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위선자들 ㅣ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
M. J. 알리지 지음, 유혜인 옮김 / 북플라자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사우샘프턴의 외진 곳에서 연이어 잔혹하게 훼손된 시신들이 발견됩니다. 범인은 피해자들의 가슴을 열고 무자비하게 심장을 뜯어낸 뒤 그것을 택배상자에 담아 가족이나 직장으로 보냅니다. 사우샘프턴 중앙경찰서의 헬렌 그레이스 반장은 첫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연쇄살인의 가능성을 제기했고 그 예상은 적중합니다. 언론에선 피해자들이 성매매 도중 살해된 사실을 지적하며 ‘잭 더 리퍼에 대한 역습’, 즉 매춘부가 성매매 남성들을 단죄하는 사건이라고 보도하는 가운데 헬렌과 수사진은 좀처럼 단서를 찾아내지 못해 애를 먹습니다. 한편 1년 전 해결한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헬렌은 수사 외에도 경찰 내부와 언론 등 사방에서 가해지는 공격 때문에 큰 위기에 봉착하고 맙니다.
‘이니미니’에 이은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헬렌 그레이스는 ①영국의 여형사이자 ②심각한 유년기의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으며 ③광적인 오토바이 마니아라는 점에서 안젤라 마슨즈가 창조한 ‘걸 크러쉬 형사’ 킴 스톤과 무척 닮은꼴입니다. 캐릭터 자체도 매력적이지만 시리즈 첫 편인 ‘이니미니’에서 평생 지워지지 않을 큰 상처를 입은 탓에 그 후 헬렌이 어떤 삶을 살게 됐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매매 남성 연쇄살인’을 해결하는 게 헬렌의 가장 큰 미션이며 이 작품의 중심 줄거리이긴 하지만 그에 못잖게 독자의 눈길을 끄는 건 헬렌을 향한 유무형의 날선 공격들입니다. 새로 부임한 총경 세리 하우드는 헬렌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는 것은 물론 그녀의 공을 빼앗는 짓도 서슴지 않는 전형적인 관료 빌런입니다. ‘이니미니’에서 헬렌 못잖게 큰 트라우마를 얻은 찰리 브룩스는 1년 만에 경찰에 복직하지만 한때 롤 모델로 삼을 정도로 추앙했던 헬렌과의 관계가 서먹해진 것은 물론 그녀가 자신의 복직을 반대했다는 말을 듣곤 어떻게든 공을 세워 그녀에게 한 방 먹일 각오를 다집니다. 또한 특종과 명성을 위해서라면 좀더 많은 살인이 벌어져도 좋다고 여기는 악질 기자 에밀리아 개라니타는 전작에 이어 헬렌과 수차례 충돌을 거듭하는데 이번에는 그녀를 완전히 망쳐놓을 작정으로 넘어선 안 될 선을 수시로 넘습니다.
400여 페이지의 분량임에도 무려 121개의 챕터로 나뉘어져있는데 그만큼 빠른 템포와 속도감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연이어 희생자가 발생하는 가운데 수사는 지지부진하고 자신을 향한 악의에 찬 공격들까지 방어해야 하는 헬렌의 위기가 더욱 숨가쁘게 느껴지는 건 이런 짧고 빠른 호흡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인물의 심리나 배경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가 영미권 스릴러의 특징이지만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는 독자를 조급하게 만들 정도로 딱 필요한 요소들만 언급하며 이야기를 빠르게 전개시킵니다.
개인적으론 연쇄살인사건보다 헬렌이 겪는 시련들이 더 재미있게 읽혔는데, 바꿔 말하면 그만큼 사건 자체가 덜 흥미로웠다는 뜻입니다. 연이어 희생자가 발생하면 그만큼 독자가 느끼는 위기감도 함께 고조돼야 하는데, 이 작품 속의 연쇄살인은 동어반복 같은 지루한 인상이 더 강했습니다. 마지막에 밝혀진 범인의 정체와 동기는 나름 반전의 맛을 전해주긴 하지만 무게감이나 진정성 면에서는 약해 보인 게 사실입니다. 어쩌면 전작인 ‘이니미니’가 워낙 세고 독했기에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컸던 게 아쉬움의 진짜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엔 ‘이니미니’에 대한 스포일러가 굉장히 많이 들어있습니다. 또한 ‘이니미니’를 읽지 않으면 여러 가지 팩트와 인물들의 심리 등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대목들이 많기도 합니다. 헬렌은 말할 것도 없고 주요인물 대부분이 ‘이니미니’ 속 사건의 여파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급적이면 ‘이니미니’를 먼저 읽은 뒤에 이 작품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