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자리
고민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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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에서 1로 변모하는 과정은 설레면서 우울하다.

곧 1이 되겠지만 아직은 아니므로 0에 가까운 자신을 체감하게 된다.

첫 출근 날에는 0.0000001쯤 되는 기분이었다."

예전에 천문대에서 진행하는 1박2일 캠프를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도 지금과 같은 5월 언젠가였던거 같은데... 망원경을 보며 처음으로 하늘을 가까이 보고 있다는 설레임이 지금도 기억난다. 별자리를 보던때는 당연히 밤인데다 산중턱이었으므로 꽤 쌀쌀했음에도 별자리를 설명하던 강사가 그런 말을 했었다. 별은 추운 계절에 훨씬 잘 보인다고, 여름이 되어갈수록 수증기가 하늘에 많아져서 별이 잘 안 보인다고... 그때 생각했었다. 여름이라는 계절은 강렬한 햇빛때문에도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지만 밤에 별도 잘 못보는 계절이었구나... 이 소설을 읽으며 그때 그 여름의 수증기가 생각났다. 책속의 계절이 여름이기도 했지만, 별을 아무리 찾아도 가리고 감춰버린다는 하늘의 그 여름수증기처럼 이 소설은 뿌연 안개속을 걷고 있는 느낌으로 읽게 되는 소설이라서... 너무나 뿌옇고 뿌옇고 뿌얘서 영이 무엇인지 영의 자리가 어디인지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건지 온통 뿌얘서 아무것도 명확하게 보이질 않았다.

무엇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게을렀던 건 아니다. 남들만큼은 노력했다고 믿었는데 부족했던 걸까. 더 노력한다고 달라지기는 할까. 살아온 날보다 살아야 할 날들이 더 하찮아 보였다. 평소와 다른 선택을 하게 되는 건 그런 순간일 것이다. 달라질 거라고 믿거나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믿거나. 나는 후자였다. (p. 12)

'나'는 얼마전 실직을 했다. 여기저기 이력서를 보냈으나 생각보다 취업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살던 원룸에서 집주인이 나가달라고 해서 급하게 이사를 하느라 연락도 잘 안하는 본가에 손을 벌려야 했다. '넌더리가 났다. (p. 12)' 그래서 한 약국에서 모집하는 전산원 알바 자리 면접에 나갔다. 그어떤 학력이나 이력이나 나이나 성별이나 아무조건도 따지지 않는 단순업무 알바 자리에.

-유령이 또 왔네.

-네?

-유령이라고.

-유, 뭐요?

-몇 번을 말해.

약사가 나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유령이라니까. (p. 19)

-유령이 뭔데요?

-유령이 유령이지 뭐겠어.

-핼러윈에 사탕 받는 유령이요?

-그건 유령으로 분장한 사람이고

-진짜 유령이요?

-그렇다니까.

-제가요?

-원래 유령은 자기가 유령인지 몰라.

-유령은 죽은 사람이잖아요. 저는 살아 있는데요.

-산 사람도 유령이 될 수 있어. (p. 20)

약사는 대뜸 '나'를 유령이라고 한다. '나'는 별다른 의구심을 갖지 않고 그냥 그런가보다 한다. 소설에서 내내 이 '유령'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소설을 다 읽고나서도 이 '유령'이 뭔지 나는 알수 없었다. 취준생 이라던가 백수 라던가 경력단절 이라던가 사회부적응자 라던가 여하튼 변변한 직업을 갖지 못하고 아직 젊다면 젊은 30대의 나이에 모아놓은 것이 없거나 혹은 빚에 허덕이며 알바나 소소한 일회성 일자리들로 근근이 살아가는 존재, 그러니까 사회의 중심에서 튕겨나왔으나 그 언저리를 떠돌고 있는 존재를 '유령'이라고 칭한것 같긴 한데 희미한 짐작일뿐이다.

해를 정면으로 볼 때처럼 이마가 간질간질 했다. 광반사 재채기 증후군이라는 이름을 알기 전까지는 내가 과민하다고 생각했었다. 어떤 증세에 이름이 붙었다는 건 유의미한 통계가 생겼다는 뜻이다. 나 혼자만의 경험이 아니고 드문 일도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혜가 가르쳐준 건 그런 것들이었다. 나는 숨 쉬는 법부터 다시 배운 기분이 들었다. 혜를 만나기 전에는 아마 물고기였을지도 모른다. 이별이 진행되는 지금 도로 물고기가 되어버렸는지도. 할 말이 목구멍 안에 고인 채 빠져나오지 못했다. 재채기를 하기 전에 그만 고개를 숙였다. (p. 57)

'나'와 혜는 이별한 것 같다. 하지만 어떤 관계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약국에는 김약사 말고 '나'보다 먼저 들어온 조가 있다. 조 역시 유령이다. 조 역시 누군가와 이별중인것 같다.

최저 임금으로는 미래를 꿈꾸기 어려웠다. 아직 서른이라고 해도 살아내는 당사자에게는 인생의 끝자락이다. 상상력이 고갈되었는지 막다른 길 너머를 그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벌써 길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아직과 벌써 사이에는 넓은 해협이 있었다. 안개가 자욱한 바다에서 홀로 헤매는 기분이 들 때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달고나 먹을래요?

조는 요즘 매일같이 토토를 했다. (p. 92)

새로운 취향을 만드는 데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조는 노력이 유발하는 피로를 감당할 여력이 없어 보였다. 나도 요즘 무거운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지난 몇 해를 훨씬 바쁘게 살았는데 그때보다 더 지치는 기분이었다. 일을 배우느르 그렇다는 핑계도 슬슬 약효가 떨어지고 있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좋을지 생각하는 일조차 피곤했다. 그나마 무엇이라도 되었으니, 유령이기는 하지만, 다행인 걸까. (p. 97)

'나'는 시간이 나면 SNS를 둘러보며 시간을 때운다. 조는 그런 '나'를 보며 자신은 그런 걸 잘 모른다고 유투브나 가끔 본다며 나이들수록 익숙한 것만 찾게 된다고 말한다. 아직과 벌써 사이에는 얼마나 넓은 해협이 있는 걸까, 누군가에게는 해협이 아니라 그저 졸졸졸 흐르는 작은 시냇물 같을 수도 있을까. 상상력이 고갈되고 무엇을 해도 피곤한 상태 일종의 번아웃 상태가 유령인 걸까. 유령이 된 것도 무엇이 되긴 된 것일까. '나'는 유령이 된 것을 즐기고 있는 걸까.

혜를 집에 데려다준 뒤로 단단한 기둥 같았던 사람이 연약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부식된 면이 바스러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원하는 자리에 머물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자리를 옮겨 앉는 순간 어긋난 틀을 메우지 못한 채 자꾸 벌어지기만 했다. 관계가 허물어지는 소리는 짧은 알림음과 긴 적요의 반복이었다. 매일 주고받던 메시지가 점차 길을 잃었다. 나는 짐이 되지 않는 기쁨과 짐이 될 수 없는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p. 130)

'나'에게 혜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주기적으로 네일아트를 바꾸고 패셔너블한 차림을 하면서 자신을 가꾸고 영화나 전시회등을 꾸준히 관람함으로써 취향을 가꾸고 정치뉴스와 커뮤니티 활동에 열성적으로 댓을 달거나 모임에 나가는 등 삶의 모든 면에 주도적인 사람으로 늘 '나'에게 깨우침과 깨달음을 주는 존재였다. 그러던 어느날 만취한 혜를 집에 데려다주면서 '나'는 보았다. '현관에 재활용 쓰레기가 아무렇게 쌓여 있었고 주위에 양념이 묻은 플라스틱 그릇이 흩어져 있었다. 바닥에는 벗어놓은 스타킹이 머리카락 뭉치와 뒤엉켜 있었다. 쓰러져 있는 빈 술병에도 먼지가 앉았다. 싱크대에 시퍼렇게 곰팡이가 슨 귤이 보였다. 개수대 거름망에 음식물 쓰레기가 가득 차 있었다. 화장대 위에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인 화장품이 수십 개 늘어서 있었다. 몇 개는 뚜껑을 열어놓아 내용물이 말라붙었다. (중략) 나는 현관으로 돌아가 발에 묻은 먼지 덩어리를 비벼서 떨어뜨리고 신발을 신었다. 문을 닫자 도어록 잠기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p. 129)'

어머니는 아버지와 다투고 나면 꼭 나에게 와서 하소연했다. 한때는 어머니와 같은 나라의 주민이라고 생각했다. 귀담아듣고 연민했으며 언젠가 상황이 나아지리라 믿었다. 몇 년쯤 똑같은 얘기를 반복해서 들은 뒤에야 어머니에게 딸이란 약국에서 구입하기 쉬운 약과 같다는 걸 알았다. 수시로 복용해도 병세의 원인이 다른 데 있었기에 차도는 없었다. 그저 진통제에 불과했던 약의 역할을 거부했더니 어머니의 한탄은 비난응로 바뀌었다. 나는 점차 침묵을 모국어처럼 사용했다. (p. 135)

참 이상스러우면서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세상엔 행복한 가족이 별로 없다는 거다. 소설을 읽으면 크고 작은 문제로 가족은 늘 껄끄러운 관계이고 뉴스를 보면 크고 작은 문제로 가족은 늘 폭력적인 관계다. 그런데 가족이란 단어가 풍기는 느낌은 가족이란 단어에 대해 배울때의 기억은 너무 다르지 않은가? 그러고보니 어쩌면 자라는동안은 너무 이상적으로만 배워서 어른이 되어 현실에 내팽개쳐졌을때 그토록 많이들 유령이 되는 것일까...

이제까지 쌓아온 것들을 전부 무너뜨린 경험이 나에게도 있었다. 숨 쉬는 법을 모르던 물고기는 숨 쉬는 법을 잊은 물고기가 되었다. 바다는 여전히 푸르고 거대했다. 끝났다거나, 실패했다거나, 돌이킬 수 없다는 말보다는 유령이 되었다고 하는 편이 나았다. (p. 146)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숨을 쉰다. 사람은 들숨날숨으로 숨을 쉬고 물고기는 아가미로 숨을 쉰다. 하지만 들숨날숨만 숨을 쉬는 거라고 말할 수 있다면 물고기는 애초에 숨을 쉬는 법을 모르는 거다. 하지만 살아 있고 들숨날숨으로 숨을 쉬지 않아도 살아 있음으로 들숨날숨으로 숨쉬는 법을 잊어도 살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유령이 되었다. 유령은 숨을 쉬지 않는데...'나'는 살아 있는데... 살아있다고 말하기 보다는 유령이 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았다는 것일까...

아픔에 대한 공감은 고통을 나누어 받는 일이다. 처음에는 감당할 만하지만 점차 가슴에 파랗게 멍이 든다. 나는 진통제를 복용하듯이 덕질을 했다. 아이돌, 배우, 유투버, 캐릭터 상품 등등 좋아하는 감정에 한 발이라도 걸치면 전부 덕질의 계끼가 되었다. 돈이 들기는 했지만, 원래 사원이 있던 시절부터 치료에는 대가가 필요했다. (p. 173)

엄마는 딸이 듣거나말거나 하소연하는 것이 진통제가 되었다면 딸은 덕질에 돈을 쓰는 것이 진통제가 되었다. 하지만 진통제는 먹을수록 내성이 생긴다. 효과가 없어지면 더 쎄게 먹어야 한다. 그렇게 진통제를 늘려나가는 것에도 한계가 있고... 그래서 '나'는 유령이 되었다는 것일까...

스물다섯 해보다 지난 다섯 해를 더 치열하게 살았다. 나는 성실하게 하루를 파쇄해갔다. 무언가는 변하고, 무언가는 변하지 않은 채 그렇게 구부러져 0이 되었다. (p. 198)

0이 된 것이 유령이 되었다는 것일까...

조에 비해 내가 겪는 비극은 흔하디흔하고 산개되어 있었다. 하나씩 짚어 말하면 평범한 일상으로 보인다는 점이 비극이었다. 차라리 혜를 만나지 않았다면 더 편했을지 모른다. 나는 달라졌는데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그대로여다. 서른이라는 섬에 얼마나 지쳐서 도달했던가. 유령이 되는 건 외로움에 대한 저항이 실패하는 과정이었다. (p. 218)

'나'는 몇달만에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달라졌는데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그대로' 라는 것을. 그래서 그 모든 그대로인 것들에게로 돌아가기로 했다. 갑자기. 약국을 그만두고 취업을 했으며 덕질을 시작하고 커뮤니티에 공지된 집회에 나갔다. 외로움에 대한 저항에 실패하여 유령이 되기를 이제 거절한 것으로 보이는 '나'의 모습과 '유령이 되는 건 외로움에 대한 저항이 실패하는 과정'이라는 말이 상치되어 이제 어느정도 '유령'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내머릿속은 또다시 뒤죽박죽이 되었다.

강의가 끝나면 뿔뿔이 흩어져 다시 만나지 않겠지만 비슷한 취향을 공유하는 동안은 더없이 가깝게 느껴질 이들이었다. 강의가 끝나면 또 무언가를 배워보고 싶었다. (p. 241)

불분명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나로서는 소설을 읽는 내내 어떻게든 줄거리를 정리해보려고 유령이 무엇인지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며 읽은 소설이었다. 하지만 이름도 직업도 커뮤니티의 활동과 혜와의 관계등 '나'의 삶은 온통 희뿌연 안개에 가려져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결국 0이 무엇인지 유령이 무엇인지 그래서 영의 자리가 어디인지 나는 결국 찾지 못한채 마지막 페이지를 덮어야 했다.

아직 1이 되지 못한 세상의 모든 0에게 바치는 조용한 응원, 고민실 첫 장편소설 『영의 자리』 한국문학의 새로운 발견, 고민실 첫 장편소설! 이라는 책소개와 “세상은 유령이 살기에 더 적합한 구조로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덤덤하고 세밀하게 일상을 관조하는 유령의 글쓰기 라는 출판사 서평을 통해 이 책은 내가 설명할 수 없는 미학적 소설로 평가될 수도 있겠구나 라고 생각한다. 그렇게보면 그럴수도 있겠구나, 다들 그렇게들 살고 있으니 너무 아등바등하지 말라는 응원의 글이 될수도 있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뿌연 안개속을 걷는 사람들에게 혼자가 아니라고 그렇게 안개속을 걷는 사람들이 많아요 라고 알려주는 이 소설이 그렇게 유령의 글로 위안을 줄수도 있겠구나 싶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함께 안개속을 걷는 것보다 안개를 걷어낼 뚜렷한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좀더 구체적인 응원을 느낄 수 있는 소설이 더 취향저격인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0과 1사이 어딘가에서 부유하는 삶에 대한 관조또한 필요하다고도 생각한다. 그 관조의 시선에서 이 소설과 비슷한 관점에서든 다른 관점에서든 0의 자리와 1의 자리에 대해 늘 생각해보게 될 것 같다. 나는 0과 1사이 어디쯤일까... 0.0000001 쯤은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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