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으로 읽는 조선고전담 - 역전 흥부, 당찬 춘향, 자존 길동, 꿈의 진실게임, 반전의 우리고전 읽기 내 인생에 지혜를 더하는 시간, 인생명강 시리즈 22
유광수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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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 흥부, 당찬 춘향, 자존 길동, 꿈의 진실게임, 반전의 우리고전 읽기

교훈에 갇힌 기존 고전에서 해방되는 능동적 사유의 시간

<문제적 고전 살롱 : 가족 기담> 이라는 책을 통해 저자를 처음 알게 된 이후 팬이 되었다. 그동안 내가 알았던 고전은 제대로 이해된 적이 한번도 없었음을 저자의 책을 통해 배웠다. 이후 읽은 <복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도 좋았다. 전래동화가 고전으로 탈바꿈해 다가오게 만들었다. 이번 책은 우리의 고전 중에서도 대표라 할 만한 4작품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깨닫게 해주었다. 바로, 흥부전, 춘향전, 홍길동전, 구운몽 이다. 흥미유발용으로 스포를 조금 하자면, 흥부는 한탕의 욕망이 있었고 춘향은 열녀라기 보다 자기결정권의 혁명가였으며 홍길동은 영웅이 아니었고 구운몽은 인생무상 이야기가 아니었다 랄까. ㅎㅎㅎ

이 책을 쓴 이유는 내 가슴 속의 흥분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다. 박제되다 못해 이젠 화석이 되어버릴 것만 같은 우리 고전을 원래 모습 그대로 복원해, 원래 모습 그대로 우리 가슴 속에 살아 숨 쉬도록 하는 게 목표다. 어쩌면 학교에서 배운 것과 많이 다를지도 모르겠다. [흥부전]은 우애 이야기가 아니고, [춘향전]은 열녀 이갸기가 아니란 것에 놀랄 수도 있다. [홍길동전]의 작가가 과연 허균인지도 고민해볼 문제고, 홍길동이 우리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일을 벌였단 사실을 확인하고 난감할 수도 있다. 게다가 [구운몽]이 일장춘몽 이야기가 아니란 말에 마음이 착잡해질 수도 있다. 고전을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게 만든 원흉은 그냥 그렇게 '좋고 좋은 착한 이야기예요'라고 넘어간 방조와 무관심이다. 시대적 요청과 우리의 필요에 따라 입맛에 맞게 고전을 불러내 멋대로 박제처럼 만든 게 우리 고전을 어렵고 지루하고 피곤한 짐 덩어리로 전락시켜 버렸다. 그러나 고전은 짊어져야 할 짐도 아니고 시험문제에 어렵게 출제하라고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고전에는 고전다움이 있다. 그 고전다움을 이 책을 통해 하나씩 제대로 풀어볼 생각이다. (p. 10~11) -프롤로그 中-

저자의 책에는 쾌감이 있다. 고리타분함의 대명사라고 할만한 고전이라는 분야를 너무나 재밌어 하며 연구한 사람이기에 전해져오는 진심어린 유쾌함도 있지만 무엇보다 편견을 깨부수는 시원함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전은 후대에 만들어진 이미지다. 아니 우리가 만들어낸 고정관념이다. 원래의 고전은 그렇지 않았다. 저자는 통쾌하게 그 원래다움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원래다움의 기저에는 '욕망'이 있었다. 인간은 본디 욕망의 동물 아니던가. ㅎㅎㅎ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흥부전]은 우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과 욕심, 현실과 미래, 삶과 비전에 관한 이야기다.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놀부와 흥부, 둘 다 훌륭하기도 하고 둘 다 문제가 많기도 하다'는 점이다. (p. 20)

[흥부전]은 판소리로도 불리고, 널리 읽히며 퍼진 소설이다 보니 다양한 이본이 존재한다. (p. 22)

다양한 이본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인기가 있었다는 것이기도 하고 정본의 이야기를 확실하게 걸러내기 힘들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흥부전]의 시작은 명확하다. 바로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시고, 형 놀부는 부자로 살고, 동생 흥부는 가난하게 산다는 점이다. 저자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당대 조선시대의 유산상속제도와 결혼 후 독립해 사는, 당연하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지점부터 흥부가 왜 가난해졌는가라는, 흥부의 삶의 태도 그리고 흥부의 아이들은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가 라는 의문등 [흥부전]이 이렇게 재밌었던가?싶을 이야기들이 술술 풀려나온다. 여하튼 알아두시라, 흥부도 놀부 못지 않은 욕망남이었다는 것을.


[흥부전]의 고전다움은 그런 해피엔딩 때문이 아니라 더 깊고 심오한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p. 86)

둘이 똑같다는 것, 반대로 보이지만 둘 다 동일하게 극단적으로 끝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이다. 닮은 것을 넘어 거울을 마주한 듯이 둘은 무척이나 동일하다는 사실을 [흥부전]은 냉철하게 지적한다. 그래서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p. 88)

저자는 흥부와 놀부의 새로운 이해를 깨닫게 해준다. 그동안 우리가 너무 선 아니면 악 하는 식으로 이분법적으로 판단해 온 것이 얼마나 오독이고 오해였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흥부전]은 둘 중 한 명을 고르라는 게임이 아니고, 둘 중 한 명처럼 살아야 한다는 교훈서도 아니다. [흥부전]은 놀부 흥부가 보여주는 모습을 통해 단순한 선악 판단을 넘어 두 극단적 삶과 행동, 사고와 가치가 똑같이 문제라는 사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리고 그 두 극단 사이에 무수히 많은 모습이 스펙트럽처럼 펼쳐져 있는 게 세상이며, 그 사이 어딘가에 우리 인생이 자리하고 있다고 웅변한다. 흥부 놀부가 우리이고, 그들 삶이 우리 삶이다. (p. 92)' 그렇게 [흥부전]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 세상은 어떠한지 돌아보게 한다는 저자의 말은 고전이 왜 고전인지 새삼 깨닫게 한다. 고전이 던질 질문에 성실하게 답하는 것이 고전을 고전답게 읽는 길일 것이다.

사실 [춘향전] 이본 중 가장 주목해야 할 이본은 서울에서 유통되던 [남원고사]로, [열녀춘향수절가]보다 적어도 30년가량 먼저 출현했고 분량도 두 배 이상 많고 풍성하다. 무엇보다 돈을 받고 책을 빌려주던 세책점의 세책본이라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읽던 텍스트였다. (p. 106)

[춘향전]이라는 이야기는 '춘향굿'에서 비롯되었고 성춘향은 광복 이후 영화나 드라마에서 고정시키면서 만들어진 것이지 춘향의 성은 없었다. 남원에서는 성춘향이었으나 서울에서는 김춘향이었고 월매가 기녀였기에 기녀의 아이는 성씨가 없는게 당연했다.

저자는 당대의 법과 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변학도가 얼마나 억울한 캐릭터인지 이몽룡이 얼마나 대단치 않은지 무엇보다 춘향의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이지 조목조목 설명한다. 읽다보면 아하 오호 헐 하면서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될 그런 합당한 이야기들을 읽고 나면 우리가 알던 [춘향전]은 과연 무엇이었나 싶어질 것이다.

대체 [춘향전]은 왜 이렇게 억지와 무리수를 많이 두었을까? 이유는 현대 막장 드라마의 뺨을 치고도 남을 이런 황당한 이야기에 사람들이 열광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춘향전]의 비밀이 숨어 있다. (p. 125)

[춘향전]의 핵심 가치를 굳이 꼽자면 에로티시즘과 혁명성이라고 할 수 있다. (p. 126)

에로티시즘과 혁명성을 뺀 [춘향전]이 그렇게 고루한 도덕 교과서가 되어버린 [춘향전]이 우리가 아는 그 [춘향전]이다. 춘향은 이몽룡이 와도 그만 안와도 그만 이었으나 자신의 몸은 자신의 뜻대로 라는 혁명적 캐릭터였다. 열녀가 아닌 춘향, 제대로 된 [춘향전]의 가치를 알고 싶다면 원전을 찾아 읽어야 하나? 아니다. 일단, 저자의 이 책을 읽으면 된다. ㅎㅎㅎ

[홍길동전]은 지극히 단순한 이야기라 오해의 여지가 없는데 정작 [흥부전], [춘향전]보다 더 크게 오해하고 있는 작품이다. 가장 큰 이유는 [홍길동전]을 잘못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홍길동이 시대적 요청에 따라 불려나와 영웅으로 만들어졌기에 실제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오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홍길동은 우리 의도대로 만들어진 영웅이기에 진정한 홍길동의 영웅성을 도리어 훼손하고 있다. (p. 156)

홍길동이 영웅인 것은 맞다. 하지만 어려운 백성을 돕는 의협심 강한 영웅이라기 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을 실현해낸 자존의 영웅이라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러나 홍길동의 영웅성을 논하기 전에 더 큰 오해는 최초의 한글소설이냐 아니냐의 문제다. 이 최초의 한글소설이라는 명예 때문에 홍길동이 영웅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기도 했기 때문이다. ' '최초'와 '한글 소설'이 필요했던 당시 시대적 요청이 있었다. 그때 마침 우리 눈앞에 딱 '홍길동전'이 있었다. (p. 157)' 홍길동전은 과연 최초의 한글 소설일까? 아니 그보다 홍길동전의 작가가 허균인 것은 맞을까? 저자가 연구자로서 빛나는 대목이다. 문헌적 근거를 착착 들이대는 것을 보면. ㅎㅎ

전반부의 의로운 홍길동이 후반부의 조금 기이한 홍길동이 되었다는 식의 시각이 많아지면서 불일치성 운운하는 문제가 도드라진 것이다. 말했듯이 불일치성 문제는 없다. 적서 차별, 활빈당 활동, 탐관오리 정치 등의 전분부 사건들부터 엉뚱하게 읽어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하나씩 살펴보겠지만, 홍길동이 빈민을 구휼하고 탐관오리를 징치하는 등의 의로운 행동을 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행동에 따른 결과이지 목표가 아니다. 그런 행동의 본질은 욕망에 따른 자기 과시와 정치적 시위에 있다. (p. 185)


[흥부전], [춘향전] 보다도 시대의 영웅적 이미지를 가진 [홍길동전]의 오해를 바로잡는 저자의 설명에 반감을 가지는 독자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홍길동이 영웅이라는 것이 변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가 그동안 잘못 이해해 왔을 뿐이다. 영웅이 뭐 다 시대적 영웅일 필요 있나? 그렇지 않은 영웅도 영웅은 영웅이다. 모든 고전은 그 고전이 지어졌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알고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현재적으로만 홍길동을 읽으려 한게 아닐까. 당시 사람들은 홍길동이 '단지 구휼을 하거나 탐관오리를 혼내주고 못된 자들을 무찔러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마음을 이해해주고 자신들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 진정한 소망을 엄청난 활약을 통해 이루어 냈기 때문 (p. 222)'에 열광했던 것이다. 우리가 홍길동에게 덧씌운 이미지에는 어떤 이유 때문이었을까 생각해볼 일이다.

[구운몽]은 남성 판타지가 아니라 인간 존재 본연에 대한 이야기다. (p. 228)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구운몽]을 쓴 이유가 '어머니의 근심 걱정을 풀어드리고자'한 것인데 '부귀공명이 일장춘몽이다'라는 내용으로 과연 어머니의 근심을 풀어줄 수 있을까? 한번 생각해보라. 효자 아들이 귀양지에서 홀로 늙어가는 어머니를 위로한답시고 하는 말이 "어머니, 부귀공명은 한바탕 꿈같은 거예요. 인생은 덧없어요"라고 말했을까?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어머니는 위로를 받았을까? 인생이 말짱 꽝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오히려 근심이 더해지지 않았을까? (p. 235)

저자는 [구운몽]에 대해 '우리 민족의 고전' 이고 '동서고금의 소설 중 [구운몽]을 뛰어 넘는 작품이 없으리라 생각한다'(p. 227) 며 [구운몽]이 얼마나 희대의 명저인지 설명한다. 눈앞에 있었다면 아마 입에 거품물 정도로 열심히 열렬하게 설명하는 저자의 모습이 보였을 것 같을 정도로 [구운몽]에 대한 저자의 애정은 각별하다. 그래서인지 나도 저자의 설명을 통해 [구운몽]의 위대함에 감탄하게 되었다. 알면알수록 엄청난 철학서였달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어느 욕망을 끝없이 추구해 그 정점에 도달하면 완성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전혀 다른 욕망으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라캉(1901~1981)의 말처럼 욕망은 완전히 충족될 수 없어 여분의 욕망이 남아 인간은 늘 그것을 추구하러 달려간다는 것을 김만중은 17세기에 [구운몽]을 통해 이미 설파해놓았다. (p. 248)

김만중은 대단한 집안의 뛰어난 지식인이었다. 그가 촘촘히 구성해 놓은 프랙탈 구조의 이야기는 속고 속이는 와중에 진정한 깨달음을 숨겨 놓고 있었다. 읽으면 읽을 수록 '[구운몽]의 주제는 인생무상이나 일장춘몽이 결코 아니다. (p. 258)' 라는 저자의 설명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작품 자체가 깨달음에 대해 말하는 '깨달음에 대한 텍스트'이면서 깨달음을 주는 '깨달음의 텍스트'였던 것이다. 김만중은 소설 [구운몽]이라는 묵직한 탄환을 우리에게 날렸다. (p. 271)' 고전의 가치는 이런 것이다. 읽는 이에게 묵직함을 여전히 날릴 수 있는 그런 글.

[구운몽]의 묵직한 깨달음에 대한 설명으로 마무리되는 이 책의 끝에 가면 고전의 가치를 새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그동안 식상하다고 여겼던 고전이 사실은 우리가 잘못 알고 있어서 그랬다는 것도. 그러니 고전의 가치를 제대로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이 책과 같은 좋은 선생님과 함께 읽어나가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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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의 법칙 - 충돌하는 국제사회, 재편되는 힘의 질서 서가명강 시리즈 36
이재민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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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돌하는 국제사회, 재편되는 힘의 질서

서가명강 시리즈 36 인 이 책은 내가 지금까지 읽어봤던 서가명강 책들이 그랬듯 역시 유익한 책이었다.

국내 정세가 혼돈이라 더욱 여유가 없는 시기이긴 하지만 언제부턴가 우리는 우리의 국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국제사회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자연스레 깨달았던 것 같다. 더구나 코로나19를 겪으며 세계는 점점 서로 더 밀접한 관계라는 것을 절감하기도 했다. 국제 사회는 지금 어떠한가? 그 이해를 위한 기본에 국제법이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배웠다. 국제사회도 어려운데 국제법이라고? 헐 하며 손사래를 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보다 국제법은 우리의 일상에 이미 너무나 가깝게 너무나 흔하게 들어와 있었다.

휴대폰의 GPS기능은 국제 규범의 결과다. 애플의 아이폰은 국제 규범에 따른 교역으로 우리 손에 왔으며, 우리 스마트폰 역시 국제 규범에 따라 만들어지고 수출된다. 즉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국제 규범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 언젠가부터 편의점에서 담배 판매대가 판매자 앞쪽에서 뒤쪽으로 이동했다. 이것 역시 2003년 WHO에서 채택되어 2005년 발표한 담배 규제 협약 때문이다. (p. 212)

국제법이라고 하니까 괜히 어렵게 생각했지 우리의 일상을 기초하는 다양한 규범들은 이미 국제적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무심코 운전을 하고 자연스레 전화를 건다.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기차와 버스를 타고 여행도 하고 맛있는 곳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닌다. 넷플릭스로 영화를 시청하고 네이버에서 최저가 상품을 검색한다. 이러한 일상은 어떻게 가능해진 걸까? 물론 이를 가능하게 한 기술적 발전이 그 출발점이다. 그다음에는 이를 운용하기 위한 여러 '규범'이 정비되었기 때문이다. (p. 11)

우리의 모든 일상에는 서로 공유하는 규범들이 있고 그 규범들을 공식적으로 명시한 것이 법이라 할때 인터넷을 통해 세계가 연결되는 지금 우리의 일상 규범엔 국제적 규범 즉 국제법이 들어와 있다. 하지만 빨라지는 기술과 변해가는 환경을 따라잡지 못한 국제적 규범들은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있다. 그 혼돈 속에서 각 나라들은 자국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여 각축적을 벌이고 있는바 이 상황에선 역시 힘의 질서가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영향은 특히 국제법의 세계엔 더더욱 미미하다. 그러니 '앞으로 국제사회에서 살아갈 우리 개개인, 특히 젊은 세대가 국제 규범의 중요성을 알고, 이를 적절히 활용하는 데 이 책이 조그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p. 15)'라는 저자의 바람은 바람을 너머 당위에 가깝게 다가온다.

저자는 크게 4챕터로 나누어 국제질서를 국제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 준다. 신냉전, 디지털 시대, 우주 경쟁 그리고 이 모두를 포함한 국제사회의 전환점 이 그 4개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 주요국 간 갈들이 다시 커지며 새로운 진영 대결이 시작되더니, 이제 급기야 '냉전 2.0' 시대가 시작되었다. 바로 신냉전 시대의 개막이다. 냉전 1.0에 비해 냉전2.0은 더 복잡해지고 더 정교해졌다. 그만큼 신냉전은 여러 국가에 많은 고민거리를 안기고 있다. 우리가 지금 미·중 갈등 사이에서 어려운 고민을 계속하는 것도 냉전 1.0보다 훨씬 복잡한 함수를 제시하는 냉전 2.0시대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p. 20)

냉전시대는 끝난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차라리 이념분쟁을 바탕으로 한 미·소 갈등의 냉전 1.0은 간단한 거였다. 신냉전 시대의 이해에는 국제법에 대한 이해가 필수요건이다. 그런데 이 국제법이란 것이 역사를 거슬러봤을때 400년 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만들어진 체제가 여전히 적용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국제사회가 얼마나 급변했는데 현 국제질서도 이 때의 제제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니 문제가 안 생길래야 안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2차대전 종식후 세계대전은 없었다지만 여기저기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그나마 세계대전으로 번지지 않는 것이 국제법 덕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국제 사회는 법률전쟁이 더 뜨겁고 논리 대결이라 해도 힘의 질서는 작용하기 마련인데 한국은 얼마나 국제법을 이해하고 활용하고 있는 걸까... 걱정이다.

넷플릭스와 같이 인터넷으로 콘텐츠를 송출하는 디지털 OTT 기업 혹은 IT 기업들은 어떻게든 세금을 줄이려고 애쓰고 있다. 이들은 이익 대비 세금이 적은 국가 즉, 법인세가 낮은 국가의 법을 따르고자 한다. 넷플릭스의 경우, 미국 본사 외에 세율이 적은 네덜란드에 '넷플릭스 인터내셔널'이라는 법인을 하나 더 두어 네덜란드 법인에서 이용권을 구매해 한국에 되파는 식으로 법인세를 아끼고 있다고 한다. 넷플릭스 뿐만 아니라 구글, 애플과 같은 IT기업들도 법인세율이 낮은 싱가포르나 아일랜드에 세운 법인을 통해 매출을 확인하고 궁극적으로 세금을 덜 내는 방식을 택한다고 보도되괴 있다. 이게 가능한 것은 디지털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디지털 활동에 대한 통일된 용어나 정의, 규범이 없기 때문이다. (p. 83)

400년 전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던 당시 디지털 시대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체제를 바탕으로 한 국제법에 디지털 시대에 대한 규범이 있을리가;;; 강력해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을 포함한 각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합의를 위한 다양한 시도들은 이어지고 있으나 얼마나 합의될 수 있을까? 그것이 과연 국제법으로 정착되기 까지 얼마나 걸릴까? 그 과정에서 인터넷 강국이라는 한국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 '우리의 이익은 우리만이 지킬 수 있다. 디지털 시대는 더욱 그러하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결정되기 때문이다. (p. 114)' 라는 저자의 말 앞에 후덜덜해지는데... 이또한 걱정이네;;;

남극과 북극 역시 우주와 비슷하다. 호기심의 대상이던 지역이 인간의 활동 대상이 되면서 새로운 규범 문제를 안게 되었다. 온난화로 인해 예기치 못했던 새로운 바다를 우리가 만나게 되면서 북극해에 애한 규범을 새로 만드는 것이 지금 시급한 국제적 현안이다. (...) 우주와 남북국을 둘러싸고 법률전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기억하고 새로운 동향을 주시해야 한다. (p. 168)

이 책을 읽다보면 걱정에 걱정을 더하게 되고 마음이 급해진다. 이렇게 시급한 현안들이 가득한데 국제법 관련 이해와 노력을 한국사회가 얼마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서다. 저자는 '기존 규범을 발전시키고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우리가 적극 참여해 '메이드 인 코리아'의 블록을 여러 영역에 확산 시키는 것 (...) 이것이 바로 앞으로 우리나라가 전개할 수 있는 건설적이고 법률전쟁적인 접근법이다. (p. 189)' 라면서 조언하고 '국제 규범을 전략적으로 이해하고 활용하는 접근으로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일에 모두가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기를 바란다. (p. 214)' 라며 응원하지만 글쎄... 잘 모르겠다. 한국 사회가 한국의 법전문가들이 그렇게 잘 하고 있을런지...

이 공부를 위해서는 세계사를 공부하고 국제 뉴스를 팔로우업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또한 이 모든 논의가 이루어지는 의사소통 수단인 영어에 익숙해지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국제법에 관심이 있다면, 점점 국제무대에서 활동하고 싶은 마음이 커질 것이다. 국제무대 혹은 국제기구에서 활동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전문성을 가지는 것이다. (p. 226) 자세한 사항은 외교뷰에서 발행한 국제기구 진출 가이드북을 참조하는 것도 좋다. (p. 227)

앞으로 미래를 만들어갈 젊은 세대가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는 것에 대해 좀더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내로라하는 똑똑한 학생들이 모두 의대에 몰려갈 것이 아니라 과학에서 국제법에서 이름을 알리고 그렇게 국제사회라는 힘의 질서에 한국의 자리를 좀더 넓혀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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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너머 자유 - 분열의 시대, 합의는 가능한가 김영란 판결 시리즈
김영란 지음 / 창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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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의 시대, 합의는 가능한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법관 김영란의 '판결'시리즈 신작

김영란법을 통해 익히 알던 이름이었으나 그의 책을 처음으로 읽은 것은 <김영란의 헌법 이야기>란 책이었다. 역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헌법의 역사를 차근차근 짚어주는 이 책이 법이야기라기 보다는 역사책으로 읽혀져서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런데 이번 신작은 '판결'에 대한 이야기라.. 더구나 '합의'에 대한 이야기라니 궁금했다. 한국을 들썩이게 만든 판사의 판결과 합의는 어떠했는지.

어느 쪽 편인지 밝히라고 강요하며 시도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전짓불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소설 속 소설의 현실과 이 시대의 현실이 너무도 닮았다. (p. 8)

저자는 1971년작 이청준의 [소문의 벽]이라는 소설의 내용을 설명하며 프롤로그를 시작한다. 전쟁당시 국군과 북한군이 번갈아 마을로 내려오며 사람들을 죽이는 과정에서 항상 문제시 됐던 '어느 편인가'라는 물음에 이 시대라고 과연 다를까라는 저자의 질문에 나또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지만,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발표된 알지못하는 소설과 '전짓불'이라는 생전 처음 보는 단어 앞에 이 책의 시작은 걱정스런 마음을 갖게 했다.

하지만 '토론은 없이 표결만 남은 사회로서 동조자를 끌어들여서 다수를 확보하는 것만이 중요한 사회로 가고 있다. 그럴수록 서로 다른 신념체계를 가진 사람들이 전짓불빛의 공포에서 벗어나서 일정한 합의를 해나갈 수 있어야 사회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 터이므로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망설이지 말고 받아들여야 하는 대가 당도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p. 13)' 라는 문장이 기대감을 갖게 했다. 우리는 어떤 미래를 원하는가? 그 미래에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필요한가? 아니 그에 앞서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란 무엇인가?

2013년부터 법학전문대학원에서 1년에 한 학기 동안은 최신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함께 읽고 해설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헤아려보니 10년을 넘어섰다. 시간의 속도를 새삼 느끼게 된다. 그 학기 동안 20개가 조금 넘는 전원합의체 판결을 읽고 강의하는 일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지만 늘 새로 선고된 판결 읽기를 고집해왔다. 함께 읽으면서 계속 공부하지 않으면 나조차도 전원합의체 판결을 일부러 찾아 읽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다. (p. 15)

간단히 얘기하자면, 이 책은 저자가 공부하고 가르치며 꾸준히 읽어온 법원의 전원합의체 판결 사례들을 바탕으로 해설한 책이고, 전원합의체 판결은 판사들의 만장일치가 아니라 다수결에 의한 판결이다. 즉 '합의'에 대한 면면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 좀더 자세하게 이 책이 어떤 책인가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다원주의의 시대가 도래햇지만 아직 제대로('합당하게')자리잡고 있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 그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는 우리 법원의 현주소를 롤수의 이론을 이정표 삼아 살펴보기로 했다. 롤스의 이론 중 관련이 있는 부분을 개관해보고 최근의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들 중 중첩적 합의와 기본적 자유들의 우선성과 연관되는 몇개의 판결들을 대입해 살펴보는 방법으로 접근했다. (p. 17)

자, 이러니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란 무엇인가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1장은 그래서 '롤스의 정치적 정의관과 중첩적 합의'부터 설명한 후 실제 판결들을 바탕으로 적용 및 해석을 이어간다.

롤스가 말하는 정치적 자유주의란 '서로 다른 교리(신념체계) 사이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조정하는 역할에 철저한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다. (p. 30)

롤스는 합당한 포괄적 신념체계들이 공존하는 다원주의의 현실에서 근본적인 정치적 문제에 관한 공공적 합의는 '공적 이성'에 의한 '중첩적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중첩적 합의란 기본적인 가치관이나 세계관, 진리에 대한 신념 등이 다르더라도 바람직한 사회적 질서에 대하여 대체로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면 일단 그 중첩된 부분에 한해 성립시키는 합의를 말한다. (p. 49)

이러한 롤스라는 렌즈를 통해 대법원의 최근 판결들에서 '합의'의 과정과 내용 그리고 의미를 분석하는데, 사건하나하나 모두 첨예한 화두를 담고 있는 것에 비해 그 결과들은 아쉬운 부분들이 많았는데 그래서 저자가 대놓고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제시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제를 드러내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방향키를 넌즈시 제안했달까. 여하튼, 예로 제시되는 판결들은 모두 호기심을 갖게 한다.

분묘기지권, 제사주재권의 문제를 둘러싼 사건들에서는 전통과 현재적 가치가 충돌하는 사건에서 두 가치가 충돌하는 문제가 대법원의 전원합의체 판결들 속에서 잠정적 타협을 넘어 중첩적인 합의를 이루었는지 살펴볼 예정이다. 혼인과 관련한 친생자 추정 사건은 공적 이성에 의한 중첩적 합의와 전통적 가치에 호소한 비공적 이성이 어떻게 마주쳤고 대법원은 어떤 입장을 택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읽었다. 법외노조에 대한 통보 제도를 어떻게 볼 것인지 하는 사건에서는 정의의 원칙들이 적용되는 4단계의 과정에서 문제를 본다면 대법원의 전원합의체 판결은 어떻게 읽을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했다. (p. 57)

우리나라의 장례문화는 과거에 산에 묘를 지었고 산의 주인이 딱히 없던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땅에 모든 산에 주인이 있다. 과거에 누구의 땅인지 모르고 묘를 지어 제사를 지내왔는데 산주인이 이의를 제기했을때 전통적 가치는 어디까지 적용될까?

전통적으로 제사의 주재권은 가장 혹은 장자가 맡아왔다. 하지만 딸만 있을 경우 딸이 주재하면 안되는가?

무정자증 남편이 아내와의 합의하에 정자기증받아 아이를 출산했다. 하지만 이혼하면서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한다면 친자가 아닌건 맞는데 과연 법적으로 자녀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전교조 설립당시 해직교사의 권리에 대한 논쟁이 길게 이어졌었다. 해직교사는 노조원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

위의 사례 판시들은 '상반되지만 합당한 신념들 간의 합의와 대법원 판결'을 설명하고 있다. 그 다음은 '우선하는 기본적 자유들과 대법원 판결'의 예시들이 이어진다.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에서는 양심의 자유가 우선적으로 보호되어야 하는 근거 등을 살펴보고, 성적 소수자의 기본권보호 사건에서는 성적 소수자들의 기본권보호의 문제가 현재 어느 단계까지 와 있는지 보았다. 명의신탁 관련 사건에서는 우리 헌법의 재산권보호 문제를 롤스의 재산소유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살펴보고자 했다. 그리고 손자녀 입양 등 가족제도와 관련한 사건에서는 롤스의 정치적 정의의 원칙이 가족 문제와 관련해서는 어떻게 변화해갔으며 우리 전원합의체 판결에서는 어떤 가치를 존중하고 보호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p. 140)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적 토론의 장에서 공적 이성으로 더 많은 논쟁이 계속되어야 할 필요는 여전히 남아 있다. (p. 160)' '롤스가 주장하는 중첩적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고, 사회의 변화를 조금씩 수용해가는 단계로 보인다. (p. 187)' '악용하는 형태를 바로잡아가는 일이 여전히 문제로 남을 것이 예상된다. (p. 210)' '사건 전원합의체 판결의 반대의견이 고스란히 입법에 반영된 결과였다. 물론 이 판결의 당사자는 구제받을 수 없었다. (p. 226)' 종합하면 토론이 더 필요하고 합의가 더 필요한 문제가 산재하단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프롤로그는 우리나라의 대표 작가 이청준의 [소문의 벽]으로 시작했지만 에필로그는 SF작가 켄 리우가 2004년 발표한 단편 [사랑의 알고리즘]으로 시작하고 싶다. (p. 228)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적어도 '헌법의 핵심사항들'과 '기본적 정의의 문제들'에서만큼은 자신의 포괄적 신념체계의 알고리즘에서 독립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p. 238)

[사랑의 알고리즘]은 켄 리우의 단편집 <어딘가 상상도 못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라는 책에 실린 작품으로 내가 읽었던 SF소설집이 이런 책에서 언급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 한국의 근현대 소설에서 외국의 SF소설 사이의 간극만큼 사회는 빠르게 변화해왔다. 그 사이에서 '법'의 적용 또한 변화의 흐름을 수용해야 했다. 다만 사회의 변화속도만큼 빠르게 법이 변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러니 책 속에 인용된 판례들의 결과에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지만 그와 동시에 희망을 보기도 했다. 적어도 '법'이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완고함만 고집하고 있는건 아니구나, 법에도 사회철학이 반영되어 변화되고 있구나 싶었달까.

개인의 삶에도 사회의 이해에도 그리고 '법'에도 철학이 필요함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래서 그 완고함의 세계에 법철학적 해석의 방향키를 제시하는 저자의 노력이 감사하다. 읽기 쉬운 책은 아니었지만 많은 대중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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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꾸물거릴까? - 미루는 습관을 타파하는 성향별 맞춤 심리학
이동귀 외 지음 / 21세기북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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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의지박약도 게으른 사람도 아니다

일을 미루는 것은 감정 조절의 문제다!

미루는 습관을 타파하는 성향별 맞춤 심리학

책 표지의 나무늘보가 친숙하다. 애니메이션 주토피아에서 봤던 그 나무늘보의 대화법이 떠오르기도 한다. 느려도느려도 그렇게 느릴 수 없이 세상속터지게 하던 그 나무늘보! 하지만 우리에게도 각자의 나무늘보가 있다. 모든 일에 바로바로 착착 열정을 다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때로는 종종 어쩌면 자주 우리는 해야한다는 생각과 나중에 라는 변명속에 꾸물거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곤 한다. 나무늘보처럼 늘어지고 늘어지면서 꾸물거리고 꾸물거리는 나, 왜일까? 뭐가 문제일까?

이 책은 '우리가 꾸물거리는 이유'에 대해 탐구하는 글이다. 이 글의 선임 필자는 20여 년간 다양한 장면에서 연구와 강의, 그리고 상담을 해온 상담심리학자이다. (p. 4) 이 책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미루기 행동에서 연상되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우고자 함이다. (p. 7) 둘째, 꾸물거리는 이유에 중점을 둔다. 꾸물거림을 극복하는 방법은 다른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 셋째, 이 책은 꾸물거리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어려움에 대한 위로나 단순한 공감보다는 꾸물거리는 이유에 대한 인지적 이해, 그리고 더 바람직한 마인드셋을 검토할 기회 제공에 주안점을 두었다. (p. 8) -프롤로그 中-

표지그림도 귀엽고 제목도 편안하다고 해서 이 책이 그냥그런 만만한 자기계발서라고 착각하면 곤란하다.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5명의 학자가 공동집필한 엄연한 심리서이고 따라서 이 책은 이렇게하는게 좋다 저렇게하는게 좋다라는 식의 따라해도그만 안따라해도그만인 행동지침서들과는 다른 자기자신을 탐구하게 만드는 책이다. 이 책 본연의 위엄?!은 책의 첫번째 챕터 첫번째 문단에서부터 느껴지는 바가 있다. '할 일을 미루는 행동을 심리학에서는 꾸물거림, 학술 용어로는 '지연 행동(procrastination)'이라고 한다. (p. 17)' 꾸물거림을 학술 용어로 바뀌어 읽으니 벌써부터 뭔가 다르지 않은가?! ㅎㅎㅎ

꾸물거림은 시간 관리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 조절의 문제이다. (p. 18) 꾸물거림은 타고난 기질이나 성격이 아니라 일종의 '감정적 교착 상태'로 인한 행동적 결과이다. 성격이란 한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나 일관적이고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패턴이다. (p. 19) 하지만 꾸물거림은 다르다. (p. 20) 그러면 우리는 대체 왜 꾸물거리는 것일까? 이 '왜(why)'라는 질문으로부터 변화의 여정이 시작된다. 이때의 '왜'는 '왜 이렇게 게을러?'와 같은 질책이 아니다. (p. 21)

이 책이 쉽게 위안을 주는 그렇고그런 힐링서는 아니지만 원인에 집중한다고 해서 책임추궁을 하는 그런 책도 아니다. 이 책은 탐구하고 분석한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기회를 준다. 왜 꾸물거리는지 스스로 생각해보고 스스로 고쳐나갈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당신의 꾸물거림은 어디에서 생겨났는가? 이것이 바로 이 책의 핵심 주제이다. (p. 31)

이 책에서는 꾸물거림의 발단이 되는 다섯 가지 개인 특성(비현실적 낙관주의, 자기 비난, 현실 저항, 완벽주의, 자극 추구)에 대해 깊이 있게 살펴볼 것이다. 분명히 하고 싶은 점은 이 다섯 가지 개인 특성은 상호 배타적인 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특성을 가질 수 있고, 또 동일한 특성이라도 개인마다 그 정도가 다를 수 있다. 중간 회색지대가 있을 수도 있다. 나의 꾸물거림의 발단이 되는 특성(들)을 명료하게 이해함으로써 변화 과정에서 방향감각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p. 38)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꾸물거림의 원인으로는 크게 다섯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고 한다.

비현실적 낙관주의, 자기 비난, 현실 저항, 완벽주의, 자극 추구

이 책의 본문은 이 다섯가지에 대해 상세히 분석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세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게끔 유도한다.

나는 왜 꾸물거릴까? 그럼 어떻게 되면 좋을까? 그래서 지금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직접적인 행동 지침을 제공하는 대신, 스스로 장기 목표에 집중하고, 자신에게 잘 맞는 방법을 찾아갈 수 있도록 '나는 왜 꾸물거릴까?'라는 '이유'에 자신이 대답하고, 명확하게 이해하도록 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p. 215)

여러번 강조하는 위와 같은 이 책의 의도는 명확하다. 하지만 읽는 와중에 찾아지는 자신의 꾸물거림에 대한 분석은 그리 명확하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는 앞서 언급되었듯이 한가지 원인이 아니라 여러가지 원인이 동시에 혹은 혼합된 순서로 자신의 꾸물거림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꾸물거림에 대한 이유를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한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해보는 것은 여러번의 시행착오가 있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읽고 단번에 이해되고 해결되지 않는다 해서 또다시 좌절에 빠지진 말자. '변화는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고, 이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바로 변화를 원하는 자신의 목소리에 대한 자각이다. (p. 220)' 라는 저자의 마지막 문장에서 기운을 얻어보자. 어찌되었듯 분명한 것은 꾸물거리는 것이 게으르다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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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전쟁인가?
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허보미 옮김 / 책세상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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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류는 참혹한 실수를 반복하는가?

힘의 논리만으로는 고찰할 수 없는 전쟁에 대한 섬세한 성찰

왜 전쟁인가?

참으로 끌리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양차세계대전 이후 평화의 시기가 도래했다고는 하지만 과연 전쟁이 멈춘 적이 있었던가? 세계대전 만큼의 전쟁이 아니라고 해서 전쟁이 전쟁이아닌 것은 아니다. 전쟁은 끊임없이 이땅저땅에서 벌어져 왔는데 왜 지금 더욱 화두가 되었는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이다. 저자는 서문 제목에서부터 이를 확실히 한다. [이번에는 '진짜' 전쟁이다]

이번에는 전쟁이, '진짜'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앞으로 이 책에서는 플라톤에서 마키아벨리, 홉스에서 클라우제비츠, 루소에서 카를 슈미트에 이르기까지 과거 전쟁에 대해 의문을 품고, 전쟁의 의미를 규명하고자 노력한 모든 사상가의 이론을 함께 살펴볼 것이다. (p. 10)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철학적으로 풀어낸다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서문에서 언급한 철학자들의 이름들도 어마어마하다. 그렇다고 이 책을 읽기에 앞서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 200여 페이지가 채 안되는 분량이 다행스럽고 철학자들의 이론을 상세히 풀어낸다기 보다는 저자가 이미 소화시킨 철학들을 주제에 맞춰 곁들이는 정도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읽는 동안은 그저 '왜'에 집중하면서 읽어나가면 좋을 것 같다. 왜? 그다음엔 '마지막으로 최후의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이 책을 끝맨고자 한다. 무슨 평화를 위한 전쟁인가? (p. 14)' 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어떤 평화를 원하는가?


과연 전쟁이 귀환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옳을까? 귀환이란 말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하 '러우 전쟁')이 반세기 넘게 평화를 구가하던 유럽 역사에 '갑작스런 단절'을 초래한 사건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내포하는 데 말이다. 오히려 1945년 이후 전쟁이 어떤 모습으로 변천했는지를 자문하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현 사태를 전쟁의 주요한 전략적 변천 과정의 일환으로 간주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이 책은 앞으로 냉전, 글로벌 전쟁, 혼돈 유발 전쟁. 이렇게 총3막의 비극으로 나누어, 전쟁의 주요한 전략적 변화를 함께 살펴보려고 한다. (p. 18)

결과적으로 러우전쟁은 '전쟁'이 맞다. 러우전쟁은 '가장 오래된 전쟁의 정의에 부합하는 전통적 전쟁의 구조를 갖췄기 때문(p.43)' 이다. 그렇다면 전쟁을 규정하는 측면은 무엇인가? 저자는 '공적인 차원의, 정의로운, 무력' 분쟁이라고 말한다. 전쟁은 국가대국가 차원에서 발생하므로 공적인 차원이라는 부분에서는 딱히 철학의 도움까진 필요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의와 무력의 측면에 대해선 각자의 입장에 따라 상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기에 철학적으로 어떻게 분석하는가에 따라서 현저히 다른 결론으로 향해갈수도 있다.

하지만 정당한 명분의 전쟁론 이면에 감춰진 가장 은밀하고도 가장 결정적인 전쟁의 이유는 바로 권력의 우발성이리라. (p. 126)

전쟁의 3대원인은 다양한 사상가들의 연구를 토대로 정리해보면 '탐욕, 공포, 명예욕' (p. 152) 이라고 한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이 3가지 원인에 결부된 다른 한 문장이 더 눈길을 끌었다. '전쟁이 남녀 차이의 필요성과 긴급성을 강화하는 데 일조한 것이다. 말하자면 전쟁의 '남성적 일상성'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상 전쟁은 매번 남성의 구분, 남성의 우월성을 반복적으로 제기하고, 제도화하고, 재확인하는 역할을 했다. (p. 160)' 러우전쟁에서 이 '남성의 일상성'을 결부시켜 파악해보는 것은 시간이 좀 걸릴 주제일것 같다... 여하튼 저자는 러우전쟁에서 앞서 말한 전쟁의 3대원인이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런후 '이제는 수많은 전쟁이 역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에 역행해서 이뤄진다는 사실을 온전히 인정하기 위해서라도 이제 그만 헤겔의 사상을 뛰어넘어야 할 때다. (p. 172)' 라고 글을 마무리한다. 음... 헤겔의 사상을 좀더 설명해주었으면 싶긴 한데;;; 저자는 서문에서 언급한 '평화'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간다.

우리가 기대해야 할 평화란, 다시 말해 합리적인 철학이 토대로 삼아야 할 평화란, 무장 평화나 공동묘지의 평화보다는 훨씬 더 희망에 찬, 조금 더 진실 어린 평화여야 하지 않을까. (...) 두 가지 종류의 평화를 제안해볼 수 있다. 그러려면 먼저 전쟁이 언제나 칸트가 말한 의미에서 반공화주의적이고, 스피노자가 말한 의미에서 반민주주의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p. 178)

나가는 글에서 '평화'에 대한 저자의 의견은 그리 길지 않은 편이라 '그렇다면 무슨 평화를 위한 전쟁인가' 라는 주제를 완전히 이해하고 책을 마무리하기는 좀 어려웠다. 그저 저자가 기억하라고 한 두 철학자의 언급으로 섣부른 결론을 정리한다면 세계 모든 국가가 완벽하게 공화주의적이고 완벽하게 민주주의적이라면 전쟁은 없을 것이다 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과연 평화가 가능하겠는가;;;; 하지만 저자는 '자연스러움'으로 이를 실현해보려 한다.


우리는 일정한 사물이 현존하는 방식과는 다른 차원에서 자연을 이해해야 한다. 사실상 자연은 최종적으로는 일종의 조합능력 그리고 완성원리를 의미한다. (p. 180)

국가가 서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국가들 사이에 자연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가련한 인간들의 이해타산, 치졸한 야망, 빈약한 상상력이 빚어낸 오판 등이 지나치게 많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를 평화의 길에 이르지 못하게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은 증오심, 잘못된 복수심, 두려움, 심술궂은 교만함이라는 인류의 문화다. 왜냐하면 평화란 언제나 부정적 감정들을 이겨낸 환희의 승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p. 181)

그러니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 철학적 사유다.

ps. 유럽대륙에선 전쟁이 일어나면 유럽철학자가 이토록 온갖 철학들을 관통하며 끊임없이 사유하고 그 결과물을 책으로 펴내 다른 이들에게 알린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철학이 없어진 사회는 너무나 암울하다... 그 암울함이 만들어낸 참혹한 결과는 결국 각자의 몫으로 돌아갈 터인데도... 우리나라 학자들이여 먼저 사유하고 목소리를 내어주었으면... 한국의 철학자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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