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처한 동양미술 이야기 1 - 인도, 문명의 나무가 뻗어나가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동양미술 이야기 시리즈 1
강희정 지음 / 사회평론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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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시대가 온다

이제 미술의 역사를 다시 쓸 차례

일명, <난처한 미술 이야기> 시리즈를 정말 좋아한다. 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시리즈를 다 읽은 것은 아니지만 6권 중 1권과 2권을 읽으며 너무 유익하고 재미있어서 시리즈 전체에 욕심이 났던 책이었다. 서양사를 읽을 때도 박물관에 전시물을 보러 갈때도 꼭 한번 읽고 넘어가야 할 시리즈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번엔 동양미술에 대한 시리즈가 시작되었다. 1권은 인도편이다. 아~! 기대된다!!!

미술을 회화 중심으로 생각한다는 건 우리가 그만큼 서양의 기준에 익숙하다는 뜻입니다. 이제부터 탐험할 동양미술의 세계는 훨씬 넓고 깊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단단히 준비해주세요. (P. 16)

저자는 이른바 고대문명발상지 4곳중 3곳이 동양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 서양사관에 젖어 온게 아니냐고 묻는다. 동양미술 이라고 하면 수묵화를 떠올리는 것 자체가 서양의 기준으로 판단하는데 너무나 익숙해진 때문이라고 말한다. (듣고 보니 정말 그렇다!) 따라서 동양미술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데 있어서 보다 열린 태도로 임할 것을 당부하며 보다 광범위한 예술 세계를 만나게 될 것을 예고한다.

1872년 일본정부에서 해외 박람회에 참가하면서 만들어낸 번역어예요. 독일오 쇤네 쿤스트(Schöne Kunst)의 번역얼오, 쿤스트는 원래 미술보다 예술이란 뜻에 더 가까워요. 그림 뿐만 아니라 시, 음악, 조각, 공산품 등이 포함되죠. (p. 18) 그런데 우리가 아는 미술사는 서양 관점이에요. 혁신을 핵심 기준에 놓은 미술이죠. 동양 미술은 달라요. 서양미술이 스스로 발전을 거듭한 끝에 일상에서 먼 곳까지 달려나갔다면 동양미술은 생활에 밀착해 있습니다. (p. 20) 동양미술이라는 세계를 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의 기준을 내려놓고 우리 주변을 새롭게 돌아보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입고 먹고 자는 모든 곳에서 동양미술이 단서를 찾을 수 있어요. (p. 23)

미술이라는 단어 자체가 일본인들이 만든 번역어 였다. 번역어란 아무리 충실해도 원어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기란 어렵다. 예술을 의미하는 Art 라는 영어단어의 기원도 찾아 올라가다보면 테크네라는 그리스어로 거슬러올라가지게 되는데 테크네는 예술이라기 보다는 기술에 가까웠다. 여하튼, 그러한 미술이라는 단어 자체도 일본이 서양을 바쁘게 쫓가며 만든 단어였기에 서양 관점이 담길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리게게 지금 미술이나 예술은 일상과 너무나 멀고 먼 비싸고 귀한 무엇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동양미술 세계는 달랐다고 말하여 따라서 서양식 관점을 벗어날 것을 다시한번 강조한다. 또한 동양과 아시아라는 단어의 의미와 그 간극에 대한 설명도 덧붙이는데 일단 '동양미술'로 부르기로 한다.

우리가 먼저 가볼 곳은 인도입니다. 동양미술의 시작으로 인도만큼 적당한 출발지가 없어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인도에서 불교가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p. 38) 제야의 종도 원래는 불교 행사였어요. (p. 39) 통치방식을 바꾼다고 1000년간의 세계관이 갑자기 바뀔 리 없지요. (중략) 조선 건국 이후 600년이 더 흘렀지만 우리는 아직 그 세계관 안에 있습니다. 잘 몰라서 안 보이는 것뿐이에요. (p. 41) 한가지만 강조하고 싶어요. 미술에는 그 미술을 만들어낸 이들의 역사와 문화, 즉 세계가 깃들어 있습니다.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우리는 서양 중심으로 세상을 봐왔지만 그 역시 여러 관점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물론 알던 대로, 익숙한 대로 세상을 본다고 큰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닙니다. 그래도 닫힌 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할 가치는 충분하죠. 알에서 깨어나야 더 넓은 세상이 열리는 것처럼요. 동양미술, 더 나아가 동양을 이해한다는 건 우리를 이해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p. 42)

저자는 동양미술에 들어가기에 앞서 동양이란 어디이고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으며 왜 동양미술을 알아야 하고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조곤조곤 설명해 준다. 하나하나 주옥같은 말이 많아서 포스트잍을 붙이며 읽다가 앗! 했는데, 소단원내용이 하나 끝날때마다 <필기노트>로 깔끔하게 이미 정리되어 있었던 것이다.이 책을 읽고 요약해보고픈 사람은 매 단원마다 있는 이 <필기노트>로 핵심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매 대단원이 끝날때마다는 본문에 나왔던 유물들을 모아 간략한 설명과 연표로 정리해놓음으로써 핵심노트 뿐만 아니라 시각적 자료의 되새김까지 가능하게 해놓았으니 이 책의 친절한 구성에 감사할 따름이다.

인도가 지금과 같은 영토를 갖춘 건 영국 식민지 시기부터입니다. 말하자면 어느 날 갑자기 영국이 '여기 다 우리 땅!'하며 경계를 긋고 이를 인도란 이름으로 관리하기 시작하면서지요. 생각보다 얼마 안 된 일이에요. (p. 59)

이 책은 '미술이야기'라는 제목을 달고 있긴 하지만 풍부한 미술적 자료를 갖춘 역사책에 가까웠다. 그렇다고해서 인도의 역사이야기 라기 보다는 인도를 중심으로 한 동양 역사의 유래를 풀어내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인도라는 나라의 이름부터 지금의 인도에 이르기까지 간략하게 설명되는 인도 역사는 동양미술, 인도미술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 바탕이었다. 제대로 된 '의미'파악은 늘 제대로 된 배경'지식'에서 출발하게 되므로.

문명의 시작 연대는 점점 올라가고 있습니다. 인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인도 최초 문명을 인더스 문명이라 배웠겠지만 그 이전에 있었던 문명이 최근에 발견됐거든요. (p. 79) 이 문명을 인더스 문명에 앞선 문명이란 뜻에서 먼저 선(先)자를 붙여 선인더스 문명이라 불러요. (p. 80) 기원전 2000년경 기후 변화로 날씨가 급격히 건조해지자 메르가르에 살던 사람들이 인더스 계곡으로 이주했을 거라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p. 82) 메르가르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게 기원전 7000~6000년이에요. 지금으로부터 약9000년 전입니다. (p. 83) 메르가르는 비교적 최근인 1974년에 발굴됐습니다. 이 사실이 교과서까지 반영되려면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해요. 시간이 충분히 지나야 '추상적인 무늬를 그린 게 신석기 문화의 특징이다'라고 배웠던 우리의 고정 관념도 바뀔 수 있을 겁니다. (p. 88)

신석기혁명과 농업혁명에 너무나 익숙한 나로서는 괴베클리 테페의 유적을 알게 되었을 때 무척 충격이었다. 농업혁명 이전에 집단거주가 있었을 수도 신석기 혁명이 신석기 혁명이 아닐 수도 있게 할 괴베클리 테페 유적은 1963년 발견되었을 땐 그저 무덤이겠거니 했다가 1994년 재발굴에 들어가면서 1만년~9천년 전의 고대인류 유적지로 인정받아 2018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발굴 및 연구중이다. 그런데 1974년에 발굴된 선인더스 문명에 대해선 왜 지금껏 단 한번도 들어본 적 없었을까? 이런....

동양 문명이 서양에서 기원했다고 생각한 서구 학자들의 선입관이 반영돼 있습니다. 즉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 문명의 지모신은 그리스 문명이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인도까지 퍼져 나간데서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애초에 인도 최초 문명의 발상지를 인더스강으로 봤던 것도 인더스강이 메소포타미아와 가깝기 때문이었고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인더스 문명을 낳았다는 생각은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오랫동안 기정사실처럼 여겨졌습니다. 심지어 인더스 문명을 만든 드라비다인을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라고까지 했죠. 하지만 메르가르의 발굴을 통해 드라비다인이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훨씬 먼저 문명을 일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 장은 설득력을 잃게 됩니다. (p. 92~93)

아직 논쟁중인 문제에 대해 저자는 성급하게 판단을 내리진 않는다. 다만 지금껏 상식이라고 여겨왔던 고대문명에 대한 상식을 깨트릴 것을 제안하는 듯 했다. 모든 문명은 서로 교류했다. 따라서 서로 영향을 끼쳤다. 어디가 먼저이고 어느것이 우수한지를 따지는 것은 나중 문제다. 그러한 것보다는 그 교류와 영향을 통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저자는 강조하고 나또한 그런 저자의 생각에 깊이 동감한다. 이후 저자가 풀어내주는 이야기들은 그러한 오픈마인드를 더 탄탄하게 지탱해줄 만큼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처음 봤을 땐 두꺼워보이던 책이었지만 재미난 소설읽듯이 책장이 아주 술술 넘어갔다.

다만 유념했으면 합니다. 강의를 처음 시작할 때 동양이라는 말의 의미를 짚었던 걸 기억하나요 아시아를 하나로 묶기 위해 동양이라는 단어를 쓰고, 불교를 공통된 정신으로 내세운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고작 몇백년 전인 19~20세기의 일본에서였지요. 일본 근대미술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오카쿠라 덴신이 최초로 동양이란 세계를 정의하고 퍼뜨린 사람입니다. (p. 496) 오카쿠라 덴신의 주장은 훗날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는 배경이 된 대동아 공영권 개념을 뒷받침할 때 이용돼요. (중략) 여기서 우리가 불교라는 관점에서 인도를 돌아본 것처럼 19~20세기 일본 학계에서도 같은 일을 했었단 점을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지끔까지 인도를 일본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만 이해했어요. 하지만 이제 그 프리즘 밖으로 나올 때입니다. 불교를 통해 아시아 미술을 이해하려는 우리의 방향 자체가 틀린 건 아니에요. 아시아 일대에 불교가 어떻게 영향력을 미쳤는지 좇는 여정은 여전히 의미있고 유효합니다. 다만 그 여정에는 과저 제국주의자들이 아시아와 동양, 인도에 덧씌워놓은 선입견을 벗겨내는 과정이 동반돼야 할 거에요. 난생처음 한번 공부하는 동양미술 이야기가 그 성공적인 시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p. 497~498)

책에 실린 이미지 자료들보다도 매단원마다 잘 정리된 핵심포인트들보다도 역사와 맞물려 흥미롭게 읽히는 동양미술이야기 보다도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마지막 페이지에 쓰여있던 바로 저 문장들이었다. 우리 자신도 모르게 갇혀 있던 미술에 대한 예술에 대한 프레임을 넓히고 선입견을 벗어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그럴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그러한 노력에 이 책과 이 시리즈가 한몫할 것이라 믿으며 다음 편을 기다려본다.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읽은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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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 행복한 사람이 욕망에 대처하는 자세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유재민 지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EBS BOOKS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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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을 읽기 전 먼저 읽으면 좋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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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 행복한 사람이 욕망에 대처하는 자세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유재민 지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EBS BOOKS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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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종교·문화적으로 시대를 지배한

'그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이 작고 얇은 책의 제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이지만, 이 작고 얇은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집대성한 그의 대표작 <니코마코스 윤리학> 이 이렇게 작고 얇을 리가 없다. 하지만 이 책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는 엄청난 책을 읽기 전 보면 좋을 훌륭한 책이다. 원전번역서가 아니지만 원전번역서와 세트로 읽어야 할 책이라고나 할까 ㅎㅎ

이 작고 얇은 책은 사실 시리즈다.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시리즈로 동서양 철학 고전을 쉽고 입체적으로 읽도록 도와주는 안내서인데, 시리즈 중 한권인 <모어의 유토피아>를 인상깊게 읽었던 터라 다른 책들도 궁금했고 그렇게 이 책을 읽게 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상의 철학자이자 현실의 철학자다. 그의 모든 사상이 그러하지만, 인간의 삶을 다루는 윤리학적·정치학적 저술들 속에서는 이를 보다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그는 타고난 외모나 물려받은 재산이 많을수록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을 하는 철학자이다. (p. 5)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분량에 있어서나 내용 이해의 측면에서 평범한 독자들이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읽어내기 힘든 저술이다. 이해를 방해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그의 개념 사용에 있다.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몇 개의 핵심 개념들 (중략) 이해와 어떤 점에서 다르고, 현대적인 관점에서라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염두에 두면서 만들어졌다. 부디 이 책을 읽고 난 독자들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직접 대면할 용기를 가지기를 바란다. (p. 7)

결론적으로 먼저 말하자면 아주 유익했다. 엄두도 못냈던 책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대면할 용기가 조금은 생긴듯 하다. 비록 근시일내에 도전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 아예 손도 못대볼 고전이 아니라 내가 언젠간 읽을 고전목록에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포함된 것은 이 작은 책 덕분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작한 학문의 이름에는 윤리학, 정치학, 수사학, 미학, 생물학, 화학, 경제학, 경영학 등 우리가 들어본 적 있는 대부분의 학문분과들이 포함된다. 그에 걸맞게 후대 사람들은 그를 '만학(萬學)의 왕'이라고 불렀다. 또한 서양 중세 시대에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대사상가들로부터 '그 철학자'로 불렸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름을 언급할 필요 없이 그냥 '그 철학자는 이렇게 말한다'는 식으로 한 명의 사상가가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받아들여져던 것이다. (p. 13) <니코마코스 윤리학>에는 행복, 중용, 덕, 정의, 우정 등 다양한 주제들이 등장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먼저 '행복'개념을 설명하면서 시작한다. (p. 14) 역사상 위대한 철학자들은 대부분 돈이나 타고난 음색이나 외모 같은 '우연'적인 것들에 별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중략)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점에서 매우 현실적인 철학자다. 그는 돈이나 타고난 재능 같은 '우연성'들이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고, 참된 행복과 우연성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탐구한다. (p. 16)

이 책에는는 '행복한 사람이 욕망에 대처하는 자세' 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부제만 보면 어찌어찌해라 라는 식의 실용적 지침을 배울 수 있는 책 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사실 이 부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집중 탐구한 주제를 압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는데 그 행복이 무엇이냐를 탐구하다 보면 인간의 본성과 인간이 지켜야 할 무엇을 탐구하게 되고 결국 행복한 사람이 갖게 되는 자세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서 이것이 모아져서 일종의 윤리처럼 받아들여 지게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도덕적으로 착한' 사람을 만들기 위한 책이 아니라 '좋은 성격을 가진' 사람, '훌륭한 성품을 갖춘' 사람을 만들기 위한 책이다. (중략) '윤리'는 그리스어 '에티코스'를 번역한 단어다. '에티코스'의 어원은 '습관'을 의미하는 '에토스'이고 우리가 습관을 들여 좋아지거나 나빠지는 것은 '도덕'이나 '윤리'가 아니라 '성격' 혹은 '성품'이다. 이런 점에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성격에 관한 책' 혹은 '성품에 관한 책'이지, 착한 사람이 따라야 하는 법칙이나 착한 사람이 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윤리학'은 정확하게 말해서 '성격학'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전제해야 한다. (p. 33)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행복'의 윤리학으로 불린다. 그의 '윤리학'적 사유는 '행복'에 관한 논의로 시작되어 '행복'에 관한 검토로 막을 내린다. (p. 36)' 고 한다. 어떻게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행복론 혹은 성품론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윤리학'에 대해 기존에 갖고 있던 상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내려놓고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윤리적? 도덕적? 이런 것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이미지가 있을 텐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것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이 철학자는 늘 행복에 관심을 기울이고 특히 인간의 행복에 대해 철학적 사유를 한다. 이러한 철학자의 사상이 왜 '윤리학'으로 전해졌는지 의아해질텐데 저자는 어원적 의미와 당대의 사상적 변화를 토대로 핵심만 쏙쏙 골라 간단명료하게 설명해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을 주관의 만족감이나 즐거운 감정으로 이해한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주관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 그의 행복은 객관적이다. 행복의 그리스어 어원은 '에우다이모니아'이다. 여기서 '에우'는 '좋은'을 의미하고, '다이모니아'는 '신적 존재, 수호신'을 의미해서, 어원상 행복은 '좋은 수호신의 보살핌, 신이 내린 행운'이 된다. 어원상으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은 주관의 만족감과는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p. 37) 그리스어, 영어, 한자어 모두 하나의 단어가 '착한' 과 '좋은'의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 셈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오해가 있는데, 그가 사용한 '아가톳'를 '착하다'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윤리학 책은 착한 사람이 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그 책은 훌륭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각자의 욕망을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이성을 어떻게 발휘해야 하는지, 인간관계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등을 알려준다. (p. 38)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행복의 윤리학이자 '덕'윤리학이다. 행복으로 시작하지만, 저술의 대부분은 '덕'을 해설하는 데 할애된다. (p. 39)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하며,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은 '좋은' 사람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행복론은 객관주의적 행복론을 표방한다. (p. 41)

그리스어 '아가토스' 영어의 'good' 한자어 '善' 은 모두 '착한' 과 '좋은' 의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데 '윤리학' 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자연스레 '착한' 이라는 뜻이겠거니 여기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에 역점을 두었다. 자신이 좀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유리한 선택을 하는 것을 그렇게 '착한' 행동을 하는 것을 우리는 도덕적이라거나 윤리적이라고 말할 때가 종종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니라고 말한다. 개인적 쾌락주의도 초월적 탈세속주의도 집단적 공리주의도 사회적 윤리원칙도 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행복'하지 않은 것들이다. 어느 하나만 콕 집어 맞다 라고 혹은 틀리다 라고 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윤리'는 다른 차원의 답변을 시도하는 것으로 현대에 와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고 하는데 이 얇은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왜 그런지 수긍할 수 있었다.

저자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는데 필수적인 개념들을 설명해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하는 단어를 지금 현대어로 번역했다고 해서 그 의미까지 번역됐다고는 말할 수 없기에, 그가 그당시 왜 그단어를 사용했는지를 알고 읽어야 그 참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작고 얇은 책이 알려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본 개념들은 무척 유용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아직 읽지 않았음에도 어렴풋이 그의 사상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쉽고 편하게 읽혔다. 책의 뒷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과 함께 읽으면 좋을 책들도 알려주니 이또한 더할나위 없이 좋은 참고서라 할만 하다. 그 중에서도 <성격의 유형들, 테오프라스토스, 쌤앤파커스, 2019> 라는 책과 <세 통의 편지(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1,2), 에피쿠로스, 나남, 2021> 그리고 <덕과 지식, 그리고 행복, 윌리엄 J 프라이어, 서광사, 2010> 이라는 책은 언젠가 꼭 읽어리라 다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이나 그의 사상이 궁금했던 사람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관심이 있지만 시작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아마 한결 가뿐해진 기분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향해 달려갈 수 있을 것같다.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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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농장 책세상 세계문학 5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책세상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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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

조지 오웰의 작품은 엄청나게 유명해서인지 안 읽었는데도 읽은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줄거리를 대강 알고 있기에 더 그런것 같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렇게 대충 아는 것과 온전히 작품을 읽는 것은 천지차이의 깨달음을 준다. 유명한 문학 작품들이라 해도 나는 그닥 관심없는 작품들이 종종 있었는데 몇달전 책세상 출판사에서 나온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마음가짐이 바뀌었다. 새로 나온 번역도 좋았지만 작품 뒤에 실린 독후감이 참 좋았다. <위대한 개츠비>의 독후감은 백민석 소설가가 썼는데 '위대한'이라는 수식어에 전혀 동의할 수 없었던 그동안의 내 비호감을 변화시켜 주었다. 이번 <동물농장>은 장강면 소설가가 쓴 독후감이 실려 있었는데 역시 현실비판적 공감도를 높여주는 촌철살인 문장이 마음에 남았다.

동지 여러분, 오늘날 우리 동물들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삶은 비참하고 고통스러우며 덧없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는 겨우 목숨을 부지할 정도로 최소한의 먹이를 받아먹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몸에 남아 있는 힘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죽어라 강제 노동에 시달립니다. 우리는 이렇게 일만 하다가 주인이 더는 쓸모가 없다고 판단하는 순간, 소름 끼치도록 잔인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합니다. 행복이 무엇인지, 휴식은 무엇인지 아는 동물은 이 잉글랜드 땅에 단 한 마리도 없을 겁니다. 이 땅에서 자유로운 동물은 하나도 없다, 이말입니다. 동물의 삶, 그것은 비참한 노예의 삶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처음부터 정해진 우리의 운명이며 자연의 섭리일까요? 우리가 사는 이 땅이 너무나 척박해서 우리에게 안락한 삶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여러분! 단언컨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p. 13)

동지 여러분! 오늘 밤 내가 여러분께 하고 싶은 말은 인간과 맞서 싸우는 것, 즉 반란입니다! (중략) 동지 여러분, 남은 생애 동안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십시오! 무엇보다 오늘 내가 말한 것을 여러분 후손에게도 전달하십시오! 미래 세대들이 승리를 얻을 때까지 투쟁을 이어가도록 해야 합니다! 동지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의 굳은 결의가 절대로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논리에 유혹당해서도 안 됩니다. (중략) 우리 동물들끼리 단결해야 합니다. 투쟁을 위해 투철한 동지 의식을 지녀야 합니다. 인간은 모두 우리의 적이고, 동물은 모두 우리의 동지입니다. (p. 16) 우리는 모두 힘을 합해 인간과 맞서 싸우되 절대로 그들을 닮아가서는 안 됩니다. 이 점을 꼭 기억하십시오. 승리를 쟁취한 뒤에도 인간이 저질러온 악행을 본받아서는 안 됩니다. (p. 17)

매너 농장은 평범하다면 평범한 농장이었다. 다양한 종류의 동물들이 농장에서 고된 노동을 하고 있었고 농장주는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가질뿐 동물들에 대한 애정도 배려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이든 돼지 한마리가 동물들을 모아놓고 그동안 자신이 생각했던 바를 들려준다. 동물들은 그 연설을 듣고 각성해가기 시작한다. 이렇게 소설의 앞부분에서 대놓고 설명해놓은 이상사회를 뒤로 가면서 슬금슬금 너무나 자연스럽게 파괴시키는 것을 읽다보면 작가의 탁월한 표현에 저절로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죽은 돼지 영감의 가르침을 다듬어서 '동물주의'라는 사고체계를 만들어낸 동물들은 비밀모임을 갖기 시작하고 서로서로 교육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배고픔에 지쳐있는데 채찍질까지 당하자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농장을 장악하게 된다. 매너농장이라는 간판은 내리고 '동물농장'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내건 후 영리한 돼지들의 지휘에 따라 동물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농장을 운영해간다. 합의하에 만들어낸 7대강령에 대해 보다 쉽게 각인시키기 위해 하나의 금언으로 압축하는데, 그것은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 였다. 하지만 너무나 똑똑한 돼지들은 점차 교묘하게 다른 동물들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귀한 우유와 사과는 돼지들의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동물들은 스스로가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돼지들의 지배에 점점 예속되어 가는 중이었다.

동지 여러분!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우리 돼지들은 힘든 두뇌 노동을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이 농장의 전반적인 경영과 관리 업무를 모두 우리가 맡고 있다, 이겁니다. 우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 하면 동지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줄까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우유를 마시고 사과를 먹는 건 다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p. 43)

그러다 동물농장 사회는 전복됐다. 사나운 개들을 앞세운 돼지 한마리가 모든 권력을 강제적으로 장악해버렸다. 동물들은 갈수록 점점 더 많이 노동하고 점점 더 많이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인간지배 아래 있던 때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라는 돼지들의 말에 여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상황은 수년 전 인간 타도를 목표로 뭉쳤을 때 모든 동물이 꿈꾸던 미래의 모습과 완전히 다르다고, 메이저 영감이 맨 처음 반란을 언급했던 그날 밤, 동물들이 기대했던 것은 공포와 살육으로 얼룩진 미래가 아니었다. 클로버가 머릿속에 그렸던 미래는 굶주림과 채찍질로부터 자유롭고, 모든 동물이 평등하며, 각자 능력에 따라 일하는 사회였다. 메이저 영감이 연설하던 날 밤, 클로버가 앞다리를 구부려서 어미잃은 새끼오리들을 보호했던 것처럼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는 사회야말로 클로버가 꿈꾸는 동물농장의 참모습이었다. 그런데 현실은 영 딴판이었다. 동물들은 사나운 개가 사방에서 으르렁대며 어슬렁거리는 바람에 아무도 자기 생각을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런 데다 동룓르이 자아비판을 한 뒤 잔인한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p. 92)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동물들은 여전히 돼지들이 시키는데로 죽어라 노동했고 굶주림에 시달렸다. 어느새 지도자격 돼지였던 나폴레옹은 모든 성공과 행운의 주인공으로서 온갖 대단한 칭호의 수식어를 이름앞에 붙이도록 했다. 동물농장은 '공화국'으로 선포되었고 대통령 후보자는 단 한마리의 돼지 뿐이었으므로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하늘너머 세상엔 '슈가캔디 마운틴'이 있어서 영원히 편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하고 다니는 까마위 모세의 말을 예전엔 다 무시했지만 이제 동물들은 모두 그 말을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돼지들은 쫓아냈던 모세를 농장에 살게 했다.

농장은 전에 비해 훨씬 부유해졌지만, 동물들의 생활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물론 돼지와 개들은 예외였다. (p. 131) 동물들의 삶은 하루하루 힘겨웠다. 동물들이 바라는 것이 모두 충족되지는 않았다. 충족되기는 커녕 부족한 것투성이였다. 하지만 동물들은 자신들이 다른 농장의 동물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 (p. 134)

힘겨운 생활 속에서도 동물들은 모두가 '평등'하다는 생각에 버텼다. 자신들이 이루어낸 성과가 동물농장의 존재 그 자체였다.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을 알 수 있는 압축적인 표현이 바로 변해버린 강령이었다.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더 좋다!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더 좋다!" (p. 136)

돼지들이 두 다리로 걷기 시작했다!

한때 이웃 농장에서는 이곳 동물 농장의 훌륭한 경영주에게 적대 감정, 아니 정확히 말해 걱정스러운 마음을 품었던 게 사실입니다. (p. 138) 하지만 이제 그런 의구심이 말끔히 해소된 겁니다! 오늘 나와 내 동료들이 이곳을 방문해 직접 농장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둘러본 결과,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중략) 이 농장의 하급 동물들은 전국의 그 어떤 동물들보다 많이 일하면서도 먹이는 더 적게 받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효율적인 농장 운영 방식입니까? (p. 139) 돼지 여러분에게 골치아픈 하급 동물들이 있다면, 우리 인간들에게는 하층민들이 있지요! 푸하하! (p. 140)

앞에서 한 돼지 영감이 했던 연설을 상기해 보라. 지금의 농장 상황이 더더욱 소름끼치게 느껴질 것이다. 인간처럼 굴고 인간과 어울리는 돼지들의 모습을 창밖에 보던 농장 동물들...

창밖의 동물들은 돼지의 얼굴에서 인간의 얼굴로, 다시 돼지의 얼굴로, 또다시 인간의 얼굴로 번갈아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동물들은 어느 것이 인간의 얼굴이고, 어느 것이 돼지의 얼굴인지 끝내 구별하지 못했다. (p. 143)

마지막 장면의 여운이 길다.

왜냐하면 저 상황은 80여년전 조지 오웰이 쓴 저 문장은 여전히 지금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오웰은 사회 정의에 민감한 작가로서 진실을 증언하고 사실을 기록하려는 욕구가 강했다. 그는 '폭로하고 싶은 거짓이 있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 진실이 있기 때문에 글을 쓴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그에게 거짓과 진실은 악과 선, 억압과 자유, 굴종과 저항을 대신하는 말이었다. (p 147) 조지 오웰이 작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한 기간은 첫 작품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발표한 1933년부터 마지막 작품인 <1984)를 출간한 1949년까지 17년이다. 이 기간은 제1차 세계대전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류 전체가 이데올로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채 피를 흘리던 비극의 시기로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파시즘, 독일 히틀러의 나치즘, 소련 스탈린의 스탈린주의, 일본의 군국주의 등 전체주의의 양상이 극에 달했다. 이로 인해 전 세계는 공포와 광기에 휩싸였으며,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가 말살되고 곳곳에서 끔찍한 살상이 자행되었다. 오웰은 작품을 통해 그런 잔인무도한 시대에 저항하고, 폭력성을 낱낱이 고발했다. 그는 특히 전체주의를 극도로 혐오했다. (p. 150~151) <1984>에서도 그렇지만 <동물농장>을 보면 작가 오웰이 가장 우려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아주 가까운 과거에 일어난 일조차 쉽게 잊어버린다는 점이다. 망각은 똑같은 역사를 반복하게 하고, 사회 정의나 윤리적 원칙이 제자리걸음 치게 한다. 오웰은 사람들에게 바로 그런 사실을 환기하려고 <동물농장>을 쓰지 않았나 싶다. 오웰은 말한다. '그것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지 마라. 그것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 라고. (p. 154~155) -작품해설 中-

전체주의... 망각... 역사의 반복... 뼈때리는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전체주의가 과연 저 냉전시대에만 있었을까? 망각하던 대중들이 지금은 과연 자각하는 시민들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시대를 역행하는 역사의 반복이 지금 이 시대에도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독후감을 쓴 소설가의 문장이 내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는 듯 했다.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 그 선량하고 이상적인, 동시에 얄팍하고 선정적인 구호가 회의를 중단시키고 비판자들의 목소리를 막는다. 모든 구호가 그런 위험성을 품고 있다. 그래서 나는 복잡한 논의가 오가지 않는 사회, 각론이 부실한 사회, 대신 맹목적인 열성 지지자와 그럴싸한 구호와 선정적인 음모론이 넘치는 사회를 진심으로 염려한다. 그런 사회는 전체주의를 향한 내리막길에 있다. 여기서 지금의 한국 현실을 떠올리는 사람이 나만은 아니리라. 오웰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예언자다. (p. 166~167) - 장강명(소설가) 독후감 中 -

지금 한국 현실에서 읽어야 할 단 하나의 소설을 골라야 한다면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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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완전해석 장치청의 중국 고전 강해
장치청 지음, 오수현 옮김 / 판미동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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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명쾌한 도덕경 강해, 지금 시대에 맞춰 풀어낸 인생의 깊은 지혜

쉽고 정통한 도덕경의 결정판

동양고전 하면 공자맹자장자노자 뭐 이런 이름들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하지만 왠지 친숙한 동양고전이 더 고리타분하게 느껴지고 멀고먼 서양고전이 더 신선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서양고전에 대해선 1도 모르니까 고전이건 현대물이건 다 새롭고 동양고전은 그래도 들은 풍월이 있으니 뭐 아는 것도 없으면서 아예 모르는건 또 아니라는 생각에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면 그닥 어렵지도 않고 생각보다 내용도 술술 넘어간다는 걸 공자의 논어를 읽으면서 느꼈었다. 요즘 세상이 또 좀 좋은가?! 한자를 몰라도 읽을 수 있게 나온 책들이 수두룩 하다. 그렇게 친절한 동양고전 읽기~! 로 이번엔 노자의 도덕경을 읽게 됐다.

노자는 이이李耳 또는 이백양李伯陽이라고 불렸으며 사후에는 노담老聃으로도 불렸다. 담聃은 시호, 즉 세상을 떠난 뒤 붙여지는 호칭으로 귀耳를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이와 노담은 의미가 통한다. 노자의 자는 백양伯陽이다. 백伯은 첫째라는 뜻이다. 고대에는 형제간 항렬을 따질 때 백伯, 중仲, 숙叔, 계季 혹은 맹孟, 숙叔, 계季 라는 용어를 썼다. 역사서에서는 노자에게 형제가 있었는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백伯이라는 글자에서 노자의 항렬이 첫째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공자는 항렬이 둘째이다. 그의 자가 중니衆尼이기 때문이다. (중략) [사기]에는 총 세 명의 노자가 등장한다. (p. 13) 노자는 이 같은 주나라 국가 도서관 관장직을 30년간이나 맡았기 때문에 특히나 학문의 소양이 깊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그의 직책이 수장리가 아닌 수장사였다는 점이다. 종종 노자가 수장리였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리는 비교적 낮은 직급의 관리이다. 이를테면 공자가 위리委吏를 맡았던 적이 있는데 그것은 창고를 관리하던 말단 관리를 의미한다. 사史는 이와 달리 지위와 계급이 무척 높았다. (p. 17)

동양고전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중국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만큼 동양고전에 대해서는 중국인 학자들이 아무래도 전문가일 것이다. 저자는 중국에서 고전연구와 강의의 권위자 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두꺼운 벽돌책의 모양새가 주는 부담감에 비하자면 내용은 학자풍이 아니라 비교적 평이하게 서술되고 있는 편이라 읽기에 그리 어렵진 않았다. 노자 라는 사람에 대한 소개와 시대적 배경을 알려주는 것으로 시작하니 배경지식이 어느 정도 있어야 이해가 용이한 고전읽기에 적합한 시작이라고 보여졌다.

공자왈 할 때 공자가 이름이 아니라는 것정도는 알았지만 그래도 이름이 공구 니까 공씨성을 가진 어른이겠거니 했기에 노자라하면 노씨성을 가진 어르신에 대한 존칭인줄 알았었는데 이씨 성이었다니.

[노자]는 [도덕경]으로도 불리늰데, 이는 [노자]가 '도경'과 '덕경'의 두 부분으로 나뉘기 때문이다. [노자]는 최소한 세 개의 판본이 있다. 하나는 통행본이고, 다른 하나는 백서본, 나머지 하나는 죽간본이다.통행본은 주로 위진 시기 왕필이 주석한 것이고, 백서본은 1973년 후난성 창사 마왕퇴의 한나라 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갑, 을 의 두 가지로 나뉜다. 전국시대 말기에서 한나라 초반의 판본으로 글자 수는 5000여 자에 달한다. 죽간본은 1993년 후베이성 징먼 곽점 초나라 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갑, 을, 병의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전국시대 중반의 판본으로 글자 수는 2000여 자에 달한다. 이 세 가지 판본을 비교하면 통행본과 백서본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배열 순서가 다르다는 점이다. (p. 25~26) 본서는 통행본을 주요한 저본으로 삼고 죽간본과 백서본을 참고로 삼고자 한다. (p. 29)

고전은 항상 원전번역서로 읽는 것이 가장 좋은데 그 이유중의 하나는 고전의 원전번역서는 출처와 해석의 근거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본내용을 읽기전 고전해석서로서의 근거를 상세히 설명해주어서 좋았다.

[노자]는 역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우리가 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한 가치를 지닐까? 조금만 역사를 돌아보면 [노자]의 영향력이 [논어]보다 훨씬 일찍 시작되어 오랜 기간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찍이 전국시대의 유명인사 한비자는 법가를 집대성한 사람으로 그의 저서 또는 [한비자]라고 불리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런 그가 바로 그의 저서에 [노자]를 수록하였을 뿐 아니라 주석까지 달았다. (중략) 이런 점에서 [노자]는 [한비자]사상의 중요한 뿌리가 되었음을 알 수 이싿. [사기]가 노자와 한비자를 [노자 한비자 열전]으로 한데 엮은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노자]에 주석을 달았던 이들 가운데 신분이 황제인 사람이 다섯이나 된다. (중략) 역사적으로 [노자]를 해석했던 책은 무척이나 많다. 어떤 이는 [노자]전파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노자]를 해석하여 중국의 본토 종교인 도교 창립의 길을 열었는데, 그가 바로 동한 시기의 장도릉이다. (p. 29) 장도릉은 이렇나 노자를 교주로 받들고 '오두미교' 즉 도교를 세웠다. (p. 30) 그 외에도 수많은 불교 승려가 [노자]를 풀이했다. (중략) 노자는 [주역]을 은연중 풀이해고 공자는 [주역]을 대놓고 풀이했다. (p. 31) 노자는 소를 탔고 공자는 말, 즉 말이 끄는 수레를 타서 서로 달랐다. 왜일까? 소와 말은 두 사람의 다른 사상을 대표하는 상징물이자 두 개의 문화적 부호로, 노자가 음을 중시하고 공자는 양을 무겁게 여겼음을 설명해 준다. [주역]을 읽었다면 말이 건괘, 즉 양의 강건함인 '양강'을 상징하고 소는 곤괘, 즉 음의 부드러움은 '음유'를 대표함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p. 37)

노자의 철학이 오래전부터 다양하게 영향력을 끼쳐왔음에 대해 저자는 강조하고 역설한다. 쉽게 쓰인 손자병법 책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후 장자의 <제물론>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던 나로서는 도교의 출발점이 노자였다고 하는 내용을 읽으니 놀라웠다. 특히나 종종 등장하는 공자와 대조하는 내용 즉, 간단하게 말하자면 서로 상반되기 때문이고 결국 같은 뿌리로 보이는 그런 비교 내용이 나올때마다 무척 흥미로웠다. 이 책은 노자에 관한 책이므로 저자는 당연히 공자의 철학보다 노자의 철학을 우대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철학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고 노자의 철학을 이야기하며 도교나 불교 그리고 공자의 철학을 함께 곁들여 주어서 그또한 흥미로웠다.

노자의 탁월함은 하늘의 도를 밝히고 이를 통해 인간사를 미루어 설명하며 인간의 도를 밝힘으로써 천지에 대응한 데 있다. [노자]철학의 핵심을 한 글자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바로 '도道'이고, 도의 내적 함의를 한 글자로 총괄하며 바로 '무無'이다. 이는 사마천이 '인위적인 작위 없이 스스로 변화하며 맑고 고요한 가운데 스스로 바르게 한다'고 말한 것과 통한다. (중략) 많은 사람이 '도'가 지나치게 심오하고 분명하지 않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노자는 친절하게도 후대인들이 어려워할 것을 염려한 나머지 '도'를 두 가지 사물에 빗대어 설명하였다. 하나는 자연계의 '물'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세상의 '아기'이다. (p. 38)

[노자]를 읽으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번잡함이나 초조함이 사라진다. 많은 사람이 내게 [주역] [노자]와 같은 고서가 오늘날 무슨 소용이 있냐고 묻는다. 이런 고서들이 이 시대에 하는 역할은 내가 감히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최소한 세 가지의 쓸모로 압축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적어도~하지 않게 하는' 세 가지 인데, 첫째 사람들을 자살하지 않게 하고, 둘째 우울하지 않게 하며, 셋째 치매와 같은 정신적 노화를 늦추거나 걸리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p. 50)

저자는 본론을 시작하기에 앞서 상당히 길게 [노자]의 철학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들을 해준다. 노자와 노자의 사상 그리고 노자가 그런 철학을 생각했던 배경들을 알게 되고 이후 어떻게 노자의 사상이 해석되어 왔는지 살펴보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자가 노자에 대해 판단한 것까지 고스란히 다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저자는 노자를 읽는 이유에 대해 세가지 쓸모를 이야기하지만 그 이유들이 딱히 내게 와닿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이유들과 다른 이유들로도 현대에 노자를 읽을 이유는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고전읽기란 항상 읽는이 각자에게 나름의 쓸모를 찾아주기 마련이다.

본문의 구성은 무척 효율적이다. 먼저 주제를 제목으로 삼고 한자로 된 원문에 한자음이 덧붙여져 있다. 그 한자 풀이를 옆에 실었고 그 뒤로 '쉬운말' 이라는 짧은 풀이와 '해석' 이라는 긴 풀이가 이어진다. 따라서 한번에 이 한권을 완독해도 되지만 1장씩 읽어도 되고 짧은 해석들만 읽어도 되고 긴 해석들만 읽어도 되고 이 책의 읽는 방법은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1장부터 81장까지 읽고나면 노자의 5000여자를 모두 읽게 되는 것이다.

5000자라고 하면 되게 많은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그리 많지도 않다. 5천자를 대충 81로 나누면 1장에 60여자가 되는데 한자 60여개로 이루어진 문장을 한글로 풀어쓰면 좀 길어지긴 하지만 한글이 60개 쓰여있다고 생각해보면 60개의 글자가 차지하는 분량은 한문단 정도의 분량이다. 그렇게 80여개이 문단으로 이루어진 소설이 있다고 생각해보면 그 페이지는 비교적 짧은 단편에 가까울 것이다. 책을 세는 단위 '권'이라는게 옛날에 죽간에 쓰느라 길게 쓰지 못하므로 여러 죽간묶음들을 수레에 담아 시작된 단위인 것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한 권의 책을 읽지만 한 수레의 책을 읽게 되는 셈이므로 많다면 많을 이 분량에 대해선 개인차가 있을 것이나 여하튼 읽을만한 분량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노자의 사상을 한 글자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분명 '도道'일 것이다. 갑골문에서는 '도'를 0라고 표기하였는데 이는 '행行'과 '지止'가 합쳐진 형상이다. '행'은 대로를 가리키고 '지'는 발가락이니 사람이 발을 이용하여 대로를 걷는 모습이다. 금문에서는 각각 길과 머리의 상형자인 '행行'과 수首'가 만나는 모습으로 발전하는데 그때 이미 추상화가 시작되어 '머리로 깨달은 길'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게 딘다. 소전에서는 길과 머리가 만나는 회의자가 되어 그 뜻을 계승하였다. 그뒤 해서의 형태로 지금까지 쭉 사용되었다. '도'는 처음에는 유형의 길을 의미했다가 점차 무형의 '도리' '이치' '방법'등의 의미로 변용되었고, 그 함의도 갈수록 풍성해져서 길, 경로, 방법, 생각의 갈래, 법칙, 서술 등의 다양한 개념을 아우르게 되었다. 노자의 도는 바로 생각의 큰 길을 뜻하여 천지만물, 자연생명을 인식하는 방법의 도이자, 천지만물 자연생명의 근원적 도이며, 운동하고 변화하는 법칙의 도이다. (p. 68)

갑골문을 표기할 수 없어 0자로 대체하긴 했는데 중국고전이니만큼 한자풀이는 필수였기에 저자가 들려주는 글자풀이는 무척 재미있었다. 글자는 사람의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고 사람의 생각이 변할수록 그 글자도 변하는 것을 보며 새삼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여하튼 '길'이라는 것은 의외로 철학적인 무엇인가 보다. '이력'의 한자에 대해 깨닫게 된 이후 다시한번 '길'의 철학에 대해 읽고보니 참 오묘한 심정이 들었다.

'시始'는 계집아이, 소녀이고 '없음'은 마치 이러한 계집아이, 소녀와도 같다. '있음'의 단계는 만물의 어머니다. '모母'라는 글자의 형상은 여女라는 글자에 두 개의 점이 찍힌 모습인데 이 두 개의 점은 여성의 유방으로 성숙한 여인을 상징한다. 이리하여 도는 없음과 있음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중 '없음'은 첫 번째 단계이며 계집아아니 소녀를 뜻하고 '있음'은 두 번째 단계로 어머니이자 젊은 부인을 가리킴이 분명해졌다. (p. 74) 없음에서 있음에 이르는 길은 계집아이에서 어머니가 되고 소녀에서 젊은 부인이 되는 과정이다. 없음에서 있음이 나지만 없음은 만물을 직접 생산할 수 없고, 오직 '있음'이라는 단계에 이를 때에만 만물을 생겨나게 할 수 있다. (p. 75) 노자는 여성을 높이고 자주 여서의 비유를 들었던 반면 공자는 남성을 숭상했다. 여기서도 우리는 노자가 공자보다 앞 시대를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모계사회가 먼저 있었고 그 뒤에 부계 사회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노자가 음의 성질을 숭상하고 여성을 높인 데는 전형적인 모계사회의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공자가 남성을 숭상하고 양의 성질을 높인 것에는 전형적인 부계사회의 사상이 엿보인다. (p. 76)

1장부터 앞부분은 해설이 상당히 긴 편인데 이것은 노자의 사상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원문 풀이만 하면 사상에 접근하기가 어려울 것이기에 독자를 위해 당연한 저자의 선택인 것 같다. 81장으로 구분되어 있긴 하지만 소설처럼 맥락이 필요한 문장들이 아니므로 순서는 그닥 크게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반복적인 개념이 나오므로 처음엔 이러한 상세한 설명이 무척 유용하다. 노자나 공자나 모두 옛 선현들은 주역에 대단히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동양사상 하면 아주 간단하게는 음양과 오행의 조화 라는 표현이 떠오르기 마련인데 대분은 음은 어둡고 별로 안 좋은 것 양은 밝고 좋은 것 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노자가 음을 더 중시했다니, 첫 문장부터 여성의 신체를 빗대어 있음과 없음 이라는 자신의 사상을 설파했다니, 놀라웠다.

원래 하나였던 것이 선악과 미추로 나뉘면 그것은 곧 도덕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본질이 아닌 두 번째이자 나중의 것이며 인위적인 것이다. 인류는 자신의 관점에서 출발해서 자연 만물, 더 나아가 인류 자체를 선악과 미추로 구분한다. 이 때문에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며, 아름다움을 좋아하고 추함을 싫어하게 되며, 그러다 결국 분쟁이 초래되기도 한다. 그래서 노자는 '인을 끊고 의를 버린다' (중략) 원래 하늘과 땅 사이에는 소위 인의라는 것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도의 경지이다. 그래서 선악과 미추를 나누거나 분별심을 일으키지 말고 천지자연의 경지로 돌아가야 한다. (중략) 노자게 보기에 미추와 선악은 모두 대립하는 관계에서 생겨난 것이자 사물이 '있음'이라는 두번째 단계에 도달해야만 출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둘은 서로 보완하고 서로 이루어주는 관계이다. 만일 아름다움이 없으면 추함도 없을 것이고, 선이 없으면 악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형이하에 속하여 사람들의 심리상태가 시간, 환경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 이 말은 우리에게 현실의 삶에서 소위 순수한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느다는 큰 일깨움을 준다. (p. 95)

노자는 어째서 이러한 사상을 제시했을까? 전국시대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분위기가 만연했고 역대 제왕들 또한 함부로 행동함이 그 도를 넘어섰다. 그래서 노자가 말한 성인과 공자가 말한 성인은 같은 개념이 아니다. 공자의 성인은 인의를 중시하지만 노자가 말한 성인은 인의를 중시하지 않는다. 인의가 중시하게 된 이유는 바로 대도가 무너진 결과이기 때문이다. 사실 세상에 도가 있었더라면 인의를 강조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본래부터 스스로 그러한 이치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인의를 들먹일 필요가 없다. 그래서 인의를 강조하지 않는 것이다. (p. 99)

그래서 [노자]는 신하가 읽는 것이 아닌 제왕께 바치는 책이라는 의미에서 '남면지술南面之術'이라고 불렸다. (p. 101)

노자의 철학에서 놀라운 것은 노자의 사상이 제왕에게 바쳐진 철학이었다는 점이었다. 무위 라던가 자연으로 돌아가라 라던가 하는 식의 노자의 사상에 대한 이미지는 가진자들보다는 가지지못한자들의 사상으로 더 알려지지 않았나? 그렇게 위로와 힐링의 측면으로 설명한 책들도 있지 않았나? 그런데 정치철학적으로도 경영철학적으로도 저자가 풀어주는 노자의 사상은 가진자들에게 하는 쓴소리였다.

공자와 노자는 그 출발점은 완전히 일치하지만 공자는 정면에서 직접적으로 서령한 반면 노자는 정면이 아닌 이면에서 접근하여 설명한다. 하나가 정正을 말했다면 다른 하나는 반反을 말하여 음陰을 들어 양陽을 내세우는 식이다. 공자는 당시 사회가 예약이 붕괴하고 백성이 서로 다투며 도적이 횡행하는 모습을 보고 인의를 높여 군자는 군자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고 했다. 즉 예의를 중시하고 법칙을 준수하여 사회윤리의 강령을 세워야 함을 정면에서 직접 주장한 것이다. 이와 달리 노자는 반대 면에서 출발하여 오히려 어짊과 덕을 갖춘 사람을 추존하지 말라고 한다. (p. 106)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이 같은 대립을 없애고 뿌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재물이나 능력있는 사람, 희귀한 물건을 숭상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노자가 '뜻을 약하게 하고 뼈는 강하게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중략) 욕망이 없다면 천하는 혼란스러워지지 않을 것이고, 소위 지혜자라고 하는 이들이 활개를 칠 곳이 사라져 감히 경거망동하지 않을 것다. (p. 110) 즉 자신의 욕망이나 의지대로 행하지 않고 자연에 부합하고 순응하며 사람의 본성을 따라 행하면, 천하가 태평해지고 사람들의 마음이 혼란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노자는 공자보다 한층 더 높은 고지에서 철저하게 세상을 바라봤다고 할 수 있다. (p. 111)

공자는 지혜와 인의를 강조하여 후대 유가는 공명사상을 인 의 예 지 신 이라는 오덕으로 귀결시켰지만, 노자는 도리어 '인을 끊고 의를 버린다' '영명함을 끊고 지혜를 버린다' 고 하여 인의나 지혜를 모두 버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얼핏 보기에는 노자와 공자가 완전히 상반된 양상인 듯 하지만, 사실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문제와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는 동일하다. (중략) 공자는 예악이 붕괴한 사회의 혼란을 정면에서 직시하고 이것이 인의예지신을 중시하지 않은 결과라고 여겼지만, 노자는 그것의 반대 면에서 사회의 혼란을 보았다 .예악의 붕괴는 인의예지신을 강조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의예지신을 지나치게 많이 강조한 결과 나타난 현상이므로 오히려 우리는 잃어버렸던 맑고 고요한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 본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이다. (p. 160)

노자의 음의 사상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공자의 양의 사상에 대한 물음표가 생겨나기 마련인데 저자는 이에 대해 반복하여 강조한다. 공자의 사상엔 오히려 한계가 있고 노자의 사상엔 한계가 없다고. 노자의 책 한권 읽었다고 그의 사상을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어떤 규칙을 강조하는 것이 되려 그 규칙이 무너졌기 때문이기에 그럴수록 그 규칙을 더더 강요하기보다는 본래의 목적이 무엇이었나를 생각하라는 점에 대해서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많았다. 생각해보면 어떤 한가지를 강조한다는 것은 그 강조로 인해 이득을 보는 자들이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음이 무시되고 양이 강조 되면서 사회가 어떻게 바뀌었나? 선을 추구하고 악을 비방하면서 그러한 분리적 사고로 인한 결정이 누구에게 유리해졌나? 기준과 구분은 결국 차별과 억압을 만들어왔다. 그렇다고 무법천지 세상으로 내버려 두자는 말은 아니다. 노자가 말하는 無에 대해 무위에 대해 조금은 알것도 같다는 말일뿐.

최고의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 다음가는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를 가깝게 여기고 기린다.

그 다음가는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한다.

그 다음가는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를 업신여긴다.

17장에 나오는 경구의 일부이다. 아~! 싶지 않은가? ㅎㅎ 이러한 감탄이 고전을 읽는 맛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노자와 공자, 석가모니 등 동방의 성인은 하나같이 심령과 심성은 본래 순수하고 깨끗하며 맑고 비어 있어 외부 사물을 관찰하고 조명하는 능력이 있다고 보지만, 서양의 주류 사상가와 심리학자들은 인류의 심령 가장 깊은 곳에서는 조급함과 초조함, 불안함이 있으므로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해야 한다고 봤다. 이러한 인식 차이는 서양인이 외재적 추구와 외재적 실증, 경험 지식을 중시하게 된 사유의 전통을 만들어 냈다. 이 두 가지 사유방식을 비교하면 과연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나는 둘 사이에 옳고 그름은 없으며 각자의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본체엇 출발하면 사람의 심령은 맑고 깨끗하며 잠재능력은 거대하다. 조급함은 심령의 본질이 아니라 다만 심령의 외재적 표현일 뿐이다. 오직 심령의 깨끗하고 순수한 본질로 회귀해야만 비로소 거대한 잠재력을 발휘하여 외부 사물을 인지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는 지금 외재적 추구가 지나쳐 경험적 지식을 과도하게 중시하는 반면, 내적 실증, 내적 추구의 능력은 크게 퇴화되는 상황이다. 덮어놓고 외적 추구만 할 거이 아니라 반드시 내적 실증, 내적 추구를 훈련함으로써 마음이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게 해야 한다. (p. 426)

사실 도를 닦고 마음을 수련하는 것은 우리네 문화권에선 그닥 새롭지 않은 문화이다. 그러나 '마음챙김' 이라면서 서양에서는 종교 외의 내적 단련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과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어느쪽 이 더 낫다거나 먼저라거나 하는 식의 생각은 말자. 코로나시대에 외떨어진 심정을 다독이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 되어버렸으니 그저 자연스럽게 원래 하던 방식으로 '나'를 '나의 마음'을 '나의 상태'를 생각하면 된다. 우리는 우리의 내적 수련에 대해 늘 가까이 접해온 사람들이다.

'무위無爲'로 행하고 '무사無事'로 일삼고 '무미無味'로 맛을 본다. 크든 작든 모두 원한을 은덕으로 보답한다. 어려움을 해결할 때는 쉬운 일부터 착수하고 대업을 이룰 때도 작은 일부터 시작한다. 천하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일에서 시작하고 천하의 큰일도 반드시 작은 일에서 시작한다. 이 때문에 성인은 시종 큰일을 하지 않아서 결국 그의 위대함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쉽게 승낙하는 사람은 반드시 신임을 얻기 어렵고, 일을 지나치게 쉽게 보는 사람은 반드시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이 때문에 성인은 늘 일을 어렵게 여겨서 결국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p. 525~526)

아프니까 청춘이다 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땐 이런 명언이 있나 싶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책을 읽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그런 무책임한 말이 또 어디있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됐다. 꽃길만 걷자 라는 말을 처음 봤을땐 이런 축언이 어디 있나 싶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들 뒤에 결코 축언이 아님을 깨닫게 됐다. 어려운 일은 어렵게 생각하고 어렵게 풀어야 하고 쉬운 일은 쉽게 여기고 쉽게 풀어야 한다. 어려운 일을 쉽게 쉬운 일을 어렵게 해내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꽃길만 걷다가는 작은 돌멩이에 걸려 넘어져도 일어나지 못할 수가 있으며 청춘이 당연히 아픈줄 알다가는 청춘에 골병들어 노년까지 버티지 못할 수도 있다. 차근차근 모든 것을 처음처럼 신중하게 대하는 태도는 분명 어려우나 그러한 태도를 키워나갈때 결국 많은것들에 대한 어려움이 없어질 것이다.

나라를 작게 하고 백성을 적게 한다.

백성들이 열 가지 백 가지 기물이 있어도 쓰지 않게 하고

백성들이 죽음을 중히 여겨 멀리 이사다니지 않게 한다.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그것을 탈 일이 없고

갑옷과 병기가 있어도 그것을 늘어놓을 일이 없다.

백성들이 다시 새끼를 꼬아 그것을 사용하게 한다.

음식을 맛있게 여기고 옷을 아름답게 여기며

거처를 편안히 여기고 풍속을 즐겁게 여긴다.

이웃 나라와 서로 바라다보고 닭 울고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 (p. 631)

80장의 경구이다. 여기서 시대적 차이로 인해 새끼를 꼬는 것은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 상고 시대에 백성들이 사물 혹은 사건을 기록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이라는 것만 알아두면 나머지는 그대로 의미를 생각해보면 될 문장이다. 저자는 마지막 문장에 대해 왕래가 잦으면 시비도 늘어나는 법이니 굳이 교류해서 무엇하겠는가 자족하고 살면 된다 라고 풀이하지만 나는 왠지 그 풀이로 만족이 되진 않는다. 자칫하면 서로 나몰라라 하고 살라는 말처럼 들리지 않는가? 하지만 노자의 사상을 81장 중에서 80장정도까지 읽었으면 그 의미는 아니란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굳이 왕래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된다는 것을.

믿음직한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하지 않다.

선한 자는 말을 잘하지 못하고

말을 잘하는 자는 선하지 못하다.

지혜로운 자는 해박하지 않고

해박한 자는 지혜롭지 못하다.

성인은 쌓아 두지 않고

남에게 모두 베풀어도 자신은 더욱 가지게 되고

남에게 모두 주어도 자신은 더욱 많아진다.

하늘의 도는 이롭게 할 뿐 해하지 않으며

성인의 도는 베풀 뿐 다투지 않는다. (p. 637)

노자의 사상 5000여자 중에서 그 81장 중에서 마지막 경구이다. 마지막 문장이라고 해서 꼭 핵심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이 책을 마무리하기에는 좋은 문장인것 같아서 옮겨왔다. 잘은 몰라도 그냥 딱 노자 같달까 ㅎㅎㅎ

도덕경 이라고 하니 왠지 공자왈 맹자왈 하는 책보다 더 예의범절 적이고 경직된 느낌을 주지만 막상 읽어보면 훨씬 자연적이고 하릴없는 순리를 느끼게 되는 책이었다. 무위로 돌아간다는 것이 빈털터리 헐벗은 원시인이 되자는 소리가 아니라 선으로 충만하고 깨달음으로 평온한 상태라는 것에 대해 내내 생각하게 되면서 조금은 관조적인 사람이 되어 느긋해지는 기분이 되기도 했다. 두툼한 벽돌책을 완독했다는 만족감에 뿌듯해하는 여전히 '있음'적 사고를 하는 나 이지만 '없음'으로써 가득해지는 경험을 한 시간 만큼은 충분히 감사를 표하고 싶다. 그래도 조금은 '무위'를 깨달았다고... ㅎㅎ

공자의 논어가 의욕을 일으키는 책이었다면 노자의 도덕경은 그러한 의욕이 부질없음을 알게 하는 책이었는데 그동안의 나의 무력이 게으름때문임을 알면서도 나는 노자의 도덕경에서 그 게으름의 탈출구를 조금은 찾은 것도 같다. 항상 열심히 할 수는 없다. 매일 앞만 보며 달려갈 순 없다. 때론 열심하 하지 않는 것이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을 바깥의 길이 아니라 내 안의 길도 들여다 봐야 한다는 것을... 앞으로도 종종 노자의 無를 상기하며 사는 것이 큰 힘이 될 것 같다. 자연의 순리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고, 가득채워 단단해지는 것이 아니라 비워냄으로 단단해지는 것을 원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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