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완전해석 장치청의 중국 고전 강해
장치청 지음, 오수현 옮김 / 판미동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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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명쾌한 도덕경 강해, 지금 시대에 맞춰 풀어낸 인생의 깊은 지혜

쉽고 정통한 도덕경의 결정판

동양고전 하면 공자맹자장자노자 뭐 이런 이름들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하지만 왠지 친숙한 동양고전이 더 고리타분하게 느껴지고 멀고먼 서양고전이 더 신선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서양고전에 대해선 1도 모르니까 고전이건 현대물이건 다 새롭고 동양고전은 그래도 들은 풍월이 있으니 뭐 아는 것도 없으면서 아예 모르는건 또 아니라는 생각에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면 그닥 어렵지도 않고 생각보다 내용도 술술 넘어간다는 걸 공자의 논어를 읽으면서 느꼈었다. 요즘 세상이 또 좀 좋은가?! 한자를 몰라도 읽을 수 있게 나온 책들이 수두룩 하다. 그렇게 친절한 동양고전 읽기~! 로 이번엔 노자의 도덕경을 읽게 됐다.

노자는 이이李耳 또는 이백양李伯陽이라고 불렸으며 사후에는 노담老聃으로도 불렸다. 담聃은 시호, 즉 세상을 떠난 뒤 붙여지는 호칭으로 귀耳를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이와 노담은 의미가 통한다. 노자의 자는 백양伯陽이다. 백伯은 첫째라는 뜻이다. 고대에는 형제간 항렬을 따질 때 백伯, 중仲, 숙叔, 계季 혹은 맹孟, 숙叔, 계季 라는 용어를 썼다. 역사서에서는 노자에게 형제가 있었는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백伯이라는 글자에서 노자의 항렬이 첫째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공자는 항렬이 둘째이다. 그의 자가 중니衆尼이기 때문이다. (중략) [사기]에는 총 세 명의 노자가 등장한다. (p. 13) 노자는 이 같은 주나라 국가 도서관 관장직을 30년간이나 맡았기 때문에 특히나 학문의 소양이 깊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그의 직책이 수장리가 아닌 수장사였다는 점이다. 종종 노자가 수장리였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리는 비교적 낮은 직급의 관리이다. 이를테면 공자가 위리委吏를 맡았던 적이 있는데 그것은 창고를 관리하던 말단 관리를 의미한다. 사史는 이와 달리 지위와 계급이 무척 높았다. (p. 17)

동양고전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중국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만큼 동양고전에 대해서는 중국인 학자들이 아무래도 전문가일 것이다. 저자는 중국에서 고전연구와 강의의 권위자 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두꺼운 벽돌책의 모양새가 주는 부담감에 비하자면 내용은 학자풍이 아니라 비교적 평이하게 서술되고 있는 편이라 읽기에 그리 어렵진 않았다. 노자 라는 사람에 대한 소개와 시대적 배경을 알려주는 것으로 시작하니 배경지식이 어느 정도 있어야 이해가 용이한 고전읽기에 적합한 시작이라고 보여졌다.

공자왈 할 때 공자가 이름이 아니라는 것정도는 알았지만 그래도 이름이 공구 니까 공씨성을 가진 어른이겠거니 했기에 노자라하면 노씨성을 가진 어르신에 대한 존칭인줄 알았었는데 이씨 성이었다니.

[노자]는 [도덕경]으로도 불리늰데, 이는 [노자]가 '도경'과 '덕경'의 두 부분으로 나뉘기 때문이다. [노자]는 최소한 세 개의 판본이 있다. 하나는 통행본이고, 다른 하나는 백서본, 나머지 하나는 죽간본이다.통행본은 주로 위진 시기 왕필이 주석한 것이고, 백서본은 1973년 후난성 창사 마왕퇴의 한나라 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갑, 을 의 두 가지로 나뉜다. 전국시대 말기에서 한나라 초반의 판본으로 글자 수는 5000여 자에 달한다. 죽간본은 1993년 후베이성 징먼 곽점 초나라 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갑, 을, 병의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전국시대 중반의 판본으로 글자 수는 2000여 자에 달한다. 이 세 가지 판본을 비교하면 통행본과 백서본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배열 순서가 다르다는 점이다. (p. 25~26) 본서는 통행본을 주요한 저본으로 삼고 죽간본과 백서본을 참고로 삼고자 한다. (p. 29)

고전은 항상 원전번역서로 읽는 것이 가장 좋은데 그 이유중의 하나는 고전의 원전번역서는 출처와 해석의 근거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본내용을 읽기전 고전해석서로서의 근거를 상세히 설명해주어서 좋았다.

[노자]는 역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우리가 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한 가치를 지닐까? 조금만 역사를 돌아보면 [노자]의 영향력이 [논어]보다 훨씬 일찍 시작되어 오랜 기간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찍이 전국시대의 유명인사 한비자는 법가를 집대성한 사람으로 그의 저서 또는 [한비자]라고 불리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런 그가 바로 그의 저서에 [노자]를 수록하였을 뿐 아니라 주석까지 달았다. (중략) 이런 점에서 [노자]는 [한비자]사상의 중요한 뿌리가 되었음을 알 수 이싿. [사기]가 노자와 한비자를 [노자 한비자 열전]으로 한데 엮은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노자]에 주석을 달았던 이들 가운데 신분이 황제인 사람이 다섯이나 된다. (중략) 역사적으로 [노자]를 해석했던 책은 무척이나 많다. 어떤 이는 [노자]전파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노자]를 해석하여 중국의 본토 종교인 도교 창립의 길을 열었는데, 그가 바로 동한 시기의 장도릉이다. (p. 29) 장도릉은 이렇나 노자를 교주로 받들고 '오두미교' 즉 도교를 세웠다. (p. 30) 그 외에도 수많은 불교 승려가 [노자]를 풀이했다. (중략) 노자는 [주역]을 은연중 풀이해고 공자는 [주역]을 대놓고 풀이했다. (p. 31) 노자는 소를 탔고 공자는 말, 즉 말이 끄는 수레를 타서 서로 달랐다. 왜일까? 소와 말은 두 사람의 다른 사상을 대표하는 상징물이자 두 개의 문화적 부호로, 노자가 음을 중시하고 공자는 양을 무겁게 여겼음을 설명해 준다. [주역]을 읽었다면 말이 건괘, 즉 양의 강건함인 '양강'을 상징하고 소는 곤괘, 즉 음의 부드러움은 '음유'를 대표함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p. 37)

노자의 철학이 오래전부터 다양하게 영향력을 끼쳐왔음에 대해 저자는 강조하고 역설한다. 쉽게 쓰인 손자병법 책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후 장자의 <제물론>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던 나로서는 도교의 출발점이 노자였다고 하는 내용을 읽으니 놀라웠다. 특히나 종종 등장하는 공자와 대조하는 내용 즉, 간단하게 말하자면 서로 상반되기 때문이고 결국 같은 뿌리로 보이는 그런 비교 내용이 나올때마다 무척 흥미로웠다. 이 책은 노자에 관한 책이므로 저자는 당연히 공자의 철학보다 노자의 철학을 우대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철학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고 노자의 철학을 이야기하며 도교나 불교 그리고 공자의 철학을 함께 곁들여 주어서 그또한 흥미로웠다.

노자의 탁월함은 하늘의 도를 밝히고 이를 통해 인간사를 미루어 설명하며 인간의 도를 밝힘으로써 천지에 대응한 데 있다. [노자]철학의 핵심을 한 글자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바로 '도道'이고, 도의 내적 함의를 한 글자로 총괄하며 바로 '무無'이다. 이는 사마천이 '인위적인 작위 없이 스스로 변화하며 맑고 고요한 가운데 스스로 바르게 한다'고 말한 것과 통한다. (중략) 많은 사람이 '도'가 지나치게 심오하고 분명하지 않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노자는 친절하게도 후대인들이 어려워할 것을 염려한 나머지 '도'를 두 가지 사물에 빗대어 설명하였다. 하나는 자연계의 '물'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세상의 '아기'이다. (p. 38)

[노자]를 읽으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번잡함이나 초조함이 사라진다. 많은 사람이 내게 [주역] [노자]와 같은 고서가 오늘날 무슨 소용이 있냐고 묻는다. 이런 고서들이 이 시대에 하는 역할은 내가 감히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최소한 세 가지의 쓸모로 압축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적어도~하지 않게 하는' 세 가지 인데, 첫째 사람들을 자살하지 않게 하고, 둘째 우울하지 않게 하며, 셋째 치매와 같은 정신적 노화를 늦추거나 걸리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p. 50)

저자는 본론을 시작하기에 앞서 상당히 길게 [노자]의 철학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들을 해준다. 노자와 노자의 사상 그리고 노자가 그런 철학을 생각했던 배경들을 알게 되고 이후 어떻게 노자의 사상이 해석되어 왔는지 살펴보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자가 노자에 대해 판단한 것까지 고스란히 다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저자는 노자를 읽는 이유에 대해 세가지 쓸모를 이야기하지만 그 이유들이 딱히 내게 와닿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이유들과 다른 이유들로도 현대에 노자를 읽을 이유는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고전읽기란 항상 읽는이 각자에게 나름의 쓸모를 찾아주기 마련이다.

본문의 구성은 무척 효율적이다. 먼저 주제를 제목으로 삼고 한자로 된 원문에 한자음이 덧붙여져 있다. 그 한자 풀이를 옆에 실었고 그 뒤로 '쉬운말' 이라는 짧은 풀이와 '해석' 이라는 긴 풀이가 이어진다. 따라서 한번에 이 한권을 완독해도 되지만 1장씩 읽어도 되고 짧은 해석들만 읽어도 되고 긴 해석들만 읽어도 되고 이 책의 읽는 방법은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1장부터 81장까지 읽고나면 노자의 5000여자를 모두 읽게 되는 것이다.

5000자라고 하면 되게 많은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그리 많지도 않다. 5천자를 대충 81로 나누면 1장에 60여자가 되는데 한자 60여개로 이루어진 문장을 한글로 풀어쓰면 좀 길어지긴 하지만 한글이 60개 쓰여있다고 생각해보면 60개의 글자가 차지하는 분량은 한문단 정도의 분량이다. 그렇게 80여개이 문단으로 이루어진 소설이 있다고 생각해보면 그 페이지는 비교적 짧은 단편에 가까울 것이다. 책을 세는 단위 '권'이라는게 옛날에 죽간에 쓰느라 길게 쓰지 못하므로 여러 죽간묶음들을 수레에 담아 시작된 단위인 것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한 권의 책을 읽지만 한 수레의 책을 읽게 되는 셈이므로 많다면 많을 이 분량에 대해선 개인차가 있을 것이나 여하튼 읽을만한 분량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노자의 사상을 한 글자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분명 '도道'일 것이다. 갑골문에서는 '도'를 0라고 표기하였는데 이는 '행行'과 '지止'가 합쳐진 형상이다. '행'은 대로를 가리키고 '지'는 발가락이니 사람이 발을 이용하여 대로를 걷는 모습이다. 금문에서는 각각 길과 머리의 상형자인 '행行'과 수首'가 만나는 모습으로 발전하는데 그때 이미 추상화가 시작되어 '머리로 깨달은 길'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게 딘다. 소전에서는 길과 머리가 만나는 회의자가 되어 그 뜻을 계승하였다. 그뒤 해서의 형태로 지금까지 쭉 사용되었다. '도'는 처음에는 유형의 길을 의미했다가 점차 무형의 '도리' '이치' '방법'등의 의미로 변용되었고, 그 함의도 갈수록 풍성해져서 길, 경로, 방법, 생각의 갈래, 법칙, 서술 등의 다양한 개념을 아우르게 되었다. 노자의 도는 바로 생각의 큰 길을 뜻하여 천지만물, 자연생명을 인식하는 방법의 도이자, 천지만물 자연생명의 근원적 도이며, 운동하고 변화하는 법칙의 도이다. (p. 68)

갑골문을 표기할 수 없어 0자로 대체하긴 했는데 중국고전이니만큼 한자풀이는 필수였기에 저자가 들려주는 글자풀이는 무척 재미있었다. 글자는 사람의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고 사람의 생각이 변할수록 그 글자도 변하는 것을 보며 새삼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여하튼 '길'이라는 것은 의외로 철학적인 무엇인가 보다. '이력'의 한자에 대해 깨닫게 된 이후 다시한번 '길'의 철학에 대해 읽고보니 참 오묘한 심정이 들었다.

'시始'는 계집아이, 소녀이고 '없음'은 마치 이러한 계집아이, 소녀와도 같다. '있음'의 단계는 만물의 어머니다. '모母'라는 글자의 형상은 여女라는 글자에 두 개의 점이 찍힌 모습인데 이 두 개의 점은 여성의 유방으로 성숙한 여인을 상징한다. 이리하여 도는 없음과 있음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중 '없음'은 첫 번째 단계이며 계집아아니 소녀를 뜻하고 '있음'은 두 번째 단계로 어머니이자 젊은 부인을 가리킴이 분명해졌다. (p. 74) 없음에서 있음에 이르는 길은 계집아이에서 어머니가 되고 소녀에서 젊은 부인이 되는 과정이다. 없음에서 있음이 나지만 없음은 만물을 직접 생산할 수 없고, 오직 '있음'이라는 단계에 이를 때에만 만물을 생겨나게 할 수 있다. (p. 75) 노자는 여성을 높이고 자주 여서의 비유를 들었던 반면 공자는 남성을 숭상했다. 여기서도 우리는 노자가 공자보다 앞 시대를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모계사회가 먼저 있었고 그 뒤에 부계 사회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노자가 음의 성질을 숭상하고 여성을 높인 데는 전형적인 모계사회의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공자가 남성을 숭상하고 양의 성질을 높인 것에는 전형적인 부계사회의 사상이 엿보인다. (p. 76)

1장부터 앞부분은 해설이 상당히 긴 편인데 이것은 노자의 사상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원문 풀이만 하면 사상에 접근하기가 어려울 것이기에 독자를 위해 당연한 저자의 선택인 것 같다. 81장으로 구분되어 있긴 하지만 소설처럼 맥락이 필요한 문장들이 아니므로 순서는 그닥 크게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반복적인 개념이 나오므로 처음엔 이러한 상세한 설명이 무척 유용하다. 노자나 공자나 모두 옛 선현들은 주역에 대단히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동양사상 하면 아주 간단하게는 음양과 오행의 조화 라는 표현이 떠오르기 마련인데 대분은 음은 어둡고 별로 안 좋은 것 양은 밝고 좋은 것 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노자가 음을 더 중시했다니, 첫 문장부터 여성의 신체를 빗대어 있음과 없음 이라는 자신의 사상을 설파했다니, 놀라웠다.

원래 하나였던 것이 선악과 미추로 나뉘면 그것은 곧 도덕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본질이 아닌 두 번째이자 나중의 것이며 인위적인 것이다. 인류는 자신의 관점에서 출발해서 자연 만물, 더 나아가 인류 자체를 선악과 미추로 구분한다. 이 때문에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며, 아름다움을 좋아하고 추함을 싫어하게 되며, 그러다 결국 분쟁이 초래되기도 한다. 그래서 노자는 '인을 끊고 의를 버린다' (중략) 원래 하늘과 땅 사이에는 소위 인의라는 것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도의 경지이다. 그래서 선악과 미추를 나누거나 분별심을 일으키지 말고 천지자연의 경지로 돌아가야 한다. (중략) 노자게 보기에 미추와 선악은 모두 대립하는 관계에서 생겨난 것이자 사물이 '있음'이라는 두번째 단계에 도달해야만 출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둘은 서로 보완하고 서로 이루어주는 관계이다. 만일 아름다움이 없으면 추함도 없을 것이고, 선이 없으면 악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형이하에 속하여 사람들의 심리상태가 시간, 환경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 이 말은 우리에게 현실의 삶에서 소위 순수한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느다는 큰 일깨움을 준다. (p. 95)

노자는 어째서 이러한 사상을 제시했을까? 전국시대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분위기가 만연했고 역대 제왕들 또한 함부로 행동함이 그 도를 넘어섰다. 그래서 노자가 말한 성인과 공자가 말한 성인은 같은 개념이 아니다. 공자의 성인은 인의를 중시하지만 노자가 말한 성인은 인의를 중시하지 않는다. 인의가 중시하게 된 이유는 바로 대도가 무너진 결과이기 때문이다. 사실 세상에 도가 있었더라면 인의를 강조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본래부터 스스로 그러한 이치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인의를 들먹일 필요가 없다. 그래서 인의를 강조하지 않는 것이다. (p. 99)

그래서 [노자]는 신하가 읽는 것이 아닌 제왕께 바치는 책이라는 의미에서 '남면지술南面之術'이라고 불렸다. (p. 101)

노자의 철학에서 놀라운 것은 노자의 사상이 제왕에게 바쳐진 철학이었다는 점이었다. 무위 라던가 자연으로 돌아가라 라던가 하는 식의 노자의 사상에 대한 이미지는 가진자들보다는 가지지못한자들의 사상으로 더 알려지지 않았나? 그렇게 위로와 힐링의 측면으로 설명한 책들도 있지 않았나? 그런데 정치철학적으로도 경영철학적으로도 저자가 풀어주는 노자의 사상은 가진자들에게 하는 쓴소리였다.

공자와 노자는 그 출발점은 완전히 일치하지만 공자는 정면에서 직접적으로 서령한 반면 노자는 정면이 아닌 이면에서 접근하여 설명한다. 하나가 정正을 말했다면 다른 하나는 반反을 말하여 음陰을 들어 양陽을 내세우는 식이다. 공자는 당시 사회가 예약이 붕괴하고 백성이 서로 다투며 도적이 횡행하는 모습을 보고 인의를 높여 군자는 군자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고 했다. 즉 예의를 중시하고 법칙을 준수하여 사회윤리의 강령을 세워야 함을 정면에서 직접 주장한 것이다. 이와 달리 노자는 반대 면에서 출발하여 오히려 어짊과 덕을 갖춘 사람을 추존하지 말라고 한다. (p. 106)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이 같은 대립을 없애고 뿌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재물이나 능력있는 사람, 희귀한 물건을 숭상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노자가 '뜻을 약하게 하고 뼈는 강하게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중략) 욕망이 없다면 천하는 혼란스러워지지 않을 것이고, 소위 지혜자라고 하는 이들이 활개를 칠 곳이 사라져 감히 경거망동하지 않을 것다. (p. 110) 즉 자신의 욕망이나 의지대로 행하지 않고 자연에 부합하고 순응하며 사람의 본성을 따라 행하면, 천하가 태평해지고 사람들의 마음이 혼란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노자는 공자보다 한층 더 높은 고지에서 철저하게 세상을 바라봤다고 할 수 있다. (p. 111)

공자는 지혜와 인의를 강조하여 후대 유가는 공명사상을 인 의 예 지 신 이라는 오덕으로 귀결시켰지만, 노자는 도리어 '인을 끊고 의를 버린다' '영명함을 끊고 지혜를 버린다' 고 하여 인의나 지혜를 모두 버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얼핏 보기에는 노자와 공자가 완전히 상반된 양상인 듯 하지만, 사실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문제와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는 동일하다. (중략) 공자는 예악이 붕괴한 사회의 혼란을 정면에서 직시하고 이것이 인의예지신을 중시하지 않은 결과라고 여겼지만, 노자는 그것의 반대 면에서 사회의 혼란을 보았다 .예악의 붕괴는 인의예지신을 강조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의예지신을 지나치게 많이 강조한 결과 나타난 현상이므로 오히려 우리는 잃어버렸던 맑고 고요한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 본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이다. (p. 160)

노자의 음의 사상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공자의 양의 사상에 대한 물음표가 생겨나기 마련인데 저자는 이에 대해 반복하여 강조한다. 공자의 사상엔 오히려 한계가 있고 노자의 사상엔 한계가 없다고. 노자의 책 한권 읽었다고 그의 사상을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어떤 규칙을 강조하는 것이 되려 그 규칙이 무너졌기 때문이기에 그럴수록 그 규칙을 더더 강요하기보다는 본래의 목적이 무엇이었나를 생각하라는 점에 대해서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많았다. 생각해보면 어떤 한가지를 강조한다는 것은 그 강조로 인해 이득을 보는 자들이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음이 무시되고 양이 강조 되면서 사회가 어떻게 바뀌었나? 선을 추구하고 악을 비방하면서 그러한 분리적 사고로 인한 결정이 누구에게 유리해졌나? 기준과 구분은 결국 차별과 억압을 만들어왔다. 그렇다고 무법천지 세상으로 내버려 두자는 말은 아니다. 노자가 말하는 無에 대해 무위에 대해 조금은 알것도 같다는 말일뿐.

최고의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 다음가는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를 가깝게 여기고 기린다.

그 다음가는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한다.

그 다음가는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를 업신여긴다.

17장에 나오는 경구의 일부이다. 아~! 싶지 않은가? ㅎㅎ 이러한 감탄이 고전을 읽는 맛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노자와 공자, 석가모니 등 동방의 성인은 하나같이 심령과 심성은 본래 순수하고 깨끗하며 맑고 비어 있어 외부 사물을 관찰하고 조명하는 능력이 있다고 보지만, 서양의 주류 사상가와 심리학자들은 인류의 심령 가장 깊은 곳에서는 조급함과 초조함, 불안함이 있으므로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해야 한다고 봤다. 이러한 인식 차이는 서양인이 외재적 추구와 외재적 실증, 경험 지식을 중시하게 된 사유의 전통을 만들어 냈다. 이 두 가지 사유방식을 비교하면 과연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나는 둘 사이에 옳고 그름은 없으며 각자의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본체엇 출발하면 사람의 심령은 맑고 깨끗하며 잠재능력은 거대하다. 조급함은 심령의 본질이 아니라 다만 심령의 외재적 표현일 뿐이다. 오직 심령의 깨끗하고 순수한 본질로 회귀해야만 비로소 거대한 잠재력을 발휘하여 외부 사물을 인지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는 지금 외재적 추구가 지나쳐 경험적 지식을 과도하게 중시하는 반면, 내적 실증, 내적 추구의 능력은 크게 퇴화되는 상황이다. 덮어놓고 외적 추구만 할 거이 아니라 반드시 내적 실증, 내적 추구를 훈련함으로써 마음이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게 해야 한다. (p. 426)

사실 도를 닦고 마음을 수련하는 것은 우리네 문화권에선 그닥 새롭지 않은 문화이다. 그러나 '마음챙김' 이라면서 서양에서는 종교 외의 내적 단련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과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어느쪽 이 더 낫다거나 먼저라거나 하는 식의 생각은 말자. 코로나시대에 외떨어진 심정을 다독이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 되어버렸으니 그저 자연스럽게 원래 하던 방식으로 '나'를 '나의 마음'을 '나의 상태'를 생각하면 된다. 우리는 우리의 내적 수련에 대해 늘 가까이 접해온 사람들이다.

'무위無爲'로 행하고 '무사無事'로 일삼고 '무미無味'로 맛을 본다. 크든 작든 모두 원한을 은덕으로 보답한다. 어려움을 해결할 때는 쉬운 일부터 착수하고 대업을 이룰 때도 작은 일부터 시작한다. 천하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일에서 시작하고 천하의 큰일도 반드시 작은 일에서 시작한다. 이 때문에 성인은 시종 큰일을 하지 않아서 결국 그의 위대함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쉽게 승낙하는 사람은 반드시 신임을 얻기 어렵고, 일을 지나치게 쉽게 보는 사람은 반드시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이 때문에 성인은 늘 일을 어렵게 여겨서 결국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p. 525~526)

아프니까 청춘이다 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땐 이런 명언이 있나 싶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책을 읽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그런 무책임한 말이 또 어디있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됐다. 꽃길만 걷자 라는 말을 처음 봤을땐 이런 축언이 어디 있나 싶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들 뒤에 결코 축언이 아님을 깨닫게 됐다. 어려운 일은 어렵게 생각하고 어렵게 풀어야 하고 쉬운 일은 쉽게 여기고 쉽게 풀어야 한다. 어려운 일을 쉽게 쉬운 일을 어렵게 해내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꽃길만 걷다가는 작은 돌멩이에 걸려 넘어져도 일어나지 못할 수가 있으며 청춘이 당연히 아픈줄 알다가는 청춘에 골병들어 노년까지 버티지 못할 수도 있다. 차근차근 모든 것을 처음처럼 신중하게 대하는 태도는 분명 어려우나 그러한 태도를 키워나갈때 결국 많은것들에 대한 어려움이 없어질 것이다.

나라를 작게 하고 백성을 적게 한다.

백성들이 열 가지 백 가지 기물이 있어도 쓰지 않게 하고

백성들이 죽음을 중히 여겨 멀리 이사다니지 않게 한다.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그것을 탈 일이 없고

갑옷과 병기가 있어도 그것을 늘어놓을 일이 없다.

백성들이 다시 새끼를 꼬아 그것을 사용하게 한다.

음식을 맛있게 여기고 옷을 아름답게 여기며

거처를 편안히 여기고 풍속을 즐겁게 여긴다.

이웃 나라와 서로 바라다보고 닭 울고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 (p. 631)

80장의 경구이다. 여기서 시대적 차이로 인해 새끼를 꼬는 것은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 상고 시대에 백성들이 사물 혹은 사건을 기록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이라는 것만 알아두면 나머지는 그대로 의미를 생각해보면 될 문장이다. 저자는 마지막 문장에 대해 왕래가 잦으면 시비도 늘어나는 법이니 굳이 교류해서 무엇하겠는가 자족하고 살면 된다 라고 풀이하지만 나는 왠지 그 풀이로 만족이 되진 않는다. 자칫하면 서로 나몰라라 하고 살라는 말처럼 들리지 않는가? 하지만 노자의 사상을 81장 중에서 80장정도까지 읽었으면 그 의미는 아니란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굳이 왕래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된다는 것을.

믿음직한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하지 않다.

선한 자는 말을 잘하지 못하고

말을 잘하는 자는 선하지 못하다.

지혜로운 자는 해박하지 않고

해박한 자는 지혜롭지 못하다.

성인은 쌓아 두지 않고

남에게 모두 베풀어도 자신은 더욱 가지게 되고

남에게 모두 주어도 자신은 더욱 많아진다.

하늘의 도는 이롭게 할 뿐 해하지 않으며

성인의 도는 베풀 뿐 다투지 않는다. (p. 637)

노자의 사상 5000여자 중에서 그 81장 중에서 마지막 경구이다. 마지막 문장이라고 해서 꼭 핵심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이 책을 마무리하기에는 좋은 문장인것 같아서 옮겨왔다. 잘은 몰라도 그냥 딱 노자 같달까 ㅎㅎㅎ

도덕경 이라고 하니 왠지 공자왈 맹자왈 하는 책보다 더 예의범절 적이고 경직된 느낌을 주지만 막상 읽어보면 훨씬 자연적이고 하릴없는 순리를 느끼게 되는 책이었다. 무위로 돌아간다는 것이 빈털터리 헐벗은 원시인이 되자는 소리가 아니라 선으로 충만하고 깨달음으로 평온한 상태라는 것에 대해 내내 생각하게 되면서 조금은 관조적인 사람이 되어 느긋해지는 기분이 되기도 했다. 두툼한 벽돌책을 완독했다는 만족감에 뿌듯해하는 여전히 '있음'적 사고를 하는 나 이지만 '없음'으로써 가득해지는 경험을 한 시간 만큼은 충분히 감사를 표하고 싶다. 그래도 조금은 '무위'를 깨달았다고... ㅎㅎ

공자의 논어가 의욕을 일으키는 책이었다면 노자의 도덕경은 그러한 의욕이 부질없음을 알게 하는 책이었는데 그동안의 나의 무력이 게으름때문임을 알면서도 나는 노자의 도덕경에서 그 게으름의 탈출구를 조금은 찾은 것도 같다. 항상 열심히 할 수는 없다. 매일 앞만 보며 달려갈 순 없다. 때론 열심하 하지 않는 것이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을 바깥의 길이 아니라 내 안의 길도 들여다 봐야 한다는 것을... 앞으로도 종종 노자의 無를 상기하며 사는 것이 큰 힘이 될 것 같다. 자연의 순리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고, 가득채워 단단해지는 것이 아니라 비워냄으로 단단해지는 것을 원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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