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나가사키 타카시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23년 11월
평점 :
품절


서스펜스 만화가를 꿈꾸며 유명 만화가의 보조로만 5년을 보낸 야마시로 케이고는 그림 실력은 뛰어나지만 천성이 착한 나머지 악한 캐릭터를 창조해내지 못해 만화가 데뷔에 번번이 실패하고 맙니다. 그런 그가 한 저택을 스케치하러 갔다가 일가족 네 명이 살해당한 현장을 목격합니다. 범인과 마주쳤음에도 충격 때문에 그 얼굴을 기억해내지 못한 야마시로는 용의자로 몰리기도 하지만 알리바이 덕분에 겨우 풀려납니다. 얼마 후 단골 펍에서 만난 분홍머리 남자가 살해현장에서 마주쳤던 범인과 똑같은 목소리를 내자 야마시로는 그대로 얼어붙습니다. 하지만 그가 떠난 뒤 그의 얼굴을 스케치해본 야마시로는 드디어 찾아낸 악의 캐릭터에 환호합니다. 그리고 그 캐릭터를 등장시킨 만화로 야마시로는 데뷔와 함께 대박을 터뜨립니다. 문제는 그 만화를 그대로 본 딴 듯한 4인 가족 살인사건이 연이어 벌어진다는 점입니다.

 

읽은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작가의 작품이지만 눈길이 끌린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띠지에 적힌 소설-만화 동시 발행이라는 문구였고, 또 하나는 인터넷서점에서 나가사키 타카시라는 이름으로 30편의 작품이 검색되는데 그중 28편이 만화라는 점입니다. 소설을 모방한 살인사건이라는 소재는 익숙하지만 만화를 모방한 살인사건은 들어본 적이 없어서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주인공 야마시로 케이고의 딜레마는 서스펜스 만화가를 꿈꾸면서도 너무도 선한 성격 탓에 인기를 끌만한 악한 캐릭터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런 그가 참혹한 살인사건 현장을 목격하고 그 범인과 마주친 뒤로 그토록 그려내지 못했던 악한 캐릭터를 창조해낼 수 있었다는 건 역설적이면서도 운명적인 설정입니다. 재미있는 건 악한 캐릭터를 창조한 바로 그 순간 야마시로 자신의 캐릭터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지고 비틀어졌다는 점입니다.

 

‘34’라는 제목의 야마시로의 데뷔작에 등장한 악한 캐릭터는 대거라는 이름의 무차별 살인귀입니다. 그리고 행복해 보이는 4인 가족만을 골라 참혹하게 살해하는 역대급 사이코패스입니다. 독자는 대거에게 열광했고 야마시로는 데뷔작부터 초대박을 터뜨립니다. 문제는 연재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돼 그의 만화를 그대로 모방한 4인 가족 살인사건이 일어난 점입니다.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대거의 실제 모델인 분홍머리 남자가 눈앞에 나타나자 야마시로는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만화를 포기할 것인지 연쇄살인의 공범이 돼서라도 어렵게 이룬 만화가의 꿈을 이어갈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캐릭터라는 제목에 걸맞게 이 작품은 선한 캐릭터의 만화가 지망생이 세상에 유래가 없는 4인 가족 연쇄살인마 캐릭터를 창조함으로써 만화가의 꿈을 이루지만 그로 인해 자기 자신의 캐릭터까지 망가지고 마는 비극을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만화 속 살인마 대거의 실제 모델인 분홍머리 남자, 만화 오타쿠이자 연쇄살인을 수사하는 카나가와 현경 수사1과의 세이다 슌스케, 망가진 야마시로 때문에 절망하는 연인 나츠미 등 등장인물 모두의 캐릭터를 미스터리 못잖게 디테일하게 그려냅니다. 그래선지 소설보다는 만화에 적합한 서사로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현실적이고도 정교한 미스터리를 설계한 뒤 그 안에 악과 마주하는 여러 인물들의 다양한 캐릭터와 감정을 함께 불어넣음으로써 한 번에 마지막 장까지 읽게 만드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막판의 흥미로운 반전과 클라이맥스에서는 다분히 만화적인 설정이 등장하긴 하지만 앞서 탄탄하게 쌓아온 서사 덕분에 아주 약간의 위화감 외에는 무난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 약간의 위화감 때문에 별 0.5개를 뺀 건 무척 아쉽게 느껴지긴 했습니다.

스토리와 캐릭터의 힘 모두 정통 미스터리보다는 만화 계열의 미스터리에서 성장한 작가의 이력이 제대로 발휘된 덕분이란 생각인데, 혹시라도 이 작품이 만화나 애니로 만들어진다면 꼭 찾아보려고 합니다. 소설 속에선 야마시로가 그린 만화 장면이 대사로만 설명되는데, 만화나 애니라면 소설과는 달리 매력적이면서도 충격적인 비주얼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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