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영혼 뫼비우스 서재
막심 샤탕 지음, 이세진 옮김 / 노블마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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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틀랜드 경찰서 강력반의 조슈아 브롤린은 FBI에서 훈련받은 프로파일러 능력을 발휘하여 크고 작은 사건들을 해결한 덕분에 30대 초반에 수사 지휘권을 거머쥔 인물입니다. 포틀랜드 일대에서 여성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지만 수사는 답보상태이고 언론은 범인에게 포틀랜드 인간 백정이라는 별명을 붙여가며 경찰을 압박합니다. 그러던 중 브롤린은 과학수사팀의 도움을 받아 살해 현장을 특정할 수 있었고, 범인의 네 번째 범행을 가까스로 저지하며 감금돼있던 줄리에트 라파예트를 구해내는데 성공합니다. 줄리에트는 심각한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예전의 삶을 되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1년 후 포틀랜드 인간 백정의 모방범이 나타나자 브롤린과 줄리에트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악의 영혼200226세의 막심 샤탕이 내놓은 악의 3부작가운데 첫 편입니다. 처음 읽은 건 대략 2007년 전후로 기억하는데, 인생 스릴러라고 생각하면서도 서평을 남기지 않은 것이 아쉬워서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젊은 여성을 납치 살해한 뒤 끔찍한 형태로 시신을 훼손하는 포틀랜드 인간 백정은 그 어느 잔혹한 스릴러 속 연쇄살인마와도 비교되지 않는 엽기적인 악마입니다. 하지만 그를 저지한 브롤린과 그에게 목숨을 잃을 뻔 한 줄리에트의 진정한 악몽은 사건 1년 후 포틀랜드 인간 백정을 완벽하게 모방한 또 다른 악마가 나타나면서 시작됩니다. 더구나 이번 범인은 경찰에게 보낸 은유로 가득 찬 편지를 통해 자신의 범행 또는 피해자의 위치를 알려주는데, 그 때문에 브롤린을 비롯한 포틀랜드 경찰은 범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 더욱 애를 먹습니다. 그런 와중에 피해자는 연이어 발생하고 브롤린과 줄리에트의 공포는 더욱 깊어집니다.

 

6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방대한 분량에 비해 사건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물론 브롤린과 경찰을 대혼란에 빠뜨리는 모방범의 범행 수법과 동기라든가 1년 만에 다시금 연쇄살인마의 표적이 될지도 모른다는 줄리에트의 공포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애쓰는 브롤린의 분투 등 다양한 서사들이 이 방대한 분량을 지루할 틈 없이 채워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못잖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건 조슈아 브롤린이 설파하는 프로파일링 기법과 살인자를 잡기 위해 살인자가 된다.”는 프로파일러의 특별한 수사법에 대한 묘사입니다. 살인 현장을 꼼꼼히 살펴본 브롤린이 범인의 특징과 윤곽에 대해 한 페이지 넘게 프로파일링을 하는가 하면, 결정적인 순간에는 스스로 범인이 되어 살해 상황을 상세히 재현해보다가 생각지도 못한 단서를 포착하기도 합니다. 프로파일러라는 개념이 더는 생소한 개념이 아니다 보니 이 작품을 최근에 읽게 된 독자라면 이 대목들이 다소 지루하게 읽힐 수도 있는데, 제가 이 작품을 읽은 2000년대 중반만 해도 무척 파격적이고 신기하게 여겨진 게 사실입니다.

 

대략의 줄거리조차 잊고 있었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던 건 이보다 더 끔찍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듭됐던 잔혹한 묘사들입니다. ‘인간 백정과 모방범의 범행 장면은 말할 것도 없고, 차가운 해부대 위에서 진행되는 부검 장면 역시 마치 눈앞에서 지켜보는 듯 생생하고 상세하게 그려져서 어지간히 무딘 저조차도 수시로 불편함을 느낀 기억이 선명하기 때문입니다. 피해자가 모두 여성이란 점 때문인지 디테일에 대한 찬사 못잖게 선정성에 기댄 서사라는 비난 어린 서평이 적잖았던 것도 기억나는데, 이에 대해서는 독자마다 조금씩 생각이 다를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제가 손에 꼽을 수 있는 역대급 잔혹 작품임에는 분명하니 이런 스타일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관심을 가져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20년도 넘은 작품이지만 지금쯤 개정판이 나와도 괜찮을 정도로 스릴러로서의 완성도도 높고 프로파일링에 대한 해박한 묘사도 수준급인 작품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내용이 워낙 많아서 초반부 정도의 줄거리만 소개했는데, 좀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인터넷 서점이나 블로그에서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찾아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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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속의 여인
로라 립먼 지음, 박유진 옮김, 안수정 북디자이너 / arte(아르테)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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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미국 볼티모어. 매디 슈워츠는 37살 생일을 앞두고 그동안의 안락한 삶에 작별을 고합니다.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며 집을 나간 매디는 열악한 생활을 견디는 와중에 흑인 경찰 페디와 인연을 맺는가 하면 11세 소녀 실종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일을 계기로 신문기자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겨우 볼티모어 신문사 스타에 들어갔지만 기사 작성과는 거리가 먼 잡무만 떠맡으며 혹독한 수습생활을 견디던 매디는 호수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흑인여성 클레오의 사건에 관심을 갖고 어떻게든 진실을 알아내 특종을 따내기로 마음먹습니다. 하지만 경찰과 사건 관련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스타의 기자들까지 냉소만 보낼 뿐입니다. 더욱 분발하던 매디는 유력한 단서를 손에 넣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큰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1997년 데뷔 이래 세계 유수의 범죄문학상을 석권했다는 로라 립먼의 프로필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 호수 속의 여인을 통해 그 이름을 처음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전까지 한국에는 (앤솔로지 작품인 라인업을 제외하면) 단 두 작품만 소개됐다는 점도 그녀의 명성에 비하면 다소 의외로 보였습니다.

 

줄거리만 보면 주인공이 기자인 살인사건 미스터리로 예단할 수 있는데, ‘호수 속의 여인은 미스터리 외에도 다양한 면을 지닌 작품입니다. 큰 뼈대는 기자 지망생매디 슈워츠가 호수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흑인여성 클레오의 죽음의 진실을 찾는 이야기지만, 그 외에도 1960년대 미국에서 벌어졌던 온갖 종류의 차별 - 여성, 흑인, 종교 에 대한 사실감 넘치는 서사와 함께 3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욕망과 희망 사이에서 혼란을 겪으며 살아온 매디 슈워츠라는 한 여성의 굴곡진 연대기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미스터리, 사회 고발물, 여성소설이라는 최소한 세 개의 얼굴을 지닌 작품이라고 할까요?

 

10대 때부터 엄청난 카리스마와 외모로 상대방을 장악했던 매디는 원하는 것은 모조리 손에 넣는 능력자였지만 17살에 악몽과도 같은 일을 겪은 탓에 18살이 되자마자 자신의 체면을 세워줄 수 있을 것 같은 남자와 부랴부랴 약혼을 했고, 이후 겉으로는 안락한 삶을 누리는 것처럼 지냈지만 실은 자신의 처지가 시녀에 불과하다는 자괴감에 빠진 채 살아왔습니다. 그런 그녀가 집을 뛰쳐나온 뒤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는 칼럼니스트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군분투하는, 특히 백인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경찰과 언론의 마초들에게 수시로 당하는 지독한 차별을 이겨내는 모습은 1960년대에 태동한 페미니즘 이슈를 극적으로 반영하고 있어서 무척이나 눈길을 끈 대목입니다. 스티븐 킹이 당시 여성에게 기대되는 것과 여성이 열망하는 것 사이의 간극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찬사를 보낸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으로 보입니다.

 

매디의 캐릭터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건 새 연인인 흑인경찰 페디입니다. 당시 흑백인종간의 연애가 불법이었던 탓에 데이트는커녕 함께 외출하는 것조차 꿈도 꾸지 못하던 매디와 페디는 늘 좁은 방에서 서로의 몸을 탐닉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불행한 연인입니다. 경찰인 페디는 매디의 취재와 조사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두 사람의 존재감은 미스터리보다는 당시의 부당했던 사회상을 폭로하는 장면들에서 더욱 빛이 납니다.

 

클레오의 죽음의 진실을 추적하는 매디의 행보는 거침없습니다. 정식 기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건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지독할 정도로 쫓아다니며 작은 단서라도 얻기 위해 분투합니다. 페디의 도움도 있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통해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단서를 확보하기도 합니다. 당연히 매디를 방해하는 자들이 나타나기도 하고, 때론 신변에 위협을 느끼는 아슬아슬한 상황도 발생합니다. 하지만 매디의 롤러코스터 같은 과거사와 온갖 차별에 대한 서사가 워낙 묵직하게 읽혀서 그런지 미스터리 자체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 갔던 게 사실입니다.

또한 보기 드문 독특한 구성 역시 미스터리에의 몰입을 방해한 요인 중 하나입니다. 즉 매디가 누군가를 만나거나 탐문하는 챕터가 끝나자마자 바로 그 누군가1인칭 주인공인 챕터가 이어집니다. 중요한 조연뿐 아니라 매디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그 누군가로 등장하는데, 이들은 사건이나 매디에 관해 말하기도 하지만 때론 자신만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뒤 사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이야기 역시 희한하게도 무척 재미있어서 역설적이지만 독자로 하여금 미스터리 서사를 망각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일으키곤 합니다.

 

정통 미스터리를 기대했다가 차별이 만연했던 1960년대를 살아간 한 여성의 버라이어티한 이야기를 읽게 된 셈이지만 개인적으론 의외로 재미있는 책읽기가 됐습니다. 미스터리 서사가 좀더 강렬했더라면 더 바랄 것이 없었을 텐데 그 아쉬움은 한국에 출간된 로라 립먼의 두 작품들(‘죽은 자는 알고 있다’, ‘나는 네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로 달래볼까, 생각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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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물이 너를 베리라
S. A. 코스비 지음, 박영인 옮김 / 네버모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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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동성 부부인 아이지아와 데릭이 잔인하게 살해당합니다. 원한 관계로만 추정될 뿐 아무런 단서도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경찰의 수사는 거의 답보상태입니다. 피해자들의 아버지인 아이크와 버디는 직접 진상을 알아내기로 하고 위험천만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성 소수자 문제를 다루는 비영리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하던 아이지아가 어떤 일을 보도하려던 게 사건의 기점임을 알게 된 아이크와 버디는 아들들이 살던 집에서 단서를 찾으려 하지만 갑자기 쳐들어온 괴한들에게 습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들들을 살해한 갱단의 정체를 파악한 것은 물론 사건 이면에 한 여자가 연루된 사실도 알아냅니다. 아이크와 버디는 여자를 찾기 위해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지만 사태는 점점 그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뿐입니다.

 

처음 그 이름을 들어본 작가였지만 검은 황무지라는 묵직한 제목과 어둡고 황량한 분위기를 발산하는 표지에 이끌려 만났다가 곧바로 팬이 된 S. A. 코스비의 두 번째 한국 출간작입니다. ‘검은 황무지도 그랬지만 묵직하면서도 돌직구처럼 날아가는 S. A. 코스비의 서사는 단순한 진실 찾기를 넘어 깊은 여운을 자아내는 다양한 주제를 동시에 다루고 있습니다.

 

내 눈물이 너를 베리라는 아들들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려는 두 아버지의 분투가 메인 줄거리지만, 그에 못잖게 인종, 세대, 성 소수자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사회파 스릴러이기도 합니다. 흑백 동성 부부였던 아이지아와 데릭은 가족 그 누구에게도 축복받지 못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들의 아버지였던 아이크와 버디는 아들들의 커밍아웃에 분노했고 그들의 결혼식을 외면했으며 그들이 살해당하기 전까지도 거의 절연하다시피 지내왔습니다. 하지만 사건 이후 두 아버지의 가슴 속엔 돌이킬 수 없는 회한만 남게 됐고, 아들들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끝 모를 자책감과 죄책감에 고통스러워합니다. 결국 아들들에게 용서를 구하며 그들의 목숨을 앗아간 자들을 향해 순수한 증오심을 담아 복수하기로 결심합니다.

 

인종도 다르고, 처지도 다르지만 아이크와 버디는 치명적인 전과자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갱단과 맞서 싸우기에는 턱없이 나이가 든 중년들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폭력에 익숙한 전과자라는 이력이 그들의 유일한 무기이자 버팀목입니다. 아이크와 버디를 상대하는 악당들은 늙은 소금과 후추’(흑백 인종을 일컫는 속어)라며 조소를 보내다가 이내 나이를 초월한 그들의 폭력에 눈이 휘둥그레지고 잠시 후엔 피와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악몽을 경험하게 됩니다. S. A. 코스비의 폭력 묘사는 그리 잔혹한 편은 아니지만 너무나도 사실적이어서 마치 직접 목격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그래선지 아이크와 버디가 거침없이 응징을 가하는 장면들은 사이다 같은 통쾌함과 함께 그들의 꺼지지 않을 분노를 100% 생생하게 공감할 수 있게 만듭니다.

 

피와 살점이 튀는 폭력을 동반한 복수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복수의 여정을 통해 나이 든 두 남자가 많은 것들을 깨달으며 변화하는, 하지만 너무 늦어버린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라는 출판사의 소개글처럼 아이크와 버디는 아들들의 죽음의 진실에 다가가면 갈수록 더욱 깊은 회한에 빠져듭니다. 하지만 자책감과 죄책감에 짓눌렸던 초반과 달리 두 사람은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조금씩 아들들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결국엔 그들이 남긴 손녀 아리아나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깨달음은 너무 늦게 찾아왔지만 이제는 아들들을 편안한 마음으로 가슴 속에 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폭력적이지만 감동적인 스릴러라는 평단의 호평은 아마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게 아닐까 싶습니다.

 

S. A. 코스비의 최근작은 2023년에 출간된 ‘All the Sinners Bleed’입니다. 두 편의 전작이 모두 호평을 받았으니 빠르면 올해 안에 한국에 소개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문학성까지 가미한 유려한 문장과 묵직하면서도 속도감 높은 스릴러 서사까지 겸비한 S. A. 코스비의 신작 소식이 하루라도 빨리 들려오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사족으로... ‘검은 황무지와 달리 내 눈물이 너를 베리라에선 적잖은 오타가 눈에 띄었습니다. 한참 몰입해있던 중에 불쑥불쑥 튀어나온 오타 때문에 한숨이 나곤 했는데, 단순히 옥의 티라고 보기엔 좀 과한 편이었습니다. 출판 과정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지만 오타는 정말 피할 수 없는 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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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자들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
M. J. 알리지 지음, 유혜인 옮김 / 북플라자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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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샘프턴의 외진 곳에서 연이어 잔혹하게 훼손된 시신들이 발견됩니다. 범인은 피해자들의 가슴을 열고 무자비하게 심장을 뜯어낸 뒤 그것을 택배상자에 담아 가족이나 직장으로 보냅니다. 사우샘프턴 중앙경찰서의 헬렌 그레이스 반장은 첫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연쇄살인의 가능성을 제기했고 그 예상은 적중합니다. 언론에선 피해자들이 성매매 도중 살해된 사실을 지적하며 잭 더 리퍼에 대한 역습’, 즉 매춘부가 성매매 남성들을 단죄하는 사건이라고 보도하는 가운데 헬렌과 수사진은 좀처럼 단서를 찾아내지 못해 애를 먹습니다. 한편 1년 전 해결한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헬렌은 수사 외에도 경찰 내부와 언론 등 사방에서 가해지는 공격 때문에 큰 위기에 봉착하고 맙니다.

 

이니미니에 이은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두 번째 작품입니다. 헬렌 그레이스는 영국의 여형사이자 심각한 유년기의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으며 광적인 오토바이 마니아라는 점에서 안젤라 마슨즈가 창조한 걸 크러쉬 형사킴 스톤과 무척 닮은꼴입니다. 캐릭터 자체도 매력적이지만 시리즈 첫 편인 이니미니에서 평생 지워지지 않을 큰 상처를 입은 탓에 그 후 헬렌이 어떤 삶을 살게 됐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매매 남성 연쇄살인을 해결하는 게 헬렌의 가장 큰 미션이며 이 작품의 중심 줄거리이긴 하지만 그에 못잖게 독자의 눈길을 끄는 건 헬렌을 향한 유무형의 날선 공격들입니다. 새로 부임한 총경 세리 하우드는 헬렌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는 것은 물론 그녀의 공을 빼앗는 짓도 서슴지 않는 전형적인 관료 빌런입니다. ‘이니미니에서 헬렌 못잖게 큰 트라우마를 얻은 찰리 브룩스는 1년 만에 경찰에 복직하지만 한때 롤 모델로 삼을 정도로 추앙했던 헬렌과의 관계가 서먹해진 것은 물론 그녀가 자신의 복직을 반대했다는 말을 듣곤 어떻게든 공을 세워 그녀에게 한 방 먹일 각오를 다집니다. 또한 특종과 명성을 위해서라면 좀더 많은 살인이 벌어져도 좋다고 여기는 악질 기자 에밀리아 개라니타는 전작에 이어 헬렌과 수차례 충돌을 거듭하는데 이번에는 그녀를 완전히 망쳐놓을 작정으로 넘어선 안 될 선을 수시로 넘습니다.

 

400여 페이지의 분량임에도 무려 121개의 챕터로 나뉘어져있는데 그만큼 빠른 템포와 속도감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연이어 희생자가 발생하는 가운데 수사는 지지부진하고 자신을 향한 악의에 찬 공격들까지 방어해야 하는 헬렌의 위기가 더욱 숨가쁘게 느껴지는 건 이런 짧고 빠른 호흡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인물의 심리나 배경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가 영미권 스릴러의 특징이지만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는 독자를 조급하게 만들 정도로 딱 필요한 요소들만 언급하며 이야기를 빠르게 전개시킵니다.

 

개인적으론 연쇄살인사건보다 헬렌이 겪는 시련들이 더 재미있게 읽혔는데, 바꿔 말하면 그만큼 사건 자체가 덜 흥미로웠다는 뜻입니다. 연이어 희생자가 발생하면 그만큼 독자가 느끼는 위기감도 함께 고조돼야 하는데, 이 작품 속의 연쇄살인은 동어반복 같은 지루한 인상이 더 강했습니다. 마지막에 밝혀진 범인의 정체와 동기는 나름 반전의 맛을 전해주긴 하지만 무게감이나 진정성 면에서는 약해 보인 게 사실입니다. 어쩌면 전작인 이니미니가 워낙 세고 독했기에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컸던 게 아쉬움의 진짜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엔 이니미니에 대한 스포일러가 굉장히 많이 들어있습니다. 또한 이니미니를 읽지 않으면 여러 가지 팩트와 인물들의 심리 등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대목들이 많기도 합니다. 헬렌은 말할 것도 없고 주요인물 대부분이 이니미니속 사건의 여파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급적이면 이니미니를 먼저 읽은 뒤에 이 작품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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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워닝 잭 매커보이 시리즈
마이클 코넬리 지음,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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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살인사건 전문기자로 활약하며 두 개의 큰 사건(‘시인’, ‘허수아비’)에 관여한 것은 물론 그 과정을 책으로 펴내 부와 명예를 누렸던 잭 맥커보이. 하지만 50대가 된 지금 그는 페어 워닝(Fair Warning)이라는 소비자 보호를 위한 뉴스 사이트에서 소시민의 경비견을 자칭하며 평범한 기자 생활을 이어가는 중입니다. 그런 그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연쇄살인의 단서를 발견하곤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사고나 자살로 위장한 듯한 엽기적인 살해방법도 특이해 보였고 피해자들이 특정업체에 DNA 조사를 의뢰했던 공통점까지 알아낸 잭은 전직 FBI 요원이자 연인이었던 레이철 월링을 찾아가 도움을 청합니다.

 

시인’, ‘허수아비’, ‘페어 워닝으로 이어지는 잭 매커보이 시리즈는 단 세 편뿐이지만 무려 24년에 걸친 긴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1996시인에서 콜로라도의 중소신문사 기자였던 잭은 2009허수아비에서는 LA타임스의 잘 나가는 고액 연봉자였고,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2020페어 워닝에서는 소비자 보호를 기치로 내건 인터넷 매체의 기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팔팔하던 20~30대의 잭이 어느 새 50대가 된 건 서글픈 일이지만 살인사건 전문기자라는 그의 본능은 여전히 날카로움과 집요함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이 시리즈는 잭과 레이철 시리즈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레이철 월링의 비중과 활약이 압도적입니다. 두 사람은 기자와 FBI 요원이라는 관계를 넘어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굴곡을 겪어왔습니다. “그녀와의 관계는 뜨겁고도 차가웠고 강렬하면서도 소원했으며 친밀하면서도 엄격하게 직업적이었다. 궁극적으로는 마음이 찢어질 듯한 관계였다. 처음부터 레이철은 내 가슴에 거의 낫지 않을 구멍을 남겼다.”라는 잭의 고백대로 애정과 증오를 수없이 주고받으며 25년에 가까운 관계를 이어온 셈입니다. 그리고 허수아비이후 달콤한 미래까지 꿈꿨다가 돌이킬 수 없는 파탄을 맞이했던 두 사람이 오랜만에 또 다시 희대의 연쇄살인마를 잡기 위해 손을 맞잡습니다. 이 시리즈를 읽어온 독자라면 진실 찾기 또는 진범 잡기 못잖게 잭과 레이철이 어떤 엔딩을 맞이하게 될지 무척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1년 전 우연히 만나 딱 한 번 관계를 가졌던 여자가 살해된 사건 때문에 잭은 경찰에게 심문을 당합니다. 그녀의 사인이 고리뒤통수 관절 탈구, 즉 목을 180도 비틀어 죽인 특이한 케이스라는 점에 주목한 잭은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똑같은 사인으로 죽은 여자가 전국적으로 여러 명이라는 점을 알아냅니다. 또 그녀들이 모두 같은 업체에 자신의 DNA 조사를 의뢰했다는 사실까지 알아낸 잭은 본격적인 조사를 위해 레이철 월링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페어 워닝의 동료기자 에밀리까지 가세하여 의심스러운 부분들을 조사하던 잭과 레이철은 큰 충격에 빠집니다. 아무런 규제도 받지 않는 DNA 산업이 현실에서 얼마나 끔찍한 일들을 일으킬 수 있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유전학 연구의 상업화에 따른 실제적 위험에 장르적 관습을 영리하게 적용한 놀라운 작품이라는 뉴욕 타임스의 북 리뷰처럼 페어 워닝은 제대로 된 규제도 없이 무분별하게 일반상품처럼 취급되는 DNA의 위험성을 적시한 작품입니다. 여기에다 여성혐오, 개인정보, 다크웹, 사이버 스토킹, 연쇄살인 등 다양한 코드들이 믹스되면서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 중에서도 단연 두드러지는 사회파 스릴러의 서사를 선보입니다. 2023년에 읽은 유명 작가의 스릴러에서도 페어 워닝과 비슷한 방식으로 DNA 문제를 다룬 적이 있는데, 아직 한국에서는 흔한 일이 아니지만 언제라도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묵직하면서도 서늘한 경고처럼 읽혔습니다.

 

50대에 이른 잭과 레이철은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특종에 목을 매는 통속적인 기자지만 잭은 정의를 구현하는 일에 매정하지 않은 캐릭터입니다. 과거 조연으로 등장한 작품에서 얄미운 3류 기자로 묘사된 적도 있지만 나름 나이만큼 성숙해졌다고 할까요? 레이철을 향한 꺼지지 않는 지고지순한(?) 감정도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불미스러운 일로 FBI를 그만두고 지금은 사람들 뒷조사로 먹고살지만 레이철의 프로파일러로서의 본능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잭의 요청으로 오랜만에 사건에 뛰어든 레이철은 그녀 특유의 매력을 발산하며 과거의 전성기를 다시 한 번 독자에게 선보입니다.

 

페어 워닝의 엔딩은 두 사람의 미래에 관해 꽤 눈길을 끄는 떡밥을 남겨놓습니다. 물론 이 작품이 출간된 2020년 이후 새로운 잭 매커보이 시리즈가 나오진 않았지만, 언젠가는 잭과 레이철의 멋진 활약을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한 가지 바람이라면 그 시기가 너무 늦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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