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학 살인사건
치넨 미키토 지음, 권하영 옮김 / 북플라자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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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을 앞둔 외과의사 미즈키 치하야는 오랫동안 서먹한 채 벽을 쌓고 살아온 아버지 미노루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힙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망 직후 자신의 시신을 해부해달라는 미노루의 유언에 크게 놀란 치하야는 동기인 병리의(病理醫) 토야 시오리와 함께 해부를 진행한 결과 미노루의 위장 벽에 새겨져 있는 기이한 암호문을 발견하곤 충격에 빠집니다. 혼란스러운 치하야에게 닥친 결정타는 평생 경비원으로 일했다던 미노루가 실은 경시청 수사1과 형사였으며, 아직까지 미제로 남은 28년 전의 연쇄 여아 살해사건, 일명 종이학 살인사건을 담당했었다는 사실입니다. 한편 미노루가 사망한 바로 그날, 종이학 살인사건의 범인이 28년 만에 새로운 범행을 시작했음을 알리는 여성 변사체가 발견됩니다.

 

현직 의사이자 미스터리 작가로서의 치넨 미키토의 매력을 또 한 번 제대로 만끽할 수 있었던 작품입니다. 최근에 읽은 유리탑의 살인이 본격 미스터리에 치중한 작품이었고, ‘구원자의 손길이 감동적인 메디컬 소설이었다면, ‘종이학 살인사건은 두 장르가 절묘하게 조합된 메디컬 미스터리의 정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傷痕のメッセージ’(상흔의 메시지)입니다. 치하야의 아버지이자 전직 경시청 수사1과 형사였던 미노루의 위장 벽에 새겨진 암호 메시지가 이 작품의 원제이자 미스터리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미노루로 하여금 경찰을 그만두게 만들었던 28년 전 연쇄 여아 살해사건과 관련 있는 것으로 밝혀집니다.

왜 아버지는 편지가 아닌 기이한 방식으로 메시지를 남겼는가? 만일 종이학 살인사건의 중요한 단서라면 왜 지금까지 경찰에 넘기지 않은 건가? 무엇보다 왜 아버지는 자신에게 전직 경찰임을 알리지 않은 걸까? 자신을 혼란에 빠뜨린 이 무수한 의문들의 해답을 찾기 위해 치하야는 동기 의사인 시오리와 함께 암호 메시지 해독에 나섭니다. 그리고 거기에 28년 전 미노루의 파트너이자 신참 멘티였으며 현재 경시청 수사1과 소속인 사쿠라이가 가세합니다. 그는 종이학 살인사건 범인이 28년 만에 저지른 것으로 보이는 여성 교살사건 때문에 수사본부에 합류했고, 미노루의 죽음과 교살사건이 같은 날 벌어진 게 절대 우연이라 믿지 않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치하야는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사쿠라이의 태도와 의도에 적잖은 의심을 품습니다.

 

미노루의 딸인 치하야가 그의 생전 인간관계를 조사하고, 미노루를 해부한 병리의 시오리는 그의 위장에 새겨진 메시지는 물론 시신에 담긴 또 다른 단서를 찾기 위해 밤낮으로 현미경에 매달립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수사는 경시청의 사쿠라이가 담당합니다. 말하자면 치하야가 휴먼, 시오리가 메디컬, 사쿠라이가 미스터리를 담당한 셈인데, 사건 못잖게 이 세 인물의 케미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치하야는 아버지에 대해 알아갈수록 자신이 몰랐던 아버지의 면모에 여러 번 놀라고 눈물을 흘립니다. 시오리는 미노루의 장기를 정밀하게 관찰하면서 그의 시신이 전달하려는 또 다른 메시지를 찾는데 전념합니다. 병리의의 의무는 단순히 해부나 관찰에 그치지 않고 시신이 남긴 메시지를 유족에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믿는 시오리의 신념은 메디컬 픽션에서만 맛볼 수 있는 남다른 감동을 전합니다. 그리고 과거 사수였던 미노루가 그랬듯 사쿠라이는 상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수사를 감행하는 철두철미한 반골입니다. 유족인 치하야와 민간인 의사인 시오리와 비밀리에 협업하는 건 바로 그런 그의 수사 스타일 때문인데, 문제는 그 협업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다는 점입니다.

 

연쇄 여아 살해사건 이후 28년 만에 다시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한 진범을 찾는 미스터리도 흥미롭고, 아버지의 진짜 모습을 알아가는 치하야의 고통스러운 여정도 긴장과 감동을 번갈아 선사합니다. 막판에 밝혀진 범인의 정체는 놀라움 그 자체이고, 사쿠라이와 시오리가 알아낸 진실 때문에 자칫 평생을 지옥도에서 살아갈 수도 있는 치하야의 위태로운 처지는 막판까지 반전을 거듭하며 어떤 마무리가 기다리고 있을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요약하자면 정말 잘 짜인 메디컬 미스터리의 쾌감과 여운을 한껏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까요?

 

라노벨 계열과 달달해 보이는 미스터리는 읽지 않았지만 치넨 미키토의 정극 미스터리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찾아 읽는 편입니다. 검색해보면 엄청난 양의 작품을 집필한 걸로 나오는데 아직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이 한 편이라도 더, 하루라도 빨리 소개되기를 간절히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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