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귀신이 되다
전혜진 지음 / 현암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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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읽은 「여성, 귀신이 되다」 라는 책, 정말 흥미롭다. 분류를 역사책으로 묶어야 할지, 고전소설로 묶어야할지 약간 애매하긴한데. 일단 성리학적 사상이 바탕이 된 조선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여러 고전이나 설화, 필기, 야담집을 인용하긴 했으나 결국 조선이라는 역사적인 배경 아래서 기록된 이야기들이니. 역사책으로 분류를 해볼까 한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우리가 으레 알듯 성리학적 사상, 흔히 말하는 유교사상을 토대로 세워진 나라다. 무엇보다 그놈의 유교는 ‘사농공상’을 이야기하며, 학문을 하는 선비를 중요시 했다.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할 부분이있으니, 사농공상의 주체는 바로 남성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여성은? 우리 모두가 알듯,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여성은 남성가 달리 권리가 없으며 가부장제도 안에서 보호되어야 할 존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보호’다. 생각보다 많은 조선의 여성들이 가부장제도 안에서 ‘보호’받지 못했고, 성리학적 사상에 짓밟혀야만 했다.



조선시대 여성에게 권리는 없었고 의무만 있었다는 사실은 현대를 사는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만 봐도 여성의 존재가 어떤 모습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빗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매체에서 그려진 조선의 여성들은 대부분 가부장적 제도안에서 큰 사고 없이 사는 극히 일부의 조선 여성들의 모습만 그려졌으니까. 물론 그 안에서도 아주 당연하게 남녀차별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이 책은 그런 매체에서는 그리지 않았던, 조선에서 바라는 ‘정상적인’ 여성상을 살지 못하고 죽은 여성들의 삶을 보여준다. 당대 사대부들이 썼던 필기, 야담집의 이야기를 통하여. 여기서 함정은 필기, 야담집을 쓰고 읽었던 사람들은 당연히 성리학을 공부하던 선비들, 즉 사대부 남성들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귀신이야기에서, 죽은 사람이 조상이 되는지 원귀가 되는지는 그 사람이 얼마나 착하게 살았는지에 달려 있지 않다. 그 사람이 이승에서 각종 통과의례를 별 탈 없이 거치고 살아왔는지, 얼마나 정상적으로 죽었는지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다. p 015



성리학적 문화권, 유교 문화권에서는 조상, 성현에게 지내는 제사가 참 중요하다. 어느집이든 4대조 조상까지 제사를 지내고, 조상이 업적을 드높이면 조정에서는 그 조상을 불천지위 대상으로 지정하여, 대대손손 제사를 지내게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 제사를 받는 대상의 기본은 어디까지나 사망한 ‘남성’이다. 물론 사망한 여성도 제사를 받기는 한다. 제사를 받는 남성의 배우자이면서, 대를 이을 자손을 낳고, 그 자손이 문제없이 대를 이을경우에 한하여. 즉 조선에서 말하는 각종 정상적인 통과의례를 거친 여성만이 사망후에 제삿밥을 먹을 수 있었단 이야기다.



조선의 여성들에게 필요한 정상적인 통과의례는 한 가정에 태어난 후, 정상적인 집안에 본처로 시집을 간 뒤, 그 집에서 자손을 낳고, 그 자손이 정상적으로 대를 이었을 경우를 말한다. 



※성리학적 제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귀신들※

어려서 죽은 이들은 부모 가슴에 못 박고 죽은 불효자식이라고, 제사는 고사하고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젊은 사람이 결혼하지 못하고 죽으면 강한 원한을 품어 세상에 해코지를 하는 처녀귀신이나 손각시, 몽달귀신이 된다고 믿었다. 이들 역시 제대로 묘를 쓰지 못했다. 함부로 세상에 나와 돌아다니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로 뭇 사람들이 밟고 다니도록 길 한복판에 묻기도 했다. 혼인을 했어도 자식 없이 죽은 사람, 혹은 아이를 낳다가 죽은 여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식 없이 죽은 사람은 누군가의 조상이 될 수 없으니 제사를 받지 못하고, 제사를 받지 못하니 원귀가 된다고 생각했다. 자식이 있다고 해서 모두 조상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식은 있으되 아들이 없어도 원귀가 되었고, 집에서 죽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죽은 사람은 객사한 원귀, 소위 객귀가 되어 떠돈다고 믿었다. p 016



※성리학적 제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귀신들을 위한 의례※

그래서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성리학적 제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이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별도의 의례들을 마련했다. 죽은 사람에게 굳이 양자를 들여 제사를 잇게 하고, 결혼하지 못하고 죽은 이들을 위해 사후 혼사굿을 했다. 객사한 이들이나 재해로 죽은 이들을 조상으로 안주시키기 위한 굿도 있었다. 그조차도 여의치 않아 결코 조상이 될 수 없는 이들을 위해 무속과 불교의 의례를 동원했다. p 016



물론 조선의 남성들도 정상적인 통과의례를 거치지 못하고 죽었다면, 제삿상을 받지 못했다. 예컨데 단명, 비명횡사, 자손없음 등 말이다. 하지만 정상적인 통과의례를 거치지 못했더라도, 사망한 그 남성이 좋은 가문 사람이었다거나 종친이었다면 양자를 들여서 제사를 이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는 죽은 뒤 제삿상 받기가 이렇게나 힘들다. 



뭐, 여기까지는 대충 기본 배경이고... 이 책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범죄에 희생되고, 성리학에 또 다시 희생된 우리네 조상, 여성들의 이야기다.


사또, 억울하옵니다.


‘처녀귀신’ 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이야기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아랑설화」와 「장화홍련전」이랄까? 특히 이 두 이야기는 TV드라마나 영화로도 각색될 정도로 유명한 조선시대 처녀귀신 이야기이기도 하다. 요즘은 방영하지 않지만 꽤 오랫동안 여름마다 안방을 찾았던 TV드라마 『전설의 고향』에서도 수많은 처녀귀신 이야기가 나왔다. 헌데 그 모든 처녀귀신 이야기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분명 서로 다른 처녀귀신 이야기인데 이상하게 구조가 비슷하달까? 



비참하게 죽은 여성이, 죽었을 당시의 모습으로 원님 앞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고, 원님이 억울함을 풀여주면, 처녀귀신이 말끔한 모습으로 바뀌면서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하직인사를 올리며 사라지는 것. 대부분의 처녀귀신 이야기가 이런 플롯을 가지고 있다. 대체 왜그럴까?


「아랑설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전형적인 처녀 귀신 이야기다. 흰 소복에 머리는 길게 풀어헤친 귀신이 바람과 함께, 때로는 찢어지는 듯한 귀곡성과 함께 원님 앞에 나타난다. (…) 아랑 이야기는 이렇게 원님을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야기의 전형이 되었다. 여성이 범죄의 피해자가 되고 억울한 누명을 쓰거나 잘못된 소문으로 고통받는 것은 가해자의 잘못이지, 피해를 입은 여성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과거의 여성들은 이런 억울한 일을 겪고 어디다 호소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과거에만 그랬을까. 현대에도 여성이 범죄의 피해자가 되면 사람들은 어두운 밤거리를 돌아다녀서, 외진 곳에 혼자 있어서, 옷을 단정하게 입지 않아서 등 범죄의 원인을 손쉽게 여성에게 돌려버린다. p 029



이야기 속에서 여성 원귀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대상은 남성 사대부이다. 그 남성 사대부는 대부분 고을의 원님이나 어사나 무변과 같은 사법권을 쥔 관리였다. 피해자는 젊은 여성, 특히 어머니가 없는 젊은 처녀나 기생, 비구니, 여종처럼 약자의 입장에 놓인 이들, 억울함을 직접 말하기 어려운 이들이었다. 특히 아랑처럼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면 피해 사실을 직접 말하지 못하고 단서만을 주기도 한다. 이런 경우 여성의 이야기는 범행 내용 외에는 흐릿해진다. 이야기는 여성의 억울한 죽음이 아닌, 사대부들의 유능함을 과시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셈이다. p 032



그 누구도 깨닫지 못했던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처녀귀신 이야기들은 정말 놀랍게도 성리학을 공부하는 사대부 남성들이 기록하고 향유했던 이야깃거리였다. 애초에 처녀귀신 이야기들이 실려있는 조선시대 수많은 기록들인 『ㅇㅇ필기』, 『ㅇㅇ야담』 등은 기록하는 주체가 남성 사대부였고, 읽는 사람 역시도 남성 사대부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처녀귀신 이야기 플롯은 언제나 현명한 원님이 나타나고, 현명한 원님이 처녀귀신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우리가 알고 있는 처녀귀신 이야기들을 더듬어 본다. 대부분의 처녀귀신 이야기에는 희생된 여성들의 억울한 사연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거기다 그 여성이 범죄에 희생되는 동안, 여성을 보호했어야 할 가부장제도에 대해서도 침묵한다. 예컨에 희생된 여성의 아버지의 보호와 책임등을 말이다. 



적어도 현존하는 필기, 야담집에 수록된 처녀귀신들의 이야기 속의 그녀들은 가부장제도 안에서 정상적으로 보호받지 못했다. 대표적인게 바로 「아랑설화」다. 아랑의 부친은 사대부, 그것도 귄위있는 사대부 밀양부사였다. 하지만 아랑의 부친은 아랑이 사라지자 딸을 잘못 가르쳤다며, 사라진 딸을 찾을 생각도 하지않고, 혹시나 범죄에 희생된 건 아닐까 생각해보지도 않고 무책임하게 밀양을 떠나버렸다. 「장화홍련전」은 또 어떠한가. 장화, 홍련의 부친인 배 좌수는 계모의 부추김에 손쉽게 넘어가서 자신의 딸들을 의심하고 죽음에 이르게 방조했다. 처녀귀신 이야기는 아니지만, 「콩쥐팥쥐전」의 콩쥐 부친은 아예 언급도 없다(원전에서는 콩쥐가 일단 자신의 몸을 잃기도 했으니). 어머니를 여읜 여성들에게 유일한 보호막은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이 아버지들은 딸을 보호하지 않았다. 



처녀귀신 이야기를 향유하는 사대부 입장에서 이러한 가부장제도의 허점은, 가부장제도를 뒤흔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희생된 여성들을 보호하지 못한 아버지에 대해서는 침묵을 택한 것이다. 대신 처녀귀신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현명한 원님에 초점을 맞추어, 사대부라는 존재가 얼마나 학식이 높고, 약자를 못 본체 하지 않으며, 용기가 있고, 완벽하고 유능한 존재라는 사실에 만족한다.



그러니 사실 여성 원귀들의 이야기는, 귀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원님의 이야기다. 원님들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귀신들을 정상성 안에 편입시키는 방식으로 그들을 평화롭게 내쫓은 뒤 현실을 복원하고 가부장적 세계의 평화를 되찾는다.  현실에서 약자들이 받는 억압은 바뀐게 없고, 아버지는 처벌받지 않으며, 권력자인 원님은 명관이 된다. 이 얼마나 체제 수호적이면서도 당대의 사대부들에게 흥미진진한 이야기였을까. p 045



어쩌면 이런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왜 희생된 여성들은 귀신의 모습으로 가해자가 아닌 원님을 찾아간걸까? 


놀랍게도 이 역시 이런 기록을 남긴게 남성 사대부이기 때문이다. 희생된 여성들 입장에서 가해자는 1차 피해를 입힌 남성 가해자와 자신의 피해를 방관한 남성인 아버지다. 만약 처녀귀신이 가해자들을 찾아간다면, 남성이 우월하고 가부장제도가 당연시되었던 조선의 근간을 뿌리채 흔들 수 있으며, 동시에 사대부를 드높이는 기록이 남겨질 수 없으므로 당연히 처녀귀신은 원님을 찾아갈 수 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이런 처녀귀신들은 이미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존재다. 따라서 성리학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그녀들은 당연히 아버지 보다 더 위에 있는 아버지. 조선의 만 백성이 섬기는 ‘큰’ 아버지를 찾아갈 수 밖에 없다. 조선의 만 백성이 섬겨야 할 아버지는 당연히 임금이다. 하지만 한낱 여성이, 그것도 원귀가 된 여성이 지엄한 임금을 찾아갈 순 없으니 임금 대신 마을에 파견된 행정관인 원님을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해야만 성리학적 사상과 사대부를 드높일 수 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말이다.


원귀들은 자신의 억울함을 해결해준 사대부에게 반하지 않는다. 억울함을 밝히고 깨끗하게 다시 매장되고 나면 대부분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들은 간혹 원님이 위급한 일을 당했을 때 「원님의 목숨을 구해준 처녀」처럼 목숨을 구해주기도 하고, 「이원지와 재상의 딸」처럼 자신의 가족들을 찾아가 현실적인 보답을 받게 하기도 한다. 감사를 표한 뒤에는 더는 미련도 원한도 없다는 듯이 정말로 사라진다. 영명함은 과시하고 싶지만 귀신과 오래 얽히고 싶지는 않았을 사대부들의 입장에서는 정말 편리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p 034



사대부들은 기본적으로 괴력난신을 논하지 않는다. (…) 하지만 공자가 괴력난신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고 해도 살아 있는 다른 사람들은 죽음과 영혼의 문제에 끊임없이 관심을 갖기 마련이다. 성리학자들은 삶과 죽음, 그리고 영혼의 문제를 이기론을 이용해 해명하려 했다. 이들은 필기, 야담과 같은 문집에서 자신들의 흥미와 관심 분야를 드러내며 귀신 이야기를 다루었다. 자신들의 흥미를 느끼는 대목들만을 골라서. 필기, 야담의 귀신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대부들은 이상정인 모습에 가깝다. p037



그래서 처녀귀신 이야기의 결말은 언제나 깔끔하다. 가해자들의 처벌에 대한 내용도 없고, 이런 범죄 피해에 대한 재발방지에 대한 내용도 없다. 그저 처녀귀신의 시신을 찾아 곱게 묻어주고, 처녀귀신은 원님께 감사인사를 하고 떠난다.



우리는 이런 처녀귀신 이야기를 단지 조선시대 억압받던 여성들의 이야기로 한정 지을 수 있을까? 시대가 많이 변했다고는 하나 21세기인 지금도, 자신의 범죄 피해와 억울함을 밝히지 못한 피해자들이 많다. 어떤 이들은 하늘의 별이 되었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피해를 꼭꼭 숨긴채 오래도록 마음의 병을 키우기도 한다. 그들에게 범죄피해를 밝히는건 예나 지금이나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왜? 범죄피해를 밝히고 가해자들을 신고한다 한들, 가해자들이 받는 처벌은 미미하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현대판 나랏님들은 재발방지를 위한 법안을 만든다고는 하지만 유명무실하기 그지없다.



처녀귀신 이야기는 아니지만, 조선 성종 대 어우동과 그녀와 만났던 수 많은 남자들의 처벌을 돌이켜보자. 어우동이 우리가 아는 어우동이 되기 이전에, 그녀는 남편이 있는 부인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다른 여자가 좋다며 어우동을 버렸다. 조선 초기까지는 고려의 영향으로 여성의 자율성이 어느정도 있었기에, 어우동은 이혼을 원하였지만, 당시 왕이었던 성종은 그녀의 이혼을 금지시켰다. 왜? 성종은 그의 모친 인수대비와 함께 조선에 남녀가 유별하다는 성리학을 완벽하게 뿌리내리고자 했던 임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가 아는 어우동이 탄생했다. 그렇다면 어우동, 어우동과 간통한 남자들의 처벌수위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우동은 사형된 반면, 그녀와 간통한 수 많은 남자들은 한마디로 무죄였다. 



21세기 대한민국, 성범죄 피해자와 가해자들. 피해자들 보호는 여전히 잘 되지 않고, 가해자들의 처벌 수위는 여전히 낮다. 다시한번 생각해본다. 우리는 정말 처녀귀신 이야기를 조선시대 이야기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안채도, 규방도 안식처는 될 수 없었다.



이번에는 조선의 일처다부제 속에서 희생된 여성들의 이야기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한 명의 부인을 맞았다. 납채, 문명, 납길, 납폐, 청기, 친영의 여섯 절차인 육례를 치르고 어엿하게 맞이한 부인의 소생의 가무의 대를 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사대부들은 첩을 들였다. 부인은 맞는다면, 첩은 들이는 것이었다. 예물 대신 예전 명목으로 첩의 친정에 돈을 보내기는 했으나, 부인을 맞을 때처럼 정성스레 육례를 갖추지는 않았다. 자신이 정실이고, 자신의 자식이 가문의 대를 이을 것이라 하나, 남편의 사랑을 다른 여성에게 빼앗긴 부인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첩 역시 마찬가지다. 자식을 낳아봤자 서자에 불과하고, 평생 부인의 위세에 눌려 있어야 하는데다, 대게는 친정도 부인의 친정보다 신분이 낮거나 가난하니 난편 밖에는 기댈 곳이 없다. 이런 그들이 서로 갈등하고 때로는 미워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사대부는 제 정욕 때문에, 혹은 본가를 떠나 한성에서 지낼 때 제 수발을 들 사람이 필요해서 첩을 들이지만, 그 뒤에 벌어지는 가정에서의 갈등은 책임지지 않았다. 고통은 여성들의 몫이었다. p 150



조선의 사대부는 공식적으로 1명의 부인과 여러 명의 첩을 둘 수 있었다. 공식적으로 말이다. 사대부들이 여러 여자를 취하는 건 정말 당연한 일이었다. 사대부들은 자기들의 욕정, 또는 필요로 인해 첩을 두었으나 그로 인해 일어난 수많은 문제들에는 눈을 돌렸다. 대신 그 문제들을 일명 ‘처첩갈등’, 그저 ‘여자’들의 문제라 타자화하며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득옥 이야기는 『성호사설』을 비롯해, 『해동기화』, 『이순록』, 『국당배어』, 『기문총화』, 『풍암집화』 등 여러 필기, 야담집에 실려있다. 경신환국이라는 사건과 대군 가문의 몰락을 배경으로, 사대부 가문에서 벌어지는 축첩 문제와 처첩간의 갈등, 여성들의 질투와 증오라는 문제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의 기본적인 틀은 간단하다. 인평대군이 득옥이라는 기녀 출신의 첩을 들였고, 인평대군 부인이 투기해 득옥을 죽였는데, 득옥의 원귀가 집안을 망하게 했다는 것이다. p 153



사대부들은 외려 이런 이야기를 기록하고 향유하면서, ‘여성’ 이라는 존재에 대해 더욱 왜곡된 시선을 가졌을 것이다. 그렇게 뿌리깊게 조선 오백년간 뿌리깊게 내려진 ‘여성’에 대한 왜곡된 시선은, 기백년이 흐른 지금까지 일부 사람들에게 여전히 남아있다(예컨데 성범죄범이나, 가정폭력범이라던가?).



「강생의 전처와 후처」 이야기를 읽으면 필기, 야담이 어디까지나 남성 사대부가 기록한 글이라는 한계가 뼈저리게 느껴진다. 젊고 건강한 후처의 몸에 성품이 어질고 부지런한 전처의 영혼을 집어넣는다는 발상부터가 지독하게 남성 중심적이다. 그런데다 후처가 왜 사나울 수 밖에 없었는지, 왜 살림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비겁할 정도로 입을 다물고 있다. 후처는 첩이 아니다. 전처가 죽은 다음 다시 정식으로 혼인한 부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흔히 후처를 전처보다 낮잡아 보았고, 첩으로 오해하는 일도 잦았다. p 159



「귀신이 지은 시를 알아본 김정국」 이야기는 첩이 시가 사람들의 변덕에 따라 언제든 쫓겨날 수 있는 불안정한 신분이었음을 보여준다. 글공부가 부족하고 풍류를 좇던 송생이 재주 많은 여성을 만나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들, 그 공은 송생의 공일 뿐이다. 여성은 함부로 재주를 내비치니 겸손하지 못하고 요망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 현실이었다. 송생의 첩은 귀신이었던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재주 많은 여성을 핍박해 끝내 죽음으로 몰아 낙수의 물귀신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p 165



「일월당 황씨부인 유래」에서는 가난한 집안에 시집 와 아홉 번이나 출산을 한 며느리를, 시어머니는 모질게 시집살이를 시키고 괴롭힌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 특히 젖먹이 어린 딸을 두고 세상을 떠날 만큼 심한 학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황씨 부인의 서글픈 인생은 시집살이로 고통받던 수많은 여성들의 삶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황씨부인당에는 따로 제사를 지내는 날이 없다. 대신 여성들이 집안에 우환이 있을 때, 재수가 없을 때 찾아와 촛불을 켜고 쌀과 과일을 두고 치성을 드리곤 한다. 구박받던 황씨 부인은 그렇게 이 지역 여성들의 수호신이요, 토지신으로 좌정했다. 그 모든 서러움과 슬픔을 담은채로. p 171



시집을 간 여성들에게 처첩갈등만 있을까? 본처와 후처에 대한 이야기, 시집살이 문제도 고스란히 그녀들의 몫이었다. 후처 자리에 들어간 여성은 이미 죽은 본처와 비교를 당하며 살아야 한다. 만약 본처의 자식들이 대를 잇는다면, 후처의 입지는 더더욱 작아질 수 밖에 없다. 그 뿐만이 아니다. 조선의 악명높은 시집살이도 문제였다. 조선 초기까지만해도 고려의 영향을 받아 남자가 여자집으로 장가를 가는 경우가 많았으나, 성종대 이후부터 강력한 ‘유교사상’ 확산으로 여자가 남자집으로 시집을 가는 것이 당연해졌다. 그렇게 여성들의 고된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시집간 여성들이 이 모든 일을 겪는동안 많은 사대부 남성들은 무엇을 했을까? 자신의 배우자가 겪는 어려움을 그저 강 건너 물 보듯 했다.



위의 「귀신이 지은 시를 알아본 김정국」의 일화는 그저 첩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있으니, 바로 초당 허엽의 딸이자 허균의 누이인 허난설헌이다. 초당 허엽만 봐도 알 수 있듯 허난설헌은 유력 명문가의 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다른 형제들처럼 시/서화에 재능이 있었다. 심지어 부친인 허엽도 그녀의 재능을 아꼈다. 하지만 그녀가 시집을 간 뒤, 그 재능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독이 되고 말았다. 허난설헌의 남편은 그녀의 재능을 시기했으며, 같은 이유로 시댁 어른들 역시 그녀를 어여삐 보지 않았다. 거기다 자녀들도 일찍 죽어버리자, 의지할 곳 하나 없는 허난설헌은 결국 이른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만다. 당시 유력한 명문가의 딸이었던 허난설헌의 일생도 이러했는데, 한미한 집안의 재능있는 여성들은 삶은 어땠을까? 신사임당의 가족같은, 유니콘 같은 친정/시댁을 만나지 않고서야, 재능있는 여성이 조선에서 행복하게 살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처/첩 이를 것 없이 재능있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족들의 핍박을 받는게 바로 조선의 여성들이었다. 위에서도 말했듯 신사임당은 친정/시댁이 모두 유니콘(?) 같았기에 그녀의 재능이 꽃피웠고, 지금도 신사임당의 그림들이 널리 알려져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유명한 아들(율곡 이이)을 둔 덕이 크다. 한마디로 신사임당은 재능있는 여성으로써 이름이 알려진게 아니라, 천재적인 아들 율곡 이이을 키워낸 현모로 널리 알려진 것이다. 결국 재능있는 여성이 좋은 가족을 만나서 행복한 삶을 산다고 해도, 자식을 잘 둬야 그나마 후세에 작품 및 당호라도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비극적이게 삶을 마감한 허난설헌의 경우, 동생인 허균 덕택에 작품과 당호 및 이름 ‘허초희’가 알려질 수 있었던것이고.



왜 조선은 이토록 여성을 억압할 수 밖에 없었을까? 유교/성리학을 창조한 공자, 맹자는 진실로 여성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을까? 현자로 일컬어지는 공자, 맹자가 여성을 억압하라고 말하진 않았을텐데. 그런데 놀랍게도, 조선의 여성을 옭아매던 ‘칠거지악’은 공자의 제자들이 집필한 『공자가어』에 실려있다. 물론 당시 칠거지악이란, 적어도 공맹과 그들의 제자들은 정상적인 며느리와 정상적인 시댁을 떠올리며 남긴 공맹의 자산이었을 것이다. 후대 사람들이 자신의 입맛에 맞게 해석하기 시작하면서 그 성질이 비틀어지고, 조선의 여성들을 그토록 옭아메는 악법이 되었을뿐.




칠거지악 그리고 삼불거, 내훈


그렇게 조선에서는 ‘칠거지악’과 더불어, 인수대비가 집필한 ‘내훈’을 들이밀며 조선의 여성들을 옭아메기 시작했다. 물론 여성들에게 방패가 되는 ‘삼불거’라는 규범이 있긴 했다. 하지만 남성 사대부들은 이 삼불거조차도 교묘하게 비틀어버렸기에, 실제로 삼불거가 여성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조선의 보조 법전인 『대명률』에 기록된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권리, ‘칠거지악’.

시부모를 잘 모시지 못하거나

아들을 낳지 못하고

음행을 저지르거나

남편이 사랑하는 다른 여자를 질투하고

치료가 되지 않거나 자손에 유전되는 병이 있거나

말이 많거나

도둑질을 할 경우 


여기서 (7)도둑질은 범죄이고 지금도 이혼 사유가 되기에 이해가 되는 사유이다. 하지만 그 외의 사유들은 여성들에겐 너무나 불공평한 사유가 된다. 특히나 (5) 음행의 경우 역시나 지금도 이혼 사유이나, 당대 조선에서는 남성은 첩을 두고 기생방을 가기도 했다. 즉 남성은 합법이나, 여성은 불법이라는 이중잣대란 이야기. (4)투기도 (5)과 같은 연장선상에서 남성의 일처다부제를 옹호하는 내용이다. (1)과 (6)의 정상적인 해석은 시부모에게 잘하라는 이야기인데, 조선의 사대부들은 그 시부모가 시집살이를 시켜도 복종하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시집살이를 할 때는 눈 감고 삼 년, 귀 막고 삼 년, 입을 막고 삼 년 지내야한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볼 수 있다. (2) 아들을 낳지 못하고는 요즘 시대에서는 당연히 씨를 잘못 준 남성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여자탓을 하는 시부모가 있으니 뭐. (5)도 (2)의 아들을 낳는 것에 대한 연장선이다. 건강한 아들을 낳기 위하여 있는 조항이다. 남성에게 유전병이 있는건 침묵하되, 여성에게 유전병이 있는건 있을 수 없는 조선이었다.



한마디로 조선 사대부들이 생각한 칠거지악은 조악한(!) 시부모를 만나더라도 침묵하고 효성을 다해야하며, 남편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든 침묵하고 남편을 사랑해야하며, 남편에게 유전병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건강한 아들을 낳아서 대를 잇게 해야한다는, 시가의 화목과 안정/평화를 위해야한다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으면 이 칠거지악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조선의 여성들은 이혼을 당했다.



물론 여성에게도 원치않는 이혼을 막을 수 있는 방패, ‘삼불거’ 라는 규범이 있었다. 


아내가 의지할 곳이 없거나

부모의 삼년상을 함께 치뤘거나

혼인할 때는 가난했다가 나중에 부자가 된 경우


언뜻 보기에는 불합리하게 규정된 칠거지악에 대항하는 규범이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삼불거 조차도 혼인한 여성의 권리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 사대부들은 ‘불량한’ 부인까지 삼불거 규범을 허용하면, 사회적으로 불미한 결과를 남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인이 아무리 삼불거를 들이밀어도, 사대부가 부인을 ‘불량한 처’라고 매도하면 여성은 이혼을 막을 길이 없었다.



무엇보다 조선 왕실에서더 ‘내훈’이라는 규범을 집필하여, 조선의 여성들을 옭아매는 데 박차를 가했다.



<내훈>


-제1장 언행에서는 부녀자가 말과 행실에서 주의할 점 및 준수사항을 서술하였다.  현모양처의 교육적 인간상을 그리면서 부덕(婦德)·부언(婦言)·부용(婦容)·부공(婦功)의 여유사행(女有四行)이 있음을 밝혔다. 


-제2장 효친은 어버이에 대한 올바른 효도방법이 무엇인가를 밝혔다. 친가의 부모뿐 아니라 시가 부모를 모시는 법, 부모가 살아 있을 때와 죽은 뒤의 효도법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제3장 혼례는 혼인의 예절을 밝힌 부분으로, 혼례의 뜻과 혼수감에 대한 기본자세, 혼인 뒤의 마음가짐 등을 설명하였다. 


-제4장 부부는 부부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를 밝힌 부분으로, 부부의 도를 음양의 이치로써 설명하고, 남편에 대한 예의와 마음가짐 등을 정의한 뒤 역사적인 사실을 특별히 많이 인용하여 아내의 도리를 강조하고 있다. 


-제5장 모의는 어머니로서의 예의범절을 밝힌 부분이다. 유모의 선택에서부터 자식의 연령에 따른 교육방법, 시어머니로서의 마음가짐과 며느리에 대한 교육 등을 설명하였다. 


-제6장 돈목은 정애(情愛)와 화목에 대한 것으로서 동서 또는 친척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방법을 밝혔다. 


-제7장 염검은 청렴과 검소의 정신으로 어떻게 생활하고 손님을 대접하며, 관직에 있는 남편을 어떻게 보필할 것인가 등을 밝히고 있다. 



옛날엔 남존여비가 당연했어, 그 시절엔 어쩔 수 없었어. 현재의 가치관으로 파악하지 마.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선 이전, 고려는 달랐다. 물론 고려에서도 남성이 여성에 비해 그 위치가 높기는 했으나, 적어도 고려의 여성들은 조선의 여성에 비하면 더욱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그 이전 시대로 올라가면 더 자유로웠고. 그래도 남존여비가 당연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점은 지금이 21세기라는 점이다. 아주 뚜렷하게 남녀차별이 사라지고 있다. 완벽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일상생활에서 ‘큰’ 불편함은 없을 정도로 사라졌다. 부디 내 딸이 장성해서, 스스로 삶을 영유하는 시대에는 작은 불편함 조차도 사라진 세상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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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지 않다고 외치고 나서야 괜찮아지기 시작했다
정순임 지음 / 파람북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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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잇는 ‘남자’가 중요하던 시절, 그 시절 종가집에서 태어난 둘째 딸 정순임. 이 책 「괜찮지 않다고 외치고 나서야 괜찮이지기 시작했다」의 저자다. 태어나면서부터 남녀차별, 남아선호사상의 피해를 고스란히 받고 자란 그녀다. 지금은 이미 쉰이 넘은 그녀다. 내 엄마와 동시대를 산 사람이다.








난 저자의 딸과 같은 세대를 살았다. 아니 살고 있다. 세대가 다르기에, 저자와 내가 자라온 환경도 분명 다르다. 내가 자란 시대는 그 때보다는 더욱 발전되고, 더욱 살기 편한 시대였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었다. 바로 ‘남아선호사상’과 ‘남녀차별’. 내가 태어나던 그 시대 출산된 남/여 아기 성비가 극악으로 치달았을 정도로, 남자아이를 많이 낳았던 시대다. 분명 저자가 자란 시대와 내가 자란 시대는 분명 ‘세대 차이’가 확연하게 나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남아선호사상’과 ‘남녀차별’은 무섭도록 그대로였던 시대다.



내가 어렸을 때 만해도, 당시 대한민국의 ‘평범한’ 가족구성원 형태는 ‘엄마, 아빠, 누나, 남동생’ 또는 ‘엄마, 아빠, 오빠, 여동생’ 이런 구성의 4인 가족이었다. 나는 이토록 평범한 4인 가족 구성원 중 ‘누나’, 즉 남동생을 둔 장녀다. 내가 원해서 된 ‘누나’가 아니었다. 남동생이라고는 해도 고작 1살 차이밖에 아지 않았다. 하지만 이 당시에는 ‘누나’란 나이가 어리든 많든 엄마가 자리를 비웠을 땐 ‘엄마를 대신해야하는 존재’였으며, ‘누나’는 남동생이 뭐라고 하든 양보해야했고, ‘누나’가 잘못이 없어도 ‘누나’라는 이유로 크게 혼이 나는 자리였다. 그렇기에 ‘누나’는 나이가 어릴지라도, 언제나 어른이어야만 했다. 만약 지금시대에 이렇게 남매를 키운다면? 오은영 박사님이 아주 팔짝 뛸 이야기다. 




나는 자라오면서 뿌리깊은 ‘남아선호사상’을 증오했다. 그만큼 내가 입은 피해가 심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당연한 일이었고, 받아들여야만 했던 일이었다. 더군다나 남동생이 어렸을 때 크게 아팠었기에, 더욱 그랬다. 언제나 참는 것은 나여야 했고, 양보하는 것도 나여야 했다. 남매끼리 싸우면 누나라는 이유로 혼났다. 언제나 싸움의 원인은 남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뿐이랴? 남동생은 쉽게 받는 용돈을, 나는 엄마의 일을 도와주어야만 받을 수 있었다(초딩때부터 중딩때까지 엄마와 우유배달을 했으니 말 다했지 뭐). 시골에서는 특히 더했다. 명절이 되면 아주 당연하게 엄마와 큰엄마들 사이에서 나도 음식을 도와야했다. 내 남동생은 삼촌(또는 큰아빠)와 나가서 과자를 먹곤했다. 뿐만인가? 밥상은 남자상 따로 여자상 따로. 



물론 부모님께선 차별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지만, 내가 자라오며 일어난 사건들은 내가 받은 차별을 여실히 뒷받침해준다. 그 사건들은 찌들어있는 남아선호사상과 남녀차별로 인한 스트레스 받을 대로 받은, 참다가 참다가 결국 폭발해서 일어난 사건들이기도 했으니까. 내가 일으켰던 그 사건들은, 피를 보는 제법 큰 사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나에게 크게 뭐라하지 않았다. 본인들도 내가 얼마나 참았는지, 내가 왜 그랬는지 잘 알고 계셨으니까. 만약 그 때 마저도 나에게 큰소리를 내셨다면, 아마도 난 생각보다 더 빠른 나이에 그 집을 나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엄마아빠에게 약한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아이였던 나에게 어른처럼 크길 원했던 분들이었기에. 그래서 그냥 조용히, 내 스스로 모든 것을 하며, 부모님에게는 언제나 대견한 아이로 지내왔다. 오죽하면 우리 부모님이 내 그런 ‘장한 면’을 친구들에게 자랑까지 했고, 그게 다시 내 귀에 들렸을까. 실상 이건 부모의 자랑거리가 아니라, 자기 자식을 애 어른으로 키운 부모의 아픔이 될 이야기인데 말이다. 물론 각박한 세상에서 두 아이를 먹여살려야 했던 부모님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 역시 그들의 장녀 이자, 남동생의 ‘누나’이기 전에 아이였다는 것을 알아주었음 했을 뿐이다.




그렇게 애어른으로 큰 난, 진정한 어른이 되지는 못했다. 내 스스로도 어딘가 결핍이 있다고 인정한다. 그렇기에, 나를 위해서 결혼하기에는 조금 이른 나이에 결혼해서 부모님 집을 나왔다. 뭐, 따지고 보면 이십대 중반이 그렇게 이른 나이가 아니기도 하지만, 요즘은 30대에 결혼하는게 기본이니까. 뭐, 여튼! 그렇게 온전하게 내 가족을 꾸렸고, 나름대로 안정적인 삶을 살기 시작했다. 적어도 결혼한 후의 내 삶은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 나의 결핍을 알아주는 신랑 덕분에, 이제는 약한소리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불행하지는 않았으나, 행복하지도 않았던 어린 날과는 너무나 대비되고 정신적으로도 안정적인 삶이랄까.



무엇보다 나에게는 곧 돌이 될 딸이 있다. 내 딸을 보며 결심한 건, 둘째는 결코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혹시라도 둘째가 생긴다면, 귀한 내 딸이 행여나 나처럼 행복하지 않은 ‘누나(또는 언니)’로써의 삶을 살까봐(그렇다고 불행했다는 건 아님), 내 딸이 나처럼 아이가 아이답게 크지 못할까봐 걱정되기 때문이다. 만약 오지라퍼들이 외동이면 아이가 외롭지 않겠느냐? 라고 이야기한다면, 난 이렇게 말하련다.



“저에게도 엄마아들이 하나 있으나, 그저 피만 이어져있을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래도 오지라퍼들이 몇 마디를 더 얹는다면?



“엄마아들로 인해 제 유년 시절은 그닥 행복하지는 못했습니다” 라고 말하련다.





태어난 이후 ‘아무개 집 딸’이라는 사실이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 집에는 한 해하고 5일을 먼저 태어난 오빠가 있었고, 둘째인 것만으로도 당연했던 시절인데 종손인 오빠를 두고 태어난 가시나에게 차별이란 건 놀라운 일도 아니다. 밖에선 귀댁의 영애, 안에선 차별받은 가시나, 이것보다 더 정확하게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다. 전 생애를 관통하며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닌 실체는 그것이었다. p 014



한약 땜에 피부가 검어졌을 리 만무하고 당신 아들 피부가 검어서 아들 닮아 그렇게 태어난 손녀를 유전자 탓을 했어야지 왜 여자 탓을 하셨는지, 지금도 오빠랑 나는 아주 똑 닮았는데 아들인 오빠는 시커멋게 태어나도 이쁘기만 하셨으면서 왜 나한테 그러셨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데 왜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죄책감을 느껴야 했던 것인지. “니가 시커멓게 태어나서….” 내게 상처 주려고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겉으론 그러려니 했으면서 그 말 속 작은 분위기를 예민하게 끌어안은 건 나 자신이었을테니까. 그러나 난 다 자랄때까지 그 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p 031



할아버지가 대구  집에 오실 때 학용품 살 돈을 받곤 했는데. 어느 날 산수 노트를 다 썼다고 보여 드렸는데 “돈 없다” 하시면서 오빠를 보고 씨익 웃으신다. 내가 보는 앞에서 오빠에게 빵하고 우유 사 먹으라고 돈을 주시는 거다.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지만, 오빠가 대문을 나서 나한테 그 돈을 주면서 공책 사라고 했던 기억을 가지고 괜찮다 하며 살았다. 그 일은 할아버지가 너무하신 일로 늘 가족들 속에서 회자되었고, 모두가 웃으면서 하는 옛날 이야기는 내게는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다. p 055



부산에서 작은 아이가 태어났고, 아이를 낳고 병실에 도착했을 때 전화를 한 아이들 할머니는 “아들 하나 더 낳아야 되겠다” 한마디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 둘째도 딸이라 섭섭했던 우리 엄마도 큰아이 때와는 달리 감정을 숨기지 않았고, 작은 아이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애정 등급제의 최하위에 자리를 잡아야 했다. p 085


반독재 투쟁에 함께 했던 그들은 그 한가지 일에 동의한 사람일 뿐 성평등이나 환경문제, 빈부격차, 노동문제 등등 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여러 가지 불합리한 것들에는 전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게 현실이란 걸 인정해야 하는 일은 녹록치 않았다. (…) 심심할 새도 없이 터져 나오던 남학생들의 음담패설, 그 정도는 같이 해줘야 안 밀리고 버틸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여학생들의 동조. 여자들이 말하는 ‘노(NO)’는 노가 아니라고 낄낄대는 군상들. 청춘이기에 일어날 수 있는 혼돈을 감안하더라도 총체적 문제를 가진 우리 사회의 민낯은 변혁 운동을 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징글징글하게 존재 했다. p 077



우리 사회에 진보가 있다면, 그것은 반독재 투쟁을 했던 사람이라는 뜻일 것이고, 제반 사회 문제를 다양하게 합리적으로 인식하고 행동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불공정과 불공평을 입으로는 말하면서 태생적으로 여성들보다 50보, 100보 앞선 출발점에서 태어나 자신들이 받아온 사회적 이익에는 ‘세상이 원래 그런데 뭐 그런것까지 따지고 드냐’고 슬그머니 편승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차고 넘친다. p 077



어떤 형태든 사회생활을 해본 여성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회식 자리에서 일어나는 비일비재한 일들을. 술은 할매라도 여자가 따라야 맛이지, 분위기 띄위게 노래 한 곡 해봐라. 직장 생활하는 데 이 정도도 못 맞추면 집에 가서 애나 봐야지. 관습이란 괴물들이 도처에서 혀를 날름거리고 있다는 것을, 문제를 제기하면 돌아오는 것이 창창한 남자 앞길 망치려고 작정한 미친년이란 타이늘이고, 명백하게 잘못이 드러나도 사내가 그럴 수도 있지, 수없는 숨구멍이 그들에게 산소를 공급한다는 것을. p 102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는 말이 있다. 남자를 하늘에 여자를 땅에 비유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일단 그럴 수 있다 쳐본다. 하늘은 높이 있고 비를 내리고 태양을 비추고, 땅은 아래에 있고 만물을 품고 길러내고, 모든 생명은 그 안에서 살아간다. 근데 그게 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의미로 이해되었을까. (…) 여성이 위대하고 초월적인 존재가 되는 순간이 있다. 골몰하고 고통받고 차별받아도 묵묵히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 여성이 존재하는 이유는 오로지 모성이라고 그것만이 여성이가진 유일한 본능이라고 강조될 때가 바로 그때다. 그런 엄마를 가진 아들들은 세상 거칠것이 없다. 우리 엄마는 그렇게 살았는데 너는 왜 못하냐고 너무도 당연하게 칼날을 꺼내든다. 한량이었던 아버지는, 엄마를 고생만 시키고 자식을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는, 당신도 괴로운 것이 있어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거란 관대함으로 묻힌다. p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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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신령한 동식물사록
강예달 지음 / 금림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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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금림출판 신간 역사책은 앞서 출간된 『신령한 동식물이야기』의 축소 개정판(?)인 『한 권으로 읽는 신령한 동식물사록』 이다. 왜 축소 개정판이냐면, 앞서 출간된 『신령한 동식물이야기』의 내용 중 일부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 축소인가? 물어본다면 아마도 앞서 『신령한 동식물이야기』를 구매한 독자들을 배려했기 때문이라고 해야할듯 하다. 




앞선 책을 구매하지 못한 독자들이 다시한번 출간해달라는 요청은 쇄도하는데, 같은 책을 다시 출간하기엔 앞서 책을 구매한 독자들에게는 미안한 부분이기도 하고. 그래서 앞선 책을 구매하지 못한 독자들과, 앞선 책을 구매한 독자들을 배려해서 출간된 게 바로 『한 권으로 읽는 신령한 동식물사록』 ...........이지 않을까 하는 흔한 더쿠의 생각 ㅋㅋㅋㅋ



이게 무슨 느낌이냐면, 앞서 출간된 『신령한 동식물이야기』는 한정판/에디션/초회판 이런 느낌이고, 이번에 출간된 『한 권으로 읽는 신령한 동식물사록』은 일반판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면 이해가 쉬우려나? 



그렇다고 이번에 출간된 역사책 『한 권으로 읽는 신령한 동식물사록』의 내용이 부실한가?! 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물론 앞선 책에 비하면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지만, 굵직굵직한 내용은 거의 포함되어있다. 심지어 앞선 책에는 실려있지 않는 새로운 사진자료들도 많이 포함되었다. 고로 앞선 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이번에 새로나온 『한 권으로 읽는 신령한 동식물사록』을 다시 살 수 밖에 없는 뭐 그런....전지적 더쿠마인드랄까 뭐랄까 ㅋㅋ





앞선 책인  『신령한 동식물이야기』 리뷰에서도 썼듯, 이번 개정된 『한 권으로 읽는 신령한 동식물사록』은 우리나라 역사 속에 기록된 신비한 동물과 식물에 대한 이야기다. 



신령한 동물의 대표 주자라면!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한번 쯤은 들었을 법한 신령한 동물인 (주작, 청룡, 현무, 백호)를 비롯하여 단군신화 속 곰과 호랑이, 고구려의 상징 삼족오를 비롯하여, “똘기, 떵이, 호치, 새초미~” 노래를 부르며 쉽게 외운 십이지신등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들이 이 책 속에 실려있다. 근데 여기서 함정!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 이야기라고 해서 이 역사책을 우습게 보지 말자. 이런 신령한 동물들은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들인건 맞지만, 우리가 간과한 사실이 있다. 우리는 이 동물들이 왜 신령한 동물이라 부르는지, 어째서 현대에 이르러서까지 유명한 건지, 대체 역사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등 그 사연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 그렇기에 이 책을 꼭 읽어야만 한다.




발이 세 개라는 의미가 담긴 삼족오는 실제 존재하지 않는 동물을 숫자로 표현한 동물이다. 3은 상고시대부터 우리민족 문화를 상징하는 숫자이며, 한국의 신화와 삶 속에 꾸준히 사용되고 있는 상징숫자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은 3이라는 숫자를 하늘, 땅, 인간을 연결하는 상징숫자라고 믿었다. 또, 우리 민족은 신성한 행위 또는 새로움을 표현할 때 3을 사용했다. 3은 우리말로 ‘삼’이라고 읽는다. 삼은 생명이나 생명을 낳는 일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또 태와 탯줄을 일컬어 ‘삼’이라고 지칭했고, 생기다의 옛말도 ‘삼기다’라고 불렸는데 여기서의 삼기다의 ‘삼’도 옛날에는 숫자 3과 연관지어 썼다. 즉 ‘삼’이 생명과 관계된 단어였기 때문에 같은 발음이었던 생명을 지칭하는 숫자가 되었다. p 051



고구려는 부여와 더불어 고조선의 영향을 크게 받아 태양신을 천신으로 믿었고, 삼족오를 천상의 동물이자 태양신 또는 태양신의 사자, 태양의 불을 먹고사는 전령이라고 믿었다. 고대에는 태양을 하늘의 대표적 자연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삼족오를 하늘을 대표하는 동물로 생각하여 숭배했다. 즉 삼족오 신앙은 단순히 새를 숭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 태양을 믿었던 고대 천신사상에서 시작되었다. p 052



사방신을 풍수지리로 한 이유는 『의룡경』, 『금낭경』, 『감룡경』 이라는 책의 영향 때문이었다. 세 권 모두 당나라대 제작된 풍수지리 책으로 조선시대에는 음양공부와 초시 시험 교과서로 사용할 정도로 필독서였다. 『의룡경』에 따르면 청룡은 산의 동쪽을 의미하는데 용의 몸 위에 봉우리가 없어야 하고, 반듯한 몸으로 낮고 평평한 것이 귀중하고 집터 중심이 명당이라고 적혀 있다. p 075



백호는 실존하는 동물로, 조선시대에 종종 나타나곤 했다. 그래서 백호를 발견하면 상서로운 일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태종실록에는 중국에서 백호를 잡은 일을 왕에게 아뢰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태종실록』 권8, 태종 4년 11월 1일). (…) 중국에서는 백호를 전설의 동물로 생각할 정도로 신성하게 여겼는데, 이 영향을 받아 조선도 백호를 신령한 동물이라고 믿었다. 흰 털을 가진 동물은 희귀했기 때문에 길상의 징조로 여겼다. 그래서 흰털을 가진 호랑이인 백호는 기존 산신을 상징하는 동물인 호랑이에 길상의 의미인 흰색이 섞이면서 조선시대에 백호를 더 신적인 존재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p 083




그렇다면 신령한 식물은 무엇이 있을까? 상대적으로 신령한 동물에 비해선 떠오르는게 없을지도 모른다. 벗뜨, 우리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알게모르게 옛날부터 전해내려와 지금까지도 현대인의 머리속에 자리잡은 식물 이야기들이 있다. 복숭아나무가지가 귀신을 쫓고, 각 동네마다 마을을 지켜주는 당산나무가 있다는 것. 뿐만 아니라 부처님하면 연꽃이 떠오르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은 모란과 각별한 인연이 있으며, 조선의 선비들의 덕심(?)을 불러일으키는 건 사군자(매화, 난, 국화, 대나무)라는 것. 다는 몰라도 최소 1가지 이상은 들어본 이야기 일 것이다. 하지만 이 식물들이 왜 저런 신령한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는지 물어보면 “음?” 하며 고개를 갸우뚱 할지도. 그렇기에 이 책을 꼭 읽어야만 한다222222.




복숭아나무는 이른 봄, 잎이 나기 전에 꽃을 피우는 나무라서 봄의 전령이라고도 불린다. 무속에서 복숭아나무를 신령하게 여기는데, 이느 ㄴ나무 기운을 없애고 귀신을 물리치는 힘을 가진 나무이기 때문이다. 복숭아나무의 신이한 능력은 주로 민간신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우리나라 민간신앙에서 복숭아나무는 악귀를 물리치고 전염병을 치료하며 집을 지키고 신병이나 정신병을 치료하는 능력을 발휘한다. 특히 악귀를 물리치는 능력이 가장 강조되어 복숭아나무 가지로 만든 방망이로 귀신을 물리치는 설화나 정월 초하루에 복숭아 나무 판자를 둬 귀신을 쫓는 풍습이 대대로 전해져 내려왔다. p 329



모란은 권위, 부귀, 명예, 길상, 번영, 창성, 화복, 만남 등을 상징하는 꽃이다. 궁궐과 민간에서 다양하게 사용된 꽃으로 목단화라고도 불린다. 모란이 우리나라에 유입된 시기는 신라로, 선덕왕 때 당나라 태종이 선덕왕에게 모란도와 모란 씨를 선물했다는 기록에서 처음 모란이 언급되었다. 선덕왕과 모란 이야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해진다. p 364



국화는 흔히 장례식이나 제례 때 사용하는 꽃이지만, 예로부터 불로장수를 상징하던 꽃이다. 국화의 다른 이름은 갱생, 장수화, 수객, 부연년, 연령객 등으로, 모두 장수와 관련된 의미를 갖고 있다. 국화는 본래 중국이 원산지로, 장수라는 뜻도 중국에서 유래했다. 중국에서는 신선들이 국화를 먹기 때문에 늙지 않는다고 믿어 국화꽃잎으로 차를 만들거나 꽃잎을 곱게 말려 베개 속이나 이불 속에 넣어 사용하기도 했다. p 372




2023년은 계묘년 흑토끼의 해


책속에 있는 신령한 동물 토끼 이야기!



십이지신의 네 번째 수호신인 토끼는 동쪽과 오전 5시에서 오전 7시, 음력 2월을 지키는 신이다. 토끼는 전 세계적으로 장수의 상징이자 달의 정령으로 여겨졌다. 토끼를 달의 정령으로 믿었던 것은 옛날 사람들이 음의 상징인 달이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토끼와 같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달은 예로부터 ‘정월은 천지인 삼자가 합일하고 하늘의 뜻에 따라 화합하는 날’이라고 하여 만물이 풍요로워지게 하는 자연물이라고 믿었다. 토끼는 가임 기간이 짧고 중복임신이 가능하여 다산을 상징한다. 그래서 풍요와 생산의 의미를 갖는 달과 같은 의미를 갖는 토끼하고 연결한 것으로 보인다. p 162



엄마토끼 한 마리와 아기토끼들이 살고 있었다. 봄이 되어 나물을 뜯으러 가다가 엄마토끼가 함정에 빠져버렸다. 때마침 노루 한 마리가 그 곳을 지나갔다. 엄마토끼는 노루에게 자신을 구해달라고 했지만 노루는 발이 짧아 구할 수 없어 그냥 가버렸다. 엄마토끼는 지나가던 너구리에게 구해달라고 했지만 너구리도 가버렸다. 이번엔 여우가 찾아왔는데, 함정 앞에서 기웃거리며 약만 올리고 갔다. 다음에는 삵이 왔지만 역시 그냥 가버렸다. 엄마토끼가 죽겠다고 생각해 구슬프게 울자, 지나가던 다람쥐가 나타났고, 엄마토끼는 다람쥐에게 아기토끼들을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아기토끼들을 만난 다람쥐가 함정에 빠진 엄마토끼 이야기를 하자 아기토끼들은 엄마가 빠진 함정으로 향했다. 엄마토끼는 아기토끼들에게 김첨지네 굴뚝모퉁이에 있는 호미를 가져오라고 했다. 엄마토끼는 호미로 벽을 디디면서 올라왔다. 하지만 곧 떨어졌다. 엄마토끼는 이번에는 칡넝쿨로 밧줄을 만들어 내리라고 했다. 아기토끼들이 밧줄을 내려 보내 엄마토끼를 끌어올렸지만 힘이 부족해 구할 수 없었다. 그러자 엄마토끼는 흙을 파서 함정을 메우라고 했다. 


하지만 아기 토끼들이 내려 보내는 흙으로는 메울 수 없었다. 토끼들이 주저앉아 울자 동쪽하늘이 밝아지더니 둥근 달님이 떠올랐다. 아기토끼들이 달님에게 소원을 빌자, 달님이 하얀 동아줄을 내려 보내 엄마토끼를 구해줬다. 그날 이후 토끼 네 마리는 달님이 내려 보낸 동아줄을 타고 보름달이 되면 달나라에 올라갔다. 


이 이야기는 함정에 빠진 엄마토끼를 구하기 위해 애쓰는 아기토끼들의 이야기며, 토끼가 왜 달 속에 살게 됐는지를 알려주는 이야기기도 하다. 원래는 달 속에만 살던 토끼가 중국의 약 찧는 토끼와 결합되면서 떡방아를 찧는 토끼로 변형되어 북한과 남한지역에 전파되었다.p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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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밍이네 어린 정원
고현경.이재호 지음 / 티나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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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돌아온 식물의책 타임!


n년 식물집사 답게 가끔 눈에 띄는 가드닝 책이 있으면 읽곤 한다. 물론 그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식물의 책은 누가 뭐래도 프로개님 책이긴 하지만ㅋㅋ. 그렇다고 내가 다른 가드닝 책을 안 읽는 것은 절대 아니다. 지금까지 서평했던 여러 식물의 책을 보듯, 난 프로개님이 아닌 다른 저자들의 가드닝 책도 꽤나 열씸히 읽었으니까! 뭐, 한마디로.. 오늘 소개하는 책도 식물집사라면 꼭 한번 읽어봤으면 할 가드닝 책이라는 그런 이야기!


오늘 포스팅하는 가드닝 책 「단밍이네 어린 정원」은 전원주택에 살며 정원을 가꾸는 부부의 이야기다. 그렇다. 식물집사라면 한 번쯤 꿈 꿔보았을 전원주택&정원!! 물론 실상은 아파트에 처박혀, 조그만 베란다만으로도 화분을 놓을 공간을 주셔서 그저 감사하는 배포작은 식물집사지만^_T.


이 책은 기본적으로 식물 가드닝과 정원 꾸미기가 메인으로 이뤄진 책이다. 어찌보면 식물을 좀 키워봤다(?) 싶은 사람들에 쉬울 법한 책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댓츠 놉! 초보 식집사들을 위해 식물에 대한 기본부터 차근차근 이야기 한다. 예컨에 식물의 분류라던가, 식물의 부위별 명칭, 광합성, 비료 등 식물의 성장에 영향을 주는 모든 것을 말이다. 하지만 역시 책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건 ‘정원’이다. 따라서 실내에서 가드닝하는 식집사들에게는 조금은 부럽고, 질투나는 책일지도 모른다. 모름지기 식집사라면 알고 있는 그것! 식물들에게 제일 최고의 화분은 ‘노지’라는 사실을 우린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실외에, 오롯이 나만의 정원이 있는 단밍이네가 넘 부럽다는 뭐 그런 이야기.




내가 본격적으로 식물을 키우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곰곰히 생각해봤다. 아마도 유산을 경험한 당시였던 것 같다. 다른 곳에 집중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위로가 필요했다. 그때 눈에 들어왔던게 집안에 있던 두어개의 화분이었다. 그렇게 본격적인 식집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초보자가 키우기 쉽다는(?) 식물들을 구입하고, 집에서 과일 먹다가 나온 씨앗을 심고, 전지작업 후 화단에 방치된 나무 가지 몇개를 집어와서 삽목을 하고. 그렇게 식물을 불리고 불리고 불리고. 그렇게 방안 곳곳에 식물들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물론... 그때 자리잡았던 식물들 중 몇몇은 지금 집에 없다. 식집사들이 으레 그렇듯(?) 여러 이유로 인해 초록별로 보냈다는 뭐 그런 슬픈 이야기랄까. 특히..............뿡뿡이 출산 & 육아 과정에서 엄청 많은 식물들을 초록별로 보냈다는 건 안비밀^_T.



뭐 여러 이유로 식물들을 초록별로 보내긴 했으나, 따지고 보면 이유는 하나다. 식물이 자라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했던 것. 예컨에 물을 제때 못줘서 말려 죽이거나(수국ㅃㅇ...), 환기를 제대로 못해줘서 자기 독성에 지 혼자 죽게하거나(율마ㅃㅇ..), 벌레 잡는다고 약+물샤워 미친듯이 하다가 과습으로 죽이거나(너무 많음^_T) 기타 등등!!! 


고로 식집사라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식물을 키우기 좋은 환경이 어떤 환경인지를! 아, 물론 이론은 잘 알고 있음에도 현실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가 더 많긴 하지만... 하하하하(내 이야기^^). 근데 여기서 또 함정이 있다면, 식물을 키우는 장소가 실내냐 외부냐에 따라 다르다. 조금 더 들어가면 화분에서 자라느냐, 노지에서 자라느냐일까나?


실내가드너로서는 정말 인정하고 싶지않지만, 노지에서 자라는 식물과 화분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시작부터가 다르다. 특히 화분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조금만 잘못해도, 식집사에게 반항을 하면서 죽을 꺼라는 협박을 한다는 슬픈 이야기.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듯 식물 또한 다양한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살아가기 힘든 환경에 처한 동물들이 먹이와 물을 찾아 이동하는 것과는 달리 식물은 스스로 이동할 수 없습니다. 우연히 씨앗이 떨어진 최초의 그 자리가 평생을 살아갈 자리가 되곤 합니다. 자신이 처한 환경이 불리해지더라도 그 환경을 회피할 수 없다는 뜻이지요. 식물은 그저 주어진 환경에 어떻게든 적응하며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 입니다. 가드너가 이를 알고 각 식물에게 적절한 환경을 제공하고 조절해주거나, 불리한 환경도 이겨낼 수 있도록 지원할 경우 식물은 더욱 안전하고 건강하게 자라 자신을 도운 가드너에게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식물이 살아가는 데 영향을 받는 환경에는 크게 온도환경, 광환경, 토양환경, 수분환경, 공기환경이 있습니다. p 052



아래에 식물이 살아가는데 아주 중요하게 영향을 끼치는 빛, 흙, 수분에 대한 내용을 책에서 발췌해보았다.




▶ 빛이 식물에게 주는 영향


식물이 좋아하는 빛이 따로 있을까요? 꼭 태양빛이어야만 할까요? 집안 형광등이나 백열등 아래에서는 광합성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 점에 대해 한 번쯤 의문을 가진 적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식물은 실내의 인공적인 빛 아래에서도 광합성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내 환경에서는 부족한 빛을 보충해주는 장치들이 개발되어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p 056



빛이 강렬할수록 광합성 양은 증가하며 많은 영양분을 만들어냅니다. 일반적인 식물의 경우 밤에는 빛이 없기 때문에 광합성은 하지 못하고 호흡만 하게 됩니다. 아침에 해가 다시 뜨고 서서히 빛을 받기 시작하면서 식물들은 이산화탄소 양과 호흡을 통해 배출하는 이산화탄소 양이 같아지는 지점을 ‘광보상점’이라고 합니다. 이 광보상점 이상의 빛을 받을 수 있어야 식물들은 지속적으로 생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빛의 세시가 점점 오후로 들어갈 수록 강렬해지고, 빛의 세기에 따라 광합석 속도 또한 증가하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면 더 이상 광합성 속도가 증가하지 않는데, 이 떄의 빛의 세기를 ‘광포화점’이라고 합니다. 식물마다 광보상점과 광포화점은 다릅니다. 광보사점과 광포화점이 낮은 식물일수록 실내환경처럼 빛이 적은 조건에서도 잘 자라게 됩니다. p 058



많은 빛이 필요한 식물들: 장미, 봉선화, 백일홍, 코스모스, 선인장, 소나무 등

중간 정도 빛이 필요한 식물들: 옥잠화, 비비추, 진달래 등

적은 양의 빛이 필요한 식물들: 스킨답서스, 스파티필름, 필로덴드론, 맥문동 등


많은 식물들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일장 변화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보입니다. 이를 식물의 ‘광주기성’ 이라고 부릅니다. 많은 수의 식물들은 꽃을 피우는 혹은 피우지 않는 기준이 되지는 빛의 길이인 한계 일장을 갖고 있습니다. 한계 일장보다 긴 일장 조건이 주어지면 개화하는 식물을 장일식물, 한계 일장보다 짧은 일장 조건에서 개화하면 단일식물이라고 합니다. 한계 일장이 없어서 일장 조건에 관계없이 개화하면 중성식물이라고 분류하기도 합니다. p 059



장일식물: 페튜니아, 금어초, 과꽃 등

중성식물: 봉선화, 진달래, 옥잠화 등

단일식물: 국화, 코스모스, 카랑코에 등



▶ 흙이 식물에게 주는 영향


식물을 키울 때 사용하는 토양은 논, 밭의 흙과 같은 일반토양과 원예용 특수토양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일반토양은 암석이 풍화된 가루에 유기물, 미생물, 수분, 공기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점토 함량에 따라 사질, 점질토양 등으로 구분됩니다. 반면 원예용 특수토양은 원예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흙입니다. 상토, 용토, 배양토 등의 종류가 있습니다. p060



식물이 좋아하는 흙은 어떤 흙일까요? 좋아하는 흙이 따로 있는 것일까요? 보통 좋은 흙은 아래 조건이 충족된 흙을 말합니다. p 061



공기가 잘 드나드는 흙(통기성)

물이 고이지 않고 잘 빠지는 흙(배수성)

물을 보유하는 능력이 좋은 흙(보수성)

비료성분을 보유하는 능력이 좋은 흙(보비성)

표토가 깊고 부드러운 흙

보통 토양의 pH가 6.0~7.0의 약산성에서 중성 범위의 흙(식물마다 다를 수 있음)

병충해가 없는 흙



좋은 흙을 만들기 위한 중요 포인트! (자세한 내용은 책을 읽으시길...ㅎ)

흩알구조와 떼알구조와 유기물

흙의 pH

유효토심


▶ 수분이 식물에게 주는 영향


수분부족 현상과 그로 인한 피해는 식물에게도 발생합니다. 식물 특히 초본 식물의 경우 80~90% 이상이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많은 양의 수분으로 이루어진 식물에게 적당한 수분 공급은 식물이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p 073



식물에게 수분이란?

광합성 재료

영양분의 흡수와 이동이 이루어지게 함

대사작용을 원활하게 함

팽압을 형성하여 식물의 고유한 형태가 유지되게 함

식물의 체온을 유지함



한여름같이 건조하고 더운 날씨에는 식물들 잎과 줄기가 축 늘어지고 탄력 읽은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식물의 고유한 형태를 유지하던 수분이 부족하여 팽압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 반대로 장마철처럼 수분 공급이 지나치게 많았을 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뿌리가 물에 잠겨 숨을 쉴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수분이 많아 땅속 산소가 부족해지면 뿌리 호흡이 원활하지 않게 됩니다. 호흡이 저하되면 식물의 정상적인 생리작용에 사용되는 에너지가 만들어지기 어려워집니다. p 074



그리고... 개인 정원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중요한 ‘정원’ 조성부터 시작해서, 정원에서는 가드닝을 어떻게 하는지, 계절별로 어떤 식물들을 심으면 좋을지 많은 정보가 이 책에 가득가득 담겨 있다. 물론 실내 가드너인 나에게는 아직까지는 필요가 없는 정보이지만, 언젠가!! 필요한 정보가 될거라 믿는다. 꼭 전원주택으로 이사가고 말리라.............




생각해보면 난 가드닝 책은 꽤 많이 읽었기에, 솔직한 말로 이론은 빠삭한 편에 속한다. 뭐든 시작하기전에 책보며 공부하고 시작하는 스타일이기도 하고. 근데 가드닝만큼 이론과 현실의 갭이 큰 것도 흔치 않다T_T. 뭐, 그 갭 덕분에 더 많은 실전을 경험하며 식물들을 여러 방법으로 키우는 도전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예컨에 식물은 오롯이 흙에서만 키워야한다고 생각했던 옛날과 달리, 물속에서도 식물을 잘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수경재배’라고 하면 흔히들 접하는 몬스테라, 연화죽, 상추 같은 것들 말고도 말이다. 물 관리와 양액관리만 잘 해주면, 커피나무 같은 유실수도 수경재배로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터득했다. 물론 수경재배는 흙에서 키우는 거에 비하면 더더욱 번거로운 가드닝이기도 하지만..하하.



그래도 뭐 확실한건 식물에겐 힘이 있다. 나를 위로하는 힘이. 매일 지긋지긋한 벌레와 사투를 벌이게 한대도 말이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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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군복의 역사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쓰지모토 요시후미 지음, 쓰지모토 레이코 그림, 김효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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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 권, 두 권 모으고 있는 세계사책이 있다. 시리즈물은 단연코 아니다. 다만 분류가 같다. 바로 ‘전쟁사’. 전쟁사 관련 책을 모으기 시작한 건, 아마도 임용한 교수님 책이 시작이었던 것 같다. 의도한건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 보니 전쟁사 관련 책들이 여러권 보이길래, 책장 한켠에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물론 그 모든 책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_T. 이쯤에서 돌이켜보면, 난 정말 책을 읽는 것 보다 모으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인 게 확실한 것 같기도. 뭐 여튼, 오늘 포스팅하는 세계사책은 여러 권의 전쟁사 책 중 하나인 『전쟁과 군복의 역사』 라는 전쟁사 세계사책이다. 



이 책 『전쟁과 군복의 역사』는 제목에서도 보이듯 ‘전쟁’과, 전쟁과 당대 시대상에 따라 발전한 ‘군복’의 역사를 소개한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짚고 넘어가자면, 우리가 현재 입고있는 옷이나 군복은 모두 서양에서 출발한 의류이기에,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전쟁과 군복의 역사도 당연히 서양 즉, 유럽을 중심이다. 즉, 동양이나 아시아 전통 군복(?)이 왜 없는가에 대한 의문은 애초에 해당이 안된다는 것!




내 나름대로는 역사더쿠라 세계사에서 비중있는 전쟁들은 꽤 알고 있는 편이다. 여러 세계사책으로 읽기도 했고, 임용한 교수님의 《토크멘터리 전쟁사》 라는 프로그램을 즐겨보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전쟁사란, 어디까지나 ‘전쟁’에 대한 것이다. 전쟁에 따른 정치, 문화, 사회의 변동 이런 느낌이랄까? 오로지 그런 것들만 머리속에 넘처날 뿐, 군복의 역사는 진심 1도 관심이 없었다. 아! 굳이 굳이 군복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을 찾자면, ‘버버리 코트가 군복에서 시작되었다’와 ‘세일러복이 해군에서 시작되었다’ 이 정도 랄까. 하하하.



즉, 군복의 역사는 제대로 아는 것이 진짜 1도 없었기에, 이 세계사책 『전쟁과 군복의 역사』는 나에게 신문물(?) 이었다. 제일 놀라웠던건, 군복의 역사가 신사복의 역사와 궤를 같이했다는 점이랄까. 넥타이부터 시작해서, 구두, 투피스(정장), 쓰리피스(정장) 등 각종 패션의 산물이 군복에서부터 시작한거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인지! 세계사 속 전쟁에 대해선 나보다도 엄청 많은 지식을 자랑하는 우리 신랑조차도 이런 내용이 처음이었다고 한다면 정말 말 다한듯 싶다.



물론! 군복의 역사가 신사복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고 해서, 고대 부터 그러했는가? 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또 당연히 NO 다. 고대야 뭐, 동양이고 서양이고 군복이라 말하기 민망할정도로 헐벗은(?) 옷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 최초로 통일된 군복이 등장한게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고 하니, 와. 이건 놀랄 노짜다. 하긴, 생각해보면 입고 있는 옷이 다 다르면, 싸울 때 니편인지 내편인지 알 수 없을테니 군복을 통일하는 건 정말 중요한 문제이긴 하다.



중세시대의 군복은 전쟁에서 얼마나 실용적인지도 중요하지만, 비전쟁시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편리한가에 중점을 두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왜그런고 하면, 당시의 기사들은 한마디로 ‘작위’를 받은 귀족이나 왕족이었다. 즉 ‘기사’ 이기 이전에 귀족, 왕족들이었기에, 일상생활에서 편하게 활동할 수 있던 일상복이 당시의 군복으로 고스란히 이어졌다나 뭐라나. 뭐, 이때까지만해도 냉병기를 주로 사용하던 시대였으니 크게 문제가 없었겠지만, 전쟁에서 열병기가 주로 사용되면서는 귀족을 위한 군복도 당연히...빠이빠이!



또 신기했던 점이 ..... A국가와 B국가가 전쟁을 벌여서, A국가가 이겼다다고 치자! 그럼 이긴 A국가의 군인들이 입은 군복이 전 유럽적으로 유행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쯤되니 군복도 확실히 패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 전쟁과 군복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가 가득 담겨있는 책이다보니, 전쟁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을 정도다.




정말 책의 내용이 풍부하기도 풍부하지만, 그 내용을 뒷받침하는게 있으니 바로 삽화다. 정말 수 많은 역사책을 읽어봤지만 이렇게 삽화가 많은 책은 처음인듯;; 그것도 올 컬러 삽화로 말이다. 아무래도 군복이다보니, 문자로만 풀어내면 ‘딱!’하고 떠오르지 않을 수 있어서 그런 것같다. 덕분에 문자로만 읽고, 흐리멍텅하게 머리로만 상상(?)하는 일 없이, 어떤 군복인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게 꽤나 마음에 들었다.



아래는 책의 일부 내용을 발췌하였다.



군복이란 무엇인가



제네바 조약 및 헤이그 육전 조약의 규정에 의하면 군복을 입은 자는 교전 상대국에 사로잡혀도 포로로서 보호를 받는다. 사복을 입은 자는 간첩, 테러리스트로 간주해 처형될 가능성도 있다. 군복이란, 국가가 군율로 정한 복제로 법적인 근거하에 지급하는 피복이다. 조약상 ‘멀리서도 알 수 있는 명확환 휘장’을 부착해야 한다. 장교 등이 관급품이 아닌 개인적으로 주문해 구입하는 경우에도 그 국가의 제복에 준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p 010



제복학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 군복의 규정을 조사하는 일이다. 각국에서 복장 규정을 정하게 된 것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이다. 이후 몇 년부터 몇 년까지 그 군복이 이용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한데 근거가 되는 명문 규정이 있는 경우는 그 규정을 최대한 찾아내야 한다. 예컨대, 프랑스 육군은 1661년 무렵, 영국 육군은 1706년에 처음 군율이 제정되었다. p 011



※군복의 아이템: 정모(관모), 견장, 넥타이, 훈장, 견식, 스트랩슈즈



넥타이가 군장 특유의 아이템이라고 하면 놀라는 사람도 많을 테지만 실은 넥타이야말로 틀림없는 군복용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다. 목에 감는 스카프형 장식의 원형은 고대 로마 군단의 병사가 목에 감았던 포칼레로 오늘날 신사복 역사의 정설로 정착했다. 당시 로마군의 투구는 목을 감싸듯 돌출된 형태로, 목덜미의 접촉이나 마찰을 완화하기 위해 감았을 것으로 보인다. p 021



훈장은 고대 로마 군단에서 탄생했다.​ 백인 대장급 장교가 팔레라 라는 금속제 원반을 가슴에 다는 관습이 1세기 때 이미 존재했다. 그 사람의 전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지금의 종군휘장과 같다. 그러므로 훈장의 원조는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십자군 시대인 12세기경부터 기독교 수도회의 기사단이 문장을 제정하게 되었다. 기사단은 십자군을 지지하는 군사적 단체로 각 기사단을 상징하는 문장을 서코트나 방패에 그려넣었다. 이 문장이 기사단 유니폼의 시초로 ‘훈장’ 제도의 기원이다. p 025~026



마지막 아이템은 구두이다. 단순한 신사화라고 생각하겠지만 이것도 군에서 유래된 형식이다. 스트랩 슈즈 자체는 일찍이 5,000년 전 유럽의 추운 지방에서 등장했다. 하지만 기후가 온난한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샌들을 주로 신었으며 로마 군단의 병사들은 바닥에 징을 막은 군용 샌들 칼리가를 신었다. p 033




근대식 군복 이전의 역사


인류 최초의 군복은 언제 탄생했을까. 인류 최고의 메소포타미아 문명기, 고대 수메르의 도시국가에 이미 군대가 존재했으며 통일된 제복이 등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인류는 문명의 개화 이래 군대를 조직하고 군복을 제정한 것이다. p 036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민권을 가진 자만이 군인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노예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일이었다. 시민들은 각자 창과 방패, 투구와 갑옷 등을 마련해 중장 보병으로 군무에 종사했다. 각자 말을 사육해야하는 기병은 부유층이 종사하는 병종으로, 자격 심사도 엄격했다. 해군은 직접 군함을 건조한 거부가 선주가 되어 조직했다. 즉, 하나부터 열까지 일반 시민의 기부와 봉사로 국방이 성립했던 것인데 당시는 군무나 공직에 얼마나 기부를 했는지 혹은 사회 공헌을 했는지가 평가의 기준이었던 사회였다. p 037



명확한 국가의 군대로서 장비품을 지급한 증거가 남아 있는 것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끌었던 마케도니아군으로, 도검과 갑옷 등 통일적인 규격품을 양산해 병사들에게 지급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을 지탱한 것은 국가의 군수 보급 시스템을 바탕으로 조직된 군대였던 것이다. p 039



(로마)기원전 107년 실시된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을 거쳐 직업 군인으로 조직된 정규군의 군단제를 시행하면서 통일적인 군장을 지급했기 때문에 이것도 국가의 군복이라 할 수 있다. 제정 시대 병사들에게 지급된 로리타 세그멘타타라고 불리는 갑판은 고대 세계의 최첨단 장비였다. 또 로마 군단의 군장은 오늘날 텍타이의 기원이 된 포칼레와 종군 기장의 원형인 팔레라 등 놀라운 첨단성을 갖추고 있었다. p 040




갑옷의 진화가 남성의 복장 전반에 변화를 촉진하기도 했다. 13세기까지 사슬갑옷이 주류였다가 14세기가 되면서 전신을 장갑판으로 감싸는 신형갑옷인 판금갑옷이 등장했다. 백년 전쟁에서 영국군의 장궁이 사슬갑옷을 간단히 관통하자 방어력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백년 전쟁 초기에 큰 활욕을 보인 영국의 왕태자 에드워드는 ‘흑태자’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한데 그가 입었던 초기 판금 갑옷의 표면이 검은색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p 041




전신에 밀착되듯 감싸는 신형 갑옷이 등장하면서 남성의상의 길이가 짧아졌다. 그로인해 남성의 다리가 드러났다. 중세 유럽의 신사라고 하면 흔히 타이즈 차림을 떠올리는데 그 배경에는 군사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또 갑옷 안에 입는 솜옷에서 유래한 더블릿이라는 풍성한 상의가 유행했다. (…) 이처럼 군장과 일반 신사복 사이에는 커다란 연관성이 있다. 당시의 지배 계층인 왕후가 귀족들이 기사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일상적인 복장이 갑옷으로 규정된 면이 있다. p 042




르네상스 시대부터 17세기 초, 국가의 군대가 봉건 기사단에서 근대적인 정규군으로 변천한는 동안 정장을 지배한 것은 용병들이었다. 그들은 용병대장의 뜻에 따라 일정 장비를 통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복장과 장비는 각자 마련했다. 단, 용병산업을 제도화한 스위스 용병은 특별한 경우인데, 저명한 종군 기록 작가 디볼드 실링의 『루체른 연대기』를 보면 적어도 각 지역 부대마다 색조나 양식을 통일한 제복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p 044



1477년 낭시 전투로 로렌공국을 공격한 부르고뉴 공국의 군주 용담공 샤를은 로렌 공작 르네2세가 고용한 스위스 용병대에 의해 전사했으며 (…). 낭시 전투 이후 스위스 용병들은 전투로 찢어진 옷 안에 샤를의 본진에서 약탈한 화려한 옷감을 채워 넣고 개선했다고 전해진다. 그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천 조각이 눈길을 끌면서 전신에 슬래시를 넣는 기묘한 패션이 탄생해 17세기 중반에 이르는 200년 남짓 유럽의 신사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p 045



30년 전쟁 - 스웨덴군과 ‘근대식 군복’의 등장


(스웨덴 왕)구스타프 아돌프는 초기의 징병제인 선택 징병제를 제정했다. 당초 피복 자재의 조달과 제조는 각 연대별로 이루어졌으며 징병되지 않은 시민들에게 피복비를 징수했다. 1620년 제정된 법령에 의하면, 병역의 의무가 있는 15세 이상의 남성은 지역 집회소에 10명 단위로 정렬하게 되어 있었다. 군 징병관이 그중 한 명을 선택했으며, 그를 위한 피복비와 징비품 비용은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 9명이 내는 일률 징수금으로 충당하는 제도였다. p 049



스웨덴군은 덴마크식으로 군기의 색으로 구분한 4개의 연대가 있었다. 이들은 본국의 징병제에 의해 구성된 스웨덴인 연대가 아니라 외국인 지원병으로 구성된 직업 군인들의 보병 부대로, 스웨덴군 외정 부대의 실질적인 주력이었다. ‘황색 연대’는 국왕 직속 근위 연대로 왕궁 연대 또는 호위 연대라는 통칭도 있었다. 그 밖에 ‘청색연대’, ‘적색연대’, ‘녹색연대’가 존재했다. 이들 연대의 장교는 스코틀랜드인이 많았으며 영국에서 온 병사도 다수 존재했다. 황색, 청색과 같은 색명은 당초 군기의 색을 나타낸 것에 불과했지만 1625년을 경계로 군복의 색도 통일한 것으로 보인다. p 051



전쟁이 한창이던 1626년, 구스타브 아돌프는 메웨 전투에서 당시 세계 최강으로 불리던 폴란드 기병 부대를 머스킷 총을 활용해 격퇴했다. 이듬해 8월 디르샤우 전투에서 경부를 피격당한 이후로는 갑옷을 입을 수 없게 되었다. (…) 국왕이 갑옷도 입지 않고 진두에 선 모습을 본 기병이나 보병들은 더더욱 무거운 갑옷을 꺼렸을 것이다. 당시의 화승총은 성능이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에 견고한 갑옷으로 어느 정도 방어력을 확보할 수 있었기 떄문이다. 이처럼 군복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총기의 보급과 갑옷의 퇴장이 있었다. ‘근대 군대의 아버지’라고 불린 구스타브 아돌프가 근대 군복의 창시자가 된 것도 필연적인 일이다. 갑옷의 폐지는 다양한 군복색의 통일과 채용으로 이어졌다. p 053



루이 14세의 전쟁 - 태양왕과 ‘페르시아풍’ 군복



루이 14세는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외모에도 굉장히 신경을 썼다. 다만 신장은 160cm 정도로 17세기 당시 남성의 신장으로 볼때 작은 편이라고 할 수 없지만 결코 장신은 아니었다. 본인도 그 점이 신경 쓰였는지 하이힐을 착용했다. 그가 신은 뒷굽을 빨간색으로 칠한 궁정용 하이힐은 금세 가신들 사이에 유행했다. 루이 14세의 궁정에서 하이힐은 남성들이 맵시를 뽐내기 위해 신는 구두였다. (…) 또한 프릴과 레이스를 이용한 리본 장식을 가득 배치한 매우 여성적인 복장을 즐겼다. 그는 화려한 의상을 유행시켜 국내의 산업을 진흥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모자 차양에 깃털을 가득 장식하거나 랭그라브 라고 하는 큐롯 스커트 형태의 반바지를 입고 발레 동작처럼 우아한 자태로 활보하는 모습은 중성적인 그의 미의식과 기호를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p 066




당시는 남성 귀족이나 군인도 모두 장식을 달고 하이힐을 신었는데 솔직히 이런 차림은 전쟁에 적합하지 않았다.​ 리본이나 프릴 장식이 나부끼는 전쟁은 당시로서도 위화감이 컸다. 당시 프랑스군에도 제복이라고 부를만한 복장이 존재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로 널리 알려진 왕실 근위 총사대의 제복이다. p 068




영화나 TV에 등장하는 다르타냥과 삼총사는 하나 같이 파란색 타바드를 입고 있다. 하지만 루이 13세나 리슐리외의 시대를 반영한 것이라면 고증적으로 문제가 있다. (…) 실제 ‘파란색 타바드’가 채용된 것은 1657년으로 프롱드의 난이 종결된 이후 루이 14세가 치세하던 시대였다. 푸케를 체포할 당시의 다르타냥은 이 제복을 입고 있었을 것이다. 1665년부터는 길이가 더 긴 캐속이라는 상의로 진화했다.1665년 이후 총사대의 캐속에는 루이 14세의 빨간색 태양 문장이 추가되었다. p 069



촌스럽다고 생각되던 긴 상의가 1660년대 이후에는 최신 패션으로 둔갑해 프랑스군에 널리 유행한다. 이 상의는 ‘페르시아풍’ 또는 ‘동양풍’이라고 불리었다. 상의만 보면 폴란드나 리투아니아 부근의 ‘동유럽풍’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페르시아풍 복장은 아비 안에 상의와 비슷한 길이의 소매가 긴 옷을 한 벌 더 입었다. 이것을 베스트라고 불렀다. 그 후, 베스트의 소매를 없애고 길이도 짧아졌는데 이것을 프랑스에서는 길러라고 불렀다. 즉, 상의와 베스트 조합으로 중세 더블릿 시대에 탄생한 ‘스리피스’가 유럽에서 부활한 것이다. 오늘날 스리피스 정장의 직접적인 원점이라고 할 수 있다. p 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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