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이 언니에게 남긴 것 위픽
이서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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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서와 주민등록등본, 통장사본을 정리하다가 낯선 이름들을 발견한다. 한글이 아닌 알파벳으로 적힌 글자를 조합해서 읽으려고 눈을 크게 떴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 게 외국인 등록증이나 보건증에 한글로 번안된 이름이 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많이 있구나. 한국으로 일하러 오는 외국인들이. 식당에 밥 먹으러 갔을 때 마트 계산대 앞에서 약간의 미묘하게 다른 한국어를 듣고는 그러려니 했고 이제야 실감 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주변에 그들을. 


언니라는 말을 듣는 게 꺼림칙하다. 연년생의 자매는 나를 언니라는 호칭 대신 이름으로 불렀다. 또 그러려니 했다. 어느 날 친구랑 신호등에 서 있는데 그 애가 나를 이름으로 부르는 걸 친구가 듣고는 깜짝 놀랐다. 왜 이름으로 불러? 그 말을 듣기 전까지 그게 이상한지 몰랐다는 게 더 이상하고 소름 끼쳤다. 집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 애에게 나를 언니라고 불러야 한다는 걸 가르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지금도 그 애는 나를 제대로 언니라고 하지 않는다. 호칭의 자리에 필요한 말을 먼저 들이댄다. 


이서수의 소설 『첫사랑이 언니에게 남긴 것』을 읽으면서는 읽고 나서는 이런 두서없는 생각들이 마구 떠오르는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 언니 그리고 사랑. 외국인 등록증을 처음 보았고 흐린 눈 대신 맑은 눈으로 월요일에 가면 다시 그 서류를 봐야 하고 이제는 하나 남은 혈육이 나를 어떻게 불렀는가 부르고 있는가를 『첫사랑이 언니에게 남긴 것』을 읽고는 생각한다. 소설 속의 동생은 언니의 행방을 걱정하다가 지치면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다. 우연과 필연이 반쯤 섞인 지점에서. 


소설 속 언니는 한여름에 패딩 점퍼를 입고 돌아다닌다. 언니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몇 백만 원의 돈을 빌려줬고 그이는 잠적한 이후라 동생인 나는 아무 말 하지 않는다. 한여름에 패딩이라니 제발 그러지 말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다. 언니는 재중동포가 많이 사는 집에 살고 있었고 그중에 한 명과 연애를 하다가 그만둬야 했다. 다시 언니는 잠적. 엄마는 언니가 그렇게 살면서 무연고자가 되어 쓸쓸하게 죽어갈 운명이라고 딸을 향한 원망의 말인지 악의의 말인지 모를 말들을 한다. 


다시 사라진 언니를 동창생의 제보에 의해 찾아내고 나는 언니를 무관심으로 둘 수 없어 찾아간다. 소설은 그렇게 언니와 동생의 이야기를 슴슴하게 해준다. 한국인보다는 외국인이 많이 사는 곳에서 사는 게 편한 언니. 언니의 집을 방문하다가 근처 오랜 직장 동료의 집들이를 가는 나. 그곳에서 나를 설레게 하던 사람과 조우하는 나. 애인이 있냐고 차마 물어보지는 못하고 손에 낀 반지나 들여다보는 나. 


나는 이 사람이 시간도 없는데 왜 알맹이 없는 말을 씨불이나 초조했지만 적당히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는 좀 다른 생각이 드네요. 내부는 영혼과 가축, 외부가 인간 같아요. 뭐든 인간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것 같아서요. 

(이서수, 『첫사랑이 언니에게 남긴 것』中에서)


삼천 원과 오천 원 사이의 이천 원. 이천 원이 있으면 삶이 약간은 편해질 수 있지 않느냐고 이천 원은 그런 돈이라고 말하는 언니. 사랑의 정의나 의미를 뛰어넘기보다 그런 게 있냐는 식으로 살며 사랑하는 언니. 『첫사랑이 언니에게 남긴 것』은 언니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으면서도 동생인 나의 이야기를 슬쩍 끼어 넣는 방식으로 첫사랑이든 어떤 사랑이든 사랑이 우리에게 남겼거나 남길 뻔한 것들을 타전해 준다. 여기는 사랑의 세계, 들리십니까. 


네. 들립니다. 그럼 이건 어떨까요. 아무것도 남지 않아도 좋잖아요. 사랑은. 남는다니 오히려 그게 이상한 거 아닐까요. 사랑은 남기지 않습니다. 완전히 지우는 형태로 우리 곁에서 사라집니다. 주접 같아도 손에서 반짝이고 있는 반지나 들여다보지 말고 물어봐야죠. 사귀는 사람 있어요? 결혼했어요? 


언니, 동생 그리고 가족 이야기를 보거나 들어도 화가 치민다. 우리 가족은 사이좋다는 공익 광고 같은 말을 듣는 순간에는 바닥을 닦고 있던 밀걸레를 던져 버리고 싶다. 폭력적이고 미친 건가. 현실의 어느 가족은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게 믿을 수 없고 다만 사촌을 사랑하고  모금함을 들고 전도를 하는 언니와 그런 언니에게 마음속의 말을 하지 못하는 동생이 있는 세계에서는 행복을 빌어주고 싶다. 현실의 나를 미치지 않게 만들어 주는 소설 속 세계가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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