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살인 사건 매그레 시리즈 7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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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덜란드, 그 곳은.... 

 

  나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8년 전에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 모든 장소에서 멀리 벗어나 이곳(네덜란드)에 오기로 결심했다. (...) 여기서 나는 남의 일에 호기심을 가지기 보다는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아주 활동적인 위대한 국민들과 더불어 대도시의 편리함을 만끽하면서도 가장 먼 황야(사막)에 있는 것 처럼 유유자적하는 은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 데카르트, 방법서설 (p. 182 ~ 83) 

 

  데카르트는 암스테레담에서 오히려 '가장 먼 황야'를 느낀다. 왜냐하면 더없이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곳이지만 거기에는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완벽한 은둔자요 프랑스인도 네덜란드인도 아닌,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다. 거기서 그는 '코기토 에르고 섬'을 외치는데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그렇게 그 모든 것으로 부터 이탈한 스스로의 존재가 되어버린 그가 정말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데카르트는 존재의 '무화(無化,Nullify)를 경험하는 가운데 존재의 확실성을 추구하려 했던 것이다. 

  네덜란드를 그러한 존재를 무화시키는 광막한 황야로 바라보았던 이가 비단 데카르트 뿐만은 아니다. 알베르 까뮈 역시도 비슷한 감흥을 느꼈다. 그는 운하들이 담쟁이 덩쿨 처럼 뒤얽힌 암스테레담을 바라보며 '지옥도'를 연상했고 거기서 '전락'이라는 소설을 통해 상상적 자살을 감행했었다. 하지만 그 리스트는 까뮈에서 그치지 않는다. 까뮈 자신 심농을 읽지 않았다면 이방인을 전혀 다르게 썼을 거라며 그 영향력을 인정한 바 있었던 심농 역시 그 리스트에 들어가야 한다. 바로 '네덜란드 살인사건'에서 우리는 데카르트가 했던 고백과 비슷한 것을 매그레 자신의 입을 통해서 듣게되는 것이다. 

  한데 지금 그는 네덜란드의 그림엽서와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북유럽 특징이 농후한 광경과 맞딱드리고 있는 것이다. (p. 9) 

  그 북유럽적 특징이란 끝간데 없이 드넓게 펼쳐져 있는 히스 들판을 말한다. 게다가 공간적 배경이 되는 델프제일은 파리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곳이다. 그야말로 데카르트의 가장 먼 황야와 비슷한 가장 멀리있는 광막한 초원인 것이다. 그는 이곳으로 '생폴리앵에 지다' 처럼 수동적으로 이끌려 온다. 아는 이 하나 없는 전혀 낯선 곳에 유일한 프랑스인으로(매그레가 온 것은 뒤클로라는 프랑스 교수 때문이었지만 그는 사실은 스위스 태생으로 프랑스에 귀화한 자였다. 그러니 정말 프랑스인은 매그레가 유일한 것이다.). 거기다 매그레는 네덜란드어를 전혀 모른다. 그러니 당연히 고립될 수 밖에 없다. 거기서 그는 외딴 섬과도 같은 존재다. 아니 '얼룩'이다. 언제든 사회에 균열을 일으키고 전복시켜 버릴 수 있는 '수상한 이방인'이다. 사람들은 경계하고 기피한다. 때로는 자존심 강한 유럽인들 답게 아예 무시한다. 그렇게 매그레는 자기 존재의 '무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단적으로 오스팅을 따라 들어간 카페에서 그 '무화'가 나타난다. 

  이어서 전개된 활발한 대화는 네덜란드어 특유의 거칠고 요란한 발음들 때문에 흡사 말다툼을 방불케 했고, 그러다보니 매그레가 호주머니에서 잔돈을 꺼내 계산을 한 뒤 판 하설트 호텔로 자러 가는 것엔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p.87)

  그렇게 그는 유령이 된다. 심농이 이렇게 매그레에게 '존재의 무화'를 가져다 주는 것은 데카르트가 했던 것과 똑같은 것을 매그레에게 주고자 함이다. 즉 존재를 유령처럼 희미하게 만들어 오히려 매그레로 하여금 더욱 더 자기 존재에 숙고하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런데 왜 심농은 하필 시즌2의 세번째 작품인 '네덜란드 살인사건'에 와서 그런 것을 매그레에게 주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교차로의 밤'에서 매그레가 느낀 유혹 때문인 것이다. 매그레는 전면적으로 다가오는 '엘세(Else)'에게 유혹을 느낀다. 그것은 이름에 감추어진 상징 그대로 여성성 전체가 전해오는 유혹이기도 했다. 바로 거기서 느낀 '유혹' 때문에 심농은 매그레에게 '존재의 무화'를 경험토록 하는 것이다. 과연 그 유혹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깊이 숙고하도록 만들기 위해. 

  때문에 매그레가 네덜란드에 와서 처음 만나는 이가 바로 포핑아를 유혹했던 존재인 '리번스'가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유혹이 어쨌길래 심농은 매그레에게 '무화'까지 경험하게 하면서 매달리게 하는 것일까? '생폴리앵에 지다'를 생각하면 심농이 왜 이러는지 이해가 된다. '생폴리앵에 지다'와 '네덜란드 살인사건'은 시즌의 세번째라는 것과 공간적 배경이 모두 프랑스가 아니라는 공통점 말고도 매그레가 지극히 수동적으로 거기로 인도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단적으로 매그레는 '네덜란드 살인사건'에서 이렇게 말한다. 

난 지금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건에 휘말린 상태요! 프랑스인이 한 명 의심을 받고 있다기에 사건을 해결하라고 나를 보낸 거지....(p.216)

  매그레 시리즈에서 '수동성'은 주로 죄에 대한 인식과 관계가 있다. 즉 매그레가 수동적으로 한 공간으로 인도된다는 것은 일종의 고해성사와도 같은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카톨릭 세계관에 그 영혼이 깊이 침윤되어버린 자로서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인지도 모른다. '죄'에 대한 생각들이 뼛 속 깊이 새겨졌기에 스스로 그 '죄'를 인식만해도 마치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처럼 참회에의 욕구로 이끌리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렇게 자신이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지극히 수동적인 것인 것이다. 그러니 '네델란드 살인사건'에서 또 다시 매그레가 수동적으로 인도된다는 건 심농이 그 유혹을 '죄'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때문에 심농이 매그레 자신을 온전히 숙고할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그 '죄'에 대해 숙고할 시간을 갖게 하는 것이고 이미 '죄'라고 인지된 이상 그 숙고는 바로 스스로를 '정화'하려는 노력이 된다. 모든 고해성사가 그렇듯이... 

  하지만 여기서 '죄'는 단순히 기독교적 의미의 그런 '죄'는 아니다. 좀 더 본질적으로 존재의 위협이 되는 것. 그러니까 꾸준히 유지해 온 존재에 하나의 얼룩을 만들어 교란시키는 것. 그렇게 궤도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죄'인 것이다. 정확히 오디세우스를 홀려서 배에게서 뛰쳐나오게 만드려는 세이렌의 노래소리인 것이다. 즉, 심농은 '생폴리앵에 지다'에서도 그랬듯이 '죄'의 카톨릭적 의미를 교묘하게 비틀어 자신의 일상성에 위협이 되는 것을 '죄'라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보인 이 '수동성'은 일종의 자기 기만적 정당화인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일상을 견고히 지키고 싶은 그가 위협이 되는 것에 그렇게 '죄'라는 레떼르를 붙임으로써 그 배척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러니 '생폴리엥에 지다'에서 심농이 했던 참회의 목적이 사실은 일상의 복권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 살인사건'에서도 역시 그 유혹에 관한 숙고는 본디 일상의 재탈환이 목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이미 정답을 가지고 있다. 문제되는 건 오로지 그 정답을 뒷받침 해 줄 근거와 증거 뿐인 것이다. 그래서 '포핑아' 살인 사건에 있어서 매그레가 진정 원하는 것은 누가 그를 죽였는가가 아니다. 그가 정말 알고자 하는 것은 그가 '왜' 죽었는가이다. 즉 여기서 '포핑아'는 매그레에게 일종의 반면교사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모델이다. 매그레가 유혹에 굴복당했을 경우 어떤 운명을 걷게 될 것인지 알려주는 이정표인 것이다. 따라서 매그레의 수사의 진정한 목적은 세이렌의 유혹으로 부터 자신을 일상에다 단단히 결박시켜줄 그 '밧줄'을 찾아내는 것이다. 

 

  과연 매그레는 그 밧줄을 찾아낼 수 있을까? 

  - 오디세우스를 빌어 보여주는 '서로 상반된 모순으로 중첩된 삶'이라는 모습 

    

  매그레의 목적은 유혹을 제거하고 다시 안전하게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바람은 정작 시도하자마자 난관에 봉착한다. 물론 그것은 그 근거를 찾기가 어려워서가 아니다. 본질적으로 그가 스스로 그 유혹에 노출되고 싶은 은밀한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심농은 왜 매그레에게 리번스를 가장 먼저 만나게 했던 것인가? 매그레의 진정한 목적에 따르자면 그는 곧바로 포핑아의 집으로 인도되었어야 한다. 그곳은 말하자면 페넬로페(포핑아의 부인은 뒤클로의 묘사에 따르면 페넬로페와 똑같다.)가 있는 오디세우스의 고향 '이타케'이다. 머무르는 곳. 굳건한 일상이다. 하지만 매그레는 거기로 인도되지 않는다. 리번스를 만나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뒤이어 뒤클로를 만나는 것이다. 왜 심농은 매그레를 곧장 거기로 인도하지 않는가? 왜 리번스와 뒤클로를 만나고 난 뒤에 인도시키는 것인가? 이것은 마치 오디세우스가 이타케로 돌아와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오디세우스 역시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깥에서 저간의 사정을 듣는 것이다. 그렇게 매그레는 오디세우스의 역할을 이어받는데, 문제는 그가 거치는 인물들이 모두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리번스는 끊임없이 그 곳을 벗어나려 애쓰는 여자이고 뒤클로는 자신의 범죄 이론을 강연하기 위하여 세계 곳곳을 떠도는 자이다(그는 하물며 스위스 태생이지만 프랑스로 귀화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들은 일상을 떠나려하거나 머물 수 없는 자들이다. 그렇게 매그레에게 들려오는 세이렌의 유혹을 상징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매그레는 그들을 만나고나서야 포핑아의 집으로 인도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들이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유념해서 볼 것은 심농이 그들을 묘사하는 방식이다. 바로 여기에 왜 매그레가 오디세우스 처럼 스스로 귀를 열고 세이렌의 노래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이유가 드러난다. 당신이 유념해서 읽었다면 매그레가 리번스를 처음 만났을 당시 암소가 송아지를 출산하고 있었음을 기억할 것이다. 리번스는 늘 떠나려 하는 여자다. 그런데 출산은 여성을 한 곳에 머무르게 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지 않는가? 즉 여기에는 상반된 모순이 하나로 접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뒤이어 만나는 뒤클로 역시도 마찬가지다. 뒤클로는 세계 곳곳을 떠돌아 다니지만 사실은 포핑아 부인에 대한 묘사에서 드러나듯 내부적으로는 강하게 머무르고 싶어하는 자이다. 그 역시 모순된 삶을 살고 있으며 심농은 그것을 강조하듯 호텔(일시적으로 머무는 장소)에서 경찰(일상을 항구적으로 유지하는 대표적인 직업)의 감시를 받는 뒤클로를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왜 매그레가 스스로 유혹에 노출시키는지 그 이유가 드러난다. 심농이 리번스와 뒤클로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바로 우리네 삶이 그러한 상반된 모순이 중첩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것이 옳은지 쉬이 결정을 내릴 수 없고 따라서 유혹에 늘 귀를 기울이게 된다는 것이다. 심농은 이러한 상반된 모순이 중첩된 삶의 모습을 작품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보여주는데 그건 '포핑아'가 살고 있는 집의 위치에서도 드러난다. '포핑아'의 집 위치를 한 번 그려보자면 이렇다. 

   

 

 

  여기서 포핑아의 집은 바로 운하에 접해 있다. 그런데 그 운하는 거대한 바다로 이어져 있다. 포핑아는 한 때 항해사였고 가장이 되어 일상에 머무른 지금도 늘 바다로 나가기를 꿈꾸고 있는 자였다. 즉 여기서 운하는 바로 그에게 '유혹'인 것이다. 출근하거나 퇴근하거나 그는 늘 운하와 나란히 놓인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는데 그렇게 그는 매일 그 유혹과 대면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게다가 바로 곁에 자신에게 늘 같이 도망가자고 조르는 리번스의 집 마저 있다. 그렇게 그 역시 늘 세이렌의 노래소리를 듣는 자였던 것이다. 심농은 그러니까 잘 알고 있다. 삶 이란게 세이렌들의 섬을 지나는 오디세우스의 배와 같다는 것을. 서로 상반된 모순으로 중첩된 이런 삶에서 우리는 늘 진정한 진실을 확인하게 되기를 염원할 수 밖에 없고 그러니 그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보인다면 우리의 눈과 귀는 그것에로 끌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디세우스도 부하들의 귀는 모두 밀납으로 막았지만 자신만은 위험을 무릎쓰고서라도 그 노래를 들으려 했던 것이 아니겠냐고 심농은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매그레는 자신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뚜렷이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포핑아의 집으로 가는 것은 주저하는 것이다. 

 

  하지만 심농은 또 우려한다. 늘 그 유혹에 빠져있을 수 없다. 어차피 단단히 하나로 결부된 모순들은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내버려두면 늘 그 사이에서 방황만 할 뿐 인생은 조금도 진전하지 않는다. 심농은 그것을 알고 있다. 유혹에 굴복하든 극복하든 언젠가는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심농은 삶의 지속을 위하여 '결단'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이를 위해서 심농은 매그레 시리즈 중 그 어느 작품 보다 '네덜란드 살인사건'을 고전 미스터리 공식에 충실하도록 만든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심농은 두 가지 전략을 쓰는 것이다. 늘 상반된 모순을 안고 사는 삶이라는 것을 강조하게 위해 그는 세이렌과 이타케에 있어서의 오디세우스를 차용하고 모순의 서투른 봉합이라고 해도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고전 미스터리 공식을 차용하는 것이다. 

 

  고전 미스터리 공식을 통해 강조되는 결단

 

  '네덜란드 살인사건'은 그 어떤 시리즈의 다른 작품 보다 고전 미스터리 공식에 충실하다. 도면의 등장, 알리바이 공작, 용의자 감추기 그리고 마지막 범인 찾기 연출(관련 용의자 모두를 모아놓고 탐정이 범인을 밝히는 공식)까지 당신이 셜록 홈스에게 기대했던 것을 여기서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도면이 가능한 것이다.  사실 이 집의 배치는 사건 정황과 용의자가 왜 범죄가 불가능했는지 이해하는데 있어 정말 필수적인데 정작 책에는 실리지 않아서 아쉬웠다. 그래서 그려본 것. 이러한 도면이 가능할 정도로 '네덜란드 살인사건'는 고전 미스터리 공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과연 심농이 강조하고자 하는 결단과 그것을 위해 차용하는 고전적 미스터리 공식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이미 글이 너무 길어졌으므로 세세하게 말하기 보다 가장 결정적인, 그러니까 관련 용의자 모두를 모아 놓고 범인을 밝히는 마지막 장면만을 들어 설명하려 한다. 이건 고전 미스터리에 있어서 하나의 전형적인 공식이라 할 만한데 애초에 왜 이러한 공식이 자리잡았는지를 설명하면 심농이 왜 결단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고전 미스터리 공식을 차용했는가가 설명될 것으로 믿는다. 그렇다면 왜 고전 미스터리는 하필이면 그러한 마지막 장면 연출을 하나의 공식으로 정립했는가? 그것은 바로 부르조아지의 욕망과 관련이 있다. 애초에 미스터리 장르가 왜 자리잡았는가? 그것은 근대에 이르러 더욱 더 격변하는 정세와 통신과 교통의 발달로 한 개인이 인식하고 이해하기에는 그 범위를 넘어서버린 세상에 대해 불안해진 부르조아들이 상상적으로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말하자면 고전 미스터리는 애초에 부르조아들에게 진정제 역할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건 해결도 경찰이 아니라 사립탐정이라는 독특한 존재가 맡게 된 것이다. 부르조아들에게 국가란 애증의 대상이어서 자신의 권리와 재산에 지나친 간섭을 싫어한다. 이른바 야경국가란 부르조아들의 꿈인데 때문에 그들의 불안을 상상적으로 해소시켜줄 존재로 경찰은 아무래도 미덥지 못한 존재였던 것이다. 뭣보다 프랑스의 '비독' 처럼 미천한 범죄자 출신들이 경찰의 전신이었기 때문에 신분적으로 열악한 그들에게 그들의 치부를 드러낼 사건의 해결을 맡긴다는 것은 자존심상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반 다인의 파일로 반스 처럼 귀족이거나 최소한 신사 계급 출신이 탐정을 맡게 된 것이다. 즉 고전 미스터리의 공식들은 그러니까 철저하게 부르조아의 욕망을 실현하는 쪽으로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건 마지막 장면의 연출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여기에 은밀히 끼어드는 부르조아의 욕망이 바로 심농이 강조하고자 하는 '결단'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은 왜 그렇게 연출되는 것인가?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범죄가 일어난 그 시간을 복원한다는 것이다. 탐정은 마지막에 모든 관련자들을 모아놓고 일어난 사건의 전모를 하나하나 밝힌다. 그렇게 과거의 사건을 그대로 재현해 내는 것이다. 왜 이렇게 하는가? 이것은 단순하게 사건의 경위와 해결을 드러내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보다 본질적인 목적은 바로 그 시간을 다시 가져오는 것이다.  왜 그 시간을 다시 가져오는 것인가?  그것은 과거의 시간이 범죄가 발생한, 그래서 완벽해야할 부르조아의 질서에 흠집을 가져온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탐정이 마지막에 가서 그 사건을 하나하나 세밀히 복원하고 이윽고 범죄자릋 찾아내어 해결하는 것은 사건으로 인해 파탄나버린 부르조아적 질서를 다시 회복하고 궁극적으로는 아예 그 사건이 없었던 것 처럼 만들어 부르조아의 질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그러니까 마지막 장면 연출은 부르조아들의 욕망(자신들이 속한 질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앞으로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믿음)을 상상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거기엔 아무런 실체적 근거가 없다. 탐정의 해결이란 존 딕슨 카가 '화형법정'에서 잘 보여준 것 처럼 '수사'에 불과한 것이다. 

  '진리란 수사에 불과하다.'란 말이 미스터리 장르만큼 더 잘 어울리는 장르도 없다. 그 무엇보다도 피에르 바야르가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 대한 그의 해석은 아가사 크리스티보다 더 설득적이다. '해결이 하나의 수사에 불과하다'의 궁극적인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탐정이 행한 해결이 그 순간에 내린 결단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그는 그 순간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심농이 고전 미스터리 공식을 '네델란드 살인사건'에 차용한 궁극적 원인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매그레가 해결해 가는 마지막 장면의 연출이 흥미롭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매그레는 결정적인 해결이 순간까지 머뭇거리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니까 그는 갈등하는 것이다. 이런 진실을 밝혀도 좋을까? 때로는 등장인물에게 묻기도 한다. 사람들은 반대한다. 아무도 매그레의 해결을 환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밝힌 것을 조용한 사회에 큰 돌덩이를 던졌다고 나무라는 것이다. 그는 왜 해결을 했던 것일까?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해결을 왜 감행해야 했던 것일까? 이것은 그동안 매그레가 보여준 모습과 너무 다르지 않는가?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때로 필요하다면 법적인 정의를 가볍게 무시할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매그레이기에 이번 처럼 모두가 기피한다면 그들의 삶을 위해 사실은 눈감아주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과거의 그 자신을 깡그리 부정하듯 감행한 것이다. 그럼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그건 바로 매그레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는 외에 다른 대답이 여기서 과연 가능할까? 그렇다. 매그레는 바로 자신을 위해 그 무모한 해결을 감행한 것이다. 포핑아는 그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포핑아 처럼 매그레 역시도 유혹에 휘둘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포핑아는 결국 아무 선택도 하지 못한 채 유혹에 흔들리기만 하다가 비극적 최후를 맞고 말았다. 그러니까 매그레는 포핑아를 일종의 스스로에게 반면교사로 삼고자 해결을 감행한 것이다. 그렇게 유혹에 흔들렸던 포핑아를 비난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스스로에게 경고하고자 모두가 반대하는 해결을 해버린 것이었다. 즉, 그는 결단한 것이다. 유혹을 끊어내고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물론 이것은 잠정적이고 순간적이다. 심농은 현명하게도 여기에 아무런 이성적 근거를 달지 않는다. 당연하다. 인생은 수많은 모순이 중첩된 것이라 정말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다만 그 때 그 때의 결단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심농은 결정적으로 포핑아의 배신이 밝혀지는 과정을 우연히 찾아든 등대 불빛에 의해 노출되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뿐만 아니라 대부분 결정적인 장면들은 우연히 보게 된 시각에 의해 잡혀진다. 등대 불빛, 이층집에서 바라보는 것 등등 이렇게 '우연성으로 포착되는 결정성'이야말로 바로 심농이 말하고 싶은 결단의 본질임을 그것들은 잘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네덜란드 살인사건'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간단하게 그려본 것. 

 

  '네덜란드 살인사건'은 보기 보다 단순하지 않다. 거기에는 심농이 생각하는 삶의 진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은밀히 깃들어 있다. 시즌 2의 후반에서 이렇게 유혹이 강조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거꾸로 우리 인생이 갇혀 있는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닐까 한다. 유혹은 늘 바깥으로 인도하는 존재이니까 말이다. '네덜란드 살인사건'은 그 '갇혀짐'이 바로 우리 자신의 결단임을 은밀히 말한다. 그런에 왜 우리는 스스로 갇혀지는 것을 선택한 것일까? 아마도 그 이유는 다음 작품 '선원의 약속'에서 고찰될 것이다. 

 

                                                 -  이타케게 갇힌 오디세우스를 떠올리며 연출해 본 것.



 
 
크라이슬러 2011-08-24 06:02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심농이, 아니 매그레가 살아있다면(살아있군요..), 악수라도 청하지 않았을까 싶은 서평입니다.

헤르메스 2011-08-24 23:20   URL
감사합니다.^ ^

마녀고양이 2011-08-31 11:39   댓글달기 | URL
저도 애지간히 추리나 스릴러에 속하는 장르 소설을 좋아하는데
이런 리뷰도 가능하군요....... 감탄하고 돌아갑니다.

헤르메스님 즐거운 날 되셔요.

헤르메스 2011-08-31 21:55   URL
앗! 저의 서재에 들려주셨군요.
아픈 것은 잘 나으셨나 모르겠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교차로의 밤 매그레 시리즈 6
조르주 심농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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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권이나 되는 매그레 시리즈를 차례로 보았더니 저절로 문리라도 트인 것일까? 

  문득 뭔가 규칙 같은 것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뭐, 말하고 보면 사실 별거 아닌데 그러니까 다음의 작품은 바로 이전 작품의 일종의 변주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마치 얼 스탠리 가드너의 페리 메이슨 시리즈와도 비슷하다. 물론 페리 메이슨 시리즈 역시도 변주란 뜻은 아니고 그 시리즈는 언제나 한 작품의 결말에 다음 작품의 시작을 삽입하는데 그렇게 두 작품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심농의 매그레도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연속적인 두 작품은 그냥 연속으로 그치지 않고 변주를 하면서 서로를 보완한다는 점이 흥미로운데, 

    

    이를테면 매그레의 연속된 두 작품은 에셔의 이 그림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데뷔작 수상한 라트비아인에서 이루어졌던 범죄는 다시 바로 그 뒤의 작품 '갈레씨 홀로 죽다'에서 주요한 테마로 등장하고(스포일러상 이렇게만 언급한다.) 세번째 '생폴리앵에 지다'에서 피해자로 다루어졌던 삶은 그 다음 작품 '라 프로비당스호의 마부'에서는 가해자의 삶으로 다루어진다. 마찬가지로 다섯번째 작품 '누런 개'에서 변하지 않는 사랑의 형태는 다음 작품 '교차로의 밤'에서는 더이상 믿지 못할 무언가로 그려진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이렇게 심농의 매그레는 연속된 두 작품의 변주를 보여주는데 어쩐지 그 모습이 마치 사건의 양 면을 모두 아울러 고찰해 보려는 태도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혹시 심농이 나름 훗설이라도 읽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심농이 보여주는 그 모습이 훗설이 말했던 현상학적 환원 태도와도 닮아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정해진 신체가 있는 이상 인간은 언제나 대상의 한 쪽 면 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것은 궁극적 한계다. 그 사물의 뒤쪽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신체에 갇혀있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지구에서 영원히 달의 뒤쪽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한계지어진 객관 세계를 마치 진정한 객관 세계로 알고 살아간다. 사실은 신체적 제약으로 단편 밖에는 알 수 없는 세계를 전부 아는 것 처럼 착각하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훗설은 그러한 착각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그 착각을 버리기 위해서 요구되어지는 것이 지금까지 인식한 모든 것의 백지화(에포크). 즉 현상학적 환원이다. 이는 바로 내가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여기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뒤로 가서도 보아야 한다는, 그렇게 되기까지는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앎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가변적인 앎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인간이 알 수 있는 진리란 늘 궁극적인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겸손이 바로 현상학적 환원의 태도이다. 심농의 매그레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다음의 변주에서 이전에 해왔던 것은 전혀 고려에 넣지 않으면서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 아무튼 당신이 '누런 개'를 읽고 바로 이 작품 '교차로의 밤'을 읽는다면 이러한 심농의 면모가 더욱 더 잘 드러나 있음을 눈치챌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교차로'라는 제목 자체에서 드러나지만 내내 소설에서 묘사하고 있는 '사물이 보이는 그대로만은 아님'에서도 잘 드러난다. 무엇보다 소설에 나타난 버나드 쇼의 '피그마리온'과 완전히 반전된 형태는 이러한 심농의 현상학적 환원 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또 하나 언급할 것은 이 소설에 유독 전면으로 나오고 있는 저널리스트로서의 심농이다. 

  이 소설은 사건이 복잡하고 용의자도 많은데다 사건 전개가 쉴 사이 없고 유달리 액션도 많이 나오기 때문에(사실 '누런개'도 비슷하니 시즌2의 전형적 특성이라 보아도 무방하겠다.) 저번과 같은 차분한 전개 속에 드리워졌던 감상적 필치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묘사에 정확히 사건의 핵심만 짚어 풀어내는 저널리스트적 묘사가 한껏 드러나있다. 아마도 매그레 시리즈 중에서 지금까지 이만큼 심농의 저널리스트로적 면모가 드러났던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교차로의 밤'은 이전 작 '누런 개'와 비교하자면 보다 공간적으로 확장되고 묘사되는 계층은 더욱 더 다양해졌다고 할 수 있다

  '누런 개'가 이른바 프랑스의 엘리트 집단을 다루고 있다면 여기서는 전 프랑스의 계급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심농은 1930년대 초반의 점증하는 계급적 갈등 앞에 서 있는 당시 프랑스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을 다 읽고 분위기를 짐작해보면 소설 속 상황이 마치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날 당시의 프랑스와 어쩐지 비슷하구나 하는 느낌을 가지게 되는데 그만큼 심농 역시도 당시 프랑스 사회를 덮쳐오던 어떤 파국의 전조를 느끼고 있었던 것은 아닐지 생각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앞서 말했던 피그마리온의 반전된 형태는 그가 단정적으로 "계몽주의는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더욱 그렇다. 

  "자아, 이제 서로가 꿈꾸고 있던 화해의 환상은 모조리 깨어졌다. 그렇다면 이제 어떡할 것인가? 폐허의 잔재를 보면서 씁쓸히 연민을 곱씹을 것인가? 아니면 '그래도' 하면서 깨어진 환상에 마냥 억지로 매달릴 것인가?" 마치 심농은 '교차로의 밤'을 통해 이렇게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는 듯 한데, 정작 심농 자신은 그 어느 것 하나도 선택해 보여주지 않는다. 매그레는 여전히 교차로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다. 사방으로 열려진 그 어느 길이든 그는 갈수가 있지만 방향을 정할 수 없는 난처함이 마치 그 발을 대지에다 그대로 못박아 버린 듯이... 



 
 
 
누런개 매그레 시리즈 5
조르주 심농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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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런 개'는 일종의 단절이고 그렇기에 새로운 시작이라 할 만합니다. 

   (보다 자세한 것은 이 페이퍼를 참조 http://blog.aladin.co.kr/748481184/4879544)

   뭣보다 여기에서는 심농이 천착해 왔던 '타인의 삶'이 한 개인에서 한 사회 전체로 보다 넓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확장 속에서 심농은 이제 그 사회 전체를 불안과 공포로 몰고가는 것을 더 구체적으로 포착해내려 합니다. 이전의 네 작품에서는 과거의 상처에서 환기되어 막연한 불안감으로만 남아있던 것이 '누런 개'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공포로 나타나고 결국엔 그것이 쓰고 있었던 가면 마저 벗겨집니다. 

  여러면에서 심농의 '누런 개'는 조지 오웰의 '숨쉬러 나가다'를 연상시킵니다. 쓰여진 시기는 비록 누런 개는 32년 숨쉬러 나가다는 39년으로 7년이라는 시차가 있지만 둘 다 뭔가 변하고 있는 시대적 공기를 포착하고 있다는 점과 그것을 하나의 범죄로 상징화 시켜서 드러낸다는 점에서 비슷합니다.(심농의 '누런 개'에서는 '누런 개'로 오웰의 소설에서는 그 변화에 대한 불안감이 사체로 나타난 한 여성의 잘려진 다리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범죄로 상징되어 나타났기 때문인지 '누런 개'는 매그레 시리즈중(물론 제가 다 읽어본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지금까지 읽어본 것만 가지고 하는 말입니다만) 가장 전통적인 의미의 추리소설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Who done it? 을 파헤치는 '퍼즐러'식 추리소설 말이죠. 그렇게 '누런 개'는 범인 찾아내기를 거대한 줄기로 해서 교묘한 알리바이 공작이라든지 반전과 반전 끝에 밝혀지는 범죄자의 의외성이라든지 아무튼 우리가 전형적인 추리소설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들을 빠짐없이 맛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심농이 갑자기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이전까지 해오던 작업을 포기하고 갑자기 전통적인 방식으로 돌아간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다만 그가 이제 천착하는 주제가 달라짐으로써 거기에 맞도록 서술의 방법이 달라진 것 뿐입니다. 그렇게 심농이 '누런 개'에서 집요하게 미스터리적 기법을 취하는 것은 그가 '누런 개'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에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여기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당시의 프랑스 사회를 암암리에 불안으로 물들여 점점 가위눌리게 만들었던, '그 것'의 정체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정체를 밝히는 데 있어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가지게 하려면 미스터리적 기법 만큼 적합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심농은 '누런 개'에서 매그레의 추적 끝에 드러난 한 사람의 얼굴을 통해 그것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얼굴은 오웰 자신도 맡았던 그 변화된 공기가 궁극엔 가져올 얼굴이기도 했습니다. '숨쉬러 나가다'에서 오웰은 이제 세상이 점점 예측불가능해질 것임을 예감합니다. 한 치 앞도 헤아리기 어려운 세상이 곧 펼쳐지리라는 두려움이 그로하여금 모든 내일이 명약관화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가지도록 만들었고 결국엔 그것을 다시 찾고자 한 번도 꿈꾸지 않았던 일상으로 부터의 일탈 마저 감행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오웰을 그토록 두렵게 만들었던 그 '예측불가능성'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시대의 변화를 다시 한 번 전쟁으로서 강요하게 될 '파시즘'이라는 '전체주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전체주의'의 핵심을 '예측불가능성'으로 파악한 것이죠. 왜 오웰이 그렇게 생각했느냐면 그는 전체주의가 무엇보다도 한나 아렌트가 말한 '무사유성'에 기반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전체주의란 무엇보다도 사유하지 않는 괴물이라는 것이죠. 때문에 그것엔 지금까지 인간이 해왔던 대로 어떤 이해의 시선도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절대적인 불가해한 존재이기에 그는 예측불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죠. 이렇게 서로 부르는 명칭만 다를 뿐, 오웰 역시 아렌트 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파시즘이 가지고 있던 핵심을 알아차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심농 역시 그 오웰 보다 7년 전에 이미 그러한 핵심을 눈치채고는 작품에 새겨놓았습니다. 바로 그 산물이 '누런 개'인 것입니다. 

   '누런 개'가 이전 작과 무엇보다도 차별화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심농이 파악한 전체주의의 핵심을 한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여 보여주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련의 인물 묘사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얼굴에서 확인한 것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철저히 자기 이해관계에만 집착하고 타인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머리는 있으나 가슴은 없는 무심한 얼굴인 것이죠. 

   하지만 그러한 얼굴이 전적으로 심농에게 혐오스러운 것만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게 문제라면 문제랄 수 있는데 어쨌든 파시즘은 심농에게 야누스적인 존재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니까 사이렌의 노래소리를 돗대에 밧줄로 묶인 가운데 듣고 있는 오디세우스 처럼 말이죠. 그렇게 파시즘은 심농에게도 역시 공포이자 매혹으로 동시에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공포로써의 징후를 '누런 개'에서 확인할 수 있고 매혹으로써의 징후를 '타인의 목'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후일 심농이 나치 동조자의 혐의를 받았던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야누스적인 태도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 봅니다. 어쩌면 심농이 그렇게 된 것은 파시즘이 과연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정확히 예측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오웰 이 그랬듯이 당시는 온갖 예측불가능성의 대기로 넘쳐있었으니까요. 심농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전의 작품에서 일련의 공간 묘사를 통해 시대가 완전히 예전과 다르게 흐르고 있고 그 흐름 또한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한 바 있었습니다. 그렇게 심농에게도 동시대는 전혀 예측불가능성으로 다가왔기에 파시즘에 대한 태도 역시 이중적이었을지 모릅니다. 

   아무튼 그러한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누런 개'는 정말로 뛰어난 심농의 시대적 감식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구나 치밀하게 적용된 미스터리적 기법은 그야말로 범죄 소설이 시대적 공기를 담아내는 데 있어 얼마나 성공적인 그릇이 될 수 있는지 또한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러니 저러니 따지지 않고도 미스터리적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이 작품에 대한 얘기를 '스누피'로 유명한 찰즈 슐츠가 '피너츠'에서 언젠가 했던 말을 인용함으로써 끝맺으려 합니다. 

   '그저 이것만 기억해. 네가 일단 언덕 정상에 오르기만 하면, 

    그 뒤 부터는 속도가 저절로 붙을테니까...' 

   '누런 개'는 바로 그 언덕의 정상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이제 당신에게는 그 다음 작품으로 정신없이 빠져드는 일만 남아있는 셈이죠. 그것도 가속도가 점점 붙은 채로 말이죠. 

 



 
 
2011-06-27 2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8 0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8 0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헤르메스 2011-06-28 00:27   URL
역자님께서 이렇게 칭찬의 말씀을 해 주시니 정말 몸둘바를 모르겠네요.
저 역시 읽으면 읽을수록 심농의 천재성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시대의 예민한 공기를 담아내고 있으리라고는 몰랐습니다 그것도 아렌트 보다 수십년 전에 파시즘의 실체까지 정확하게 파악할 정도로 말이죠.하지만 역자님의 좋은 번역이 아니었다면 그런 면을 쉽사리 간파해내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누런개'는 다른 번역으로 읽은 적이 있지만 이번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열린 것 같았으니까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좋은 번역으로 심농의 진면목을 확인하게 해 주신것에 오히려 제가 감사를 드립니다.^ ^

헤르메스 2011-06-28 00:34   댓글달기 | URL
p.s '누런개'에서 레옹과 엠마의 관계는 저 역시 인상깊었습니다. 저는 왠지 뤽 베쏭의 영화 '레옹' 이 정말 많이 떠오르더군요. 이름이 같기도 하지만 세 남자에게 끊임없이 착취당하고 있는 엠마의 처지가 왠지 레옹에서의 '나탈리'를 연상시켰어요. 그리고 소설의 레옹이 오로지 개 하나만을 벗하고 살아가는 고독한 처지가 식물 하나만 벗하고 살아가는 영화속 레옹과 또 겹치기도 하고... 어쩌면 정말 뤽 베송이 '누런개'에서 레옹의 영감을 얻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되어 조사도 해봤지만 인터뷰 기록은 찾을 수 없더군요. 그래도 왠지 정말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드네요. 이것도 이전에 읽었을 때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던 연상이었는데 역자님의 좋은 번역 덕분으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번의 독서는 그래서 정말 번역의 중요성을 다시금 많이 느끼게 된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번역이니 이번에야말로 심농의 작가로서의 진정한 면모가 재평가를 이루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 ^
 
생폴리앵에 지다 매그레 시리즈 3
조르주 심농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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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초엔 그저 한 우연이 있었을 뿐이다. 

 벨기에 경찰의 의뢰로 매그레는 브뤼셀로 가게 된다. 휴가삼아 떠났던 가벼운 여행. 회의도 예상 보다 일찍 끝나 한 잔이나 하려구 들른 작은 카페. 거기 구석진 자리에서 매그레는 우연히 한 남자를 보게된다. 여지없이 '전문적 백수' 로 보이는 남자. 무심코 그를 바라보게 된 순간 그 남자가 행색과는 어울리지 않게 주머니에서 수북한 지폐 다발을 꺼낸다. 그리고 그것을 종이로 포장을 하더니 그 위에 주소를 적는다. 초라하고 남루한 사내로서는 도저히 가질 법하지 않은 그 거액에 매그레의 예민한 감각은 사건의 냄새를 맡는다. 그렇게 그의 추적이 시작되고 소설이 진행된다. 

 그렇지만 보시다시피 여기엔 얼마나 많은 우연이 있는 것인지... 첫 문장 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그가 결국 사건에 착수하게 될 때까지 저 많은 우연이 단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되는 게 여기서 드러난다. 벨기에 경찰이 의뢰하지 않았다면, 회의가 예정보다 일찍 끝나지 않았다면, 한 잔하려고 무심코 작은 카페에 들르지 않았다면, 거기 한 남자가 하필 매그레가 보았을 때 그 지폐 다발을 꺼내지 않았다면, 매그레는 결국 죄책감(이 원인에 대해서는 소설을 아직 읽지 않은 분들을 위해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을 가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결국 오래도록 묻혀 있었던 한 사건이 수면으로 떠오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이걸 읽는 순간 너무나 많은 우연의 남발에 이 소설은 치명적인 구성적 결함을 가지고 있구나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먼저 언급해두고 싶은 것은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러한 연쇄된 우연엔 분명 심농의 명확한 의도가 있으며 그것은 정확히 심농이 '생폴리앵에 지다'  작품 전체를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 관해 생각해보고 싶은 것으로 이 소설이 다른 시리즈에 비해(지금 출간한 네권에 한정해서이다.) 가지고 있는 독특성이다. 그 독특성은 다른 소설과 달리 '생폴리앵에 지다'에서만은 매그레가 사건을 발견하고 수사하고 해결하게 되기까지 내내 사건에 수동적으로 관계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잘 설명이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매그레는 단서를 발견하는데서도 앞에서 말했듯이 우연히 그 단서가 주어져서 그랬던 것이고 수사를 진행하는 와중에서도 그가 직접 발견하기 보다 사건 관계자들이 알아서 그 앞에 나타나주는 식이다. 그렇게 이 소설에서 매그레는 내내 이 사건의 핵심을 향하여 누군가에게 인도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 마치 사건이 드러나기 위해서 그를 초대한 것만 같이 말이다. 그렇게 매그레는 유독 이 소설에서 너무도 수동적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매그레가 가지는 태도의 독특성은 앞서 말했던 우연의 남발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 둘을 나란히 놓고 보면 그 관계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에 관해 앞에서 언뜻 힌트 처럼 남겨놓기도 했다. 바로 '섭리'라는 말로 말이다. 이것은 이 다음 작품 '라 프로비당스호의 마부'에서 그 '라 프로비당스'가 가진 뜻이기도 하다. 아무튼 굳이 이 말을 쓴 것은 이 소설에서 나타난 우연의 남발과 매그레의 현격한 수동성은 심농이 이를 통해 결국 그 사건이 드러나게 된 것은 일종의 '신의 섭리' 로 보여주려 했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는 언젠가 다 밝혀지게된다'라는 오랜 카톨릭적 믿음 그대로 말이다. 

  이는 작가 심농 자신을 생각해 보면 더 명확해 보인다. 이 소설은 심농 자신의 자전적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 그 역시 이 소설에 나오는 '묵시록의 동지들'처럼, 그렇게 영화 '죽은 시인들의 사회'에 나오는 그 모임 처럼, 젊었을 적 그런 모임을 했었던 것이다 . '묵시록의 동지들'이 보여주었던 낭만과 열정은 사실 당시 심농이 참여했었던 그 모임의 분위기를 그대로 옮겨온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날 그 모임중의 한 사람이 목을 매달고 죽는다. 사건은 자살로 처리되었지만 타살의 의혹도 없지는 않았다. 그 때 목을 맸던 사람의 이름이 바로 '조제프 장 클라인'이었다. 책의 맨 뒤에 언급되는 이 이름은 '클랭'이라는 이름을 영어식으로 읽은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프랑스식으로 말하면 정확히는 '조제프 장 클랭'이 될 것이다. 바로 '생폴리앵의 성당'에서 '묵시록의 동지들'중 목을 매달고 죽은 '클랭'과 똑같은 이름이다.(목매달아 죽은 곳도 바로 생폴리앵 성당, 그 곳이다) 희생자의 이름도 죽은 장소의 이름도 동일하다는 것은 혹시나 심농은 이 소설을 통하여 그 사건 자체를 재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게 그저 자전적 경험을 따왔다기 보다는 오히려 심농 자신이 매그레에게 접신되어서 아직까지 그 스스로에게도 미궁으로 남아있는 사건 자체에로 뛰어들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의문을 가지게 만든다. 나는 이 질문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단순한 문학적 재현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그 사건에 제대로 아무런 대처도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일종의 참회록일까? 이건 비단 이 소설에만 국한된 문제만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이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은 바로 뒤이은 '라 프로비당스호의 마부'의 성격마저도 규정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이 두 작품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아무튼 그 연결관계는 후에 '라 프로비당스호의 마부'의 리뷰를 쓸 때 말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계속 '현재의 심농이 과거의 사건에 뛰어듦'에 대해서만 살펴보도록 하자. 

  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근거는 또 하나가 있다. 그 역시 목매달고 죽은 자의 이름 때문이다. 그 이름은 앞서도 말했듯 '조제프 장 클랭'이었다. 여기서 클랭이란 이름은 소설에서도 똑같이 희생자 이름으로 쓰였다. 그런데 씌여진 이름이 클랭만은 아니다 . 여기엔 또 하나의 이름이 쓰였는데 그 이름을 가진자가 이 소설에서 하는 역할 때문에 하필이면 그 이름을 가졌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그 이름은 바로 '조제프'이다. (마지막 하나 남은 '장'이라는 이름은 바로 '라 프로비당스호의 마부'에서 또 쓰인다. 이것도내가 두 작품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근거중의 하나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조제프란 인물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본격적으로 매그레를 사건에 착수하게 만드는 자일 뿐만아니라 아예 사건의 핵심마저 다가가도록 인도하는 자이다. 매그레가 테세우스라면 조제프는 아리아드네의 실 같은 자인 것이다. 그런데 심농은 그 아리아드네의 실 같은 자에게 죽은 자의 이름을 주었다. 클랭이라는 성이 아니라, 그 시절 늘 부르곤 했을 바로 그 이름을. 나는 이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매그레를 인도했던 바로 그 자에게 그 시절에 늘 부르곤 했을 죽은 자의 이름을 주었다는 것이. 그건 심농이 늘 의혹으로 남아있는 그 비극을 생각할 때 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아니 그는 오히려 그 이름 때문에 늘 그 사건에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건 다른 어어떤 조제프가 아니라 그가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던 대로 그만의 조제프였을 테니까. 따라서 관계는 명확해 보인다. 소설속 매그레와 조제프의 관계는 현실속 심농과 조제프의 관계로 반복되고 정확히 조제프에게 매그레가 인도되었듯이 심농 역시 이 소설을 통하여 마지막 한 걸음으로서 다시금 그 사건에게로 뛰어드는 것이다.(여기서 굳이 '마지막'이라고 한 까닭은 '라 프로비당스호의 마부'가 사실상 그러한 트라우마처럼 남아있던 그 사건에 대한 심농 개인의 작별인사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때문에 유독 이 소설에서 만큼은 매그레가 수동적일 수 밖에 없었으며 어쩌면 사실 그가 직접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수사관으로서의 매그레란 캐릭터 자체를 태어나게 한 것도 근본적으로는 바로 이 사건이 동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만일 이것이 정말 내 생각대로 진짜 매그레를 통해서 근원적으로 하고 싶었던 것을 하는 거라면 그렇게 유독 이 작품에서 카톨릭적 색채가 짙게 나타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바로 이 근원적 회귀와 같은 시도를 통해서 묻는 질문은 인간에게 있어 '죄'란 무엇이고 또 그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인데 그것은 그야말로 그가 가장 처음으로 영향을 받았고 또 지속적으로 성장시켜온 카톨릭적 세계관 위에서라야 대답이 가능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생폴리앵 성당의 모습 

 

  심농의 어느 전기 작가(Lucille Frackman Becker)는 "매그레의 전체적 분위기는 일요일날 들리는 성당의 종소리와 더불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심농의 작품에 있어서 카톨릭적 세계관은 아주 중요한 밑받침이 되었음을 강조했다. 특히나 그는 어렸을 때 부터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할 때 거드는 아이로 일했고 종교 생활에 아주 열심이었다고 한다. 그 전기작가는 그 어린 시절 카톨릭 성당에서의 경험이 심농에게 '죄'라는 것, '심판'이라는 것 그리고 '죄를 짓는 인간'에 대한 원초적인 감정들과 시각들을 주었을 것이며 그것이 그대로 매그레에게 가장 근본적인 태도 'Comprendre sans juger' 즉 '심판하지 않고 이해한다'를 이루게 만들었을 것이라 한다. 아마도 매그레를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매그레가 꼭 범죄자에게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비록 그는 수사관이지만 말이다. 그가 마지막 범죄자 앞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국가의 질서집행자라기 보다는 어쩐지 고해를 듣는 신부와도 같은 모습이다. 물론 그 고해를 남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헤아려서 거꾸로 들려준다는 점에 차이는 있지만. 아무튼 그는 법의 눈이 아니라 같은 인간의 눈으로서 범죄자의 범죄가 과연 심판 받을 만한 것인가를 가늠한다. 법의 눈이 가진 '지은 죄'라는 좁은 시야를 넘어 매그레는 왜 그러한 죄를 범했는지 맥락을 헤아리고 때로는 죄가 설령 심판받아야 하는 것임에도 그 심판이 불러올 또 다른 비극까지 감안하여 기꺼이 그 죄를 용서하는 포용을 보여준다. 이것은 고해성사를 받은 신부가 전하는, 그렇게 신의 눈으로 본 용서라고 할 수는 없을까? 아무튼 이 마지막 물음에 부정적인 대답을 하더라도 이렇게 카톨릭적 세계관이 매그레의 작품세계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만은 인정하게 되리라 믿는다. 

  그러니까 그 많은 우연의 남발은 심농의 죄에 대한 카톨릭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떤 죄이든 신 앞에서는 감추어질 수 없으며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결국에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하지만 그가 카톨릭적 색채를 이렇게 부여하는 것은 비단 이러한 죄의 성격만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아니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그 죄 앞의 '인간' 자체를 생각하기 위해서이다. 바로 이를 통해 그가 강조하는 인간은 모습은 그 무엇보다 '경계에 서 있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경계는 소설의 도입부 노이샨츠 역에서 부터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 노이샨츠 역은 바로 네델란드와 독일의 국경에 있는 역이었다. 그렇게 그 역은 '경계' 위에 서 있는 역이다. 거기는 양쪽의 많은 노동자들이 통근 혹은 퇴근 열차를 타고 스쳐간다. 아니, 잠시 머무르기도 한다. 국경을 건너기 위한 필요한 절차를 거치는 잠시 동안만. 그 때 그들은 우르르 요깃 거리를 찾아 식당으로 뛰어든다. 그렇지만 단 두 사람만은 갈 곳을 잃은듯 대합실에 우두커니 못박혀 있다. 그 중 한 사람이 매그레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가 지금 추적하고 있는 자이다. 

  소설의 도입부 노이샨츠 역의 모습과 또 그렇게 홀로 내버려진 두 사람의 존재는 무엇보다 앞으로 이 소설에서 하게 될 얘기를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노이샨츠 역이 경계에 서 있듯이 그 대합실의 두 사람도, 다른 사람들은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고픈 배를 채우는 그렇게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일종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정말 후반에 매그레가 쫓는 그 존재는 그렇게 삶이라는 경계 다른쪽에 있었던 인물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운명과도 같은 '죄의 밝힘'이 잘라낼래야 잘라낼 수 없는 죄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이렇게 경계 위에 서 있는 인간 존재는 그 죄로 인해 심판이 아니라 바로 이해를 받아야 하는 변호의 이유가 된다. 그것은 그들이 그만큼 강한 존재가 아니었기에 저지를 수 밖에 없던 것이기도 했고 또 이미 선택한 경계의 한 쪽 즉 특히나 '삶'을 택했던 자들은 이제는 혼자만이 아닌 자신에게 딸린 가족들까지 책임지느라 어쩔 수 없이 저지를 수 밖에 없던 것이기도 했다. 아니, 달리 보면 어쩌면 현상하는 '죄' 자체가 그렇게도 안정적이고 항구적일 것만 같았던 인간의 삶이 사실은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서 있는 것임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살아 있는 '묵시록의 동지들'의 묘사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나는데 그 중 가장 상위의 계층을 차지하고 있는 모리스와 조제프의 변화는 정확히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만큼 쓰고 보니 심농이 매그레를 비롯하여 묵시록의 동지들을 모두 과거의 사건으로 소환하는 그 존재가 단순히 '죄'만을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의심스러워 진다. 혹시 그 존재는 중세의 '메멘토 모리'와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면 소설에서의 죄의 묘사는 '죽음'으로 바꿔놓고 보아도 그대로 다 들어맞는 것 같다. 아니 초반에 처음 조제프가 등장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자면 그것은 그야말로 그가 죽음으로 인해 과거의 사건으로 소환되는 것이 아닌가! 그림자처럼 삶에 결부되어 있지만 모두가 회피하려 드는, 그래서 거꾸로 삶에 더욱 더 집착하게 만드는 죽음. 하지만 그것은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영원한 얼룩이다. 그 얼룩은 안정적이라 이대로 늘 같은 모습이리라 여겼던 삶에 계속 균열을 만들고 사실은 그 삶의 기반이 그리 단단하지 못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얼룩이 커다란 입을 벌릴 때 사람들은 소설에서 매그레의 처분을 다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던 것 처럼 그렇게 그 입이 닥쳐옴을 속절없이 기다리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죄로 보았을 땐 '용서'의 관계가 '죽음'으로 치환시키자 그대로 '간구'의 몸짓이 된다. 뒤이은 '라 프로비당스호'도 그것이 배에 쓰이면 흔히 '구원자'를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일 참회록이라면 심농은 이 경계 어디에 서 있을 것인가? 아마도 당연히 경계의 안쪽, '삶'이라는 곳에 서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매그레에 접신되어 과거의 사건으로 다가가서는 이제 매그레 앞에 서서 지난날의 자신을 혹은 그 상처를 안고 살아온 오늘날의 자신을 용서를 비는 것과 동시에 지금 삶을 그래도 이대로 계속 영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지 모른다. 마치 어린시절 신부에게 하곤 했던 고해성사 처럼... 

   솔직히 고백하자면 리뷰를 쓸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은 늘 이렇게 마지막이다. 지금도 이 글을 어떻게 끝맺어야 할지 난감하다. 이 쯤이면 '생폴리앵에 지다' 전체에 대해서 지금까지 해 왔던 말들을 종합해 정리해 놓아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에 딱 들어맞는 문장들을 생각해내기가 힘들다. "'생폴리앵에 지다'는 이후 매그레 시리즈의 모든 주제와 특징들이 발현되는 그 진정한 시작이라 할만하다'"고 썼다가 지우고 "'생폴리앵에 지다'는 죄에 대해 민감했던 심농을 여실히 드러내며 그가 왜 매그레 같은 추리소설을 쓰게 되었는지 보다 확실하게 우리에게 알려준다"라고 썼다가 또 지운다. 그 어느 문장도 지금까지 해 온 말들을 부분적으로 밖에는 담고 있지 못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휴우~ 하지만 어떻게든 끝은 맺어야 하는 글. 그냥 무작정 덤벼들고 보자. 따라서 이 뒤에 쓰일 말들은 그저 이 순간 아주 우연히 결정된 것임에 다름아니다라는 것을 미리 알려둔다. '생폴리앵에 지다' 자체가 모든 우연이듯이. 사실 따지고 보면 우연과 필연은 또 종이 한 장 차이 아닌가? 짝사랑을 하던 여자를 내내 기약없이 기다리고 있던 남자에게 마침 나타난 그 여자는 필연이지만 그 여자에게 있어 기다리고 있던 남자는 또 그렇게 우연이듯이... 

  아무튼 이 소설은 심농이 그 어떤 작가보다 인간이 처한 존재론적 조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작가라는 걸 보여준다. 그가 하필이면 추리소설이라는 형식을 택했던 것은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천지창조를 그리기 위해 붓을 택했던 것 처럼 그것이 그가 추구했던 주제에 그저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 무엇보다도 그는 해명되지 않은 죽음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자였으니까 말이다.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그 죽음을 안고 거기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살아가는 자는 나날의 일상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그것으로 부터 완전히 달아나기 위해 더 삶에 집착할수도 거기에 빠져 소용돌이에 갇힌 듯이 늘 맴돌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다 그는 어릴때 부터 카톨릭적 세계관에 깊이 빠져있었다. 그렇게 그의 모든 행위를 신 앞에서 헤아려볼 수 밖에 없는 자였다. 거기서 일상이 가지는 위태로움, 죄가 드리운 어두운 그늘은 더욱 더 크게 자리잡았을지 모른다. 그는 그렇게 낮동안은 웃고 떠들다가도 밤엔 괴로워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주 활기차고 정력적인 삶을 살았던 심농이 왜 매그레는 이렇게 한없이 우울한 분위기를 띠게 되었을까 궁금하게 여겼었는데 어쩌면 바로 이와 같은 심농의 삶 자체 때문에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뉘게 된 것은 아닌가 싶다. 현실적 삶은 그 죽음이 주는 여운으로 부터 달아나기 위해 더욱 더 집착하느라 그랬던 것이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카톨릭적 세계관과 죄책감으로 환기되는 억누를 수 없는 우울은 이렇게 매그레를 통해 토로되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그렇게 매그레를 통해 보여주는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 역시도 혹시 그러한 자신을 신에게 이해받고 싶은 욕망에서 발현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면 죽음은 정말 '노이샨츠역'과 같다. 죽음이 삶과 단단히 결부되어 있듯이 삶은 늘 그곳을 스쳐간다. 하지만 삶이라는 기차는 그곳으로 부터 오직 멀어지기 위해 속도를 더해갈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이샨츠역'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그 경계를 넘어가기 위해 한 번은 내려야 할 곳이다. 한없이 이어지는 결말에 종지부를 찍기위해서라도 그냥 이렇게 말하자. "이 소설은 언제가 당신이 내려야 할 그 노이샨츠 역으로 불현듯 데려가는 소설이라고!"  



 
 
이프리트 2011-06-09 19:04   댓글달기 | URL
전 '수상한 라트비아인'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둘 다 매그레 시리즈죠^^

헤르메스 2011-06-10 00:10   URL
이프리트님 오랜만이네요^ ^
네. 수상한 라트비아인이 데뷔작이고 이 소설은 세번째로 나온 작품이에요.
제 생각엔 앞으로 나올 매그레 시리즈의 어떤 원형과도 같은 작품이 아닌가 싶어요.
 
수상한 라트비아인 매그레 시리즈 1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뭐든 시리즈의 데뷔작이라면 관심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것도 문학사에 있어 아주 뚜렷하고 거대한 족적을 남긴 시리즈의 데뷔작이라면 더욱 더! 그리고 만일 그 시리즈의 팬이라고 한다면 더!더! 더욱 그럴 것이다. 셜록 홈즈의 팬에겐 데뷔작인 '주홍색 연구'가 그럴테고, 엘큘 포와로의 팬에겐 데뷔작인 '스타일즈저택의 죽음'도 역시 기필코 보아야 할 작품이 될 것이다. 그건 아마도 팬으로서 전설의 시작을 확인하고픈 마음일수도 있겠고 처음의 시작이 어땠는지를 살펴 사랑하는 캐릭터가 시간에 걸쳐서 어떻게 변화해 갔는지 그 역사를 확인하고픈 마음이기도 할 것이다. 

  그와 똑같이 매그레의 팬임을 자처하는 나에게도 데뷔작 '수상한 라트비아인'은 당연히 기필코 보아야할 작품이다. 전설의 목격이자 역사의 확인으로서... 

   1929년 9월 네델란드 항구의 델프제일에서 '괴짜'를 뜻하는 그의 배 '오스트로고토호'가 수리되고 있는 동안 그 옆의 궤짝에 앉아있던 심농에게 불현듯 떠오른 어떤 환상에 의해 이 매그레 데뷔작은 시작되었다고 한다. 전 세계 5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고 5억권 이상이나 팔려나갔다는 시리즈의 시작으로서는 도저히 믿기 힘들 정도로 즉흥적인 창조이다. 그래서 혹 이 작품 역시도 즉흥적으로 창조된 작품들이 흔히 가지고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약점들 그러니까 개연성 없는 플롯, 평면적인 캐릭터, 우연의 남발, 억지스러운 해결등이 있으리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안심하시길, 그런 약점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오히려 그렇게 쓰여졌기 때문인지 몰라도 문장은 마치 흔들리는 배에서 급하게 쓰여진 것 처럼 군더더기 없이 핵심만 딱딱 던져줄 정도로 단순 명료하고 거기다 내처 신들린듯 써내려갔는지 전개도 먹이를 덮치기 직전 웅크렸더 덤벼드는 표범처럼 재빠르다. 그렇다고 구성이 빈약한 것도 아니다. 사실 매그레 시리즈를 과연 추리소설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나 자신은 반감이 매우 크지만 아무튼 추리소설이라는 통념을 받아들여 그 입장에 서서 판단해 보아도 소설의 동력이 되는 수수께끼는 빈틈없이 공정하게 잘 해결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소설은 추리소설로 보아도 꽤 성공적이라고 보여지며 지금으로 부터 70여년 전에 씌여졌다고는 그것도 그렇게 즉흥적으로 씌여졌다고는 도저히 믿지 못할 만큼 현대적이고 탄탄한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이러한 추리소설의 평가만으론 이 작품이 가진 진정한 매력을 말하기엔 턱없이 모자른다. 어차피 당신 역시 이 책을 읽게되면 나중에 남는 것은 추리소설로서의 재미가 아닐 것이다. 분명 추리소설로서의 지적 쾌감 같은 것은 결말에 가서 범인의 고백을 듣게 되면 그로부터 받는 묵직한 울림 때문에 더이상 신경쓰지도 않을테니까. 그래서 앞서도 말했듯이 나는 이 소설이 추리소설이라 불리는데 저항감이 있고 사실 추리소설로서의 잣대는 이 소설에 있어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뭣보다 이 소설에 있어 가장 압도적인 면모는 매그레를 매개로 심농이 그려내는 한 인간의 서글픈 초상이기 때문이다. 매그레를 통해 우리가 정말 보게되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언제나 사람이다. 그건 심농 자신이 고백한 바 있다. 언젠가의 인터뷰에서 그는 매그레를 통해 사건을 중심에 놓기 보다는 어디까지나 한 인간을 그 중심에 놓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추적이라는 것도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은 그 인간이 왜 그런 짓을 했나?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그렇게 심농에게 중요한 것은 흔히 추리소설에서 묻는 '누가(WHO)'가 아니라 '왜(WHY)이며 여기에서 보자면 이 데뷔작은 그야말로 충실하게 거기에 대해 답변을 하고 있는 셈이라 할 수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작품이 자신이 대답해야 할 질문을 '왜(WHY)'로 삼게 되면 액션은 줄어들고 관조적이 되기 쉬운데 그래도 이 작품은 데뷔작이라서 그런지 나중의 매그레 시리즈들 보다 훨씬 더 많이 액션이 넘쳐난다. 그래서 어쩌면 심농이 본격적으로 매그레적 세계를 완성하기 전의 그 과도기적 작품으로도 볼 수 있을 듯 하다. 거기다 이 작품의 테마라고나 할까? 아무튼 천착하고 있는 주제는 일종의 '정체성 바꾸기' 같은 것인데 사실 이것은 뒤이은 매그레 시리즈(바로 뒤이은 '갈레 홀로 죽다'도 여기의 변주라 할 만하다)나 별개의 작품에서도 자주 반복되는(독자적 작품으로는 33년에 나온 '런던에서 온 사나이'에서 아주 유사하게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2007년 벨라 타르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것으로 바로 이 소설 '수상한 라트비아인'에는 심농이 평생 꾸준히 천착해온 주제의 원형 같은 것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데뷔작에서 드러나는 심농 소설의 특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이 겪는 정체성의 변화'이다. 이 작품이 태어난 연대를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추리소설의 황금기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그 어떤 추리소설에서도 매그레가 보여주고 있는 것들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매그레가 드러내는 특징적 세계는 오로지 매그레 혼자만의 독보적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추리소설의 대세를 거스르면서까지 심농은 그러한 특징들 -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 개인이 겪는 정체성의 변화 - 을 천착했던 것일까? 그것은 또다시 이 소설이 태어난 연대의 유럽의 정치상황을 살펴보면 어느정도 대답이 될 것 같다. 

   1920년대와 1930년대는 그야말로 유럽은 정치상황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1차대전의 휴유증이 아직 가시지 않은 가운데 많은 이들이 어려운 경제적 형편으로 곤란을 겪었고 따라서 범죄가 급증했다. 그러한 힘든 경제사정 가운데  이데올로기적으로도 혼란한 상황이었다. 당시의 유럽은 크게 세 개의 거대한 이데올로기가 충돌하고 있었다. 자유민주주의, 파시즘 그리고 사회주의 이렇게.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은 그대로 그 안에 살고 있는 개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그들 역시도 스스로 갈피를 종잡을 수 없는 형국이었다. 거기다 독일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점차 세력을 확장해가는 파시즘과 소련의 사회주의 독재화 과정속에서 동유럽과 러시아의 많은 유대인들과 사회주의에 내몰린 사람들이 중부와 남부 유렵으로 흘러들어왔다. 이러한 대량 이주민의 유입은 당연하게도 원래 거주하고 있던 이들에게는 커다란 두려움을 야기시켰다. 말하자면 이 시대의 유럽인들은 내부적으론 이데올로기적 혼돈을 외부적으로 전혀 다른 이민족들에 대한 두려움을 겪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심농의 매그레가 보여주는 특징들은 이러한 상황이 그대로 투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많은 이민자들의 유입, 그렇게 전혀 다른 곳 다른 시간을 살았던 낯선 자들의 대량 유입은 심농에게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고 거센 이데올로기적 혼란들은 심농에게 한 개인이 겪는 정체성의 변화에 주시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응은 비단 심농만은 아니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가사 크리스티 또한 여기에 민감하게 반응한 작가였다. 세심하게 읽어본 이들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들이 끊임없이 자신이 알지 못하는 타자에 대한 공포를 그리고 있음을 알 것이다. 특히나 미스 마플이 등장하는 작은 시골마을을 무대로 벌어지는 추리소설의 경우엔 더 명확하게 이러한 불안감이 드러나고 있다. 아가사 크리스티는 그 모든 작품들에서 끊임없이 러시아나 동유럽으로 부터 넘어온 이민자들을 그린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 의중을 알 수 없는 존재들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러한 묘사는 특별히 아가사 크리스티가 보수적이거나 국수적이어서가 아니라 상황의 변화에 민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전까지는 누구네 집에 누구의 숟가락이 몇 개가 있는지 그렇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훤히 다 알았었는데(미스 마플의 작은 전원마을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추리 소설들은 늘 이것을 강조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이민자들이 흘러들어온 뒤 부터는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타인들은 저마다 의혹을 지닌 존재로 때로는 깜짝놀랄만한 비밀을 가진 존재로 아가사 크리스티 앞에 나타난다. 그녀는 거기에 대한 혼란을 겪었고 두려움을 느꼈다. 바로 그런 반응이 그녀의 작품 속에 그대로 투영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타자에 대한 관심은 두려움의 또다른 표현이었다. 하지만 심농의 경우는 아가사 크리스티와 달랐다. 바로 그 다른 점이 같은 것을 느꼈으면서도 아가사 크리스티의 경우엔 퍼즐러 식의 심리 추리소설로 심농의 경우엔 오히려 인간의 삶에 더욱 더 천착하는 추리소설로  다르게 나아가도록 했는지 모른다. 아가사 크리스티와는 다르게 심농은 그러한 낯선 타인의 삶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심농은 매그레를 통해 그들의 삶은 우리가 보고 들어야할 삶이며 결국엔 껴안고 가야 하는 삶임을 보여준다. 매그레의 깊은 연민의 시선들은 너와 나의 삶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통찰이며 아무리 서로가 다른 곳에 다른 시간을 살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결국엔 이해받지 못할 삶은 없다라는 선언이다. 이렇게 아가사 크리스티와 심농의 소설들이 완전히 다르게 걷게 된 이유는 뭘까? 그것은 아마도 아가사 크리스티는 미스 마플 처럼 오래도록 한 곳에 머물렀고 심농은 반대로 아주 많이 정처없이 유랑을 했기 때문은 아닌지 속 편하게 생각해 본다. 낯선 곳과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자신의 세계를 조금씩은 허물어뜨리는 경험을 가져다 주니까 말이다. 

   아마도 매그레가 나온 즉시 얻게된 커다란 성공 또한 이렇게 동시대의 유럽 사람들이 겪고 있던 타인에 대한 불안한 심리와 이데올로기적 충돌에 따른 정체성의 변화 같은 것을 잘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매그레가 펼쳐보이는 작품 속 등장인물들에게서 자신과 조금 아니면 아주 많이 닮은 모습들을 보았을 것이며 그렇게 심농의 동정적인 시선 속에 오롯이 그려지는 범죄자의 삶을 보며 그들을 동정하였듯이 자신을 동정하고 또한 매그레가 범죄자에게 보여주는 연민을 통해 스스로 위로받았을지 모른다. 아마도 그래서 그들은 기꺼이 매그레를 자신의 옆자리로 초대했던 것이리라. 아무튼 이렇게 앞서 나온 버즈북의 제목 그대로 매그레는 삶을 수사하고 삶 자체를 담는다. 때문에 범인 찾기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버리는 것이 훨씬 많고 또한 별 재미도 느끼지 못하리란 걸 미리 알려두어야겠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나는 가수다'에서 임재범이 '여러분'을 부를 때 했던 그것. 그러니까 하나의 영혼을 온전히 바라보기 위해 우리가 하는 것. 모든 선입관과 판단의 무장해제 그것이다. 매그레의 소설들은 깊은 밤과 불면의 새벽을 위한 소설이다. 그렇게 오로지 고독한 자기 대면의 시간 가운데서 읽어야 하는 소설이다. 루이스 세풀베다든 헤밍웨이든 한결같이 고독한 시간에 벗 삼기에 최고다라고 말하는 것에 정말 유념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정말 그렇게 읽어야 한다!

 



 
 
포와로 2011-05-29 20:05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이 오픈키드님이셨군요..! 물만두 추리소설 대회 1등이셨던..ㄷㄷㄷ
남다른 안목이 돋보이는 서평인 듯 합니다 ㅋ

헤르메스 2011-06-04 02:42   URL
포와로님 반갑습니다.
부끄럽습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서^ ^;
어느새 제 서재까지 찾아오셔서 글까지 남겨주시고
칭찬까지 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