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 너머 자유 - 분열의 시대, 합의는 가능한가 김영란 판결 시리즈
김영란 지음 / 창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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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의 시대, 합의는 가능한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법관 김영란의 '판결'시리즈 신작

김영란법을 통해 익히 알던 이름이었으나 그의 책을 처음으로 읽은 것은 <김영란의 헌법 이야기>란 책이었다. 역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헌법의 역사를 차근차근 짚어주는 이 책이 법이야기라기 보다는 역사책으로 읽혀져서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런데 이번 신작은 '판결'에 대한 이야기라.. 더구나 '합의'에 대한 이야기라니 궁금했다. 한국을 들썩이게 만든 판사의 판결과 합의는 어떠했는지.

어느 쪽 편인지 밝히라고 강요하며 시도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전짓불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소설 속 소설의 현실과 이 시대의 현실이 너무도 닮았다. (p. 8)

저자는 1971년작 이청준의 [소문의 벽]이라는 소설의 내용을 설명하며 프롤로그를 시작한다. 전쟁당시 국군과 북한군이 번갈아 마을로 내려오며 사람들을 죽이는 과정에서 항상 문제시 됐던 '어느 편인가'라는 물음에 이 시대라고 과연 다를까라는 저자의 질문에 나또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지만,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발표된 알지못하는 소설과 '전짓불'이라는 생전 처음 보는 단어 앞에 이 책의 시작은 걱정스런 마음을 갖게 했다.

하지만 '토론은 없이 표결만 남은 사회로서 동조자를 끌어들여서 다수를 확보하는 것만이 중요한 사회로 가고 있다. 그럴수록 서로 다른 신념체계를 가진 사람들이 전짓불빛의 공포에서 벗어나서 일정한 합의를 해나갈 수 있어야 사회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 터이므로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망설이지 말고 받아들여야 하는 대가 당도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p. 13)' 라는 문장이 기대감을 갖게 했다. 우리는 어떤 미래를 원하는가? 그 미래에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필요한가? 아니 그에 앞서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란 무엇인가?

2013년부터 법학전문대학원에서 1년에 한 학기 동안은 최신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함께 읽고 해설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헤아려보니 10년을 넘어섰다. 시간의 속도를 새삼 느끼게 된다. 그 학기 동안 20개가 조금 넘는 전원합의체 판결을 읽고 강의하는 일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지만 늘 새로 선고된 판결 읽기를 고집해왔다. 함께 읽으면서 계속 공부하지 않으면 나조차도 전원합의체 판결을 일부러 찾아 읽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다. (p. 15)

간단히 얘기하자면, 이 책은 저자가 공부하고 가르치며 꾸준히 읽어온 법원의 전원합의체 판결 사례들을 바탕으로 해설한 책이고, 전원합의체 판결은 판사들의 만장일치가 아니라 다수결에 의한 판결이다. 즉 '합의'에 대한 면면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 좀더 자세하게 이 책이 어떤 책인가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다원주의의 시대가 도래햇지만 아직 제대로('합당하게')자리잡고 있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 그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는 우리 법원의 현주소를 롤수의 이론을 이정표 삼아 살펴보기로 했다. 롤스의 이론 중 관련이 있는 부분을 개관해보고 최근의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들 중 중첩적 합의와 기본적 자유들의 우선성과 연관되는 몇개의 판결들을 대입해 살펴보는 방법으로 접근했다. (p. 17)

자, 이러니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란 무엇인가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1장은 그래서 '롤스의 정치적 정의관과 중첩적 합의'부터 설명한 후 실제 판결들을 바탕으로 적용 및 해석을 이어간다.

롤스가 말하는 정치적 자유주의란 '서로 다른 교리(신념체계) 사이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조정하는 역할에 철저한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다. (p. 30)

롤스는 합당한 포괄적 신념체계들이 공존하는 다원주의의 현실에서 근본적인 정치적 문제에 관한 공공적 합의는 '공적 이성'에 의한 '중첩적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중첩적 합의란 기본적인 가치관이나 세계관, 진리에 대한 신념 등이 다르더라도 바람직한 사회적 질서에 대하여 대체로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면 일단 그 중첩된 부분에 한해 성립시키는 합의를 말한다. (p. 49)

이러한 롤스라는 렌즈를 통해 대법원의 최근 판결들에서 '합의'의 과정과 내용 그리고 의미를 분석하는데, 사건하나하나 모두 첨예한 화두를 담고 있는 것에 비해 그 결과들은 아쉬운 부분들이 많았는데 그래서 저자가 대놓고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제시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제를 드러내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방향키를 넌즈시 제안했달까. 여하튼, 예로 제시되는 판결들은 모두 호기심을 갖게 한다.

분묘기지권, 제사주재권의 문제를 둘러싼 사건들에서는 전통과 현재적 가치가 충돌하는 사건에서 두 가치가 충돌하는 문제가 대법원의 전원합의체 판결들 속에서 잠정적 타협을 넘어 중첩적인 합의를 이루었는지 살펴볼 예정이다. 혼인과 관련한 친생자 추정 사건은 공적 이성에 의한 중첩적 합의와 전통적 가치에 호소한 비공적 이성이 어떻게 마주쳤고 대법원은 어떤 입장을 택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읽었다. 법외노조에 대한 통보 제도를 어떻게 볼 것인지 하는 사건에서는 정의의 원칙들이 적용되는 4단계의 과정에서 문제를 본다면 대법원의 전원합의체 판결은 어떻게 읽을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했다. (p. 57)

우리나라의 장례문화는 과거에 산에 묘를 지었고 산의 주인이 딱히 없던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땅에 모든 산에 주인이 있다. 과거에 누구의 땅인지 모르고 묘를 지어 제사를 지내왔는데 산주인이 이의를 제기했을때 전통적 가치는 어디까지 적용될까?

전통적으로 제사의 주재권은 가장 혹은 장자가 맡아왔다. 하지만 딸만 있을 경우 딸이 주재하면 안되는가?

무정자증 남편이 아내와의 합의하에 정자기증받아 아이를 출산했다. 하지만 이혼하면서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한다면 친자가 아닌건 맞는데 과연 법적으로 자녀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전교조 설립당시 해직교사의 권리에 대한 논쟁이 길게 이어졌었다. 해직교사는 노조원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

위의 사례 판시들은 '상반되지만 합당한 신념들 간의 합의와 대법원 판결'을 설명하고 있다. 그 다음은 '우선하는 기본적 자유들과 대법원 판결'의 예시들이 이어진다.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에서는 양심의 자유가 우선적으로 보호되어야 하는 근거 등을 살펴보고, 성적 소수자의 기본권보호 사건에서는 성적 소수자들의 기본권보호의 문제가 현재 어느 단계까지 와 있는지 보았다. 명의신탁 관련 사건에서는 우리 헌법의 재산권보호 문제를 롤스의 재산소유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살펴보고자 했다. 그리고 손자녀 입양 등 가족제도와 관련한 사건에서는 롤스의 정치적 정의의 원칙이 가족 문제와 관련해서는 어떻게 변화해갔으며 우리 전원합의체 판결에서는 어떤 가치를 존중하고 보호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p. 140)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적 토론의 장에서 공적 이성으로 더 많은 논쟁이 계속되어야 할 필요는 여전히 남아 있다. (p. 160)' '롤스가 주장하는 중첩적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고, 사회의 변화를 조금씩 수용해가는 단계로 보인다. (p. 187)' '악용하는 형태를 바로잡아가는 일이 여전히 문제로 남을 것이 예상된다. (p. 210)' '사건 전원합의체 판결의 반대의견이 고스란히 입법에 반영된 결과였다. 물론 이 판결의 당사자는 구제받을 수 없었다. (p. 226)' 종합하면 토론이 더 필요하고 합의가 더 필요한 문제가 산재하단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프롤로그는 우리나라의 대표 작가 이청준의 [소문의 벽]으로 시작했지만 에필로그는 SF작가 켄 리우가 2004년 발표한 단편 [사랑의 알고리즘]으로 시작하고 싶다. (p. 228)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적어도 '헌법의 핵심사항들'과 '기본적 정의의 문제들'에서만큼은 자신의 포괄적 신념체계의 알고리즘에서 독립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p. 238)

[사랑의 알고리즘]은 켄 리우의 단편집 <어딘가 상상도 못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라는 책에 실린 작품으로 내가 읽었던 SF소설집이 이런 책에서 언급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 한국의 근현대 소설에서 외국의 SF소설 사이의 간극만큼 사회는 빠르게 변화해왔다. 그 사이에서 '법'의 적용 또한 변화의 흐름을 수용해야 했다. 다만 사회의 변화속도만큼 빠르게 법이 변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러니 책 속에 인용된 판례들의 결과에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지만 그와 동시에 희망을 보기도 했다. 적어도 '법'이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완고함만 고집하고 있는건 아니구나, 법에도 사회철학이 반영되어 변화되고 있구나 싶었달까.

개인의 삶에도 사회의 이해에도 그리고 '법'에도 철학이 필요함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래서 그 완고함의 세계에 법철학적 해석의 방향키를 제시하는 저자의 노력이 감사하다. 읽기 쉬운 책은 아니었지만 많은 대중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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