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파즈 - 무라카미 류 걸작선
무라카미 류 지음, 김지룡 옮김 / 동방미디어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90년대부터 현재까지 한국에 소개된 무라카미 류의 작품은 50여 편이나 되지만 그 가운데 읽은 건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한 편뿐입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에 읽어서 줄거리는 가물가물하지만 19금 판정이 당연해 보일 정도로 수위가 센 이야기였다는 것만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200여 페이지의 분량에 12편의 단편이 수록된 토파즈역시 19금 판정을 받은 작품으로, 지금까지 읽은 성()을 소재로 한 작품 가운데 묘사 수위에 관한 한 거의 원톱으로 꼽을 만큼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두어 작품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주인공은 가학적인 성매매를 전문으로 하는 SM클럽 소속의 여성들입니다. 주인공의 감정과 욕망을 기승전결을 갖춘 이야기 속에 담아낸 작품도 있지만 마치 성매매 일지처럼 거칠고 엽기적인 성관계 장면을 디테일하게 서술한 작품도 있습니다. 돈으로 성을 사는 남성들은 하나같이 폭력적이고 야비한 변태로 그려지지만 그들에게 성을 파는 여성들은 고통과 수치심을 느끼면서도 자신을 호출할 다음 손님의 전화를 기다리는, 말 그대로 일상적인 업무로 성매매에 나섭니다.

 

독자에 따라 이 작품을 알맹이 없는 SM 포르노그래피로 여길 수도 있고, 사회 고발물이나 여성소설로 분류할 수도 있고 픽션의 탈을 쓴 다큐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속을 불편하게 만들 정도로 비정상적인 성관계 묘사만 놓고 보면 음지에서나 유통될 법한 SM 포르노그래피로 읽히는 게 당연합니다. 사회 고발물이나 여성소설로 분류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주인공들이 성매매에 빠져들게 된 안타까운 경위라든가 어떻게든 참혹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이라든가 좀더 구조적인 관점에서 성매매를 비판하는 이야기 같은 건 거의 없어서 이 작품을 사회파 소설로 규정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개인적으론 픽션의 탈을 쓴 다큐’, 즉 뭔가 독자에게 설파하려는 주제가 있다기보다는 이런 요상한 세상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과 아주 무관한 세상은 아닙니다.”라며 상식이나 도덕이라 불리는 것들과 거리가 먼, 겉으로는 더럽고 추하다고 부정하면서도 속으론 호기심을 갖게 되는, 그런 세상의 단면을 뚝 잘라 내보인 이야기로 읽혔습니다.

 

표제작인 '토파즈'를 비롯해서 간혹 주인공의 감정에 빠져들게 만들어 미묘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들도 꽤 있습니다. 그런 작품을 읽고 나면 왠지 주인공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궁금해지기도 하고, 손을 내밀어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들은 타인의 관심과 위로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진 않아서, 또 누군가의 동정심이나 이해 같은 것도 바라지 않는 것 같아서 그저 지켜보며 각자의 감정에 빠지는 것이 독자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저 파격적인 19금 소설정도가 아니라 비위가 약한 독자라면 구토를 일으킬 수도 있는 작품이라 함부로 추천할 수는 없지만 세상의 또 다른 단면을 엿보고 싶은 독자라면 수록작 한두 편쯤 맛보기로 읽어봐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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