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에 달 가리운 방금 전까지 인간이었다 레이디가가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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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의 에도 괴담 시리즈의 광팬이지만 실은 그녀의 현대물에선 아쉬움을 느끼거나 실망한 경우들이 종종 있어서 꽤 특이하고 긴 제목의 신작을 무조건 반길 수 없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이쿠와 소설의 콜라보라는 점 때문에 기대감을 갖게 됐는데, 어딘가 예스러운 이야기들이 펼쳐지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추측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기타모리 고의 꽃 아래 봄에 죽기를은 제목과 이야기 모두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인데, “원하건대 꽃 아래 봄에 죽기를, 그 추운 음력 이월의 보름에”(“はくはにて春死なむそのきさらぎの望月のころ”)라는 하이쿠에서 제목을 따온데다 내용 역시 예스럽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아마도 내심 미미 여사의 신작 역시 이런 인상을 주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각각 30페이지 내외의 12편의 단편이 수록돼있습니다. 각 수록작의 제목은 미미 여사가 활동하는 모임의 멤버들이 지은 하이쿠이며, 미미 여사가 그 하이쿠들을 씨앗 삼아 이야기를 자아낸 것입니다.

기대와 달리 예스러운 이야기들만으로 채워진 건 아니었고, 이제 막 본 내용이 펼쳐지려는 지점에서 이야기가 마무리돼서 제목인 하이쿠의 의미가 잘 다가오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미 여사 특유의 애틋함과 기괴함, 또는 잔잔하지만 오래 가는 여운을 담은 작품도 여러 편 있어서 다 읽은 뒤엔 에도 괴담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정취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 것이 아닌 존재가 등장하는 괴담도 있고, 판타지의 향기가 물씬 배어있는 이야기도 있고, 살아온 인생을 찬찬히 조망하는 듯한 따뜻한 이야기도 있지만 수록작 중 상당수가 고통 받는 여성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이 눈에 띕니다. 외도, 폭력, 착취, 스토킹, 집착, 의심 등 쓰레기 같은 빌런들로 인해 상처받고 괴로워하는 여성들의 사연을 많이 집필한 것에 대해 미미 여사는 일본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수록작에 따라 그 상처가 치유되는 경우도 있지만 담담하게 관조하거나 문제의식을 제기한 상태에서 마무리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면 제목으로 쓰인 하이쿠의 의미가 남달라 보이기도 합니다.

 

일본 소설 속에서 간간이 접했던 하이쿠는 짧은 문장만으로도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절묘한 시구들이어서 눈길을 끌곤 했습니다. 이 짧은 문장의 이면에 과연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라는 궁금증도 자아내곤 했는데, 아마도 미미 여사 역시 이런 점에 착상해서 하이쿠와 소설의 콜라보에 도전한 게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그런 점에서 한 가지 아쉬운 건 다소 평범해 보인, 그러니까 소설 내용이 그리 궁금해지지 않는 제목들이 꽤 있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산산이 지는 것은 여물고자 함이니 복사꽃’, ‘구름에 달 가리운 방금 전까지 인간이었다’, ‘날선 가위여 꽃밭의 맨드라미 목을 자르리등 이 하이쿠를 어떻게 소설화 했을까 호기심을 자극한 하이쿠들도 많았지만, 너무 직설적이거나 평범했던 제목들은 하이쿠 자체로도 좀 아쉽게 읽힌 게 사실입니다.

 

편집자인 삼송 김사장 님과 미미 여사가 제안한 이 작품의 독서 가이드를 정리하면 후반에 실린 작가의 말을 먼저 읽고 각 수록작의 제목인 하이쿠를 충분히 음미한 뒤 본문을 (절대 급히 달리지 말고) 아주 천천히 감상하고 다시금 제목인 하이쿠를 읽어달라.”입니다. 실제로 몇몇 작품은 이런 순서로 읽었을 때 남다른 여운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 읽지 않은 독자라면 이 가이드를 참고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수록작마다 세세하게 평점을 매겨보니 별 5개가 4, 4개가 8편이었고, 전체적인 인상도 비슷했습니다. 미미 여사는 하이쿠와 소설의 콜라보후속작들을 여러 편 염두에 두고 있다고 밝혔는데, 후속작에서는 수록작 모두에게 별 5개를 줄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물론 미미 여사에게 사심으로 가득한 1인이라 이번 작품보다 좀더 세고 독하거나 좀더 따뜻하고 깊은 이야기들이 수록된다면 무조건 별 5개를 줄 게 분명하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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