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사라진 날
할런 코벤 지음, 부선희 옮김 / 비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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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의 유능한 투자자문가 사이먼 그린은 직업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누리고 있었지만, 큰딸 페이지가 대학 입학 후 한 학기 만에 마약중독자가 되어 가출한 뒤로 엉망진창이 되고 맙니다. 어느 날 공원에서 길거리 공연을 하던 페이지를 발견하고 쫓아가지만 에런이라는 남자의 방해 때문에 오히려 폭행범 신세가 됩니다. 가까스로 피소를 면했지만 사이먼은 얼마 후 충격적인 소식을 듣습니다. 자신을 방해했던 에런이 실은 페이지의 남자친구이자 그녀를 마약중독에 빠뜨린 장본인이었는데 그는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 참혹하게 살해당했으며 페이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이먼은 아내 잉그리드와 함께 직접 페이지를 찾기로 결심하고 위험천만한 마약소굴로 향합니다.

 

네가 사라진 날까지 한국에 출간된 작품이 18편이고, 그중 8편을 읽었으니 아직 제대로 된 팬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명성과 필력에 비해 저에게 무척 야박한 평점을 받아온 작가가 할런 코벤입니다. 최근 읽은 작품들은 비교적 호평과 함께 만점에 가까운 평점을 줬지만, 초기에 만났던 작품들에겐 무슨 이유에선지 혹평이나 다름없는 서평을 남겨놓았기 때문입니다. 개정판으로 출간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를 읽은 뒤에도 절감했던 바지만, ‘네가 사라진 날을 읽고 나니 혹평을 남겼던 그 작품들을 꼭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런 코벤의 진가를 뒤늦게 깨달았다고나 할까요?

 

네가 사라진 날은 할런 코벤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실종이 또 한 번 매력을 발산한 작품입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개의 축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마약에 중독된 채 끔찍한 살인사건 현장에서 종적을 감춘 큰딸 페이지를 찾으려는 사이먼의 분투이고, 또 하나는 사이비종교단체와 연관 있어 보이는 살인청부사 커플이 도처를 돌아다니며 살인행각을 벌이는 이야기입니다. 전혀 관련 없어 보이던 두 이야기는 사이먼이 사립탐정 엘레나 라미레스를 만나면서 접점을 맞이합니다. 바로 이 지점부터 사이먼의 본격적인 위기가 시작되는데, 동시에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페이지의 비밀과 비극까지 드러나면서 사이먼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혹독한 시간들이 밀려듭니다.

 

나는 누군가 죽는 이야기보다 사라지는 이야기에 매료되는 편이다. 살인은 사건 해결에 초점을 두지만 실종은 희망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희망이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자, 우리를 산산이 깨부술 만한 거대한 것이다.” (할런 코벤, 출간 인터뷰에서)

 

독자 입장에서 사이먼에게 이입하지 않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희망때문입니다. 만약 페이지가 살해당한 상태에서 사이먼이 범인을 찾는 이야기라면 이 이입의 쾌감은 결코 만끽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이먼은 페이지를 찾는 내내 자책과 절망을 거듭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이지를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겠다는 희망하나로 위험천만한 고비들을 넘곤 합니다. 반면 우리를 산산이 깨부술 만한 거대한 것이라는 표현대로 희망은 순식간에 그 얼굴을 뒤집으며 사이먼을 심연 속으로 집어던질 수도 있는데, 실제로 사이먼은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기까지 수시로 희망에게 배신을 당하곤 합니다. 영영 페이지를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은 말할 것도 없고, 그동안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던 가족들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사이먼의 희망에는 셀 수 없는 균열이 일어납니다.

 

이야기는 긴박하면서도 무자비한 액션 장면과 함께 대미를 장식하지만, 독자는 에필로그에서 또 한 번 뒤통수를 맞을 준비를 해야 됩니다. 그것은 희망이 사이먼에게 가한 가장 큰 배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이먼으로 하여금 새로운 형태의 희망을 품게 만드는 채찍질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책을 덮을 때까지 결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반전이 거듭된다는 뜻입니다. 수많은 인물들과 사건들, 복잡하게 얽힌 심리와 감정들, 그리고 놀라움과 함께 애틋한 여운을 품게 하는 반전 어린 엔딩에 이르기까지 할런 코벤이 직조한 정교한 설계도에 감탄하면서 마지막 장을 덮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직 한국에 소개된 작품의 절반도 못 읽은 상태지만 단언컨대 할런 코벤 최고의 작품이라는 해외언론의 호평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네가 사라진 날은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조만간 보이 프럼 더 우즈를 읽을 예정인데, 점점 더 그 진가를 맛보게 되는 할런 코벤의 필력을 다시 한 번 만끽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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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통제구역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정세윤 옮김 / 오픈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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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 탄 노인의 돈봉투를 노리던 한 남자를 제압한 리처는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는 노인의 딱한 사정을 듣게 된다. 노인이 살고 있는 도시는 우크라이나인과 알바니아인 갱단이 구역을 나눠 지배하고 있는데, 이들이 사채업을 비롯해 여러 불법적인 사업을 운영하면서 시민들의 돈을 갈취하고 있었다. 리처는 노인을 대신해 사채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의도치 않게 두 갱단에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에 휘말리면서 조직 간에 난투극이 벌어지게 만든다. 이 틈을 타 갱단들을 박살내려던 리처는 갱단을 움직이는 더 큰 세력이 존재함을 알게 되고 코어 집단을 파괴하기 위해 출입통제구역으로 향한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출입통제구역잭 리처 시리즈24번째 작품입니다. 이 시리즈는 제게는 무척 애매한 상태로 남아있습니다. 중고로 구매한 7편을 소장하고 있지만 아직 읽은 적이 없고, 유일하게 읽은 건 우연히(?) 도서관에서 대출했던 나이트 스쿨한 편 뿐입니다. 구매한 작품들을 읽지 않은 건 언젠가 순서대로 시리즈를 읽고 싶은 욕심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 벌어진 사태이고, ‘나이트 스쿨은 어쩌다 보니 대출한 책에 끼어 있어서 우발적으로 읽게 됐을 뿐입니다. 핑계에 불과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잭 리처 시리즈초기작이 뭉텅이로 한국에 출간되지 않은 것도 읽고 싶은 마음이 덜 들게 만든 이유 중 하나입니다. (현재 한국에는 3~8, 12편 등 모두 일곱 작품이 출간되지 않았습니다.) 원톱 주인공이 이끌어가는 시리즈인데 그의 성장과정중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읽을 수 없다 보니 좀 맥이 빠진다고 할까요?

 

아무튼... 그런 이유 때문에 뜬금없이 읽게 된 출입통제구역은 이야기는 술술 읽히지만 잭 리처가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기는 여러 가지로 무리인 작품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퇴역 후 미국 전역을 떠도는 잭 리처는 칫솔 하나만 달랑 들고 마음 내키는 곳에 머물며 법의 영역을 벗어난 범죄자들을 모조리 처단한다.”는 시놉시스에서 알 수 있듯 고정 조연들이 없다 보니 더더욱 잭 리처의 과거와 현재를 제대로 맛볼 수 없었습니다. 역시 빠진 작품들이 많더라도 시리즈 첫 편인 추적자부터 차근차근 읽어봐야 할 것 같긴 합니다.

 

줄거리대로 잭 리처는 위기에 처한 노인을 돕는 아주 작은 선행 하나 때문에 거대한 갱단의 살육전에 말려드는 것은 물론 그보다 더 큰 세력과의 목숨을 건 싸움을 시작하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육군 헌병대 출신인 잭 리처를 돕는 건 해병대 출신의 드럼연주자와 냉전시대를 겪은 기갑부대 출신의 노인입니다. 갱단에게 끔찍한 일을 당했던 웨이트리스와 재즈 밴드의 리더 역시 잭 리처의 지원군으로 활약합니다.

잭 리처가 갱단의 살육전을 촉발시키는 초반부는 마치 블랙코미디처럼 전개됩니다. 잭 리처의 소행을 상대 갱단의 도발로 여긴 오해들이 차곡차곡 쌓이다가 무자비한 보복전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갱단들이 잭 리처의 존재를 깨달으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고 잭 리처는 사악하기 짝이 없는 갱단들과의 전쟁을 냉정하면서도 한 치의 자비심도 없이 벌여나갑니다. 그 와중에 자신에게 선의를 베푼 웨이트리스와 짧지만 강렬한 로맨스도 빠뜨리지 않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는 하드보일드 캐릭터지만 나름 할 일은 다 하는 매력적인 잭 리처가 아닐 수 없습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유일하게 읽은 나이트 스쿨과 달리 별 5개를 주지 못한 건 몇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우선 잭 리처에게 도무지 인간미를 찾아볼 수 없었는데 어쩌면 이건 이 시리즈의 가장 고유한 특징일 수도 있기 때문에 읽는 내내 좀 혼란스러웠던 점입니다. 위기의 노인을 구하고 그를 돕는 과정이나 웨이트리스와 로맨스를 벌이는 대목에서도 잭 리처에게서 온기라곤 거의 느낄 수 없었습니다. 마치 비즈니스의 일환처럼 보였다고 할까요? ‘나이트 스쿨의 서평을 다시 찾아보니 딱히 그런 느낌은 없었던 것 같은데 어쩌면 작품에 따라 인간미를 맛볼 수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또 한 가지 아쉬웠던 건 클라이맥스와 엔딩을 장식한 거대 세력과의 일전입니다. 갱단들 역시 만만치 않은 존재들이었는데 그보다 더 거대한 세력을 등장시켜 잭 리처를 폭주하게 만든 건 왠지 사족처럼 느껴졌습니다. 더구나 우연히 얻은 지원군들이 없었다면 100% 불가능한 작전이었기에 현실감이 많이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오히려 갱단들과의 전쟁으로 이야기가 끝났다면 훨씬 더 깔끔한 마무리가 됐을 거란 생각입니다.

 

작품 자체보다 엉뚱한 소리가 더 많았던 서평이 되고 말았는데, 쓰다 보니 조만간 잭 리처 시리즈를 순서대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지고 말았습니다. 분명 매력 넘치는 캐릭터인데 그의 초기 모습부터 제대로 맛보지 않으면 잭 리처는 물론 이 시리즈 자체를 만끽하는 게 불가능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뭉텅이로 빠진 초창기 작품들이 뒤늦게 한국에 출간될 것 같진 않지만 아쉬운대로 첫 편부터 차근차근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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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 20분의 남자 스토리콜렉터 109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허형은 옮김 / 북로드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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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육군 특수부대 제75레인저연대의 유능한 장교였으나 동료의 죽음으로 인해 제대를 선택한 트래비스 디바인. 월가의 신참 애널리스트로서 투자회사 카울앤드컴리에 근무하며 매일 아침 620분 열차를 타고 출근하던 그에게 발신자 불명의 이메일 한 통이 날아든다. “여자가 죽었어.” 실제로 직장 동료이자 헤어진 연인이 자살한 채 발견되고 디바인은 경찰의 의심을 받는다. 더 큰 문제는 디바인 주위에서 연이어 살인사건이 벌어진다는 점. 그런 그에게 전직 장성인 의문의 남자가 접근해오고, 그는 군 시절의 디바인의 비밀을 폭로하겠다며 카울앤드컴리사에 대한 내밀한 조사에 협조할 것을 강요한다. 디바인은 졸지에 정부기관의 비공식 비밀요원이 되어 자신이 근무하는 회사와 관련된 거대한 음모를 밝혀야 할 입장에 처하고 만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2020진실에 갇힌 남자를 끝으로 3년 동안 소식이 없어 궁금해 하던 차에 북로드에서 데이비드 발다치의 신작을 출간해서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습니다. 특히 스탠드얼론이 아니라 미국에서 ‘6:20 Man series’라 이름 붙은 새 시리즈의 첫 작품이라 더 기대가 됐는데,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에이머스 데커에 맞먹는 매력을 지닌 주인공 트래비스 디바인은 데뷔 무대부터 압도적인 육체의 강력함과 명석한 지능’, ‘폭죽처럼 폭발하는 강렬한 액션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540여 페이지의 두툼한 분량에 적잖은 등장인물, 서로 연관이 있는지 끝까지 궁금증을 자아내는 두 개의 사건 - 연쇄살인과 국가안보의 위기 - ‘620분의 남자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겹겹의 층위를 쌓은 다층구조의 플롯을 지닌 작품입니다.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굴지의 투자회사 카울앤드컴리의 가공할 음모를 파헤치는 이야기에서 그쳤다면 이 작품은 평범한 스릴러에 그치고 말았겠지만, 데이비드 발다치는 범인도 동기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참혹한 연쇄살인사건을 잘 결합시켜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꾸며냈습니다. 밀접하게 연관된 것 같기도 하고 전혀 별개인 것 같기도 한 두 개의 사건은 디바인은 물론 독자의 머리를 무척이나 복잡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막판에 밝혀진 의외의 진실은 데이비드 발다치의 설계와 구성이 얼마나 정교하고 빈틈없이 이뤄졌는지를 제대로 실감하게 해줍니다.

 

이 작품의 미덕 중 하나는 곳곳에 배치된 매력적인 조연들인데, 우선 디바인이 머무는 타운하우스의 능력자동거인들은 각각 러시아 출신의 화이트 해커, 변호사 시험을 준비 중인 법대 졸업생, 유망한 스타트업을 이끄는 MIT 출신 재원으로 디바인의 수사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때론 그 정체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미스터리한 인물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 620분 열차를 타고 출근할 때마다 디바인이 지켜보곤 했던 대저택의 비키니미셸은 예상치 못한 행보를 거듭하여 독자의 흥미를 자극하는 인물입니다. 대형 스포일러까지는 아니어도 미리 알면 그 재미가 반감되는 인물이라 더 이상 언급은 어렵지만 이 작품의 재미를 배가시키는 존재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전직 특수부대 장교답게 디바인은 수차례에 걸쳐 위험천만하면서도 카타르시스 만점의 액션 장면을 소화해냅니다. MBA 출신의 명석한 지능까지 겸비한 그의 화려한 액션은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특별한 매력인데, 덕분에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를 더욱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가족을 잃은 트라우마에 갇힌 에이머스 데커와 마찬가지로 불행한 가족사와 함께 특수부대의 마지막 날들을 악몽으로 간직하고 있는 디바인의 큰 상처 역시 그의 미래를 궁금하게 만드는 요소들입니다. 결코 완치될 수는 없겠지만 그 상처들을 짊어진 채 점점 더 성장해나갈 디바인을 응원하고 싶어지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시리즈 2편인 ‘The Edge(2023)’까지 출간된 상태입니다. 빠르면 내년쯤엔 만나볼 수 있을 듯 한데, 우선은 곧 한국에 출간될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 사선을 걷는 남자를 읽으며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첫 번째 큰 미션을 마친 디바인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돌아올지, 어떤 고비를 맞이할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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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론의 법칙 변호사 미키 할러 시리즈 Mickey Haller series
마이클 코널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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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능력을 갖췄지만 최악의 속물이기도 한 변호사 미키 할러는 또 한 번의 무죄 판결을 이끌어낸 축하 파티 직후 귀가하던 중 순찰경관에게 제지당합니다. 무슨 연유에선지 자동차 뒤 번호판이 사라져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의 트렁크에서 잔혹하게 살해된 샘 스케일스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점입니다. 희대의 사기범이었던 스케일스는 할러의 고객 중 한 명이었고, 끝이 안 좋게 헤어진 일이 있는 악연의 인물입니다. 현행범으로 체포된 할러는 결국 구치소에 수감됐고 피고인으로 법정에 서는 신세가 됐습니다. 스스로를 변호하기로 한 할러는 후배인 제니퍼와 함께 대응에 나서지만 모든 정황은 그를 꼼짝없는 살인범으로 지목합니다.

 

변론의 법칙은 미국에서 2020년에 출간된 작품으로 미키 할러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입니다. 전작인 배심원단의 미국 출간이 2013년이니 무려 7년 만에 나온 신작인 셈인데, 그 사이 마이클 코넬리는 해리 보슈 시리즈르네 발라드 시리즈에만 주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미키 할러 시리즈’ 7편인 ‘Resurrection Walk’2023년에 출간됐습니다.)

 

의뢰인이 악당이라 하더라도 수임료만 맞으면 기꺼이 변호를 맡고 특유의 재능으로 무죄 혹은 형 감경을 이끌어냈던 미키 할러는 사방에 적이 많습니다. 그런 그가 살인을 저지른 피고인의 처지가 되자 그 적들이 날뛰기 시작합니다. 할러에게 두 번이나 물을 먹었던 판사는 일반적인 보석금보다 두세 배 높은 금액을 책정해 그의 보석을 원천봉쇄했고, 할러에게 보복할 날만 기다려온 검찰은 사형집행인이라는 별명이 붙은 강력부 스타 데이나 버그를 투입하여 그를 완전히 매장하려 합니다. 검찰 못잖게 악당을 위한 변호사할러를 증오해온 경찰 역시 그의 몰락에 쾌재를 부릅니다. 피고인 할러가 그나마 다행스럽게 여긴 건 재판을 맡은 판사 워필드가 다혈질에 독선적이긴 해도 비교적 공정하고 객관적인 인물이란 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할러는 단순히 무죄를 입증하는데 그치지 않고 진범을 직접 밝혀내기로 결심합니다.

 

변론의 법칙은 이른바 미키 할러 어벤저스의 맹활약을 그린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섯 번째 증인에서 법대를 졸업한 지 10개월 된 풋내기로 등장했지만 이제 9년차 변호사가 되어 할러와 함께 공동변호인이 된 한 제니퍼 애런슨, 할러의 두 번째 아내이자 사무장인 로나, 유능한 검사지만 이번 사건 때문에 휴가를 내고 할러의 변호를 맡은 첫 번째 아내 매기, 그리고 이복형인 해리 보슈에 이르기까지 할러 주위의 인맥들이 총출연합니다. 로스쿨에 다니는 할러의 딸 헤일리, 경찰학교에 다니는 보슈의 딸 매디, 충직한 수사관 시스코까지 가세한 ‘‘미키 할러 어벤저스의 전방위적인 활약은 사건 못잖게 눈길을 끄는 대목입니다. 전작인 배심원단이후 7년 가까이 할러의 연인이었다가 헤어졌던 켄달이 오랜만에 그의 곁으로 돌아와 온기를 불어넣어주는 장면들도 아슬아슬한 로맨스의 묘미를 선사합니다.

 

구치소에 수감된 상태에서 제한된 활동밖에 할 수 없지만 특유의 재능을 발휘하여 팀원들을 움직이는 할러의 활약도 매력적이고, 할러를 매장하기 위해 물불을 안 가리는 사형집행인이란 별명의 검사 데이나 버그의 맹공격도 화려하게 그려져서 500페이지를 훌쩍 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흥미진진하게 읽힙니다. 전처인 매기와 로나, 현재의 연인인 켄달과의 미묘한 4각 로맨스도 재미있고, 성장기 내내 아빠 할러와 갈등을 겪었던 헤일리가 법정 안팎에서 할러를 응원하는 대목은 시리즈를 쭉 읽어온 독자에겐 그저 애틋하게 보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을 딱 한 가지만 꼽으라면, 법정 스릴러의 교과서를 방불케 하는 상세한 재판 과정 묘사들이 간혹 느슨하고 지루하게 읽힐 만큼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꼭 필요한 설명들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읽은 미키 할러 시리즈에 비하면 다소 과해 보였습니다. 그 부분들이 조금만 축약됐다면 훨씬 더 슬림하고 속도감 넘치는 이야기가 됐을 거란 생각입니다. 상대적으로 미스터리의 핵심인 살인사건 자체는 분량에 비해 단선적으로 전개됐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더 강하게 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장을 덮으면서 가장 기대된 점은 할러의 딸 헤일리의 미래입니다. 후속작인 ‘Resurrection Walk’가 이 작품 이후 3년 만에 출간됐으니 현재 로스쿨에 다니고 있는 헤일리는 어엿한 변호사가 돼있을 것 같지만 어쩌면 정반대로 엄마인 매기의 뒤를 이어 검사가 됐을 수도 있습니다. 변호사가 됐다면 할러와 제니퍼의 동료가, 검사가 됐다면 할러의 이 되는 셈입니다. 어떤 사건이 할러를 궁지에 몰아넣을지도 궁금하지만 애초 가족이었다가 해체의 상처를 겪었던 할러-매기-헤일리가 어떤 미래를 맞이할지가 더 궁금해지는 건 미키 할러 시리즈의 팬이라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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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알아서는 안 되는 학교 폭력 일기 쿤룬 삼부곡 2
쿤룬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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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제목을 가진 이 작품(이하 학교폭력 일기’)은 역시 독특한 제목을 가진 살인마에게 바치는 청소지침서’(이하 청소지침서’)에 이은 쿤룬 3부곡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아직 읽지 못한 세 번째 작품 역시 업자에게 잊혀진 시체 보관기록이라는 엽기적이면서도 특이한 제목을 갖고 있습니다.

청소지침서가 희대의 연쇄살인마 잭 더 리퍼를 숭배하는 전 세계적인 살인집단 ‘JACK’의 조직원만 골라 죽이며 복수를 펼치는 결벽증 미소년 스녠의 활약을 그렸다면, ‘학교폭력 일기는 살인범에게 아버지를 잃은 뒤 지독한 학교폭력과 가정폭력의 피해자로 살던 15살 여중생 장페이야가 무시무시한 살인마로 변신하여 복수를 펼치는 이야기입니다.

 

쿤룬 3부곡이라는 시리즈 명에 걸맞게 두 작품에는 몇 가지 접점이 있습니다. 장페이야는 청소지침서에서 아버지가 살해되는 장면을 목격한 어린 남매로 등장한 바 있습니다. 또한 부와 명예와 미모를 겸비한 심리치료사 닥터 야오, 그녀를 숭배하는 미스터리한 인물 이하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정보판매상 다비도프, 그리고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의 주인공이 될 시체수거업자등 눈길을 끄는 조연들이 모두 등장합니다. 주인공은 계속 바뀌지만 크게 보면 한 편의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하다는, 즉 시리즈의 묘미를 한껏 살린 작품들이란 뜻입니다.

 

아버지를 잃고 동생과도 헤어져 고모 집에 머물게 된 장페이야는 고모 부부의 거칠고 탐욕스런 학대는 물론 전학 간 학교에서마저 지독한 폭력에 시달립니다. 그런 장페이야에게 유일한 위안은 편의점에서 심야 아르바이트를 하는 청년 류촨한뿐입니다. 어리숙해 보이지만 다정다감한 촨한 덕분에 장페이야는 찰나에 불과하지만 편안함과 안식을 얻습니다. 하지만 우연한 불청객 때문에 촨한의 어두운 과거가 밝혀지고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장페이야와 촨한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때 고모집과 학교에서 더는 인내할 수 없는 사태들이 벌어진 상태에서 누군가 장페이야에게 손을 내밉니다. 복수하라고, 도와주겠다고.

 

가해자에 대한 복수는 오래된 소재이기도 하고 근래 들어 지나치게 자주 소모된 탓에 다소 식상한 면이 있지만, 그래선지 장르를 불문하고 이야기를 창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설정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것으로 보입니다. 쿤룬 역시 그중 하나인데, 중화권 미스터리의 일반적인 특징 시끄럽고 잔혹하지만 블랙유머가 난무하고 대체로 쉽게쉽게 넘어가는 구성 등 을 다 갖추고 있으면서도 나름 흥미로운 캐릭터와 스토리를 자아냈습니다.

혹독한 성장기와 비극적인 사건 때문에 희대의 살인마가 된 청소지침서의 스녠이나 여린 모범생이었지만 끝이 안 보이는 지독한 폭력으로 인해 임계점을 넘은 끝에 피의 복수자가 된 학교폭력 일기의 장페이야는 다소 비현실적인 캐릭터임에 분명하지만, 작가는 그들의 과거와 현재 속에 연민을 자아낼 수밖에 없는 지극히 현실적인 설정 가족, 연인, 미래에 대한 희망 등 - 을 배치하여 나름 적절한 방식으로 중화 효과를 이끌어냅니다. 또한 주인공들에게 (비위가 약한 독자라면 외면하고 싶을 정도의) 잔혹한 폭력을 거듭 가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저절로 그들을 응원하게 만들고 부디 복수해!”라며 등을 떠밀고 싶게 만들기도 합니다. 과도할 정도의 감정 이입을 조장함으로써 캐릭터의 비현실성을 망각하게 한다고 할까요?

 

잔혹한 스릴러 서사를 좋아해서 무척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전작과 마찬가지로 별 4개에 그친 가장 큰 이유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모든 것이 너무 쉽다는 것입니다. 스포일러를 피해 이야기하자면 너무 쉽게 포기하고, 너무 쉽게 오해하고, 너무 쉽게 살인마가 된다, 정도인데, 적잖은 중화권 미스터리에서 비슷한 아쉬움을 여러 번 느낀 걸 보면 아무래도 보편적인 현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스포일러가 될 대목들이 많아서 인상 비평에 가까운 서평이 되고 말았는데,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어도 중독성이 강한 이야기라 한 편이라도 읽으면 나머지 작품들도 찾아 읽게 될 게 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저 역시 시리즈 마지막 작품까지 달릴 생각인데, 이 작품에서 장페이야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류촨한이 막판에 세 번째 작품을 위한 큰 떡밥을 남겨서 더욱 기대감을 갖게 됐습니다. 과연 세 번째 작품에서 장페이야가 류촨한과 재회할지, 또 아버지의 죽음의 진실을 알게 될지, 그럼으로써 첫 번째 작품의 주인공 스녠과 연결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1~2편의 모든 인물이 집합하여 화려한 대결을 펼친다.”고 하니 1~2편보다 더 세고 독하고 잔혹한 이야기들이 펼쳐지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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