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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엠마'는 제인 오스틴의 네번째 소설이다.

  초기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등, 주로 작품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정서(pathos)들을 제목으로 가져왔던 오스틴은 여기서는 주인공의 이름을 직접 제목으로 가져왔다. 이러한 변화는 세번째 작품이자 바로 전 작품인 '맨스필드 파크'에서 시작되었는데 거기서 '맨스필드 파크'란 바로 소설의 주 무대가 되는 곳의 이름이었다.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에서 보듯이 오스틴은 제목을 신중히 고르는 작가다. 그녀에게 제목은 독자에 대한 일종의 안내(그러니까 '여기에 유념해서 보아주길 바란다'와 같은...)이자 그녀 스스로가 작품을 통해서 정말 드러내고 싶은 핵심이기도 하다(어쩌면 결국 같은 말일 수도 있겠다. 핵심이니 일부러라도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은거겠지...). 그렇다면 이런 짐작을 가능케 한다. '맨스필드 파크'에서 제인 오스틴이 보여주고자 하는 핵심은 '맨스필드 파크'로 대변되는 거기서 더부살이 중인 가련한 패니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 자체이며 '엠마'는 주인공인 '엠마'라는 존재 자체가 보여주고자 하는 핵심임을 말이다.

  

  

 

 



 

 

 

 이렇게 '엠마'가 여성이 쓴 여성 자체의 이야기라고 한다면 '맨스필드 파크' 이후로 여기엔 어떤 연속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맨스필드 파크'가 주인공 패니 프라이스로 대표되는 여성이란 존재를 그녀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이라는 바깥에서 관찰한 이야기라면 '엠마'는 그 모든 배경을 던져버리고 오로지 그 여성 내부에서만 여성을 관찰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오스틴은 여기서 신중하게 엠마라는 캐릭터를 형성한다. 엠마는 오스틴의 그 많은 여성 주인공들 중 유일하게 아무런 경제적 어려움이 없다.(전작의 주인공 패니 프라이스와 비교하면 이건 하늘과 땅 차이이다.) 따라서 결혼만이 현재 겪고있는 모든 사회적 곤궁으로 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던 다른 주인공들과는 달리 엠마는 결혼에 대해서도 그리 강박적 집착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당당히 혼자 살겠다고 선언까지 하여 그녀의 아버지 우드하우스씨를 안심시킨다. 오스틴은 그러한 엠마의 경제적 독립(그녀는 어머니의 사후, 저택 살림을 주도적으로 도맡아 꾸려왔다.)과 결혼으로 부터의  자유로움을 엠마의 가정교사로 더할나위 능력과 매력이 있는 그녀이지만 별다른 재산과 가문의 후광이 없는 관계로 양자로 보낸 아들까지 있는 홀아비와 결혼해야 했던 미스 테일러와 매력은 있지만 가난해서 늘 실연의 위험을 무릎써야만 하는 해리엇을 통해 강조한다.

 사실 이 둘, '경제적 여력의 요구'와 '그것을 위한 결혼으로의 강요'는 미스 테일러와 해리엇에게서 보듯이 당시 여성들을 억죄고 있었던 두가지 주요한 사회적 굴레였다. 오스틴은 작품에서 이 두 가지를 내내 강조해왔으며 바로 전작인 '맨스필드 파크'는 그 흐름이 최고조에 다다른 작품이었다. 이 두가지 굴레는 영국사회에서 오스틴 당시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 뒤에도 주욱 이어져 2차대전 후나 50년대에 이르러서도  혼기가 찼음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지 않는 여자들을 - 결국은그래서 아무런 경제적 여력을 가지지 못한 이들을 - '잉여여성'이라 경멸을 담아 부르도록 만들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 두 가지로부터 엠마가 자유롭다는 것은 오스틴이 '엠마'에 이르러 당시 사회가 여성들에게 가하던 가장 주요한 요구들을 없애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바로 이것이 그 바깥이 아니라 오로지 여성 내부에만 천착해서 여성을 관찰한다는 것의 의미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미 그 바깥에서 살펴봄은 '맨스필드 파크'에서 충분히 이루어졌기에 그 모든 사회적 굴레를 벗겨낸다면 과연 여성 스스로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가 새로운 또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자리잡은 것일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만일 우리가 이 다음 작품 '노생거 사원'까지 고려한다면, 사실 '맨스필드 파크'에서 '엠마' 그리고 '노생거 사원'까지 죽 이어지는 일련의 연속성이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는데 단순히 말하자면 일종의 시점(바라보는 것)의 변화라 할 수 있지만 보다 흥미로운 점이 있으니 이 시점의 변화가 바로 전작의 결론들을 완전히 뒤집어버린 곳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맨스필드 파크'에서 여성의 구원(진정한 자유를 쟁취했다는 의미에서)에 있어 '경제력'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면 뒤에 이은 '엠마'는 그것을 다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관찰함으로써 과연 경제력만 있다면 여성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를 살펴보고 '엠마'에게 있어 진정한 삶을 이루는데 있어서 나이틀리와의 관계에서 보듯이 남성의 역할 또한 중요한 것임을 말했다면 '노생거 사원'에서는 과연 그렇게 남성과 제대로 진정한 만남을 이룬다면 여성은 진정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묻는 것이다. 

 

   물론 오스틴은 전작의 결론들을 모두 부정한다. 맨스필드 파크에서 그토록 중시되었던 경제력은 엠마에게 와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며 엠마에게 있어 자신을 교정해주고 적절한 충고와 사랑으로서 보다 완전해질 수 있는 삶을 가져다 줄 수 있었던 남성은 '노생거 사원'에 와서는 전적으로 신뢰만은 할 수 없는, 보다 깊은 남성의 내면으로 들어갈 경우 배척당해 버리는 그래서 남성이 여성에게 정말 바라는 것은 필요할 때 어루만질 수 있는 정도의 애완동물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의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오스틴은 '맨스필드 파크'에서 '노생거 사원'에 이르기까지 찰라에도 변하는 시간을 온전히 담기위해 수많은 덧칠을 했었던 세잔 처럼 전작 위에다 새로운 작품을 수없이 가필하면서 여성 스스로 진정한 자유를 구가하기 위해서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것이다. 때문에 오스틴은 전작의 주인공들 마저 새로운 작품에 다시 삽입하면서 까지 그 연속성을 강조한다. 즉 '맨스필드 파크'의 패니 프라이스는 '엠마'에 와서 '제인 페어펙스'로 다시금 등장하고 '엠마'의 해리엇은 '노생거 사원'에서 주인공 '캐서린'으로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 이 두 인물이 모두 작품의 전형적인 피해자의 자리를 점유한다는 것 역시 흥미로운데, 여기에서 드러나듯이 오스틴의 작품들은 - 특히 이 세 작품에 있어서 -  전작의 전복적 위치에 있는 것이며 그렇게 그녀는 부정의 부정을 통하여 계속해서 여성 자신의 진정한 삶을 위한 근본적 조건들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스틴에게 여성 자신의 진정한 삶을 위한 근본 조건은 단순히 말하면 여성이 진정으로 자유를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을 말한다. 이 점에서 그녀는 후대의 작가 버지니아 울프와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도 '3기니'에서 여성의 자유에 있어 경제력은 필수 조건이라고 한 바 있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지만 오스틴도 여기에 동의한다. 하지만 경제력은 필수 조건이지만 여성의 자유를 위한 충분 조건은 아니다. 거기엔 뭔가 하나 더 필요하다. '엠마'는 그것에의 추구였다. 버지니아 울프의 생각도 그랬다. 그녀는 그래서 '자기만의 방'을 쓴다. 그것은 여성이 주체로서 여성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에세이였다. 그와 똑같은 것을 오스틴 역시 행한다. 말하자면 이 '엠마'는 - 후대의 작가 작품을 가지고 비유하는 것은 몹시 무례한 일이지만 - 오스틴의 '자기만의 방'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이렇게 보자면 오스틴의 소설적 결말이 이상하다. 그녀의 작품들은 종국에는 사랑의 작대기가 서로 이어지는 해피엔딩이나지만 이러한 결말은 사실 그녀가 작품에서 천착해 온 것과 정반대의 결론이기 때문이다.  마치 오스틴의 결말들의 보여주는 모습은 지금까지 해온 모든 과정들을 부정하기까지 하는 느낌인데 오스틴은 왜 그러한 부정적이거나 혹은 한계지워진 결말들을 작품에다 허락했던 것일까? 이건 내게 아직도 더 깊이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이지만 논의의 전개상 무리를 해서라도 말한다면 어쩌면 오스틴 그녀 자신에게 처음부터 세 작품을 일련의 작품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고 그 의도대로 세 작품에 하나의 연속성을 주기 위하여 다음 작품의 주제가 전개 될 수 있도록 정작 나아가야 할 그 순간 발길을 멈추고 그 내부에 머무르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여겨진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말이 너무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므로 다시 '엠마'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말해본다면, 엠마를 통해 오스틴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러니까 왜 엠마는 전작 맨스필드 파크의 여주인공 패니 프라이스가 그토록 절실했던 경제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내 실패를 경험하느냐에 대해서 오스틴은 엠마가 그녀 스스로를 늘 자유롭다고 말하지만 사실 자신은 전혀 자유롭지 못하며 그것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 항상 스스로를 규정하려 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선, 타인에게서 발현되어 스스로를 자기 검열하게 만드는 시선의 대표적 상징이 그 시선의 총합이며 그 시선들을 만들어내는 사회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당시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존재가 남성임을 감안한다면 그 엠마를 구속하는 시선들은 모두 남성으로 부터 오는 규율적 권력의 효과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엠마가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그 자체가 남성으로 부터의 독립임과 동시에 스스로의 자유를 쟁취하겠다는 외침이므로 만일 오스틴이 '엠마'에서 천착했던 주제에 충실하자면 결말의 해피엔딩은 과감히 지우고 꿋꿋하게 독신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엠마를 그렸어야 옳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엠마는 소설 내내 자신을 검열케하고 교정시키게 만들었던 대표적인 시선의 권력 주체인 나이틀리에게로 가는 것을 택함으로써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내팽개치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결말은 오스틴이 작품 내내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던 것에 완전히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작품이 가진 한계라기 보다는 작가 스스로 다음의 작품으로 자연스레 시점을 이동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잠정적 결론이 아닐까 하는 게 지금 내 생각이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오스틴의 세 작품은 그대로 헤겔의 변증법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어쩔 수 없이 '엠마'에서 오스틴이 여성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보다 더 궁극적인 것을 말했는데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타인의 시선이며 작품속에서는 흔히 '매너'로 표현되는 모든 것들이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자크 르벨에 따르면 '매너' 이른바 예절이라는 것의 기원은 1530년에 간행된 우리에겐 '우신예찬'으로도 유명한 에라스무스가 쓴 '어린이를 위한 예절서'라는 책이라고 한다. 그 책은 세가지 점에서 혁신적이었다고 하는데 첫째는 무엇보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차별없이 그 어떤 계층이든 모든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이며 세번째는 어린이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규범'이라는 것을 가르치려 했다는 것이다. 즉 자크 르벨이 이 책을 예절(혹은 매너)의 기원으로 삼은 것은 이 예절이 특정 계층이나 어린이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 규범(예절에 대한 하나의 정형적 태도)을 정립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책에 실린 내용들은 그대로 학교 교육에도 편입되어 이제 사회 성원들을 재사회화 시키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과정이 된다. 에라스무스가 추구했던 보편적 규범의 추구는 오로지 개인들의 다양한 욕망들을 억누를 수 있을 때만이 가능하므로 그래서 그는 그 규범을 정착시키는데 있어 '훈육'을 가장 중요한 수단중의 하나로 보게 되고 그를 수용한 학교 교육은 그래서 강제적이고 채벌이 수반되는 것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른바 예절이라는 것은 태초부터 개인 본연의 욕망과 자유를 억압하고 획일화된 하나의 틀을  폭력적으로 강제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예절이 하나의 보편적 사회관계 형성의 태도로 자리잡음으로서 이제 예절이란 나와 상대방 모두에게 있어 그 가치를 가늠하는 표준적인 잣대가 되어버렸다. 정확히 이러한 상황을 나타내듯 오스틴의 '엠마'는 얼마나 이 매너, 예절이라는 것이 나와 남을 판단하고 스스로 인정받는 것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이 되었으며 그를 위해 모든 행위에 있어서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는지 조금은 섬뜩할 정도로 나타내고 있다. 매너라는 것이 사람들의 가치를 판단하는 데 있어 결정적이 것이  되었음은 엠마가 결정적으로 해리엇의 짝으로 마틴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그의 매너가 부족하기 때문이었다는 점에서 도 드러나며  엠마가 엘튼이나 나이틀리를 비롯한 모든 이들을 만날 때 그 모든 표정이나 몸짓을 눈여겨보고 있음에도 드러난다. 사실 오스틴이 이 소설에서 아마도 가장 많이 쓰는 동사는 '보이다' '드러나다'와 같은 시각에 관련한 동사이기도 하다. 그렇게 엠마는 끊임없이 '내가 어떻게 보여질까?' '남들이 나에게 어떻게 보여지는가?'를 생각한다. 한 장면에서는 엘튼이 더할 나위없이 무례하게 느껴졌어도 엠마는 '예절' 때문에 스스로의 분노를 억지로 가라앉히는 모습도 보여준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오스틴이 드러내는 것은 명백하다. 아무리 경제력을 가진 여성이더라도 아무리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더라도 그녀는 이미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형성되어 있던 타인의 시선의 매개물이라 할 만한 매너에 깊숙이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로 부터 헤어날 가능성은 있는가? 엠마가 자신의 자유를 구속하는 궁극적인 것이 바로 그 시선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녀는 그것을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오스틴은 거기에 대해 비관적이다. 그래서 그녀는 조금은 지루하게 여겨질 정도로 당시 사회에 통용되고 있던 예절의 형태들을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흔히 '엠마'가 보여주는 '사실주의 문학의 모태가 되는 작품'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의 사실주의적 면모는 바로 여기, 이러한 개인 스스로의 힘으로는 달아날 수 없는 꽉 얽혀진 시선의 매트릭스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이다. 

 

   문제는 그 시선의 매트릭스가 오로지 남성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고 여성은 오로지 그 대상일 뿐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여성은 그대로 그 시선에 의해 규정당하고 교정당하는 대상일 뿐 스스로 평가하고 교정해주는 주체일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오스틴의 '엠마'는 이것을 이렇게 보여준다.  그 시선의 매트릭스가 남성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작품 속의 여성들은 그 시선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가 하나도 없는데 남성은 그것으로 부터 자유로움을 보여주는 것으로 나타낸다. 이것은 주로 나이틀리의 형제에게서 나타난다. 특히나 엠마와 긴밀한 관계를 갖는 형 나이틀리가 더욱 그러한데 그는 때때로 의도적으로 타인과 사교해하는 의무를  무시하고 공공연히 혼자만의 일에 몰두하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동생 나이틀리도 기본적으로 관대하고 배려해야 하는 장인이자 엠마의 아버지 우드하우스에게 그러한 의무를 종종 지키지 않는다.) 그런데도 엠마는 나이틀리를 이기지 못한다. 그녀는 늘 설득당하는 존재이며 그 앞에서 비평을 받는 존재이다. 바로 이러한 나이틀리와 엠마의 일방적 관계에서 여성은 오로지 그 시선의 매트릭스에서 규정과 교정의 대상일 뿐이라는 게 드러난다. 더구나 엠마 스스로 관찰하고 평가해서 이리저리 맺어주려 했던 관계들이 모조리 파국으로 끝나고 마는 것은 더욱 이것을 강조한다. 작품 내내 엠마는 그토록 열심히 보고 평가를 했는데도 자신은 잘못 보았으며 진실은 자신이 본 것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다. 더구나 진짜 커다란 진실 프랭크와 제인의 관계는 아예 보지도 못한다. 제대로 보는 것은 오로지 그 시선의 매트릭스로 부터 자유로운 나이틀리 뿐이다. 

 

   때문에 최종적으로 엠마가 나이틀리와 이어짐은 그 시선의 권력 주체에게 완전히 포섭되어짐을 의미한다. 작품 내내 그토록 독립적이고 가장 자유로운 여성이었던 엠마는 그렇게 해서 그 독립과 자유를 스스로 남성에게 상납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우리는 오스틴 소설의 기묘한 측면, 즉 보여주고자 하는 주제와 표현되어지는 내용의 상반성을 보게 된다. 오스틴 스스로 여성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궁극적 원인이 여성 스스로 자신을 보는 시선 그리고 남들이 자신을 보는 그 상상의 시선 자체에 있음을 말하면서도 정작 작품에 드러나는 내용 자체는 그러한 시선의 주체가 되려고 할 때마다 내내 실패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표면의 드러남과 이면의 진실의 반전된 모습은 어찌된 까닭일까? 

 

   다시 여기서 '엠마'라는 작품을 생각해보면 이 작품이 그 무엇보다 '시각적 작품'이라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보다', '드러나다' 등등의 시각적 동사들이 가장 많이 쓰였다는 사실에서도 이러한 특성은 단적으로 드러난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특성과 그 표면과 이면의 반전성이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할수는 없을까? 엠마는 늘 보여지는 모습에 신경을 쓴다. 그래서 그녀는 싫지만 내색을 할 수 없고 정작 중요한 자기만의 진실된 감정들은 내부의 비밀의 영역에다 감추어야 한다. 이는 엠마만이 아니다. 엘튼도 나이틀리도 마찬가지다. 프랭크와 제인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렇다. 프랭크와 제인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이것은 결코 엠마에게는 드러나지 않았던 미스터리였지만 궁극적으로 엠마의 세계 자체를 전복시킬수 있을만큼 핵심적인 것이었다. 가장 커다란 진실이자 가장 본질적 진실이었지만 엠마는 그것을 볼 수 없었다. 프랭크와 제인의 표면은 그것의 기미조차 하나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작품에서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의 차이가 중요해지는 것인가 이 모든 것을 통해 오스틴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이제 우리는 그것을 물어야 한다. 이것은 시각의 한계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늘 타인을 보는 시선과 타인에게서 비롯되는 상상의 시선을 신경쓰게 되면 절대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며 진정한 관계조차 이루지 못할 것임을 의미한다. 엠마가 정확히 이랬다. 즉 오스틴은 작품 속 엠마의 상황 그래도 독자를 이끌고 가기 위해 '표면과 이면의 반전성'이라는 방법을 취했으며 또한 그것을 통해 자신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주제를 더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품 표면에 오스틴이 보여주는 상황 자체를 늘 의심하고 바라보아야 한다. 엠마가 그랬듯 그 표면에만 집착하다 보면 정작 감춰진 진실을 영영 보지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연히 표면적으로는 행복해 보이는 나이틀리와 엠마의 결합 또한 의심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결국 우리가 제대로 된 작품 속 진실을 찾고자 하면 본류 보다는 지류를 줄기 보다는 세부에 돋보기를 가져다 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왜 작품 '엠마'에게 쏟아지는 비판 중의 하나이기도 한 '별로 명확한 줄거리도 없이 지리하게 그 세부를 모조리 복원했다.' 처럼 오스틴이 써내려 갔는지 그 이유가 명확해진다. 앞서 말했던 그대로 이면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문장 하나 손짓 하나 그 모조리 복원된 현실의 가장 작은 단면 조차 과연 그 안에 깃든 진실이 무엇일지 세세하게 헤아려야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명확한 줄거리 따위는 소용없으며(그것은 오히려 말하고자 하던 진실을 오도하므로) 그 재현되는 과정 전체를 즐겨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오스틴이 엠마를 통해 정작 하고자 했던 것 '여성이 진정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시선으로 부터 해방되어야 한다'와 연결되는 것일까 의문이 들 것이다. 시선으로 부터 해방되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 그건 내가 보여지는 대상이 아니라 보는 대상이 되는 것 뿐이다. 엠마가 초기에 했던 그대로 내가 스스로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시선을 통해 타인을 규정하려는 나이틀리의 권력에 맞서는 유일한 길은 거꾸로 나이틀리를 규정하는 시선적 권력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오스틴 역시 초반에 그것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작품 초반 나이틀리에게 엠마가 당당하게 대처할 때 나이틀리가 무기력해지고 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말이다. 따라서 이 '엠마'가 재현되는 과정 전체를 즐기는 소설이 되어야 함은 마땅한 것이다. 왜냐하면 작품 전부가 내내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보고 판단하는 시선의 주체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때문에 '엠마'가 가진 구성적 모호성은 오스틴의 명백한 의도이며 이것은 독자로 하여금 독립적 시선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훈련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엠마'는 오스틴의 새로운 전략적 글쓰기를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남성의 시선에 포착되지 않는 이면과 세부에 진정한 진실들을 새겨넣어 볼 수 있는 자에겐 지금의 현실이 그 편파적인 욕망이 아로새겨진 인위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음을 더욱 드러내는... 

   새삼 엠마를 주목함은 이 작품으로 인해 오스틴을 나 스스로 전혀 새롭게 해석해 볼 여지가 생겼기 때문이다. 오스틴은 늘 이야기의 매력으로 먼저 다가온 작가였는데 이제야 비로소 그 이야기의 아래에서 오스틴이 진정 새겨넣으려 했었던 손길들이 보이는 듯 하다. 단적으로 말해 엠마는 오스틴을 이해하는 데 있어 내게 하나의 전환점이 되어 주었다는 것이다. 고전이란 언제 어느 때 다시 보아도 늘 새로운 생각을 주기 때문에 고전이다 라고 하더니 그렇다면 엠마야 말로 거기에 적합할 듯 하다. 아무튼 엠마로 인해 이제 전혀 새롭게 만나볼 오스틴의 작품들이 벌써부터 마구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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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흐로 올 가을은 아무래도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의 가을이 될 것 같군요. 이미 뮤지컬이 그것도 신성우, 유준상, 엄기준 등 초호화캐스팅으로 공연중인데다가  좀 있으면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로 유명한 폴. W. S 앤더슨이 감독한 '삼총사'도 3D 영화로 나오고 말이죠. 예고편을 보아하니 일종의 '스팀 펑크' 쪽이던데 주인공들 보다 오히려 악역 배우들이 화려해서 관심이 갑니다. 무엇보다 저의 초유의 관심은 팜므파탈의 대명사 '밀레디'를 누가 맡았느냐인데 '레지던트 이블'로 감독과 인연이 깊은 밀라 요요비치가 맡았더군요. 그래서 관심이 더욱 급증되었습니다. 

 

  오우! 드레스 입은 밀라 요요비치도 멋지군요. 팜므파탈로서의 매력이 정말 물씬나는 캐스팅 입니다.

                                                               

  그 외, 그녀를 유혹해서 스파이로 만드는 버킹검 공작 역엔 올랜도 블룸이 리슐리외 추기경엔 '거친녀석들'로 아주 인상적인 악역 연기를 보여준 바 있는 크리스토퍼 왈츠가 맡았더군요. 거의 악역들의 포스가 삼총사를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악역 배우들의 연기가 어떤 앙상블을 만들어낼지 지켜보는 것도 이 영화에 대한 좋은 감상 포인트가 될 것 같습니다.(악역들이 화려해서 정작 주인공 역할을 누가 맡았는지는 관심 밖이 되네요. ㅡ ㅡ) 

 

   근데 왜 이렇게 갑자기 삼총사가 뮤지컬과 영화 양쪽으로 비슷한 시기에 상륙하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삼총사의 공습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원작인 뒤마의 '삼총사' 역시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제게는 쥘 베른 선집의 번역가로 더 유명하지만...) 김석희님의 새로운 완역본으로 올가을에 나오게 되었으니까요. 

 

 

 

 

   유년시절 절 가장 들뜨게 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던 소설 중의 하나가 바로 '삼총사' 였습니다. 소설 뿐만이 아니라 애니메이션까지 가세해서 더욱 더 삼총사의 매력에 헤어나올 수 없었죠. 그래서 당연히 이렇게 각종 컨텐츠로 삼총사가 마구 나오는 것은 저에겐 환영할만한 일입니다. 일단 저는 삼총사에 대한 '팬심'이 있으니까요.  저는 이미 뒤마의 탄생 200주년 기념으로 2002년에 민음사에서 나온 몬테크리스토 백작과 삼총사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만 삼총사의 새로운 완역본이라면, 그것도 쥘 베른 선집에서 신뢰감을 넣어준 김석희님의 번역이고 보면 소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 책이 저에게 왔습니다. 이렇게... 

  두둥! 외관이 2002년에 나온 하얀색 양장본 보다 더욱 근사해졌습니다. 

  이번엔 각도를 달리하여 모아서 찍어봅니다. 흐음, 확실히 전시효과는 뛰어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엔 2002년에 나온 민음사 판을 한번 봐 볼까요? 

 이게 2002년 뒤마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민음사에서 나온 판본입니다. 번역자는 이규현님으로 미셀 세르의 '헤르메스'와 미셀 푸코의 '성의 역사 1 - 앎의 의지'를 번역하신 분이죠. 불문학 전공자이시구요. 후기를 보면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생각하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했다고 합니다. 시공사 판은 프랑스 왕조의 문양을 사용한 반면, 민음사 판은 파블로 피카소의 '파이프와 꽃을 들고 있는 총사'를 표지에 사용했습니다. 민음사 판은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양장본으로 세권으로 분권되어 나왔습니다. 이번에 나온 시공사 판은 두 권 입니다. 가격은 당시 민음사 본이 권당 만원이었고 이번 시공사 판은 16,000원이니 한 2천원 정도 민음사 판이 더 저렴합니다. 하지만 2002년에 나온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시공사 판이 더 저렴하지 않나 생각되는군요. 내친김에 몬테크리스토 백작도 같이 한 번 찍어 올려 봅니다. 

  

  이렇게 같이 죽 놓고보면 민음사 판도 전시효과가 상당합니다. 자아, 이제 외관을 확인했으니 정작 2002년의 민음사 판과 지금 나온 시공사 판이 어떻게 다른가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LET'S FIGHT !! 

 

 

 먼저 아무래도 가장 관심이 가는 것이 번역일테니 두 판본의 번역을 살펴보겠습니다. 

 되도록 공정하게 하기 위하여 그냥 가장 첫 시작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프랑스 판의 원문은 이렇습니다.  아래는 같은 부분의 김석희님의 번역입니다. 

Il y a un an à peu près, qu'en faisant à la Bibliothèque royale des recherches pour mon histoire de Louis XIV, je tombai par hasard sur les Mémoires de M. d'Artagnan, imprimés — comme la plus grande partie des ouvrages de cette époque, où les auteurs tenaient à dire la vérité sans aller faire un tour plus ou moins long à la Bastille — à Amsterdam, chez Pierre Rouge. Le titre me séduisit: je les emportai chez moi, avec la permission de M. le conservateur; bien entendu, je les dévorai.

 

 

   1년쯤 전에 루이 14세의 전기를 쓰려고 왕립도서관에서 자료를 조사하다가 <다르타냥 씨의 회고록>이란 책을 우연히 발견했는데, 암스테르담에 있는 피에르 루주 서점에서 출간된 책이었다. 당시만 해도 진실을 말했다가는 감옥에 가는 때여서, 이런 불운을 피하고 싶은 저자들은 대부분 외국에서 저서를 펴냈다. 제목에 마음이 끌린 나는 도서관 사서의 허락을 받고 그 책을 집으로 가져와 한달음에 읽었다.

 

 같은 부분 이규현님의 번역입니다. 

 일 년 쯤 전에 나는 왕립도서관에서 루이 14세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 자료 조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다르타냥 씨의 회상'이란 책이 눈에 띄었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피에르 루주 출판사에서 나온 책으로, 당시에는 대부분의 책들이 이런 곳에서 출판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바스티유 감옥에 갇히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릎쓰고 진실을 이야기하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제목에 끌린 나는 집으로 책을 가져와 - 물론 도서관 사서의 허가를 받고 - 정신없이 읽어 내려갔다.

 

 번역 스타일이 확연히 두드러지는 것 같군요. 대체적으로 김석희님이 가독성을 고려한 의역 스타일을 이규현님은 되도록 원문에 충실한 직역 스타일을 보여주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가독성을 더 중시하기 때문에 일단은 김석희님의 번역이 더 마음에 드는군요. 

 

 하나 더 비교해 볼까요? 이번에는 가장 마지막 부분을 그러니까 어린 시절 절 가장 눈물짓게 만들었던 다르타냥과 삼총사가 헤어지는 부분을 비교해 보죠. 

 김석희님의 번역입니다. 

 아토스는 펜을 들고 사령장에 다르타냥의 이름을 적어서 그에게 돌려주었다. 

 "그럼 나에게는 친구가 없겠군요. 아! 이제 남은 것은 씁쓸한 추억뿐..." 

다르타냥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두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네는 아직 젊어." 아토스가 말했다. "자네의 씁쓸한 추억도 세월이 흐르면 달콤한 추억으로 바뀔 거야." 

 

 이번엔 같은 부분 이규현님의 번역입니다. 

 

그가 펜을 들었다. 사령장에 다르타냥의 이름을 써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럼 이제 나에게는 친구가 없는 거로군요." 젊은이가 말했다. "아! 이제 남은 것은 씁쓸한 추억뿐..." 

 그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볼을 따라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네는 아직 젊어. 젊고말고." 아토스가 대답했다. "자네의 씁쓸한 추억이 달콤한 추억으로 바뀔 시간은 충분하네!"

 

 어릴 때의 감흥이 아직도 남은 것인지 지금 읽어도 왠지 저려오네요. 아무튼 여기서도 번역 스타일은 확연히 차이나죠? 여러분은 어느 것이 더 마음에 드시나요? 

 번역 스타일도 그렇지만 또 다른 점에서 시공사 판과 민음사 판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이번 시공사 판에는 삽화가 실려 있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민음사 판에는 삽화가 전혀 실려있지 않습니다. 대신 앞부분에 따로 인물 소개 형식으로 삽화가 조금 실려 있습니다. 하지만 내용적인 부분과 관련해서 삽화가 없다는 것은 어린 시절에 삼총사를 보아온 저로서는 상당히 아쉬울 수 밖에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삽화 역시도 저에게 엄연한 추억의 대상이기 때문이죠. 거기다 삽화라는 것이 단순히 내용에 첨부되는 것이 아닌 그 내용을 전혀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함께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런 고전 클래식에서 삽화가 없는 것은 정말 아쉽기만 합니다. 그럼 여기서 시공사 판에 실린 삽화 하나를 올려보겠습니다. 

 

 삽화의 퀄리티가 상당합니다. 모리스 르루아르의 작품으로 알고보니 당시에 꽤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더군요. 

 

                                               

 여기에 또 하나 차이가 있는 것이 바로 '각주'입니다. 삼총사에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이해해야 할 필요도 있고 아무래도 낯선 지명이나 인명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각주가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데요. 민음사 판은 그걸 간단히 삽입한 반면 시공사 판은 책 말미에 따로 자세한 각주를 정리해 두었더군요. 이를테면, 민음사 판은 페이지 17에 나오는 도시 '라로셀'에 관하여 각주로 '대서양에 면한 항구도시로 신교도가 세력을 떨쳤던 곳으로 유명하다 - 옮긴이' 이렇게 처리한 반면 시공사 판은 맨 뒤에 따로이 이렇게 자세히 써 두었습니다. 

 

   저기 13 이 있는 각주가 바로 라로셀에 대한 것입니다. 앞의 13은 바로 그 것이 나와있는 페이지를 가리키는 숫자입니다. 다른 각주와는 달리 일일이 페이지 수를 명기해 놓았다는 점에서 출판사의 배려가 엿보이는 듯 합니다. 아무래도 말미에 나와있으면 일일이 찾기란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죠. 그런데 저렇게 페이지 수를 표기해 놓으면 그 수고는 많이 덜어질 것입니다. 각주의 내용이 분량상 길어서 맨 뒤로 따로이 정리할 수 밖에 없었던 형편상 그나마 독자의 수고를 줄여주려 배려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각주가 꽤 상세해서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덤으로 역자 후기와도 같은 작품 해설에 있어서도 차이가 보이더군요. 김석희님은 뒤마의 소개를 문학적 스타일로 풀어간 반면 이규현님은 '헤르메스' 같은 인문서를 번역하신 분 답게 논문식으로 풀어가셨더군요. 뒤마의 일대기에서는 김석희님이 훨씬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었고 삼총사의 전체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이규현님의 해설이 좋았습니다.(무엇보다 왜 다르타냥이 있는데도 제목이 굳이 삼총사였을까는 저도 의문이었는데 이규현님 해설 덕분으로 조금 수긍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뒤마에 관해서라면 그래도 김석희님 보다 부족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는데요. 일단 뒤마의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흑인 노예를 건드려 낳았다는 건 유명한 얘기입니다만 그런데 뒤마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인 후작의 이름을 쓰지 않았었죠. 그것에 대해서 이규현님은 단순히 아버지와의 불화로 사용하지 못했다고 한 반면 김석희님은 후작이 다시 다른 여자와 재혼을 결심하는 바람에 아들로서 부친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 않고자 스스로 포기했다고 보다 상세히 함으로써 그 인간적 고뇌까지 전해지도록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해주더군요. 

 

 이렇게 이번에 나온 시공사 판과 2002년에 나온 민음사 판을 비교해 보았는데요. 번역 스타일이나 삽화의 차용 그리고 각주의 처리 등에 있어서 두 판본은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판본이 더 마음에 드시나요? 아무튼 뒤마를 좋아하고 삼총사를 많이 즐겨온 저로서는 이렇게 삼총사로 풍성한 가을이 더욱 기대되지 않을 수 없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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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ek 2011-10-01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규현 님의 번역도 읽고 싶네요!
그래도 제 생애 최고의 삼총사 이야기는... 멍멍기사! :)

ICE-9 2011-10-02 00:14   좋아요 0 | URL
앗! 저랑 통하시는데요.
저도 그 애니를 정말 사랑합니다.^ ^

2011-10-01 1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02 0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1-10-01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뭐 이쯤되면 헤르메스님 시공사 밀어주시는 게 역력한데요?ㅎ
표지 장정도 시공사가 훨씬 좋아 보입니다.
글치 않아도 문득 이 책이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그렇다고 당장 읽겠다는 건
아니고.ㅋ) 이렇게 꼼꼼하게 비교를 해 주시니 감읍할 다름입니다.
잘 보고 갑니다.^^

ICE-9 2011-10-02 00:25   좋아요 0 | URL
아, 제 개인적인 취향이 너무 드러났나요? ^ ^;
아무래도 제가 두 판본을 다 가지고 있다보니 비교를 한 번 해보는 것도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오늘 들어와보고 이 페이퍼가 이리도 관심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고도 있습니다.
뭔가 도움이 되셨다니 제가 오히려 더 기쁘네요^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adf657 2011-10-01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공사에서 삼총사 속편 20년후와 브라즈론 자작(철가면)도 내주면 좋겠습니다.
김석희 선생님이 나마지 속편도 변역해주실지^^
저는 초등학생일부터 삼총사 1부만 지겹도록 읽어왔습니다. 이제 삼총사 속편도 완역본으로 정말 보고 싶습니다.

ICE-9 2011-10-02 00:27   좋아요 0 | URL
저도 정말 간절히 바랍니다.
조르주 페렉의 'W 또는 유년의 기억'을 읽어보니 거기에도 삼총사 속편에 대한 얘기들이 나오더군요. 그것도 구구절절. 삼총사가 어떻게 최후를 맞는지도 페렉이 써 놓았던데 그것을 읽으며 속편을 아직도 읽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제발 이번에 삼총사가 제대로 성공해서 꼭 속편도 완역본으로 만나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염원!

노이에자이트 2011-10-01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마 부자는 둘 다 유명한 소설가죠.제게 뒤마 페르 전기가 있어요.뒤마 피스가 사생아여서 아버지를 원망했다고 하네요.

ICE-9 2011-10-02 00:31   좋아요 0 | URL
아, 뒤마의 아버지 역시 소설가였군요. 김석희님의 해설에는 아주 능력있는 군인으로만 나와있어서 몰랐던 사실입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노이에자이트 2011-10-02 21:26   좋아요 0 | URL
하하하...3대를 파악하려니 꼬였네요.소설가 뒤마 부자란 <삼총사>와<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쓴 뒤마와 <춘희>를 쓴 그의 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이를 구별하기 위해서 전자를 뒤마 페르, 후자를 뒤마 피스라고 합니다.이름이 똑같거든요.

헤르메스 님이 말하는 능력있는 군인은 뒤마 페르의 아버지를 말하는데 이 사람은 뒤마 페르가 아주 어렸을 때 사망합니다.작가는 아니었어요.뒤마 페르는 이야기솜씨가 좋은 어머니 영향으로 작가의 꿈을 키웠다고 하네요.

정리하면 뒤마 페르의 아버지는 군인이고 아들은 작가입니다.이 뒤마 페르의 아들이 사생아라는 것이죠.

저는 김석희 씨 번역본은 없는데 그 책의 해설은 <춘희>의 작가 뒤마 피스 이야기가 있는지 확인해서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ICE-9 2011-10-02 23:38   좋아요 0 | URL
아, 그게 뒤마와 그 아들 얘기였군요. 저는 뒤마의 아버지 얘기로 오해를^ ^;
김석희님의 해설에도 '춘희'의 뒤마 피스가 바로 뒤마의 사생아중 하나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뒤마는 원래 배우자, 여배우인 이다 페리에 외에도 다른 여인들과 교제하여 네 명의 사생아를 낳았다고 하는데 양재사였던 마리-로르-카트린 라베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바로 춘희를 쓴 뒤마 피스라고 하는군요. 이름은 아버지를 따랐고 때문에 같은 소설가와 극작가의 길을 걸은 그들을 구별하기 위해 알렉상드르 뒤마 페르(아버지)와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아들)로 불리어졌다고 합니다. 이 정도로만 나와있네요^ ^

노이에자이트 2011-10-03 17:37   좋아요 0 | URL
뒤마 피스에 대해선 그 정도 서술이 대부분인 것 같아요.제가 읽은 뒤마 전기는 이 부자 간 이야기가 상당히 자세해요.뒤마 페르와 빅토르 위고,오노레 드 발자크 간의 일화도 재밌는 게 많네요.하지만 45년 전 것이고 그 뒤로는 안 나오는 책이라 시중에서 구할 순 없죠.

노다웃 2011-10-06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의 비교 잘 읽었습니다~
시공사 삼총사 보자마자 확 들어왔는데 꼼꼼한 비교까지!
양장본이 너무 예뻐서 조만간 데려오려고요. 저도 어렸을 적 달타냥~무지 좋아했었거든요.
참 영화도 기대됩니다. 밀라 요요비치가 나오니깐요 후후훗


ICE-9 2011-10-07 22:49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셨다니 저도 기쁘네요.
달타냥을 좋아하신다면 이번의 삼총사로 또 한번 즐거운 추억에 빠져드실 수 있으실듯 합니다.
저 역시 밀라 요요비치 때문에 영화를 무척 기다리고 있답니다.^ ^

뽀로롱 2011-10-08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 정말 알찬 정보 감사드려요 ^^
삼총사가 이번에 물량공세를 하길래 관심이 있었는데 콕콕 찝어주셔서 정말 도움이 됐어요.
저는 읽기 좋고 표지도 이쁜녀석이 끌리네요 ㅎㅎㅎ 감사합니다. ^^*

ICE-9 2011-10-10 23:56   좋아요 0 | URL
삼총사의 팬으로서 당연한거죠. 좋은말씀 감사합니다.^ ^

콜록콜록 2011-10-13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정보 감사드려요.
민음사 판 삼총사가 반값할인을 하기에 좋은 기회다 싶어 구매하려다 헤르메스님이 포스트하신 걸 보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전 시공사 판 번역이 마음에 드네요. 그래서 비싸지만 시공사에서 나온 삼총사로 질렀습니다. ^^
민음사에서도 얼마전 완역본이 새로 나왔는데 번역하신 분이 같으니 아마도 번역의 느낌은 비슷하겠지요...게다가 표지가 안습이에요...--;;
아무튼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려요~ m(__)m

ICE-9 2011-10-19 01:13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셨다니 제가 오히려 기쁘네요. 즐거운 독서되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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