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카즈무후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2
마샤두 지 아시스 지음, 임소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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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하게 그리려고 할수록 희미해지는

진실과 의심의 경계

세상은 넓고 작가는 많다!

새로운 소설을 읽게 될 때마다 느끼게 된다.

소설 읽기를 즐겨하는 이라면 때론 다른 나라의 작가와 작품에 대해 궁금증이 생길 것이다. 그렇게 이나라 저나라 여행하듯 읽다보면 세계문학을 접하게 되는데 그렇게 알게되는 작가들은 자주 낯선 이름이곤 한다.

마샤두 지 아시스

어느 나라 이름인지도 모르겠는 이 생소한 이름의 작가는 브라질 작가다.

소개를 보니 브라질의 국민작가인 것 같은데, 기왕 세계문학을 접한다면 늘 대표적 작가부터 시작하고 싶은 이 소심한 호기심이 이번에도 덜컥 이 낯선 소설을 손에 들게 했다.

황폐해진 마음에서 소설의 경계까지,

질투와 의심이란 작은 돌멩이 하나로 허물어뜨리는 작품

브라질의 대문호이자 심리소설의 대가인 마샤두 지 아시스의 대표작이다. 국내 초역이며, 아시아권 언어로 번역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그가 남긴 열 편의 장편소설과 이백여 편의 단편소설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브라질에서는 국민 대부분이 알고 있으며 현재까지 드라마, 영화, 연극 등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 소설가 정소현 추천사 中 -

인터넷서점의 책소개글에서 읽게된 추천사 또한 이 책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독자는 숨은 단서를 포착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소설을 다시 읽을 수밖에 없다. 읽을 때마다 문장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지만 쉽게 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믿을 수 없는 화자와 알 수 없는 진실은 독자를 좀처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정소현 소설가)' 라는 책 뒷표지의 글은 이 책에 대한 일말의 망설임도 불러일으켰다. 나는 읽은 소설을 다시 읽는 편이 아닌데 한번에 이해 안되는 문장들이 많으면 어떡하지;;;

그렇게 설레임반 걱정반으로 브라질 소설의 첫 문을 열어젖혔다.

나에게 '동 카즈무후'라는 별명이 생겼다. 말이 없고 은둔형 기질인 나를 좋아하지 않았던 이웃들이 사용하던 말이 결국 별명이 되어버렸다. (중략) 굳이 사전을 찾아보진 말길 바란다. 여기서 '카즈무후'는 사전적 의미가 아닌, 말이 없고 자기 세계에 빠진 사람에게 흔히 붙이는 별명이다. '동'은 귀족 냄새를 풍기기 위한 반어적 표현이다. (p. 8)

굳이 사전을 찾아보았다;;;ㅋㅋ 이 소설의 제목인데 무슨 말인지 모르는 단어였으니까. ㅎㅎㅎ

책의 목차는 따로 없었지만 작가는 한두 페이지마다 소제목들을 붙여 놓았다. 그렇게 148장까지 있는 이 소설의 첫 소제목이 '표제에 대하여' 이다. 그리고 역자는 주석에서 이 '동 카즈무후'라는 단어가 '무뚝뚝 경' 혹은 '퉁명 공'이라는 뜻의 포르투갈어 라고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작가는 '제목을 설명했으니 이제 책을 쓰고자 한다. (p. 9)' 라며 마치 회고록 처럼 읽히게 될 이 소설을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마샤두 지 아시스 라는 작가가 쓴 소설이자 무뚝뚝 경인 동 카즈무후가 쓴 소설인 셈이다.

나의 분명한 목표는 삶의 양 끝을 연결하여, 노년기에 이르렀을 때 젊은 날의 의미를 되찾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독자여, 나는 과거의 시간도 과거의 내 모습도 되살려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면에서, 얼굴은 같은 사람인데, 인상이 달라진 듯했다. 내가 그저 누군가를 잃기만 한 것이라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군가를 잃은 상처를 어느 정도 스스로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경우엔 모든 것을 잃은 것과 같다. 그 빈자리는 절대 채워지지 않는다. (p. 10)

나에게 남아 있는 친구들은 최근에 만난 사람들이다. 옛 친구들은 모두 영적 세계의 지질학을 연구하러 떠났다. (중략) 그러나 다른 삶이 더 나쁜 삶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저 다른 것이다. (중략) 사실 나는 되도록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고 입도 잘 열지 않는다. 외출하는 일도 드물다. 대부분의 시간을 텃밭과 정원을 가꾸고 책을 읽는데 소비한다. 잘 먹고 잠도 설치지 않는다. 지금은, 모든 것은 시들해지기 마련이듯, 이 단조로움 역시 결국 나를 지치게 했다. 변화를 꾀하고 싶었고, 책을 써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p. 11)

'나'는 비교적 윤택하게 혼자 사는 건강한 노인이다. 나는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지만 실재의 삶에서 나는 거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옛날의 나를 아는 친구들이 저세상으로 가고, 그 과거의 나를 아는 이가 나만 남은 시점에서야 '나'는 과거의 나를 다시 되짚어 책으로 써보기로 한다. 젊은 날과 노년기의 삶이라는 양 끝을 연결하고 싶다는 것은 결국 그동안 젊은 날의 삶과 단절한채 살아와 노년을 맞았다는 이야기다. '나'는 왜 그렇게 모든 것을 단절하고 퉁명스럽게 귀족인양 굴며 살아온 것일까.

자, 그럼 절대 잊을 수 없는 11월의 어느 성대한 오후를 떠올려보자. 그날보다 더 좋거나 나빴던 날도 많았지만, 그날 오후만큼은 내 영혼에서 절대로 사라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읽으면서 이해하게 될 것이다. (p. 12)

11월이었고, 연도는 정말 오래전이긴 하지만 오래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내 인생의 중요한 날짜를 변경하지는 않겠다. 1857년이었다. (p. 13)

1899년 발표된 이 소설의 배경은 발표된 당시로 봤을때 무척 현대적 시점이었다. 화자가 살아있는 시점과 독자가 읽고 있는 시점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시절의 독자라면 화자가 말하는 시대를 자신의 과거처럼 회상하게 될 것이었다. 때는 입헌군주제로 브라질이 포루투갈 왕실에서 이어진 왕정아래 있던 시절이었다. 2022년에 읽는 독자는 이 시대적 간극을 염두에 두고 이 소설을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글로리아, 그 아이를 정말 사제로 만들어야 할까?"

"주께 맹세했으니 지켜야 해요" (p. 15)

"항상 함께 있으니까요..."

"몰래..."

"그 집에선 연애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말들이 혼란스럽게 맴돌았다. (p. 35)

열다섯 살 소년 벤치뉴는 어느날 응접실에서 어머니와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엿듣게 된다. 어머니가 자신을 신학교에 보내 사제로 키울 것이라는 말은 딱히 몰랐던 내용은 아니었다. 하지만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이 있었다. 어머니에게 그 결심을 다시 상기시킨 사람, 하인까지는 아니지만 객식구로 더부살이 하고 있던 지아스의 밀고를 통해 벤치뉴는 어려서부터 함께 커온 친구 카피투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런저런 비밀 이야기가 내 안에 불러 일으켰던 감정을 그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그 감정은 달콤하고 새로웠지만, 나는 그 원인을 캐내거나 의심조차 하지 않은 채 회피했었다. 지난 며칠간의 침묵은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제야 나는 그것이 하다 만 말, 호기심 어린 질문들, 모호한 대답, 조심스러운 행동들, 유년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는 즐거움과 같이 무언가를 의미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챘다. 카피투를 생각하며 잠에서 깨고, 그녀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리거나 그녀의 발소리에 화들짝 놀라는 현상이 나타난 것도 최근의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p. 37)

그리고 다행히?! 카피투도 벤치뉴를 사랑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카피투는 자신의 감정을 벤치뉴보다 먼저 깨달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벤치뉴가 스스로의 감정을 깨닫도록 더 과감하게 벤치뉴를 자극하고 있었다. 벤치뉴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가슴 벅찬 떨림을 진정시키고자 노력했다. (p. 38)' 첫사랑이었고 평생의 유일한 사랑이 될 터였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깨닫자마자 곧 닥쳐올 신학교 입학이라는 난제가 닥쳐왔다.

"나는 남자야!"

이 말을 세번째 반복했을 때 신학교가 생각났지만, 지나간 위험, 뿌리 뽑힌 악, 사라진 악몽에 대해 생각하는 이가 있을까? 나의 모든 신경이 나에게 남자는 성직자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나의 피도 같은 생각이었다. 다시 한번 카피투의 입술이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입맞춤의 추억을 남용하는 측면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추억은 바로 그런 것이다. 지나간 옛 기억을 곱씹는 것이다. 그 시절의 모든 기억 중에서 가장 달콤하고, 가장 새롭고, 가장 포옹력 있고, 나 자신을 온전히 드러냈던 기억이 바로 이것이다. (p. 101)

벤치뉴와 카피투는 나름 작전을 짜기 시작한다. 이별하지 않을 수 있을, 사제가 되지 않을 수 있을, 둘이 함께한 맹세가 이루어질 수 있는 방법을.

알다시피 사람의 영혼은 집의 구조와 같다. 사방에 창문이 나 있고, 많은 빛과 신선한 공기가 들어온다. 수도원이나 감옥처럼 창문이 없거나 창살로 둘러싸여 없는 것과 매한가지인 폐쇄적이고 어두운 곳도 있다. 또한 예배당과 시장, 소박한 농가나 호화로운 궁전도 있다. 나의 것은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직 '카즈무후'라는 이상한 별명도, '동 카즈무후'라는 경어법이 어울릴 만한 지위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두려움이 나의 솔직함을 가로막았지만, 문제는 열쇠도 자물쇠도 없었기 때문에 그저 문을 밀기만 하면 됐다. 에스코바르는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를 여기 안에서 발견했고, 적어도 그때까지는 이 안에 머물러 있었다... (p. 159)

벤치뉴는 신학교에 들어가긴 했지만 사제가 되지는 않았다. 신학교에서 평생의 절친 에스코바르를 만난 것은 큰 축복이라 생각했다.

신학교에서의 생활은 나름 괜찮았지만 떨어져 있는 시간만큼 카피투에 대한 불안함이 커져갔다.

'다른 생각이 아니었다. 잔인하고 알 수 없는 감정, 순수한 질투, 나의 내면의 독자였다. 그러한 감정들이 내가 혼자 주제 지아스의 말을 되뇔 때 나를 갉아먹었다. (p. 173)' 첫사랑에 빠져 달콤함만 만끽해도 모자랄 이 시기에 벤치뉴의 마음 속엔 이미 '내면의 독자'가 생겨버렸던 것이다.

혹여 이 장르에서 개선해야 할 점이 있다면, 나는 실험적으로 끝에서 시작하는 작품을 제안하고 싶다. 오셀로가 1막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데스데모나를 죽인 뒤, 다음에 이어지는 세 개의 막은 느린 동작과 함께 갈등의 하강 구조로 펼쳐지고, 마지막은 첫 장면부터 터키인의 위협, 오셀로와 데스데모나의 설명, 슬기로운 이아고의 좋은 충고로 마무리된다. (p. 199)

이 소설의 뒤에는 '오셀로 증흐군이 빚어낸 파국'이라는 해설이 붙어 있다. 벤치뉴와 오셀로는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를까.

'나는 그녀의 목 아주 깊숙이 손톱을 박아 넣고 그녀가 피를 흘리며 숨이 끊어져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p. 204)'

그저 골목에 지나가는 모르는 남자가 카피투를 한번 쳐다보았을 뿐인데 말이다.

오셀로에게는 이아고라는 협잡꾼이 있었지만 벤치뉴에겐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내면에 그 협잡꾼이 있었다. 벤치뉴가 소년에서 어른으로 자람에 따라 그 협잡꾼도 성장해 갔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는 독자가 소설 속의 이 '내면의 독자'를 깨닫게 되는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중략) 그때 나는 겨우 열일곱이 조금 넘은 나이였다.... 여기가 이 책의 중간 지점이 되어야 했지만, 글쓰기 경험이 부족해서 펜이 가는 대로 쫓아가다보니 정작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한 채 어느덧 거의 책 끝부분에 도달했다. 이제 약간의 수정과 숙고를 거쳐 추려질 이야기를 장마다 큼직큼직하게 짚어나가기만 하면 된다. (p. 254)

실제 그랬다. 이 소설의 대부분은 벤치뉴의 십대 시절 이야기를 담고 있다. 노년기의 무뚝뚝경이 가장 그리워하는 시절이자 현재의 삶과 가장 연결시키고자 하는 시절, 그래서 삶의 양 끝을 연결하여 젊은 날의 그 소중했던 의미를 되찾고자 하는 욕망이 좋았던 이야기만 한참을 늘어놓게 만들었다. 정작 자신을 그렇게 만든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큼직큼직하게 후려치겠단다. 어쩌면 여전한 일종의 회피이자 무책임으로 보일 수 있는 이러한 서술 태도는 어느새 화자의 이야기에 젖어든 독자가 화자의 심정을 물려받아 화자의 생각대로 이야기를 판단할 토대를 구축한 상태라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회피와 무책임을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나는 분명하고 뚜렷한 이 목소리를 자주 들었다. 예컨대, 그녀는 스코틀랜드 마녀의 사촌임이 틀림없다. "너는 왕이 될 거야, 멕베스!" "너는 행복할 거야, 벤치뉴!" 그것은 결국 보편적이고 영원한 같은 곡조의 같은 예언이다. (p. 260)

300여 페이지에 걸쳐 몇년 간의 자신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펼쳐놓았던 벤치뉴는 이제 50여페이지에 걸쳐 수십년 간 자신 만든 파국을, 이제야 이야기한다.

에제키에우는 '다른 사람들을 모방하는 걸 좋아해' (p. 290)

'아주 작은 몸짓 하나,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 사소한 고집에도 괴로워할 정도로 나는 그녀에게 계속 집착했다. 종종 무관심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질투했다. 이웃집 남자, 왈츠 파트너,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남자라면 누구나 나를 공포와 불신으로 가득 채웠다. (p. 291)'

'어떻게 죽은 사람까지! 죽은 자도 당신의 질투는 피할 수 없구나! (p. 343)'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달까? 벤치뉴는 에스코바르가 사고로 갑자기 죽었을 때 장례식장에서 평생의 불신을 품게 된다. 에스코바르가 벤치뉴를 절친이자 함께 하고픈 행복한 사람으로 알고 죽은 게 그나마 벤치뉴가 만들 파국이 덜 비극이 되게 했다... 하지만...

나는 외식을 했다. 저녁에는 극장에 갔다. 때마침 내가 본적도 읽은 적도 없는 <오셀로>를 상연 중이었다. 극의 주제는 알고 있었기에 우연의 일치를 기뻐했다. 나는 손수건 한 장 때문에 무어인이 크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저 단순한 손수건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장에서는 아메리카 대륙과 다른 대륙 심리학자들의 연구 자료를 소개하고자 한다. (중략) 손수건은 잃어버릴 수 있다. 오늘날에는 침대 시트 정도는 되어야 한다. (p. 335)

오셀로는 가당치도 않은 의심을 했다고 생각하는 벤치뉴는 자신의 의심만큼은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오셀로에게는 거짓이나마 물증이 있었다면 벤치뉴에게는 아무런 물증 없이 그저 혼자만의 심증만 있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면에서 카토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기 위해 소파에 몸을 뻗었다. 그의 행동을 단순히 모방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p. 337)'

'아니야, 아니야. 나는 네 아빠가 아니야! (p. 340)'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뭐야?" (p. 342) "나는 그 이유를 알아. 우연의 일치로 닮았기 때문이지... 신의 섭리만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거야...비웃는 거야? 이해해. 신학교에 다녔으면서도 당신은 신을 믿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믿어..." (p. 344)'

그러니까... 카피투와 벤치뉴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에제키에우는 벤치뉴가 봤을 때 죽은 에스코바르를 똑닯았던 것이다. 발가락만 닮아도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말이다...

지금처럼 유전자검사가 가능한 시절이었다면 불가능했을 소설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가능했을 소설일지도 모르겠다. '독자도 나의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카피투의 어린 시절을 기억한다면, 껍질 안에 있는 과실처럼 한 사람이 이미 다른 사람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해답이 무엇이든 간에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중략) 그토록 사랑했던 나의 첫사랑과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결국 나를 기만하고, 하나가 될 운명을 택했다는 것이다.... (p. 361)' 라는 마지막 페이지의 문장으로 확인되는 화자의 태도를 보면 말이다.

하지만,

혀를 끌끌 차며 기막힌 채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벤치뉴는 정말 자신의 불신을 믿음으로 확고히 한 것일까? 오셀로 처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것일까?

왜냐하면 시작부터 벤치뉴는 단절되어 살아온 노년기의 자신이 젊은 날의 자신과 연결되어 화해할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피력했기 때문이다.

작품 뒤에 붙은 평론가의 해설은 차치하고 그저 독자로서 이 소설을 꼽씹다보면 작가의 은근한 매력을 새삼 깨닫게 된다. 오호라 이래서 정소현 소설가는 다시 읽을 수 밖에 없는 소설이라고 말했구나! 하지만 나는 다시 읽게 되진 않을 것 같다. 핑계를 대자면 해피엔딩이 절실한 시절이라서랄까...

ps. 브라질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쌈바축제때 보이는 유색인이자 식민지에서 벗어난 인디오들의 사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처음 읽은 브라질 작가의 소설은 내가 알던 그 브라질이 아니었다. 그저... 포르투갈 이었다. 검색해보니 브라질의 인구구성에서 백인의 비중은 절반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좀 단적으로 말하자면 백인들의 나라였던 것이다. 뒤늦게 깨달은 브라질의 역사는 이 소설보다 내게 더 충격적 잔상과 여러 물음표들을 남겨 놓았다. 과연 브라질 적인 것은 무엇일까?...

'마샤두 지 아시스는 백인이 아닌 가난한 집안 출신의 물라토 혼혈로 인종적·사회적 열등감에 늘 시달려야 했다. 최근까지도 미디어 속 마샤두 지 아시스의 이미지가 전형적인 백인 엘리트르 연상시키는 외모로 묘사되거나 백인에 가까운 모습으로 수정·보완되어 소개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브라질 최고의 소설가로 인정받기까지 그가 얼마나 노력했을지, 어떤 시련을 겪었을지 가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실제로 그러한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듯 그는 살아생전 단 한번도 흑인이나 하층민과 같은 사회적 약자의 시각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을 발표한 적이 없었다. (p. 367 - 해설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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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한국사 - 시와 노래로 만나는 우리 역사 푸른들녘 인문교양 40
조혜영 지음 / 푸른들녘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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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흘러간 옛 노래"란 없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야기는 '오늘의 노래'다

역사를 좋아하는 편이라서 역사관련 책을 자주 읽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신기한 것이 역사는 읽어도 읽어도 묘하게 새롭다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역사인줄 알았는데 이렇게 읽으면 다르고 저렇게 읽으면 또 다른 것이 역사이야기라는 걸 느끼고 나니 새로운 역사이야기에 늘 호기심이 일곤 한다. 이번엔 현직역사교사가 쓴 '노래로 만나는 한국사' 다.

국어 시간에 주로 그 시의 문학적 가치에 대해서 배웠다면 이 책에서는 그 시가 쓰인 역사적 배경을 충실하게 설명하여 여러분이 그 내용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역사를 좀 더 쉽고 재미있게 이해하고 싶은 학생, 학교에서 교과 융합 수업을 고민하는 선생님들께도 이 책이 유용하게 활용되길 바랍니다. (p. 15) - 저자의 말 中 -

이 책에 실린 시는 아무래도 '시'이다 보니 역사교과서 보다는 문학교과서를 통해 접했던 것들이 많았다. 역사교과서에서는 제목만 알았다면 문학교과서에서는 단어 하나하나 운율 하나하나 따져봤던 시들. 그래서 아주 몰랐던 것도 아니고 어쩌면 일정 싯구는 여전히 외우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역사로 읽으니 또새롭게 다가왔다.

님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님은 결국 물을 건너시네

물에 빠져 죽었으니

장차 임을 어이할꼬

노래를 마친 아내는 조용히 강물 속으로 들어가 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던 뱃사공 곽리자고는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아내 여옥에게 새벽녘에 자신이 본 광경을 이야기해 주었고, 자신이 들었던 노래 <공무도하가>를 들려줍니다. (p. 19)

그 이름도 익숙한 <공무도하가>의 노랫말이 저랬던가! 이렇게 생소할 수가!! 가수 이상은의 노래로 더 친숙했던 이 고대가요가 남편이 강으로 휘적휘적 들어가 생을 마감하는 것을 본 아내가 부른 노래였다니... 첫번째 노래부터 놀라웠다. 그리고 고대가요는 노랫말 그 자체로 이해해야 할 것이 아니라 깊은 상징과 은유가 들어가 있기 마련이라 하나하나 풀어본 역사적 이해가 또한 새로웠다.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노랫말 풀이가 역사적 흥미를 한층 높여주는 것을 느끼며 이런 재밌는 역사이야기를 만날때마다 생각하게 되는 거지만, 학창 시절에 역사를 이렇게 배웠다면 얼마나 재미있었을꼬;;;

이어지는 노래들도 하나같이 사연이 구구절하면서 역사적 풀이또한 흥미진진해서 책 한권이 후루룩 금새 읽혔다.

공무도하가 같은 고대의 노래부터 해방이후의 금지곡들까지 시대별로 서너가지의 노래 이야기를 읽고나니 한반도의 역사를 간단하게 훑어 내렸는데도 전혀 부담감이 없었다. 그리고 더 궁금해졌다. 다른 노래들은 또 뭐가 있었을까? 사연많은 역사 이야기들은 또 무엇이 있을까??

새로운 역사적 깊이를 더해가려던 이들에겐 이 책이 얕게 느껴졌을수도 있으나 큰 기대 없이 가볍게 혹은 역알못이나 청소년들에게 이 책은 무척 유용한 책이 될 것 같다.

그래서 이런 책이 시리즈로 좀더 나왔으면 좋겠다. 그러다보면 역사라는 과목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기분으로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분야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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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대멸종
엘리자베스 콜버트 지음, 김보영 옮김, 최재천 감수 / 쌤앤파커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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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구상에서 단 다섯 번만 일어났던

대멸종이 재현되고 있는 순간을 살고 있다.

이 책에는 13개 장에 걸쳐 여섯 번째 대멸종 이야기가 펼쳐진다. 각 장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한 종이 등장한다. (중략) 멸종은 소름 끼치는 주제이며, 대량 멸종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매혹적인 주제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나는 두 측면, 즉 멸종에 대해 알게 되면서 느낀 흥분과 공포 모두를 전달하고자 한다.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나서 우리가 매우 특별한 순간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p. 23 - 프롤로그 中 -

저자는 과학자가 아니라 저널리스트 이지만 이 책은 과학책임에 분명하다. 저널리스트라는 직업이 과학자의 전문성을 넘어설 수는 없겠지만 특유의 집요함과 광범위한 조사는 때로 그 어떤 과학자의 책보다 더 전달력 강하게 주제에 접근하게 한다. 또한 칼럼처럼 쓰여진 대중적인 서술은 이 책의 어려운 주제를 쉽게 읽도록 해준다. 그러니 주제의 무게에 이해의 무게까지 더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잠시 접어두어도 된다. 이해되면 될수록 더해가는 마음의 무거움만 느껴도 충분히 버거울 테니. 왜냐하면 이 책의 주제는 '멸종' 이니까 말이다. 그것도 대.멸.종.

양서류는 지구상의 모든 대륙이 판게아라는 하나의 땅이었던 시기에 출현했다. 그러다 판게아가 분열하면서 남극 대륙을 제외한 모든 대륙의 환경에 적응했다. (p. 37) 오늘날 양서류는 지구상의 동물 중 가장 위기에 처한 강 이라는 달갑지 않은 타이틀을 얻었다. (p. 44) 종들이 사라지는 데는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지만, 그 과정을 끝까지 추적하다 보면 늘 동일한 범인인 '일개의 나약한 종'을 만나게 된다. (p. 45)

'일개의 나약한 종'

이미 예상하고 있겠지만 인간이다.

세계 곳곳에서 개구리들이 사라지고 있다. 조용해져서 좋겠다고? 아니다. 그렇지가 않다. 인류보다 먼저 태어나 인류보다 더 다양한 환경에 적응해온 양서류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저자는 이미 멸종한 개구리부터 확인시켜 준 후 '멸종'의 기원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나간다. 그 시작은 진화론의 출발전 생명의 나무부터 시작된다.

칼 린네가 이명법 체계를 고안했을 때, 그는 산 것과 죽은 것을 구별하지 않았다. (중략) 다룬 것은 오직 한 종류의 동물, 즉 현생 동물 뿐이다. (p. 53) 퀴비에는 '현재 존재하거나 화석에 남아 있는 코끼리 종들'이라는 강연에서 멸종이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임을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 (p. 66) 퀴비에의 절멸종 목록이 길어질수록 그의 명성도 높아졌다. (p. 73) 생명의 역사가 길고 변화무쌍하며,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환상 속의 동물로 가득한 때가 있었다는 퀴비에의 주장을 들으면 그가 당연히 진화론자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퀴비에는 진화라는 개념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이론을 발전시킨 동료들을 깔아뭉개려고 했고 그 시도는 대게 성공적이었다. (p. 76) 라이엘이 보기에는 멸종 역시 매우 느린 속도로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특정 시기, 특정 장소에서 감지되지 않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p. 85) 라이엘은 당대의 스티븐 핑커라고 할 만한 유명 인사가 되었으며, 보스턴에서 열린 그의 강연에는 4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왔다. (p. 86) 찰스 다윈도 <지질학 원리>에 열광한 독자 중 한 명이었다. (p. 88) 정확하게 말하자면, 비글호 항해에서 다윈이 발견한 것은 자연 선택이 아니라 라이엘이었다. (p. 89) 한 전기 작가는 라이엘이 다윈에게 미친 영향을 이렇게 요약했다. "라이엘이 없었다면 다윈도 없었다" (p. 91) "종이 완전히 멸절하는 과정이 그 종이 만들어지는 과정보다 일반적으로 더 느리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 새로운 종의 탄생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다윈에 따르면 그런 일을 불가능하다. 종 분화는 너무나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지는 과정이어서 사실상 관찰 불가능하다. 다윈은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그토록 느린 변화를 볼 수 없다'라고 단언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p. 95)

생물의 분류부터 화석에서 비롯된 지질학의 발견을 거쳐 다윈의 진화론에 이르기까지 과학은 차근차근 자연의 변화를 밝혀내는 것처럼 보였다. 다윈의 후계자들은 '서서히 멸절'했다는 관점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그토록 점진적인 변화로 설명되지 않는 대멸종의 증거들이 쌓여갔다. 그리고 1991년 소행성 충돌설이 확인되었다. 격변은 실재했고 대멸종의 원인들이 밝혀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모든 대량 멸종을 아우르는 일반론은 없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또다른 대멸종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고 다가오는 대멸종의 원인만큼은 이미 알 수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이미 이 책의 첫 장에서부터 급격한 '종의 멸종'을 확인했다.

지난 80만 년 동안의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수치다. 아마 수백만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해도 이산화탄소 농도가 이보다 높았던 때는 없었을 것이다. 현재의 추세가 지속된다면, 2050년에는 CO2농도가 산업화 이전의 두 배인 500ppm을 넘어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구의 평균 온도가 2~4℃ 상승하고, 이 온도 상승은 빙하 소멸, 저지대 섬 해안 도시 침수, 북극의 만년설 유실 등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변화로 이어질 것이다. 게다가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p. 172)

지구의 기후변화는 지구의 자연환경을 변화시키고 그 자연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생물다양성 감소가 일어날 것이라는 증거는 확실하다. 일부 내성이 강한 생물은 더 번성하겠지만 전반적인 다양성에는 손실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과거의 대량 멸종 시기에 일어난 일인 것입니다. (p. 181)' 이산화탄소 증가는 기후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산화탄소가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곳은 바다다. 바다가 그 이산화탄소의 많은 부분을 흡수하기 때문이다. '산호초는 단순히 해저의 열대 우림인 것이 아니라 바다 버전의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 있는 열대 우림이다. (p. 207)' 산호초도 사라지고 있다.

다음 세기의 기온 변화 규모는 빙하기의 온도 변동과 비슷할 것으로 예측된다. 다만 변화의 규모는 비슷할지라도 그 속도는 전혀 다를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관건은 속도다. 오늘날의 온난화는 마지막 빙기를 비롯하여 이전의 모든 빙기말에 일어났던 것보다 최소 10배 빠르게 일어나고 있다. 그 속도를 따라잡으려면 동식물의 이주나 적응도 10배 빠르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p. 235)

하지만 인류는 지구의 환경은 빠르게 변화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진화의 속도를 빠르게 만들 수는 없다. 오직 사라지게 만들 수 있을뿐.

'의존 관계는 쌍방향적이어서 나무도 동물이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다. (중략) 지구 온난화가 적어도 생태 공동체의 재구성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p. 245)' '한 개체군이 유실되었을 때 그 자리가 다른 개체군으로 다시 채워질 가능성은 그 서식지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p. 261)'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중요한 건 '속도' 다. 인류가 지구를 변화시키는 속도를 지구 생명체의 진화속도가 따라잡을 수 없다면? 멸종이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인류세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지질학적 분포라는 원리를 한데 뒤섞어 버린다는 점이다. (중략) 전 세계의 동식물을 재혼합하는 과정은 오래전 인간의 이주 경로를 따라 천천히 시작했지만 최근 수십년 동안 급격하게 속도를 높여 이제는 토착종보다 외래종이 많은 지역이 생길 정도로 진전되었다. (p. 282) 아시아의 종들을 북아메리카로, 북아메리카의 종들을 호주로, 호주의 종들을 아프리카로, 유럽의 종들을 남극 대륙으로 옮겨 놓으며, 우리는 사실상 이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초대륙으로 재편하고 있다. (p. 294) 국가적 다양성은 증가했지만, 같은 이유로 인해 전 지구적 다양성은 감소했다. (p. 300)

지구의 빨라지는 오염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인위적으로 교란시킨 생태계도 문제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깨닫지 못한 멸종의 방법중 하나는 인류의 사냥이었다. '수천만 년 동안의 숱한 가뭄에도 살아남았던 호주의 거대 동물들이 공교롭게도 정확히 최초의 인류가 도착하자 거의 동시-수백만 년을 단위로 하는 지질사적 의미에서-에 죽음을 (p. 324)' 맞았다. 이러한 과정은 같은 호모종인 네안데르탈인에게도 일어났다. 그렇게 인류만 남아가고 있다. 그렇게 인류만 살아남은 지구가 가능하리라고 보는가?

나의 진짜 주제는 그들이 사라져 가는 과정이 보여주는 일정한 패턴이다. 나는 하나의 멸종 사건-홀로세 멸종 또는 인류세 멸종, 좀 더 완곡한 표현을 원한다면 '여섯 번째 멸종'이라고 해도 좋다-을 추적함으로써 그 사건을 생명의 역사라는 더 넓은 맥락 안에 위치시켜 보고자 했다. 그 역사는 동일 과정설이나 격변설 어느 하나를 따른다기보다는 둘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p. 368)

저자는 여러 챕터에서 멸종하는 생물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생물 하나하나에 대한 기록처럼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좀더 읽어보면 그 멸종의 원인들이 비슷한듯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고 아주 비관적이지만은 않다는 것도 알게 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초래한 멸종이 우리에게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p. 371)' 에 대해 이젠 우리가 좀더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류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지금 우리에게 현재로 인식되는 이 놀라운 순간에, 우리는 의도치 않게 어느 쪽의 지노하 경로는 열어두고 어느 쪽은 영원히 차단해 버릴지를 결정하고 있다. (p. 373)' 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이다. 인류는 여섯 번째 대멸종을 만들어가고 있지만 또한 아직 오지 않은 멸종을 막을 수도 있다. 2014년에 나온 책이 지금 다시 한국에 나왔다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 여전히 한국에서 읽히고 있지만 이제쯤은 <여섯 번째 대멸종>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그 어느때보다 기후위기에 대한 관심이 소홀해진 한국에서 지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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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 현실과 환상이 만나고 다투다가 하나 되는 무대 클래식 아고라 2
일연 지음, 서철원 옮김 / arte(아르테)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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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환상이 만나고 다투다가 하나 되는 무대

<삼국유사>라는 제목에서 '유사'는 빠뜨린 일, 남겨둔 일 혹은 버려진 일 등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빠뜨린 일들을 애써 모은 것일까? 바로 나라에서 펴낸 역사책인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나름대로 의식한 표현이다. 이 때문에 <삼국유사>는 여러모로 <삼국사기>와 비교되곤 하였다. 이를테면 <삼국사기>가 왕권의 강약과 귀족 세력의 부침에 따른 정치사를 바탕으로 서술되었다면, <삼국유사>는 불교와 고유 신앙의 대립과 화해, 향가를 비롯한 문학과 미술작품 건축물의 조성 등 종교를 중ㅅ미으로 한 문화사의 영역을 해명하고 있다. (p. 11) <삼국유사>자체가 그런 혁신적인 생각의 산물이라 할 수는 없어도, 공식적인 사관의 평만이 유일한 역사의 눈이 되는 것을 경계하기에는 충분하다. <삼국유사>는 역사 이해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성을 마련해 주려고도 한다. (p. 12) 우리가 미래에 이루려 하는 다문화, 다양성과 다원성을 지닌 새로운 한국은 이미 <삼국유사>를 통해 우리가 한 차례 이미 이루었던 것이다. (p. 16) 이 책은 다른 번역서들처럼 정확한 번역을 앞세우기보다, 일단 잘 읽히는 번역을 추구하였다. (p. 17)

본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역자는 <삼국유사>의 가치와 이 책의 특장점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일단 잘 읽히는 번역을 추구하였다' 에 감사한 마음이다. 한자를 그대로 옮기기만했다면 내가 과연 이 책을 읽을 엄두나 낼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난해함이나 거부감없이 술술 읽힌다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교과서에서 제목만 보던 역사책을 이렇게 쉽게 읽을 있는 시대가 오다니! 내가 그 <삼국유사>를 읽다니!! 와우, 정말 세상 참 좋아졌다. ㅎㅎㅎ

이 책은 총9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역사 이야기에 해당하는 1편과 2편이 절반 나머지 불교관련 이야기가 절반의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삼국의 역사이야기라고는 하지만 대체로 신라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을 주 맥락으로 잡고 있기 때문에 고려의 시초이야기랄까 고려의 용비어천가랄까 싶은 역사이야기였다.

또한 역사이야기이긴 하지만 대체로 신화적 이야기 였다. <삼국사기>와 대조되는 가장 큰 부분도 바로 이 점일 것같다. 신화적이고 영웅적인 일종의 야사같은 이야기들. 그래서 삼국의 역사라 할 수 있는 1편과 2편의 큰 제목은 '기이, 정치 현실과 신성한 환상' 이다. 기이하고 환상같지만 오래도록 전해져오는 역사이야기 라고나 할까. 그래서 출발은 언제? 고조선 이야기다!

나라를 다스린 지, 1500년 만에 주나라 무왕이 기묘년에 즉위하여 기자를 조선 땅의 제후로 삼았다. 그러자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훗날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 산신령이 되었다. 그때 나이가 1,908세였다. (p. 23) 한 고조 유방때 연나라 왕 노관이 배반하고 흉노를 섬기게 되었다. 이때 연나라 사람 위만은 무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요새를 나와 동쪽으로 달려 패수를 건너 망명했다. (p. 24)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는데, 우거왕 대신 성기가 저항을 이어갔기 때문이었다. (중략) 마침내 한나라는 조선을 정벌하고 그 땅에 진번, 임둔, 낙랑, 현도 등 4군을 설치했다. [위지]에서 말한다. 위만이 조선ㅇ르 공격할 때, 조선왕 준은 궁궐의 여인들과 가까운 부하들만 거느리고 바다를 건넜다. 그리고는 남쪽 한 땅에 나라를 세워 마한이라 했다. (p. 27) [통전]에서 조선의 유민이 70여 나라로 나뉘었는데, 각각 그 영토가 100리 씩이라 했다. (중략) 마한은 서쪽에 54소읍이 있어 모두 '나라'라 했고, 진한은 동쪽에 12소읍이 나라를 자칭했다. 변한도 남쪽으로 12소읍이 나라를 칭했다. (p. 30)

내가 중고등학생일땐 기자조선이라던가 위만조선에 대해 배운적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요즘 중고교생들의 교과서를 보면 이 내용이 나온다. 역사가 과거이야기로 그저 지난 일이라 고정불변일 것 같지만 사실 역사는 매 시대 새롭게 읽히는 과거로서 변화한다. 이 변화를 판단하는 데 있어 각자의 역사관이 그만큼 중요하다 할 것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역사책을 읽는 것이 중요한데, 이 책은 <삼국유사>라는 본문과 적절한 보충설명이 쉽고도 객관적으로 쓰여 있는 것 같아 믿음직해 보였다.

위 내용에서 '삼한'은 우리가 알고 있는 마한,진한,변한과 좀 다르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삼국유사>는 삼한 가운데 마한을 고구려, 변한을 백제, 진한을 신라라고 불렀던 최치원의 관점을 존중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기사의 순서 또한 '마한-고구려-변한 백제-진한'의 순서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마한을 백제의 모태로, 변한을 가야의 시초로 생각하는 오늘날의 역사적 지식과는 어긋난 것이다. 이는 삼한이 곧 삼국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따르고자 한 것이다. (p. 40)' 또한 '<삼국유사>의 모습은 일연의 역사관과 국제 관계의 이상을 반영한 것이다. (p. 34)' 라는 점도 이 책을 읽는 동안 알아두어야 할 것같다.

지금 풍속에 '경'을 서벌(서울)로 읽는 게 이 때문이었다. (p. 60)

이빨이 더 많아서 먼저 왕위에 올랐다. 여기에서 잇금(이사금, 임금)이라는 말이 유래하여, 유리왕부터 지금까지 '임금'이라는 칭호를 쓰고 있다. (p. 63)

미추왕릉의 서열도 박혁거세를 비롯한 박씨 왕족의 5릉보다 위에 두어 대묘라 하였다. (p. 71)

새로 알게 되는 깨알 역사 상식들이 재밌기도 했지만, 고조선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초대 왕들의 신화적 이야기를 읽으며 든 생각은 당시 한반도의 상황이 서양역사가 유래된 펠레폰네소스반도와 그닥 다를게 없었다라는 점이었다.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 땅에서 세습이 아닌 왕위계승이 이루어졌고 자잘한 도시국가들로 느슨한 연합체가 이합집산했다는 점이 말이다. 다만 한반도는 바다로 나가면 주변이 뻥 뚫린 광활한 태평양이었지만 펠레폰네소스 반도는 지중해라는 닫힌 바다여서 무수한 문화들이 서로 얼키고설켰다는 점이 이후 역사의 향방을 가른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이런저런 역사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역사는 어디서든 참 비슷한 흐름을 보여주는 면이 있다.

의자왕은 백제가 멸망했던 해를 넘기지 못하고 병들어 죽었다. 황제는 벼슬을 추증하고 옛 백제 신하들의 조문을 허락했다. 사치 때문에 나라를 망친 것으로 유명한 임금들인 삼국시대 오나라 마지막 임금 손호, 남북조 시대 진나라 마지막 임금 진숙보 곁에 묻고 비석을 세웠다. (p. 100)

고려의 군대가 수십 일을 머무르다 떠났는데, 지휘에 따라 단정했고 규율을 조금도 어기지 않았다. 서라벌의 남녀들은 기뻐하며 말했다. "예전에 견훤이 왔을 때는 늑대와 호랑이 같았는데, 고려 태조 왕건 공께서 오시니 부모님을 뵌 것 같네요" (p. 150)

안종은 고려 8대 현종의 아버지로, 이후 고려 임금은 모두 현종의 자손이므로 결국 경순왕은 고려 임금들의 조상이기도 하다. (p. 153)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삼국을 생각했을때 고려 라고 하면 고구려 에서 맥을 이은 나라가 아닐까라고 막연히 생각해왔었나 보다. 이 책을 읽다보니 고구려와 백제의 이야기는 그 시작부터 멸망까지 짧게 다룬 반면 신라의 이야기는 굉장히 길고 자세했다. 사실 역사지도를 봐도 고려는 통일신라 땅으로 시작했다. 발해가 차지하고 있던 옛 고구려의 영역까지 넓혀가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조선시대에 지금의 국경이 정해지기까지 결국 요동지역까지는 수복하지 못했다. 고려 시대의 역사가 신라의 역사를 자세히 남긴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지금 우리는 신라의 역사를 고려와 연결시켜서는 잘 모르는 것 같지?

역사가는 평한다.

신라는 운수가 다하고 도리를 잃어 하늘이 더 돕지 않았고, 백성들은 의지할 데 없는 틈을 타 도적이 고슴도치 털처럼 일어났다. 가장 왕성한 이들은 궁예와 견훤 둘이었다. 궁예는 본디 신라 왕자인데도 자기 집안을 원수로 삼아, 선조의 그림을 칼로 베었으니 너무 심하게 사나웠다. 견훤은 신라 백성으로 신라의 녹을 먹으며 반역할 뜻을 품어, 나라의 위기를 기회로 생각하고 그 도읍을 침략하여 왕과 신하를 다 짐승처럼 죽이니 천하에 으뜸가는 악당이었다. 그러니까 궁예는 신하들에 버림받고 견훤은 아들에게 불행을 당한 일이, 다 자업자득이고 누구 탓할 자격이 없다. 향우나 이밀 같은 능력자들도 한나라, 당나라의 천하통일을 막을 수 없었거늘, 궁예와 견훤 따위가 우리 태조를 당할 수 있었을까? (p. 177)

고구려, 백제, 신라에 대한 일연의 평가가 지금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평가와 어떻게 얼마나 다른 건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역사가의 평가는 시대마다 달라지기 마련인데, 지금 우리가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의미를 크게 두고 있는 부분은 과연 어디일까?

여하튼, 삼국의 이야기 끝에 저자는 가야의 역사도 빼놓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가장 빈약하게 배우는 부분이 가야인 것 같은데 최근 유적발굴도 활발하다 하니 이 부분의 역사가 좀 보완됐으면 좋겠다.

이렇게 고조선부터 시작하여 삼국과 가야의 시작과 멸망을 다루고 나면 각 국에 불교가 언제 어떻게 전래됐는지를 시작으로 절이나 불상, 탑 등에 얽힌 이야기, 유명한 스님들의 일화 그리고 민간에 전해지던 이런저런 교훈적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대개가 설화적 이야기들이다 보니 약간은 전래동화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신선하게 읽혔던 부분은 (아무래도 불교 이야기라서 그런가) 인도등의 외국과 관련된 이야기들이었다.

"너희 신라 황룡사는 석가모니와 예전 세상 가섭 부처님들이 강연하던 땅이라, 연좌석이 아직도 있다. 그래서 인도 아소카왕이 황금을 좀 모아 바다에 띄워 보내, 1300년 후 신라에 다다라 황룡사에 모셔질 수 있었다. 다 공덕과 인연 덕분이니라" (p. 233)

이렇게 땅에서 돌로 된 뭐가 자꾸 나온다는 점은, 샤머니즘 거석 신앙이 불교에 수용된 결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p. 240)

물고기 상징은 우선 수로왕과 아내인 허황옥의 상징물이 쌍어, 물고기 두 마리였다. 이는 메소포타미아에 기원을 두고, 불교의 상징으로서 물고기처럼 눈을 깜빡이지 않고 열심히 수행하는 이미지를 얻기도 했다. 한편 로마 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도 물고기로, 예수의 시대를 황도12궁 물고기의 시대라 부르기도 했다. 물고기는 이렇듯 신과 생명의 기원에 관한 종교 신앙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소재였으므로, 만어산과 같은 물고기 산의 이미지가 가능한 것이다. (p. 278)

인도에서는 신라를 '구구타예설라'라고 부른다. '구구타'는 닭, '예설라'는 귀하다는 뜻이다. 인도에 전해지기로는, 신라가 닭의 신을 공경하므로 닭의 깃을 머리에 꽂아 장식했다고 한다. (p. 323)

지금은 없지만 황룡사가 정말 중요한 절이었구나 싶어 더 궁금해지고, 거석신앙이 불교와 연결된 점도 아하 그랬구나 감탄했고, 인도와 관련된 이야기들도 신선했다. <삼국유사>가 이렇게 재밌는 책인데 그동안 왜 고전으로서 읽을 생각을 못했나 싶을 정도다. 역자는 <삼국유사>가 여러 이야기의 모음집이므로, 순서대로 읽는 것도 좋겠지만 초심자의 경우 아무 곳이나 흥미로운 부분부터 띄엄띄엄 읽어나가는 방법도 권장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1편과 2편은 아무래도 연대기적 역사이야기이다 보니 순서대로 읽고, 3편 이후 불교관련 이야기들은 자유롭게 읽어도 좋겠다라고 생각한다.

여하튼, 우리의 역사고전으로서 이렇게 대중적으로 읽을 수 있게 해준 클래식아고라 시리즈 관련자분들께 그저 감사한 마음이다. 이 시리즈의 1권인 <징비록>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는데, 2권인 <삼국유사>도 이처럼 즐겁게 읽고나니 앞으로 나올 다른 책들도 절로 기대가 된다. '고전 회복 운동'으로 시작했다는 클래식아고라 시리즈, 꾸준히 지속되길 응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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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신예찬 - 라틴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5
에라스무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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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읽히지만 가볍지 않은 고전, 역시 현대지성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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