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속의 여인
로라 립먼 지음, 박유진 옮김, 안수정 북디자이너 / arte(아르테)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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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미국 볼티모어. 매디 슈워츠는 37살 생일을 앞두고 그동안의 안락한 삶에 작별을 고합니다.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며 집을 나간 매디는 열악한 생활을 견디는 와중에 흑인 경찰 페디와 인연을 맺는가 하면 11세 소녀 실종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일을 계기로 신문기자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겨우 볼티모어 신문사 스타에 들어갔지만 기사 작성과는 거리가 먼 잡무만 떠맡으며 혹독한 수습생활을 견디던 매디는 호수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흑인여성 클레오의 사건에 관심을 갖고 어떻게든 진실을 알아내 특종을 따내기로 마음먹습니다. 하지만 경찰과 사건 관련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스타의 기자들까지 냉소만 보낼 뿐입니다. 더욱 분발하던 매디는 유력한 단서를 손에 넣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큰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1997년 데뷔 이래 세계 유수의 범죄문학상을 석권했다는 로라 립먼의 프로필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 호수 속의 여인을 통해 그 이름을 처음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전까지 한국에는 (앤솔로지 작품인 라인업을 제외하면) 단 두 작품만 소개됐다는 점도 그녀의 명성에 비하면 다소 의외로 보였습니다.

 

줄거리만 보면 주인공이 기자인 살인사건 미스터리로 예단할 수 있는데, ‘호수 속의 여인은 미스터리 외에도 다양한 면을 지닌 작품입니다. 큰 뼈대는 기자 지망생매디 슈워츠가 호수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흑인여성 클레오의 죽음의 진실을 찾는 이야기지만, 그 외에도 1960년대 미국에서 벌어졌던 온갖 종류의 차별 - 여성, 흑인, 종교 에 대한 사실감 넘치는 서사와 함께 3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욕망과 희망 사이에서 혼란을 겪으며 살아온 매디 슈워츠라는 한 여성의 굴곡진 연대기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미스터리, 사회 고발물, 여성소설이라는 최소한 세 개의 얼굴을 지닌 작품이라고 할까요?

 

10대 때부터 엄청난 카리스마와 외모로 상대방을 장악했던 매디는 원하는 것은 모조리 손에 넣는 능력자였지만 17살에 악몽과도 같은 일을 겪은 탓에 18살이 되자마자 자신의 체면을 세워줄 수 있을 것 같은 남자와 부랴부랴 약혼을 했고, 이후 겉으로는 안락한 삶을 누리는 것처럼 지냈지만 실은 자신의 처지가 시녀에 불과하다는 자괴감에 빠진 채 살아왔습니다. 그런 그녀가 집을 뛰쳐나온 뒤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는 칼럼니스트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군분투하는, 특히 백인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경찰과 언론의 마초들에게 수시로 당하는 지독한 차별을 이겨내는 모습은 1960년대에 태동한 페미니즘 이슈를 극적으로 반영하고 있어서 무척이나 눈길을 끈 대목입니다. 스티븐 킹이 당시 여성에게 기대되는 것과 여성이 열망하는 것 사이의 간극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찬사를 보낸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으로 보입니다.

 

매디의 캐릭터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건 새 연인인 흑인경찰 페디입니다. 당시 흑백인종간의 연애가 불법이었던 탓에 데이트는커녕 함께 외출하는 것조차 꿈도 꾸지 못하던 매디와 페디는 늘 좁은 방에서 서로의 몸을 탐닉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불행한 연인입니다. 경찰인 페디는 매디의 취재와 조사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두 사람의 존재감은 미스터리보다는 당시의 부당했던 사회상을 폭로하는 장면들에서 더욱 빛이 납니다.

 

클레오의 죽음의 진실을 추적하는 매디의 행보는 거침없습니다. 정식 기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건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지독할 정도로 쫓아다니며 작은 단서라도 얻기 위해 분투합니다. 페디의 도움도 있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통해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단서를 확보하기도 합니다. 당연히 매디를 방해하는 자들이 나타나기도 하고, 때론 신변에 위협을 느끼는 아슬아슬한 상황도 발생합니다. 하지만 매디의 롤러코스터 같은 과거사와 온갖 차별에 대한 서사가 워낙 묵직하게 읽혀서 그런지 미스터리 자체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 갔던 게 사실입니다.

또한 보기 드문 독특한 구성 역시 미스터리에의 몰입을 방해한 요인 중 하나입니다. 즉 매디가 누군가를 만나거나 탐문하는 챕터가 끝나자마자 바로 그 누군가1인칭 주인공인 챕터가 이어집니다. 중요한 조연뿐 아니라 매디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그 누군가로 등장하는데, 이들은 사건이나 매디에 관해 말하기도 하지만 때론 자신만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뒤 사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이야기 역시 희한하게도 무척 재미있어서 역설적이지만 독자로 하여금 미스터리 서사를 망각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일으키곤 합니다.

 

정통 미스터리를 기대했다가 차별이 만연했던 1960년대를 살아간 한 여성의 버라이어티한 이야기를 읽게 된 셈이지만 개인적으론 의외로 재미있는 책읽기가 됐습니다. 미스터리 서사가 좀더 강렬했더라면 더 바랄 것이 없었을 텐데 그 아쉬움은 한국에 출간된 로라 립먼의 두 작품들(‘죽은 자는 알고 있다’, ‘나는 네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로 달래볼까, 생각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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