젬스톤 매혹의 컬러
윤성원 지음 / 모요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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젬스톤의 컬러는 단지 감상의 대상이 아니다.

가치의 척도이자 가격표이다.

책제목과 표지에서 알수 있듯이 이 책은 보석에 대한 책이다. 그리고 부제와 뒷표지문구에서 알수 있듯이 보석에 대한 이야기 중 특히 컬러에 대한 이야기다. 사실 보석은 돌인데 돌이 보석이게 된 이유는 그 '색' 때문이니 보석에 대한 이야기중 가장 기초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책은 화이트, 레드, 핑크, 오렌지, 옐로, 그린, 스카이블루, 블루, 퍼플, 멀티컬러 등 열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파인 주얼리에서 자주 쓰는 50여 개의 보석을 컬러별로 배치했다. (p. 8) 요약하자면, 색에 따른 분류가 기본이지만 광물의 본질적인 특성상 무 자르듯 명쾌하게 나눌 수 없었다는 말이다. 선택된 50여 개의 보석은 2023년 현재 글로벌 시장의 수요 공급과 트렌드를 반영한 리스트라고 볼 수 있다. (p. 9)

보석과 컬러에 대한 책이니만큼 시각적으로 보는 즐거움이 있는 책이었다. 오른쪽엔 보석의 사진이 왼쪽엔 그 보석에 대한 설명이 배치된 책의 구성상 책의 두께 대비 책장도 술술 넘어가고 무엇보다 각각의 보석이 저마다의 매력으로 눈길을 사로잡으니 내겐 마치 화려한 박물관을 관람하는 기분을 느끼게 하기도 했다.

내게 보석이란 음... 내가 직접 걸치는 악세사리라기 보다는 내게 닿을 수 없는 박물관의 유물처럼 여겨져서... ㅋ 가진게 없고 가질수 없으며 멀게 느껴지는 보석이 박물관의 유물과 다를게 무어 있겠나 ㅎㅎㅎ 그래서인지 각각의 보석이야기는 때론 상식처럼 때론 역사처럼 흥미롭게 읽혀졌다.

정확히 말하면, 캐럿은 크기가 아니라 무게다. 1캐럿은 0.2g이다. (p. 14)

다이아몬드 그만큼 '영원한 사랑'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보석이 또 있을까? 물론 고유의 단단한 성질도 한몫 했다. '정복될 수 없다'는 뜻의 그리스어 아다마스에서 유래한 명칭만 봐도 그렇다. (p. 37)

첫번째 보석 '다이아몬드'부터 새로운 이야깃거리라 툭툭 튀어나왔다. 다이아몬드가... 오 그래? 하면서 읽게되는. ㅎㅎ

이런 식의 감탄과 호기심의 자극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진다.

그리스인들은 루비를 '모든 보석의 어머니'라고 불렀고, 로마인들은 다이아몬드보다 높이 평가하면서 '돌 가운데 꽃'이라 여겼다. 성경에도 붉은 보석이 네 번 등장하는데 모두 아름다움이나 지혜와 연계되어 있다. 대제사장의 흉패에 박힌 12개의 보석 중에서 제1열의 첫 번째 보석도 루비다. (p. 79)

산호는 특히 주요 산지인 지중해 일대에서 이집트와 로마 시대부터 어린아이를 보호하는 부적으로 쓰였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영웅 페르세우스가 괴물 메두사의 목을 잘랐을 대 흘러 넘친 피가 지중해에 떨어져 산호가 되었다고 한다. (p. 123) 진주, 호박, 상아와 함께 대표적인 유기질 보석인데 가치로만 따지자면 진주에 버금가는 이인자로 꼽힌다. (p. 125)

"이상하네, 내가 아는 토파즈는 파란색인데?" 사실 순수한 토파즈는 무색이다. (p. 195) 토파즈가 산스크리트어로 '불'의 뜻을 가진 'taoas'에 기원을 둔 이름인 만큼 노란 기가 도는 보석은 모두 토파즈로 불릴 때도 있었으니 말이다. (p. 197)

페리도트는 보석을 뜻하는 아랍어 파리다트에서 유래된 프랑스어다. 고대에는 토파조스라고 불리다가 18세기 이후에야 페리도트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옛 문헌에 토파즈로 기록된 보석이 있다면 페리도트일 확률이 높다. (p. 249) 페리도트는 한때 '가난한 자의 에메랄드'라는 오명이 붙기도 했지만 이렇듯 수세기 동안 부활과 재생의 의미로 폭넓게 애용된 보석이다. (p. 251)

터키석은 16세기의 프랑스식 표현이다. 풀어쓰자면 '튀르키예에서 온 돌'이 된다. 사실상 튀르키예에서 산출되지 않았음에도 프랑스의 상인들이 페르시아에서 건너온 돌을 튀르키예의 시장에서 구매했기 때문에 그렇게 믿은 것이다. (p. 295)

라피스라줄리는 한자어로 청금석, 즉 푸른 금의 돌이다. 기원전 7000년부터 아프가니스탄의 바다흐샨 지역에서만 산출되어 이름처럼 금값에 맞먹는 비싼 보석으로 자리매김했다. 성경에 의하면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대제사장의 흉패에 박힌 12개의 보석 중 하나가 라피스라줄리였다. 유대인의 기록에도 십계명을 새긴 명판이 라피스라줄리라는 설이 있다. (p. 327)

역사를 좋아하다보니 보석 이름의 어원이나 관련된 역사적 에피소드가 등장하면 더 재미있게 읽혀졌고,

보석의 나이로 줄을 세운다면 1열은 단연 지르콘의 차지다. 1956년에 미국의 지구화학자 클레어 패터슨이 지구의 나이를 45.5억년으로 발표했을 때 사용한 연대 측정 광물이 바로 지르콘이었기 때문이다. 지르콘은 우라늄 같은 소량의 방사성 동위원소를 갖고 있기 때문에 반감기를 이용해 암석의 생성 시기를 측정할 수 있다. (p. 287) 큐빅 지르코니아와 혼동되는 것인데 둘은 엄연히 다른 물질이다. 큐빅 지르코니아는 1970년대부터 인간이 다이아몬드 모조석으로 생산해온 이산화 지르코늄이고, 지르콘은 규산 지르코늄이라는 천연 광물이다. (p. 289)

'귀한 돌'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우팔라' 또는 라틴어 '오팔루스'에서 유래한 이름이 더없이 잘 어울리는 보석이다. 오팔은 실리카와 수분으로 구성된 비정질의 함수규산염이다. 즉 엄밀히 따지자면 광물이 아닌 준광물에 속한다. (p. 353)

보석은 돌 그러니까 광물이다보니 때로는 과학적 이야기로도 흥미롭게 읽혀졌으며,

오렌지색을 만들어내는 적색과 황색은 서로를 보완해주는 관계로서 동양에서 가장 사랑받는 '투톱'컬러이기도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 영국에 오렌지가 수입되기 전까지는 이 색을 지칭하는 영어 단어가 없었다고 한다. 1512년이 되어서야 'orange'가 색을 묘사하는 단어로 쓰이기 시작했다. (p. 165)

한여름의 태양 빛을 닮은 호박은 오랫동안 동유럽의 왕실을 장식하고, 각종 종교 오브제나 공예품의 소재로 귀한 대접을 받아왔다. (p. 203) 덴마크에는 1933년부터 90년 가까이 호박 주얼리만 생산해온 브랜드가 있을 정도로 스칸디나비아 일대에서는 행운의 상징으로서 인기가 높다. (p. 207)

때로는 상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다양한 이야기로 읽히기도 했다.

누군가 가장 저평가된 보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단연코 스피넬이다. (p. 99)

순수한 칼세도니는 백색이다. 여기에 미량의 발색 원소나 미세한 내포물이 들어가 색을 갖게 되는데 다공질이다 보니 모든 색으로 염색과 탈색도 가능하다. 한 예로 오닉스는 원래 검정색과 백색의 직선 줄무늬가 나란히 배열된 보석이다. 따라서 시중에 유통되는 오닉스는 모두 인위적으로 검게 염색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p. 381)

하지만 가장 신선했던 점은, 보석의 다양성과 색 자체를 변형시킬 수 있는 가공성 이었다. 내가 아는 보석 이름이라곤 열가지도 대지 못할 것 같은데 세상엔 실로 엄청나게 다양한 보석이 있었다. 또한 보석이라고 하면 그냥 돌을 캐서 예쁘게 깎은 것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열처리를 하건 다른 물질을 삽입하건 표면에 어떤 처리를 하건 여하튼 보석은 그냥 예쁜 돌이 아니라 충분히 만들어질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

이 책은 매 보석마다 다양한 이야깃거리부터 보관법 같은 깨알상식까지 알차게 담고 있는데 책의 뒷부분에는 젬스톤의 보석학적 특징과 용어정리까지 깔끔하게 추려져 있어서 보석에 대해 학문적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도 재미있게 읽혀질 수 있을 것 같다. 정리하자면, 단순히 보석에 대한 ~카더라 식의 흥미위주가 아니라 적절히 역사적이고 적절히 과학적인 그렇게 적절히 전문적인 보석의 이야기를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달까.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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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슬픔의 거울 오르부아르 3부작 3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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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벗어달라는 제안을 받은 교사,

비밀이 든 가방을 들고 다니는 헌병,

전선에서 도망치다 붙들린 군인 …

이 시대의 가장 재기 넘치는 거장 21세기의 발자크,

피에르 르메트르의 신작

작가에 대해서도 작품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신간안내의 무수한 광고문구들 사이에서 작가의 이력이 눈에 띄었다.1951년에 태어나 55세의 나이에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첫 작품부터 상을 받더니 발표하는 작품마다 호평을 얻고 이내 늦깎이 신예에서 곧장 장인의 반열에 올랐다는 작가에 대한 그 소개가 말이다. 그는 과연 어떤 작품을 썼길래?!

전쟁이 곧 시작되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시들해져 있었고, 누구보다도 쥘 씨가 그랬다. 총동원령이 내려지고 나서 여섯 달이 넘어가자, 실망한 라 프티트 보엠의 사장은 더 이상 그 가능성을 믿지 않게 되었다. 서빙을 하던 루이즈는 그가 <이 전쟁이 정말로 일어난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라는 말까지 하는 것을 듣곤 했다. (p. 13)

첫 문장부터 전쟁과는 어울리지 않는 왠지모를 나른한 분위기로 시작하는 이 두툼한 소설은 실은 두 달여 간의 짧다면 짧은 날들을 담은 작품이라는 것을 1940년 4월6일 - 1949년 6월6일 - 1940년 6월13일 로 이루어진 단촐한 차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직 세계대전이 벌어지진 않았으나 곧 터질것 같은 전쟁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던 시절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기막힌 상황들이 펼처지기 시작한다. 총동원령까지 내려졌음에도 전쟁은 벌어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부터가 기막힌 생각이었지만 그 시절의 파리는 그런 생각들이 자연스러운 그런 곳이었다.

「당신의 벗은 모습을 보고 싶소」 그가 말했다. 「딱 한 번만. 그냥 보기만 하고 다른 것은 안 해요」 깜짝 놀란 루이즈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p. 16)

초등학교 교사인 루이즈는 여가시간에 동네 레스토랑인 라 프티트 보엠에서 서빙을 하고 있었다. 교사가 된 이후로 굳이 서빙일 까지 할 필요는 없었지만 어려서부터 해온 쥘 씨의 식당돕는 일을 굳이 그만 둘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이 레스토랑의 단골 손님 중엔 20년 전 부터 토요일마다 와서 전면 유리창 옆의 똑같은 테이블에 앉아 점심을 먹고 가는 의사 선생이 있었다. 그 의사선생이 처음으로 루이즈에게 말을 걸었는데 그 내용이 너무 어처구니 없어서 루이즈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루이즈는 당황했다가 기분이 나빴다가 호기심이 일었다가 기분이 썩 괜찮았다가 하는 혼란한 와중에 의사가 받아들일 수 없을 거라고 예상되는 '만 프랑'을 대가로 요구했다. 그러나 의사는 그렇게 하자며 호텔방을 예약한 메모지를 건네는 것이었다. -0-

9백명이 넘는 병사들은 수만 세제곱미터의 콘크리트 아래에 묻힌 수 킬러미터의 지하 통로를 쥐새끼처럼 돌아다니며 살고 있었다. (...) 적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었으므로 탄약 상자를 쌓고, 열고, 분류하고, 옮기고, 확인하고, 정리하기를 반복했으니, 이 일 외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p. 40) 평소에도 깊게 잠드는 편이 아닌 가브리엘에게 이 지하 요새는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기다리다 진이 빠졌다. (...) 기장이 상당히 해이해져 경계 근무 사이사이에 휴게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p. 42) 라울 랑드라드 병장이 그의 작업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 휴게실에서였다. (...) 그에게 있어서 삶은 온갖 술책과 부정 거래가 우글거리는 연못이었다. (p. 43)

수학선생이었으나 통신병으로 징집된 가브리엘과 한 내무반에 라울 랑드라드 병장이 있었다. 그는 가브리엘과 극과극의 사람이었다. 가브리엘이 올곧다면 라울은 올곧지 않은 일만 골라 하는 사람이었다. 가브리엘은 라울이 벌이는 일들이 모두 마뜩찮았으나 그의 속임수와 폭력과 사기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가브리엘에겐 시간이 흐를수록 절대 얽히고 싶지 않은 사람이 라울이었는데 이 둘의 관계는 점점더 밀접해져만 갔다.

루이즈는 사흘 더 병원에 머물렀다. 그녀는 거의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녀가 떠나려 할 때, 한 경찰관이 병실에 들어와 법원의 판결을 알려 주었다. 사인은 자실로 확인되었고, 매춘 시도 혐의는 기각되었다는 거였다. (p. 60)

호텔방에서 루이즈의 벗은 몸을 보던 의사는 돌연 권총자살을 했고 그 장면을 목격한 루이즈는 충격에 빠질 수 밖에 없었는데 겉보기로만 봤을 때 매춘에 가까웠던 상황이었기에 루이즈에 대한 소문은 나빠져만 갔고 그렇게 루이즈의 일상은 무너져내렸다. 그는 왜?

데지레 미고가 처음부터 미고 변호사엿던 것은 아니다. 이 사건이 있기 전 해에, 그는 석 달 동안 리바레탕퓌이제 마을에 단 하나 있는 학급의 초등 교사로 근무(...) 몇 달 후, 그는 에브뢰 항공 클럽의 조종자 데지레 미냐르의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다. (p. 82) 비행 클럽 금고를 들고 영원히 사라져 버렸던 (...) 그의 얼마 되지 않은 경력의 하이라이트는 이베르농쉬르손생루이 병원의 외과 의사 데지레 미샤르 박사로 두 달 넘게 활동한 일이었다. (...) 데지레 미고의 진정한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생농라브르테슈에서 태어나 거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그곳의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그의 흔적이 발견되지만, 그 후에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를 만난 적이 있는 사람들의 의견은 그의 삶 자체만큼이나 다양했다. (p. 83)

한마디로 '사기꾼'이라 할 수 있지만 그냥 사기꾼이라고 폄하하기엔 뭔가 어떤 인간미와 묘한 신비로움이 있는 청년 데지레 미고가 다시 등장한 곳은 일촉즉발의 전쟁시국에서 혼란에 빠진 파리시내의 정보를 수습하고 검열해야 했던 공보국이었다. '콩티낭탈 호텔에서 데지레의 수직에 가까운 상승은 무수한 논평과 질문을 불러일으켰다. <저 친구는 대체 어디서 온 거야?> 라고 사람들은 묻곤 했다. (p. 147)' 데지레는 이번에도 그 화려한 언변으로 주변을 휘어잡고 있었다.

「전시에 정확한 정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감을 주는 정보야. 진실은 우리의 주제가 아니야. 우리에겐 보다 높은 임무가, 보다 야심 찬 임무가 있어. 우리는 프랑스 국민의 사기를 책임지고 있는 거라고!」(p. 149)

자신감을 주고 소식을 알려주면서도 애매하게 말하는 것, 이게 바로 이 일의 어려운 점이었다. (p. 150) 지금 진정한 전쟁부는 바로 공보국이었고, 데지레는 그 대변인이었다. (...) 이것은 전쟁인 동시에 파티였다. (p. 151)

소문으로만 들려오는 독일의 진격, 넘쳐나는 정보 속에 사라진 진실, 어디선가 전쟁중이 확실했지만 파리는 아직 파티 중이었다. 그리고 파티는 곧 끝났다. 독일군이 파리로 진격해오기 시작했다. 파리는 멘붕에 빠졌다.

「그 의사 말이야. 자기 애인을 데리고 올 때마다 우리가 잘해 주지 않았어? 그거, 다른 데 가서 하면 안 됐나? 그래, 어미 하나로 충분치 않아서 딸까지 데려온 거야?」 (p. 203)

일상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던 루이즈에게 우연히 눈에 띈 어머니의 유품속엔 그녀가 몰랐던 어머니의 과거가 있었다. 어머니가 왜 일생을 우울증에 빠져 창가에 앉아 있어야만 했는지 알 수 있을 힌트가 있었다. 그리고 의사선생이 왜 루이즈를 그렇게 쳐다보았는지도. '어머니가 의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는 살아 있었다. 이 세상 어딘가에. (p. 239)' 루이즈는 배다른 오빠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때 독일군의 진격이 파리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페르낭은 그동안의 망설임에 마침표를 찍었다. 알리스는 파리를 떠나되, 혼자 떠날 거였다. 왜냐하면 지산은 이시레물리노에서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p. 303) 그는 제목을 입고 건물 뒤뜰로 내려가서는, 거기 담겨 있던 감자의 흙이 아직도 밑바닥에 남아 있는 황마 자루 몇 개를 거냈다. 그런 다음, 자전거에 올라탔다. 이제 그의 구원은 어느 환경미화원의 손에 달려 있었다. (p. 308)

헌병대장 페르낭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 때문이기도 했지만 전시 상황 속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짐작되자 아내를 먼저 피난시키고 자신은 뒤따라가 가기로 했다. 목표한 바는 쉽게 이루었으나 마지막으로 죄수 소송 임무가 주어졌고 이 임무가 그를 상상밖의 상황으로 몰고 가게 되는데...

부유한 이들의 탈출은 이미 며칠 전에 끝났고, 지금은 그렇지 못한 이들이 군복 차림의 병사, 농부, 민간인, 장애인 들이 뒤섞인 잡다한 무리를 이루어 힘겹게 걷고 있었다. 한 시청 차량에 탄 어느 유곽의 매춘부들, 그리고 양 세 마리를 몰고 가는 목동 등 도로 위엔 그야말로 온 백성이 모여 있었다. 갈가리 찢기고 버려진 이 나라의 모습 자체인 이 피란민의 물결 속에서 자동차는 천천히 덜컹거렸다. 어디에나 얼굴들, 얼굴들이 있엇다. 어떤 거대한 장례 행렬 같다고 루이즈는 생각했다. 우리의 슬픔과 우리의 패배의 가혹한 거울이 된 거대한 장례 행렬이었다. (p. 459)

번역자에 의하면 이 작품의 원제는 <우리 고통들의 거울> 이라고 한다. 고통은 전쟁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듯한 원제라고도 이야기 한다. <우리 슬픔의 거울> 과 고통의 거울이 함께 들어가 있는 문단은 피란민의 행렬을 묘사한 장면에서 찾을 수 있었다. 고통이든 슬픔이든 뭐라하든 큰 관계 없었을 장면, 피란민의 행렬 모습은 '장례 행렬' 같았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었다. 예상을 했건 못했건 믿었건 믿지 않았건 벌어졌고 벌어진 이상 어쩔 수 없는. 하지만,

이번에도 상황이 모든 이를 화해시켜 주었다. (p. 611)

이 소설은 고통스럽거나 슬프게 읽혀지는 작품은 아니었다. 묘하게 우스꽝스럽고 묘하게 피식거리게 되는 그러니까 한마디로 무거워야 할 내용이 가볍게 읽혀지는 묘한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이 묘하게 가짜같은 상황들이 1940년대 프랑스의 현실, 진짜 현실 이었다고 한다. '라디오 방송에서 데지레가 전하는 소식들 중에는 아주 기상천외한 것들이 있다. 이들 중 상당수가 너무나 괴상하게 느껴지겠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들이다... (p. 617)' 거짓말이 난무하는 시대에서 거짓말 같은 상황이 정말 현실이었다고나 할까.

유럽 근대 소설의 양대 산맥이 영국과 프랑스라는 사실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낭만주의 감성의 영국에서는 자유로운 상상력의 환상 소설, 모험 소설, 고딕 소설, 역사 소설이 주를 이뤘다면, 실제의 사회와 역사를 치열한 비판 의식으로 파헤친 리얼리즘 소설은 프랑스 문학의 본령이었다. 19세기 초의 발자크, 스탕달, 플로베르, 빅토르 위고로부터 시작하여, 중반과 후반의 외젠 쉬, 공쿠르 형제, 에밀 졸라를 거쳐 20세기 초반의 마르셀 프루스트와 로제 마르탱 뒤 가르에 이르기까지, 프랑스는 세계 문학사에 길이 남을 굵직한 리얼리즘 작가들을 끊임없이 배출해왔다. (p. 623) 21세기 초반에, 가물가물해져 가던 이 영광스러운 횃불을 이어받겠다고 나선 작가가 나타났으니, 바로 피에르 르메트르 이다. -옮긴이의 말 中-

작가는 <오르부아르>, <화재의 색> 에 이어 <우리 슬픔의 거울> 로 세계대전 시대를 3부작 대하소설로 써냈다는데, 마지막 작품을 읽어서 그런가 굳이 그 이전 작품들까지 찾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 소설에서 확인한 어처구니없는 상황들을 또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전쟁이 현실이 되기까지 얼마나 무방비한 상태로 있었는지, 전쟁이 현실이 되고나서도 그 전쟁보다 더한 고통과 슬픔이 인생에 얼마나 많은지 깨닫게 하는 이 소설은 분명 명작이긴 한데, 내가 프랑스의 리얼리즘을 아직 잘 모르는 사람이라서인지 묘하게 멀게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굵직한 세계사를 소설로 새롭게 바라보고 싶은 사람에겐 꼭 한번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싶은 작품이기도 했다. 모든 역사는 우리에게 또다른 거울이 되고 모든 문학은 우리에게 또다른 슬픔을 알게 해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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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히브리스 - 인류, 그 거침없고 오만한 존재의 짧은 역사
요하네스 크라우제.토마스 트라페 지음, 강영옥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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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파괴적 욕망으로 질주하는 오만한 유전자, 인류에게 미래는 있는가?

한 권으로 살펴보는 인류 진화의 천만년사

이 책의 부제는 [인류, 그 거침없고 오만한 존재의 짧은 역사] 이다. 수천년 수만년에 이르는 인간의 역사를 두고 '짧은 역사' 라니 이상한가? 하지만 이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지구의 역사에 비해 인간의 역사는 정말이지 아주 짧은 역사이기 때문이다. 46억살이라는 지구의 역사에 견줘보면 고작 몇만년 정도의 인류의 역사는 거의 찰나의 시간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찰나의 존재인 인류가 더할나위 없이 오만해졌다. 휘브리스는 고대그리스어에서 '오만함'을 의미한다. 저자는 오만해진 인간을 '호모 히브리스'라 칭하며 메세지를 던지고 있다.


이 책은 끝없이 승승장구해온 인간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몰락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은 숱한 우연의 상호작용을 통해 파괴적인 속도로 진화의 정점을 향해 내달리고, 궁극적으로는 지구의 오지까지 정복해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는 아주 특별한 동물 종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이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끝에 단 한 번뿐인 성공 가도에 진입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수많은 진화 경로는 인간의 계통이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침팬지와 보노보로 분화된 이후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그중 하나는 이미 우리 앞에 있다. 이 책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 아프리카에서 시작해 전 세계로 퍼져나간 최초의 인간을 다루고 있다. (p. 12) 이후 이들에게 최대의 적은 가장 위험한 동반자이자 효과적인 무기가 되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역사의 흐름에 거듭 영향을 끼쳐왔던 치명적인 병원체였다. 21세기에 인간이 이 재앙을 극복했다는 확신을 얻을 때까지, 더 많은 것들을 깨달을 때까지 말이다. 인간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며, 어떤 것도 주어진 대로 취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을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다. (p. 13) 지금 우리는 정상에 있지만 언제 추락할지 모른다. 무엇이 우리를 정상까지 인도했을까? 문명 창조의 주인공이 다른 유인원이 아니고 우리 인간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시작부터 특별했던 고고유전학 연구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p. 14) -서문 中-

독일의 고인류 DNA연구자 와 독일의 저널리스트가 공동으로 쓴 이 책은 앞서 이 둘이 펴낸 책 <호모 에렉투스의 유전자 여행>과도 닿아 있다. <호모 에렉투스의 여행>이란 책을 읽으며 고인류학을 통해 '난민'문제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신선하고도 설득력 있게 다가왔었더랬다. 그후 코로나팬데믹 시대를 거치며 이번엔 '호모 히브리스'라는 메세지로 책을 낸 것이다. 전작과 비슷하게 내용은 과학으로 가득하지만 핵심은 사회적으로 심플하다.

현생인류는 최소 5000년 동안 유럽에서 네안데르탈인과 함께 살다가, 현생 인류가 유럽 대륙을 차지한 것이다. (p. 50)

네안데르탈인에게는 시신을 눕히거나, 앉히거나, 함께 매장된 다른 사람 쪽을 향하게 하는 등 특정한 방식으로 시신을 매장한 무덤이 없지만, 크로마뇽인에게는 많다. 오늘날 고고유전학자와 고고학자가 연구하고 있는 네안데르탈인의 뼈는 대부분 뼈의 주인이 죽은 후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가 하이에나와 같은 청소부 동물들에게 뜯어 먹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발굴물이다. 이것은 우리 조상들이 주변 사람들을 매장함으로써 모면하려고 했던 광경이었다. (p. 60)

현생인류는 지금으로부터 4만 년 전에 세계를 정복하고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p. 62)

'인간은 아프리카에서 처음 직립보행을 배우고, 고성능 뇌를 개발하고, 문화 기술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변화는 몇 년 전까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생각했던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거대한 대륙 전체에 흩어져 나타났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인종의 용광로에서 다양한 인간의 계통이 혼합되어,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된 아프리카인으로 통합되었다. (p. 66)' 고유전학 관련 책을 읽을 때마다 놀라운 것이 내가 배웠던 과학지식이 잘못 증명된 지식이었었다는 점이다. 수십년 사이에 새로이 밝혀진 사실들이 너무나 많았다. 인류의 발달 관련해서 가장 널리 잘못 알려진 상식이 아마도 직립보행과 연결지은 한 그림일 것 같다. 인류는 단순하게 직선적으로 계단식으로 진화해오지 않았다. 인간의 계통도는 아주 다양한 가지를 갖는 복잡하고도 동시적인 공존의 시대를 알려준다. 진화의 상식적인 그림은 바뀌어야 한다.


약 200만 년 전에 드디어 호모 에렉투스가 나타났다. 그들의 등장은 인간을 처음 유라시아로 이끈 진화적 도약이었다. 이들의 직계 조상은 일반적으로 직립보행을 하지 않았던 반면, 호모 에렉투스는 두 다리로 멀리까지 갈 수 있었다. 식단의 대부분이 고기나 짐승의 사체였기 때문에 호모 에렉투스가 뛰어난 사냥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할 필요가 없다. 두 다리로 걷는 것만큼 효율적인 보행법은 없었고, 호모 에렉투스가 장거리 달리기에 적응하도록 진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몰이사냥 기술을 습득했기 때문이다. (p. 84) 오랜 시간이 흐르고 이들의 시대도 저물었다. 유라시아에는 현생인류처럼 아프리카의 호모 에렉투스의 계통에서 분화된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만 남았다. 이 시기에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현생인류, '이성을 가진' 호모 사피엔스의 존재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몰랐다. (p. 85)

인간을 인간이게 한 것으로 '뇌'의 발달이니 '바늘'을 비롯한 도구의 사용이니 '언어'이니 여러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어쩌면 '몰이사냥'기술 인 건 아닐까 싶다. 호모종이 '몰이사냥'을 시작하면서 호모종이 출몰한 지역에선 대형동물들이 멸종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호모종은 세력을 불려나갔다.

다양한 인류 종이 공존하던 시대에 왜 우리 조상들은 점점 북쪽으로 밀려났을까? 네안데르탈인들에게 남쪽 지역을 정복하겠다는 야망이 정말 없었을까? 진화의 잣대로 판단할 때 현생인류는 아주 짧은 기간에 힘들이지 않고 아프리카의 사바나에서 유라시아의 스텝 지대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반면 이 수십만 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네안데르탈인들이 자신들이 살던 곳과 다른 생활환경에 적응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p. 128) 현생인류는 더 온화한 기후와 생존 기회가 더 많았던 남쪽에서 더 많은 것을 채워 나갔다. 북쪽으로 이동해 네안데르탈인과 혼형을 했던 현생인류는 자연선택의 이점도 함께 물려받았다. (p. 130) 과거에 보장받았던 생존, 극한 환경적 조건에 대한 유전자 적응 하나만으로는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없었다. 인간의 문화가 생물학적 특성을 이긴 것이다. 현생인류가 유라시아 대륙 구석까지 진출하면서 주로 매머드 스텝 지대에 머물렀던 네안데르탈인에게 남은 선택지는 후퇴였다. (p. 131)

인류의 진화라고 해서 고고유전학적 연구만 들여다봐서는 곤란하다. 지구의 생태환경은 꾸준히 변화해 왔고 기후는 격변을 거듭해 왔다. 이러한 환경적 요인인 진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3만9000년 전에 찾아온 자연 재해는 오랜 방어전에 지친 네안데르탈인에게 결정타를 날린 사건이었다. (p. 131)' 대규모의 화산폭발은 긴 시간 광활한 지역의 기후를 변화시켰다. 환경에서 살아남고 환경을 이용하는 종이 살아남기 시작했다.

호모 사피엔스는 숨 가쁜 속도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들은 다른 모든 동물들의 생물학적 특성을 무력화했기 때문이다. 이제 막 개발된 사냥과 살인 기술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더 이상 수많은 생물 가운데 하나가 아닌,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효율적으로 일하는 킬러로 등극했다. (p. 133)

하지만 이 때에도 호모종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단일종이었던 것은 아니다. 인류 진화의 역사에서 호모 사피엔스만 남게 된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호모종은 다양하게 공존해왔다. 하지만 '그들이 가는 곳마다 모든 거대 동물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이것이 바로 동물권에서 절대 남획을 하지 않는 다른 인류 종들과 우리 조상들의 차이다. 매머드는 네안데르탈인과 공존하며 수십만 년 후에도 안정적인 개체 수를 꾸준히 유지했고, 네안데르탈인은 하이에나를 보며 한 번도 스스로가 먹이사슬에서 사라질 거라는 걱정을 하지 않았다. (p. 133)' 호모 사피엔스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네안데르탈인이 멸종됐고 매머드를 비롯한 대형동물들이 하나둘 멸종해갔다. 인류진화의 역사는 어쩌면 킬러본능의 발달이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안데르탈인과 달리 힘든 시기를 버티기 위한 카니발리즘을 금기시했 (p. 136)'던 호모 사피엔스의 문화는 아이러니하다. 전쟁으로 수많은 목숨이 죽어나가는 걸 보면 이젠 뭐 그런 카니발리즘 금기도 사라진 것 같지만..

정글은 수렵·채집인에게 결코 좋은 장소가 아니다. 이것은 호모 에렉투스의 조상들이 우림에서 도망쳐 나와 고개를 쭉 빼고 아프리카 스텝 지대를 기웃거리며, 큰 뇌를 가진 열정적인 육식 동물이 되어야 했던 이유다. 원시림은 제아무리 민첩한 수렵인이라 해도 앞이 보이지 않는 데다 이동의 자유도 없었고, 무엇보다 창·작살·활·화살로 원거리의 짐승을 찔러 죽이기에 이상적인 조건이 아니었다. 반면 원시림에서 잠재적인 먹잇감들은 몸을 숨길 기회가 많았다. 이곳에서 몰이사냥은 먹히지 않는 기술이었던 것이다. (p. 152)

호모 사피엔스는 몰이사냥 말고도 다른 기술을 익혔다. 이또한 다른 호모종이 멸종해 나갈때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였다. '수렵·채집 시대는 이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p. 179)' 농경의 시대가 열렸다. '인류가 농경생활을 했다는 초기 증거는 주로 약 1만1000년 전 아나톨리아의 괴베클리테페에서 발견되었다. (p. 185)' '아나톨리아에서 시작해 이곳에서 약 8000년 전 신석기인들이 확산되었다. (p. 190)' '이들의 세력이 팽창하면서 수렵·채집인의 어두운 피부색은 점점 이주민들의 밝은 피부색에 자리를 내주고 영원히 사라졌다. (p. 191)' 밝은 피부색은 여러 차례의 돌연변이로 인해 생겼다고 한다. 인류는 어차피 모두 다 호모사피엔종 이다. 단 하나의 유일한 종이면서 DNA로도 큰 차이가 없는 종이 단순히 피부색으로 차별을 한다는게 어찌보면 참 무식한 판단이 아닐까 싶다.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의 신석기 혁명의 특징은 우월한 농경민에게서 시작된 이주와 축출 움직임이었다. 아나톨리아인들은 이 방식으로 유럽, 근동지방, 남아프리카 일부 지역의 유전적 특성을 형성했다. 이란의 신석기인들은 동쪽으로, 아마도 멀리는 인도까지, 그리고 아시아의 스텝지대로 전진했다. 오늘날 반투 유전자는 남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지역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의 농경민들은 거대한 제국의 모든 비옥한 평야로 퍼져나갔다. 빙하기 말부터 세계의 다른 지역과 고립되어 있던 아메리카의 신석기 혁명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곳의 신석기 혁명은 이주한 농경민의 우세를 암시하는 유전자 이동과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원주민의 살아 있는 후손들은 약 1만2000년 전 이곳에 살았던 이들과 유전적으로 동일하다. (p. 204)

유라시아에서 이주와 축출과 살상이 난무하며 횡적으로 퍼져나갈때 아메리카 대륙에선 종적으로 그런 이주와 축줄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좀저 친자연적이고 평등적이고 평화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상식은 참 변해야 할 게 많다. 여하튼 인간은 본격적으로 '욕망'을 분출하기 시작한다. 정복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식민화의 역사는 DNA에도 새겨져 있었다. 원주민 남성은 자식을 낳을 기회를 박탈당하며 사라져갔고 원주민 여성은 정복자들의 혼혈자식을 낳으면서 인류의 DNA풀은 더 줄어들기 시작한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다 다른 것 같지만 DNA적으로 봤을때 인류는 한뿌리다. 그래서 전염병에 취약한 것이다. 다른 종과의 결합으로 더이상 진화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팬데믹은 새삼스레 이것을 알려준 것이다.

지금까지 박테리아가 원인인 거의 모든 감염병은 고고유전학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엇다. 반면 바이러스는 재구성이 거의 불가능하다. 유전물질이 DNA가 아닌, 그보다 훨씬 불안정한 RNA 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p. 280) 현재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에피데믹과 팬데믹의 정점에 대해서만 확실히 알고 있다. 전염병은 덥고 습한 지역에서 많이 발생한다. 이런 곳은 병원체들이 활동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지만 쉽게 분해되기 때문에 고고유전학자들이 흔적을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p. 281)

인류를 속절없이 무너뜨린 자연의 위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무지하게도 인간은 죽음을 가져오는 질병과 유행병들을 자신들이 창조하고 상상한 존재들, 즉 신의 형벌로 이해했다. 인간은 죽은 자를 매장하고 저세상으로 부장품을 보내는 인류 최초의 문화에서 이미 다음과 같은 깨달음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했다. 인간도 자연 순환의 일부이자, 환경의 혜택에 의존하는 동물 중 하나이며, 최악의 경우 보이지 않는 적들로 인해 죽을 수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깨달음 말이다. (p. 290)

그래서 저자는 '20세기는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히브리스로 만들었다. (p. 292)' 로 말한다. 하지만 '이제 지구의 한계가 인간의 앞에 놓여 있기 때문에 진화의 특성으로는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팽창, 영원한 진보는 인간에게 더 이상 가능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영원한 진보는 인간에게 더 이상 가능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영리한 종이기 때문에 이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깨달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p. 292)' 코로나팬데믹으로 인류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인간의 자연적 진화는 오래전에 끝났다. 인류는 하나의 종이다. 그 하나의 종이 정말 호모 히브리스가 된다면 멸종의 길은 앞당겨질 것이다. 그러니 호모 사피엔스로서 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인간과 자연 나아가 지구와의 공존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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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사람들 - 신과 인간의 서사를 만든 첫째성경 인물 열전 EBS CLASS ⓔ
주원준 지음 / EBS BOOKS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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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고전이자 서양 예술의 원형

구약성경 속 인물과 서사에 대한 현대적 고찰

서양고전읽기를 순차적으로 하게 됐을때 수메르 신화에 대한 책들을 읽으며 새로운 역사를 배웠다. 고대그리스 나 고대이집트 이전에 수메르가 있었고 성경 이전에 신화가 있었다. 김산해님의 수메르 신화책은 정말 압권이었는데 함께 읽은 참고도서중 하나가 주원준님의 <구약성경과 신들> 이었다. 학자입장에서는 중립적일수 있다쳐도 종교인의 입장에서 중립적으로 쓰려 노력한 책이 있다는게 놀라웠었고 인상적이었다. 이 드물고 귀한 관점에서의 책이 새로이 나왔다니 관심up 기대upup

요즘은 새것을 자랑한다. 시계든 구두든 오래 쓰지 않는다. 다들 흰머리를 염색하고 어려 보인다는 말에 반색한다. 그래서 '옛 약속(구약)'은 '새 약속(신약)'보다 열등하거나 심지어 대체되어야 한다는 느낌이 확산되었다. 옛 약속이 있어야 새 약속이 있는 것이고 옛 약속은 새 약속만큼 소중한 것이라는 '균형 잡힌 느낌'은 교회 안팎에서 무너져 내렸다. 구약성경이 '옛 약속의 경전'이기에 낡고 해진 약속의 책으로 다가온다면, 이 이름을 재고해야 마땅하다. (p. 5)

그래서 저자는 구약성경대신 '첫째성경'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렇다고 이 용어를 만든 사람이 저자인 것은 아니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가톨릭 구약학계에서도 저자와 같은 생각으로 '첫째성경'이라는 용어를 제안한 학자가 있었고 일부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첫째성경은 고대근동 세계의 문학이었다. 한국의 대학과 교회에서 아직도 고대근동을 거의 가르치지 않는 사실은 무척 안타깝다. (p. 7)

우리나라에는 교회가 참 많다. 그에 비해 성당은 좀 적은 것도 같은데... 여튼 서양에서는 교회는 그냥 교회이지 성당과 교회를 구분짓지 않고 부른다. 저자가톨릭계이지만 구분없이 교회는 그냥 교회라고 부른다. 어느쪽 교회이든 간에 바탕은 성경일 것이다. 하지만 저자 말마따나 우리나라 교회가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 그 배경이 된 역사를 어느정도나 공부했는지 아니 공부한적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배경지식 없는채 글줄만 읽는 것이 과연 얼마나 성경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할수 있는 것인지도.

EBS의 초대로 교회의 벽을 넘어 세상 사람들과 만날 기회를 얻었다. 2020년 겨울부터 방영된 EBS클래식e의 <구약의 사람들>은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이 책에는 방송에서 설명한 것 외에 다른 강연 내용도 많이 들어있다.

첫째성경이 전하는 전복의 서사는 내가 묵상하는 순교자의 영성이다. (p. 9)

이 책은 저자가 EBS방송에서 진행했던 강연을 바탕으로 관련한 다른 내용까지 첨부하여 묶은 책이다. 역사와 종교에 관심있는 사람이었다면 공부해야 했을 내용들이었으나 저자가 공부한 내용을 우리는 그저 쉽게 읽기만 하면 된다. 게다가 더 공부하고 싶은 사람을 위해 참고도서들도 여럿 알려주고 있다. 참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이 책의 서언에서 가장 눈에 띄는 단어는 '전복의 서사' 라는 표현이다. 구약의 인물들을 현대적으로 해석해준 책인데 '전복'이라고?! 언뜻 어울리지 않아보일 법한 이 표현이 이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새삼 놀라게 된다. 구약이 이렇게 전복적이었나! 종교가 있든없든 성경을 알든모르든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인물들에 대해 새로운 해석이 펼쳐진다. 시작은 물론 아담부터다. 그리고 마지막은 욥 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이 이야기는 사실 성당이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성경을 유심히 읽어보지 않았다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많다. (p. 16)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원죄 이야기, 이 첫번째 이야기부터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다니 흥미롭지 않은가?!

첫째성경의 첫머리는 철학책이나 과학책처럼 논리적으로 앞뒤가 딱 맞는 구성으로 짜여 있지 않다. 세부적인 항목에서는 충돌하는 서술도 꽤 많고 시각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등 자유로운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의미의 긴장을 일으키는 곳이 많다. 논리적 비약이나 생략도 적지 않다. 이런 충돌과 생략과 비약은 성경의 약점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빈구석'이야말로 첫째성경이 지닌 가장 위대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p. 17)

성경의 빈구석은 약점도 아니고 실수도 아니다. 오히려 이런 빈공간이야말로 신이 우리를 초대하는 자리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의 상상력과 성찰이 꽃피우기 때문이다. (p. 19)

'전복의 서사'는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전복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해석할 때 가능한 것이다. 저자의 관점은 신선하고 학문적으로도 깊이가 있다. 뭐랄까... 성경을 제대로 읽은 아우라가 느껴진달까. 저자는 '신의 초대'를 기껍게 맞이했고 풍부하게 즐기고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어한다.

'고대근동 신화의 병행 요소'를 서로 비교하면서 연구하는 일은 흥미롭다. (중략) 이렇게 고대근동 신화와 비교해보면 창세기 이야기의 독특한 점이 드러나지 않을까? 우선 창세기 1~11장에는 다른 신화에 흔하게 등장하는 영웅, 반신적 영웅, 초인적 존재, 괴수 등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첫째성경은 전반적으로 그런 존재들에 대해 놀라우리만큼 무관심하다. 이 점이 가장 눈에 띄는 차이다. (p. 24)

사실 성경에는 그 이전에 있었던 신화들과 비슷한 이야기들이 상당히 많다. 세상을 창조하는 이야기부터 인간을 만들고 그 인간들이 겪어내는 일들까지 아주 새로운 이야기는 거의 없다시피한 것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저자는 과거의 신화들을 조금 변형하여 묶은 에피소드들 처럼 읽혀질 수도 있을 성경의 이야기들이 어떤 차별성을 갖는지 명확이 짚어낸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구약을 '전복의 서사'로 읽게 만들수 있었다.

인간은 신이 아니고 신은 인간이 아니다. 그래서 조금 안심도 된다. 인간과 신이 다르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같다는 말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 반신적 존재란 없다. 그래서 창세기는 보편과 평등에 대한 책이다. (p. 27)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를 증명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창세기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다. 오직 '지금 여기'에 관심을 둔다. 적어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우리 조상이 노동하고 소통하며 그렇게 몸으로 부대끼며 살던 세상에는 그런 존재는 없다고 말한다. 창세기는 인간의 보편적 평등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간다. '모든 인간은 죄인의 자손이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기에 한계도 뚜렷이 같다.' 이러한 인식은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끈다. (p. 28)

'인간은 신의 은총을 받아야 살 수 있다는 것 (p. 28)' 이 창세기의 가장 위대한 가르침이라고 하면저 저자는 구약에 등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성 안에서 평안히 살던 사람들이 아니라 '성 밖의 가난한 백성 (p. 29)' 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첫째성경의 수많은 이야기에서 인간은 계속 도전하고 욕망하고 죄를 짓는다. 그리고 신은 인간의 죄를 꾸짖기도 타이르기도 분노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인간의 죄를 용서한다. (p. 32)

무슨 일을 하든 가난한 백성의 곁에 신이 등장하고 어쨌든 살길을 열어준다는 사실은 신을 의지하며 살았던 백성에게는 희망이자 축복이었을 것이다. (p. 33)

그렇다. '희망' 이었다. 구약에서의 약속은 '희망'이었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부터 카인과 아벨, 노아, 아브라함, 요셈, 모세, 삼손, 다윗, 유딧, 엘리야, 예레미야, 요나, 욥 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물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은 결국 어떤 일이 생겨도 인간이 살 수 있도록 마음을 먹게 해주는 그런 일화들이었다. '용서하는 신이 우리와 동반한다는 점은 큰 위로이고 희망이다. (p. 35)' 라는 저자의 말이 조금씩 이해가 되도록 해주는 책이었기에 종교가 없는 내가 읽어도 아무런 저항감 없이 저자의 문장이 와닿았다. 그랬구나...하면서.

창세기 원역사 이야기에는 '반복되는 구조'가 있다. 이야기의 처음은 늘 좋다. 신이 마련한 무대, 창조계 자체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이 발단이다. 아담과 하와가 금기의 열매를 따 먹고,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바벨탑을 쌓아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온 세상이 타락하는 등의 사건이 발생한다. 그때마다 신이 나타나서 가르침을 준다. 신의 반응은 다양하다.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훈계하고, 이따금 추방이나 홍수 같은 큰 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신이 용서함으로써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하느님은 한결같다. 죄인에게 다시 살길을 열어준다. 창세기의 시작은 이렇게 신의 자비와 용서로 마무리되는 이야기들로 빼곡히 채웠다. (p. 47)

죄의 사슬, 죄의 연쇄 작용을 끊는 것이 신의 뜻이고 용서의 본질이다. 복수는 인간적일지 모르지만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용서는 신적인 것이고 그만큼 어렵지만 훨씬 더 진보한 것이다. (p. 59)

나는 종교가 없지만 무신론자는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불가지론자라고 해야하나... 신이든 무엇이든 영적인 무언가가 있다고는 생각한다. 인간과 다른 인간보다 대단한 어떤 존재가 있다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해되지 않아 믿지 못해 종교를 갖지 못하는 내게 일단 믿으면 다 이해된다는 그동안 만난 수없이 나를 전도하려 했던 이들의 말에선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러나 저자의 문장은 달랐다. 쏙쏙 이해가 되고 종교가 새롭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내가 내일 당장 교회에 나갈 것 같진 않지만.

고대근동 문헌을 읽고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고대근동의 많은 신화들을 원문으로 읽고 첫째성경을 히브리어로 읽으면 어떤 느낌이고 어떤 차이를 느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한두 가지를 꼽기는 힘들지만 히브리인들의 첫째성경이 유독 의로움을 강조한다는 점은 빼놓을 수 없다. 첫째성경과 신약성경은 의로움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의로움을 일관되게 강조하는 문헌은 찾아보기 힘들다. (p. 76)

첫째성경의 상당 부분을 공유하는 그리스도교, 유다교, 이슬람교가 개인과 공동체의 도덕성과 정의를 중시하는 근원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의로움을 추구하는 열정은 오랫동안 유교 문화권에서 형성된 우리 민족의 심성과도 잘 통한다. (p. 81)

뭐든 원론적인 핵심이 나쁜 것이 오래 전해져올리는 없지... 원래 뜻이야 좋았겠지... 문제는 그것이 지켜졌는가 혹은 지켜지고 있는가 랄까... 그 '의로움'은 다 어디로 갔을까;;; 혹시 성경을 저자처럼 제대로 깊이있게 읽지 않아서 이렇게 된 게 아닐까...;;;

고대근동의 수많은 신들 가운데 성 밖의 작은 신이었던 야훼만이 현대로 전승되었고 다른 신들은 모두 잊혔다. 사실 고대근동 문명은 거의 망각되었다. (중략) 하지만 야훼는 성 밖을 떠돌던 신들은 물론이고 고대근동 전체 신들 중에서 유일하게 후대로 전승된 신이고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을 통해 전세계로 확산되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인류 종교사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거대한 신전에 정주하며 큰 백성을 거느리던 신들은 전부 잊혔지만 변방을 떠돌던 작은 백성을 선택한 신만이 후대에 크게 확산된 것이다. 작고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고 그들과 동행한 것이 야훼와 예수의 공통점이다. 이 점은 깊이 새겨볼 만하다. (p. 103)

왕이 섬기고 제국이 모시던 거대한 신들은 모두 사멸되었다. 하지만 성 밖에서 떠돌던 한 가정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작은 신은 오래도록 전승되어 남았다. 게다가 그 가정의 이야기에서 장자의 권리는 박탈되고 힘없는 사람이 신에게 선택되곤 했다. '이런 면에서 첫째성경은 '전복의 시선'을 드러낸다. 세상의 시각을 뒤집어야 신앙의 논리가 이해되는 것이다. (p. 119)' 저자의 말을 읽으면 읽을수록 묘하게 성경이 새롭게 보인다.

성경은 밖과 아래로 시선을 향하라고 말한다. 위와 중앙만을 볼 것이 아니라 작은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소외된 변방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전복의 시선을 권한다. (p. 141) 사회에서 주류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 써내려가는 역사가 있다. 지금은 보잘것없고 초라해 보이지만 신은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실 것이다. 그건 인간이 아니라 신이 허락하는 것이다. (p. 142)

성경이 신을 믿고 신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라는 말만 하는 책인줄 알았더니 이토록 진보적 시각을 보여주고 있는 책이었단 말인가.

'우리는 흔히 성경에서 전하고 있는 메시지를 신에게 의존하고 순종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기 쉽다. 이것이 종교가 매력을 잃어가는 원인 중 하나다. (p. 206)' 라는 말은 다른 사람이 했으면 눈길한번 주지도 않았을 텐데 저자의 문장을 읽다보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 진다. 종교가 없는 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 정도다. 그러게... 다들 성경 좀 공부하지... 싶고.

사람들은 종교가 무슨 말을 하느냐보다 공동체와 이 사회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하는지를 중요하게 바라보고 있다. 첫째성경에는 이런 전복적인 여성 영웅의 계보가 있다. 먼 옛날 창세기의 할머니들이 그러했고, 모세 곁에서 독특한 역할을 수행한 미르얌도 그러했다. 예리고 성에 살았던 창녀 라합이나 페르시아에 포로로 잡혀가 왕비가 된 에스테르도 빠질 수 없다. (p. 230) 그런 독특한 방법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새롭게 만든 여성 전승의 총합이자 절정이 바로 '성모 마리아'라고 할 수 있다. (p. 232)

놀랍지 않은가? 고대엔 이스라엘 말고도 여성이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는 것이 당연했고 성경 속 여인들도 가부장의 권위에 눌리고 신의 선택에 늘 비껴나는 존재들인줄 알았는데 여성 영웅의 계보가 있고 그 절정이 '성모 마리아'라니. 이런 시각 정말 신선하다.

신선한 시각이지만 결코 저자의 주관적이라고 치부할 만한 그런 주장은 아니다. 저자의 고대근동에 대한 학문적 바탕은 책을 읽는 내내 탄탄하게 저자의 해석을 뒷받침해준다. 특히나 성경의 탄생에 있어 '일리말쿠' 에 대한 내용은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꼭 알아두었으면 싶은 부분이었다. 하지만 '고대근동 세계에 대한 문맹과 같은 한국 신학계의 처지가 안타깝다. (p. 248)' 라는 저자의 개탄이 비신자인 나조차 알 지경인데 누가 알겠나 그런 중요한 내용들을;;;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지닌 독특함은 저항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에 있다. (p. 289)

정권과 관련된 예언을 한다는 점은 비슷하지만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말라키서 같은 문서에 기록된 예언자들이 저항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은 독특하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는 왕권을 정당화하려는 왕권 신학으로서 예언 관행이 문서로 남았다면, 이스라엘은 왕권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예언이 문서로 남았다. (p. 301)

그런데 왜 이스라엘에서는 정권에 순종한 예언자와 사제의 책은 없어지고 정권을 비판한 저항 세력의 책만 남았을까? 이스라엘에서 저항 예언자들의 기록이 살아남았던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나라가 망했기 때문이다. 나라가 망했기 때문에 주류 세력이었던 왕권 신학자들의 기록이 밀려나거나 소실되었고, 그 반대편에 있던 비판자들과 저항했던 자들의 기록이 살아남을 여지가 생겼다. 게다가 시기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p. 304) 다시말해 망국과 유배를 통해 인류사에서 거의 유일한 '기록의 역전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주류의 기록이 지워지고 비주류의 기록이 대접받게 되었다. (p. 305) 이런 면에서 첫째성경은 인류사에서 유일한 전복의 역사를 담고 있는 책이리라. (p. 307)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 절묘한 역사가 일어났다. (p. 309)

저자의 말마따나 참으로 절묘한 역사였다. 성경이 탄생하고 전승되고 현대에 이토록 광범위하게 퍼진 배경이 그 '전복성'에 있었다니. 읽으면 읽을수록 너무 기묘하게 다가오면서도 너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wow 대단한대!

어찌보면 종교인의 삶이란 그런 예언자의 삶이다. 세상의 질서는 자본과 권력을 향해 짜여져 있다. 중심을 향하고 더 높은 곳을 향해 경쟁하는 것이 세속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지만 종교인은 큰 사랑과 자비의 마음으로 세상의 어둡고 아픈 곳을 향해야 한다. 자본과 권력이 그늘을 드리운 곳, 소외된 곳, 주변부와 아래로 시선을 둬야 한다. 그런 곳에서 우리가 할 일을 숙고하고 나눠야 하는 사람들이다. 종교인들이 가치 있게 내세우는 나눔, 사랑, 자비, 정의는 결국 세상과 맞서는 일이다. (p. 324)

그런 종교인이 한 명만 내 곁에 있었더라도 나는 바로 따라갔을 텐데....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아무래도 죽기전까지 한 명도 못날것 같다. 단 한 명도.

욥기는 이런 면에서 종교인, 지식인, 지도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를 보여준다. (p. 341) 욥기를 읽으면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희생자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과정을 보는 것 같아 일종의 페이소스마저 느끼게 된다. (p. 343) 교회는 신의 무한한 은총을 베풀고 확산하는 곳으로서 '은총의 촉진자'역할을 해야 마땅하다. 공감하고 위로하고 치유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곳이다. 하지만 교회가 신의 사랑을 얻기 위한 통행세를 걷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은 특정 교파에 돈이나 서비스를 제공해야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p. 345) 세 친구는 욥에게 공감과 위로의 말을 전하려고 왔지만 평가하고 판단하려는 습성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자신들이 섬기는 신, 자신들의 목숨과도 같은 믿음이 조금이라도 훼손되는 일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신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판단과 단죄는 오로지 신에게 주어진 역할이다. (p. 346) 욥이 옳았고 세 친구는 틀렸다. 신은 그렇게 딱 도장을 찍어주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주신 하느님은 인간들에게 외면받던 의인을 보증해주었다. (p. 353)

성경의 다른 에피소드들에 비해 욥기에 대해선 잘 몰랐는데 저자의 설명을 읽고나니 이해가 된다. 성경을 읽은 적이 없는데 성경을 다 읽은 기분이랄까. ㅎㅎ

종교에 관심이 있고 성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마 새로운 눈을 뜨게 될 것이다. 참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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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반쪽사 - 과학은 어떻게 패권을 움직이고 불편한 역사를 만들었는가
제임스 포스켓 지음, 김아림 옮김 / 블랙피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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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를 전체역사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익한 책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제목 그대로 반쪽짜리만 알던 진실에 대해 마저 배울 수 있어 좋았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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