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꼴찌부터 잡아먹는다 - 구글러가 들려주는 알기 쉬운 경제학 이야기
박진서 지음 / 혜다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난 태생적으로(?) 문과이자 인문학도에다가, 심지어 전공도 인문계열인 행정학/일본학이다. 태생적 문과(?)답게 수능 사탐과목 조차도 뭘 골라야할지 모를 정도로, 대부분이 흥미로워서 고민했었다. 물론 딱 한 과목 ‘경제’를 제외하고. 심지어 고2 담임쌤이 경제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를 아주 극혐했다. 당시 담임쌤에겐 미안하지만, 경제시간에는 거의 다른 과목 공부 할였으니 뭐. 그정도로 난 경제와 거리가 아주 먼 사람이었다(그렇다고 경제 과목을 아예 무시한건 아님! 다만 시험을 위해 주입식으로 외웠을뿐) 당최 학교에서 배우는 경제는 무슨 공자님 말씀마냥, 내가 아는 사회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기에 이런게 경제라면, 내 삶과 무관할 것 같았다. 이런 경제를 배워봤자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냐 싶었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렇게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서, 회사를 다니며 월급을 받고, 내 집마련을 위해 대출을 받고,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고… 그렇게 1n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동안 내가 한 모든 행동들은 충격적이게도, 내가 그렇게 극혐하던 경제생활이었다. 거기다가 매일매일 뉴스 경제면을 장식하는 유가변동, 금리인상/인하, 원재료값상승, 집값상승, 최저임금 인상, 코스피 급락 등등등 두말하면 입아픈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삶에, 우리 모두의 삶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니까. 확실한건.. 학교에서 배웠던 경제 교과서에선 이런 현실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가르쳐준적이 없었다는 거다.



거기다 TV에 나오는, 경제학자라는 명함을 들고 있는 저명한 인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뭐래?”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러니 사람들이 자꾸 경제를 멀리하게 되고, 경제를 멀리하게 된 여파는 역풍의 부메랑으로 다시 돌아오고, 거기다 역풍을 맞는 이유 조차 생각해보지 못하는거 아닌가. 예컨데 학교에서 금리에 대해 제대로 배워본적이 없는 상태에서, 사회에 나와 급하게 내집 마련을 위해 은행에서 골라준 대출을 한다 치자. 그 결과가 바로 현 상황이 아닐까? 이자가 적게는 2배, 많게는 3배까지 올라서 한달에 부담해야할 이자가 원금보다 더 높은 상황같은 뭐 그런거. 만약 고정금리, 변동금리, 금리인상/인하 등에 대해서 조금만 더 잘 알고 있었다면 만약을 위한 사태에 대비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뭐, 그렇다고 갑인 은행을 우리같은 을도 아닌, 병/정 같은 소시민들이 이길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뭐, 여튼! 한마디로 우리는 경제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이다. 



그럼 지금이라도 경제를 공부해봐야하나? 경제 공부는 어떻게해야하지?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경제도 전문용어 남발에, 대한민국 현실과는 동 떨어진 이야기만 줄줄줄이었는데? ... 라고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한 경제도서가 있을까? 싶었는데, 있었다. 심지어 전문용어 남발이 아니라, 지금 우리 현실 경제를 이야기하며, 인문학적으로 풀어낸다. 제일 중요한건 주류 경제학자 돌려까기(^^). 내가 본투비 인문학도인 것도 있지만, 그것과 별개로 난 주류보다는 비주류를 선호하고(?), 모두까기, 돌려까기도 선호하는 사람이다. 헌데 바로 이 책 「악마는 꼴찌부터 잡아먹는다」라는 경제도서가 내 취향이 딱 맞았다. 내 나름대로 경제관련 책도 몇권 읽어봤지만, 솔직히 와닿지 않아서 한 권 읽는데 몇일을 소비하고 심지어책장 구석에 처박아뒀는데.. 이 책은 펼친 그 자리에서 다 읽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책 읽을 시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깊이 잠들어주신 우리 뿡뿡이에게 심심한 감사의 말을..ㅋㅋㅋ



이 책의 목차는 총 8개로 나뉘어 있는데, 목차만 봐도 .... 내가 말한 모두까기, 돌려까지, 주류까기(ㅋㅋㅋ)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학자들을 믿지마라


경제학자들은 왜 경제를 예측하지 못할까?


우리가 잃어버린 이름 ‘정치경제학’


경제학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경제학이 일자리를 만들 수 있을까?


경제적 불평등은 정말 피할 수 없는 것일까?


부자만이 아닌 모두의 자유를 위한 경제학


경쟁은 누구도 승자로 만들지 않는다




특히 첫 주제인 “경제학자들을 믿지마라”. 와, 너무 멋져! 박수치고 싶다.


▶경제학자들을 믿지마라


왜 사람들은 경제를 알고 싶지 않은 것으로, 경제학을 어려운 학문으로 생각하는 걸까요? 어쩌면 우리 사회의 많은 경제학자들이 현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혹은 현실에 근거한 이론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이론에 현실을 끼워 맞출 때에만 경제학을 호출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경제는 우리들의 삶과 현실 그 자체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을 연구하는 사회과학은, 그중에서도 특히 사람이 먹고 사는 문제를 다루는 경제학은 밤하늘의 별과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근본은 현실이라는 땅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경제는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것이기 때문입니다. p 016



우리는 경제학 교과서 즉 주류 경제학에서 너무나 좁게 정의한 ‘개인의 최대 만족을 위한 최적의 선택’ 이라는 명제로부터 탈출을 모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지 최적의 선택만으로 나의 경제적 상황이 나아질 수 없다는 걸 알게되는 것이죠. 이러한 고민은 굳이 어려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됩니다. ‘돈 쓸 일이 많으니 지금보다 더 벌어야지’ 라는 생각부터 ‘똑같은 일을 하는제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만으로 왜 월급은 정규직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걸까?’처럼 현실의 평범한 언어로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근데 경제학자들은 이런 고민을 굳이 ‘생산성 증대를 통한 소득의 증가’라고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의 문제’라고 어렵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p 020



경제 발전을 모색하고 연구하는 경제학은 최신 기술을 이용해 기업의 생산성을 올리고 이윤을 더 많이 확보하는 길만을 찾는 학문이 아닙니다. 기업의 생산성을 올린 대가로 얻은 성과와 이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이를 연구하는 것 또한 경제학 본연의 임무인 것입니다. 앞에서 예로 든 사례에서 보다시피 문제는 새로운 기술의 도입이 아닙니다. ‘그 기술을 도입해 얻는 혜택은 과연 누구를 위한것인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함께 풀어 가야 할 문제입니다. 경제발전을 통해 얻어진 성과물들은 서류로만 존재하는 법인이 아닌 생명을 가진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p 029




▶경제학자들은 왜 경제를 예측하지 못할까?


매해 11월 초, 기업의 각 부서들은 다음 해 사업 계획서를 준비해야만 합니다. 어느 직장인의 푸념처럼 연간 사업 계획은 “계획을 위한 보고서, 보고를 위한 계획서”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두 달여 동안 최소 3번 이상의 승인 요청과 반려를 거듭한 사업계획서는 CEO의 승인을 받는 순간 부메랑으로 돌아와 그것을 작성한 노동자에게 1년 동안 족쇄로 작동합니다. 매달, 매 분기별 수치화되어 있는 목표와 그에 따른 실적은 각 팀 구성원의 인격(!)입니다. 또한 목표 대비 달성률을 나타네는 퍼센티지(%)는 회사가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기본 급여와 보너스의 기준이 됩니다. p 045



-주요 대학의 이른바 일류 경제학자의 연구일수록 외국 학술지를 지향해 한국 경제의 현실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


-한국 경제학계는 대부분 외국에서 학위를 받고 외국 학술지 게재를 지향하는 연구자들로 구성돼 있어서, 한국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결핍돼 있고 학문 재생산 능력도 상실했다.(…)이런 이유로 한국의 경제학은 관료나 기업들과 진정으로 대화하지 못하며, 한국의 경제학자들은 한국의 경제 문제에 대한 진정한 전문가로 자처하기 힘들다.


경제학자들에게는 몹시 유감스러운 노릇이겠지만 위의 내용은 한국 경제학계와 학자들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한 동업자(!)의 주장 중 일부입니다. 어쩌면 한국의 주류 경제학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외국 경제학의 하청 업체일지도 모릅니다. p 054



한국 현실을 말하는 경제학자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학계의 중심에 있거나 이런 내용이 연구나 교육의 중심에 있지는 않다. (…) 경제학 연구와 교육이 한국 경제 현실에 기반을 두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경제뿐만 아니라 경제학에 대해서는 비판하는 사람이 더욱 적다. p 056 /연세대 경제학과 홍훈 교수


1n년간 내가 회사에서 하는 업무 중 하나가 바로 저놈의 ‘사업계획(예산)’이다. 초반 몇년은 사업계획을 작성할 때마다 아주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 몇년 간 얻은 교훈은, 사업계획은 ‘답정너’ 라는거. 다음해 물가인상은 커녕, 당해년도 물가인상 고려하는 것 마저도 원가절감이라는 이유 하나로 칼같이 잘라낸다. 결국 그 피해는 고스란히 나와, 직원들이 받는다. 더군다나 ‘대기업’이라는 명함을 달고 있는 회사인데도 이런데 다른 회사들은 어찌할런지. 그렇게 ‘답정너’가 되어 승인된 사업계획을 보고 있노라면, 그 사업계획을 바탕으로 새해 업무를 하고 있노라면. 하 ㅋㅋㅋㅋ 뭐, 대놓고 직원은 소모품이라고 말하는 회사인데, 뭘 더 바랄게 있나 싶기도 하고.



근데 여기서 원가절감 운운하는 것도 결국 회사 경제를 위함인데, 대체 이 회사 경제는 누구를 위함인가? 적어도 나와 다른 직원들은 아닌 것 같다. 오롯이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법인’을 위한건지, 아니면 그 ‘법인’뒤에 숨어있는 설립자 가족을 위한건지. 확실한건 회사 경제는 회사를 이끌기 위해 야근을 마다않는 대다수의 직원이 아닌, 그들 위에 군림하는 소수의 누군가를 위해 돌아간다. 우리가 아는 대다수의 회사들도 이런 모습을 취하고 있고, 이에 대해 그 누구도 토를 달지 않는다. 분명 뭔가 잘못된거 같은데, 아무도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이상한 회사경제가, 실은 우리 사회 모습의 축소판이라서 그런게 아닐까싶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실제로 ‘경제’에서는 고려되지 않았으니까.




▶경제학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디어 마이 프렌즈」에 등장하는 인물들 하나하나를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국가의 부가 20배로 들어날 때 과연 이들의 삶도 20배 좋아졌을까요? 온 생애를 바쳐 열심히 살아온 그들에게 남은 건 고작해야 서울 변두리의 허름한 집 한채 뿐입니다. 누구는 평생의 소원인 해외여행 한 번 가지 못했고, 누구는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짬뽕과 커피장사에 매달려 있으며, 누구는 콜라텍에서 노인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걸로 하루하루를 연명해 갑니다. 박정희 시대에는 1인당 국민총소득이 20배로, 전두환 시대에는 GDP가 2.8배 늘어났지만 그 눈부신 열매는 결코 그들의 몫이 되지 못했습니다. p 113



경제를 성장시키는 일은 결국 인간의 삶을 성장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명제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숫자보다 그 시절을 살아낸 평범한 이들의 작은 역사를 소중히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지금껏 버텨 낼 수 있었던 건 숫자로 대변되는 눈부신 경제 발전의 결과 때문이 아니라 팍팍한 삶 속에서도 함께 부대끼며 끝까지 곁에 있어 주었던 사람들 때문입니다. p 113



1934년 GDP 개념을 최초로 정희한 경제학자 사이먼 쿠즈네츠는 GDP의 태생적 한계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국민소득 추계로부터 한 나라의 후생을 알아내기는 매우 어렵다.


이 말을 현실에 적용해 볼까요? 공장의 폐수로 인해 마을의 식수원이었던 강물이 오염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마을 사람들은 그동안 공짜로 마시던 강물 대신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생수를 사서 마셔야 합니다. 이 소비 덕분에 GDP수치는 오르겠지만, 그 마을의 후생 즉 살림살이는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쿠즈네츠가 말하는 GDP의 태생적 한계입니다. p 118



거창한 경제 개념을 몰라도 우린 여러 경험을 토해 어떤 통찰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1948년 정부가 출범한 이래 1970년대 오일파동과 1998년 IMF 탁치 시절을 제외하고 우리나라의 GDP는 단 한 번도 내려간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여전이 많은 이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을 중산층이라 생각하는 사람의 수도 점점 줄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의 모순을 좀 더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GDP라는 숫자가 지닌 허상을 경계해야 한다’는 경제학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p 119



그동안 경제학에서 정의했던 빈곤은 ‘필요한 상품을 살수 없을 정도로 부족한 소득 상태’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센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빈곤은 물적 자원이 부족한 상태가 아니다. 잠재 역량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상태다.” 라고 말하며 자신의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상황을 빈곤으로 규정했습니다. 빈곤은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가질수 없다는 데 있는게 아니라, 가난을 더욱더 비극적으로 만든는 상황에 있다는 것입니다. (…) 그러나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빈곤은 필연적으로 불평등과 공정성 같은 사회문제와 연결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기근과 마찬가지로 전반적인 경제 위기 또한 ‘악마는 제일 뒤처진 꼴찌부터 잡아먹는다.’는 표현처럼 사회에서 가장 최하층에 속한 사람들부터 희생시키지요.”라는 센의 말은 자본주의 사회의 잔인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p 123~124



“한강의 기적”. 6.25 전쟁 이후 대한민국의 고도 성장을 일컫는 말이다. 근데 참 웃기다. 실제로 한강의 기적을 경험한 건 서류상으로만 있는 ‘법인’이 아닌가? 아니면 ‘법인’을 내세워, 그 뒤에 숨어있는 설립자가족이라던가. 근데 분명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사람들은 ‘법인’이 아니라, 대다수 노동자들이 땀과 고혈이 아니었나? 그들의 땀과 고혈이 아니었으면, 한강의 기적은 개뿔. 어쩌면 아직도 한국전쟁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헌데... 그렇게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대다수의 노동자들의 삶은 어떠한가.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노동자중에는 우리 부모님도 있다. 우리 부모님은 한강의 기적을 맞이했나? 음, 글쎄. 우리 부모님의 지금 상황은 그저... 과거에는 시골이었던, 이제서야 조금 수도권 취급받는 외곽 도시의, 대출이 껴있는 아파트 한채가 고작이다. 거기다 두분 모두 아직도 은퇴를 못하셨다. 아, 아니면 한강의 기적이란게 이런걸 뜻하는거였는데, 내가 몰랐던건가!




▶경제적 불평등은 정말 피할 수 없는 것일까?


국내총생산이 절반으로 줄었다는 건 국민들의 수입이 반토박 났다는 의미입니다. 한마디로 모두 함께 망해버린 것이죠. 하일부로너는 대공황의 원인을 이렇게 분석합니다.


생산성 증가에서 나온 이득을 저소득층에게 분배하지 못한 반면 잠재적으로 지출하지 않으려 드는 사람들의 소득이 크게 불어난 관경에 주목해야 한다.


대공황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열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창출된 부가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가지 않고 굳이 필요치 않은 계층으로 흘러들어 금고에 쌓이기만 한 결과 경제긔 균형이 무너지고 대공황이 불어닥친 것입니다. 결국 불평등은 이렇게 사회 구성원 모두를 가난하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p 191



놀랄만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자본과 노동이 손을 맞잡고 같은 목표를 향해 노력하자 경제 질서가 바뀐 것입니다. 이 협약을 통해 경제적 활동의 과실은 더 이상 특정 계급에 의해 독식되지 않고 자본가와 노동자가 함께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 기술의 진보, 자본과 노동 간의 협약 그리고 정부의 역할,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한 것은 위기를 극복하고야 말겠다는 인간의 의지와 실천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연,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 대공황 시대에 빗대 묘사한 ‘대압착시대(1930~1950까지 미국에서 증세 등 강력한 조세 정책으로 부유층과 저소득층 사이의 소득 격차 및 근로자 간 임금 격차가 급격히 좁아졌던 시대)’도 결국 인간에 의해 그 운명을 다하게 되었습니다. 세계화와 자유주의의 공모로 태어난 신자유주의가 대압착 시대의 저격수로 나섰기 때문입니다. 결국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에 의해 추동된 신자유주의도 인간들이 만든 정치적 결과였던 것입니다. p 194



정치와 경제 그리고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일 모두 인간의 영역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역사를 기억하고 진실을 좇는다면 ‘불평등은 어쩔 수 없다’라는 체념이 ‘불평등도 그 격차는 줄일 수 있다’ 라는 신념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 p 195



▶부자만이 아닌 모두의 자유를 위한 경제학


지금으로부터 50녀년 전 한 흑인 인권운동가(마틴 루터 킹)가 외친 보장소득 즉 ‘기본소득 운동’은 경제학자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던졌고 시대 담론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킹 목사가 암살당하고 한 달 뒤, 폴 새뮤얼슨, 제임스 토빈, 존 케네스 캘브레이스 등으로 대표되는 1,200명의 경제학자들은 미국 의회에 ‘(연간)보장소득’도입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냈습니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 1969년 닉슨 대통령은 4인 가족 기준 연간 1,600달러를 보장하는 법안인 ‘가족지원제도(FAP)’를 추진하였습니다. 하지만 마틴 루터 킹의 유산은 결국 현실화되지 못했습니다. 당시 백악관이 추진한 현대판 기본소득 법안은 미 하원의 문턱은 넘었지만 상원에서 10표차로 부결되고 말았습니다. 킹 목사의 꿈은 결국 무너져 버렸고, ‘진보와 복지’ 대신 ‘보수와 불평등’을 선택한 미국은 현재 선진국 중에서도 경제적 불평등 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가 되고 말았습니다. p 213



기본소득은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논쟁거리를 낳았습니다. 망명가들의 이해할 수 없는 논쟁에 아득함을 느낄때면 저는 그들의 주장에 현실을 대입시켜 봅니다. (…) 그럼에도 여전히 ‘아무 일도 안하면서 정부에게 돈을 달라고 하는 건 미친 짓이다’ 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가족 공동체를 한번 떠올려 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일을 하는 어머니, 직업이 없는 아버지, 대학생 아들과 고등학생 딸, 이렇게 네 식구로 이루어진 가정의 어머니는 자신의 수입을 아무 조건 없이 다른 가족들과 나눕니다. 만일 당신이 지구 공동체라는 말을 혐오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세상의 모든 부는 몇 안되는 천재가 만든다는 끔찍한 우화를 믿지 않는다면 당신도 지구 혹은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아무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존재 자체가 경제를 움직이고 부를 창출시키는 기반이니까요. p 222



실질적 자유를 얻기 위한 도구로써 기본소득에 관한 당신의 생각은 무엇인가요? 어쩌면 이에 대해 고민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야말로 코로나19 이후 세계에 대한 새로운 구상이 될지도 보릅니다. 팬데믹이라는 인류 전체의 위기 앞에서 우리가 불러낼 얼굴이 신의 형상일지 아니면 악마의 화신일지 결정하는 것도 이 고민과 대답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p 224


‘기본소득’. 난 기본소득을 찬성한다. 하지만 ‘모두’에게 ‘평등’하게 나누어주는건 반대한다. 적어도 일정 금액 이상의 소득이 있는 사람들이 기본소득까지 받는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누군가는 똑같이 세금내는데, 왜 받지 못하냐고 하며 ‘역차별’이라고 한다. 과거에 책인지 칼럼인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그 내용만큼은 선명히 기억나는 어떤 글을 읽었다. 그 글의 내용은 ‘역차별’을 이야기 한다는건, 무언가를 누리는 데에 있어서 그 사람이 이미 기득권층이기 때문이라는 내용이었다. 해서 ‘역차별’이 많아질수록, 사회적 약자에게 더 많은 것이 돌아갈 수록, 사회는 점점 살기 좋아지는 거라고 했다. 이 글이 지금까지도 내 뇌리에 남는 건, 나 역시 같은 사회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런 사회가 온다면 빈곤이라는 악마가 찾아왔을 때, 항상 잡아먹히던 꼴찌들이 힘껏 저항할수 있지 않을까? 자포자기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뿡뿡이가 그런 사회에서 살 수 있기를 바라는 건 내 욕심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삼국유사 - 현실과 환상이 만나고 다투다가 하나 되는 무대 클래식 아고라 2
일연 지음, 서철원 옮김 / arte(아르테)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난 역사책을 정말 좋아한다. 역사를 주제로한 교양서, 에세이, 여행서, 입문서, 학술서 기타 등등 왠만하면 다 읽는 편이다. 세계사도 좋아하고, 한국사도 좋아하기에 우리집에 있는 책중 많은 양이 역사를 주제로 한 책이다. 물론 그 중에서도 한국사가 압도적이다. 개인적인 취향을 고르자면, 난 한국사 중에서도 고대사에 관심이 많은 터라, 고대사 관련 책을상당수 읽었다. 내가 읽었던 수 많은 책들이 참고한 역사서 중 상당수가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이야기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에서 고대사를 기록하고, 현재 남아있는 제일 오래된 기록물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이기 때문에. 심지어 학교 국사시간에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대해서 무조건 배운다. 그렇기에 한국인이라면 이 두 역사책을 모르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을 것이다. 다만, 정말 씁쓸하게도 이 두 책을 다 읽어봤느냐고 물어본다면, “아니요” 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대다수 일 것이다. 나 역시 각잡아서 읽은 역사책은 『삼국사기』 뿐, 『삼국유사』는 읽어본적이 없으니까^_T. 




하지만 또...그렇다고 『삼국유사』의 내용을 모르는 건 아니다. 위에서도 말했듯 수 많은 역사책들이 『삼국유사』를 인용했고, 학교에서도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일화들을 가르치기도 했으니까. 예컨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모르는게 이상한) 환웅, 곰, 호랑이가 나오는 ‘단군신화’는 『삼국유사』 기이편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뿐만아니라 ‘미추왕과 대나무잎 군사들’, ‘만파식적’, ‘처용설화’, ‘수로부인 헌화가’, ‘서동요’ 등도 『삼국유사』 기이편에 실려있다. 고로 난 『삼국유사』는 읽어본적이 없으나,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상당수의 이야기들을 알고 있는 아이러니 한 이야기랄까? 하하하. 그래도 언제고 한번 쯤은 『삼국유사』를 제대로 읽어봐야지! 싶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 21세기북스(아르테)에서 고전시리즈를 출간하고 있는데, 이번에 나온 고전이 바로 『삼국유사』. 역사덕후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지:)



TMI지만.... 개인적으로 책을 살 때는 통일성을 중시하다보니, 시리즈로 나오는 책들은 계속해서 구입한다. 대표적인 예가 서해문집 고전시리즈 ‘오래된 책방’(리뷰올린건 몇 건 안되는게 함정ㅋ). 헌데 이번에 21세기북스에서 출간된 『삼국유사』를 읽고 보니, 표지도 이쁘고 무엇보다 가독성이 좋다. 아무래도 고전은 옛말을 지금 우리가 쓰는 말로 번역해야하는 어려움이 있고,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단어도 있고 하다보니 가독성이 떨어지는 번역서도 많다. 헌데... 이 책은 가독성이 좋네? 고전은 가독성이 제일 중요하니까. 그러다보니...21세기북스 고전시리즈도 전부 모아볼까 싶은 생각이 스물스물 든다. 아 근데 분명 서해문집 고전시리즈랑 중복되는 책이 한 두권이 아닐거라, 솔직히 고민중. 하 ㅋㅋㅋ고민되네.



『삼국유사는 』  그 분량이 정말 방대하다. 쉽게 말하면 ‘벽돌책’이랄까^^. 벽돌책이라면 손 조차 가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그런 사람들도 『삼국유사』 만큼은 아주 쉽게 읽을 수 있다. 왜? 삼국유사는  읽고 싶은 부분만 골라서 띄엄띄엄 읽을 수 있는 책이니까. 거기다 고리타분한 인세의 ‘정치사’가 아니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기이하고 신기한 이야기들이다. 단군신화처럼 곰이 여자가 되고, 때로는 도깨비가 나오고, 전쟁을 멈추는 피리도 나오고, 용도 나온다. 즉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이야기들은 대부분이 흥미진진하다.






『삼국유사』는 ‘왕력.기이.흥법.탑상.의해.신주.감통.피은.효선’ 이라는 총 9편의 주제로 나뉜다. 다만 왕력은 일종의 연표, 계보에 해당하여 이 책에서는 제외되었다. 



기이편은 왕들의 이야기이되, 기이한 이야기가 섞여있다. 대체적으로 기이편에 실려있는 이야기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가 많다. 흥법, 탑상, 의해, 신주, 감통, 피은편은 저자가 스님이다보니 불교적 내용이 많다. 『삼국유사』 이야기중 절반 이상이 불교적인 색채가 가미되어 있는 이유가 바로 이때문이다. 마지막 효선편은 말그대로 효도와 선행에 대한 것이다. 



지금까지 『삼국유사』는 여러 출판사에서, 여러 번역/해설본이 나왔는데 내가 굳이 이 책을 읽은 이유는 뭐였을까?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삼국유사』에 대한 이 책 번역자의 해석이 와 닿아서 그런게 아닌가 싶다.



언젠가 단군 신화 이래로 단일민족, 통일된 한 줄기 민족혼 등을 강조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한국에 필요한 덕목은, 그 무엇보다도 다양성을 존중하고 개성이 다른 사람들끼리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내는 게 아닐까? 남과 다른 ‘나’가 존중받지 못하는 탓에, 언제부턴가 누구라도 분노와 울분을 품고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나’가 존중받지 못하는데, ‘너’를 인정해서 이들이 ‘우리’로 이루어질 리도 없다. 그런데 사실은 단일 민족설의 토대가 된 단군 신화를 전해준 『삼국유사』 조차도, 불교와 비불교, 정치와 문화예술,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들, 말하자면 세상 모든 것들의 공존과 만남, 화해를 거듭거듭 강조해왔다. 

『삼국유사』에 나왔던 이들을 보자. 바다를 넘나들며 문명을 교류했던 석탈해, 허왕옥과 연오랑, 세오녀 등은 다문화를,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김현의 아내 호랑이, 살아있는 몸으로 신이 된 욱면 등의 여주인공은 편견을 벗어난 다양한 시각을, 한국의 고유신앙을 포용하며 성장했던 한국불교는 이념과 사상의 다원성을 증거하고 있다. 우리가 미래에 이루려 하는 다문화, 다양성과 다원성을 지닌 새로운 한국은 이미 『삼국유사』를 통해 우리가 한 차례 이미, 이루었던 것이다. p 016



과거 우리는 단군의 후손, 단일민족이라고 운운했던 적이 있다. 이 땅에서 단군의 후손이자 단일민족이라며, 우리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기 시작했던 때는 다름아닌 우리 역사의 암흑기였던 일제강점기 당시였다. 악마같은 일제와 맞서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라는 끈이 필요했을 때다. 이때의 단군신화는 일제에 핍박받던 우리 민족의 힘이자 등불이었다. 일본에 맞선 조선인들은 (고)조선을 세운 단군의 후예이자, 단일민족이었다. 우리끼리 똘똘 뭉쳐야 했기다. 그게 바로 시대가 만들어낸 가치관이기도 했다. 그때는 그게 정답이었다.



그 이후로 백여년의 시간이 훌쩍 지났다. 시대가 바뀌었다. 지금은 단일이 아닌, 다원화된 사회이다. 지금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고, 존중해야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단일민족 운운하며, 나와 ‘우리’끼리만 똘똘 뭉쳐서 다른 사람들을 차별, 더 나아가서 혐오를 조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보통 민족을 떠나서, 그들이 말하는 ‘우리’와 ‘다른’ 사람이라면 무조건 적대시하고 배척한다. 그들은 단군신화를 하나의 방패로 삼아, 자신들의 생각이 올바르다고 믿는다. 참으로 웃기지도 않다. 정작 단군신화를 뜯어보면 하늘을 숭상하는 종족과 곰을 숭상하는 종족, 즉 서로 다른 종족들의 공존이다. 뿐만 아니라 단군신화를 알려준 『삼국유사』도 단일민족이라고 외부 종족을 배타적으로 대하지 않았으며, 외려 여러 민족과 어울려 사는 모습을 그리고, 때로는 그들에게 무언가를 배우기도 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는 외침이 잦았기에, 단일민족이 될래야 될 수도 없다.



16세기에 쓰여진 『삼국유사』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알려주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의 품격 - 말과 사람과 품격에 대한 생각들
이기주 지음 / 황소북스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 새벽마다 눈이 번쩍!하고 뜨인다. 그리고.....꽤 오랜 시간 잠을 못잔다^_T. 집나간 잠을 돌아오게 하려고 이런 저런 방법을 써봤지만 실패. 그러다 신랑이 책을 읽어보라길래, 이번엔 그 새벽에 책을 집었다. 왠걸. 잠은 더 달아나고 그냥 다 읽었다. 그렇게 새벽녘에 읽은 책이 「말의 품격」. 하하하. 역시 밤에 책 읽으면 잠이 더 달아다는 건 국룰................은 개뿔. 다음 새벽엔 「코스모스」를 봐야겠다. 그정도면 다시 잠들겠지....




그나저나 오랫만에 읽은 「말의품격」은 한 밤중에 내 잠을 깨운 것은 물론이요, 내 자신을 반성하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하나 같이 맞는 말 투성이에다가, 읽으면 읽을수록 내 지난날의 언사가 계속해서 떠오르기 때문이다. 말은 글과 달리 내뱉으면 주어담을 수 없다. 그래서 말을 할 때는 한번씩 생각하고 말해야하는데, 하. 그게 정말 어렵다. 



무심코 내뱉은 말은 누군가를 할퀴는 칼이 될 수도 있기에, 말하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한다는 사실을 안다. 해서 격식을 차리고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는 그게 가능하다. 하지만 반대로 나와 친한 사람들과 마주하면, 이상하게 잘 안된다. 나와 평생 갈 사람들이기에, 그래서 더욱 말할 때 예를 갖추고 조심스레 대해야하는게 맞는게 그게 어렵다. 그래서 때로는 악의 없는 내 말 한마디에, 내 주위 사람이 상처를 입기도 한다. 이게 참, 반성을 하는데도 고치기가 어렵다. 하, 나이를 먹어도 이러니 원. 앞으로 우리 뿡뿡이가 이런 엄마를 보고 뭘 배울지T_T..



옛말에 이청득심耳聽得心이라 했다. 귀를 기울이면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일리가 있다. 독일의 철학자 게오르크 헤겔은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바깥쪽이 아닌 안쪽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상대가 스스로 손잡이를 돌려 마음의 문을 열고 나올 수 있도록,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해야 한다. 그런 뒤에야 마음을 얻는 것도 가능하다. 이는 얼핏 교과서적인 얘기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다양한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수많은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적절한 말과 행동을 건네야 하는데, 이때 본질적인 해결책은 다름 아닌 상대방의 말속에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p 025-026


중용은 기계적 중립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용은 단순히 중간 지점에 눌러앉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여건에 맞게 합리적으로 위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유연한 흔들림이라고 할까. (생략) 절충과 협상 과정에서 나름의 전제 조건이 있을 거란 생각도 든다. 무엇일까? 상대에 대한 완벽한 이해일까? 글쎄다. 각기 다른 두 사람의 만남은 서로 다른 우주의 충돌이다. 충돌은 두 주체가 서로 맞부딪치고 맞서는 것이다. 갈등을 낳는다. 나와 생각이 다른 누군가를 향해 내뱉는 “내가 당신을 이해할게요” 라는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완벽히 뿌리내리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p 064-065



이 구절들을 요약하자면, 결국 ‘존중’과 ‘경청’ 이다. 존중과 경청은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에 제일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서로 존중할 줄 안다면 아주 자연스레 혐오는 사라진다. 모름지기 존중이란 서로가 같은 인간임을 알고,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그 다름을 인정할 수는 있게 한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에, 경청도 가능해진다. 경청이 가능해지므로써 불통은 소통이 되고, 불통으로 인한 감정소모도 사라진다.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만약 존중과 경청이 아주 당연한 사회적 가치가 된다면, ‘다름’이라는 이유 하나로 쏟아지는 혐오범죄와 마녀사냥은 자연스레 사라지지않을까.




삶의 지혜는 종종 듣는 데서 비롯되고

삶의 후회는 대개 말하는 데서 비롯된다.

-말의품격 p 018



살다 보면 크리스 가드너의 사례처럼, 긍정적인 말 한마디에 절로 미소를 짓게 되는 순간이 있다. 말에는 분명 모종의 기운이 담긴다. 그 기운은 말 속에 씨앗의 형태로 숨어 있다가 훗날 무럭무럭 자라 나름의 결실로 이어지기도 한다. 말은 오며하다. 말은 자석과 같다. 말 속에 어떤 기운을 담느냐에 따라 그 말에 온갖 것이 달라붙는다. (생략) 반대로 긍정적인 생각이 모두 걸러진 말, 비판론과 염세주의로 똘똘 뭉쳐진 언어만 내뱉는 사람은 사회 관계망 속에서 고립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p 099 - 100



말과 글에는 사람의 됨됨이가 서려 있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사람의 품성이 드러난다. 말은 품성이다. 품성이 말하고 품성이 듣는 것이다. 격과 수준을 의미하는 한자 ‘품品’의 구조를 뜯어 보면 흥미롭다. 입 ‘구口’가 세 개 모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말이 쌓이고 쌓여 한 사람의 품성이 된다는 뜻이다. 사람의 체취, 사람이 지닌 고유한 ‘인향人香’은 분명 그 사람이 구사하는 말에서 뿜어져 나온다. p 137-138



타인을 향해 생각을 표현하고 감정을 전달하는 행위는 만인이 고민하는 숙제다. 그 과정에서 혹자는 상대의 의표를 찔러야 한다는 부담을 떨치지 못하고, 혹자는 누군가의 화법과 말투를 무작정 따라 하다가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우린 그렇게 살아간다. 말에 비법은 없다. 평범한 방법만 존재할 뿐이다. 그저 소중한 사람과 나눈 대화를 차분히 복기하고 자신의 말이 그려낸 궤적을 틈틈히 점검하는 것, 그리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화법을 찾고 꾸준히 언품을 가다듬는 수밖에 없다. p 153



말에는 힘이 있다고 한다. 비슷한 의미로 옆나라 일본에는 언령言靈(코토다마)이라는 말도 있다. 나역시 말에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매일을 긍정적인 말을 쓰는 사람과, 부정적인 말을 쓰는 사람은 행동부터 분위기, 주변사람들까지도 판이하게 다르지않나. 특히 부정적인 말을 쓰는 사람들 주변에는 제대로된 사람이 없기도 하다. 끼리끼리는 과학이니까.



본인도 모르게 부정적인 말, 뾰족한 말, 험한 말을 쓰다보면 그로인한 부정적인 영향은 생각보다 크게 돌아온다. 그 영향이 본인에게만 한정된다면 ‘똥 묻은 개’라 생각하고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다. 특히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원치 않아도, 부정적인 말만 쓰는 사람들을 만나기 일쑤다. 회사에서, 거래처에서, 혹은 학교에서. 분명 기분이 정말 좋은 하루였는데, 부정적인 말만 하는 사람이 나타나서 네발내발하면서 욕짓거리를 내뱉는다면 어떠겠는가? 말이 누군가를 해치는 무기가 되는 극단적인 상황도 있다. 누군가를 비난하는 무분별한 악플들을 보자. 우리는 여러차례 뉴스에서 본 적이 있다. 무분별한 악플에 못이겨 생을 뒤로한 사람들을. 부정적인말은 그 자체 만으로도 누군가의 인생을 처참하게 무너뜨리는 무기가 된다.



나는 왠만하면 긍정적인 말을 쓰려고 노력한다. 욕같은 험한말은 왠만하면 사용하지 않는다. 이건 학창시절부터 그랬던 것 같다. 중학생 때였나, 네발내발하면서 욕하는 동급생들을 보면서, 꼭 뇌 텅텅인 것 처럼 보였다. 그전에도 욕을 잘 하지 않는 나였지만, 이 이후로는 더더욱 안하게되었다. 물론 운전을 하다가 가끔 만나는 김선생님(^^)들로 인해 자그맣게 욕을 하는 경우가 있긴 한데, 그건 뭐 차에 나 혼자있을때니까!



우리 뿡뿡이에게도 말에 대한 교육을 잘 해줘야할텐데. 휴. 요즘은 뭐 어린애들도 밖에서 뛰어놀다가도 네발내발 하고 있으니, 이런 험한 욕의 파도에서 우리 뿡뿡이에게 어떻게 교육을 해야할지 고민이 많다.



사람이 지닌 고유한 향기는

사람의 말에서 뿜어져 나온다.

-말의품격 p 132



정신과 의사이자 저술가인 아론 라자르에 따르면, ‘사과는 곧  솔루션’ 이다. 용기에 바탕을 둔 진솔한 뉘우침이야말로 상대망의 마음을 움직이는 유일한 해결책이며 이해 당사자들이 갈등과 불신을 해소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의사소통 도구라는 것이 그의 논리다. 일리가 있다. 사과는 갈등과 갈등 사이에 유연함을 스며들게 한다. 사과는 틀어진 관계를 복원하는 기제機制로 작용한다. (생략) 지는 법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지는 행위는 소멸도 끝도 아니다. 의미있게 패배한다면 그건 또 다른 시작이 될 수 있다. 상대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인정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p 187-188



이 구절을 읽었을 때, 요즘 뉴스를 도배하고 있는 두 사건이 떠올랐다. 카카오 먹통 사건과 SPC그룹 제빵사 사망 사건. 두 사건 모두 워낙 어마어마한 사건이었기에, 국민의 지탄을 받았다. 자, 그럼 잘못을 일으킨 두 그룹의 대표는 사과와 이후의 행동은 어땠을까? 



카카오 대표가 사과할 당시에는 자신들의 잘못을 인지한 듯 했으나, 이후 국감 및 과기부에 제출한 사고 보고서등에서는 본인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식으로 말을 바꿨다. 카카오 먹통으로 인한 소상공인, 카카오 유저들에 대한 피해보상에 대해서도 매우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SPC그룹 대표는  유가족들에겐 사과 한마디도 없었지만, 기자들 앞에서 대국민 사과를 했다(대체 왜??). 심지어 고인의 장례식장에 삼립 빵을 무더기로 보내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사망사건이 일어난 공장은 계속 가동되었고, 불과 몇일 안지나서 또 다른 SPC 계열사 직원의 안전사고가 발생했다(하지만 SPC그룹에서 만드는 포켓몬빵은 지금도 잘팔린다^^).



이는 비단 카카오나 SPC 문제만이 아니다. 수많은 기업들은 돈으로 덮기 어려운 사건이 발생했을 때, 언제나 피해당사자가 아닌, 대국민 사과를 한다. 미리 입이라도 맞춘것처럼, 하나같이 다 똑같다. 이는 범죄자들이 피해자가 아닌 판사들에게 반성문을 제출하는 것 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거기다 재발방지, 후속조치라고 하는 것들도  피해당사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이 아닌, 어디까지난 기업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한다.



잘못을 했으면 깔끔하게 인정하고, 사과하고, 보상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것일까. 어른들을 보고 자라는 우리 아이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무엇을 배울까? ‘돈 있으면 잘못을 저질러도 괜찮구나, 내 잘못이아니라고 잡아떼도 되는구나’ 라고 배우는 건 아닐까. 씁쓸하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우주를 얻는 것과 같다.

-말의품격 p 18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의 우주를 받아든 손 소울앤북 시선
최준렬 지음 / 소울앤북 / 2018년 9월
평점 :
품절


내가 책을 즐겨 읽는 편이긴 하지만, 시집은 잘 안읽는다. 주로 읽는 책들이 역사도서라서 그런가, 막 흔히 말하는 시어, 은유, 함축..등등이 나에겐 너무 어렵다고 느껴졌달까. 그래서 학교에서 배우던 일제강점기 시인들(윤동주, 김소월 등)의 시집도 가지고는 있으나, 솔직히 말해서 제대로 읽지는 못했다.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의 독립선언문들은 그렇게 확확 들어오고, 한번 읽고 두번 읽고 그러는데......시 만큼은 그게 안되더라, 하. 난 분명 본투비 문과인데, 왜이렇게 시가 어려운지! 하지만, 아무리 시가 어려워도 시집을 읽을 환경에 처하면 읽게된다. 시집을 읽을 환경이 대체 뭐길래? 라고 갸우뚱 할 지도 모르는데, 적어도... 중앙산부인과에서 출산을 하게된다면 그 ‘환경’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헤헤ㅔㅎㅅ.





오늘 리뷰하는 시집 『너의 우주를 받아든 손』을 쓴 시인, 최준렬 시인의 본케는 산부인과 전문의다. 그는 시흥 중앙산부인과 원장이기도 하다. 



나는 뿡뿡이를 품던 10개월간 중앙산부인과를 다녔고, 병원에 갈때마다 매번 벽면 전광판에서 한편의 시를 마주했다. 그 시의 제목은 ‘분만실에서’. 병원을 다닌 초반에는 산부인과라는 병원에 걸맞는 시라고만 생각했는데, 왠걸? 나를 담당해주시는 원장님이 쓰신 시였다. 즉, 이 시집을 쓴 시인 최준렬은, 나와 뱃속에 있는 뿡뿡이를 10개월간 돌봐주신 의사선생님이자, 우리 뿡뿡이가 세상에 나왔을 때 처음 마주한 분이다. 




분만실에서

성큼 걸어나오지 않고

아주 긴 시간

느리게 하강한 너를

맞으러 서 있다

너는  내가 받아낸

수많은 생명 중의 하나

첫울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네 모습을 바라본다

묵직한 너의 우주를 받아든

손이 부끄러울 때가 있다


순수하고도 거룩한 인생에서

네가 처음으로 잡은 손

내 손가락을 움켜쥐는

너의 무한한 신뢰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힘이다


그것도 잠시

너를 엄마 품에 안겨준다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곳

엄마의 가슴은 천국이다


너의 등을 쓸어주고

태명을 예쁘게 부르면서

사랑한다 말하면

너는 대답하듯 크게 운다


사랑이 피어나는

아침 꽃밭을 본다

긴 진통의 여행을 끝낸

너와 네 엄마는

얼굴을 마주보고 잠을 잔다




처음 원장님을 뵈었을 때는, 조금은 무뚝뚝하셔서 약간 서운한 면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 시를 쓴 분이, 나를 담당하시는 원장님이라는 걸 안 이후에는 조금 달라졌다. 원장님이 겉으로는 살짝 무뚝뚝하셔도, 속은 그렇지 않으시구나. 병원에 걸려있던 이 시 한편이 나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나를 담당해주시는 최준렬 원장님에 대한 믿음을 주었다. 그 믿음 속에서 우리 뿡뿡이는 10개월간 별다른 이벤트 없이 건강하게 엄마 뱃속에 있다가, 원장님 손을 통해 건강하게 세상에 나왔다. 정말 다시한번 원장님과 수술실 간호선생님들에게는 무한한 감사를...!




계류유산


어린아이는 묻는다

엄마 뱃속의 동생이 왜 자라지 않는지


콩콩 뛰는 동생 심장 뛰는 소리가

왜 들리지 않는지


조용히 잠만 자면서

왜 쑥쑥 크지 않는지


사라진 입덧처럼 기척이 없는

아랫배를 만져보다

꽃잎 지는 창밖을 바라본다


나는 아이에게 침묵하고

아이는 보채듯이 또 묻는다

동생을

언제쯤 만날 수 있는지


나는 대답하지 못한다


태어나지도 않은 생명이

어떻게 죽을 수 있는지

나도 모르는 것을


아이는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아는 사람은 아는 이야기지만 난... 뿡뿡이를 낳기 전에, 난 또 한번의 임신을 했었다. 계획했던 임신이었고, 기다리던 아이였다. 당시에 담당 선생님도 최준렬 원장님이였다. 병원에서 분명 힘차게 뛰는 심장소리도 들었고, 기뻤었다. 하지만 그렇게 끝났다. 정기검진차 병원에 간 날, 심장소리가 들리지가 않았다. 원장님은 순간 당황하셨고, 난 순간적으로 멍해졌고, 신랑은 날 챙기느라 바빴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당시에 원장님이 엄마의 잘못이 아니라고 해주셨다. 그 한마디 덕분에 자책감에서 조금이나마 더 빨리 빠져나왔던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그 한마디가 없었다면 난 자책감에 빠져서 꽤 오랫동안 허우적거리지 않았을까.



5.18


날이 밝으면

형사 두 명이 집에 들어와

진을 치고 앉아있고

어머니는 휴교령이 내려진

대학의 적막한 잔디밭으로

풀매기 작업을 나갔다

최루가스 스멀스멀 올라오는 잔디밭

잡초 하나를 솎아내면

수배된 아들 생각에

매운 눈물 하나 떨구었다

쫓기는 동생을 접속하러 가는 미로

몇 번씩 뒤돌아보고서야

길이 끝났다

홀어머니의 애간장 끊어지는 한 숨 소리가

5월의 밤의 공포를 높여갔다

조사실이 있던 지하실로 가는 길은 지옥의 계단

그 계단은 흔들리고 내딛는 동생의 다리를

지켜주기엔 나도 어렸다


지술서를 쓰는 떨리던 손을 바라보며

나는 울고 있었다

취조하던 경찰이 피의자의 귀뺨을

사정없이 내리치던 지하실의 풍경

차라리 영화 속의 한 장면이었다면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


죽어야 할 사람은 아직도 살아있고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이제는 많지 않다.




마감의 시간


하루에도 마감이 있다


매일 모든 일에서 문을 닫고

퇴근하는 시간


빛의 스위치를 내리고

잠자리에 드는 어두운 시간도

마감이다


지금은

한해를 마감하는 시간


그렇게 마감이 쌓이고 쌓이면

세월은 대나무처럼 매듭져 자라나고


시간을 쟁여놓은 나이테처럼

나이가 된다


언젠가는 내 인생의 마감도

동지冬至처럼 말없이 올 것이다


단풍잎들 하혈처럼 쏟아낸

겨울나무 아래서

가을의 마감을 바라보고 있다



중앙산부인과에서는 병원에서 출산하는 산모들에게 출산 축하선물 꾸러미를 준다. 대부분 아기용품들인데,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으니 바로 이 시집이다. 이 시집을 받고, 중앙산부인과 바로 옆 중앙조리원에 이주일간 있었기에......위에서 말한 ‘시집을 읽을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ㅋㅋㅋㅋ 


참고로 중앙산부인과 입원실과 중앙조리원 각 방마다 최준렬 원장님의 시집이 별도로 비치되어있기에, 이건 뭐. 안 읽고 싶어도 계속 시집이 눈에 띄니 궁금해서 읽을 수 밖에 없기도 하고! 



출산후 입원실과 조리원에서 읽었던 원장님 시집을, 요즘 다시 읽고 있다. 왜? 우리 뿡뿡이를 재우기에 아주 효과적이기 때문에!!!



이게 무슨 말인고 하면, 요즘 우리 뿡뿡이가 4개월 원더윅스(^_T)때문인지 낮잠에 드는게 넘 힘들어한다. 책을 읽어주면 엄마 말소리(?)에 편안해져서 잠들지 않을까 싶어서 책을 읽어주려고 하니, 이거 참. 눕혀놓으면 칭얼내고, 안아줘야 편안히 있는데, 안은 상태에서 책을 읽기가 넘 힘들었다. 그래서 최대한 얇고, 한 단락으로 끊어 읽을 수 있는 책을 찾다가 이 시집을 꺼냈는데.................완전 대박!



뿡뿡이를 힙시트로 안고 이 시집의 시를 읽어주다보면 뿡뿡이가 잠이 든다.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원장님의 시집이 나에게는 육아꿀템이 되어버린!! 거기다 평소 엄마아빠가 쓰는 일상대화가 아닌 언어들이니, 우리 뿡뿡이 성장발달, 언어발달에도 좋을 것이고. 정말 여러모로 원장님은 나의 은인...헷:) 



다시한번....감사합니다, 최준렬 원장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을 뒤흔든 50가지 범죄사건
김형민 지음 / 믹스커피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름 개방된 역덕(?)이다보니 여러 장르의 역사책을 읽곤 했는데, 범죄관련 역사책은 또 처음이다. 그동안 비슷비슷한 책만 읽은 느낌인지라, 뭔가 이 책 새롭다새로워! 심지어 다루는 역사 속 범죄사건이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전 세계적으로 다루고 있고도 하고. 대체적으로 생소한 역사 속 범죄이야기인데, 일부는 알려진 이야기도 있다. 요즘 여러 TV프로그램(꼬꼬무, 세계다크투어 등) 에서 과거의 범죄사건을 다루기도 했는데, 그 범죄사건들 일부가 이 책 속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뭐, 중복이면 어떠하리. 이런 이야기는 한번보고, 두번보고, 세번봐도 재밌는걸?




역사책을 읽고 싶긴 한데, 뭔가 새로운 역사책을 읽고 싶다면? 바로 이 책 「세상을 뒤흔든 50가지 범죄사건」 추천추천! 뭐, 굳이 따지자면 역사책이라는 느낌보다는 꼬꼬무, 그알st 같은 책이긴..한데..ㅋㅋㅋ



읽다보니 세계사 속의 범죄보다는 한국사 속의 범죄가 더 눈길이 가는건, 역시 내가 한국인이라서 그런건가? 아니면 지금도 동일한 사건들이 반복되어서 그런건가! 분명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어떤 류의 범죄사건은 사라졌지만, 반대로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이 생겨나는, 오히려 더 진화한 동종 범죄사건들도 있다는게 참 씁쓸하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데, 글쎄. 난 죄도 밉고 사람도 밉던데? 간혹 범죄자의 생활환경 또는 어린시절의 학대 등을 이유로 참작하거나, 범죄를 저지를 수 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미화하는 게 곧잘 보이는데, 이건 정말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범죄자의 ‘생활환경이 불우해서, 학대받아서, 어쩔수없어서’ 등으로 그들의 범죄를 합리화한다면, 그건 친일파(매국노)들에게도 면죄부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논리는 동일한 환경에서 자라도 범죄와는 거리가 아주 먼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과, 친일파(매국노)와 달리 나라를 위해 자신을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을 부정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 세무 공무원 이석호, 그는 어떻게 대한민국 최고의 땅부자가 되었나!


세금 거두는 걸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 이른바 세리, 아전, 세무서원은 이 복잡하고도 피할 수 없는 세금 징수를 집행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악역을 담당해야 했다. 정직한 사람도 많았지만 세금을 빌미로 배를 채우거나 장난을 치던 나쁜 이들도 적지 않았기에 원성과 지탄의 대상이 되기 일쑤였다. (생략) 당국의 수사 때문에 “세무행정에 지장이 생기는”일은 수십 년이 흘러도 거짓말처럼 재연되었다. “검찰이 세무공무원들의 부조리에 대해 수사를 벌이자 서울 강서, 동작, 영등포, 관악세무서를 비롯 수도권 지역 20여 개 세무서의 소득세과 소속 세무공무원 중 대부분이 잠적해버려서 일선 세무 업무가 마비 상태에 빠졌다.”라는 것도 모자라 “해당 세무서장들이 검찰로 찾아와 세무공무원들이 검찰의 수사 확대를 겁내 잠적, 업무가 마비되고 있다며 수사 중지를 요청”한 상황까지 똑같았던 것이다. p 213~214



“정부는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추진하면서 부족한 재원을 마련하고자 ‘국유지 일소 계획’을 세워 국유지 매각을 독려했다. 이석호 씨는 관세 담당관으로 국유지 매각 업무를 맡고 있었다. 이 씨는 ‘국유재산에 관한 사무에 종사하는 직원은 그 재산을 취득하지 못한다’(국유재산법 14조)는 조항을 피해 친인척 등 타인 명의로 국유지를 싼값에 매입하거나, 점유자들에게 점유 중인 국유지를 매수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광주지방국세청 징세2계장(본인)’ 명의로 보내 국유지를 판 뒤 자기가 전매받는 형식으로 1만 200여 평을 ‘일소’하는 실적을 올렸다.”


무슨 말인가 하니, 국유지를 팔아 재원을 조달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을 이용해 일가붙이에게 싸게 팔아치우거나 나라 땅을 점유한 이들에게 국유지를 헐값에 팔아치우곤 가로채거나 되파는 등 20세기의 봉이 김선달 노릇을 한 것이다. 그가 팔아치운 토지 목록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질 지경이다. (생략) 숫제 문화재고 천연기념물이고 공원이고 가리는게 없었고, 해당 관청은 이석호가 국유지를 팔아치운 것도 모르고 그 땅에 들어와 있던 사람들에게 임차료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팔아치운 땅이 여의도의 30배쯤 되는 3,045만 평이었다. (생략) 그런데 그에 대한 처벌은 놀라울만큼 가벼웠다. 1994년 구속된 후 대법원까지 올라가 징역 7년을 선고받은 이석호는 형기도 채우지않고 가석방 되었다. p 216


예나 지금이나 다를바 없는 공직자들의 비리, 부정부패!!! 정말 대한민국에서 사라지지 않는 범죄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이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자, 공직자 비리의 정점인 이씨는 구속되었으나, 가석방! 심지어 그 이후에도 몰래 취득한 국유지를 위조한 매도증서를 이용해 특례매입 등 191억원을 챙겼고, 그 아들 역시 82억원을 챙기는 등 국가 땅을 가지고 돈놀이를 했다. 그 과정에서 현직 공무원들의 비호를 받은 건 덤! 이건 과거 공직자의 비리라고 하기엔, 우리에게 너무 친숙하잖아?



세종시 공무원들의 특공 비리라던가, LH직원들의 신도시 땅 투기, 신도시가 생기는 지자체 공직자 땅투기, 건강보험공단 횡령사건… 뉴스에서 나온 공직자 비리들만 나열해도 이정도인데, 뉴스로 알려지지 않은 공직자 비리 사건은 얼마나 많을지! 거기다 고위직 공무원들 재산내역 보면, 어휴. 한평생 공직생활만했다는데, 그 정도의 재산을 모을 수 있는지가 참 의아하다.



김영란법 이딴건 다 의미가 없다. 어차피 비리를 저지른 공무원들은 동일한 전적이 있는 현직, 전직 공무원들이 서로 감춰주고, 도와주고 할테니. 아마 대한민국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는 범죄가, 이런 공직자들의 비리&부정부패가 아닐까. 에잇, 퉷퉷퉷!




▶ 1970년대 흔했던 10대 ~ 20대 식모, 그녀들은 범죄의 피해자였다.


내 이모가 오랫동안 살았던 오래된 아파트의 부엌 옆에는 창고라고 하기엔 뭐하고 방이라고 부르기엔 좁은 공간이 있었다. 그곳은 ‘식모방’으로 설계된 방이었다. 당시 그 정도 규모의 아파트면 식모를 들이는게 상식이었고, 그 상식이 설계에 반영된 것이었다. 기실 부잣집이 아니더라도 웬만한 살림을 꾸리는 가정에서 식모를 들이는 건 흔한 일이었다. <하녀(영화)>에서 하녀의 유혹에 넘어가는 주인 역시 부자가 아니라 학교 음악 선생님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p 257



식모는 사회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에 속했고, 노동법 등과는 전혀 상관없이 주인집의 ‘하녀’처럼 일해야 했다. 청록파 시인으로 유명한 박두진처럼 식모의 혼처를 구해주고 혼수를 장만해준 것도 모자라 결혼식장에서 친아버지처럼 신부의 손을 잡고 입장했던 따뜻한 사례도 있긴 하다. 하지만 주인집의 호통과 학대에 시달리며 모진 가사노동에 종사하는 이가 부지기수였다. 나아가 범죄의 희생양이 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p 258



1965년 11월 17일자 <경향신문>에 ‘대학 나온 인텔리 주부’가 집에서 다이아몬드 반지가 없어졌다는 이유로 식모를 가둬 놓고 화젓가락으로 지지고 빗자루로 때린 끝에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 등장한다. 죽은 식모의 나이는 불과 열 다섯 살이었다. 같은 해 10월에도 충북 제천경찰서 간부 집의 열다섯살 식모가 도둑 누명을 쓰고 곤봉으로 두둘겨 맞아 중상을 입었다는 보도가 나왔으니, 언론에 등장하지 않는 피해 사례는 얼마나 많았을까 싶다. p 259



이 시기 식모는 모진 노동과 학대와 더불어 집주인 남자들의 성적착취 대상으로 쉽사리 전락하기도 했다. 그 누구로부터도 제대로 된 관심과 보호를 받지 못했던 10대 소녀들은 더러운 욕망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취침 중에 몰래 침입해 욕정을 채우고 그 후에도 범하려 하므로… 동민들이 분개해 경찰에 고발”한 사건부터 “강도를 가장해 식모를 욕보인 뒤 나가선 복면을 벗고 강도야 부르짖었다가 들통난 집주인”까지 세상에 알려진 일만 해도 헤아릴 수가 없는데, 얼마나 많은 비통한 사연이 우리 역사의 그늘에 암장되었는지 귀신도 모를 일이다. p 261



산업화가 진행되고, 여성의 노동력이 산업현장에 대거 유입되면서 식모라는 직업은 사라졌다. 물론 가사도우미라는 직업이 있긴 하지만, 가사도우미는 계약에 따라 정해진 업무와 정해진 임금을 받는, 식모와는 뉘앙스부터 완전 다른 직업이다.



하지만... 식모라는 직업이 사라졌다고해서, 식모를 상대로 저지른 범죄(갑질, 성폭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범죄의 피해자가 식모라는 직군에서, 힘없는 서비스업 직군으로 바뀐 것 뿐이니까. 과거의 많은 식모들은 집주인 가족으로부터 당한 범죄피해는, 현재의 힘없는 서비스업 직군으로 옮겨갔다. 비단 서비스업 뿐만이 아니다.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동료들끼리도 상하관계에 따라 비슷한 범죄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저 피해자와 가해자의 직업만 바뀌었을 뿐, 범죄행위는 바뀌지 않았다.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라는 물음도 이제 덧없다. 이미 원인은 다들 알고 있으니까.



그저 서로가 서로를 ‘존중’ 하고, 같은 인격으로 본다면 이런 범죄는 일어나지 않을텐데. 이 역시 대한민국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을 범죄라는 생각이 드니 씁쓸하다.





▶ 일제강점기에도 ‘스토킹’은 있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우리말에서 사라져야 할 속담 두 개를 든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우선 아니 뗀 굴뚝 운운의 경우, 누군가에게 누명이나 오명을 뒤집어씌우기에 가장 효율적인 가해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인간의 의지가 지닌 힘을 묘사한 긍정적인 속담이긴 하지만, 이 속담을 ‘나무’가 아니라 ‘사람’에게 들이대면 곤란해진다는 문제가 있다. 거의 모든 사람은 누군가에게 끌리거나 사무치게 좋아하게 되는 경험을 한다. (생략) 그런데 그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감정을 강요해 ‘열 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들이대면 어떻게 될까? ‘스토킹’이라는 범죄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p 327



뜻밖의 스토커를 소개해볼까 한다. 주인공은 일제강점기 소설가, 「봄봄」과 「동백꽃」으로 유명한 ‘김유정’이다. 김유정은 1937년 3월 29일 만 서른도 살지 못하고 폐결핵과 치질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가 끝난 뒤 김유정의 친구이자 김유정에게 소설 쓰기를 권했던 안희남이 누군가를 찾아간다. 『금수회의록』의 작가 안국선의 아들이었던 안회남이 찾아간 사람은 김유정보다 세 살 연상의 소리꾼 ‘박록주’. 


박록주를 만난 안희남은 냅다 소리 지른다. “네가 김유정을 죽였지!” 친구의 죽음에 눈이 뒤집혔다곤 하지만 안회남의 절규는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은 쪽이다. 박록주를 피가 마르도록 괴롭힌 건 김유정이었고, 김유정의 빗나간 열정이 김유정 자신을 태워버렸다는 편이 정확하니까. p 329



박록주는 재력가의 소실이었다. 즉 어쨌든 결혼한 몸이었다. 하지만 김유정의 들이대기는 지극정성을 넘어 사람을 들들 볶을 만큼 뜨거웠다. 박록주가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자 김유정은 지금 들어도 소름끼치는 행동을 시작한다. 1974년 <한국일보>에 연재되었던 박록주의 「나의 이력서」에 소개된 김유정의 편지 일부.


“당신이 무슨 상감이나 된 듯이 그렇게 고고한 척하는 거요. 보료 위에 버티고 앉아서 나를 마치 어린애 취급한 걸 생각하면 지금도 분하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당신이 사랑을 버린다면 내 손에 죽을 줄 아시오.” 


“오늘 너의 운수가 좋았노라. 그 길목에서 너를 기다린 지 세시간. 만일 나를 만았으면 너는 죽었으리라.” 


“엊저녁엔 네가 천향원으로 간 걸 보고 문 앞에서 기다렸으나 나오지 않았다. 만일 그때 너를 만났다면 나는 너를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좋아하지 마라. 단 며칠 목숨이 연장될 따름이니까.” p 330



여기까지라면 김유정의 광기에 이골이 난 박록주가 질끈 씹어 넘길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잉크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혈서였던 것이다. (생략) 병마를 견디지 못하고 요절한 그의 방 벽엔 “박록주 너를 연모한다.”라고 쓴 혈서가 붙어있었다고 한다. 도저히 사랑이라고 할 수 없는 집착. 절대로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 없는 감정. 그것이 김유정의 그늘이었다. p 331



우와, 이건 좀 충격적인 이야기다. 그 유명한 소설가 김유정이 최악의 스토커였다니. 아, 정말 진짜 와. 뭐지? 하긴 국사시간이든 문학시간이든 교과서에 실려있는 유명인물의 그림자는 알려주지 않는게 우리나라 교육이니까.



당시 날이갈수록 심해지는 김유정의 스토킹으로 인해, 박록주는 경찰에 신고도 해봤으나, 경찰은 그저 구애일 뿐, 경범죄 이상은 아니라고 했다. 결국 피해자 박록주는 그 누구에도 도움을 받지못했고, 언제고 김유정 손에 사단이 날까 전전긍긍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근데 웬걸? 스토커 김유정이 병사하자 김유정의 친구라는 작자가 되려, 언제 죽임을 당할까 매일매일을 고통속에 살던 피해자에게 찾아가 “니가 죽였지!!”라고 분노를 폭발하다니.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진짜. 근데 참 놀랍게도 이 사건조차 현재의 스토킹 범죄들과 겹쳐진다는게 소름이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스토킹처벌법은 아~~~주 오랫동안 국회에 계류되어있다가 2021년 10월 21일에야 비로소 시행되었다. 즉 그 전까지만해도 스토킹은 사적인 사랑놀음일뿐, 범죄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하긴 어렸을때부터 『선녀와 나무꾼』같은 동화를 읽고, ‘열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없다’는 속담을 들으며 자라온 세대인데 말 다했지 뭐. 



늦게나마 스토킹 처벌법이 시행이 된 것도, 수많은 사람들이 악질 스토커로 인해 안타까운 생명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뉴스에 나온 스토킹 희생자만해도 한둘이 아닌데, 과거에는 얼마나 더 많았을지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렇게 정말 많은 스토킹 범죄 희생자들의 고통이 쌓이고 쌓여서, 겨우겨우 스토킹 처벌법이 시행된것이다. 그런데 참 웃긴게, 스토킹 처벌법이 시행은 되었는데....그래도 희생자가 계속해서 나온다. 이쯤되면 뉴스를 보지 말아야되나 싶기도 하고. 



아침 눈뜨자마자 뉴스를 보고, 밤에 자기 전까지 뉴스를 보는 나인데, 뭐 뉴스에서 좋은 이야기가 나와야 말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