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저 노트, 여왕의 비밀 수사 일지 첩혈쌍녀
소피아 베넷 지음, 김원희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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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 살 생일을 앞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윈저성에서 열린 연회에서 러시아 피아니스트가 변사체로 발견되자 충격에 빠집니다. 무엇보다 다분히 변태적인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시신의 상태 때문에 철저한 보안 하에 보안정보국과 경찰이 비밀리에 내사를 벌일 수밖에 없습니다. 당일 방문객과 성의 직원들까지 샅샅이 조사하지만 좀처럼 단서가 드러나지 않는 것은 물론 수사책임자인 보안정보국장이 러시아의 암살 음모가 확실하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여왕의 혼란은 더욱 깊어집니다. 여왕의 선택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진실을 캐는 것. 여왕은 신참 보조비서 로지를 비롯한 측근들을 지휘하여 사건의 진상을 하나둘씩 밝혀내기 시작합니다.

 

올해 9월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주인공인데다 그녀 자신이 왕관을 쓴 미스 마플’, 즉 미스터리 해결사로 등장한다고 해서 더욱 관심을 끈 작품입니다. 노인이나 주부 등 아마추어 탐정이 활약하는 미스터리를 선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윈저성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현직 여왕은 저 같은 취향의 독자에게도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설정이었습니다.

 

자칫 러시아 남자, 여왕의 파티에서 섹스에 탐닉하다 사망해!”라는 기사가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라 철저한 보안이 이뤄진 가운데, 사건 전날부터 윈저성에 묵은 50여 명의 방문객과 수백 명에 달하는 성의 직원들을 상대로 벌이는 수사는 초반부터 난항에 부딪힙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수사의 두 주체는 명확히 다른 관점을 드러냅니다. 보안정보국의 수장 개빈 험프리스가 푸틴의 지시를 받은 내부 스파이의 소행!”이라고 단정한 반면, 여왕의 직감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합니다. 그리고 그 직감을 입증하기 위해 측근들을 활용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여왕이 측근들을 고르는 기준은 좀 독특합니다. 아무리 자신의 수족과 같은 자라 해도 자신을 그저 블로그가 뭔지도 잘 모르는 90살 할머니로만 여기는 자들은 일부러 배제합니다.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해주는 자, 자신과 소통이 되는 자들을 선택합니다. 왕실 기마포병대에서 복무한 뒤 여왕의 보조비서가 된 지 고작 6개월밖에 안 된 신참 로즈메리 그레이스 오쇼디(이하 로지)가 선발된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과거 경호팀에서 일하다 은퇴한 빌리 매클라클런 역시 이런 맥락에서 여왕의 팀에 합류하게 됩니다.

 

직접 수사에 뛰어들 수도, 관련자들을 탐문할 수도 없는 여왕을 위해 로지와 빌리는 분주하게 발품을 팝니다. 특히 로지는 여왕의 최측근이자 자신의 직속상관인 사이먼 경마저 속여야 하는 것은 물론 비밀리에 대포폰까지 마련하는 등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스파이역할에 때론 당황하기도 때론 묘한 흥분을 느끼기도 합니다. 또한 자신뿐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왕관을 쓴 미스 마플을 보좌하던 전임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건, 측근들을 활용하여 미스터리를 풀어내긴 하지만 정작 여왕 자신이 해결사란 점은 결코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 측근들이 모아온 결정적인 단서와 자신이 직접 추리하여 얻어낸 사건의 진상을 티 안 나게 넌지시 던져주고 결과가 발표되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수사에 가담한 측근 1~2명을 제외하곤 아무도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합니다.

이런 설정은 흥미로우면서도 동시에 주인공이 발산하는 쾌감을 맛볼 수 없다는 단점도 지니는데, “윈저성에서 펼쳐지는 본격 탐정 서사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공산이 크다. 이 작품은 여왕이 자기만의 방식 - 능청스럽고 우아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무위의 기술 - 으로 미스터리를 푸는 과정을 그린다.”(p389)라는 역자 후기는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개인적으론 미스터리 못잖게 70년 가까이 왕위를 지켜온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소소한 일상들이 매력적으로 읽혔는데, 어쩌면 불과 얼마 전에 그녀가 서거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애틋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남편 필립 공과의 소박한 부부생활, 증손녀의 생일을 기다리는 작은 기쁨, 애마(愛馬)에 대한 무한하고도 따뜻한 애정, 그리고 윈저성의 모든 직원들에 대한 푸근한 배려 등 여왕의 일상 하나하나가 흥미진진하게 그려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미스터리의 난이도나 그 결과에 대해 다소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이런 미덕들 때문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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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라의 비밀 약방
사라 페너 지음, 이미정 옮김 / 하빌리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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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년 런던의 뒷골목에 자리한 비밀스러운 약방. 손님은 살의를 지닌 여자들이며, 약제사 넬라가 파는 것은 남자를 죽이는 독입니다. 오래 전 연인의 지독한 배신 이후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넬라는 엄마에게 물려받은 약방에서 남자를 죽이는 독을 팔아온 것입니다. 어느 날 심부름 온 12살 하녀 엘리자를 만난 뒤로 넬라는 예상치 못한 사건에 휘말립니다.

현재의 런던.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캐롤라인은 결혼 10주년 여행을 위해 잡아놓은 런던의 호텔에 홀로 투숙합니다. 템스강에서의 유물 찾기 이벤트에 참가했다가 하늘색 약병을 주운 캐롤라인은 역사학도다운 호기심에 약병의 사연을 알아내려 애씁니다. 그리고 그 약병이 200년도 훨씬 지난 과거에 한 약제사에 의한 연쇄 독살살인과 관련 있음을 알게 됩니다.

 

유물을 매개로 하여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잇는 방식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지만, ‘넬라의 비밀 약방은 과거의 연쇄살인사건을 현재의 인물이 추적한다는 미스터리와 함께 여성문학의 서사가 묵직하게 깔려있는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남자에게 배신당한 뒤 남자를 죽이는 독을 만들게 된 약제사 넬라가 18세기 런던의 주인공이라면, 남편의 불륜 때문에 삶 자체가 뒤흔들린 것은 물론 지금까지 자신이 결혼이란 제도에 묶인 채 너무나도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아온 것을 깨닫게 된 캐롤라인이 21세기 런던의 주인공입니다. 200년도 넘는 간극이 있지만 넬라와 캐롤라인은 남자, 사회, 제도라는 공적(共敵)을 둔 여자이자 자신을 옭아맨 것들과 과감히 싸우거나 그것들로부터 탈출하기로 결심한 투사라는 공통점을 가진 인물들입니다.

 

절망과 배신감에 휩싸인 여자들에게 독약을 팔던 넬라의 일상을 뒤흔든 건 12살 하녀 엘리자입니다. 독에 대한 호기심은 물론 약제사 넬라에 관한 궁금증에 사로잡힌 엘리자는 비밀약방의 모든 것이 그저 매력적일 뿐입니다. 더구나 이제 막 초경을 시작했지만 그것을 (자신이 배달한 독을 먹고 사망한) 귀족의 유령이 내린 저주 때문이라고 여긴 엘리자는 혹시라도 넬라가 그 유령을 퇴치할 약을 제조해줄 수 있을지도 궁금합니다. 엘리자의 지나친 관심을 냉정하게 밀어내면서도 오래 전 뱃속 아기를 잃은 기억이 있는 넬라는 엘리자에게 복잡한 감정을 느낍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복잡 미묘한 관계는 결국 비밀약방을 큰 위기에 빠뜨리고 맙니다.

 

원래 역사학도로서 런던 유학까지 계획했다가 결혼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했던 캐롤라인이 공교롭게도 템스 강가에서 발견한 작은 약병 하나 때문에 다시금 역사학도의 열정을 불태운다는 점, 또 그 과정에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억누르고 포기하며 살아왔는지를 깨닫는 과정 역시 무척 흥미진진하게 전개됩니다. 말하자면 캐롤라인이 모든 구속과 관습을 깨고 진정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게 된 성장 스토리라고 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불분명하긴 하지만 약제사 넬라에게서 닮은 느낌 혹은 연대감까지 느끼는 캐롤라인의 행보는 미스터리 못잖게 독자의 시선을 끕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을 넘나들며 공명하는 세 여성의 고통과 환희와 비밀스러운 연대. 런던의 화려한 외양 뒤에 가려진 어둠으로 입장하는 초대장.”이라는 알라딘 소설MD 권벼리의 소개글은 이 작품의 핵심을 잘 압축해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인 틀은 무척 단순하지만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넬라와 캐롤라인의 이야기가 긴박하게 전개되고 막판에 거듭된 반전까지 곁들여진 덕분에 400여 페이지의 분량을 금세 완독할 수 있습니다. 영상미를 강조한 설정도 많아서 영화로 제작된다면 원작 이상의 매력을 맛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언젠가 넬라의 비밀 약방18세기 런던을 멋지게 구현한 대형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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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인의 목격자
E. V. 애덤슨 지음, 신혜연 옮김 / 하빌리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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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을 노골적으로 공개한 칼럼으로 인기와 비난을 동시에 얻으며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온 저널리스트 젠 헌터는 그동안 감춰왔던 치명적인 비밀 하나 때문에 하루아침에 해고 통보를 받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한낮의 유명 관광지에서 벌어진 끔찍한 살인-자살사건의 목격자가 되고 맙니다. 여자친구를 살해한 남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면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던 젠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대학시절부터 절친인 벡스는 오래 전부터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보여온 젠이 걱정되지만, 오히려 젠은 직접 목격한 사건을 기사로 쓸 계획을 세웁니다. 누군가 사건의 진범이 따로 있음을 암시하는 트위터 메시지를 보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젠은 트위터를 통한 협박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분투합니다.

 

훤한 대낮에, 그것도 자신을 포함하여 다섯 명이 코앞에서 목격한 살인-자살사건에 진범이 따로 있다는 설정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물론 이 설정은 젠에게 날아온 트위터 메시지에 의해 제기된 것일 뿐 초반부터 확정된 상황은 아닙니다. 40대 초반인 젠이 젊은 시절부터 심리적인 불안정을 겪어왔다는 점에 착안한 독자라면 누군가의 악의적인 장난에 휘말린 젠이 지독한 심리 호러 서스펜스 서사를 이끌어갈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고, 이 설정이 사실이라고 믿는 독자라면 누군가 두 연인을 조종하여 끔찍한 살인-자살극을 유도했을 가능성에 주목할 것입니다. 중반부까지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열어놓고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들던 작가는 이내 범인의 정체를 공개하곤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스릴러로 방향을 확실히 잡습니다.

 

저널리스트라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과장되게 까발린 칼럼으로 인기를 얻은 젠은 과잉공유욕구, 공황장애, 심리적 의존증을 겪는 유약한 인물입니다. 대학시절 만난 절친 벡스 덕분에 가까스로 안정된 삶을 유지해왔지만 얼마 전 연인인 로렌스와 끔찍한 방식으로 헤어진데다 해고통보에 이어 살인사건까지 목격하면서 심리적으로 완전히 붕괴 일보직전에 이릅니다. 그런 그녀가 진범이 따로 있다는 익명의 트위터 메시지를 받은 뒤 사건의 진상을 기사화함으로써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제대로 된 저널리스트로 거듭나겠다고 다짐하는 건 무척이나 역설적인 일입니다. 문제는 조사를 시작하자마자 익명의 트위터를 통해 연이어 날아드는 스토킹에 가까운 협박장들입니다. 협박장을 보낸 익명의 존재가 실은 살인-자살극의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달한 젠은 벡스의 도움으로 유력한 용의자의 행적을 뒤쫓기 시작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젠의 마음속엔 진실 찾기를 넘어선 욕구가 자리 잡습니다. 그건 바로 복수심입니다.

 

이 작품엔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는 다양한 종류의 폭력이 등장합니다. 데이트 폭력, 가스라이팅, 스토킹, 가정폭력, 시기와 질투를 넘어선 집착, 그리고 죄의식 없는 살인이 그것입니다. 대부분의 폭력은 상대를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욕구에서 출발하며, 그 욕구가 자기 뜻대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물리적 수단을 이용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젠과 그녀의 절친인 벡스는 물론 살인-자살사건의 목격자들 대부분 이런 식의 폭력으로 인한 크고 작은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는데, 그 때문에 젠은 조사를 거듭할수록 다분히 감정적이고 불안정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살인을 목격한 뒤 협박을 받아가며 진상을 밝히려는 처지에서 스스로 극단적인 폭력을 저지르겠다고 마음먹게 되는 젠의 일거수일투족은 말하자면 폭력에 관한 심리 스릴러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수의 목격자가 있는 사건이지만 실은 진범이 따로 있다.”는 설정 자체는 독특하고 매력적이며, 심리 스릴러의 미덕도 함께 녹아있어서 500여 페이지의 분량을 금세 완주할 수 있었지만 크게 보면 두 가지 아쉬움이 남았는데, 하나는 사건의 성격이나 규모에 비해 과도한 분량입니다. 사건 자체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여러 인물의 심리를 강조하기 위해 이야기가 여러 번 반복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적어도 100페이지 정도는 사족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또 하나는 막판 반전을 위해 동원된 개연성 부족한 우연입니다. 차라리 상투적인 엔딩이었다면 이해됐겠지만 희박한 우연에 기댄 반전을 위한 반전은 앞서 읽은 이야기들을 다소 허망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두 가지 아쉬움만 없었더라면 적어도 4.5~5점을 줄 수 있는 작품이니 설정에 흥미를 느낀 독자라면 한번쯤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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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라트비아인 매그레 시리즈 1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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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경찰청 기동수사대 반장 매그레는 국제적 사기범인 일명 라트비아피에트르가 파리로 온다는 전보를 받곤 기차역으로 출동합니다. 한 남자가 기차 화장실에서 사체로 발견돼 소동이 일어난 가운데 매그레는 피에트르로 추정되는 인물을 뒤쫓습니다. 고급호텔에 투숙한 피에트르가 미국인 거물 부부와 어울리는 걸 목격한 매그레는 하나둘씩 단서를 모아 피에트르의 정체를 밝혀내는데 골몰합니다. 국제적 사기범인 건 분명하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어서 그를 체포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피에트르의 행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매그레는 그가 도저히 한 인물이라고 볼 수 없는 극과 극의 모습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 와중에 동료형사가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매그레 본인도 부상을 입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수상한 라트비아인1931년에 출간된 작품으로 매그레 시리즈의 첫 편이기도 합니다. 동시대의 유명한 캐릭터인 엘러리 퀸이나 에르퀼 푸아로에 비해 한국 독자들에겐 덜 알려졌지만 세계적인 판매부수나 영화로 만들어진 이력을 보면 매그레의 명성은 퀸과 푸아로에 조금도 뒤지지 않아 보입니다.

사실 수상한 라트비아인을 읽게 된 계기는 현대와 고전을 막론하고 유수의 시리즈들 가운데 전혀 접해보지 못한 작품을 첫 편만이라도 읽어보자는 욕심에서 비롯됐습니다. 결과적으론 제 취향과는 잘 안 맞는 걸 깨닫긴 했지만 고전의 풍미만큼은 충분히 맛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돼줬습니다.

 

국제적 사기범을 추적하는 꽤 큼직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매그레 원 맨 쇼에 가깝습니다. 물론 파트너도 등장하고 후배형사도 등장하지만 매그레는 45세의 나이에 반장이라는 직책에도 불구하고 마치 전성기를 구가하는 젊은 형사처럼 홀로 현장을 누빕니다. 탐문과 단서 확보는 물론 잠복까지 마다하지 않은 그의 정열은 대단하지만 역설적으로 국제적 사기범을 쫓는다면서 다른 형사들은 다들 뭘 하고 있나?”라는 의문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물론 용의자가 눈앞에서 아른거려도 증거가 없어 체포할 수 없다 보니 이런저런 탐문과 조사가 필요한 건 맞지만 아무래도 사건의 규모에 비하면 매그레 원 맨 쇼는 오히려 현실감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막판에 매그레가 밝혀낸 수상한 라트비아인 피에트르의 정체는 무척 고전적인 트릭의 결과라서 요즘의 독자들에겐 먹히기 어렵지만, 앞서 전개된 이야기들 덕분에 나름 무게감을 발휘하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또 집요할 정도로 이어지는 탐문 위주의 서사라 그리 길지 않은 분량에도 다소 지루하게 읽혔지만 매그레 반장의 매력적인 캐릭터 덕분에 끝까지 버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론 고전임을 감안하더라도 속도감이나 정교함 면에서 만족하기 어려워 높은 평점을 줄 수는 없었습니다. ‘수상한 라트비아인이 제대로 발동을 걸어줬더라면 후속작까지 달릴 수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매그레 시리즈를 계속 읽게 될 것 같진 않습니다. 다만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통해 흥미를 유발하는 작품을 발견한다면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집요함과 소탈함을 지닌 매그레 반장의 대활약을 다시 만나 볼 생각이 100% 있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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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하게 헌신적인 덱스터 모중석 스릴러 클럽 9
제프 린제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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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음흉하게 꿈꾸는 덱스터에 이은 덱스터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꽤 오래 전 미드 덱스터를 흥미롭게 본 덕분에 뒤늦게 원작소설을 찾아 읽게 된 건데, 기대와 달리 시리즈 첫 편은 여러 가지 아쉬움만 남겼습니다. 그래서 딱 한 편만 더 읽어본 뒤 시리즈 나머지를 읽을지 결정하기로 하고 두 번째 작품인 끔찍하게 헌신적인 덱스터를 집어 들었습니다.

 

경찰에 소속된 혈흔분석가지만 동시에 용서받지 못할 살인범만 골라 살해하는 특이한 연쇄살인범인 덱스터는 이 작품의 초반까지 모두 마흔 명을 세상에서 제거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형사이자 피 한 방울 안 섞인 여동생 데보라로 인해 덱스터는 엽기적인 토막상해사건에 끼어들게 됩니다. 범인은 피해자의 사지와 혀와 눈꺼풀을 잘라냈으면서도 정작 목숨은 살려둡니다. 단서 하나 잡지 못한 채 수사의 향방조차 못 정한 상태에서 워싱턴에서 날아온 연방요원 카일은 경찰의 수사를 중지시킵니다. 그리고 데보라를 연락책 수준의 파트너로 지목합니다. 애초 수사엔 관심이 없고 오히려 동업자처럼 보이는 범인에게 호기심을 보이던 덱스터는 데보라와 카일이 위기에 빠지자 본의 아니게 수사의 한복판에 서게 됩니다.

 

이번 작품에서 덱스터가 상대하는 범인은 일반적인 연쇄살인마가 아닙니다. 20여 년 전 정부기관이 중남미에서 자행한 비밀 살상임무가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하고, 범인은 무차별 혹은 쾌락살인마가 아니라 명백한 복수의 의지로 움직입니다. 한마디로 덱스터로서는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 상대라는 뜻입니다. 소아성애 연쇄살인마와 그 공범을 쫓던 덱스터가 이 사건에 말려든 건 순전히 여동생 데보라 때문입니다. 열혈형사인 그녀는 연방요원 카일과 함께 짝을 이뤄 범인 찾기에 나서는데, 연쇄살인사건에 특별한 촉을 갖고 있는 오빠 덱스터를 집요하게 밀어붙여 수사에 끌어들인 것입니다.

 

사건 못잖게 덱스터를 신경 쓰이게 하는 건 자신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감시의 눈길을 떼지 않는 독스 경사입니다. 그 때문에 피의 향연을 즐기지 못하게 된 덱스터의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러던 중 독스 경사가 엽기적인 토막상해사건에 연루돼있으며 어쩌면 그 역시 범인의 목표물일지도 모른다는 추리에 이른 덱스터는 엉뚱한 기대감 자신을 의심하는 독스 경사를 이번 사건의 범인이 제거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 을 갖게 됩니다. 상식 밖의 발상이지만 덱스터라면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또 한 가지 덱스터의 엉뚱한 면모는 범인에 대한 태도입니다. 전작에서도 피 한 방울 남기지 않은 채 완벽하게 토막살인을 저지른 범인에게 존경심을 품었던 덱스터는 이번에도 뛰어난 동업자에 대한 호기심에 사로잡힙니다. 흉악범을 체포해야 된다는 사명감 따윈 없고 어떻게든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욕망이 덱스터를 수사에 몰입하게 만드는 더 큰 원동력입니다.

 

전작에서 인연을 맺은 이혼녀 리타와 그녀의 남매(코디, 애스터)와의 관계 역시 흥미로운데, 애초 사랑 같은 감정은 품을 줄도 모르고 섹스조차 관심 없는 덱스터가 본의 아니게 리타와 끈끈하게 연결되는 대목이라든가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소심하고 내향적으로 성장한 6살 소년 코디에게서 이상한 동질감(“얘 혹시 나랑 같은 과아니야?”)을 느낀 덱스터가 충격과 기대를 동시에 품게 되는 장면들이 그것입니다. 아무런 감정도 못 느끼며 오로지 연쇄살인범을 처단하는 피의 향연에서만 행복을 느끼는 덱스터가 과연 가족이란 걸 이루게 될지, 또 양아버지에게 배운 킬러로서의 자질과 소양을 코디에게 물려주게 될지 무척 궁금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떡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덱스터 시리즈는 모두 다섯 편이 출간됐습니다. 첫 편보다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나머지 작품들을 꼭 읽고 싶다는 생각에까진 이르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덱스터의 캐릭터는 그 어떤 연쇄살인 스릴러의 주인공보다 매력적이지만 2% 남짓한 아쉬움을 떨쳐내지 못한 스토리가 발목을 잡았다고 할까요? 몇 년쯤 지나 문득 덱스터가 생각나서 후속편인 어둠 속의 덱스터를 중고서점에서 구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여기에서 잠시 쉬는 게 낫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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