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이는 소녀들
스테이시 윌링햄 지음, 허진 옮김 / 세계사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년 전 루이지애나 주의 작은 마을 브로브리지에서 여섯 명의 소녀를 납치 살해한 혐의로 딕 데이비스가 체포됐습니다. 당시 12살이던 딕의 딸 클로이는 끔찍한 시간들을 견뎌낸 뒤 지금은 심리상담사가 됐지만 여전히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다시없을 인연이라고 확신한 대니얼과의 결혼을 앞두고 12살 이후 처음 맞이한 행복에 젖어있던 클로이에게 또 다시 악몽이 찾아옵니다. 아버지의 사건 20주년을 맞아 뉴욕타임즈의 기자 에런 잰슨이 취재를 요청해온데다 아버지의 범행과 판박이처럼 보이는 소녀 실종사건이 클로이 주변에서 연이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희생자 중 한 명이 자신의 환자였기에 범인이 딕의 딸인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고 여긴 클로이는 대니얼 모르게 홀로 진실 찾기에 나서지만, 사태는 점점 악화되고 그녀의 공포심은 극에 달하게 됩니다.

 

‘26년 전 아버지가 저지른 연쇄살인과 동일한 방식으로 희생자의 손목을 자르는 범인이 나타나자 외과의사인 노라가 주변 인물들을 의심하며 진실 찾기에 나서는 이야기를 다룬 프리다 맥파든의 핸디맨과 큰 얼개가 비슷한 작품입니다. 다만 핸디맨이 주인공 노라가 범인에게 여러 차례 공격을 당하며 겪는 공포를 강조했다면, ‘깜빡이는 소녀들은 자신 안의 불안감과 싸워가며 직접 범인을 잡으려는 클로이의 분투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누구보다 다정하고 따뜻했던 아버지가 연쇄살인마로 밝혀진 충격이 가장 컸지만 아버지의 범죄를 입증할 증거를 직접 발견하고 제 손으로 경찰에 넘겼던 일은 클로이의 트라우마를 더욱 깊고 공고하게 만들었습니다. 세상의 비난과 호기심보다 클로이를 괴롭힌 건 죄책감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살인마의 딸이라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어쩌면 자신이 희생된 소녀들을 아버지에게 인도했을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후회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어린 클로이에게 들러붙은 뒤 그녀로 하여금 세상을 경계하고 의심하게 만든 것은 물론 지금까지도 불법 처방한 약에 의존하지 않고는 불안감을 씻어내지 못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고를 직접 조사해야만 안심할 수 있는 불행한 습관도 그 결과물 중 하나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등장한 아버지의 모방범은 클로이의 삶을 순식간에 패닉에 빠뜨렸고,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스스로 진실을 찾아내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그녀의 의심은 20년 전 과거 속 인물은 물론 현재 자기 주변의 인물들에게까지 미치는데, 어느 날 손에 넣게 된 결정적인 증거로 인해 클로이는 극도의 공포에 빠지고 맙니다.

 

연쇄살인마 아버지와 딸이라는 공식은 더는 신선한 소재는 아니지만 깜빡이는 소녀들은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오가는 흥미로운 구성, 과거와 현재의 클로이의 속내를 집요하고 디테일하게 그려낸 심리묘사, 여러 번 감탄을 자아내는 맛깔난 표현과 문장들, “이 지독하게 훌륭한 데뷔작에서는 누구도 믿지 마라는 피터 스완슨의 평가처럼 모두가 범인 같지만 누구도 범인 같지 않은 미스터리, 그리고 거의 마지막 장까지 거듭되는 반전 등 매력적인 요소가 다양해서 소재의 진부함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 작품입니다.

0.5개를 뺀 유일한 이유는 중반부에 심리스릴러 서사가 전개되면서 약간 지루함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500페이지가 조금 넘는 분량 가운데 그 대목에서 딱 50페이지 정도만 슬림해졌더라면 더없이 좋았을 거란 생각입니다.

 

데뷔작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완성도 높은 스릴러를 선보인 스테이시 윌링햄은 이미 세 번째 작품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고 합니다. 후속작들이 한국에도 소개될지 알 수 없지만 깜빡이는 소녀들이 좋은 평가와 성과를 얻는다면 충분히 기대해도 될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을 죽인 여자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지음, 엄지영 옮김 / 푸른숲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0년 전, 사르다 가족의 막내딸 17살 아나가 토막 난 채 불에 탄 시신으로 발견됐습니다. 단서 하나 찾지 못한 가운데 경찰은 불특정 성범죄자의 소행으로만 여겼고 금세 미제 사건으로 처리하고 맙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르다 가족은 산산조각 났고, 둘째딸 리아는 아나의 죽음에 조금의 의문도 품지 않은 채 종교적 허식으로 종결지으려는 가족들을 향해 자신은 무신론자라는 폭탄선언을 한 뒤 스페인으로 떠나버렸습니다.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준 아버지 알프레도와만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냈지만, 리아는 알프레도가 지난 30년 동안 아나의 죽음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홀로 싸워온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태어났다는 사실밖에 몰랐던 조카 마테오가 자신을 찾아와 알프레도의 편지를 전하자 큰 충격에 빠집니다.

 

아르헨티나의 대표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클라우디아 피녜이로는 2023엘레나는 알고 있다신을 죽인 여자들을 통해 처음으로 한국 독자와 만난 작가입니다. 주로 범죄소설을 집필해왔고 신을 죽인 여자들의 경우 그해 가장 뛰어난 범죄소설에 수여되는 대실 해밋 상을 만장일치로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범죄소설은 일반적인 미스터리나 스릴러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입니다. 며칠 전 읽은 엘레나는 알고 있다는 파킨슨병 환자인 어머니가 딸의 죽음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겪은 만 하루 동안의 여정을 그리고 있지만, 여성, 성역할, 종교사회의 억압, 가부장적 문화, 자기결정권 등 묵직한 주제가 서사의 중심입니다. ‘신을 죽인 여자들은 상대적으로 미스터리 본연의 서사가 좀더 강하긴 하지만 역시 여성과 종교라는 주제가 더 도드라져 보이는 작품입니다. 대실 해밋 상 수상소감에서 나는 이것이 투쟁의 결과라고 느꼈다. 책과 나, 그리고 수많은 여성들이 오랫동안 싸워온 것에 대한 상이다.”라고 밝힌 걸 보면 이 작품의 경향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인물들은 종교에 관한 한 다소 극단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종교적 해석으로 귀결 짓는 광신도에서부터 종교 자체를 부정하는 무신론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30년 전에 벌어진 사르다 가족의 비극의 이면에는 이 바로 이 종교적 갈등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작가는 그 갈등이 여성에게 더욱 가혹하다는 점, 그리고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종교를 이용하여 자신을 합리화하거나 진실을 숨기는지를 ‘30년 전 사건의 진실 찾기 여정을 통해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이야기는 여섯 명의 인물이 한 챕터씩 화자를 맡아 전개됩니다. 동생 아나의 죽음을 계기로 무신론자임을 선언하곤 가족과 조국을 떠난 둘째딸 리아, 할아버지 알프레도의 영향으로 종교의 허상을 내다버린 뒤 그가 남긴 세 통의 편지를 들고 스페인에 사는 이모 리아를 찾아가는 마테오, 절친인 아나가 목숨을 잃을 당시 함께 있다가 기억 장애를 겪게 된 마르셀라, 30년 전 초짜 법의학자로 유일하게 아나의 죽음에 의심을 품었던 엘메르, 리아와 아나의 언니인 카르멘을 아내로 둔 훌리안, 그리고 사르다 집안의 장녀이자 카리스마로 똘똘 뭉친 광신도 카르멘이 그들입니다. 마지막 에필로그는 딸의 죽음의 진실을 30년 동안 추적해온 알프레도의 편지로 장식됩니다.

 

여섯 명의 인물은 사건이 벌어진 30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겪은 일을 마치 참회록 또는 고해성사처럼 털어놓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나의 죽음의 진상이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누가, 왜 그토록 잔혹한 방식으로 아나를 살해하고 토막 내고 불태웠는가, 라는 미스터리가 독자의 눈길을 끌긴 하지만 서사의 핵심은 앞서 언급한대로 여성과 종교입니다. 왜 아나는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녀를 죽음으로 이끈 자들은 누구이며 그들에게 물어야 할 죄는 무엇인가? 그녀의 죽음에 종교는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쳤는가? 이런 주제의식이 워낙 강렬해서 그런지 이 작품의 번역 제목 신을 죽인 여자들대신 신이 죽인 여자들이 더 어울려 보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의 원제 ‘Catedrales’대성당이라는 뜻으로 레이먼드 커버의 동명 단편소설에 따왔다고 합니다.)

 

다 읽고 첫 페이지를 다시 보니 처음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던 헌사가 새롭게 읽혔습니다. “하느님 없이, 저들만의 대성당을 짓는 이들에게라는, 종교적 허상과 맹신을 향한 조소 섞인 헌사는 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을 절묘하면서도 진정성 있게 함축해놓은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을 종교, 여성, 도덕 등 좀더 넓은 의미의 사회적 문제와 모순을 다루는, 문학성이 깃든 사회파 미스터리라고 부르고 싶은데, 이 헌사야말로 그에 걸맞은 상징이 아닐까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엘레나는 알고 있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지음, 엄지영 옮김 / 비채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천둥 번개를 동반한 큰비가 쏟아진 어느 밤, 독실한 가톨릭 신자 리타가 성당 종탑에 목을 맨 채 발견된다. 사건은 자살로 종결되지만 리타의 어머니 엘레나는 딸이 살해당했음을 주장하며 재수사를 요구한다. 딸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자신이라고, 사건의 진실은 따로 있다고 확신하는 엘레나. 그러나 누구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본인 또한 병을 앓고 있어 직접 수사에 나서기는커녕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는 처지다. 상실감과 무력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엘레나는 불현듯 이십 년 전 리타에게 큰 빚을 진 여자 이사벨을 떠올린다. 리타의 도움으로 무사히 아이를 낳아 가족을 이룬 이사벨. 엘레나는 이사벨이라면 진실을 대신 파헤쳐주리라 기대를 안고 기차에 오른다. (출판사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엘레나는 딸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 타살임을 입증하려는 간절함 가득한 어머니지만 동시에 파킨슨병으로 인해 자신의 몸을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중증 환자이기도 합니다. 작가나 작품에 대한 정보를 모르는 상태에서 읽기 전만 해도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심리학자 조 올로클린(마이클 로보텀이 창조한 스릴러 시리즈 주인공)을 떠올렸던 게 사실인데, 실은 이 작품은 영어판 번역자의 말대로 범죄소설처럼 시작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줄거리를 품고 있습니다. 시작은 딸의 죽음의 미스터리를 파헤치려는 파킨슨병에 걸린 엄마의 분투지만 몸통은 여성, 성역할, 종교사회의 억압, 가부장적 문화, 자기결정권 등 묵직하면서도 행간에 숨은 의미가 무척 깊은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엘레나가 딸의 죽음에 관해 대신 조사해줄 이사벨을 찾아가는 하루 동안의 여정을 그립니다. 중증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엘레나에게는 발걸음 하나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목 근육까지 손상돼서 그녀의 시선은 늘 바닥에 고정돼있고 그런 탓에 수시로 침이 흘러내리는 수치스러운 상황까지 감내해야만 합니다. 작가는 엘레나의 이런 일거수일투족을 지독하리만치 디테일하게 묘사합니다. “독자는 엘레나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엘레나의 생각에 집중한다. 독자는 엘레나라는 인물에 파묻혀버린다.”라는 추천의 말을 쓴 정보라의 표현대로 독자는 어느새 추리소설과는 전혀 다른 영역으로 휩쓸려 들어가게 됩니다.

 

기차와 택시를 번갈아 타며 지난한 여정을 거치는 동안 엘레나는 딸 리타와의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돌아봅니다. ‘여성으로서 당연한 삶을 살아온 자신과는 다르게 결혼도 출산도 거부했던 리타. 짝수년마다 떠난 모녀의 여행에서 채찍질을 하듯 모진 소리를 퍼부으며 자신과 싸우곤 했던 리타. 어린 시절부터 가톨릭 교리에 대해 무심하거나 반발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톨릭 학교에서 오랫동안 일하며 때론 타인에게 가톨릭 교리를 앞세우곤 했던 리타.

엘레나의 회상은 희로애락을 오가지만 대부분 딸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관점에서 서술됩니다. 하지만 이 모성애는 독자에게는 오히려 불안감을 고조시키는 시한폭탄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리타도 과연 그러했을까, 라는 의문과 함께 말입니다.

 

엘레나가 도움을 받기 위해(엘레나의 관점에선 빚을 받기 위해’) 방문한 이사벨은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제 - 여성의 성역할, 육체의 존재의 의의, 자기결정권 등을 드러내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엘레나로 하여금 리타와의 관계를 다시금 돌아보게 만드는 역할도 맡고 있습니다. ‘엘레나의 도우미가 될 거라는 초반부의 나이브한 기대와는 달리 20년 전 엘레나 모녀와 맺은 인연이 그녀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보여주며 묵직한 여성 서사를 발산하는 인물입니다.

 

좀 심할 정도로 장르물에 편식하는 취향이라 다소 낯선 아르헨티나의 여성 미스터리라는 카피 한 줄만 보고 덥석 집어 들었던 작품인데, 고백하자면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쉽지 않은 책읽기가 됐습니다. 무겁든 가볍든 선명하고 확실한 서사를 좋아하다 보니 이렇듯 단어 하나, 문장 하나는 말할 것도 없고 행간의 의미와 무게에까지 집중해야 하는 작품은 다소 낯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옮긴이의 말추천의 말까지 다 읽고 나니 이 작품의 의미가 좀더 확연하게 다가온 건 사실입니다. 아마 한 번 더, 그리고 천천히 집중해서 읽는다면 이 작품의 진가를 제대로 맛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넷플릭스에서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공개된 걸로 아는데,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챙겨보려고 합니다.

 

엘레나는 알고 있다에 이어 대실 해밋 상을 수상한 신을 죽인 여자들이 최근 출간됐습니다. 소개글에 따르면 세 자매의 종교적 신념을 소재로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압제를 폭로한 뛰어난 범죄 소설이라고 하는데, 클라우디아 피녜이로의 범죄소설가로서의 명성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이기를 기대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업자에게 잊혀진 시체 보관 기록 쿤룬 삼부곡 3
쿤룬 지음, 진실희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살인마에게 바치는 청소 지침서’, 2선생님이 알아서는 안 되는 학교 폭력 일기에 이은 쿤룬 3부곡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1편이 무차별 살인집단 잭(Jack)의 조직원들에게 피의 복수를 펼치는 미소년 스녠의 이야기였다면 2편은 학교 폭력에 시달리다가 살인괴물이 돼버린 장페이야의 이야기였는데, 3편은 이전까지 등장했던 모든 인물들이 총출연하여 대미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3편의 핵심 서사는 그동안 스녠에게 속수무책으로 사냥 당하던 살인집단 잭이 드디어 스녠의 정보를 입수하곤 반격에 나서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반격의 여파는 스녠뿐 아니라 이 시리즈의 주요 인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말 그대로 피의 광풍을 일으킵니다. 앞선 1~2편보다 더 많은 시신들이 등장하고 더 잔혹한 장면들이 쉴 새 없이 이어집니다.

더불어 2편에서 살인괴물로 변신한 장페이야가 종적을 감춘 연인 촨한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 기억을 잃은 채 신입 시체 수거업자가 된 한 남자가 자신의 과거와 정체성 때문에 혼란을 겪다가 끝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게 되는 이야기 등 시리즈 대미에 걸맞은 살인마 스릴러가 실려 있습니다.

 

쿤룬 3부곡의 살인마 서사 자체는 무척 비현실적입니다. 전설적인 살인마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를 숭배하며 무차별 살인을 저지르는 잭이라는 조직도, 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밤낮없이 조직원을 색출해 살해하는 스녠도, 학교 폭력에 시달리다가 하루아침에 살인괴물로 진화하는 장페이야도, 또 순전히 재미와 쾌감을 위해 음모를 꾸미고 살인을 조장하는 주요 조연들도 판타지에 가까운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에는 그 비현실감을 거의 느끼기 어려운데, 그것은 아마도 각 인물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동기가 묘하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중에서도 주인공들에게 부여된 결코 충족되지 않는 복수심은 그들을 응원하고 지지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잭의 조직원에게 누나를 잃은 스녠과 살인마에게 아버지를 잃은 뒤 학교폭력의 희생자가 됐던 장페이야는 이미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 독자를 응원군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현실감도 없고, 잔인한 장면들이 거듭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게 어디 있어?”라는 자문 없이 마지막 장까지 단번에 달릴 수 있는 건 바로 이런 설정 덕분이란 생각입니다.

 

거의 순도 100%의 오락성 스릴러라고 할 수 있지만, ‘충족되지 않는 복수심이 주요 코드라서 그런지 결코 사이다처럼 읽히는 작품은 아닙니다. 오히려 무겁고 어두운 여운을 남긴다고 할 수 있는데, 시리즈는 마무리됐지만 살아남은 인물들이 앞으로 마주해야 할 날들이 지금보다 괜찮을 거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손에 묻은 피는 지울 수 있겠지만, 마음속의 지옥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할까요? 다만 피의 복수를 거듭하면서도 종종 소박하고 따뜻한 행복을 그리워하던 스녠의 소망만큼은 조금이라도 이뤄지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했습니다.

 

1~2편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자세한 줄거리를 언급할 수 없다 보니 시리즈 전체에 대한 인상 비평이 되고 말았습니다. ‘잔혹한 살인마 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더없이 흥미로운 작품이 되겠지만, 그 수위가 좀 높은 편이라 이야기와 관계없이 거부감을 갖는 독자도 적지 않을 거란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론 시리즈가 종료된 게 좀 아쉽긴 하지만, 동시에 쿤룬이 어떤 이야기를 들고 다시 독자를 찾을지 사뭇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3부곡이 완결된 게 2018년이니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셈인데, 조만간 그의 신작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대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이 프럼 더 우즈 보이 프럼 더 우즈
할런 코벤 지음, 노진선 옮김 / 문학수첩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괴롭힘을 당하던 여학생 나오미가 사라지자 같은 반의 매슈는 형사사건 전문변호사인 할머니 헤스터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헤스터는 매슈의 대부인 와일드에게 나오미를 찾아줄 것을 부탁합니다. 의외의 장소에서 나오미를 찾아내긴 하지만 얼마 후 다시 사라진데다 이번에는 사건으로 비화할 조짐까지 보이자 와일드는 초조해집니다. 와일드는 나오미를 괴롭히던 일당의 우두머리 크래시에게 나오미의 행방을 물으며 거칠게 몰아세우지만 그 직후 크래시마저 실종되자 당황합니다. 더구나 경호원까지 내세워 자신을 압박하던 크래시의 부모가 헤스터와 자신을 초대하자 크게 놀랍니다. 헤스터와 함께 크래시 부모의 저택을 찾은 와일드는 크래시의 목숨을 담보로 요구조건을 내건 범인들의 이메일을 보곤 더 이상 실종이나 가출이 아닌 납치사건임을 깨닫습니다.

 

보이 프럼 더 우즈는 할런 코벤의 와일드 시리즈의 첫 작품입니다. 주인공 와일드는 조금 특별한 이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30여 년 전 숲에서 야생 상태로 발견됐을 당시 6~8살로 추정됐던 와일드는 자신에 대한 기억 자체가 전혀 없었습니다. 숲에 살면서 유일하게 소통했던 인간은 형사사건 전문변호사 헤스터의 막내아들 데이비드뿐이었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와일드는 헤스터와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됐고, 이후 위탁가정에서 제대로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유일한 친구였던 데이비드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의 아들이자 자신의 대자(代子)인 매슈, 그리고 데이비드의 아내 라일라를 각별히 살피기도 합니다. 학업과 운동 등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특수부대원으로 파병된 경험까지 있지만 와일드는 여전히 사람들과 섞여 사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는 숲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에코캡슐이라는 일종의 캠핑카에서 홀로 살아갈 뿐입니다.

 

와일드에게 주어진 미션은 실종된 여학생 나오미 찾기로 시작되지만, 얼마 후 나오미를 괴롭히던 부잣집 아들 크래시까지 실종되면서 예상치 못한 형태로 확대됩니다. 몇몇 정황 상 나오미와 크래시가 동반가출한 것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그들이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였던 점을 감안하면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고, 이내 크래시를 인질로 삼은 범인들의 협박 이메일이 도착하면서 와일드는 이제 납치범들과의 전쟁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할런 코벤이 즐겨 사용하는 실종으로 시작됐다가 납치극으로 이어지긴 해도 이 내용이 작품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출판사 소개글대로 음모와 비밀을 넘어 학원폭력, SNS 등 인터넷 문화의 어두운 뒷면, 인종차별, 미디어와 정치의 부패로까지 이야기가 확장되면서 꽤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 가정폭력과 오래 전 살인사건의 진실 등 여러 가지 소재가 가미되기도 했고 그만큼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기도 해서 단 몇 줄로 줄거리를 요약하는 게 어려울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런 다채로움이 개인적으론 이 작품의 가장 아쉬운 부분으로 느껴졌습니다. 시리즈 첫 편이라 이것저것 설명할 정보가 많아서 산만하기도 했고,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제각각 흘러가다가 하나의 줄기로 합쳐지곤 하는 코벤 특유의 서사와 달리 여러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보일 정도로) 각자의 흐름을 갖고 있는 탓에 전체적으로 머릿속에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독자에 따라 이런 전개와 구성을 반길 수도 있으니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다른 서평들도 꼭 참고했으면 좋겠습니다.

 

와일드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은 보이 인 더 하우스로 이미 한국에 출간돼있습니다. 당장 찾아 읽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마지막 페이지에 실린 떡밥 때문에 와일드의 이후 행보가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 할런 코벤의 몇몇 작품에서 감초 같은 조연으로 활약하다가 이 시리즈에서 중심인물로 등장한 헤스터 역시 호기심을 자극하는 인물입니다. 이야기는 다소 아쉬웠지만 두 주인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책읽기였습니다. 후속작에서도 매력적인 두 주인공의 활약을 지켜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