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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숨결
박상민 지음 / 아프로스미디어 / 202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을 읽게 된 이유.
현직 의사가 쓴
감성 메디컬 미스터리
그 무엇보다 '현직 의사'가 썼다는 점에서 끌렸습니다.
보다 사실적일 것이기에, 보다 추악한 진실이 있을 것이기에, 그럼에도 우리는 그 사실을 직시해야함을 알기에 읽어보기로 하였습니다.
『차가운 숨결』
'이러다 터지는 거 아닐까.' - page 30
집에 돌아오는 길.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고통에 참고 또 참아봤지만 결국 응급실로 향하게 된 수아.
그녀가 도착한 그곳은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던, 푸근한 미소를 띤 아버지가 숨진 '혜성대학교병원'이었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고통과 함께 그동안 애써 잊으려 했던 끔찍한 기억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옵니다.
'그날 밤 아빠는 뇌출혈로 죽은 게 아니야. 아빠를 죽인 사람은......' - page 31
막바지를 향해 가는 수술실.
테크닉과 스피드가 다른 교수들에 비해 월등한 태주 교수님의 수술 어시스트로 들어가게 된 외과 레지던트 현우.
그는 수술실에서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종류의 실수를 하게 됩니다.
절대! 절대! 핸드폰은 진동으로 맞출 것. - page 33
아니나 다를까.
그때까지 온화함을 유지하던 김태주 교수의 표정이 갑자기 바뀌면서 그에게 이야기합니다.
"자네, 인간과 금수의 차이가 뭔지 아는가?"
"......"
태주가 말을 이어 갔다.
"인간은 남이 실수를 지적하면 알아서 고친다네. 반면에 금수는 채찍질이라도 해야 겨우 고칠 생각을 하지."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이현우 선생이 금수가 되지 않길 바라네. 내 말 이해하겠나?"
"네, 교수님. 명심하겠습니다."
"모든 건 선생이 하기 나름이란 걸 말해 주고 싶어."
(중략)
"그만 나가 보게. 자네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한테 어서 가 봐야지." - page 34 ~ 35
결국 수술실에서 쫓겨나게 된 현우.
그토록 완벽을 추구하였던 그였기에 끝없이 자신을 자책하지만 그 역시도 호출로 인해 다시 응급실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반쯤 열린 커튼의 틈새로 배를 움켜쥐고 누워 있는 여학생과 그런 딸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어머니가 보입니다.
응급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광경에 불과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의 마음 한구석에 미묘한 위화감이 꿈틀거립니다.
처방을 위해 진찰을 하려는 순간 모녀 사이의 위화감.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수아에게 현우는 말을 붙입니다.
문득 자신이 그동안 담당했던 수아 또래의 여자 환자는 많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한 번도 이런 사적인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는데 문득 자신이 쓸데없는 말이 많았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기분이 이상해집니다.
'왜 수아한테만 주책을 떠는 걸까?' - page 71
현우는 아침 북 리뷰 시간에 발표할 논문에 중요한 부분을 체크하면서 코멘트할 말을 적는데 핸드폰이 울립니다.
"무슨 일이에요?"
[현우 쌤, 여기 빨리 와 주세요. 715호 한수아 환자예요.]
놀란 현우가 손에 쥐고 있던 형광펜을 떨어뜨리며 벌떡 일어섰다. 수술 당일 몸에 이상이 생기는 경우는 합병증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무슨 일인데요, 하고 묻자 간호사가 대답했다.
[자기 엄마한테 소리 지르고 난리도 아녜요. 제정신이 아닌 거 같아요.] - page 90
격렬히 몸부림치며 악을 쓰는 수아의 모습은 야생동물을 연상케 했습니다.
사태를 진정시킨 후 현우는 수아 어머니에게 모녀간의 갈등에 대해 물어봅니다.
"원래부터 이랬던 건 아니에요. 작년까지만 해도 수아는 해맑고 귀여운 아이였어요. 그런데...... 그날 이후로 모든 게 바뀌어 버렸어요."
"그날이라면."
"수아 아빠가 가 버린 지도 벌써 다섯 달이 됐네요."
"아......"
문득 오전에 들었던 수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저도 엄마, 아빠랑 오래오래 살구 싶었거든요. 안 헤어지고 싶었는데, 그런데......' - page 95
현우는 다시 수아에게 다가가 물어봅니다.
왜 그토록 엄마를 미워하는지......
수아는 엄마가 아빠에게 약을 주입하고 약에 취해 아빠가 복도에서 넘어지면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엄마가 여자 의사 앞에서 무릎 꿇고 감사하다며, 남편이 죽었는데 뭐가 감사한건지 이해할 수 없다며 더이상 엄마와 자신 사이에 관여하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현우는 고민 끝에 마음을 굳히며 수아에게 말을 건넵니다.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 너희 아버님이 어떻게 돌아가신 건지 말이야."
"정말이에요?"
수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가 천천히 돌아와 앉았다.
"개인적으로 너희 어머님이 그런 일을 저질렀을 리 없다고 믿어서기도 하고, 네가 가진 의혹을 말끔히 지워 주고 싶어서 그래. 진실을 알아내는 게 그렇게 어렵진 않을 거야. 나한테는 과거 기록에 접근할 권한이 있거든." - page 111 ~ 112
그렇게 현우는 사건의 '진실'을 향해 다가갑니다.
소설은 과거의 사건과 더불어 벌어지는 현재의 사건과 오버랩이 되면서 그 진실을 향해 가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의사간의 신뢰가 우선시 되는 그들 사이에서 과연 진실은......
그리고 마지막의 반전의 묘미.
단순히 '아!'로 끝낼 수 없어 마지막만 두세번은 읽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의사'라는 직업의 고충......
소설 속에서도 엿보였습니다.
"슬기 떠나는 날까지...... 곁에 있어 줬잖아. 그거면 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야."
"그래도 의사인데......"
나리가 살포시 고개를 저었다.
"의사라고 모든 환자를 살릴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너도 주치의 하면서 느꼈겠지만."
"......"
"우리는 그저 의학이라는 학문이 허용하는 울타리 안에서만 환자를 살려 낼 수 있어. 슬기는 그 울타리 바깥에 있었던 거고." - page 146
그리고 '죽음'에 대해......
"할아범, 지금쯤 어디 있으려나."
"......"
"염라대왕 앞에서 담배 연기 뻑뻑 뿜어 대는 거 아닌지 몰라. 그렇게 좋아하는 담배 피운다고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겠다. 살판났겠어, 아주."
두 사람의 눈이 얽혔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현우는 문득 죽는다고 해서 그 사람의 존재가 함께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기억해 주는 누군가의 마음 속에서 여전히 살아 움직인다. 인생의 궤적에서 어느 순간 만났던 이들의 마음속에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는 것이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기영이 들켰구마이, 하고 멋쩍게 웃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 page 282 ~ 283
의사가 되기 위한 과정을 묘사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한 방향을 향해 무리 지어 날아가고 있다는 그의 이야기가 애처롭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문득 이번 '코로나 19'를 위해 힘쓴 이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통풍도 안되는 비닐옷을 입고, 보호장구로 상처에도 불구하고 24시간 불철주야 애쓰신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살아감에 또한번 감사함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