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사람들 - 신과 인간의 서사를 만든 첫째성경 인물 열전 EBS CLASS ⓔ
주원준 지음 / EBS BOOKS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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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고전이자 서양 예술의 원형

구약성경 속 인물과 서사에 대한 현대적 고찰

서양고전읽기를 순차적으로 하게 됐을때 수메르 신화에 대한 책들을 읽으며 새로운 역사를 배웠다. 고대그리스 나 고대이집트 이전에 수메르가 있었고 성경 이전에 신화가 있었다. 김산해님의 수메르 신화책은 정말 압권이었는데 함께 읽은 참고도서중 하나가 주원준님의 <구약성경과 신들> 이었다. 학자입장에서는 중립적일수 있다쳐도 종교인의 입장에서 중립적으로 쓰려 노력한 책이 있다는게 놀라웠었고 인상적이었다. 이 드물고 귀한 관점에서의 책이 새로이 나왔다니 관심up 기대upup

요즘은 새것을 자랑한다. 시계든 구두든 오래 쓰지 않는다. 다들 흰머리를 염색하고 어려 보인다는 말에 반색한다. 그래서 '옛 약속(구약)'은 '새 약속(신약)'보다 열등하거나 심지어 대체되어야 한다는 느낌이 확산되었다. 옛 약속이 있어야 새 약속이 있는 것이고 옛 약속은 새 약속만큼 소중한 것이라는 '균형 잡힌 느낌'은 교회 안팎에서 무너져 내렸다. 구약성경이 '옛 약속의 경전'이기에 낡고 해진 약속의 책으로 다가온다면, 이 이름을 재고해야 마땅하다. (p. 5)

그래서 저자는 구약성경대신 '첫째성경'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렇다고 이 용어를 만든 사람이 저자인 것은 아니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가톨릭 구약학계에서도 저자와 같은 생각으로 '첫째성경'이라는 용어를 제안한 학자가 있었고 일부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첫째성경은 고대근동 세계의 문학이었다. 한국의 대학과 교회에서 아직도 고대근동을 거의 가르치지 않는 사실은 무척 안타깝다. (p. 7)

우리나라에는 교회가 참 많다. 그에 비해 성당은 좀 적은 것도 같은데... 여튼 서양에서는 교회는 그냥 교회이지 성당과 교회를 구분짓지 않고 부른다. 저자가톨릭계이지만 구분없이 교회는 그냥 교회라고 부른다. 어느쪽 교회이든 간에 바탕은 성경일 것이다. 하지만 저자 말마따나 우리나라 교회가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 그 배경이 된 역사를 어느정도나 공부했는지 아니 공부한적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배경지식 없는채 글줄만 읽는 것이 과연 얼마나 성경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할수 있는 것인지도.

EBS의 초대로 교회의 벽을 넘어 세상 사람들과 만날 기회를 얻었다. 2020년 겨울부터 방영된 EBS클래식e의 <구약의 사람들>은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이 책에는 방송에서 설명한 것 외에 다른 강연 내용도 많이 들어있다.

첫째성경이 전하는 전복의 서사는 내가 묵상하는 순교자의 영성이다. (p. 9)

이 책은 저자가 EBS방송에서 진행했던 강연을 바탕으로 관련한 다른 내용까지 첨부하여 묶은 책이다. 역사와 종교에 관심있는 사람이었다면 공부해야 했을 내용들이었으나 저자가 공부한 내용을 우리는 그저 쉽게 읽기만 하면 된다. 게다가 더 공부하고 싶은 사람을 위해 참고도서들도 여럿 알려주고 있다. 참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이 책의 서언에서 가장 눈에 띄는 단어는 '전복의 서사' 라는 표현이다. 구약의 인물들을 현대적으로 해석해준 책인데 '전복'이라고?! 언뜻 어울리지 않아보일 법한 이 표현이 이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새삼 놀라게 된다. 구약이 이렇게 전복적이었나! 종교가 있든없든 성경을 알든모르든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인물들에 대해 새로운 해석이 펼쳐진다. 시작은 물론 아담부터다. 그리고 마지막은 욥 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이 이야기는 사실 성당이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성경을 유심히 읽어보지 않았다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많다. (p. 16)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원죄 이야기, 이 첫번째 이야기부터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다니 흥미롭지 않은가?!

첫째성경의 첫머리는 철학책이나 과학책처럼 논리적으로 앞뒤가 딱 맞는 구성으로 짜여 있지 않다. 세부적인 항목에서는 충돌하는 서술도 꽤 많고 시각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등 자유로운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의미의 긴장을 일으키는 곳이 많다. 논리적 비약이나 생략도 적지 않다. 이런 충돌과 생략과 비약은 성경의 약점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빈구석'이야말로 첫째성경이 지닌 가장 위대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p. 17)

성경의 빈구석은 약점도 아니고 실수도 아니다. 오히려 이런 빈공간이야말로 신이 우리를 초대하는 자리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의 상상력과 성찰이 꽃피우기 때문이다. (p. 19)

'전복의 서사'는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전복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해석할 때 가능한 것이다. 저자의 관점은 신선하고 학문적으로도 깊이가 있다. 뭐랄까... 성경을 제대로 읽은 아우라가 느껴진달까. 저자는 '신의 초대'를 기껍게 맞이했고 풍부하게 즐기고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어한다.

'고대근동 신화의 병행 요소'를 서로 비교하면서 연구하는 일은 흥미롭다. (중략) 이렇게 고대근동 신화와 비교해보면 창세기 이야기의 독특한 점이 드러나지 않을까? 우선 창세기 1~11장에는 다른 신화에 흔하게 등장하는 영웅, 반신적 영웅, 초인적 존재, 괴수 등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첫째성경은 전반적으로 그런 존재들에 대해 놀라우리만큼 무관심하다. 이 점이 가장 눈에 띄는 차이다. (p. 24)

사실 성경에는 그 이전에 있었던 신화들과 비슷한 이야기들이 상당히 많다. 세상을 창조하는 이야기부터 인간을 만들고 그 인간들이 겪어내는 일들까지 아주 새로운 이야기는 거의 없다시피한 것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저자는 과거의 신화들을 조금 변형하여 묶은 에피소드들 처럼 읽혀질 수도 있을 성경의 이야기들이 어떤 차별성을 갖는지 명확이 짚어낸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구약을 '전복의 서사'로 읽게 만들수 있었다.

인간은 신이 아니고 신은 인간이 아니다. 그래서 조금 안심도 된다. 인간과 신이 다르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같다는 말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 반신적 존재란 없다. 그래서 창세기는 보편과 평등에 대한 책이다. (p. 27)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를 증명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창세기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다. 오직 '지금 여기'에 관심을 둔다. 적어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우리 조상이 노동하고 소통하며 그렇게 몸으로 부대끼며 살던 세상에는 그런 존재는 없다고 말한다. 창세기는 인간의 보편적 평등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간다. '모든 인간은 죄인의 자손이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기에 한계도 뚜렷이 같다.' 이러한 인식은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끈다. (p. 28)

'인간은 신의 은총을 받아야 살 수 있다는 것 (p. 28)' 이 창세기의 가장 위대한 가르침이라고 하면저 저자는 구약에 등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성 안에서 평안히 살던 사람들이 아니라 '성 밖의 가난한 백성 (p. 29)' 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첫째성경의 수많은 이야기에서 인간은 계속 도전하고 욕망하고 죄를 짓는다. 그리고 신은 인간의 죄를 꾸짖기도 타이르기도 분노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인간의 죄를 용서한다. (p. 32)

무슨 일을 하든 가난한 백성의 곁에 신이 등장하고 어쨌든 살길을 열어준다는 사실은 신을 의지하며 살았던 백성에게는 희망이자 축복이었을 것이다. (p. 33)

그렇다. '희망' 이었다. 구약에서의 약속은 '희망'이었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부터 카인과 아벨, 노아, 아브라함, 요셈, 모세, 삼손, 다윗, 유딧, 엘리야, 예레미야, 요나, 욥 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물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은 결국 어떤 일이 생겨도 인간이 살 수 있도록 마음을 먹게 해주는 그런 일화들이었다. '용서하는 신이 우리와 동반한다는 점은 큰 위로이고 희망이다. (p. 35)' 라는 저자의 말이 조금씩 이해가 되도록 해주는 책이었기에 종교가 없는 내가 읽어도 아무런 저항감 없이 저자의 문장이 와닿았다. 그랬구나...하면서.

창세기 원역사 이야기에는 '반복되는 구조'가 있다. 이야기의 처음은 늘 좋다. 신이 마련한 무대, 창조계 자체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이 발단이다. 아담과 하와가 금기의 열매를 따 먹고,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바벨탑을 쌓아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온 세상이 타락하는 등의 사건이 발생한다. 그때마다 신이 나타나서 가르침을 준다. 신의 반응은 다양하다.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훈계하고, 이따금 추방이나 홍수 같은 큰 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신이 용서함으로써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하느님은 한결같다. 죄인에게 다시 살길을 열어준다. 창세기의 시작은 이렇게 신의 자비와 용서로 마무리되는 이야기들로 빼곡히 채웠다. (p. 47)

죄의 사슬, 죄의 연쇄 작용을 끊는 것이 신의 뜻이고 용서의 본질이다. 복수는 인간적일지 모르지만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용서는 신적인 것이고 그만큼 어렵지만 훨씬 더 진보한 것이다. (p. 59)

나는 종교가 없지만 무신론자는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불가지론자라고 해야하나... 신이든 무엇이든 영적인 무언가가 있다고는 생각한다. 인간과 다른 인간보다 대단한 어떤 존재가 있다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해되지 않아 믿지 못해 종교를 갖지 못하는 내게 일단 믿으면 다 이해된다는 그동안 만난 수없이 나를 전도하려 했던 이들의 말에선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러나 저자의 문장은 달랐다. 쏙쏙 이해가 되고 종교가 새롭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내가 내일 당장 교회에 나갈 것 같진 않지만.

고대근동 문헌을 읽고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고대근동의 많은 신화들을 원문으로 읽고 첫째성경을 히브리어로 읽으면 어떤 느낌이고 어떤 차이를 느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한두 가지를 꼽기는 힘들지만 히브리인들의 첫째성경이 유독 의로움을 강조한다는 점은 빼놓을 수 없다. 첫째성경과 신약성경은 의로움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의로움을 일관되게 강조하는 문헌은 찾아보기 힘들다. (p. 76)

첫째성경의 상당 부분을 공유하는 그리스도교, 유다교, 이슬람교가 개인과 공동체의 도덕성과 정의를 중시하는 근원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의로움을 추구하는 열정은 오랫동안 유교 문화권에서 형성된 우리 민족의 심성과도 잘 통한다. (p. 81)

뭐든 원론적인 핵심이 나쁜 것이 오래 전해져올리는 없지... 원래 뜻이야 좋았겠지... 문제는 그것이 지켜졌는가 혹은 지켜지고 있는가 랄까... 그 '의로움'은 다 어디로 갔을까;;; 혹시 성경을 저자처럼 제대로 깊이있게 읽지 않아서 이렇게 된 게 아닐까...;;;

고대근동의 수많은 신들 가운데 성 밖의 작은 신이었던 야훼만이 현대로 전승되었고 다른 신들은 모두 잊혔다. 사실 고대근동 문명은 거의 망각되었다. (중략) 하지만 야훼는 성 밖을 떠돌던 신들은 물론이고 고대근동 전체 신들 중에서 유일하게 후대로 전승된 신이고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을 통해 전세계로 확산되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인류 종교사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거대한 신전에 정주하며 큰 백성을 거느리던 신들은 전부 잊혔지만 변방을 떠돌던 작은 백성을 선택한 신만이 후대에 크게 확산된 것이다. 작고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고 그들과 동행한 것이 야훼와 예수의 공통점이다. 이 점은 깊이 새겨볼 만하다. (p. 103)

왕이 섬기고 제국이 모시던 거대한 신들은 모두 사멸되었다. 하지만 성 밖에서 떠돌던 한 가정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작은 신은 오래도록 전승되어 남았다. 게다가 그 가정의 이야기에서 장자의 권리는 박탈되고 힘없는 사람이 신에게 선택되곤 했다. '이런 면에서 첫째성경은 '전복의 시선'을 드러낸다. 세상의 시각을 뒤집어야 신앙의 논리가 이해되는 것이다. (p. 119)' 저자의 말을 읽으면 읽을수록 묘하게 성경이 새롭게 보인다.

성경은 밖과 아래로 시선을 향하라고 말한다. 위와 중앙만을 볼 것이 아니라 작은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소외된 변방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전복의 시선을 권한다. (p. 141) 사회에서 주류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 써내려가는 역사가 있다. 지금은 보잘것없고 초라해 보이지만 신은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실 것이다. 그건 인간이 아니라 신이 허락하는 것이다. (p. 142)

성경이 신을 믿고 신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라는 말만 하는 책인줄 알았더니 이토록 진보적 시각을 보여주고 있는 책이었단 말인가.

'우리는 흔히 성경에서 전하고 있는 메시지를 신에게 의존하고 순종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기 쉽다. 이것이 종교가 매력을 잃어가는 원인 중 하나다. (p. 206)' 라는 말은 다른 사람이 했으면 눈길한번 주지도 않았을 텐데 저자의 문장을 읽다보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 진다. 종교가 없는 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 정도다. 그러게... 다들 성경 좀 공부하지... 싶고.

사람들은 종교가 무슨 말을 하느냐보다 공동체와 이 사회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하는지를 중요하게 바라보고 있다. 첫째성경에는 이런 전복적인 여성 영웅의 계보가 있다. 먼 옛날 창세기의 할머니들이 그러했고, 모세 곁에서 독특한 역할을 수행한 미르얌도 그러했다. 예리고 성에 살았던 창녀 라합이나 페르시아에 포로로 잡혀가 왕비가 된 에스테르도 빠질 수 없다. (p. 230) 그런 독특한 방법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새롭게 만든 여성 전승의 총합이자 절정이 바로 '성모 마리아'라고 할 수 있다. (p. 232)

놀랍지 않은가? 고대엔 이스라엘 말고도 여성이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는 것이 당연했고 성경 속 여인들도 가부장의 권위에 눌리고 신의 선택에 늘 비껴나는 존재들인줄 알았는데 여성 영웅의 계보가 있고 그 절정이 '성모 마리아'라니. 이런 시각 정말 신선하다.

신선한 시각이지만 결코 저자의 주관적이라고 치부할 만한 그런 주장은 아니다. 저자의 고대근동에 대한 학문적 바탕은 책을 읽는 내내 탄탄하게 저자의 해석을 뒷받침해준다. 특히나 성경의 탄생에 있어 '일리말쿠' 에 대한 내용은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꼭 알아두었으면 싶은 부분이었다. 하지만 '고대근동 세계에 대한 문맹과 같은 한국 신학계의 처지가 안타깝다. (p. 248)' 라는 저자의 개탄이 비신자인 나조차 알 지경인데 누가 알겠나 그런 중요한 내용들을;;;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지닌 독특함은 저항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에 있다. (p. 289)

정권과 관련된 예언을 한다는 점은 비슷하지만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말라키서 같은 문서에 기록된 예언자들이 저항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은 독특하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는 왕권을 정당화하려는 왕권 신학으로서 예언 관행이 문서로 남았다면, 이스라엘은 왕권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예언이 문서로 남았다. (p. 301)

그런데 왜 이스라엘에서는 정권에 순종한 예언자와 사제의 책은 없어지고 정권을 비판한 저항 세력의 책만 남았을까? 이스라엘에서 저항 예언자들의 기록이 살아남았던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나라가 망했기 때문이다. 나라가 망했기 때문에 주류 세력이었던 왕권 신학자들의 기록이 밀려나거나 소실되었고, 그 반대편에 있던 비판자들과 저항했던 자들의 기록이 살아남을 여지가 생겼다. 게다가 시기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p. 304) 다시말해 망국과 유배를 통해 인류사에서 거의 유일한 '기록의 역전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주류의 기록이 지워지고 비주류의 기록이 대접받게 되었다. (p. 305) 이런 면에서 첫째성경은 인류사에서 유일한 전복의 역사를 담고 있는 책이리라. (p. 307)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 절묘한 역사가 일어났다. (p. 309)

저자의 말마따나 참으로 절묘한 역사였다. 성경이 탄생하고 전승되고 현대에 이토록 광범위하게 퍼진 배경이 그 '전복성'에 있었다니. 읽으면 읽을수록 너무 기묘하게 다가오면서도 너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wow 대단한대!

어찌보면 종교인의 삶이란 그런 예언자의 삶이다. 세상의 질서는 자본과 권력을 향해 짜여져 있다. 중심을 향하고 더 높은 곳을 향해 경쟁하는 것이 세속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지만 종교인은 큰 사랑과 자비의 마음으로 세상의 어둡고 아픈 곳을 향해야 한다. 자본과 권력이 그늘을 드리운 곳, 소외된 곳, 주변부와 아래로 시선을 둬야 한다. 그런 곳에서 우리가 할 일을 숙고하고 나눠야 하는 사람들이다. 종교인들이 가치 있게 내세우는 나눔, 사랑, 자비, 정의는 결국 세상과 맞서는 일이다. (p. 324)

그런 종교인이 한 명만 내 곁에 있었더라도 나는 바로 따라갔을 텐데....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아무래도 죽기전까지 한 명도 못날것 같다. 단 한 명도.

욥기는 이런 면에서 종교인, 지식인, 지도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를 보여준다. (p. 341) 욥기를 읽으면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희생자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과정을 보는 것 같아 일종의 페이소스마저 느끼게 된다. (p. 343) 교회는 신의 무한한 은총을 베풀고 확산하는 곳으로서 '은총의 촉진자'역할을 해야 마땅하다. 공감하고 위로하고 치유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곳이다. 하지만 교회가 신의 사랑을 얻기 위한 통행세를 걷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은 특정 교파에 돈이나 서비스를 제공해야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p. 345) 세 친구는 욥에게 공감과 위로의 말을 전하려고 왔지만 평가하고 판단하려는 습성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자신들이 섬기는 신, 자신들의 목숨과도 같은 믿음이 조금이라도 훼손되는 일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신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판단과 단죄는 오로지 신에게 주어진 역할이다. (p. 346) 욥이 옳았고 세 친구는 틀렸다. 신은 그렇게 딱 도장을 찍어주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주신 하느님은 인간들에게 외면받던 의인을 보증해주었다. (p. 353)

성경의 다른 에피소드들에 비해 욥기에 대해선 잘 몰랐는데 저자의 설명을 읽고나니 이해가 된다. 성경을 읽은 적이 없는데 성경을 다 읽은 기분이랄까. ㅎㅎ

종교에 관심이 있고 성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마 새로운 눈을 뜨게 될 것이다. 참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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