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질은 부드러워
아구스티나 바스테리카 지음, 남명성 옮김 / 해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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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인 바이러스로 지구상에서 동물이 사라진 이후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몇몇 정부는 제한적인 인육 소비를 허가했습니다. 수의사의 꿈을 접고 지금은 인육 가공 공장의 2인자가 되어 인육의 도축과 유통 과정에 깊이 관여하고 있지만 마르코스 테호는 인육을 절대 먹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릴 적 아버지와 자주 갔던, 하지만 지금은 폐허가 된 빈 동물원에 가서 견디기 힘든 비참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으려 애쓰곤 합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고기용 인간을 사육하는 업자가 최상급 암컷 한 마리를 선물합니다. 기르든 도살하든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지만 마르코스는 그 암컷을 헛간에 두고 보살핍니다. 갓 태어난 아들이 숨진 뒤 아내와 별거 중이던 마르코스는 어느 날 암컷에게 미묘한 감정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특수설정 미스터리로 유명한 시라이 도모유키의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역시 이 작품과 마찬가지로 동물이 사라진 뒤 인육을 소비하는 세상을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그 작품에서 인간이 소비할 수 있는 인육은 오직 자신의 체세포로 생산된 식용 클론뿐입니다. 하지만 육질은 부드러워에는 끔찍한 방식으로 생산되고 도축되는 진짜 인육이 등장합니다. 고기용 암컷과 수컷 간의 인공수정을 통해 태어난 뒤 사육업자에게 길러지는 최상급 인육부터 심각한 범죄를 저질러 도축형을 선고받은 자들, 사고나 병으로 사망한 자들, 외국에서 수입된 고기용 인간 등 진짜 인간의 몸이 동물성 단백질의 원천으로 이용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니라 개체, 고기, 제품, 암컷, 수컷으로 불리는 그들은 우리에 갇힌 채 물과 사료로 키워지며 때론 신속한 대량생산을 위해 성장 촉진제를 투여받기도 합니다. 그들 중엔 돈 많은 사냥꾼들의 수렵장에 끌려가 인간 사냥감이 되거나 생체실험 연구소에 팔려가 갖가지 실험에 이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히려 가장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건 도축 대상이 되는 건데, 도축된 그들의 몸은 무엇 하나 버려지는 부위 없이 완벽하게 소비됩니다.

작가는 식인이 합법화된 세상에서 인육이 어떻게 길러지고 소비되는지를 다큐멘터리처럼 보여주는 한편, 사육업자, 육류가공업자, 가죽가공업자, 인간사냥꾼, 생체실험 연구소, 성매매 업소 등 이른바 고기용 인간들을 자신의 이익이나 욕망에 이용하는 다양한 군상들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기도 합니다.

 

피와 살이 난무하는 잔인한 장르물을 어지간히 읽은 편이지만 사육-도축-가공-소비로 이어지는 식인의 일련의 과정에 관한 상세한 묘사에는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비위가 약한 독자라면 나름 큰 각오를 하고 읽어야 할 작품입니다.

다만 흥미 위주의 식인 이야기를 기대해선 안 됩니다. 또 채식주의자인 작가가 육류 소비를 비난하기 위해 쓴 작품도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를 먹어 치우며 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현대 자본주의의 폐해와 끝을 알 수 없는 인류의 탐욕을 그린 작품에 가깝습니다.

주인공 마르코스 테호는 인육을 권장하는 TV광고가 난무하는 미친 세상에서 거의 유일하게 인간성을 유지하고 있는 인물인데, 작가는 그와 그 주변사람들 - 과거 도축업자였지만 동물이 사라지고 인육이 등장하자 치매에 걸려버린 아버지, 아이가 돌연사한 뒤 패닉 상태에 빠진 채 친정으로 돌아가버린 아내, 어느 날 갑자기 마르코스의 집안에 머물게 된 최상급 고기용 암컷’, 그리고 괴로움 속에서도 마르코스가 매일 같이 만나야만 하는 비인간적인 인육 관련업자 등 - 을 통해 헤어날 수 없는 디스토피아의 비극을 절절하게 그려냅니다.

 

내용과 장르를 불문하고 디스토피아 스토리의 엔딩은 언제나 궁금증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암울한 상황에서도 작은 희망을 남긴 채 마무리될지, 마지막 장을 덮은 독자에게 한없이 무겁고 암담한 여운만 남겨 놓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인데, ‘육질은 부드러워의 경우 설정 자체가 작은 희망조차 남길 여지가 없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엔딩 때문에 여운의 무게와 암담함은 더욱 무겁고 진하게 느껴졌습니다.

 

동물은 절멸시키되 인간만 살려놓는 바이러스가 존재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만에 하나 육질은 부드러워의 세상이 도래한다면 과연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마지막 장을 덮고 표지를 다시 들여다보며 그런 의문을 떠올려보니 책을 읽을 때보다 더더욱 착잡해지고 암울해질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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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1
조엘 디케르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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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6, 미국의 지성이자 존경받는 문학교수이며 국민작가로 칭송받는 해리 쿼버트의 자택 정원에서 33년 전 15살의 나이에 실종된 소녀 놀라 켈러건의 유해가 발견됩니다. 유해 옆엔 해리의 대표작인 악의 기원의 원고 뭉치가 놓여 있었고 그는 즉시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돼 구치소에 수감됩니다. 33년 전 30대 중반이던 자신과 15살이던 놀라 켈러건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으며 악의 기원은 두 사람의 사랑을 모티브로 한 책이라는 해리의 자백에 문학계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 전역이 큰 충격에 휩싸입니다. 한편 데뷔작으로 정상에 오른 젊은 소설가이자 해리의 특별한 제자인 마커스 골드먼은 그가 결코 놀라 켈러건을 죽였을 리 없다는 확신을 갖고 직접 진상 조사에 나섭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2013년에 처음 출간됐을 때부터 관심을 가진 작품이지만 개정판이 나온 11년 뒤에야 읽게 된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엄청난 분량(개정판 기준 1~2권 합계 1,100)에 대한 부담감이었고, 또 하나는 2019년에 출간된 스테파니 메일러 실종사건을 끝까지 읽어내지 못하고 도서관에 반납한 탓에 조엘 디케르는 나와는 궁합이 맞지 않는 작가라고 예단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밝은세상의 서평단 제안이 아니었다면 영영 읽지 못할 뻔한 작품인데, 이 매력적인 이야기와 가까스로 인연이 닿은 건 정말 행운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이야기의 뼈대는 간단합니다. 국민작가인 해리 쿼버트가 33년 전 뉴햄프셔주의 소도시 오로라에서 15살 소녀 놀라 켈러건을 살해하고 암매장한 사건의 진실을 그의 제자이자 미국 문학계의 신성인 마커스 골드먼이 강력계 형사 페리 게할로우드의 도움을 받아 파헤치는 이야기입니다. 인터넷서점에선 이 작품을 프랑스 문학으로 분류해놓았지만 미스터리 스릴러의 서사가 바탕에 깔려 있어서 프랑스 문학에 거부감을 가진 독자라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줄거리만 보면 1,100쪽이라는 분량이 의아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범죄 청정지역으로 불려온 소도시 오로라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지독하다 싶을 정도의 탐문을 벌이는 마커스의 행보를 쫓아가다 보면 엄청난 디테일의 힘과 마력에 여러 차례 놀라게 되면서 왜 이토록 방대한 분량이 필요했는지를 쉽게 수긍하게 됩니다.

또한 단순히 범인은 누구?’라는 미스터리 외에도 다양한 서사가 포진돼있어서 조금의 지루함도 없이 책장을 넘길 수 있습니다. 오로라 주민들에게서 감지되는 비밀과 거짓말, 시기와 질투, 탐욕과 이기심은 33년 전 사건의 이면에 더럽고 추악한 진상이 숨어있음을 예감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그 누구라도 놀라 켈러건 살해범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팽팽한 긴장감을 선사합니다. 또한 각별한 사제관계인 해리와 마커스를 통해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소설가의 세계를 내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데, 사건 자체와는 무관해 보이던 이 소설가에 관한 심층적 고찰은 막판에 이르러 미스터리 서사와 결합되면서 큰 놀라움과 함께 그 존재의 이유를 드러냅니다.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의 가장 큰 매력은 시종 쉴 새 없이 터지는 반전입니다. 놀라 켈러건 살해용의자가 수차례 뒤바뀌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33년 전부터 지금까지 오로라 주민들이 품어온 숱한 비밀과 거짓말이 폭로되는가 하면, 15살의 나이에 30대 중반인 해리와 사랑에 빠졌던 놀라 켈러건의 충격적인 과거가 드러나기도 하고, 마커스의 존경과 믿음의 대상이자 사건의 핵심인물인 해리마저 여러 차례 마커스의 뒤통수를 치는 반전을 일으키곤 합니다. 그야말로 반전의 불꽃놀이를 보는 느낌이랄까요?

 

방대한 분량에 걸맞게 등장인물도 많고 관계도 복잡해서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진 못했지만 이 작품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홍보 카피의 헤드라인 정도만 참고한 상태에서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인터넷서점의 출판사 소개글도 꽤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스포일러는 아니지만 책읽기의 재미를 반감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마음만 먹으면 만 하루 안에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을 정도로 흡인력이 대단한 작품이니 저처럼 분량에 부담을 느끼는 독자라도 일단 100페이지만 읽어보자”,라는 마음으로 도전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이미 한국에도 출간된 조엘 디케르의 볼티모어의 서알래스카 샌더스 사건이 이 작품과 함께 3부작으로 통한다고 합니다. 내용은 독립적이지만 마커스 골드만이 화자로 등장하는 등 일부 인물들이 겹쳐서 연작소설처럼 읽히기 때문입니다. 역시 분량이 만만찮은 작품들이지만 언젠가는 꼭 읽어볼 생각입니다. 물론 중도 포기했던 스테파니 메일러 실종사건도 재도전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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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스티븐 킹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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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의 주인공은 유령과 대화할 수 있는 소년 제이미 콘클린입니다. 죽은 직후부터 그 혼이 사라지기까지 며칠간만 대화가 가능하며 유령들은 제이미의 질문에 진실만을 답한다는 특별한 설정이 있긴 하지만, ‘유령과 대화가 가능한 능력자라는 캐릭터는 기본적으론 새롭지도, 신선하지도 않은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호러의 대가 스티븐 킹은 독자의 예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제이미의 능력을 의외의 상황과 맞닥뜨리게 하곤 연이은 반전을 선사하여 마지막 장까지 흥미와 긴장감을 놓치지 않게 만듭니다.

 

6살 소년 제이미의 능력을 아는 건 싱글맘이자 작가 에이전트인 티아뿐이지만, 그녀 역시 자신의 눈으로 제이미의 능력을 확인하기 전까진 그저 우연으로 치부했거나 아들의 정신 상태를 심각하게 걱정하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제이미가 죽은 베스트셀러 작가의 유령과 대화를 나누는 상황을 직접 목격하자 티아는 충격과 함께 아들의 능력을 믿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한편 티아의 동성 연인이자 뉴욕 경찰인 리즈 역시 그 자리에서 제이미의 능력을 목격했는데, 이후 리즈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제이미를 극히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만듭니다.

 

이야기의 뼈대만 추리면 짧은 중편으로도 소화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스티븐 킹은 금융위기, 마약, 테러, 동성애, 근친상간, 폰지 사기 등 현대 미국 사회가 안은 민감한 소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면서 호러물 이상의 풍성한 이야기를 완성시켰습니다. 제이미가 목격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유령들도 이웃의 노부인에서부터 엄마가 관리하던 베스트셀러 작가, 또래들의 가혹행위로 목숨을 잃은 소년, 10년 넘게 폭탄테러를 자행해온 흉악범, 마약 중개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해서 서사 자체를 튼실하고 볼륨감 넘치게 만듭니다.

가장 큰 사건이자 이야기의 하이라이트인 제이미 납치극은 막판에 짧고 빠르게 전개될 뿐이지만 그 전까지 차곡차곡 쌓여가는 호러의 조각들이 하이라이트 못잖게 매력적이라 조금도 지루할 틈 없이 페이지를 넘길 수 있습니다.

 

매번 스티븐 킹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느낀 점이긴 하지만 나중에가 좀더 특별하게 읽힌 이유는 책을 읽는다기보다도 맞은편에 앉은 스티븐 킹이 직접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친밀감이 여느 작품보다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1인칭 화자인 제이미가 수시로 독자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거나 직접 말을 거는 듯한 장면이 많은데, 그때마다 스티븐 킹과 마주 앉은 듯한 친밀감이 고조되곤 합니다. 그래선지 유령과 대화가 가능한 능력자인 제이미의 캐릭터 역시 조금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너무나 리얼해서 세상 어딘가에 이런 인물이 하나쯤 있을 것 같다는 착각까지 들게 됩니다. 진정한 이야기꾼인 스티븐 킹의 재능을 다시 한 번 만끽할 수 있었다고 할까요?

 

스포일러까진 아니어도 책읽기의 재미를 반감시킬 만한 내용이 많아서 줄거리가 거의 없는 서평이 되고 말았는데, 그만큼 사전 정보 없이 읽어야 제 맛을 즐길 수 있는 작품이란 뜻입니다. 스티븐 킹의 팬이 아니더라도 소름 돋게 하면서도 유쾌하고 재미있는 뜻밖의 호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나중에를 꼭 찾아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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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죽지 않은 자들의 섬
필리프 클로델 지음, 길경선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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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부 지중해에 위치한 개의 형상을 닮은 군도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이 살고 있는 한 화산섬. 외부와 거의 고립되다시피 한 그 섬에 세 구의 흑인의 시신이 파도에 떠밀려오면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비극이 시작됩니다. 시장, 의사, 신부 등 섬의 지도층은 성사가 코앞인 온천사업을 지키기 위해 시신들을 화산 구덩이에 은폐합니다. 단 한 명뿐인 섬의 교사는 엄연한 범죄행위에 반대하지만 유일한 외지인인 그가 토박이들의 뜻을 꺾진 못합니다. 하지만 육지에서 온 경찰이 페리선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섬에는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그의 태도와 말투에서 마치 시장 일행이 저지른 시신 은폐를 모두 알고 온 듯한 명백한 비난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섬은 불온한 광기에 잠식되기 시작합니다.

 

프랑스 문학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의 섬은 외형적으로는 프랑스 남부 지중해에 자리 한 가상의 화산섬을 배경 삼아 심연 속에 파묻힌 진실을 폭로하는 미스터리지만 동시에 난민 문제를 소재로 한 사회성 짙은 고발물 혹은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을 비꼰 우화이기도 합니다. 또한 섬의 이름은 그저 개의 군도’(이 작품의 원제이기도 합니다)일뿐이고, 등장인물 모두 직업 또는 그 특징으로만 명명될 뿐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있지 않으며 화산섬이라는 공간 역시 고정세트 같은 무대처럼 보여서 다분히 연극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간들의 어둡고 이기적인 심리는 몇 백 페이지의 장편만큼이나 묵직하고 심도 깊게 그려집니다.

 

화산섬의 비극은 해변에서 세 구의 흑인 시신이 발견되면서 시작됩니다. 극소수의 반발 속에 은폐가 진행되지만 육지에서 온 경찰 한 명 때문에 분위기는 반전됩니다. 이어 섬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비열한 음모가 전개되고 사태는 뜻밖의 방향으로 폭주합니다. 하지만 섬의 운명은 모두의 기대와는 달리 파국으로 치달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파국에 동조하듯 화산은 점차 빈번하게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250페이지가 채 안 되는 분량이지만 무척 다양한 코드를 품고 있는 작품입니다. ‘옮긴이의 말에서 일부 인용하면 난민 위기뿐 아니라 타인에 대한 배척, 목적을 이루기 위한 권력자들의 권모술수, 매 순간 모든 곳에서 감시당하는 사생활, 대중을 선동하는 가짜 뉴스, ‘아니면 말고식의 마녀사냥, 가정 폭력에 노출된 아동등 인간이 일으키는 현대사회의 갖가지 문제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파괴하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인간은 인간을 파괴하고 인간들의 세상을 파괴한다.”(p238)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 자체가 딱딱한 다큐멘터리 같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물론 직설적인 화법으로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대목도 있지만 대부분은 프랑스 문학 특유의 지독한 풍자와 비유로 채워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시장과 경찰(공권력), 의사(과학), 신부(종교), 교사(지식), 노파(방관자) 등 고유한 이름도 없이 등장하는 인물들은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에 몰입하는 대신 객관적인 시선으로 화산섬의 비극을 바라보게 하는 우화적인 설정이라 초반부터 눈길을 끌었습니다. 말하자면 특정인물에게 공감하거나 반감을 갖게 하지도 않고, 선과 정의가 승리하기를 혹은 악과 부패가 응징되기를, 이라는 바람조차 갖지 못하게 함으로써 탐욕과 방관과 무지에 휩싸인 화산섬의 인간들이 어떻게 붕괴되는지를 똑바로 바라보게 만든다고 할까요?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간혹 목격되곤 하는 프랑스 문학 특유의 난해함 또는 모호함입니다. 불편할 정도로 심한 건 아니지만 앞뒤 맥락을 살펴봐야 하거나 같은 문장을 두어 번 되읽어야만 하는 수고를 간간이 반복해야 되곤 합니다. 매번 프랑스 작품을 읽을 때마다 첫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긴장하게 되는 게 사실인데,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의 섬은 평균보다는 쉽게 읽히는 작품이니 미리 편견을 갖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처음 만난 작가라 이름이 생소했지만 검색해보니 이전까지 한국에 소개된 필리프 클로델의 작품이 무려 다섯 편이나 됐습니다. 모두 순문학이나 에세이 등으로 아마 장르물이 아니라서 그동안 제 눈에 띄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의 섬으로 관심이 생긴 독자라면 전작들을 찾아봐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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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클레이머
르네 나이트 지음, 김효정 옮김 / 북플라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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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2015년 같은 출판사와 번역가를 통해 누군가는 알고 있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 있습니다. 서평을 쓴 시점까지도 인터넷 서점에 개정판이라는 정보가 설명돼있지 않았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큐멘터리 감독인 캐서린의 평온했던 일상은 누군가가 자비로 출판한 낯선 사람이라는 소설을 읽은 뒤로 완전히 무너지고 맙니다. 소설을 쓴 누군가가 샬롯이라는 여주인공을 앞세워 20년 전 캐서린이 스페인의 휴양지에서 겪은 일을 상세하고 적나라하게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20년 동안 비밀로 삼아왔던 그 일이 폭로된다면 직장은 물론 소중한 가족까지 붕괴되는 건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소설을 쓴 자가 누군지는 금세 알아냈지만 캐서린으로서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자가 남편 로버트와 아들 니콜라스에게도 그 소설을 전달하며 캐서린을 완전히 망가뜨리기로 작정했다는 점입니다.

 

작품마다 편차가 크기도 하고 엇비슷한 설정과 캐릭터의 식상함 때문에 기피하게 된 장르가 심리스릴러인데, ‘디스클레이머를 선택한 건 소설의 끔찍한 이야기가 내 과거라면? 나의 비밀이 책이 되어 나타났다.”라는 출판사의 홍보카피에 눈길이 끌렸기 때문입니다.

 

세세한 내용까지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날 오후에 그녀가 입었던 옷의 디자인과 색상, 머리모양까지 정확했다. 그것은 그녀가 기를 쓰고 감추어왔던 삶의 한 토막이었다. 세상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는 비밀이었다.” (p9)

 

20년 동안 비밀로 삼아온 일이 누군가가 쓴 소설 속에 적나라하게 그려졌다면 당황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소설이 우연이 아니라 명백한 의도를 갖고 쓰인 것이라면, 더구나 소설 속에서 자신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으로 그려졌다면, 또 소설을 쓴 자가 가족과 주변사람들에게 일부러 책을 배포하고 있다면 그것은 당황의 차원을 넘어 공포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캐서린은 20년 전 그 일을 겪은 직후 남편 로버트에게 솔직히 털어놓지 않은 걸 후회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소설을 쓴 자의 의도를 파악한 뒤엔 수습책이란 게 전혀 없음을 깨닫곤 절망감에 사로잡힙니다. 무엇보다 당시 5살이었던 아들 니콜라스까지 연루된 일이라 캐서린은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니콜라스가 20년 전의 일을 알게 될까봐 전전긍긍합니다.

 

캐서린과 함께 화자를 맡은 건 소설을 쓴 70대 노인 스티븐입니다. 그는 세상을 떠난 아내 낸시가 자신 몰래 간직해온 노트와 사진을 발견한 뒤 큰 충격에 빠졌고, 결국 그것들을 자료삼아 캐서린의 삶, 가족, 직장을 모조리 부숴버리기 위해 소설을 썼습니다. 성치 않은 몸과 굳어버린 학습능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캐서린을 궁지에 몰아붙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합니다. 그에겐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형적인 심리스릴러 서사대로 이야기의 상당부분은 캐서린과 스티븐, 그리고 그들의 가족과 지인 등 주요 인물들의 요동치는 심리 묘사에 할애됩니다. 후회와 분노, 의심과 갈등, 배신감, 증오심 등 소설 한 편으로 인해 폭발된 여러 인물들의 격한 감정들이 섬세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묘사를 통해 독자의 마음을 쉴 새 없이 흔들어댑니다. 적잖은 심리스릴러 작품들이 동어반복의 지루함을 피하지 못하지만 디스클레이머는 크고 작은 사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속도감과 긴장감을 놓치지 않습니다. 분량 자체도 그리 길지 않고 여러 인물들이 번갈아 화자를 맡은 챕터들은 짧게 구성돼있으며 문장들은 적확한 단어와 비유로 이뤄져있어서 지루함을 느낄 새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20년 간 감춰온 캐서린의 비밀에 대한 궁금증이 마지막까지 강력한 페이지 터너로 작동합니다. 예상하기 어렵거나 강력한 반전은 아니지만 막판에 밝혀진 진실은 소설 한 편 때문에 삶의 뿌리까지 뒤흔들렸던 여러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대혼란에 빠뜨립니다.

 

독자에 따라 두 주인공 캐서린과 스티븐의 행동과 태도에 ?”라는 의문점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무수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파국까지 몰고 간 이유에 대해 불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의문과 불만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극복해내느냐야말로 심리스릴러로서의 가치와 미덕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라는 생각입니다. 때론 눙치듯 넘어간 대목도 분명 있고, 작가에게 따져 묻고 싶은 장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0,5개를 뺀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전체적으론 독자의 의문과 불만을 충분히 잠식시킬 만큼 완성도 높은 심리스릴러라는 생각입니다. 심리스릴러에 지친 독자라도 디스클레이머는 한번쯤 도전해볼 만한 작품으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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