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파즈 - 무라카미 류 걸작선
무라카미 류 지음, 김지룡 옮김 / 동방미디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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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부터 현재까지 한국에 소개된 무라카미 류의 작품은 50여 편이나 되지만 그 가운데 읽은 건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한 편뿐입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에 읽어서 줄거리는 가물가물하지만 19금 판정이 당연해 보일 정도로 수위가 센 이야기였다는 것만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200여 페이지의 분량에 12편의 단편이 수록된 토파즈역시 19금 판정을 받은 작품으로, 지금까지 읽은 성()을 소재로 한 작품 가운데 묘사 수위에 관한 한 거의 원톱으로 꼽을 만큼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두어 작품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주인공은 가학적인 성매매를 전문으로 하는 SM클럽 소속의 여성들입니다. 주인공의 감정과 욕망을 기승전결을 갖춘 이야기 속에 담아낸 작품도 있지만 마치 성매매 일지처럼 거칠고 엽기적인 성관계 장면을 디테일하게 서술한 작품도 있습니다. 돈으로 성을 사는 남성들은 하나같이 폭력적이고 야비한 변태로 그려지지만 그들에게 성을 파는 여성들은 고통과 수치심을 느끼면서도 자신을 호출할 다음 손님의 전화를 기다리는, 말 그대로 일상적인 업무로 성매매에 나섭니다.

 

독자에 따라 이 작품을 알맹이 없는 SM 포르노그래피로 여길 수도 있고, 사회 고발물이나 여성소설로 분류할 수도 있고 픽션의 탈을 쓴 다큐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속을 불편하게 만들 정도로 비정상적인 성관계 묘사만 놓고 보면 음지에서나 유통될 법한 SM 포르노그래피로 읽히는 게 당연합니다. 사회 고발물이나 여성소설로 분류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주인공들이 성매매에 빠져들게 된 안타까운 경위라든가 어떻게든 참혹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이라든가 좀더 구조적인 관점에서 성매매를 비판하는 이야기 같은 건 거의 없어서 이 작품을 사회파 소설로 규정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개인적으론 픽션의 탈을 쓴 다큐’, 즉 뭔가 독자에게 설파하려는 주제가 있다기보다는 이런 요상한 세상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과 아주 무관한 세상은 아닙니다.”라며 상식이나 도덕이라 불리는 것들과 거리가 먼, 겉으로는 더럽고 추하다고 부정하면서도 속으론 호기심을 갖게 되는, 그런 세상의 단면을 뚝 잘라 내보인 이야기로 읽혔습니다.

 

표제작인 '토파즈'를 비롯해서 간혹 주인공의 감정에 빠져들게 만들어 미묘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들도 꽤 있습니다. 그런 작품을 읽고 나면 왠지 주인공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궁금해지기도 하고, 손을 내밀어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들은 타인의 관심과 위로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진 않아서, 또 누군가의 동정심이나 이해 같은 것도 바라지 않는 것 같아서 그저 지켜보며 각자의 감정에 빠지는 것이 독자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저 파격적인 19금 소설정도가 아니라 비위가 약한 독자라면 구토를 일으킬 수도 있는 작품이라 함부로 추천할 수는 없지만 세상의 또 다른 단면을 엿보고 싶은 독자라면 수록작 한두 편쯤 맛보기로 읽어봐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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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학 살인사건
치넨 미키토 지음, 권하영 옮김 / 북플라자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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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을 앞둔 외과의사 미즈키 치하야는 오랫동안 서먹한 채 벽을 쌓고 살아온 아버지 미노루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힙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망 직후 자신의 시신을 해부해달라는 미노루의 유언에 크게 놀란 치하야는 동기인 병리의(病理醫) 토야 시오리와 함께 해부를 진행한 결과 미노루의 위장 벽에 새겨져 있는 기이한 암호문을 발견하곤 충격에 빠집니다. 혼란스러운 치하야에게 닥친 결정타는 평생 경비원으로 일했다던 미노루가 실은 경시청 수사1과 형사였으며, 아직까지 미제로 남은 28년 전의 연쇄 여아 살해사건, 일명 종이학 살인사건을 담당했었다는 사실입니다. 한편 미노루가 사망한 바로 그날, 종이학 살인사건의 범인이 28년 만에 새로운 범행을 시작했음을 알리는 여성 변사체가 발견됩니다.

 

현직 의사이자 미스터리 작가로서의 치넨 미키토의 매력을 또 한 번 제대로 만끽할 수 있었던 작품입니다. 최근에 읽은 유리탑의 살인이 본격 미스터리에 치중한 작품이었고, ‘구원자의 손길이 감동적인 메디컬 소설이었다면, ‘종이학 살인사건은 두 장르가 절묘하게 조합된 메디컬 미스터리의 정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傷痕のメッセージ’(상흔의 메시지)입니다. 치하야의 아버지이자 전직 경시청 수사1과 형사였던 미노루의 위장 벽에 새겨진 암호 메시지가 이 작품의 원제이자 미스터리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미노루로 하여금 경찰을 그만두게 만들었던 28년 전 연쇄 여아 살해사건과 관련 있는 것으로 밝혀집니다.

왜 아버지는 편지가 아닌 기이한 방식으로 메시지를 남겼는가? 만일 종이학 살인사건의 중요한 단서라면 왜 지금까지 경찰에 넘기지 않은 건가? 무엇보다 왜 아버지는 자신에게 전직 경찰임을 알리지 않은 걸까? 자신을 혼란에 빠뜨린 이 무수한 의문들의 해답을 찾기 위해 치하야는 동기 의사인 시오리와 함께 암호 메시지 해독에 나섭니다. 그리고 거기에 28년 전 미노루의 파트너이자 신참 멘티였으며 현재 경시청 수사1과 소속인 사쿠라이가 가세합니다. 그는 종이학 살인사건 범인이 28년 만에 저지른 것으로 보이는 여성 교살사건 때문에 수사본부에 합류했고, 미노루의 죽음과 교살사건이 같은 날 벌어진 게 절대 우연이라 믿지 않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치하야는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사쿠라이의 태도와 의도에 적잖은 의심을 품습니다.

 

미노루의 딸인 치하야가 그의 생전 인간관계를 조사하고, 미노루를 해부한 병리의 시오리는 그의 위장에 새겨진 메시지는 물론 시신에 담긴 또 다른 단서를 찾기 위해 밤낮으로 현미경에 매달립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수사는 경시청의 사쿠라이가 담당합니다. 말하자면 치하야가 휴먼, 시오리가 메디컬, 사쿠라이가 미스터리를 담당한 셈인데, 사건 못잖게 이 세 인물의 케미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치하야는 아버지에 대해 알아갈수록 자신이 몰랐던 아버지의 면모에 여러 번 놀라고 눈물을 흘립니다. 시오리는 미노루의 장기를 정밀하게 관찰하면서 그의 시신이 전달하려는 또 다른 메시지를 찾는데 전념합니다. 병리의의 의무는 단순히 해부나 관찰에 그치지 않고 시신이 남긴 메시지를 유족에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믿는 시오리의 신념은 메디컬 픽션에서만 맛볼 수 있는 남다른 감동을 전합니다. 그리고 과거 사수였던 미노루가 그랬듯 사쿠라이는 상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수사를 감행하는 철두철미한 반골입니다. 유족인 치하야와 민간인 의사인 시오리와 비밀리에 협업하는 건 바로 그런 그의 수사 스타일 때문인데, 문제는 그 협업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다는 점입니다.

 

연쇄 여아 살해사건 이후 28년 만에 다시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한 진범을 찾는 미스터리도 흥미롭고, 아버지의 진짜 모습을 알아가는 치하야의 고통스러운 여정도 긴장과 감동을 번갈아 선사합니다. 막판에 밝혀진 범인의 정체는 놀라움 그 자체이고, 사쿠라이와 시오리가 알아낸 진실 때문에 자칫 평생을 지옥도에서 살아갈 수도 있는 치하야의 위태로운 처지는 막판까지 반전을 거듭하며 어떤 마무리가 기다리고 있을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요약하자면 정말 잘 짜인 메디컬 미스터리의 쾌감과 여운을 한껏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까요?

 

라노벨 계열과 달달해 보이는 미스터리는 읽지 않았지만 치넨 미키토의 정극 미스터리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찾아 읽는 편입니다. 검색해보면 엄청난 양의 작품을 집필한 걸로 나오는데 아직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이 한 편이라도 더, 하루라도 빨리 소개되기를 간절히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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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는 양들의 축연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엘릭시르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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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의 작품을 일곱 편쯤 읽고 나면 이 작가는 이런 스타일이고, 이런 장르가 전공이라고 단정할 만하겠지만, 요네자와 호노부는 여덟 번째로 읽은 덧없는 양들의 축연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도 딱히 어떤 카테고리에 넣어야 할 작가인지 단정하기 어려웠습니다. 학원 청춘 미스터리인 고전부 시리즈부터 기자의 소명과 보도윤리를 다룬 베루프 시리즈’,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 미스터리 흑뢰성에 이르기까지 그의 스펙트럼 자체가 워낙 넓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근대를 배경으로 서늘한 공포와 맛깔난 기담에 마지막 한 줄의 반전 미스터리까지 맛볼 수 있는 덧없는 양들의 축연은 요네자와 호노부의 또 다른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굳이 비슷한 톤의 작품을 고르라면 현대물인 야경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건 시대적 배경입니다. 시중을 드는 고용인이 등장하고, 지역유지가 권세를 누리는 장면 등으로 미뤄보아 대략 20세기 중반 정도로 추정됐는데, 결정적인 단서는 한 주인공이 인용한 요코미조 세이시의 밤 산책’(1949)입니다. 근대와 현대의 경계선이라는 시대적 배경은 각 수록작마다 배어있는 기담 혹은 괴담의 분위기와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집니다.

고풍스런 옛이야기의 정취가 초반을 장식하지만 이내 느닷없이 기묘한 사건이 터지면서 이야기는 기담과 괴담의 영역으로 넘어갑니다. 거기에 흥미로운 미스터리 서사가 끼어드는 경우도 있고 순수한 공포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만으로 전개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깔끔한 해법과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 수록작도 있지만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은유와 상징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작품도 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 가운데 이 작품을 감미롭고도 잔혹한 블랙 미스터리라고 부른 건 아마도 이런 이유들 때문으로 보입니다.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돼있는데, 모든 수록작의 공통점은 바벨의 모임이라는 여대생들의 독서모임입니다. 모임의 멤버들은 하나 같이 유수의 명문가의 영애들이며 집에서라면 절대 읽을 수 없는 미스터리를 탐독하고 그 감상을 서로 나누곤 합니다. 다만, 겉으론 화려해 보이지만 실은 어둡고 음습한 느낌을 주는 이 모임이 직접 묘사되거나 멤버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멤버 한 명 한 명이 각 수록작의 주인공을 맡고 있고, 때론 제3자로서 모임에 참석했던 인물이 주인공을 맡을 때도 있습니다.

 

“’바벨의 모임이란 환상과 현실을 혼동하는 덧없는 자들의 성역입니다. 너무나 단순한, 혹은 너무나 복잡한 현실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이 우리 모임에 모여들지요.” (p308)

 

명문가의 영애들이지만 기구하거나 불안하거나 불행한 사연을 지닌 탓에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미스터리를 읽으며 현실에서의 도피 혹은 대리만족을 추구하는 그녀들의 심리는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돼서 간혹 내가 지금 판타지를 읽는 건지, 현실 기반의 이야기를 읽는 건지?” 혼란스럽게 만들곤 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한 줄이 선사하는 반전에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리고 나면 그제야 앞서 읽은 내용들을 천천히 복기하고 음미하며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명문가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살인사건과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에게 충심 이상의 마음을 품은 몸종의 비밀을 그린 집안에 변고가 있어서’, 동생에게 가문을 내주고 유폐당한 장남과 그를 감시하고 시중드는 역할을 맡게 된 이복여동생의 이야기 북관의 죄인’, 외진 곳의 고급 별장을 홀로 관리하던 여성이 뜻밖의 손님을 맞이한 뒤 벌어지는 서늘한 이야기 산장비문’,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할머니에게 함부로 대해지던 아가씨가 동갑의 몸종과 만난 뒤 벌어지는 비극 다마노 이스즈의 명예’, 그리고 바벨의 모임이 몰락하게 된 사연을 그린 그로테스크한 이야기 덧없는 양들의 만찬등 이야기마다 독특한 색채와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여러 장르가 혼합된 선물세트를 읽는 기분으로 페이지를 넘길 수 있습니다.

 

중고로라도 구해서 읽어봐야지, 하면서도 마냥 미뤄뒀던 작품인데 14년 만에 개정판이 출간된 덕분에 오래된 밀린 숙제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또 다른 매력을 맛볼 수 있어서 좋았고, 잠시나마 근대와 현대의 경계,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만끽할 수 있어서 더 좋았습니다. ‘인사이트 밀’, ‘추상오단장등 아직 못 읽은 요네자와 호노부의 작품이 많은데 기회가 닿는대로 그의 팔색조 같은 이야기를 찾아 읽을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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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클로버
마사키 도시카 지음, 이다인 옮김 / 허밍북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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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소를 이용하여 여러 사상자를 낸 도요스 사건이 발생하자 경찰과 언론은 12년 전 훗카이도의 하이토 마을에서 벌어졌던 일가족 살인사건과의 연관성에 주목합니다. 두 사건 모두 똑같은 성분의 비소가 범행도구로 사용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체포된 도요스 사건 범인에겐 12년 전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고, 이후 경찰은 그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아 용의선상에 올랐던 장녀 아카이 미쓰바가 현재의 사건에 연관된 게 아닌지 의심합니다. 한편 신문사에서 정년퇴직 후 계열 잡지사 기자로 일하고 있는 가쓰키 쓰요시는 12년 전 하이토 마을에서 취재했던 일을 회상하며 가족들이 살해된 테이블에서 태연히 컵라면을 먹던 미쓰바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도요스 사건과 미쓰바 사이에 접점이 있음을 확신하곤 하이토 마을로 향합니다.

 

마사키 도시카는 그날, 너는 무엇을 했는가그녀가 마지막에 본 것은등 두 작품을 통해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가입니다. 후속작을 기다리게 될 정도로 팬이 됐고 그래서 레드 클로버의 출간소식은 더없이 반가웠습니다. 앞선 두 작품은 각각 자식 때문에 인생의 방향이 크게 뒤틀어진 여러 어머니’, ‘불의의 사고 혹은 사건 때문에 비극을 맞이하게 된 여러 부부를 등장시켜 정교하고 농밀한 미스터리와 서사를 선보인 수작들인데, ‘레드 클로버는 마사키 도시카의 진가가 제대로 배어있어서 그녀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입니다.

 

잡지사 기자인 가쓰키가 화자이자 과거와 현재의 사건을 추적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이 작품에는 수많은 화자가 번갈아가며 사건 이면의 지독한 사연들과 일그러진 감정들을 설명합니다. 서로를 혐오하는 작은 마을 내의 두 세력, 누군가를 저주하는 소원을 들어주는 흉흉한 분위기의 낡은 신사, 가족 혹은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자식, 자식이 죽기를 바라는 부모, 자신의 불행을 남의 탓이라 여기며 혐오와 살의를 감추지 않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두 개의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악연과 애증과 분노가 20년도 넘게 층층이 쌓여왔는지를 설명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때론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해지거나 더러운 것에 오염된 듯한 불편함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누가 나를 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버린다. 누가 나를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죽인다. 그것이 나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자 살아남는 길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p320)

 

이 세상은 인간의 추악함으로 만들어져있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증오하고, 저주하고, 미워하는 수많은 사람이 만들어낸 어둡고 더러운 사념이 복잡하게 뒤섞여 이 세상의 공기가 된 것이다.” (p388)

 

가쓰키가 지금은 행방이 묘연해진 미쓰바를 찾기로 결심한 건 단지 두 개의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12년 전 오직 자신만이 목격했던 가족이 죽은 현장에서 태연히 컵라면을 먹는 소녀의 모습이 위화감 이상의 특별한 기억으로 뇌리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죽인 게 맞다면 왜? 12년이 지나 도요스 사건의 범인에게 비소를 건넸다면 왜? 어느 날 갑자기 하이토 마을을 떠난 이유는? 그리고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가쓰키는 기자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미쓰바와 마주하고 싶다는 열망에 여전히 미쓰바 가족을 벌레처럼 기억하고 있는 하이토 마을 사람들을 진심을 다해 취재합니다. 동시에 자신 외에 미쓰바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음을 감지하곤 기자로서의 위기감과 함께 어떻게든 한발 앞서 미쓰바를 찾아내야 한다는 초조감에 휩싸입니다.

 

워낙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그만큼 관계도 복잡하게 설정돼있어서 작품 내용을 언급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저주, 분노, 혐오 등 인물들의 내면을 사로잡고 있던 갖가지 감정들이 폭로되고, 엉킨 실타래 같던 과거사와 사건들이 거듭된 반전을 통해 하나둘씩 밝혀지는 등 미스터리 이상의 묵직한 무게감을 지닌 채 도도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는 분명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숨 막히는 답답함과 오염된 듯한 불편함을 피할 길은 없지만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가장 강력한 페이지터너라는 생각입니다.

 

마사키 도시카의 작품을 읽어본 독자라면 전작을 뛰어넘는 그녀의 진가를 맛볼 수 있을 것이고, 이 작품으로 그녀를 처음 만나는 독자라면 전작들을 찾아 읽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길 것입니다. 마사키 도시카에 대한 사심 가득한 서평이긴 하지만 비슷한 취향의 독자라면 이 작품을 다 읽은 뒤에 제 서평에 충분히 공감해줄 거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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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 달 가리운 방금 전까지 인간이었다 레이디가가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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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의 에도 괴담 시리즈의 광팬이지만 실은 그녀의 현대물에선 아쉬움을 느끼거나 실망한 경우들이 종종 있어서 꽤 특이하고 긴 제목의 신작을 무조건 반길 수 없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이쿠와 소설의 콜라보라는 점 때문에 기대감을 갖게 됐는데, 어딘가 예스러운 이야기들이 펼쳐지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추측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기타모리 고의 꽃 아래 봄에 죽기를은 제목과 이야기 모두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인데, “원하건대 꽃 아래 봄에 죽기를, 그 추운 음력 이월의 보름에”(“はくはにて春死なむそのきさらぎの望月のころ”)라는 하이쿠에서 제목을 따온데다 내용 역시 예스럽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아마도 내심 미미 여사의 신작 역시 이런 인상을 주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각각 30페이지 내외의 12편의 단편이 수록돼있습니다. 각 수록작의 제목은 미미 여사가 활동하는 모임의 멤버들이 지은 하이쿠이며, 미미 여사가 그 하이쿠들을 씨앗 삼아 이야기를 자아낸 것입니다.

기대와 달리 예스러운 이야기들만으로 채워진 건 아니었고, 이제 막 본 내용이 펼쳐지려는 지점에서 이야기가 마무리돼서 제목인 하이쿠의 의미가 잘 다가오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미 여사 특유의 애틋함과 기괴함, 또는 잔잔하지만 오래 가는 여운을 담은 작품도 여러 편 있어서 다 읽은 뒤엔 에도 괴담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정취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 것이 아닌 존재가 등장하는 괴담도 있고, 판타지의 향기가 물씬 배어있는 이야기도 있고, 살아온 인생을 찬찬히 조망하는 듯한 따뜻한 이야기도 있지만 수록작 중 상당수가 고통 받는 여성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이 눈에 띕니다. 외도, 폭력, 착취, 스토킹, 집착, 의심 등 쓰레기 같은 빌런들로 인해 상처받고 괴로워하는 여성들의 사연을 많이 집필한 것에 대해 미미 여사는 일본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수록작에 따라 그 상처가 치유되는 경우도 있지만 담담하게 관조하거나 문제의식을 제기한 상태에서 마무리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면 제목으로 쓰인 하이쿠의 의미가 남달라 보이기도 합니다.

 

일본 소설 속에서 간간이 접했던 하이쿠는 짧은 문장만으로도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절묘한 시구들이어서 눈길을 끌곤 했습니다. 이 짧은 문장의 이면에 과연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라는 궁금증도 자아내곤 했는데, 아마도 미미 여사 역시 이런 점에 착상해서 하이쿠와 소설의 콜라보에 도전한 게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그런 점에서 한 가지 아쉬운 건 다소 평범해 보인, 그러니까 소설 내용이 그리 궁금해지지 않는 제목들이 꽤 있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산산이 지는 것은 여물고자 함이니 복사꽃’, ‘구름에 달 가리운 방금 전까지 인간이었다’, ‘날선 가위여 꽃밭의 맨드라미 목을 자르리등 이 하이쿠를 어떻게 소설화 했을까 호기심을 자극한 하이쿠들도 많았지만, 너무 직설적이거나 평범했던 제목들은 하이쿠 자체로도 좀 아쉽게 읽힌 게 사실입니다.

 

편집자인 삼송 김사장 님과 미미 여사가 제안한 이 작품의 독서 가이드를 정리하면 후반에 실린 작가의 말을 먼저 읽고 각 수록작의 제목인 하이쿠를 충분히 음미한 뒤 본문을 (절대 급히 달리지 말고) 아주 천천히 감상하고 다시금 제목인 하이쿠를 읽어달라.”입니다. 실제로 몇몇 작품은 이런 순서로 읽었을 때 남다른 여운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 읽지 않은 독자라면 이 가이드를 참고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수록작마다 세세하게 평점을 매겨보니 별 5개가 4, 4개가 8편이었고, 전체적인 인상도 비슷했습니다. 미미 여사는 하이쿠와 소설의 콜라보후속작들을 여러 편 염두에 두고 있다고 밝혔는데, 후속작에서는 수록작 모두에게 별 5개를 줄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물론 미미 여사에게 사심으로 가득한 1인이라 이번 작품보다 좀더 세고 독하거나 좀더 따뜻하고 깊은 이야기들이 수록된다면 무조건 별 5개를 줄 게 분명하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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