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나가사키 타카시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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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스펜스 만화가를 꿈꾸며 유명 만화가의 보조로만 5년을 보낸 야마시로 케이고는 그림 실력은 뛰어나지만 천성이 착한 나머지 악한 캐릭터를 창조해내지 못해 만화가 데뷔에 번번이 실패하고 맙니다. 그런 그가 한 저택을 스케치하러 갔다가 일가족 네 명이 살해당한 현장을 목격합니다. 범인과 마주쳤음에도 충격 때문에 그 얼굴을 기억해내지 못한 야마시로는 용의자로 몰리기도 하지만 알리바이 덕분에 겨우 풀려납니다. 얼마 후 단골 펍에서 만난 분홍머리 남자가 살해현장에서 마주쳤던 범인과 똑같은 목소리를 내자 야마시로는 그대로 얼어붙습니다. 하지만 그가 떠난 뒤 그의 얼굴을 스케치해본 야마시로는 드디어 찾아낸 악의 캐릭터에 환호합니다. 그리고 그 캐릭터를 등장시킨 만화로 야마시로는 데뷔와 함께 대박을 터뜨립니다. 문제는 그 만화를 그대로 본 딴 듯한 4인 가족 살인사건이 연이어 벌어진다는 점입니다.

 

읽은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작가의 작품이지만 눈길이 끌린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띠지에 적힌 소설-만화 동시 발행이라는 문구였고, 또 하나는 인터넷서점에서 나가사키 타카시라는 이름으로 30편의 작품이 검색되는데 그중 28편이 만화라는 점입니다. 소설을 모방한 살인사건이라는 소재는 익숙하지만 만화를 모방한 살인사건은 들어본 적이 없어서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주인공 야마시로 케이고의 딜레마는 서스펜스 만화가를 꿈꾸면서도 너무도 선한 성격 탓에 인기를 끌만한 악한 캐릭터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런 그가 참혹한 살인사건 현장을 목격하고 그 범인과 마주친 뒤로 그토록 그려내지 못했던 악한 캐릭터를 창조해낼 수 있었다는 건 역설적이면서도 운명적인 설정입니다. 재미있는 건 악한 캐릭터를 창조한 바로 그 순간 야마시로 자신의 캐릭터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지고 비틀어졌다는 점입니다.

 

‘34’라는 제목의 야마시로의 데뷔작에 등장한 악한 캐릭터는 대거라는 이름의 무차별 살인귀입니다. 그리고 행복해 보이는 4인 가족만을 골라 참혹하게 살해하는 역대급 사이코패스입니다. 독자는 대거에게 열광했고 야마시로는 데뷔작부터 초대박을 터뜨립니다. 문제는 연재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돼 그의 만화를 그대로 모방한 4인 가족 살인사건이 일어난 점입니다.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대거의 실제 모델인 분홍머리 남자가 눈앞에 나타나자 야마시로는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만화를 포기할 것인지 연쇄살인의 공범이 돼서라도 어렵게 이룬 만화가의 꿈을 이어갈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캐릭터라는 제목에 걸맞게 이 작품은 선한 캐릭터의 만화가 지망생이 세상에 유래가 없는 4인 가족 연쇄살인마 캐릭터를 창조함으로써 만화가의 꿈을 이루지만 그로 인해 자기 자신의 캐릭터까지 망가지고 마는 비극을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만화 속 살인마 대거의 실제 모델인 분홍머리 남자, 만화 오타쿠이자 연쇄살인을 수사하는 카나가와 현경 수사1과의 세이다 슌스케, 망가진 야마시로 때문에 절망하는 연인 나츠미 등 등장인물 모두의 캐릭터를 미스터리 못잖게 디테일하게 그려냅니다. 그래선지 소설보다는 만화에 적합한 서사로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현실적이고도 정교한 미스터리를 설계한 뒤 그 안에 악과 마주하는 여러 인물들의 다양한 캐릭터와 감정을 함께 불어넣음으로써 한 번에 마지막 장까지 읽게 만드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막판의 흥미로운 반전과 클라이맥스에서는 다분히 만화적인 설정이 등장하긴 하지만 앞서 탄탄하게 쌓아온 서사 덕분에 아주 약간의 위화감 외에는 무난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 약간의 위화감 때문에 별 0.5개를 뺀 건 무척 아쉽게 느껴지긴 했습니다.

스토리와 캐릭터의 힘 모두 정통 미스터리보다는 만화 계열의 미스터리에서 성장한 작가의 이력이 제대로 발휘된 덕분이란 생각인데, 혹시라도 이 작품이 만화나 애니로 만들어진다면 꼭 찾아보려고 합니다. 소설 속에선 야마시로가 그린 만화 장면이 대사로만 설명되는데, 만화나 애니라면 소설과는 달리 매력적이면서도 충격적인 비주얼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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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앙의 책
오다 마사쿠니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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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2015년에 출간된 책에도 수컷과 암컷이 있습니다는 읽어보진 못했지만 그 제목도 너무 특이하고 책에도 암수가 있어서 아무렇게나 붙여 놓으면 새로운 내용을 가진 책을 잉태해버린다.”라는 기발한 소재를 다루고 있어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읽어볼 생각을 갖고 있던 작품입니다. 그러다가 ()-재앙의 책을 통해 오다 마사쿠니를 처음 만나게 됐는데,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기괴한 설정과 그로테스크한 스토리에 진심으로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하나 같이 비현실 혹은 이세계에서나 가능할 법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그 이야기들의 시작은 지극히 평범한 인물의 일상에서 출발하고 있어서 아주 묘한 사실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왠지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는 식의 리얼리티라고 할까요? 또 대부분의 주인공들이 화() 혹은 재앙에 휘말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 참혹하거나 비극적인 엔딩을 맞이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독자에 따라 그만하면 주인공 입장에선 해피엔딩 아닌가?”라는 느낌을 받는 작품도 일부 있습니다. 인상 깊었던 몇몇 작품만 간단하게 소개하면...

 

식서(食書)

신작을 쓰지 못해 괴로워하던 소설가가 화장실에 숨어 책을 찢어 먹는 여자를 목격하곤 크게 놀랍니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그 여자처럼 책을 찢어 먹은 소설가는 소설 속 세계로 전이되는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됩니다.

 

미미모구리(もぐり)

타인의 귀에 손가락을 대는 순간 그 속으로 몸이 사라지는 것은 물론 귀 주인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능력을 지닌 미미모구리. 주인공은 미미모구리에게 능력을 전수받은 뒤 40여 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드나듭니다.

 

부드러운 곳으로 돌아가다(らかなところへ)

바짝 마른 몸의 아내를 둔 남자는 어느 날 버스에서 만난 풍만한 체구의 여자에게 스스로도 놀랄 만큼 강한 욕망을 느낍니다. 일상이 무너질 정도로 풍만한 여자에게 집착하기 시작한 남자 앞에 버스에서 만난 여자와 비슷한 외모의 여자가 연이어 나타납니다.

 

농장(農場)

20대에 노숙자가 된 이노우에는 한 노인의 제안으로 농장에서 일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수확하는 희귀 작물의 이름은 하나바에. 하지만 그것은 잘라낸 코를 밭에 심은 뒤 6개월 후에 수확한 재생산된 인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외에도 꿈속에서 만나곤 했던 소녀가 자신의 안구에서 피어오른 연기 속에서 나타나는 이야기(‘상색기’), 머리카락 신을 모시는 사교집단에 도우미로 참석했다가 끔찍한 참극에 휘말리는 여자(‘머리카락 재앙’), 신체접촉만으로 감염되는 노출증 때문에 패닉에 빠지는 세계(‘나부와 나부’)등 상상을 뛰어넘는 설정과 파격적인 이야기를 담은 작품들이 수록돼있습니다.

줄거리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인간의 어두운 감정들이 밑바닥에 진하게 깔린 이야기들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은 혐오와 불안입니다. 어찌 보면 공포보다 훨씬 더 독자의 오감을 자극하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선지 그 어떤 호러물보다 더 독한 여운을 남깁니다.

재미있는 건 일곱 편 모두 공통적으로 인체기관을 소재로 사용한 점입니다. , , , , , 머리카락, 나체가 그것인데, 읽는 내내 느낀 신경을 긁어대는 듯한 불쾌감의 근원은 아마 이 인체기관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혐오와 불안이라는 감정이 인체기관과 조합되면서 이야기를 더욱 농밀하게 만들었다고 할까요?

 

읽는 동안 아야세 마루의 치자나무’, 쓰하라 야스미의 일레븐이 떠오르곤 했는데, 두 작품 모두 괴담 이상의 괴담이라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강한 인상을 남긴데다 캐릭터나 설정 역시 단순히 비현실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기괴함과 파격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물론 치자나무의 경우 사랑이라는 주제가 엽기적인 설정과 조합된 독특한 작품이고, ‘일레븐은 모든 장르가 망라된 종합선물세트 같은 작품이라 ()-재앙의 책과는 톤 자체가 다르긴 하지만 평범한 상상력으론 도달할 수 없는 서사를 구사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작품으로 여겨진 것 같습니다.

 

첫 두 수록작(‘식서’, ‘미미모구리’)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별 5개도 부족하다며 감탄했지만 이후 수록작들이 살짝 기대에 못 미쳐서 별 4개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먼저 출간된 오다 마사쿠니의 책에도 수컷과 암컷이 있습니다를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고, 아직 출간 안 된 그의 작품들도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꽤 크게 갈릴 작품으로 보이는데, 불편함이나 불쾌함으로 감수하고라도 특별한 괴담을 맛보고 싶은 독자라면 한번쯤 도전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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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 1역
렌조 미키히코 지음, 양윤옥 옮김 / 모모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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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인 카리스마와 미모를 갖췄지만 갖가지 스캔들을 일으켜 유명해진 톱 모델 미오리 레이코가 독살당한 시체로 발견됩니다. 경찰은 그녀의 파혼남인 전직 의사 사사하라 노부오를 체포하지만 그는 범행을 절대 부인합니다. 그러던 중 한 기업의 대표가 자신이 레이코를 살해했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합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듣고 패닉에 빠진 여섯 명의 남녀가 있습니다. 이들은 레이코를 살해한 게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무엇보다 자살한 기업 대표의 유서에 담긴 살해 상황과 방법이 자신이 레이코를 살해했을 때와 완벽하게 동일하다는 사실 때문에 이들의 공포심은 극대화됩니다. 한편 무죄로 풀려난 사사하라는 후배 의사 하마노에게 여섯 남녀에 대한 조사를 부탁합니다. 분명 그들 중에 진범이 있기 때문입니다.

 

백광회귀천 정사를 읽고 팬이 되어 저녁싸리 정사’, ‘조화의 꿀’, ‘열린 어둠등 한국에 출간된 렌조 미키히코의 작품들을 사들였지만, 아끼며 천천히 읽고 싶은 마음에 본의 아니게 책장에 방치하고 있던 중 2023년에 출간된 ‘71을 먼저 읽게 됐습니다.

원제가 という變奏曲’(나라는 이름의 변주곡)인 이 작품은 1984년 출간된 이후 현재까지 여러 대형 출판사에 의해 다섯 차례나 복간되어 불사조 미스터리라는 별칭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매력적이고 완성도 높은 작품이란 뜻일 텐데 그래선지 이렇게 뒤늦게 한국에 소개된 게 다소 의외이기도 합니다.

 

일곱 번의 살인, 일곱 명의 범인, 하지만 시체는 하나라는 독특한 설정 속에 누가 진범인지를 캐는 과정이 미스터리의 핵심입니다. 한쪽에선 용의자로 체포됐다가 풀려난 전직 의사 사사하라 노부오가 후배 의사 하마노의 도움을 받아 레이코를 죽이고 싶어 한 일곱 명가운데 진범을 찾아내려는 분투를 다루고 있고, 다른 한쪽에선 자신이 레이코를 죽인 게 분명하다고 여기는 남녀들이 의문과 공포에 휩싸인 채 지난 5년 동안 레이코와 맺었던 관계를 돌이켜 보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하지만 미스터리 자체보다 더 눈길을 끄는 건 사악하고 이기적인 인간의 탐욕, 몸과 마음과 목소리까지 모조리 빼앗긴 자의 절망, 자신의 파멸을 무릅쓰면서까지 사랑을 완성하려는 자의 광기, 그리고 자신 외에 범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여섯 남녀의 바닥 모를 공포 등 살해당한 레이코와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지독하고도 섬세한 심리 서사입니다. 360여 페이지에 불과한 분량이지만 다 읽고 나면 마치 600페이지 급 피로감이 느껴지는 건 농밀하다 못해 숨이 막힐 정도로 빈틈없이 채워진 이 심리 서사 때문입니다.

모두가 죽이고 싶었던 여자이면서 동시에 모두를 죽이고 싶었던 여자인 레이코의 경우 참혹하고 안타까운 유년기와 5년 전의 끔찍한 사고, 그리고 그 직후 톱 모델에 이르기까지의, 화려했지만 동시에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연옥 같은 시간들이 상세하게 그려집니다. 그 과정에서 진짜라곤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그녀가 일곱 명의 범인에게 일곱 번 살해당할 수밖에 없었던 미스터리가 한꺼풀씩 천천히 독자에게 공개됩니다.

 

사진작가, 베테랑 여성 디자이너, 신인 남성 디자이너, 기업 대표이자 광고주, 톱의 자리를 다투던 동료 모델, 음반 디렉터, 젊은 의사 등 지난 5년 간 레이코의 삶을 뒤흔들었던 자들은 자신 외에 레이코를 죽인 또 다른 범인이 있다는 사실에 충격과 공포에 빠진 채 어떻게든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려 노력합니다. 실은 그들은 아무 죄책감 없이 레이코의 몸을 조각내고 살을 샅샅이 먹어치운 자들이자 그녀의 모든 것을 모조리 빼앗아 돈으로 바꾸어버린 자들입니다. 그리고 모두들 레이코를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궁지에 몰려있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레이코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평온을 되찾기는커녕 살아서는 벗어날 수 없는 진정한 지옥을 맛보게 되는 동정할 수 없는 악인의 처지로 추락합니다.

 

출판사 소개글대로 우수가 짙게 깔린 분위기”, “휘몰아치는 마지막 대반전”, “철저히 계산된 서술등 다양한 코드와 서사가 잘 섞여 있어서 일반적인 미스터리와는 전혀 다른 여운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거듭되는 반전 끝에 드러나는 레이코의 죽음의 진상은 정교한 미스터리에 대한 감탄과 함께 애잔함과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킵니다. ‘백광회귀천 정사에서 맛봤던, 섬세하면서도 그래서 더 긴장감과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문장들 역시 여전해서 그의 팬이라면 충분히 열광하고도 남을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2013년에 타계했지만 렌조 미키히코는 장편과 단편집을 포함하여 70여 편을 남겼습니다. 그 가운데 한국에 소개된 건 10편도 채 안 되는데, 그래도 최근 들어 그의 작품이 종종 출간되는 건 무척 반가운 일입니다. 가능하다면 좀더 많은 작품을 만나보고 싶은 욕심인데, 그 전에 아껴뒀던 책장 속 작품들부터 한 편씩 꺼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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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보내는 도전장
아쓰카와 다쓰미.샤센도 유키 지음, 김은모 외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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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스터리를 부러워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지만 아무래도 가장 큰 건 화수분마냥 개성 강한 작가들을 끊임없이 탄생시키는 탄탄한 문화적 기반입니다. 그 기반 가운데 하나는 다양한 하위 장르를 발전시키고 새로운 기획을 발굴하는 노력일 텐데 그런 점에서 당신에게 보내는 도전장은 일본 미스터리의 또 다른 매력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쓰카와 다쓰미와 샤센도 유키는 각각 94년생, 93년생으로 현재 일본에서 각광받는 신인작가라고 합니다. 아직 작품을 읽은 적이 없어서 두 사람의 장점이나 매력을 잘 알지 못하지만 경작(출판사의 표현인데 아마 겨루기혹은 경쟁의 의미를 담은 競作이 아닐까 싶습니다)이라 부를 만한 독특한 기획에 초대받은 걸 보면 주목받는 신예임엔 분명한 것 같습니다.

두 작가가 쓴 두 편의 중편이 실려 있는데 동일한 주제로 이야기를 자아내는 앤솔로지와 달리 두 중편은 제목 그대로 서로에게 보낸 도전장에 답한 소설입니다. 즉 미스터리의 일부만 담긴 도전장을 받은 작가는 그 일부를 모티브 삼아 온전한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언뜻 재미있어 보이는 기획이지만 비슷한 경력의 동 시대 작가 두 사람이 도전장에 걸맞은 완성도 높은 작품을 집필한다는 건 실은 무척 부담스러운 미션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선지 독자 입장에서도 일반적인 책읽기와 달리 꽤나 긴장된 상태로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습니다.

 

수조성의 살인은 샤센도 유키가 보낸 도전장에 아쓰카와 다쓰미가 답한 본격 미스터리입니다. 특이하게 생긴 게스트하우스 수조성에서 벌어진 불가해한 밀실살인을 다룹니다. 이웃에 사는 두 부부는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수조성을 찾았지만 원인 모를 화재 이후 칼에 찔린 시신이 발견된 사건 때문에 충격에 빠집니다. 시신이 발견된 곳은 방화셔터와 초대형 수조 사이의 밀실로 어떻게 해도 피해자를 죽인 범인이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입니다. 만담 커플을 떠올리게 하는 두 명의 형사가 추리에 추리를 거듭한 끝에 누구도 예상하기 힘든 진실을 찾아냅니다.

 

흔한 잠은 아쓰카와 다쓰미가 보낸 도전장에 샤센도 유키가 답한 작품입니다. 뛰어난 미술 재능과 외모는 물론 모두에게 사랑받는 존재인 여동생 지유리로 인해 가즈히사의 학창시절은 꽤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성인이 되어 독립한 가즈히사는 의식적으로 지유리를 멀리 해왔는데, 어느 날 미대 입시를 치르기 위해 도쿄에 온 지유리가 며칠 묵겠다며 집으로 쳐들어오자 당황합니다. 그리고 하필 그날 밤 가즈히사가 근무하는 호텔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특이한 건 범인이 자신이 살해한 희생자 옆 침대에서 하룻밤을 자고 갔다는 사실입니다. 가즈히사는 살해된 자의 정체를 알고 큰 충격에 빠짐과 동시에 직접 미스터리를 풀기로 결심합니다.

 

수조성의 살인이 밀실 트릭에 충실한 본격 미스터리라면 흔한 잠은 애틋하고 안쓰러운 여운을 남기는 감성적인 미스터리입니다. 말하자면 상대가 보낸 도전장에 대해 자기만의 스타일로 요리한 미스터리로 답했다는 점에서 독자는 맛과 모양이 전혀 다른 두 가지 음식을 한 번에 맛보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용만 놓고 보면 수조성의 살인의 경우 트릭이 다소 작위적으로 보인 점이 아쉬웠고, ‘흔한 잠은 미묘한 관계로 엮인 두 남매의 이야기가 눈길을 끈 반면 미스터리 자체는 단선적으로 설정된 게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내용보다 더 아쉬웠던 건 두 작가의 장점과 매력을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이 작품의 진가를 좀더 진하게 음미할 수 있었을 텐데 전작들을 읽어보지 못해 좋은 기회를 놓친 점입니다.

 

아직 많은 편수는 아니지만 한국에 출간된 두 작가의 작품을 찾아 읽어보려고 합니다. 그런 뒤에 당신에게 보내는 도전장을 다시 읽으면 상대의 도전장에 부응하여 내놓은 두 작가의 작품의 미덕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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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캡슐 - 15년 만에 도착한 편지
오리하라 이치 지음, 김윤수 옮김 / 문학수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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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관’(2015) 이후 무려 8년 만에 한국에 출간된 오리하라 이치의 신간입니다.(일본에서는 2018년에 출간됐습니다.) ‘15년 만에 도착한 편지라는 부제처럼 15년 만에 배달된 편지 한 통이 몰고 온 일곱 개의 사건을 묶은 연작소설입니다. 오리하라 이치의 주 무기인 서술트릭의 진수를 맛볼 수도 있고, 뒤통수를 치는 반전의 향연과 절묘하게 회수되는 복선의 쾌감 등 그야말로 미스터리의 다채로운 맛을 한꺼번에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15년 전의 과거가 집 안에 흙발로 들이닥친다면 어떻게 될까. (...) 행복한 과거면 괜찮지만 (...) 불행한 과거가 쏟아져 들어오면 당연히 불행해진다. (...) 행복하게 생활하던 사람은 불행해지고, 불행하게 생활하던 사람은 한층 더 불행해진다.” (p353)

 

먼 훗날 열어보기로 작정하고 자발적으로 쓴 타임캡슐 속 편지와 달리 포스트 캡슐 속 편지들은 발신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배송이 15년이나 지연된 것들입니다. 그 편지들은 하나같이 받은 사람이 황당해 할 수밖에 없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청혼을 담은 고백편지, 어머니에게 보낸 아들의 유서, 전 직장상사에게 보낸 감사편지, 돈을 요구하는 협박편지, 소설 신인상 수상을 알리는 통보, 가출한 손녀를 그리워하는 할머니의 편지 등이 그것입니다.

 

일부는 편지의 소인이 15년 전임을 알아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불과 며칠 전에 발신된 편지로 오해합니다. 어느 쪽이 됐든 받은 사람들의 첫 반응은 당황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점차 다양한 감정을 품게 됩니다. 그중 반가워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부분은 의문을 품거나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고백, 유서, 협박, 수상통보 등 받을 시기를 놓치면 곤란해질 수밖에 없는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혹은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답장을 쓰지만 그 답장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자초하거나 평온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삶이 무너지는 상황에 놓이고 맙니다. 편지의 당사자들은 편지를 주고받는데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만나기까지 하는데, 바로 그 지점부터 예기치 못한 사고나 범죄가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사건 당사자 외에 편집자라는 미지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15년 전 포스트 캡슐을 기획한 자로 보이기도 하지만 뭔가 의도를 갖고 사건 당사자들을 지켜보는 듯한 묘한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그는 당사자들을 미행하거나 지켜보며 기록을 남기는 것은 물론 사건이 종료되면 후기라는 것을 남기기도 하는데, 그 모든 기록들의 집합체가 바로 이 포스트 캡슐이라는 소설입니다. 독자는 미스터리뿐 아니라 이 편집자의 정체와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에 이르러 전혀 연관 없어 보이던 일곱 개의 사건들이 하나의 줄기로 묶이는 순간 편집자의 정체와 의도가 드러나는데, 바로 이 대목에서 오리하라 이치 특유의 서술트릭의 진가를 맛볼 수 있습니다. 눈앞에 빤히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종잡을 수 없던 단서들이 자동으로 맞춰지는 퍼즐처럼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아들어가는 쾌감도 짜릿하기 그지없습니다. 아주 가끔 애매모호거나 찜찜함이 남는 순간들이 있는 게 사실인데, 대부분은 찬찬히 복기해보면 정교한 설계의 일부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독자에 따라 막판 총정리가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별 4.5개는 충분하고도 남는다는 생각입니다.

 

평범한 한 통의 편지가 15년의 배송 지연으로 인해 위험천만한 흉기로 혹은 인간의 악의를 부추기는 불온한 촉매로 둔갑할 수도 있다는 기발한 발상에서 시작된 이 작품은 지금까지 읽은 오리하라 이치의 작품 가운데 손에 꼽을 만하다는 게 저의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입니다. 물론 도착 시리즈시리즈를 모두 읽은 것도 아니고 한국에 출간된 그의 작품 중 절반 가까이밖에 못 읽어서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아직 오리하라 이치를 만나본 적 없는 독자라면 이 작품으로 그에게 입문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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