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 (리커버 양장본) -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순간에도
정희재 지음 / 갤리온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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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당신은 늘 괜찮다고 말하나요?"


참으로 애쓰면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만 그런 것이 아니기에 누구에게 기댈 수 없었습니다.

아니, 기대게 되는 순간 무너질까봐,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해질까봐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척 견디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곤 소리없이 혼자 울음이 터져버렸습니다.

너무 힘들었기에......

너무 외로웠기에......


이 책을 보자마자 그저 마음을 놓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외롭던 내가 가장 듣고 싶었기에

외로운 당신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31가지 이야기


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

 


본문에 들어가기 앞서 전한 저자의 이야기.


귀에 스며들어 나를 삶 쪽으로, 빛 쪽으로 이끌던 말들은 단순하고 소박했다.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았다.

"밥 먹었어?"

"어디야? 보고 싶어......"

"너 때문에 꿈을 꾸게 됐어. 반짝반짝 살아 있다는 걸 느껴."

"살다가 힘들 때, 자존감이 무너지고 누구도 그 무엇도 믿지 못할 것 같을 때 기억해. 온 마음을 다해 널 아끼는 사람이 있다는 걸." - page 10 ~ 11


사실 거창하고도 멋진 말을 듣고 싶은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사소한 안부가, 작은 관심이 담긴 말 한 마디가 듣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근데 왜 그 말 한 마디가 그리도 듣기 어려운건지......

아니, 나 역시도 다른 이에게 그런 말을 건넨 적은 있는지......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 만감이 교차하기도 하였습니다.


첫 이야기인 <왜 당신은 늘 괜찮다고 말하나요?>.

늦은 밤 꽤나 취한 한 남자.

눈을 감고는 손잡이에 매달려 위태롭게 매달린 그 남자에게 사람들은 말을 건넵니다.

"저기요...... 여기 앉으세요."


하지만 그는 짧은 순간, 온몸의 힘을 끌어모아 눈을 뜨고 몸을 바로잡고는 대답합니다.

"전 괜찮아요. 정말 괜찮다니까요. 앉으세요."


그 모습을 보고 저자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날 밤 버스 안에서 만난 남자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에 몸을 얹고 살아가지 않으면 세상이 자신을 만만하게 볼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고 믿게 됐는지도. 세상에는 그런 믿음을 강화시키기에 충분한 잔혹한 사례들이 얼마나 일상적으로 일어나는가. 안심하고 감사히 호의를 받아들였더니 결국 자신을 이용하기 위한 의도였음을 알게 된다거나, 진심에서 우러난 도움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그 일로 뒷말을 듣게 된다거나. - page 26 ~ 27


살아남으려고, 상처받지 않으려 끝내 버티고 버티는 그 남자가 지난날의 나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라는 저자의 말에 참으로 미안하고도 미안했습니다.


'외롭다'는 말.

저도 잘 쓰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 하나면 나의 상황을 이해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외로워서 중독되는 것일까, 아니면 중독된 끝에 외로워진 것일까. 이성에 대한 사랑을 느낄 때 뇌가 반응하는 부위와 코카인을 흡입할 때 활성화되는 부위가 같다고 했던가. 무엇인가에 쉽게 중독되는 사람들에겐 허기진 내면의 자아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 page 163


그리고 덧붙여 이야기 합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도피자들이다. 우리의 혼은 끊임없이 외로움과 갈망, 불안, 충격으로부터 달아나 숨을 만한 곳을 찾는다. 중독은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이 현실의 전면에 나서서 지휘권을 갖는 것이다. 처음 눈을 떠서 본 존재를 어미라고 믿고 평생 따르는 새끼 오리처럼, 처음 희열을 안겨 준 것이 게임이었다면 게임이, 도박이었다면 도박이, 술이었다면 술이 우리의 대뇌에 쾌락이라고 새겨진다. 그렇게 거기에 매달리는 동안은 감추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영원히 안 봐도 된다고 믿는다. 아니, 안 보고 싶어 한다. 마치 머리만 풀숲에 박은 꿩처럼. 다시 한 번 옛날 어법으로 말하자면, 다들 외로워서 그렇다. - page 170


지금 나도 풀숲에 머리만 박고 있는 꿩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참으로 '행복'을 쫓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삶이 불공평하고 불행하다고 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가 '행복'에 대해 일러주었습니다.

 


이젠 행복에 대해 겸허해지기로 마음먹어 봅니다.


참으로 공감하며 위로를 받으며 읽었습니다.

아마도 그만큼 지쳐있었고, 그리고 나만 그런게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전한 이야기.

저에게도 그 따스한 손이, 그 온기가 느껴져 미소가 번질 수 있었습니다.


당신 이마에 손을 얹는다. 당신, 참 열심히 살았다.

내 이마에도 손을 얹어다오.

한 사람이 자신의 지문을 다른 이의 이마에 새기며 위로하는 그 순간,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떨어져 나가고, 거품처럼 들끓는 욕망에 휘둘리느라 제대로 누려 보지 못한 침묵이 우리를 품어 주리라.

당신, 참 애썼다.

사느라, 살아 내느라, 여기까지 오느라 애썼다.

부디 당신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 아직 오지 않았기를 두 손 모아 빈다. - page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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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이스탄불
부르한 쇤메즈 지음, 고현석 옮김 / 황소자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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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형제의 나라'로 친숙한 '터키'.

저 역시도 좋아하는 나라 중 하나입니다.

동서양의 조화가 이루어진 곳.

아름다운 기타 선율이 더없이 아련하게 느껴지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을 읽게 된 것도 이 한 문장으로부터였습니다.


"고통스럽게 아름다운 도시 이스탄불에 바져친 비가"


그 슬프고도 애잔함이 드리워진 도시 이스탄불로의 여행을 떠나봅니다.


이스탄불 이스탄불

 


멀리서 철문 소리가 들립니다.

그렇습니다.

이곳은 지하감옥 안이었습니다.


학생 데미르타이와 의사, 이발사 카모는 강아지처럼 서로의 몸을 붙여 온기를 유지하며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있습니다.

낮인지 밤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이곳은 며칠 동안 시간이 멈춰있는 듯합니다.


매일매일 고문을 당하러 끌려갈 때마다, 우리는 심장을 조여오는 공포를 새롭게 겪어내고 있었다. 끌려가는 짧은 순간 동안 우리는 고통 당할 준비를 했다. 인간과 동물, 정상인과 미친 인간, 천사와 악마는 모두 똑같은 것이었다. - page 8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더없이 고통과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고문은 몸을 고통의 노예로 만들지. 두려움은 영혼에 똑같은 일을 해. 그리고 사람들은 몸을 구하기 위해 영혼을 팔지. - page 34


바로 그때 철문의 육중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내가 끌려가 고문을 당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가 잡혀온 것일까......

발자국 소리는 점점 그들이 있는 40번 감방에 가까워지고 감방 문이 열립니다.


노인의 머리는 가슴 쪽으로 꺾이고, 얼굴과 몸은 피투성이였다. 간수 한 명이 말했다. "새 친구 왔다." 의사와 나는 일어나 노인을 안으로 들이고 바닥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간수들은 문을 닫고 가버렸다. - page 41


의사의 노력 덕분에 조금씩 의식이 돌아오는 이 노인 퀴헤일란.

눈을 뜨고 자기가 어디 있는지 알려고 앴는 노인은 벽과 천장 그리고 자신이 누운 콘크리트 바닥에 손을 문질러봅니다.


"이스탄불?" 노인이 거친 소리를 냈다. "여기가 이스탄불인가?"

노인은 눈을 감고 잠들었다. 의식을 잃기 직전의 사람이라기보다는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의 표정. 이상한 표정이었다. - page 49


이곳에 오게 된 이들은 아마도 혁명운동에 연루되었을 것이라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를 고문의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잠시나마 해방되고자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각자 갈망하는 자유와 연민에 어둠 속 한 줄기의 빛을 꿈꾸곤 합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마치 우리의 역사가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서대문 형무소가, 남영동 대공분실이 떠올라 가슴 한 켠이 아려왔습니다.

그들도 이들처럼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지는 않았을까......


"퀴헤일란 아저씨, 우리 믿음이 더 강해진다고 한들 뭐가 달라지나요?" 내가 물었다. 목소리에 짜증이 배어 있었다. "아무도 우리가 여기서 고통 당하는 걸 몰라요. 사람들은 우리가 여기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고요."

"글쎄. 우리를 고문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여기서 당하는 고통을 잘 알지."

나는 우리가 여기서 당하는 고통이 이 도시와 시간이 가하는 고통임을 알았다. 시간과 이 도시는 같은 것이었다. 신이 정한 규칙이 여기서 전복되는 것은 그 이유 때문이었다. 여기서는 아무도 우리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신이 선을 만들고, 악은 사람들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틀렸다. 원했다면 신은 선을 무한정 만들 수 있었다. 누가 신을 제지했는가? 나는 악을 만든 것이 신이라고, 그리고 선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람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지상의 사람들은 그걸 알았을까? 과연 우리를 생각한 사람이 있었을까?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모든 일에 대해 신경을 쓰는 사람이 있었을까? - page 247


소설에서 마지막으로 보여주었던 이스탄불의 모습.

 


고통스럽지만 아름답게 그리워진 노란 안개 속 이스탄불.

소설을 덮으며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기타선율과 함께 가슴에 드리워진 안개 속에 잠시 눈을 감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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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숨결
박상민 지음 / 아프로스미디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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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게 된 이유.


현직 의사가 쓴

감성 메디컬 미스터리


그 무엇보다 '현직 의사'가 썼다는 점에서 끌렸습니다.

보다 사실적일 것이기에, 보다 추악한 진실이 있을 것이기에, 그럼에도 우리는 그 사실을 직시해야함을 알기에 읽어보기로 하였습니다.


차가운 숨결

 

'이러다 터지는 거 아닐까.' - page 30

집에 돌아오는 길.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고통에 참고 또 참아봤지만 결국 응급실로 향하게 된 수아.

그녀가 도착한 그곳은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던, 푸근한 미소를 띤 아버지가 숨진 '혜성대학교병원'이었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고통과 함께 그동안 애써 잊으려 했던 끔찍한 기억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옵니다.


'그날 밤 아빠는 뇌출혈로 죽은 게 아니야. 아빠를 죽인 사람은......' - page 31


막바지를 향해 가는 수술실.

테크닉과 스피드가 다른 교수들에 비해 월등한 태주 교수님의 수술 어시스트로 들어가게 된 외과 레지던트 현우.

그는 수술실에서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종류의 실수를 하게 됩니다.


절대! 절대! 핸드폰은 진동으로 맞출 것. - page 33


아니나 다를까.

그때까지 온화함을 유지하던 김태주 교수의 표정이 갑자기 바뀌면서 그에게 이야기합니다.


"자네, 인간과 금수의 차이가 뭔지 아는가?"

"......"

태주가 말을 이어 갔다.

"인간은 남이 실수를 지적하면 알아서 고친다네. 반면에 금수는 채찍질이라도 해야 겨우 고칠 생각을 하지."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이현우 선생이 금수가 되지 않길 바라네. 내 말 이해하겠나?"

"네, 교수님. 명심하겠습니다."

"모든 건 선생이 하기 나름이란 걸 말해 주고 싶어."

(중략)

"그만 나가 보게. 자네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한테 어서 가 봐야지." - page 34 ~ 35


결국 수술실에서 쫓겨나게 된 현우.

그토록 완벽을 추구하였던 그였기에 끝없이 자신을 자책하지만 그 역시도 호출로 인해 다시 응급실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반쯤 열린 커튼의 틈새로 배를 움켜쥐고 누워 있는 여학생과 그런 딸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어머니가 보입니다.

응급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광경에 불과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의 마음 한구석에 미묘한 위화감이 꿈틀거립니다.

처방을 위해 진찰을 하려는 순간 모녀 사이의 위화감.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수아에게 현우는 말을 붙입니다.

문득 자신이 그동안 담당했던 수아 또래의 여자 환자는 많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한 번도 이런 사적인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는데 문득 자신이 쓸데없는 말이 많았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기분이 이상해집니다.


'왜 수아한테만 주책을 떠는 걸까?' - page 71


현우는 아침 북 리뷰 시간에 발표할 논문에 중요한 부분을 체크하면서 코멘트할 말을 적는데 핸드폰이 울립니다.


"무슨 일이에요?"

[현우 쌤, 여기 빨리 와 주세요. 715호 한수아 환자예요.]

놀란 현우가 손에 쥐고 있던 형광펜을 떨어뜨리며 벌떡 일어섰다. 수술 당일 몸에 이상이 생기는 경우는 합병증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무슨 일인데요, 하고 묻자 간호사가 대답했다.

[자기 엄마한테 소리 지르고 난리도 아녜요. 제정신이 아닌 거 같아요.] - page 90


격렬히 몸부림치며 악을 쓰는 수아의 모습은 야생동물을 연상케 했습니다.

사태를 진정시킨 후 현우는 수아 어머니에게 모녀간의 갈등에 대해 물어봅니다.


"원래부터 이랬던 건 아니에요. 작년까지만 해도 수아는 해맑고 귀여운 아이였어요. 그런데...... 그날 이후로 모든 게 바뀌어 버렸어요."

"그날이라면."

"수아 아빠가 가 버린 지도 벌써 다섯 달이 됐네요."

"아......"

문득 오전에 들었던 수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저도 엄마, 아빠랑 오래오래 살구 싶었거든요. 안 헤어지고 싶었는데, 그런데......' - page 95


현우는 다시 수아에게 다가가 물어봅니다.

왜 그토록 엄마를 미워하는지......

수아는 엄마가 아빠에게 약을 주입하고 약에 취해 아빠가 복도에서 넘어지면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엄마가 여자 의사 앞에서 무릎 꿇고 감사하다며, 남편이 죽었는데 뭐가 감사한건지 이해할 수 없다며 더이상 엄마와 자신 사이에 관여하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현우는 고민 끝에 마음을 굳히며 수아에게 말을 건넵니다.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 너희 아버님이 어떻게 돌아가신 건지 말이야."

"정말이에요?"

수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가 천천히 돌아와 앉았다.

"개인적으로 너희 어머님이 그런 일을 저질렀을 리 없다고 믿어서기도 하고, 네가 가진 의혹을 말끔히 지워 주고 싶어서 그래. 진실을 알아내는 게 그렇게 어렵진 않을 거야. 나한테는 과거 기록에 접근할 권한이 있거든." - page 111 ~ 112


그렇게 현우는 사건의 '진실'을 향해 다가갑니다.


소설은 과거의 사건과 더불어 벌어지는 현재의 사건과 오버랩이 되면서 그 진실을 향해 가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의사간의 신뢰가 우선시 되는 그들 사이에서 과연 진실은......


그리고 마지막의 반전의 묘미.

단순히 '아!'로 끝낼 수 없어 마지막만 두세번은 읽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의사'라는 직업의 고충......

소설 속에서도 엿보였습니다.


"슬기 떠나는 날까지...... 곁에 있어 줬잖아. 그거면 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야."

"그래도 의사인데......"

나리가 살포시 고개를 저었다.

"의사라고 모든 환자를 살릴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너도 주치의 하면서 느꼈겠지만."

"......"
"우리는 그저 의학이라는 학문이 허용하는 울타리 안에서만 환자를 살려 낼 수 있어. 슬기는 그 울타리 바깥에 있었던 거고." - page 146


그리고 '죽음'에 대해......


"할아범, 지금쯤 어디 있으려나."

"......"

"염라대왕 앞에서 담배 연기 뻑뻑 뿜어 대는 거 아닌지 몰라. 그렇게 좋아하는 담배 피운다고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겠다. 살판났겠어, 아주."

두 사람의 눈이 얽혔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현우는 문득 죽는다고 해서 그 사람의 존재가 함께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기억해 주는 누군가의 마음 속에서 여전히 살아 움직인다. 인생의 궤적에서 어느 순간 만났던 이들의 마음속에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는 것이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기영이 들켰구마이, 하고 멋쩍게 웃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 page 282 ~ 283


​의사가 되기 위한 과정을 묘사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한 방향을 향해 무리 지어 날아가고 있다는 그의 이야기가 애처롭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문득 이번 '코로나 19'를 위해 힘쓴 이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통풍도 안되는 비닐옷을 입고, 보호장구로 상처에도 불구하고 24시간 불철주야 애쓰신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살아감에 또한번 감사함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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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탐정 이상
김재희 지음 / 시공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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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와 추리에 능한 천재 시인 이상과

생계형 소설가 구보의 경성 활약극


1930년 경성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낭만 미스터리라는 이 소설.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로 이 소설.

매력적인 이끌림이 있었습니다.


경성 탐정 이상

 


홑적삼 위로 와이셔츠를 갖춰 입고, 그 위에 조끼와 서양식 코트를 입고 낡은 구두로 발걸음을 옮겨보는 그, 구보.

좁은 골목을 몇 번 더 돌아 도착한 건물 안 사무실은 한개해 보입니다.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문간을 지키고 있다가 마침내 심부름꾼으로 보이는 소년을 붙잡고 말을 건넵니다.


"회의실이 어디입니까? 염상섭 선생님을 뵈러 왔습니다." - page 11


텅 빈 편집부 전용 회의실에 겸연쩍게 앉아있는 구보.

그러다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물결치듯 안으로 쑥 들어옵니다.

기묘한 느낌의 이 사내.


"여기가 구인회가 모이는 곳이오?"

구보는 고개를 숙이며 안경 위로 비죽 나온 앞머리를 슬쩍 넘겼다.

"저, 저는 박태원이라고 합니다. 구보라고 편하게 부르십시오.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구보가 먼저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나 일본인 순사 앞, 혹은 여러 사람 앞에 나설 때에는 유난히 긴장하여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었다.

"나는 김해경이라 하오. 남들은 이상이라고 합니다만." - page 13


다시 회의실 문이 삐걱거리며 열립니다.

이마에 커다란 혹, 둥글넓적한 얼굴에 사람 좋은 미소, 당당한 풍채에 곧잘 어울리는 조선 한복을 입은 그, 문단의 대선배 염상섭이었습니다.

구보는 얼른 일어나 반듯하게 인사를 올리지만 상은 파이프 연통에 불을 붙이고는 느긋하게 연기를 뿜고 앉아있습니다.


"어, 혹부리 선배, 우리를 부른 이유는 뭐요? 구인회 노땅들한테 인사치레나 하자고 부른 건 아닐 테고." - page 17


"이 사건을 해결하게."

상섭은 책상에 놓인 누런 종이봉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기한은 1주일 주지. 이 문제의 단서를 포착해 결정적인 해결법을 제시하면 자네들을 정식 구인회 회원으로 받아주겠네." - page 19


그렇게 천재 시인 이상(본명 : 김해경)과 생계형 소설가 구보(본명 : 박태원) 두 문인의 사건 풀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있노라면 영국의 '셜록 홈즈'와 '왓슨 박사'가 떠오르게 됩니다.

사건을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뛰어다니는 이상의 모습은 홈즈의 모습이었고 그의 든든한 조력자 구보의 모습은 왓슨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주어지는 사건은 종로경찰서 '기무라 형사'가 해결하기 전에 그들이 먼저 범인을 잡게 됩니다.

범인을 추궁할 땐 홈즈가 했던 것처럼 사건이 일어나게 된 계기에서부터 그가 범인일 수밖에 없음을 증명하였기에 해결될 땐 통쾌감이 들곤 하였습니다.


아무래도 배경이 1930년 일제시대 경성의 모습이라 그런지 이런 이야기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구보는 몸을 움츠렸다. 사람의 잔혹한 마음에 몸서리가 쳐지는 것인지 아니면 동장군이 기승을 부려 한기가 느껴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인간의 마음이 한겨울 혹한보다 더욱 가혹하고 독한 것일지도 몰랐다. 암울한 현실 속에 독립군이 되어 인생을 걸거나, 사상이 깃든 문학을 발표해 독립심을 고취하든가 아니면 낭만시를 지어 새로운 희망을 일깨워준다든가 하는 좋은 길을 외면하고 인륜에 위배되는 범죄를 벌인 그들에게 일말의 동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 page 81


"상이, 그림에 담긴 메시지가 만약에 일본에 치명적인 약점을 안길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라도 나서서 그림을 강제적으로 빼앗아 독립투사나 상하이 임시정부 국내 연락책에게라도 넘겨야 옳은 것이 아닌가?"

상은 고개를 저었다.

"그림은 그림으로, 문화재로 남겨져야 하는 것이 옳다네. 일본 황실에서 나온 것이니 그리로 돌아가는 게 맞다고 보네. 다만 간송 선생의 애타는 심정도 이해는 가네. 언젠가 최북의 <미인도>도 조선에 돌아올 날이 있을 걸세." - page 264




사건들마다 그가 전한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인상적이었던 메시지들.


"이제 그만 돌아가게. 이곳은 바깥보다 더욱 어둠에 민감한 곳일세. 땅속이라 낮과 밤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일세. 밖의 어둠보다 잔인한 밤이 찾아오는 곳이 이곳일세." - page 162 ~ 163


진실은 아무도 모르네. 추리보다 사건수사보다 더 밝히기 어려운 것이 바로 진실이지. - page 423


사건들은 하나의 실타래로 얽혀있었습니다. 

그 중심엔......

​(이는 소설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숨가쁘게 달려오다보니 어느새 책의 마지막을 읽고 있었습니다.

이 흐름이 끊기기 전에 다음 권을 읽어야겠습니다.


영국에 셜록홈즈와 왓슨 박사가 있다면!

우리에겐 이상과 구보가 있습니다!


또다시 경성을 누비고 다닐 그들과 동행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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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 - 사고의 첨단을 찾아 떠나는 여행
짐 홀트 지음, 노태복 옮김 / 소소의책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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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유명한, '상대성 이론'이라하면 딱 떠오르는 그 분.

아인슈타인

그 어떤 과학자보다 '괴짜'로 보이는 그는 세상을 놀랄만한 많은 이론을 선보였기에 더 인상적이고 친숙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실 이 분에 대해선 알지 못했습니다.

괴델


그래서 이 책이 궁금하였습니다.

아인슈타인과 괴델이 함께 걸을 땐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을지......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

 

우선 저자는 본문에 들어가기 앞서 이 책에서 우리에게 전하고자한 바를 밝혔습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 및 일반)상대성이론, 양자역학, 군이론, 무한대와 무한소, 튜링의 계산 가능성과 '결정 문제',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소수와 리만 제타 추측, 범주론, 위상수학, 고차원, 프랙털, 통계 회귀분석 및 '종형곡선', 진리 이론 등은 내가 살면서 접한 가장 흥미로운 지적 성취이다. 이 모든 주제를 이 책에서 다루고 있다. - page 7

와~

벌써부터 '어렵다'라는 탄식이 나왔습니다.

들어는 봤는데......

과연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저자는 제 마음을 읽었나 봅니다.

그래서 덧붙인 말.

나의 이상은 칵테일파티용 잡담이다. 즉 심오한 개념을 핵심만 들추어내어 (어쩌면 냅킨에 연필로 몇 번 휘갈겨) 관심 있는 친구에게 상쾌하고 즐겁게 전달하자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나는 이 책을 통해 문외한에게는 빛나는 통찰을, 전문가에게는 뜻밖의 참신한 반전을 선사하고 싶다. 전혀 지루하지 않게 말이다. - page 7

​이 책에는 스물네 편의 글과 열다섯 편의 '짧지만 의미 있는 생각'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과학과 수학, 그리고 철학의 최근 쟁점과 주제를 위대한 사상가들의 인간적인 면모와 더불어 이야기하고 있기에 사실 일반적인 개념을 잘 모르더라도 그 흐름만은 이해할 수 있어 조금은 부담스럽게, 하지만 만족스럽게 읽어갈 수 있었습니다.


책을 펼치면 처음에 만나게 되는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책 표지에 보인 사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프린스턴에 온 지 10년이 지나자 아인슈타인은 함께 걷는 일행이 생겼다. 훨씬 젊은 그 사람은 후줄근한 아인슈타인과 달리 흰색 린넨 정장과 그에 잘 어울리는 중절모를 쓴 말쑥한 차림이었다. 둘은 연구소로 가는 아침 출근길에서, 그리고 낮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독일어로 활기찬 대화를 하곤 했다. 정장 차림의 남자는 많은 사람들이 알아보는 인물은 아닐지 모르지만, 아인슈타인은 그를 자신과 마찬가지로 혁명적 사상을 독자적으로 내놓은 동무라고 여겼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으로 물질세계에 관한 우리의 일상적 개념을 뒤집은 사람이라면, 마찬가지로 그 젊은 사람인 쿠르트 괴델은 수학이라는 추상적 세계에 혁명을 일으킨 사람이었다. - page 17 ~ 18


붙임성 좋고 웃기 좋아하는 '아인슈타인'과는 달리 침울하고 고독하고 비관적인 그, '괴델'.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둘은 그래서 더 서로에게 의존하며 대화를 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들의 이론들을 이해하고 토론하고 확립하기에 말입니다.

그래서 이 둘의 마지막 모습은 씁쓸하였습니다.

괴델과 아인슈타인 둘 다 어떤 공허함이 말년을 장식했다. 하지만 아마도 가장 공허했던 것은 시간의 비실재성에 관한 둘의 굳은 믿음이었다. - page 32


 


그리고 수학자 에미 뇌터부터 컴퓨터의 선구자 앨런 튜링, 그리고 프랙털의 발견자 브누아 망델브로에 이르기까지.

저에게는 생소한, 하지만 그들의 업적만큼은 위대한 이들의 이론이 어떻게 심화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저에겐 '앨런 튜링'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에니그마 암호 해독 임무의 책임자였던, 국가의 영웅으로 칭송받았을 그.

그리고 현대 컴퓨터의 청사진을 제작한 그.

인류에 위대한 공헌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비밀리에 붙여지고 41세의 나이로 자살로 생을 마무리한 그, 앨렌 튜링.

그 뒷배경엔 그의 '섹슈얼리티'였습니다.

이 '동성애'가 그의 위대한 업적을 덮을만한 것이었을까......

그리고 그의 죽음에 대한 의문.


튜링은 약간 부주의한 성격이었고,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사과를 먹는 습관이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한편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과와 전기 배선이 포함된' 자살 방법을 언급하기도 했다.

튜링의 죽음이 일종의 순교였을까? 완벽한 자살 - 그가 가장 염려했던 어머니를 감쪽같이 속인 - 이었을까, 아니면 (이게 더 개연성이 높을 듯한데) 완벽한 타살이었을까? 리비트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오랫동안 이런 질문을 거듭 제기했지만, 여전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리비트는 튜링이 전하려 했던 메시지가 지금까지 외면 받아왔음을 우리더러 생각해보라는 듯하다. "동화 속에서 백설공주가 먹은 사과가 그녀를 죽인 게 아니다. 왕자가 와서 입맞춤으로 깨우기 전까지 그녀를 잠재울 뿐이다." - page 265


책을 읽고나니 이런 질문 하나가 저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갈것인지.

결국 저자도 앞서 이야기했던 '윤리'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도록 이 책은 이끌고 있었습니다.


또다시 읽게 된다면 그에 대한 방향을 잡을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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