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앙의 책
오다 마사쿠니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에서 2015년에 출간된 책에도 수컷과 암컷이 있습니다는 읽어보진 못했지만 그 제목도 너무 특이하고 책에도 암수가 있어서 아무렇게나 붙여 놓으면 새로운 내용을 가진 책을 잉태해버린다.”라는 기발한 소재를 다루고 있어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읽어볼 생각을 갖고 있던 작품입니다. 그러다가 ()-재앙의 책을 통해 오다 마사쿠니를 처음 만나게 됐는데,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기괴한 설정과 그로테스크한 스토리에 진심으로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하나 같이 비현실 혹은 이세계에서나 가능할 법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그 이야기들의 시작은 지극히 평범한 인물의 일상에서 출발하고 있어서 아주 묘한 사실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왠지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는 식의 리얼리티라고 할까요? 또 대부분의 주인공들이 화() 혹은 재앙에 휘말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 참혹하거나 비극적인 엔딩을 맞이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독자에 따라 그만하면 주인공 입장에선 해피엔딩 아닌가?”라는 느낌을 받는 작품도 일부 있습니다. 인상 깊었던 몇몇 작품만 간단하게 소개하면...

 

식서(食書)

신작을 쓰지 못해 괴로워하던 소설가가 화장실에 숨어 책을 찢어 먹는 여자를 목격하곤 크게 놀랍니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그 여자처럼 책을 찢어 먹은 소설가는 소설 속 세계로 전이되는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됩니다.

 

미미모구리(もぐり)

타인의 귀에 손가락을 대는 순간 그 속으로 몸이 사라지는 것은 물론 귀 주인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능력을 지닌 미미모구리. 주인공은 미미모구리에게 능력을 전수받은 뒤 40여 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드나듭니다.

 

부드러운 곳으로 돌아가다(らかなところへ)

바짝 마른 몸의 아내를 둔 남자는 어느 날 버스에서 만난 풍만한 체구의 여자에게 스스로도 놀랄 만큼 강한 욕망을 느낍니다. 일상이 무너질 정도로 풍만한 여자에게 집착하기 시작한 남자 앞에 버스에서 만난 여자와 비슷한 외모의 여자가 연이어 나타납니다.

 

농장(農場)

20대에 노숙자가 된 이노우에는 한 노인의 제안으로 농장에서 일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수확하는 희귀 작물의 이름은 하나바에. 하지만 그것은 잘라낸 코를 밭에 심은 뒤 6개월 후에 수확한 재생산된 인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외에도 꿈속에서 만나곤 했던 소녀가 자신의 안구에서 피어오른 연기 속에서 나타나는 이야기(‘상색기’), 머리카락 신을 모시는 사교집단에 도우미로 참석했다가 끔찍한 참극에 휘말리는 여자(‘머리카락 재앙’), 신체접촉만으로 감염되는 노출증 때문에 패닉에 빠지는 세계(‘나부와 나부’)등 상상을 뛰어넘는 설정과 파격적인 이야기를 담은 작품들이 수록돼있습니다.

줄거리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인간의 어두운 감정들이 밑바닥에 진하게 깔린 이야기들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은 혐오와 불안입니다. 어찌 보면 공포보다 훨씬 더 독자의 오감을 자극하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선지 그 어떤 호러물보다 더 독한 여운을 남깁니다.

재미있는 건 일곱 편 모두 공통적으로 인체기관을 소재로 사용한 점입니다. , , , , , 머리카락, 나체가 그것인데, 읽는 내내 느낀 신경을 긁어대는 듯한 불쾌감의 근원은 아마 이 인체기관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혐오와 불안이라는 감정이 인체기관과 조합되면서 이야기를 더욱 농밀하게 만들었다고 할까요?

 

읽는 동안 아야세 마루의 치자나무’, 쓰하라 야스미의 일레븐이 떠오르곤 했는데, 두 작품 모두 괴담 이상의 괴담이라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강한 인상을 남긴데다 캐릭터나 설정 역시 단순히 비현실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기괴함과 파격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물론 치자나무의 경우 사랑이라는 주제가 엽기적인 설정과 조합된 독특한 작품이고, ‘일레븐은 모든 장르가 망라된 종합선물세트 같은 작품이라 ()-재앙의 책과는 톤 자체가 다르긴 하지만 평범한 상상력으론 도달할 수 없는 서사를 구사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작품으로 여겨진 것 같습니다.

 

첫 두 수록작(‘식서’, ‘미미모구리’)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별 5개도 부족하다며 감탄했지만 이후 수록작들이 살짝 기대에 못 미쳐서 별 4개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먼저 출간된 오다 마사쿠니의 책에도 수컷과 암컷이 있습니다를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고, 아직 출간 안 된 그의 작품들도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꽤 크게 갈릴 작품으로 보이는데, 불편함이나 불쾌함으로 감수하고라도 특별한 괴담을 맛보고 싶은 독자라면 한번쯤 도전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