아이콘트롤스의 최첨단 시냅스 스캐닝 기술은 고인의 기억과 의식을 그대로 구현합니다. 평생 플랜 구독을 통해 당신의 아이를 다시 한 번 품에 안으세요. (p. 15)

상자 안에는 여러 종류의 전선과 팸플릿이 동봉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이 기계인간은 아니 이 소녀는 누군가의 딸의 기억을 구현한 누군가의 아이였던 것이다. 이 소녀를 찾아낸 지오와 선율은 살짝 망설였지만 배터리를 연결했다. 옆 산의 물꾼과 한 내기를 이기려면 더 멋진 것을 찾아내기로 한 그 내기를 이기려면 소녀의 구동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누군가의 기억을 어떤 기억을 품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따져볼 여유가 없었다.

소녀가 입을 열었다.

"몇 달 전에 이 회사에서 상담을 받았던 기억이 나. 2038년 마지막 달에. 데이터를 수집하려면 머리에 전극을 꽂고 한 달쯤 지내야 한다더라고. 그래서 머리를 다 깎았는데... 일어나 보니까 다시 자라 있네"

소녀는 선율을 빤히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끌어당겨 살짝 웃었다. (p. 27)

현재는 2057년 이었고 소녀의 기억은 2038년에 멈춰 있었다. 세계 곳곳이 물에 잠긴지 15년쯤 됐으니까 소녀도 그때 물에 잠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물에 잠기기 전 4년 정도의 기억이 소녀에게 없는 것이었다.

삼촌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이미 끝난 걸 붙잡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게 삼촌의 말버릇이었는데도 스스로는 전혀 그렇게 살고 있지 않았다. 댐으로 막아야 하는 도시라면 바다에 잠기는 게 당연하다고 말하면서도 삼촌은 서울에 머물렀다. 물꾼이 서울을 파고드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는데도 누군가 기계를 고쳐달라고 하면 선뜻 받아들였다. 죽은 이를 기억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무덤 앞에 꽃을 올리는 건 언제나 삼촌이었다. 그런 사실을 늘어놓다 보면 삼촌이 바라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 의아해질 때가 있었다. (p. 37)

선율과 지오를 비롯한 여러 아이들을 보살피고 있는 건 삼촌이라 불리는 사내였다. 지오는 삼촌에게서 기계관련한 것들을 배웠고 선율은 이 곳에 하나뿐인 잠수장비를 사용하는 물꾼이었다. 아이들이 허락없이 소녀를 깨운것에 대해 소녀의 기억을 부활시킨 것에 대해 삼촌은 아이들을 나무랐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재미있지 않아?"

"뭐가 재미있는데?"

"살고 싶지 않았던 사람은 살아 있고, 곧 무너진다던 건물은 멀쩡하게 서 있는 거. 살려 놓은 사람도, 다른 건물도 이젠 없는데" (p. 44)

소녀는 말기암 환자 였다고 했다. 이름은 '채수호'

선율이 갑작스레 깨운것에 대해 그리고 내기를 비롯한 이런저런 것들에 대해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수호는 괜찮다면서 한가지 요구사항을 말한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서, 그걸 알 때까진 살아 보려고" (p. 46)

"지금은 2057년이고, 내 마지막 기억은 2038년이지. 그 사이에는 19년이 있고. 그런데 서울이 이렇게 된 게 15년 전이라고 했잖아. 4년이 텅 비네. 왜일까? 나는 4년 동안 거기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걸까?" (p. 47)

"내기에 나갈게. 그러니까 너도, 내 4년을 찾아 줘" (p. 48)

'이윽고 선율은 자신이 플라스틱 큐브에서 꺼내 온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았다. 그건 내기 물품이 아니라, 멀쩡하게 움직이는 기계 인간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과거였다. (p. 48)' 이 소설의 핵심이자 내게 가장 인상적인 표현이었다. '아직 오지 않은 과거'. 이 소설은 미래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SF에 가깝지만 과거를 찾아가며 퍼즐을 맞추는 과정에서 SF적 요소를 까먹게 하는 작품이었다. 과거를 찾아가면서 현재를 읽게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열여덟 살의 수호가 다섯 번째로 장기 입원을 했을 때 맞은편 침대에는 희 아주머니가 있었다. 아직 어린데 어쩌다가, 로 시작된 통성명은 서로의 입원 경력을 읊으면서 끝났다. 희는 먼 예전에 양성 종양을 한 번 떼어 낸 이후로는 몸에 칼을 대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이 나이에, 같 때문에 배를 째게 생겼다며 희는 너스레를 떨었다. 입원 경력으로 따지면 수호가 까마득한 선배인 셈이었다. 희 아주머니가 수호의 이력에 놀라는 동안 수호는 아주머니의 이름에 놀랐다. 자신처럼 병원을 뻔질나게 들락거리는 사람은 몇 번보았지만 한국에 그런 성씨가 있을 거라고 생각도 해 본 적 없었던 것이다. 서문희. 서, 문희도 아니고 서문, 희. 수호는 그게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세상이 조금 더 복잡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아직 모르는 게 세상에 많은 것 같아서, 병원에만 앉아 있을지라도 세상을 넓혀 갈 공간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아서. (p. 75~76)

희 아주머니에게 문병오는 가족은 딱 한 사람,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는 아들 경 이었다. 서문 경. 수호는 병원에서 경으로부터 과외를 받기 시작했고 대화할 사람이 생겨 기뻤다. 수호는 예닐곱살 위인 그를 경이삼촌이라고 불렀다.

경이 삼촌.

기계를 잘 다루는 노고산 삼촌.

그 삼촌의 이름은 서문 경.

수호는 서울에 그렇게 나뉘는 이름이 둘씩이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노고산 삼촌이 예전의 경이 삼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2038년의 서울과 2057년의 서울이 같지 않은 것처럼 스물다섯의 경과 마흔 넷의 경도 같지 않을 테니까. (p. 80)

수호는 경이 삼촌을 알아보았지만 경이삼촌은 수호에게 그 어떤 아는 내식을 하지 않고 있었다. 데이터에 존재하지 않는 4년의 시간 동안 수호와 경이삼촌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소설은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죽음을 원하는 사람과 죽음을 원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을 하나하나 차곡차곡 열어나간다.

그냥, 그런 세상이 있었던 거야. 없어진 것도, 아주 먼 곳에 있는 것도 눈앞에 불러낼 수 있었던 세상이. 그게 너무 당연해서 만질 수 있는 무언가를 간직할 필요가 없던 세상이. (p. 143)

예전 사람들이 컴퓨터에만 추억을 맡긴 게 이해 안 된다고 했었지. 이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 컴퓨터에 있는 것들은 마음대로 수정할 수 있으니까, 언제든지 삭제했다가 복구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여전히 진짜 같으니까 그랬던 거야. (p. 145)

어른들이 과거를 그리워하면서도 추억삼을 것을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던 것에 대해 기억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 대해 선율은 이해할 수 없었다. 수호는 그때 사람들이 핸드폰에 컴퓨터에 데이터로만 넣어놓고 언제든 꺼내볼 수 있는 것에 익숙해져서 사진도 그림도 글자도 애써 남기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다 데이터에 전원공급이 끊기고 데이터가 물에 잠기고 데이터가 망가지면 영원히 복구할 수 없는 것임을 그때 그런 일상에선 알지 못했다고...

고통을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시작을 찾아 헤매곤 한다. 나무의 밑동을 자르면 가지도 말라 죽듯이, 그것 하나만 쳐내면 다른 아픔은 한순간에 사라질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중략) 완전히 다른 세상에 발을 들이더라도 계속되는 고통이 있다. 새로 생겨나거나, 기억 속에서 선명해지거나, 둘은 완전히 나뉘는 대신 서로 얽힌다. (p. 170)

수호와 경이삼촌의 얽혀 있는 4년, 선율과 삼촌과 우찬 사이에 풀지 못한 매듭, 지오가 받아들이는 현실과 지아가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모든 문제는 현실도 미래도 아닌 과거에 답이 있었다. 그리고 시간에.

닿지 못할 행복은 생생한 만큼 슬픔이 되고,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은 그대로 남아 후회가 된다. 살아가다 보면 지나간 순간을 다시 볼 기회가 생기지만 그 반대의 일도 얼마든지 일어난다. 과거가 오늘을 옭아매는 것이다. (p. 173)

서로를 옭아매고 있는 과거를 이들이 어떻게 풀어나가는지는 아프지만 따듯한 그들의 시간을 공감하며 읽을 때 그 감동이 배가 될 것이다. 각자의 고통을 안고 살지만 미워하기 보다 서로를 품어주는 이 착한 소설 속에 풍덩 다이브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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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끄러지는 말들 - 사회언어학자가 펼쳐 보이는 낯선 한국어의 세계, 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백승주 지음 / 타인의사유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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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차별의 시대, 지금 여기의 말들을 다시 들여다보다

우리는 단일민족국가, 단일언어 사용이라는 표현등으로 '공통된 하나' 라는 일체감을 너무 깊이 각인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그 공유된 하나가 아니라고 여겨질때면 더욱 가차없이 혐오와 차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저자는 그런 공통의 일체감이 가리고 있던 균열들을 보여준다. 다름아닌 우리의 언어를 통해서. 순수를 위해 거부되고 미끄러지고 있는 말들이 내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자신이 실제 사용하는 언어를 부정한다. 그러면서도 이를 인지하지조차 못한다. 외계인들 입장에서는 사뭇 생경하게 느껴질 풍경이다. 그러니까 이 글을 통해서 내가 하려는 일은 이런 것이다. 외계인의 눈으로 사회와 언어, 삶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들여다보는 것. 당연하다는 듯 지나치는 그 '접촉의 순간'들을 정지 버튼을 누르고 살펴보는 것.

어쨌든 부디 다른 평행 우주에 있는 내가 여러분과 지구를 구할 수 있기를 빌어 본다. 그런데 우리들 사이에 숨어 있는 외계인이 한국어 초급 교재풍으로 이렇게 물어볼지도 모르겠다. "이게 책입니까" 네, 책입니다. (p. 6~7)-프롤로그 中-

저자는 사회언어학자로서 아주 적당한 삶을 살아온 것 같다. 제주에서 나고 자라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후 대학내 한국어교육원에서 10년동안 외국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다음 지금은 5.18의 도시에서 전남대 한국어교육학과 사회언어학 교수로 있다. 나는 내가 사용하는 말과 글에 대해 타자로서 생각하거나 경험해본 적이 없는데 저자는 시종일관 타자의 입장에서 한국어를 익히고 배우고 가르쳐온 것이다. 그래서인지 저자가 들려주는 사투리에 관련된 경험이나 외국인들의 한국어에 대한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진실되게 다가오고 공감대가 남다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뒤늦게 내가 사용하는 말과 글이 휘둘러온 혐오와 차별을 깨닫기 시작한다.

<어벤져스>시리즈를 모두 섭렵한 아들에게 우주란 하나의 우주인 유니버스가 아니라 당연히 멀티버스, 곧 다중 우주일 것이다. 하지만 내게 우주는 하나였다. 슈퍼맨의 고향 별인 크립톤 행성은 지구로부터 50광년 떨어져 있고, <스타워즈>는 '오래 전 멀고 먼 은하계' 저 너머의 이야기다. 그러나 그 우주는 내가 속한 나의 우주다. 내게 우주는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내가 속한 우주의 저 반대편, 그곳에서 산다는 제다이 기사들의 '포스'를 생각하다, 문득 우주의 언어에까지 생각이 미친다. 단일한 우주이기는 하지만 그 끝을 알 수 없는 광대한 우주, 얼마나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인지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스타워즈에서는 외계인들이 영어가 아닌 온갖 종류의 다른 언어를 구사한다. 이를테면 스타워즈의 우주는 다중 언어의 세계다. 이와 달리 <어벤져스>의 우주 '들'에서는 영어라는 단일한 언어가 사용된다. 우주의 끝 타이탄 행성에서 온 최강의 악당 타노스도 영어를 사용하고, 아스가르드 왕국의 왕자 토르도 영어를 사용한다. <어벤져스>의 세계는 다중 우주이지만 단일 언어가 사용되는 곳이다. (p. 22~23)

<스타워즈>의 유니버스 에서는 다종다양한 외계어들이 난무하지만, <어벤져스>의 멀티버스 에서는 단 하나의 언어가 공용된다것에 의문을 가진 사람이 왜 여태 없었을까;;;; 저자는 언어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힘과 권력의 관계가 보인다고 이야기 한다. 사투리만 해도 남자들이 사용하면 유대감의 표현이지만 여자들이 사용하면 계몽되지 않은 야생의 존재로 여겨질 뿐이라고, 그래서 여성들이 표준어 구사를 훨씬 빨리 습득한다고. 그러고보면 한국어는 전혀 하나의 한국어가 아니라고 저자는 또한 말한다. 다양한 지역방언들과 외국인들이 사용하는 한국어와 신세대들이 만들어낸 신조어의 세계등등, 한국어의 세계는 결코 하나가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는 왜 한국어는 단 하나의 종류뿐이라고 착각해 왔는가? 어벤져스의 멀티버스 우주에서 영어가 공용어로 사용되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말들은 결코 균질하지 않다. 그러나 '한국어'라는 가공품의 '발명'은 이러한 차이를 일거에 제거해 버린다. 한국어라는 말 속에는 '언어=영토=국민'이라는 성스러운 삼위일체의 구도가 숨어 있다. 그리고 이 구도를 통해 한국 영토 안에 거주하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동일하고 균질한 하나의 한국어를 사용한다는 환상이 만들어진다. 이 환상을 만들어내는 장치는 다름 아닌 표준어 제정이다. 표준어 제정 과정에는 우생학과 위생학이 개입한다. 우생학 처리 과정은 서울말을 우등한 것으로, 지역어를 열등한 것으로 만들어 표준어에서 지역어를 제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다음은 위생학적 처리과정. 이 처리과정을 통해 토착어가 아닌 외래어들은 '오염된 말'이 된다. 순수한 언어란 있을 수 없지만 만들자면 쉽게 만들 수 있다. 방법은 간단한다. 어떤 것을 오염된 것으로 지목해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나머지는 순수한 것이 된다. (p. 34)

유럽이나 미국 처럼 하다못해 가까운 중국처럼 다민족 국가들엔 당연히 다양한 언어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반도라는 좁은 땅에서 전쟁은 잦았어도 이민이나 이주는 거의 없이 전국 어디를 가나 대화를 할 수 있었기에 한국어는 하나의 단일한 언어인 것으로 당연스레 생각해 왔다. 하지만 지역방언은? 특히 제주도 말은? 축약을 하든 뒤집든 기이하게 만들어지는 신조어들은? 해석되지 않는 말은 순수하지 않아서 한국어가 아닌가? 표준어와 서울말을 기준삼아온 것은 결국 차별과 혐오의 토대를 만든 것일수도 있었다. 아니라고? 그런 방언과 조어들도 존중해왔다고?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언어학은 노동하는 인간의 언어에는 관심이 없다. 언어학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언어 자료를 다룰 것 같지만 돈 놓고 돈 먹는 세상에서 설마 그럴 리가. 언어학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본을 움직이는 자들의 언어, 자본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언어, 또는 자본을 대변하는 국가의 '정상 언어'이다. 본래부터 언어학은 근대 부르주아 국민국가의 국가 장치로 기능해 왔다. 이 국가 장치가 충실하게 수행하는 일 중 하나는 언어를 정상적인 범주와 비정상적인 범주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런 범주의 구분은 그 자체로 권력으로 작동된다. 이렇게 비정상적인 범주로 분류된 언어들, 다시 말해 순화해야 할 범주의 언어들은 이등 시민의 언어가 된다. 그리하여 노동하는 삶 속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들은 정작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로부터 소외된다. (p. 47~48)

노동하는 언어에 대해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면 건설현장을 떠올려 보라. 가장 흔히 쓰이는 노가다라는 단어부터 이미 비하의 기운을 풍긴다. 그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해 무시의 분위기가 풍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년동안 계속 사용되어져 온 단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무엇을 소외시켜 온 것인지 누구를 소외시켜 온 것인지 이제 좀 감이 잡히는가.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상범주의 언어라고 말하는 언어들 조차 잘못 사용되곤 한다는 점이다.

N번방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것을 보라. 죽음을 택한 정치인의 성폭력 피해자에게 그 죽음의 책임을 묻고 2차 가해를 하는 행태를 보라. 차별을 법으로 금지하자는 움직임을 신의 이름으로 저주하는 모습을 보라. 이것이, 한국의 '교육'이다. 많은 한국인들은 거리낌 없이 혐오와 차별의 언어를 가르치고 배운다. 이 교육 속에서 소년들은 여성을 성적 욕망을 위한 도구라고 배운다. 이 교육 속에서 상급자는 위력으로 하급자를 유린할 수 있다고 배운다. 무엇보다도 한국사회는 이 교육을 통해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 난민들에게 말하지 말 것을 강요한다. 요컨대, 혐오와 차별의 산맥 사이, 깊은 계속에 갇힌 이들의 목소리는 지층 밑에 묻혀서 들리지 않아야 한다. 이들의 말은 지형을 이루고 풍경을 만들 권리가 없다. (p. 74)

현재 한국의 언어 지형에 대해 저자는 지옥도를 그려낸다. 별것 아니라고 그럴수도 있지라며 넘겨왔던 작은 말과 글들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나니 엄청난 지옥도가 그려져 버렸다. 뭐 그렇게까지 해석하냐 할수도 있지만 말이 씨가 된다고도 했고 말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고도 했다. 말은 그런 것이다. 사소할수도 있지만 결코 무시해서는 안되는 그런 것. 더구나 인터넷 시대가 된 현대엔 더더욱.

분노가 지금은 인터넷 산업이 대량으로 생산하는 공산품이 되었다. 그것도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이다. 오늘도 구매자들은 매력적인 분노 상품을 찾아 인터넷 공간을 기웃거린다. 사람들은 기사의 답글에, 자신의 SNS에 방금 쇼핑해 온 따끈따끈한 신상 분노를 전시힌다. 소금의 생산과 유통이 고대 문명의 기반이 되었고, 향신료라는 상품이 근대를 만들었다면, 분노라는 상품은 21세기 사회를 건설(파괴?)중이다. (p. 89~90) 분노라는 포장 안에 싸여 있는 것은 결국 혐오이겠지만 말이다. (p. 92) 분노 산업의 언어는 실재를 왜곡시킨다. 그리고 그 왜곡된 언어는 다시 일그러진 실재를 구축한다. 이 무한 반복의 개미지옥에 빠져 한국 사회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다. (p. 93)

편안하게 읽히는 에세이겠거니 생각했던 내 예상은 첫장부터 찬물을 머리에 뒤집어쓴 듯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문장들로 완전히 벗어났다. 2020년 2월부터 한국일보에 <언어의 서식지>라는 제목으로 기고하고 있는 칼럼을 바탕으로 저자의 글들을 엮은 이 책은 최근의 사회적 현상들에 대한 저자의 날선 비판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한국 사회라는 언어의 서식지에서 내가 가장 많이 관찰한 것은 혐오와 차별, 억압의 말들이었다. 이는 칼럼을 쓰기 시작한 시점이 코로나19가 본격화되던 시기라는 것과도 관련이 있을 터이다. (p. 271)' 라고 저자가 설명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비판들은 하나같이 너무 따끔한 주사였고 너무 쓴 약이었다. 하지만 '약'이 되는 지적들임은 분명했다.

자신이 나고 자란 제주를 한국의 식민지라 부르며 근로가 아닌 노동을 강조하는 저자는 한국어교육원에서 자매들의 언어로 자신을 참교육으로 이끌어준 상사에 대한 추모글로 에필로그를 마무리한다. 자신의 미끄러진 말들이 누군가에 닿길 바라며.

책을 읽는 내내 생각했다. 그동안 내 주위에서 미끄러진 말들은 무엇이었나.. 혹여 내가 일부러 미끄럼틀 위에서 밀어내버린 말들은 없었나... 다행히 내 언어의 미끄럼틀의 경사는 무척 낮은 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이 사회의 경사도는 확 올라간 느낌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 미끄러지는 말들을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계속 그렇게 경사도를 높여가며 기름칠을 해가며 더더 미끄러지게 놔두기만 할 것인지... 부디 아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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