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카즈무후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2
마샤두 지 아시스 지음, 임소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분명하게 그리려고 할수록 희미해지는

진실과 의심의 경계

세상은 넓고 작가는 많다!

새로운 소설을 읽게 될 때마다 느끼게 된다.

소설 읽기를 즐겨하는 이라면 때론 다른 나라의 작가와 작품에 대해 궁금증이 생길 것이다. 그렇게 이나라 저나라 여행하듯 읽다보면 세계문학을 접하게 되는데 그렇게 알게되는 작가들은 자주 낯선 이름이곤 한다.

마샤두 지 아시스

어느 나라 이름인지도 모르겠는 이 생소한 이름의 작가는 브라질 작가다.

소개를 보니 브라질의 국민작가인 것 같은데, 기왕 세계문학을 접한다면 늘 대표적 작가부터 시작하고 싶은 이 소심한 호기심이 이번에도 덜컥 이 낯선 소설을 손에 들게 했다.

황폐해진 마음에서 소설의 경계까지,

질투와 의심이란 작은 돌멩이 하나로 허물어뜨리는 작품

브라질의 대문호이자 심리소설의 대가인 마샤두 지 아시스의 대표작이다. 국내 초역이며, 아시아권 언어로 번역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그가 남긴 열 편의 장편소설과 이백여 편의 단편소설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브라질에서는 국민 대부분이 알고 있으며 현재까지 드라마, 영화, 연극 등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 소설가 정소현 추천사 中 -

인터넷서점의 책소개글에서 읽게된 추천사 또한 이 책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독자는 숨은 단서를 포착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소설을 다시 읽을 수밖에 없다. 읽을 때마다 문장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지만 쉽게 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믿을 수 없는 화자와 알 수 없는 진실은 독자를 좀처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정소현 소설가)' 라는 책 뒷표지의 글은 이 책에 대한 일말의 망설임도 불러일으켰다. 나는 읽은 소설을 다시 읽는 편이 아닌데 한번에 이해 안되는 문장들이 많으면 어떡하지;;;

그렇게 설레임반 걱정반으로 브라질 소설의 첫 문을 열어젖혔다.

나에게 '동 카즈무후'라는 별명이 생겼다. 말이 없고 은둔형 기질인 나를 좋아하지 않았던 이웃들이 사용하던 말이 결국 별명이 되어버렸다. (중략) 굳이 사전을 찾아보진 말길 바란다. 여기서 '카즈무후'는 사전적 의미가 아닌, 말이 없고 자기 세계에 빠진 사람에게 흔히 붙이는 별명이다. '동'은 귀족 냄새를 풍기기 위한 반어적 표현이다. (p. 8)

굳이 사전을 찾아보았다;;;ㅋㅋ 이 소설의 제목인데 무슨 말인지 모르는 단어였으니까. ㅎㅎㅎ

책의 목차는 따로 없었지만 작가는 한두 페이지마다 소제목들을 붙여 놓았다. 그렇게 148장까지 있는 이 소설의 첫 소제목이 '표제에 대하여' 이다. 그리고 역자는 주석에서 이 '동 카즈무후'라는 단어가 '무뚝뚝 경' 혹은 '퉁명 공'이라는 뜻의 포르투갈어 라고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작가는 '제목을 설명했으니 이제 책을 쓰고자 한다. (p. 9)' 라며 마치 회고록 처럼 읽히게 될 이 소설을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마샤두 지 아시스 라는 작가가 쓴 소설이자 무뚝뚝 경인 동 카즈무후가 쓴 소설인 셈이다.

나의 분명한 목표는 삶의 양 끝을 연결하여, 노년기에 이르렀을 때 젊은 날의 의미를 되찾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독자여, 나는 과거의 시간도 과거의 내 모습도 되살려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면에서, 얼굴은 같은 사람인데, 인상이 달라진 듯했다. 내가 그저 누군가를 잃기만 한 것이라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군가를 잃은 상처를 어느 정도 스스로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경우엔 모든 것을 잃은 것과 같다. 그 빈자리는 절대 채워지지 않는다. (p. 10)

나에게 남아 있는 친구들은 최근에 만난 사람들이다. 옛 친구들은 모두 영적 세계의 지질학을 연구하러 떠났다. (중략) 그러나 다른 삶이 더 나쁜 삶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저 다른 것이다. (중략) 사실 나는 되도록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고 입도 잘 열지 않는다. 외출하는 일도 드물다. 대부분의 시간을 텃밭과 정원을 가꾸고 책을 읽는데 소비한다. 잘 먹고 잠도 설치지 않는다. 지금은, 모든 것은 시들해지기 마련이듯, 이 단조로움 역시 결국 나를 지치게 했다. 변화를 꾀하고 싶었고, 책을 써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p. 11)

'나'는 비교적 윤택하게 혼자 사는 건강한 노인이다. 나는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지만 실재의 삶에서 나는 거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옛날의 나를 아는 친구들이 저세상으로 가고, 그 과거의 나를 아는 이가 나만 남은 시점에서야 '나'는 과거의 나를 다시 되짚어 책으로 써보기로 한다. 젊은 날과 노년기의 삶이라는 양 끝을 연결하고 싶다는 것은 결국 그동안 젊은 날의 삶과 단절한채 살아와 노년을 맞았다는 이야기다. '나'는 왜 그렇게 모든 것을 단절하고 퉁명스럽게 귀족인양 굴며 살아온 것일까.

자, 그럼 절대 잊을 수 없는 11월의 어느 성대한 오후를 떠올려보자. 그날보다 더 좋거나 나빴던 날도 많았지만, 그날 오후만큼은 내 영혼에서 절대로 사라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읽으면서 이해하게 될 것이다. (p. 12)

11월이었고, 연도는 정말 오래전이긴 하지만 오래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내 인생의 중요한 날짜를 변경하지는 않겠다. 1857년이었다. (p. 13)

1899년 발표된 이 소설의 배경은 발표된 당시로 봤을때 무척 현대적 시점이었다. 화자가 살아있는 시점과 독자가 읽고 있는 시점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시절의 독자라면 화자가 말하는 시대를 자신의 과거처럼 회상하게 될 것이었다. 때는 입헌군주제로 브라질이 포루투갈 왕실에서 이어진 왕정아래 있던 시절이었다. 2022년에 읽는 독자는 이 시대적 간극을 염두에 두고 이 소설을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글로리아, 그 아이를 정말 사제로 만들어야 할까?"

"주께 맹세했으니 지켜야 해요" (p. 15)

"항상 함께 있으니까요..."

"몰래..."

"그 집에선 연애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말들이 혼란스럽게 맴돌았다. (p. 35)

열다섯 살 소년 벤치뉴는 어느날 응접실에서 어머니와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엿듣게 된다. 어머니가 자신을 신학교에 보내 사제로 키울 것이라는 말은 딱히 몰랐던 내용은 아니었다. 하지만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이 있었다. 어머니에게 그 결심을 다시 상기시킨 사람, 하인까지는 아니지만 객식구로 더부살이 하고 있던 지아스의 밀고를 통해 벤치뉴는 어려서부터 함께 커온 친구 카피투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런저런 비밀 이야기가 내 안에 불러 일으켰던 감정을 그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그 감정은 달콤하고 새로웠지만, 나는 그 원인을 캐내거나 의심조차 하지 않은 채 회피했었다. 지난 며칠간의 침묵은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제야 나는 그것이 하다 만 말, 호기심 어린 질문들, 모호한 대답, 조심스러운 행동들, 유년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는 즐거움과 같이 무언가를 의미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챘다. 카피투를 생각하며 잠에서 깨고, 그녀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리거나 그녀의 발소리에 화들짝 놀라는 현상이 나타난 것도 최근의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p. 37)

그리고 다행히?! 카피투도 벤치뉴를 사랑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카피투는 자신의 감정을 벤치뉴보다 먼저 깨달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벤치뉴가 스스로의 감정을 깨닫도록 더 과감하게 벤치뉴를 자극하고 있었다. 벤치뉴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가슴 벅찬 떨림을 진정시키고자 노력했다. (p. 38)' 첫사랑이었고 평생의 유일한 사랑이 될 터였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깨닫자마자 곧 닥쳐올 신학교 입학이라는 난제가 닥쳐왔다.

"나는 남자야!"

이 말을 세번째 반복했을 때 신학교가 생각났지만, 지나간 위험, 뿌리 뽑힌 악, 사라진 악몽에 대해 생각하는 이가 있을까? 나의 모든 신경이 나에게 남자는 성직자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나의 피도 같은 생각이었다. 다시 한번 카피투의 입술이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입맞춤의 추억을 남용하는 측면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추억은 바로 그런 것이다. 지나간 옛 기억을 곱씹는 것이다. 그 시절의 모든 기억 중에서 가장 달콤하고, 가장 새롭고, 가장 포옹력 있고, 나 자신을 온전히 드러냈던 기억이 바로 이것이다. (p. 101)

벤치뉴와 카피투는 나름 작전을 짜기 시작한다. 이별하지 않을 수 있을, 사제가 되지 않을 수 있을, 둘이 함께한 맹세가 이루어질 수 있는 방법을.

알다시피 사람의 영혼은 집의 구조와 같다. 사방에 창문이 나 있고, 많은 빛과 신선한 공기가 들어온다. 수도원이나 감옥처럼 창문이 없거나 창살로 둘러싸여 없는 것과 매한가지인 폐쇄적이고 어두운 곳도 있다. 또한 예배당과 시장, 소박한 농가나 호화로운 궁전도 있다. 나의 것은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직 '카즈무후'라는 이상한 별명도, '동 카즈무후'라는 경어법이 어울릴 만한 지위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두려움이 나의 솔직함을 가로막았지만, 문제는 열쇠도 자물쇠도 없었기 때문에 그저 문을 밀기만 하면 됐다. 에스코바르는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를 여기 안에서 발견했고, 적어도 그때까지는 이 안에 머물러 있었다... (p. 159)

벤치뉴는 신학교에 들어가긴 했지만 사제가 되지는 않았다. 신학교에서 평생의 절친 에스코바르를 만난 것은 큰 축복이라 생각했다.

신학교에서의 생활은 나름 괜찮았지만 떨어져 있는 시간만큼 카피투에 대한 불안함이 커져갔다.

'다른 생각이 아니었다. 잔인하고 알 수 없는 감정, 순수한 질투, 나의 내면의 독자였다. 그러한 감정들이 내가 혼자 주제 지아스의 말을 되뇔 때 나를 갉아먹었다. (p. 173)' 첫사랑에 빠져 달콤함만 만끽해도 모자랄 이 시기에 벤치뉴의 마음 속엔 이미 '내면의 독자'가 생겨버렸던 것이다.

혹여 이 장르에서 개선해야 할 점이 있다면, 나는 실험적으로 끝에서 시작하는 작품을 제안하고 싶다. 오셀로가 1막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데스데모나를 죽인 뒤, 다음에 이어지는 세 개의 막은 느린 동작과 함께 갈등의 하강 구조로 펼쳐지고, 마지막은 첫 장면부터 터키인의 위협, 오셀로와 데스데모나의 설명, 슬기로운 이아고의 좋은 충고로 마무리된다. (p. 199)

이 소설의 뒤에는 '오셀로 증흐군이 빚어낸 파국'이라는 해설이 붙어 있다. 벤치뉴와 오셀로는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를까.

'나는 그녀의 목 아주 깊숙이 손톱을 박아 넣고 그녀가 피를 흘리며 숨이 끊어져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p. 204)'

그저 골목에 지나가는 모르는 남자가 카피투를 한번 쳐다보았을 뿐인데 말이다.

오셀로에게는 이아고라는 협잡꾼이 있었지만 벤치뉴에겐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내면에 그 협잡꾼이 있었다. 벤치뉴가 소년에서 어른으로 자람에 따라 그 협잡꾼도 성장해 갔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는 독자가 소설 속의 이 '내면의 독자'를 깨닫게 되는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중략) 그때 나는 겨우 열일곱이 조금 넘은 나이였다.... 여기가 이 책의 중간 지점이 되어야 했지만, 글쓰기 경험이 부족해서 펜이 가는 대로 쫓아가다보니 정작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한 채 어느덧 거의 책 끝부분에 도달했다. 이제 약간의 수정과 숙고를 거쳐 추려질 이야기를 장마다 큼직큼직하게 짚어나가기만 하면 된다. (p. 254)

실제 그랬다. 이 소설의 대부분은 벤치뉴의 십대 시절 이야기를 담고 있다. 노년기의 무뚝뚝경이 가장 그리워하는 시절이자 현재의 삶과 가장 연결시키고자 하는 시절, 그래서 삶의 양 끝을 연결하여 젊은 날의 그 소중했던 의미를 되찾고자 하는 욕망이 좋았던 이야기만 한참을 늘어놓게 만들었다. 정작 자신을 그렇게 만든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큼직큼직하게 후려치겠단다. 어쩌면 여전한 일종의 회피이자 무책임으로 보일 수 있는 이러한 서술 태도는 어느새 화자의 이야기에 젖어든 독자가 화자의 심정을 물려받아 화자의 생각대로 이야기를 판단할 토대를 구축한 상태라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회피와 무책임을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나는 분명하고 뚜렷한 이 목소리를 자주 들었다. 예컨대, 그녀는 스코틀랜드 마녀의 사촌임이 틀림없다. "너는 왕이 될 거야, 멕베스!" "너는 행복할 거야, 벤치뉴!" 그것은 결국 보편적이고 영원한 같은 곡조의 같은 예언이다. (p. 260)

300여 페이지에 걸쳐 몇년 간의 자신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펼쳐놓았던 벤치뉴는 이제 50여페이지에 걸쳐 수십년 간 자신 만든 파국을, 이제야 이야기한다.

에제키에우는 '다른 사람들을 모방하는 걸 좋아해' (p. 290)

'아주 작은 몸짓 하나,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 사소한 고집에도 괴로워할 정도로 나는 그녀에게 계속 집착했다. 종종 무관심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질투했다. 이웃집 남자, 왈츠 파트너,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남자라면 누구나 나를 공포와 불신으로 가득 채웠다. (p. 291)'

'어떻게 죽은 사람까지! 죽은 자도 당신의 질투는 피할 수 없구나! (p. 343)'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달까? 벤치뉴는 에스코바르가 사고로 갑자기 죽었을 때 장례식장에서 평생의 불신을 품게 된다. 에스코바르가 벤치뉴를 절친이자 함께 하고픈 행복한 사람으로 알고 죽은 게 그나마 벤치뉴가 만들 파국이 덜 비극이 되게 했다... 하지만...

나는 외식을 했다. 저녁에는 극장에 갔다. 때마침 내가 본적도 읽은 적도 없는 <오셀로>를 상연 중이었다. 극의 주제는 알고 있었기에 우연의 일치를 기뻐했다. 나는 손수건 한 장 때문에 무어인이 크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저 단순한 손수건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장에서는 아메리카 대륙과 다른 대륙 심리학자들의 연구 자료를 소개하고자 한다. (중략) 손수건은 잃어버릴 수 있다. 오늘날에는 침대 시트 정도는 되어야 한다. (p. 335)

오셀로는 가당치도 않은 의심을 했다고 생각하는 벤치뉴는 자신의 의심만큼은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오셀로에게는 거짓이나마 물증이 있었다면 벤치뉴에게는 아무런 물증 없이 그저 혼자만의 심증만 있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면에서 카토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기 위해 소파에 몸을 뻗었다. 그의 행동을 단순히 모방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p. 337)'

'아니야, 아니야. 나는 네 아빠가 아니야! (p. 340)'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뭐야?" (p. 342) "나는 그 이유를 알아. 우연의 일치로 닮았기 때문이지... 신의 섭리만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거야...비웃는 거야? 이해해. 신학교에 다녔으면서도 당신은 신을 믿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믿어..." (p. 344)'

그러니까... 카피투와 벤치뉴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에제키에우는 벤치뉴가 봤을 때 죽은 에스코바르를 똑닯았던 것이다. 발가락만 닮아도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말이다...

지금처럼 유전자검사가 가능한 시절이었다면 불가능했을 소설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가능했을 소설일지도 모르겠다. '독자도 나의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카피투의 어린 시절을 기억한다면, 껍질 안에 있는 과실처럼 한 사람이 이미 다른 사람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해답이 무엇이든 간에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중략) 그토록 사랑했던 나의 첫사랑과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결국 나를 기만하고, 하나가 될 운명을 택했다는 것이다.... (p. 361)' 라는 마지막 페이지의 문장으로 확인되는 화자의 태도를 보면 말이다.

하지만,

혀를 끌끌 차며 기막힌 채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벤치뉴는 정말 자신의 불신을 믿음으로 확고히 한 것일까? 오셀로 처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것일까?

왜냐하면 시작부터 벤치뉴는 단절되어 살아온 노년기의 자신이 젊은 날의 자신과 연결되어 화해할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피력했기 때문이다.

작품 뒤에 붙은 평론가의 해설은 차치하고 그저 독자로서 이 소설을 꼽씹다보면 작가의 은근한 매력을 새삼 깨닫게 된다. 오호라 이래서 정소현 소설가는 다시 읽을 수 밖에 없는 소설이라고 말했구나! 하지만 나는 다시 읽게 되진 않을 것 같다. 핑계를 대자면 해피엔딩이 절실한 시절이라서랄까...

ps. 브라질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쌈바축제때 보이는 유색인이자 식민지에서 벗어난 인디오들의 사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처음 읽은 브라질 작가의 소설은 내가 알던 그 브라질이 아니었다. 그저... 포르투갈 이었다. 검색해보니 브라질의 인구구성에서 백인의 비중은 절반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좀 단적으로 말하자면 백인들의 나라였던 것이다. 뒤늦게 깨달은 브라질의 역사는 이 소설보다 내게 더 충격적 잔상과 여러 물음표들을 남겨 놓았다. 과연 브라질 적인 것은 무엇일까?...

'마샤두 지 아시스는 백인이 아닌 가난한 집안 출신의 물라토 혼혈로 인종적·사회적 열등감에 늘 시달려야 했다. 최근까지도 미디어 속 마샤두 지 아시스의 이미지가 전형적인 백인 엘리트르 연상시키는 외모로 묘사되거나 백인에 가까운 모습으로 수정·보완되어 소개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브라질 최고의 소설가로 인정받기까지 그가 얼마나 노력했을지, 어떤 시련을 겪었을지 가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실제로 그러한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듯 그는 살아생전 단 한번도 흑인이나 하층민과 같은 사회적 약자의 시각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을 발표한 적이 없었다. (p. 367 - 해설 中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