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고 고른 말 - 카피라이터·만화가·시인 홍인혜의 언어생활
홍인혜 지음 / 미디어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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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나를 예민하거나 소심하다고 말하지 말아 줘. 누군가의 한 마디에 상처를 받거나 기쁨을 느끼는 나 말이야. 일희일비를 즐겨 하는 나. 어떤 날은 좋았다가 슬펐다가 감정이 널뛰기 난리 블루스를 추는 나. 가시 돋친 말들을 기억했다가 집으로까지 가져오는 나. 그저 섬세하고 다정하다고 다시 말해주면 안 될까. 이왕이면 좋은 쪽으로 바람이 그대 쪽으로 부는 것처럼. 


귤 한 박스를 보내 줄게요. 무슨 문제 있으면 언제든지 저한테 전화 주시면 됩니다. 한 번 먹으러 가자. 최근에 들었던 다정한 말의 목록이다. 인생사 짧은지라 부드럽고 달콤한 말만 들으며 살고 싶다. 비꼬고 비아냥 거리거나 특정 의도를 남아 하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 들어도 잘 벼린 칼로 쳐내고 싶은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싶다. 


홍인혜의 『고르고 고른 말』을 읽다가 아하 하고 눈이 번쩍 뜨이고 쓰린 마음이 풀어졌다. '신경 쓰다 와 신경 쓰이다'의 차이점을 알려주는 부분이었다. 신경 쓰는 건 내 의지의 문제, 신경 쓰이는 건 내 의지의 문제를 벗어난 초월의 영역이라는 부분에서였다. 이러니 인간은 책을 읽어야 한다.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지만 우린 모두 병들고 아프니까. 책을 읽으며 자연 치유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 


대개 통화를 자주 한다. 전화 공포증에서 전화 무섬증까지 증상이 완화되긴 했지만 그래도 전화 통화는 긴장된다. 상대의 얼굴을 표지 못하니 비언어적 표현의 정보를 얻지 못한다. 순전히 목소리만으로 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 고도의 심리전을 벌여야 한다. 같은 말도 상대의 표정과 몸짓 정보가 있으면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그냥 하는 농담인지 농담을 가장한 조롱인지 전화로는 쉽게 간파할 수 없다. 


신경 쓰이는 마음에 대해 생각하다가 『고르고 고른 말』을 읽으며 나의 문제가 아니다는 명쾌한 이론을 얻을 수 있었다. 뒤늦게 읽었지만 『고르고 고른 말』은 올해의 읽은 책 중 마음 따뜻하고 소중한 책 1위이다. 내 마음대로 어워드에서. 언어를 오래 다룬 사람의 안목으로 힘이 되어 주고 위로가 되며 이내 행복이라는 느끼기 어려운 감정까지 느끼게 해주는 말들을 책에 담아냈다. 


알겠지만 쉽고 간단한 말 한마디면 된다, 산다. 밥을 챙겨 먹고 새로 한 머리가 잘 어울린다. 새로 올린 보고서는 고심의 흔적이 엿보여서 좋았다. 다음에는 더 잘될 거다. 그냥 너라서 괜찮아. 너를 위해 쓰는 돈은 아끼지 말아. 이런 말들. 말은 하는 것보다 참는 게 미덕이다. 그럼에도 노동자로 살아가야 하는 이상 사회적인 인간으로서의 언어생활은 해야 한다. 


말을 하기 전 생각 하자. 나의 말이 상대에게 어떻게 가 닿아 내려앉을지. 거슬리는 것 없이 사라져야 한다. 내내 염두에 두자. 상식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독서를 부지런히 해야 한다. 『고르고 고른 말』을 읽으며 깨달았다. 위트 있고 다정하며 귀여운 친구가 들려주는 따뜻한 말의 목록만으로도 세상은 붕어빵의 온기와 향기로 가득해진다. 한 입 베어 물면 달콤한 팥의 풍미는 덤. 


오늘의 고르고 고른 말: 말보다는 편의점 봉투에 담긴 달다구리 한가득. 오다 주웠다의 상위 버전인 오다 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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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방방곡곡 여행 일기
마스다 미리 지음, 이소담 옮김 / 북포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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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누워 있기만 하면 바보 될 수도 있으니까. 여행 가야지. 하고 행하는 건 여행기를 읽는 것이다. 일요일 오전에 떠나는 세계 여행. 마스다 미리의 『세계 방방곡곡 여행일기』를 집어 들었다. 1987년부터 2019년까지의 여행 기록이다. 목차를 보니 총 스물세 곳의 나라를 방문했군요. 그대의 열정에 건배. 


지금은 대유튜브 시대. 여행기를 읽어도 랜선 여행을 떠나도 즐겁다. 부지런하고 기발한 유튜버들이 보내오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의 여행 영상은 내가 간 것만 같은 착각을 준다. 몇몇 여행 채널을 구독했나? 아니군. 인터넷 세상에서도 내향인의 규칙을 지키며 한 여행 유튜버의 채널만 구독해놨다. 그 역시 내향형 여행 유튜버. 여행 가서 누워 있는 사람. 


일상 만화의 대가 마스다 미리의 첫 여행지는 이탈리아였다. 미술학교에서 간 첫 해외여행이었다. 무리해서 부모님이 보내준 여행이라 애틋한 나라이다. 유명한 장소에 가서 사진을 찍고 친구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오래전에 찍은 사진을 보며 맞아, 그랬었군 기억을 떠올리는 부분도 있다. 『세계 방방곡곡 여행일기』 초반부에는. 


예쁜 포장지 느낌의 일러스트 배경의 타이완 일기는 읽는 것만으로도 선물을 받은 느낌이다. 함께 갔지만 따로 여행을 즐긴다. 현지 음식을 먹고 현지인들에게 받은 친절을 기록으로 남긴다. 한국에서의 기록도 있다. 디저트를 하나씩 시켜서 각자 먹는 것이 아닌 여럿이서 같이 먹는 문화를 즐거워했다. 비 오는 날에 먹는 부침개를 신기해하기도 한다. 


여행기 중간중간에 담긴 단상들. 다른 무엇도 생각하지 않고 오늘을 즐겁게. 여행은 그런 마음으로 가는 거라는 걸 배운다. 내일 출근은 어떡하지. 쌓여 있는 있은 어떻게 쳐낼까. 무례한 사람에게 웃지 않고 말하는 요령은? 같은 괜히 불안만 가중되는 생각을 여행지에서라면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는 것일까. 짐작해 본다. 


오로라를 보러 가는 것만은 꼭 해보고 싶다. 북유럽이나 캐나다. 책으로 영상으로 봐도 직접 가서 보는 것에 비할 바는 아니지. 유명한 장소의 나열이 아닌 마스다 미리 엄선의 특별하고 느낌 좋은 여행지의 소개라서 『세계 방방곡곡 여행일기』는 행복한 책이다. 누군가의 행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의 느낌이 전달되니까. 기념품을 담은 사진과 그림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과자, 초콜릿, 수프, 에코백 같은 것. 


어른의 세계, 어른의 느낌. 여행을 하면 어른의 세계와 느낌을 실감할 수 있겠구나. 여행다운 여행을 해보지 않은 나는 그래서 아직 어른이 아닌 상태. 그래도 좋다. 어른의 여행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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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6
문진영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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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K마을에 모인 다섯 사람이 있습니다. 이 톤은 드라마, 영화를 요약해 주는 어느 유튜버의 시작 멘트를 따라 해본 것이다. 늘 그렇듯 누워 있지만 요즘은 더 누워서는 유튜브 영상을 본다. 예전에 봤던 영화나 신작 드라마를 리뷰 해주는 채널이 많이 있어서 놀랍고 즐겁다. 이야기 요약하는 노하우를 배워야겠다는 건설적인 생각은 들지 않고 그저 신이 난 채 보기만 한다. 아무튼.


문진영의 소설 『딩』을 요약하자면 여기 K마을에 모인 다섯 사람이 있습니다가 적합할 것이다. 동해이면서 서핑의 명소로 떠오를까 말까 하는 K마을. 작가는 부러 지명을 노출하지 않는다. 그곳에 인물들을 모이게 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처음으로 만나는 인물은 지원. 인문학 출판사의 편집자로 일하면서 가끔 불편한 전화를 받는다. 아버지. 


드문드문 소식을 이어가다가 그가 암에 걸려 죽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서둘러 장례를 치르고 마을을 떠나왔지만 집을 정리해야 한다는 절차가 부채처럼 남아 다시 마을로 돌아간다. 오래 떠돌다 온 지원은 그곳에서 누군가 등대에 남겨 놓고 간 귤과 아직 남아 있는 친구를 만난다. 주미가 있다. 그녀는 가족이 운영하는 모텔, 지금은 호텔로 명칭을 바꾼 곳에서 일을 한다. 언젠가 그 모든 걸 정리하고 여행을 떠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재인. 하와이에서 어학원 강사로 일하는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 P가 있다. 한국으로 돌아간 P가 어느 바닷가 모텔에서 목을 매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살아있는 P를 만나기 위해서 끊은 비행기표는 P의 흔적을 쫓는데 사용된다. K마을에서 그녀는 주미가 일하는 곳에 거처를 잡고 카페에서 일을 시작한다. 영식과 쑤언이 있다. 아이를 잃은 영식은 오랜 방황 끝에 주미의 호텔 앞에서 포장마차를 차린다. 술이 필요할 것 같은 사람에게는 안주를 밥이 필요할 것 같은 이에게는 밥을 팔면서. 


베트남에서 일하러 온 쑤언은 동료를 화재로 잃었다. 곁을 내주기 않기 위해 애를 썼다. 타국에서 우정은 거추장스러운 장신구에 불과하므로. 반짝거리지만 이내 쓸모를 잃고 마는 것. 머물 곳이 없는 쑤언은 영식의 충동적인 결정으로 함께 머문다. 『딩』의 서사를 인물 중심으로 압축해 보았다. 하나로 이어질듯한 이야기는 다른 인물을 만나 다른 방식으로 섞여 들어간다. 지원이었다가 주미로 제인에서 영식과 쑤언으로. 상실의 고통을 겪은 그들이 만나는 건 K마을의 황량한 바람일까. 의도하지 않은 누군가의 선량함일까. 


딩은 서핑보드가 뭔가에 부딪혀 상처가 난 것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P가 제인에게 알려주는 말이다. 우린 모두 뭔가에 부딪히며 상처를 주고받는다. 상처를 가진 채 살아가는 게 인간의 숙명이라는 생각. 『딩』을 읽고 해보았다. 부딪히지 않아도 스스로 상처를 내며 살아가는 것 또한 우리의 운명. 『딩』에서 만나는 인물들이 가진 상처는 치유의 시간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겪으며 견딘다. 


이야기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일은 까다로운 작업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그럼에도 『딩』에서 만난 지원, 주미, 제인, 영식, 쑤언의 서사를 되짚어 보고 싶었다. 나의 어두움, 불안, 불신, 분노의 원인을 그들에게서 찾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이 들었다. 그러니까 나만 힘든 건 아니다. 모두 각자의 고통과 슬픔을 가지고 있다. 상처를 바라보는 태도에는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고 『딩』은 전한다. 귤 하나를 놓아두고 미역국과 라면을 끓여 내어주는 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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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 설자은 시리즈 1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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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가는 집안을 살리기 위해 죽은 오빠 대신 당으로 유학을 떠나는 미은은 자은이 된다. 자신의 이름과 성별을 버린 채 말이다. 죽은 자은과 용모가 닮았다는 건 좀처럼 당위성을 발휘하긴 힘들고 셋째이지만 첫째가 된 호은의 압박과 여성으로서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배움과 세상을 경험해 보고 싶은 기회가 미은을 홀린 것이다. 


미은 아니 자은은 당으로 가서 학문과 식견을 넓히지만 전쟁으로 사신단이 오가지 않아 가져간 물건을 팔아가며 버틴다. 당과 통일신라 사이의 관계가 좋아지면서 자은은 신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정세랑의 추리 소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는 자은이 신라로 가는 배를 타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시작한다. 시대적 배경이 통일신라라니. 아름답고도 황홀해서 책을 읽어나가는 게 아까울 지경이었다. 


그것도 남장 여자의 설정이라니. 자은이 여성인 걸 한눈에 간파한 이가 나타나 조력자를 자처하다니. 웬 걸 설렘 포인트가 한가득이어서 나 지금 떨려 엄청 하면서 읽었더랬다. 가만있자. 시리즈가 계속된다니. 영상으로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 뿜뿜. 사람 보는 안목이 없어서 배우를 누구로 할지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네 편의 추리 소설을 읽어가면서 모든 걱정과 근심을 털어 버리자. 


단 한 마디면 된다는 걸 살아가면서 알게 되었다. 구질구질하고 어려운 헛소리 말고 단 한 마디. 미스테리아에서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에 실린 첫 번째 이야기 「갑시다, 금성으로」를 읽었을 때 제목이 근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야기는 더 압도적이었다. 배 안에서 장신구 상인이 살해당한다. 그와 함께 탄 가족은 실종되었다. 자은과 망한 나라 백제의 누반박사가 되려고 당에서 공부한 목인곤이 사건을 파헤쳐 간다. 


자은은 장신구 상인의 딸이 한밤중에 깨어나 우는 걸 목격했다. 어미의 팔목과 딸에 팔목에 끈이 묶인 것도 보았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팔이 묶인 딸이 우는 것일까. 다른 날에는 뺨 때리는 소리도 들었다. 그러다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장신구 상인은 목이 졸린 채 죽어 있었다. 자은과 인곤은 배에서 처음 만났지만 서로의 특별함을 감지하며 사건의 진상을 밝힌다. 


인곤은 자은에게 은근한 압력을 행사한다. 자은이 여성임을 알아챘으니 자신을 금성으로 데리고 가 식객으로 받아들이라고. 남성 행세를 하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며. 자은은 망설이지도 않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일단 가기나 갑시다, 금성으로." 자은의 그 멘트는 내가 들었을 때도 떨렸는데 인곤에게는 얼마나 반갑고 애틋했을지. 종이를 뚫고 나오는 다정함과 사랑이 느껴져서 황홀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같이 집으로 간다?


통일신라 시대이니까. 지금처럼 방이 하나인데도 전세 사기가 무서워 이사를 가지 못하는 2023년이 아니니까 가능한 설정이겠지. 부럽다 부러워. 자은은 인곤을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간다. 그곳에서도 성격 좋고 훌륭한 감각을 지닌 인곤과 함께 자은은 미스터리한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는 아름다움이 가득한 소설이다. 흔히 접할 수 없는 시대적 배경으로 매력적인 인물을 내세워 시간 여행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최고의 플러팅 인간 설자은. 자은을 한눈에 알아본 최고의 츤데레 인간 목인곤. 그들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궁금해. 어서 다음 이야기 내놓으란 말이야. 근간이라고 되어 있으니 빨리빨리. 갑시다, 금성으로라니. 갑시다, ♥♥♥으로 변형해서 마구 써먹어 온 세상에 연애와 사랑과 밀당의 감정을 퍼트려야 한다. 추리 소설이면서 사랑 소설인 척하는 거 있기 없기. 독자로 하여금 사랑의 주접을 떨게 하는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 만만세. 설자은 시리즈 흥행해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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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이 언니에게 남긴 것 위픽
이서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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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서와 주민등록등본, 통장사본을 정리하다가 낯선 이름들을 발견한다. 한글이 아닌 알파벳으로 적힌 글자를 조합해서 읽으려고 눈을 크게 떴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 게 외국인 등록증이나 보건증에 한글로 번안된 이름이 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많이 있구나. 한국으로 일하러 오는 외국인들이. 식당에 밥 먹으러 갔을 때 마트 계산대 앞에서 약간의 미묘하게 다른 한국어를 듣고는 그러려니 했고 이제야 실감 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주변에 그들을. 


언니라는 말을 듣는 게 꺼림칙하다. 연년생의 자매는 나를 언니라는 호칭 대신 이름으로 불렀다. 또 그러려니 했다. 어느 날 친구랑 신호등에 서 있는데 그 애가 나를 이름으로 부르는 걸 친구가 듣고는 깜짝 놀랐다. 왜 이름으로 불러? 그 말을 듣기 전까지 그게 이상한지 몰랐다는 게 더 이상하고 소름 끼쳤다. 집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 애에게 나를 언니라고 불러야 한다는 걸 가르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지금도 그 애는 나를 제대로 언니라고 하지 않는다. 호칭의 자리에 필요한 말을 먼저 들이댄다. 


이서수의 소설 『첫사랑이 언니에게 남긴 것』을 읽으면서는 읽고 나서는 이런 두서없는 생각들이 마구 떠오르는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 언니 그리고 사랑. 외국인 등록증을 처음 보았고 흐린 눈 대신 맑은 눈으로 월요일에 가면 다시 그 서류를 봐야 하고 이제는 하나 남은 혈육이 나를 어떻게 불렀는가 부르고 있는가를 『첫사랑이 언니에게 남긴 것』을 읽고는 생각한다. 소설 속의 동생은 언니의 행방을 걱정하다가 지치면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다. 우연과 필연이 반쯤 섞인 지점에서. 


소설 속 언니는 한여름에 패딩 점퍼를 입고 돌아다닌다. 언니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몇 백만 원의 돈을 빌려줬고 그이는 잠적한 이후라 동생인 나는 아무 말 하지 않는다. 한여름에 패딩이라니 제발 그러지 말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다. 언니는 재중동포가 많이 사는 집에 살고 있었고 그중에 한 명과 연애를 하다가 그만둬야 했다. 다시 언니는 잠적. 엄마는 언니가 그렇게 살면서 무연고자가 되어 쓸쓸하게 죽어갈 운명이라고 딸을 향한 원망의 말인지 악의의 말인지 모를 말들을 한다. 


다시 사라진 언니를 동창생의 제보에 의해 찾아내고 나는 언니를 무관심으로 둘 수 없어 찾아간다. 소설은 그렇게 언니와 동생의 이야기를 슴슴하게 해준다. 한국인보다는 외국인이 많이 사는 곳에서 사는 게 편한 언니. 언니의 집을 방문하다가 근처 오랜 직장 동료의 집들이를 가는 나. 그곳에서 나를 설레게 하던 사람과 조우하는 나. 애인이 있냐고 차마 물어보지는 못하고 손에 낀 반지나 들여다보는 나. 


나는 이 사람이 시간도 없는데 왜 알맹이 없는 말을 씨불이나 초조했지만 적당히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는 좀 다른 생각이 드네요. 내부는 영혼과 가축, 외부가 인간 같아요. 뭐든 인간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것 같아서요. 

(이서수, 『첫사랑이 언니에게 남긴 것』中에서)


삼천 원과 오천 원 사이의 이천 원. 이천 원이 있으면 삶이 약간은 편해질 수 있지 않느냐고 이천 원은 그런 돈이라고 말하는 언니. 사랑의 정의나 의미를 뛰어넘기보다 그런 게 있냐는 식으로 살며 사랑하는 언니. 『첫사랑이 언니에게 남긴 것』은 언니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으면서도 동생인 나의 이야기를 슬쩍 끼어 넣는 방식으로 첫사랑이든 어떤 사랑이든 사랑이 우리에게 남겼거나 남길 뻔한 것들을 타전해 준다. 여기는 사랑의 세계, 들리십니까. 


네. 들립니다. 그럼 이건 어떨까요. 아무것도 남지 않아도 좋잖아요. 사랑은. 남는다니 오히려 그게 이상한 거 아닐까요. 사랑은 남기지 않습니다. 완전히 지우는 형태로 우리 곁에서 사라집니다. 주접 같아도 손에서 반짝이고 있는 반지나 들여다보지 말고 물어봐야죠. 사귀는 사람 있어요? 결혼했어요? 


언니, 동생 그리고 가족 이야기를 보거나 들어도 화가 치민다. 우리 가족은 사이좋다는 공익 광고 같은 말을 듣는 순간에는 바닥을 닦고 있던 밀걸레를 던져 버리고 싶다. 폭력적이고 미친 건가. 현실의 어느 가족은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게 믿을 수 없고 다만 사촌을 사랑하고  모금함을 들고 전도를 하는 언니와 그런 언니에게 마음속의 말을 하지 못하는 동생이 있는 세계에서는 행복을 빌어주고 싶다. 현실의 나를 미치지 않게 만들어 주는 소설 속 세계가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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