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빅토리아 여왕과 귀족 문화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무라카미 리코 지음, 문성호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전에 영국 귀족문화에 대한 세계사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이번에 같은 출판사에서 또 다른 영국에 대한 책을 출판했는데, 이번에는 무려 영국 여왕이다. 정확히는 대영제국의 최전성기 여왕, 그녀 재위했던 시기를 ‘빅토리아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유명한 여왕, 바로 빅토리아 여왕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그 어떤 유럽의 여왕 중에서도 유명세로 탑 파이브에 들지 않을까? 여튼 그정도로 빅토리아 여왕은 유명하다. 그녀가 유명한 이유는 대충 네가지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1. 빅토리아 시대, 해가지지않는나라, 대영제국의 최전성기: 대영제국, 아일랜드 연합왕국과 인도의 여왕


2. 그녀의 자손들이 유럽 왕실 곳곳으로 퍼져있어서, 일명 ‘유럽의 할머니’.


3. 영국 왕실의 전통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를 만든 여왕.


4. 유럽 왕실에 혈우병을 퍼트린 사람.


 



빅토리아 시대는 제국주의가 최고조를 달렸던 시기이다보니, 세계 곳곳에 대영제국 식민지가 있었다. 영국의 반대편에도 있었다. 그렇기에 대영제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 따라서 이 시기가 영국에게는 제일 리즈시절이라 할 수 있지만, 그만큼 그림자도 많던 시기였다. 식민지가 많았다는 이야기에서도 충분히 추정할 수 있지 않은가. 간혹 tvN 프로그램인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영국아저씨가 출현하면, 그렇게 입이 마르도록 사과하는 이유가 바로 대영제국 시절의 영국의 그림자 때문이기도 하다.



‘유럽의 할머니’와 ‘유럽 왕실에 혈우병을 퍼트린 사람’은 그 궤가 같다. 빅토리아 여왕의 자녀는 9명이었는데, 그 중 딸들이 여러 유럽 왕가와 결혼했고 그 사이에서 42명의 손자녀를 두었다. 이 42명의 손자녀 중 손녀들도 역시 또 여러 유럽왕실로 시집을 갔다. 문제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혈우병 인자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 책에 따르면 혈우병은 여성을 통해서만 유전이 되고, 남자만 발병한다고 한다. 즉, 빅토리아 여왕에게서 시작한 혈우병은 그녀의 딸, 손녀들을 통해 유럽 왕실 곳곳으로 퍼저나갔다. 빅토리아의 아들부터 시작해서, 손자, 증손자 등등. 혈우병은 계속해서 그녀의 피를 이은 유럽 왕실 남자들을 덮쳤다. 무엇보다 빅토리아에게 시작된 혈우병으로 인해 러시아 왕가가 몰락했다고 하니, 여러모로 그녀의 존재감은 대를 끊이지 않고 유럽왕실에 드리워졌다고나 할까?



‘군립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를 영국 왕실의 전통으로 만든 빅토리아. 그 덕분에 군주제가 몰락하는 시점에서도 영국 왕실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제 2장 정치편에서 이 부분에 대해, 빅토리아의 일기와 그녀의 정치력을 보여주며 설명한다. 말 나온 김에 이 책의 목차를 보면, 빅토리아의 유년시절을 시작으로, 여왕으로 즉위하고, 그녀의 사랑인 알버트와의 결혼, 그녀의 사생활과 정치, 최전성기였던 대영제국의 영광, 그녀의 사망까지를 이야기한다. 빅토리아 여왕의 일기와, 당대의 신문기사,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자서전등을 전부 망라해서 말이다. 소설이 아닌, 오롯이 사료에 의거한 영국사, 세계사책이다. 영국사, 특히 대영제국 시기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제 1장 즉위준비 1819-1837


제 2장 대관식과 정치 1837-1839


제 3장 빅토리아의 왕궁 1837-1880


제 4장 결혼으로 가는 길 1828-1840


제 5장 여왕의 주거와 가정생활 1837-1860


제 6장 만국박람회와 전쟁 1851-1858


제 7장 상복을 입은 여왕과 남자들 1861-1883


제 8장 제국의 영광 1868-1899


제 9장 끝날 때 1900-1901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빅토리아 여왕과 관련된 각종 삽화가 정말 많이, 아주 많이 실려있다는 점이다. 올컬러로! 물론 처음부터 흑백인 삽화는 어쩔수 없지만, 그를 제외하면 올컬러다. 만약 글만 있었다면 다소 지루했을지도 모르는 이 세계사책은, 올컬러 그림자료를 넣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읽는 즐거움 뿐만 아니라 보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아래에 이 책의 일부를 발췌하였다.


▶ 제 1장 즉위준비 1819-1837

6시에 어머니가 깨워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하울리와 커닝엄 경이 와서 내게 면회를 요청했다고 했다. 커닝엄 경은 유감스럽게도 나의 할아버지, 국왕께서 이미 세상에 없다는 것, 오늘 새벽 2시 12분에 숨을 거두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내가 여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고했다. p 012, 빅토리아의 일기 中



(빅토리아가)탄생한 시점에 아버지 켄트 공에게는 세 사람의 형이 건재했으나, 모두가 정식 결혼에 의한 자식이 없었다. 만약 이 백부들 중 누군가가 적자를 얻었거나, 아니면 선왕이 살아 있는 동안 빅토리아에게 동생이 생겼다면 남자 우선인 계승 순위 때문에 왕위가 돌아오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빅토리아가 겨우 8개월이 됐을 때 아버지 켄트 공이 세상을 떠나 동생이 태어날 가능성은 사라졌으며, 백부의 자식들도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빅토리아는 겨우 18세의 나이로 영국의 군주가 된다. p 012



모친인 켄트 공 부인은 세상을 떠난 남편의 시종무관이었다가 자신의 회계관으로 등용된 존 콘로이와 함께 딸이 세간의 눈을 최대한 피하게 하고, 동시에 모랄면에서의 의심스러운 왕궁 사람들과도 심리적으로 깊게 엮이지 않도록 켄싱턴 궁전에 격리하듯이 키웠다. (…) 켄트 공 부인의 동생 레오폴드는 빅토리아에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는 사모의 대상이었으며, 동시에 지적인 인도자이기도 했다. 그는 세계 각지에서 현지의 정세를 적어 보내주었고, 편지를 통해 지리와 정치, 국제 정세의 지식을 전수했다. 자신이 여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녀가 아직 모르던 시절부터 빅토리아는 어머니와 콘로이, 레오폴드의 유도로 ‘그날’을 위한 준비를 착착 쌓아가고 있었다. p 019



1832년 7월, 13세일 때 어머니가 일기장을 준 일을 계기로 빅토리아는 더욱 구체적으로 하루하루의 기록을 일기로 남기기 시작했다. 이 일기는 가족의 죽음 등 도저히 말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중대한 일이 일어났을 때 중단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반드시 제개되었고,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계속 기록되었다. 또 언니, 숙부, 아이들, 가족과 친척에게는 대량의 편지를 썼다. p 021



빅토리아가 어른이 되어 남편과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보낸 건실하고 도덕적인 삶은 19세기 중류 계급 사람들에게 가정적 도덕의 모범이 되었다고 평가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 원점에는 가족이 없던 왕녀가 도덕 교본과 인형놀이로 생각해낸 공상의 가정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면, 참으로 얄궂은 상황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적은 것들은 모친이 매일 체크했고, 당연하지만 왕녀가 읽는 것들도 엄하게 제한되었다. 켄트 공 부인은 침실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 딸이 하인이나 여관과 필요 이상으로 잡담을 해 영향을 받지 않도록 가정교사에게 트리머 부인의 도덕 교본을 낭독해 들려주도록 명령했다. 당사자의 시점으로 생각한다면 모든 면에서 모친의 간섭과 제한이 많았던 소녀 시대였음을 엿볼 수 있다. p 023



켄트 공 부인은 빅토리아가 즉위할 때까지 같이 침실에서 자고, 가능한 딸을 자기의 컨트롤 아래에서 키우려는 의도가 있었다. 하지만 사교 행사로서의 정찬에는 적극적으로 출석시키지 않았다. 이때의 의도는 어른으로 취급하지 않고, 아이인 채로 머물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머니인 켄트공 부인과 측근이자 브레인인 존 콘로이에 대해서는, 빅토리아를 세간과 격리해 아이 취급을 했다는 점에서 역사가나 전기 작가들의 견해가 일치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아가서는 콘로이는 사설 비서, 모친은 섭정으로 지명되어, 즉위 후에도 영향력을 확보하려 했다. 장사자의 생각은 당연히 별개였다. p 031



빅토리아가 자신이 여왕이 될 것임을 안 것은 1830년 3월 11일, 10세 때였다고 한다. 위의 인용은 즉위 50주년과 60주년 시기에 대량으로 제작된 저렴한 기념 책자 중 하나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 ‘좋은 사람이 되겠다’라는 대사는, 그녀의 성격의 핵심을 나타내는 일화로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말했는지 디테일은 달라지지만, 다양한 종류의 여왕 전기, 회상록, 기사 등의 초반 하이라이트에 대부분 등장한다. p 038



신의 뜻에 따라 이 지위에 오른 이상, 나는 전력을 다해 나라를 위한 의무를 다할 것이다. 나는 너무나 어리고, 전부라고까진 하지 않더라도 많은 부분에서 경험이 부족할 테지만, 지금의 나만큼 올바른 일을 하겠다는 진정한 선의와 열의를 품은 사람은 없으리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p 040, 빅토리아의 일기 中




▶ 제 2장 대관식과 정치 1837-1839

그것은 빅토리아의 어머니 켄트 공 부인의 여관인 레이디 플로라 헤이스팅스에 관련된 사건이었다. 당시 빅토리아와 켄트 공 부인의 모녀 관계는 더욱 험악해져갔으며, 이렇게 사이가 나빠진 원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너무나도 싫어하는 콘로이와도 친하게 지냈던 여관 플로라는 그들의 스파이처럼 느껴졌다. 빅토리아는 그녀를 ‘엄마의 느낌 좋은 레이디’라고 일기에 적었지만, 당연히 비꼬는 것이었다. p 056



여관과 총리를 둘러싼 문제는 같은 시기에 하나 더 더해졌다. 1839년 5월, 휘그파의 멜번 총리가 식민지 자메이카를 둘러싼 법안에서 패배하고, 반대파인 토리파로 정권이 교체되게 된다. 이 시기까지 빅토리아는 정치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멜번총리에게 의지하고 있었으며, 그와 빅토리아는 아버지와 딸 같은 관계를 쌓고 있었다. 대관식 날의 일기에는 자신을 지켜보는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던’ 것을 네 번이나 되풀이해서 적었을 정도로. 여왕은 마지못해 토리파의 원로 정치가 웰링턴 공작을 불러 총리가 되기를 요청했으나, …. 필은 빅토리아의 침실 여관 중 ‘몇 명인가를 변경’할 것을 요구했다. 이 여관은 전원 휘그파 정치가의 아내들 중에서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 빅토리아는 ‘전원을 바꾸라고 강요당했다’고 해석해 강하게 반발했으며, 일체의 변경을 거절한다. 결과적으로 필은 내각을 조직하는 것을 단념하고 멜번이 돌아오게 되었으며, 여왕은 만족했다. 하지만 정치에서 구심력을 잃었던 멜번 총리의 명운은 금방 다했고, 2년 후에는 사임하는 사태로까지 몰리게 된다. p 058 ~ 061



빅토리아의 치세는 길었다. 경험을 쌓은 그녀의 의견은 존중되었고, 발군의 기억력을 기초로 제시되는 과거의 지식은 대신들에게도 나름대로 존중받았다. 하지만 편지나 총리와의 회견을 통해 매일 영향력을 발휘한다 해도, 최종적인 결정에는 의회의 의향이 우선시되었으며, 정치나 외교, 군사에 관한 커다란 문제에 여왕 개인의 의견을 밀어붙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한 입장으로 서서히 물러났기때문에, 수많은 나라에서 군주제 그 자체가 폐지되던 역사적 흐름 속에서도 21세기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영국 왕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p 06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일 근대인물 기행 - 한일 근대사 속살 이야기
박경민 지음 / 밥북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랜만에 내 주 관심사인 한일관계사 역사책을 들고 왔다. 물론 서평은 오랜만이고, 근래까지도 한일고대사책은 종종 읽었다. 서평만 안했을 뿐!




이 책은 한일관계사 중에서도 근대사를 다룬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암흑기이자 떠올리고 싶지 않은 역사인 근대사를 말이다. 단, 일제강점기까지는 가지 않는다. 일제강점기까지 가는 과정을 그릴 뿐이다. 그 과정을 그리는데 있어서 중심은 인물이다. 한일 근대사에 있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흐름을 만든 조선인과 일본인을. 그 인물들 중에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을 법한 인물도 있다. 반면에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인물들도 있다. 한, 일 양 국가간의 인물 모두 말이다.



우리는 조선이 어째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는지를 알고 있다. 다만 ‘제대로’ 알고 있는게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가 국사, 근현대사를 배웠을 당시에는 그 유명한 순/헌/철 시대의 세도정치와 나쁜 일본인들에 의해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정도만 배웠다. 약간 ‘남탓’ 위주였다고 해야할까? 여튼 그렇게 배웠다. 반대로 우리에게는 자랑스러운 역사인 독립운동사는 아주 세세하게 배웠다. 이름이 비슷비슷한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을 하나하나 외우면서. 이 당시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 국사, 근현대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오로지 수능 때문이었으니까. 그냥 가르쳐주는 대로 배웠고, 수능을 봤으며, 한 문제 틀린걸로 분노했었더랬다. 뭐 여튼, 그랬다.



그리고 꽤 오랜시간이 흘렀다. 언제부턴가 역사책을 읽는데, 특히 한일관계사 관련 역사책을 읽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임진왜란이 오롯이 왜놈들 탓인가? 2백년간의 평화에 도취되어, 국방력을 조금씩 조금씩 줄여나간 조선의 위정자들은 문제가 없었나?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선조의 리더십은 문제가 없었나? 일제강점기가 온게 오롯이 나쁜 왜놈들 탓인가? 당시 조선의 왕과 조선을 주름잡던 노론세력들은 정말 문제가 1도 없었나?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는 어두운 역사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어찌보면 부끄럽고, 창피하지만 엄연한 우리의 역사를 말이다.



우리 조상들의 어두운 역사를 이야기하면, 식민사관이다 뭐다해서 마녀사냥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내 블로그에도 그런 덧글들 꽤 있었음^^). 그나마 다행인 건 요즘은 시대가 변해서, (학교교육은 몰라도) 예전처럼 빛나는 역사만 이야기 하지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얼마나 다행인지. 몇 백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류성룡의 『징비록』이 빛을 발하는건가 싶기도 하다. 확실한 건 요즘은 서점에서도 ‘징비’를 하는 역사책들이 왕왕 보이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박종인 기자님의 「땅의 역사」 시리즈 같은?



‘징비’란 지난 일의 잘못을 후회하여, 후에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한다는 뜻이다. 즉, 나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정확히 파악하여 대비한다는 뜻이다. 고로 징비를 하기 위해서는, 지난 잘못에 대해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를 명확하게 알아야 하는게 우선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한일 근대인물 기행」도 ‘징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 



저자는 조선후기부터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까지, 조선과 일본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미화도 생략도 없이 사실에 기반하여 책을 썼다. 특히나 동시간대의 일본과 조선의 위정자들이 어떤 행보를 보였는지, 그 행보의 결과가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를 말이다. 그러다보니, 한일근대사를 학교에서만 배우고 끝난 사람들에게 이 책은 배신감을 주는 책일 지도 모른다. 왜? 학교에서는 남탓(일본) 위주로 가르쳤으니까.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내가 배웠던 교육과정에 한해서지만. 거기다 일본이 조선을 야금야금 집어삼킬 수 있었던 이유조차도 대게 가르쳐주지 않기도 했고. 그렇기에 난 한일근대사 역사책으로 이 역사책을 추천한다. 정확한 내용을 알아야,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고, 그래야만 반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류성룡이 『징비록』을 썼으나, 조선의 위정자들은 이를 무시했고 결국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이러한 일이 또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장담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에 알아야만 한다. 임진왜란 이후 왜 같은 일이 반복되었는지를 말이다. 그게 바로 이 역사책을 추천하는 이유다.




조선과 일본, 

근대화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일본은 그 기회를 잡았고

조선은 그 기회를 철저히 무시했다.




조선과 일본, 일본과 조선. 근대화의 시작.


조선과 일본. 서구열강의 눈에는 두 나라 모두 먹기 좋은 살구였다. 어떻게든 개항을 하게 하면 되는 거였다. 다만 서구열강에 비해 조선과 일본은 힘이 없었으니, 당연히 불평등한 시작이었을테지만 말이다. 확실한 건 불평등이라 할지라도, 개항을 해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화를 하느냐 마느냐이다. 



미국은 함대를 이끌고 일본의 해역으로 들어갔다. 조금의 시차는 있으나, 미국의 배는 조선의 해역으로도 들어왔다. 하지만 조선과 일본의 반응은 달랐다. 일본은 미국을 받아들였고, 조선은 거부했다. 그것도 아주 극렬하게 거부했다. 여기서부터 조선과 일본, 일본과 조선의 평행선은 끊어졌다. 일본은 빠르게 서구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룩한다. 반면에 조선은 강력한 쇄국을 단행한다.



조선과 일본의 서로 다른 선택의 배경은 어디서 나온 걸까?


시마바라의 난을 계기로 천주교가 가공할 단결력을 가졌음을 절실히 깨달은 막부는 천주교에 대한 단속과 탄압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쇄국정책을 ‘조법’이라며 막부 말기까지 약 250년간 엄격하게 유지했다. 이와 같이 에도막부는 엄격한 쇄국정책을 오랫동안 흔들림 없이 시행했지만, 조선의 쇄국과는 개념상 많이 달랐다. 즉 서구문물과 기술에 호의적인 반면 천주교에는 폐쇄적이었고, 무역의 효용성은 잘 알지만 막부 외의 다이묘와 상인들이 활용하는 것을 엄금했다. 정리하면 에도막부의 쇄국정책은 막부가 허용한 다음과 같은 4개의 제한된 문을 통해서만 바깥세상과 교류할 수 있었다.


나가사키의 데지마를 통한 네덜란드 상인과의 독점무역


쓰시마번을 통한 조선 왜관에서의 독점무역


사쓰마번(현 가고시마현)의 류쿠왕국에 대한 편취무역


마쓰마에번(현 마쓰마에군)의 에조치현(현 훗카이도)에 대한 독점무역 . p 029



일본 도쿠가와 막부는 쇄국을 하면서도, 기본적으로 서구문물(네덜란드)이 들어오는 창구 하나는 계속해서 유지했다. 즉, 본인들의 사상에 걸림돌이 되는 종교는 반대하지만, 본인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기술이나 문물은 끊임없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달랐다. 조선은 서구의 문물도, 서구의 종교도 전부 반대했다.



개별적인 수탈 외에 탐학한 관리들은 교묘한 수법으로 삼정의 제도를 이용한 시스템적인 수탈을 가장 많이 활용했다. 전정은 경작하는 토지에 부과되는 세금이다.농민들은 원래 수확량의 1/10 정도를 내면 되었으나, 지방 수령들이 여러 가지 명목의 부과금을 붙이며 점점 늘어나기 시작해 심한 경우 수확량의 1/2까지 수탈당했다. 군정은 16~60세의 남자가 군역 대신 군포 또는 쌀로 내는 세금이다. 18세기 중반 균역법의 시행으로 부담이 절반으로 줄었으나 군포를 면제받는 양반 수가 늘어나자 그 부족분이 농민에게 전가되었다. 지방관들은 죽은 사람에게도 부과하거나(백골징포), 어린이에게도 부과하고(황구첨정), 친척들에게까지 세금을 내게 했다(족징). p 065



정조는 죽기 직전 세자와 김조순을 불러 세자에게 옆에 있는 김조순을 가리키며 그의 보필을 받으면 절대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 않을 것이라는 유훈을 남겼다. (…) 딸이 순조의 왕비(순원왕후)로 책봉되자 그는 영안부원군에 봉해졌으며…. 1804년 정순왕후가 수렴첨정을 거두자 어린 순조를 대신해 섭정했다. 김조순은 정순왕후가 승하한 1805년 막후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p 071



김조순의 막내아들 김좌근은 초고속 승진을 통해 명실상무하게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핵심이 되었다. (…) 1862년 삼정의 문란 등으로 발생한 각지 농민봉기의 대책으로 설치된 삼정이정청의 총재관을 겸했다. 농민봉기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할 삼정이정청에 농민봉기에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세도정치의 원흉을 앉혔으니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올 수 있을까? 조선 말기의 정치가 늘 이런식이었다. p 074



조선은 세도정치로 망해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세도정치를 하던 당시 집권여당(안동 김씨 등)을 탓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세도정치를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준 사람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고 일컫는 정조다. 정조는 안동 김씨의 좌장 김조순을 직접 국구로 만든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조는 외척의 위험성을 잘 아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조순에 힘을 실어주었다. 김조순은 내 사람이니 안그러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이 문제였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제일 큰 문제는 정조의 조선은, 오로지 정조 한 사람 덕분에 굴러갔던 것이다. 시스템에 의해 잘 굴러가는 조선을 만들었어야 했으나, 정조의 조선은 시스템이 아닌 사람, 즉 정조 한 사람이 움직이는 나라였다. 그렇기에 정조가 죽자마자, 정조라는 한 사람 때문에 숨죽이던 간신들이 여기저기 몰려나와, 조선을 갉아먹기 시작 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구 열강이 앞다투어 조선으로, 일본으로 밀고 들어왔다.


(일본) 2개월이 넘는 협상 끝에 1854년 3월 31일 역사적인 미일화친조약을 맺었다. 막부는 일단 개항해 전쟁을 피하되, 시간을 벌어 서양을 이길 국방력을 키우자는 심산이었다. 역사적인 조약의 체결로 일본은 개국으로 나아가는 첫발을 내디뎠다. 통상조약은 아니지만 일본이 서양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다. 이 조약을 모델로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와도 조약을 체결했는데, 최혜국조항 등 일본에 불리한 조항을 뒤늦게 깨닫고 나서 후일 메이지 신정부가 오랫동안 불평등조약 개정이라는 숙제를 떠안게 된다. p 034




(조선) 프랑스군과의 병인양요에 이어 신미양요에서 미군이 물러나자 대원군은 더욱 확고한 쇄국으로 치닫게 된다. 일본이 이미 개항했다는 것과 개항 이후 벌어지는 일본 사회의 격렬한 변화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국제정세 파악에 소홀하고 시대적 소명을 통찰하지 못한 ‘우물 안 개구리’ 조선호는 시대의 조류와는 역방향으로 더욱 강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p 133



일본은 미국에 개항했다. 당연히 불평등한 관계였으나, 일본은 개항했다. 당시 청나라 이홍장과 주중 일본공사 모리 아리노리의 대화에서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이홍장이 물었다. “왜 귀국은 서양옷을 입는가.”


모리가 대답했다. “옛날 옷은 놀기에 좋았지만 열심히 일하는 데는 절대 맞지 않는다. 우리는 가난하고 싶지 않다. 부자기 되기 위해 옛것을 버리고 새 것을 취했다.”


이홍장이 반격했다. “의복 제도는 조상에 대한 존중 표시다. 만세 후대에 이어야 한다.”


모리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조상이 살아 있어도 똑같이 했을 것이다. 천 년 전 조상들은 중국 옷이 당시 일본 옷보다 우월해서 중국 옷을 택했다. 남의 나라 장점이 보이면 일본은 어떻게든 배워서 따라한다. 그게 일본의 미풍양속이다.” _P 287 (「대한민국 징비록」 中 모리 아리노리 전집 일부, 박종인 」




조선은 미국이 이 땅에 들어오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했다. 그렇기에 조선의 백성들을 사지로 밀어넣었다. 무기에서부터 이미 엄청난 차이를 보인 미군과 조선군이었음에도 말이다. 결국 조선 군은 미군에 의해 무참하게 학살당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딱 48시간만에 종료된 이 날, 미국 전사자는 단 3명인 반면, 미군측에서 작성한 기록이긴 하지만 조선군은 최소 300명 이상이 죽었다. 헌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날의 전투는 조선의 ‘승리’로 둔갑했다. 이유는 단 하나다. 미국이 조선의 해역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그저 미국이 조선의 개항을 ‘포기’하고 돌아선 것인데도,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조선의 위정자들은 조선이 승리했다고 자축했다. 조선군은 전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조선은 완벽한 쇄국을 선언하며, 조선 땅 곳곳에 척화비를 세웠다. 



신미양요 4년 뒤, 일본 운요호가 미국이 했던 것 처럼 강화도로 쳐들어왔다. ‘개항’을 빌미로 말이다. 과거 미국이 일본에 그러하였듯이. 이 때의 일본은 이미 근대국가로 돌아선 뒤 였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열강에 문호를 개방하고, 먹는 것 부터 입는 것 까지 모든 것을 서구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본은 근대국가로 나아가고 있었다.



1863년 봄 5명의 조슈번 청년들이 밀항해 영국 유학을 가기 위해 영국 범선의 석탄 창고에 숨어 요코하마에서 출발했다. 이들은 ‘서구의 해군과 국방기술을 배우고 온 후 제대로 된 양이를 하겠다’고 번주를 설득했고, 당시 번의 실세 다카스키 신사쿠의 지원으로 유학이 결정되었다. 유학이 불법이었기에 번주는 모르는 체 하되 사적으로 경비 지원을 해주었다. p090 (유학생 중 한명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



메이지 신정부는 선진국의 근대문물을 직접 시찰하고 이를 개혁에 반영하고자 용단을 내렸다. 오늘날 장차관과 국장 등에 해당하는 상당수의 핵심 인력이 무려 2년 가까운 기간에 걸쳐 구미 12개국을 순방했다. 이들의 또 하나의 숨겨진 임무는 서구와 맺은 기존 불평등 조약의 재협상이었다. (…) 당시 신정부의 실세 및 정부 각 부처의 중견 관리 41명, 수행원 18명, 유학생 43명 등 100명이 넘는 대규모였다. 이들의 장기 공백으로 정무에 큰 차질이 빚어졌으니 메이지 신정부의 서구 따라잡기를 통한 근대화의 의지와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p 112



이렇게 말이다. 이 때 서구에 유학을 갔던 유학생들이 훗날 메이지유신을 주도하고, 근대 일본의 권력층에 선 사람들이며,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데 일조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우리에겐 ‘원수’라는 말로도 부족하나, 일본에서는 나라를 발전시킨 애국자였다.




조선은 세도정치 후에 또 다른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그저 성씨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거기다 왕실은 황제국을 자칭했다. 물론 일본도 만세일계라는 허황된 말로 (천황)제국주의로 나아갔지만, 적어도 일본은 근대국가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오로지 황제를 위한 헌법을 만든 대한제국과는 달리, 일본은 천황제를 명시하긴 했으나 적어도 서구열강의 헌법을 조사하여, 외적으로나마 입헌군주제의 면모를 갖춘 근대헌법을 만들었다.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탕평책을 추진해 그간 소외되어 있던 남인과 북인등을 골고루 발탁했다. 아울러 역량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탈세와 당쟁의 온상이자 유림의 사권력으로 뿌리내린 서원을 정리했다. (…) 백성들에게 피해가 컸던 환곡제를 폐지하고 사창제를 시행했고, 지방특산물의 진상제도를 폐지하는 등 백성들의 잡세를 없앴다. 양반과 토호의 세금 등을 철저히 조사해 양반에게도 세금을 부과했다. 호포제를 시행해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했고, 양전을 통해 토호와 양반의 누락 토지를 발굴해 전정을 개선했다. 또한 은광 개발을 허용하는 등 나라의 재정확충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p 127



1865년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확실히 세우기 위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의 중건 공사를 시작했다. (…) 양반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원성이 높아져 대원군 몰락의 한 원인이 된다. p 128



물론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고 개혁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희망은 있었다. 하지만 그 개혁의 중심이 왕권강화였기에, 결국 그 개혁도 경복궁 중건이 시작되며 빛을 바랬다. 거기다 천주교 박해는 계속 되었고, 쇄국 역시도 계속되었다. 심지어 아들인 고종은 아비를 못마땅해하면서, 부자간의 권력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그 사이에는 고종의 부인인 민비가 있었다. 고종이 권력을 잡았을 때, 민비도 권력을 잡았다. 그렇게 조선에는 또 다른 세도정치가 시작 된 것이다. 여흥 민씨라는 성씨만 바뀐 세도정치가.



근대화의 기회를 무시하고

철저하게 ‘황제국’을 선언한 조선은

망국행 급행 열차에 탑승했다.



물론 조선에도 근대국가로 나아가고자 했던 사람들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그들은 실패했다. 



아시아에서는 제일 빠른 근대국가가 된 일본은 아래와 같이 차근차근 조선을 식민지화 시키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준비 과정에서 보다 원활하게 조선을 식민지화 시키기 위해, 고종을 비롯한 대한제국 황실을 위한 당근도 차근차근 준비되고 있었다는건 안비밀.



ㆍ1904년 한일 의정서 및 제 1차 한일협약 - 조선을 일본 군사기지로 사용, 고문 정치, 그리고 대한제국 황실 보전 및 보증


ㆍ1905년 제 2차 한일협약 (을사늑약) - 외교권 박탈, 그리고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 유지 보증


ㆍ1907년 한일신협약 (정미7조약; 정미늑약) - 차관정치, 고종 강제퇴위 및 조선 행정권 등 박탈


ㆍ1909년 기유각서 - 사법권 박탈


ㆍ1910년 6월 - 경찰권 박탈


ㆍ1910년 한일병탄 - 국권피탈, 그리고 한국 황제 및 그 일가의 존엄과 명예 향유 보존 및 충분한 세비 지원




또 다시 이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과연 장담할 수 있을까? 우리 해군이 욱일기를 단 일본 전함에 경례를 한게 불과 최근이다. 욱일기를 단 일본 해군이 독도 인근에 들어온 게 얼마 안된 일이다. 



류성룡이 말한 ‘징비’를 우리는 얼마나 하고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과거에 한번씩 블로그에 서평을 올렸던 역사책 중 일제강점기 관련 역사책 몇 권을 다시 꺼내어 읽었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암흑기와도 같은 바로 그 시대이다. 암흑기인 일제강점기를 그린 책은 크게 독립운동과 일제의 만행으로 나뉠 수 있는데, 이번에는 내가 소개하려는 책은 일제의 만행과 관련된 책이다. 이 역사책은 그 내용도 탄탄하거니와, 우리가 절데 잊어서는 안될 역사이기에 과거에도 여러차례 블로그에 소개했던 책이기도 하다.



물론 이 역사책들은 일제의 만행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보니, 가벼운 맘으로 읽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 무겁다. 하지만 그렇다고 평생토록 모르고 살면 안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가해자인 일본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역사이다보니, 당시 피해자였던 우리마저 이 역사를 잊는다면, 지난날 일제의 만행은 없던일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혹시나해서 덧붙이지만, 난 반일을 하자는 이야기도 일본을 가지말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나만해도 시간만 되면 일본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고, NHK채널을 자주 보고, 일본원서를 자주 읽는 사람이니까. 그저 많은 사람들이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알고, ‘기억’했으면 좋겠다. 적어도 매번 무슨 이슈가 있을 때마다 갑자기 ‘반일’, ‘불매’를 들고 일어나서 씩씩거리다가, 어느 순간에 슉 가라앉아서 ‘반일이 무엇? 불매가 무엇?’ 하며 모르쇠하는 그런 상황도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특히 어떠한 이슈로 인해 반일, 불매를 외치면서 누군가를 ‘매국노’라고 마녀사냥하는 행위는 정말-.. 일제와 다를바가 하나도 없다. 그렇게 누군가를 매국노라고 칭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애국자이고 깨끗한지 본인을 돌아봤으면 좋겠다. 과연 본인들은 일제의 잔재가 남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일본음식을 먹지 않고, 일본제품을 하나도 쓰지않는지, 경술국치일이 언제인지, 아니 경술국치가 어떤 의미인지는 아는지, 수백명의 독립운동가들 중 이름과 그의 행적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되는지, 매 국경일마다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는지, 순국선열을 위한 묵념을 하고 있는지를 물어보고 싶다.



이렇게 쓸데없기 길게 말한 이유는 단 하나다. 저렇게 누군가를 탓할 시간에, 혹은 어떠한 이슈가 있을 때마다 냄비처럼 들끓었다가 가라앉을 시간에, 차라리 한일근대사에 대해 정확히 알고 기억하기를 바란다. 눈앞에 있는 일본인들이 똥베짱 부리면서 자기네 조상들은 잘못없다고 말할 때, 왜곡으로 점칠된 역사를 배우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때, 그들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요목조목 냉정하게 지적할 수 있기를 바란다. 현대에도 곳곳에 남아있는 친일파들이 백년전 그 때처럼 기승할 생각을 못하도록 매섭고 날카로운 눈으로 감시할 수 있기를 바란다.




1) 일본이 찾아낸 침략과 식민지배의 기록: 우리는 가해자입니다


지은이: 아카하타신문편집국 기자들

출판사: 정한책방



이 책은 일본 기자들이 기록한 책이다. 제국주의 시절 자기의 조상들이 어떠한 만행을 벌였는지 직접 보고, 듣고, 두 발로 뛰어가며 목숨 걸고 취재하여 남긴 기록물이다. 이 책 안에는 일본이 제국주의시절 자행한 모든 불법행위에 대한 증거와 증언(녹취록)이 그대로 담겨있다. 이 책의 서문은 이렇게 쓰여 있다.


​이 책은 침략 전쟁의 역사와 상황을 규명하고, 기자들이 한국, 중국 등에서 피해를 입은 현지 주민들로부터 직접 들은 증언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는 1부 '청일/러일전쟁에서 패배 전까지의 51년'과 '한국병탄과 식민지 지배'에서 다룹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한 것은 청일/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주된 목적이 한반도의 국민과 자원에 대한 '강탈적 지배'에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일본군의 개입/군사지배에 저항하며 일어난 동학농민혁명, 항일의병운동 등과 같은 한국의 민중 운동, 특히 3.1 독립운동이었습니다. 



한일 관계의 초점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는 위안부 피해자를 직접 취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의 통제 아래 벌어진 수 많은 여성 인권 유린 행위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중략)


실제로 천황 절대의 암흑 정치 세력에 의해 불법화된 당 기관지 <세스키>는 '조선 독립운동 3.1기념일 만세!', '일본, 조선, 대만, 중국 노동자/농민의 단결!', '조선의 토지를 조선의 농민에게!' 등의 구호를 내걸었습니다. 그리고 수 많은 우리의 선배들이 탄압받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투쟁은 미래를 향한 한일 두 나라와 두 나라 국민들의 우호에 있어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고 확신합니다. 한국의 독자 여러분께서. 부디 이 책을 읽어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한국 독자에게 전하는 글 - 아카하타 신문 편집국장>



이 책을 쓴 일본 기자들은 자기 조상들의 신념을 따랐다. 식민지배를 하던 민족이었음에도, 당시 식민지 노동자들의 편에 섰던 그 조상들의 신념을 말이다. 그래서 과거의 그 조상들처럼, 이들도 일제의 만행을 취재하는 내내 수많은 반대와 살해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일제의 만행을 알리고자 이 책을 썼다.



당시 식민지배를 당했던 조선과 우리 조상들. 백여년이 지난 현재 우리는 그 땅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식민지배 당시 일제의 만행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조상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있나? 이 책을 읽다보면 머릿속에 이런 질문들이 떠다니기 시작한다. 가해국가의 기자들은 자국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책까지 내었는데, 당시 피해국가의 후손들인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 14살 때 강제 동원된 한국의 근로정신대 피해자, 양금덕


초등학교 일본인 교장과 헌병은 "정신대로 일본에서 일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여학교도 갈 수 있다." 라며 학생들을 속여 양씨 등 10명을 지명했습니다. 나중에 부모들이 반대한다고 하자, 교장은 "네가 안 가면 경찰이 너희 부친을 잡아갈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렇게 끌려가게 된 곳은 미쓰비시 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의 도우도쿠 공장이었습니다. 삼엄한 감시하에서 거대한 비행기 부품에 도장작업을 했습니다. 당시 페인트가 자주 눈에 들어갔던 탓에 지금도 눈이 아프다고 합니다. (중략) 양 씨는 일본이 패전을 맞은 뒤인 1945년 10월에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급료는 받지 못한 상태였고, 한국 사회에서는 일본군 위안부로 오해받았습니다. 정신대였던 것을 숨긴 채 결혼했는데, 남편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되자 "더러운 여자"라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 P 100



-위안소를 전전하며, 김복동


김 씨가 14살이던 당시 마을의 구역장과 반장이 일본인과 함께 찾아와 "딸을 군복 만드는 공장에 보내라. 거부하면 반역자다" 라며 가족들을 위협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끌려간 곳은 중국 광둥성에 있던 위안소였습니다. 일본군의 성 노예가 되어 하루 15명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주말에는 50명이 넘었습니다. 5년간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 등을 전전했습니다. 외국에 가면 일본 정부가 이 문제를 이미 해결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보니 이야기를 하면 다들 놀라면서 이대로는 안된다고 많이 공감해주십니다. 



-중국 후난성, 창지아오 학살사건


쟝야오메이 증언) 일본군이 창지아오에 왔을 때 쟝씨는 생후 1개월이 된 작은 딸과 집에 있었습니다. 세 사람의 일본군은 쟝 씨를 발가벗겨 이웃집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들은 부엌에 이불을 깔더니 당시 15살 정도이던 그 집 소년에게 쟝씨를 강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호통을 들은 소년은 얼떨결에 쟝 씨를 덮쳤지만 공포로 떨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화가 난 일본군은 나무 막대기를 쟝 씨의 하반신에 쑤셔 넣고 30분 이상 고통을 주었습니다.


런더바오 증언) 일본군이 집에 들어와서 총검으로 런 씨의 머리를 가격하고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다음 날 출산 예정이던 모친은 거동조차 힘든 몸으로 침대에 누워있었는데, 일본군이 총검에 2번이나 배를 찔려 태아와 함꼐 목숨을 잃었습니다. 일본군은 이에 멈추지 않고 모친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낸 뒤 총검으로 찔러 높이 내걸었습니다. 주변에 있던 동료 일본군들이 웃으며 박수를 쳤습니다. 



-정의감 강하던 아버지도 결국 가해자


고바야시의 차녀 노자키 요시코가 <아카하타신문>에 아버지, 고바야시 다로 당시 상등병의 일지를 제공했습니다. "가족으로서는 가해 사실을 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요. 그러나 침묵하고만 있으면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 되어버리잖아요. 괴롭더라도 진실을 말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중략)


난징점령 (1937년 12월) 까지의 행군과 일본 육군 최대 규모 작전인 '쉬저우 작전'의 경로를 기록한 일지입니다. "병사는 칼로 머리를 벤다. 토민(민간인)은 총살"등의 기술이 남아있습니다. 일지의 기술만 봐도 살해당한 민간인이 15명 입니다. (중략)


포로 살해 관련 일지에는 제16사단의 나카지마 게사고 사단장이 "돼지 같은 놈들은 주저 없이 죽여도 된다"고 명령한 내용도 적혀있습니다. (중략)


고바야시의 차녀 노자키는 고등학생 시절에 처음 일지를 읽었을 때, 기록되어있는 가해의 참상을 접하고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가족의 입장에서 볼 때는 늘 성실하고 정의감이 강했던 아버지였기에 더욱 무서웠고, 전쟁의 끔찍함 또한 통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베 총리는 중일전쟁이 침략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아버지의 일지를 보면 애초부터 침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대신해 희생자 유족에게 사과한다고 바뀔 것은 없겠지만, 스스로 가해를 저질렀다는 진실과 마주할 수는 있겠지요. 이 일지가 평화를 위해 작게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합니다."



 



2)분노하기 전에 알아야 할 쟁점 한일사


지은이: 이경훈

출판사: 북멘토



이 책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의 만행과 그 만행들을 왜 지금까지 풀지 못하고 있는지를 요목조목 밝히고 있다. 총 아홉가지 문제를 이야기 하고 있으며, 그 아홉가지가 바로 “일본군 성 노예, 강제동원, 사할린 한인, B·C급 전범, 야스쿠니 신사, 재일 한국인, 독도, 문화재 환수, 역사교과서” 문제이다.



이 아홉가지 문제를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하는 제일 큰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한일기본조약’이다. 1965년 박정희 정권 당시 한일국교가 정상화 되었는데, 이 때 체결한 ‘한일기본조약’이 바로 일제의 만행에 대한 면죄부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는 1910년 8월 22일 이전에 체결된 조약·협정은 ‘이미 무효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라는 조항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은 일본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강요된 한일병합 이전의 모든 조약이 무효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체결은 합법이었으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무효가 되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 중략 … 청구권협정으로 일본이 한국에 제공한 무상 3억달러, 유상차관 2억달러의 성격에 대해서도 한국은 배상금이라고 주장하지만 일본은 ‘독립축하금’이라고 하여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한일 간의 재산·권리 등에 대한 청구권에 대해서도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음을 확인한다’라고 하여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에 따른 한국국민들의 개인청구권 문제를 모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나마 일본군 위안부, 사할린 한인, 원폭피해자 문제 등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B·C급 전범으로 몰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한국인들에 대한 피해보상에 관해서도 일본 측은 한일청구권협정을 내세우며 한국 측에 보상책임을 떠넘겼습니다. 졸속으로 체결된 재일한국인협정은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와 민족차별 문제를 매듭짓지 못하였습니다. 어업협정에서는 독도문제를 협정문에 명기하지도 않았고, 문화재 협정에서는 협정 이후 새롭게 드러나는 일본인 개인이 소장한 한국 문화재의 환수에 대해서 한국정부에 '기증되도록 권장'한다고 하여 이후 약탈당한 문화재 환수에 적극적으로 나서가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_ P 016



심지어 박정희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던 그의 딸은 일본군 성노예 문제와 관련하여 일본과 밀실협약을 맺기도 했다. 거기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소송은 사법농단과 재판거래등으로 무기한 연기되기도 했다. 이후 정권이 두 차례나 바뀌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변한 것은 없다. 아, 생각해보니 변한 것이 하나 있긴 있다. 당시 생존해계셨던 피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돌아가셨다는 것. 이제 정말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아야 할 당사자인 피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몇 안계신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정부나 일본 정부는 변한 것이 없다.




3)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지은이: 강덕상

출판사: 역사비평사


이 책을 쓴 사람은 얼핏 보면 한국인이지만, 사실은 일제강점기 당시에 태어난 황국신민이었다. 당시 지도상에 ‘조선’은 없었으므로, 그는 일본어를 쓰고 일본문화를 향유하던 일본인이었던 샘이다. 심지어 일본에서 살았으니, 조선에 대한 기억이나 향수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하지만 그의 뿌리는 어디까지나 조선이었다. 그런 그가 역사를 전공하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한반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렇게 관동대지진에 대해 알게되었다. 그리고 당시에 있었던, 조선인을 상대로한 관동대학살을 마주한다.



저자는 책에서 이리 말했다. ‘왜, 어째서, 무엇때문에, 관동대학살의 피해국인 한국정부는 이 일에 대해 언급이 없고 무관심한건가?’. 



그래서 관동대지진과 관동대학살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기록물을 찾아다니고, 증거, 증언 등 수 많은 자료를 모았다. 그리고 이 책에 실었다. 그 수많은 사진과 기록, 자료들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심지어는 눈 뜨고 보기 힘든 일본인이, 조선인을 학살하는 사진들도 게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렇게 관동대학살을 샅샅히 밝힌 책이 발매되었어도, 슬프게도 한국 정부는 여전히 무관심하다. 심지어 관동대학살이 있었던 1923년 9월 1일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은, 그 의미가 바뀌었다. 2011년 3월 11일 원전사고를 일으킨 동일본 대지진으로 말이다.



내지인과 조선인을 구분하기 어려우므로 말씨가 분명치 않은 자를 조선인이라 하고, 무리를 이룬 피난민을 보고서는 ‘불령선인’ 단체라고 속단했으며, 조선인 노동자가 고용주의 인솔하에 작업장으로 가는 것을 ‘조선인 무리의 습격’ 이라고 잘못 믿어리는 등의 사례가 많았다. 9월 2일 오후 3시경 자경단원이 고마고메 경찰서로 끌고가 폭탄과 독약을 소지한 조선인을 조사해본 겨로가, 폭탄이라고 한 것은 파인애플 깡통이었고 독약이라고 한 것은 사탕이었다. P 108



이처럼 불안에 떠는 일반 시민을 동원한 권력은 어떤 행동요령을 내렸을까? 앞서 살핀 것처럼 경시총감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요시찰인, 사회주의자, 조선인의 책동에 특히 주의하시오, 방화에 주의하시오” 등의 말을 했을 것은 분명하다. 일반 심니이 점점 더 암시에 사로 잡혀갈 때, 이런 종류의 예단이 실제로 원인 불명의 화재와 겹쳐 민중을 더욱 흥분시키면서 “방화다!”, “불 지르는 것을 보았다!”, “조선인이다!”라고 외치게 만들었다. P 113



지침으로 “일부 조선인과 사회주의자 가운데 불온을 꾀하는 자 있으니 저들에게 빈틈을 엿볼 기회를 주지 않도록 시민 여러분은 군대·경찰과 협력하여 충분히 경계토록 할 것이며, 우물에 독을 투입하는 부녀자도 있으니 우물물에 주의할 것” 등의 지령이 있었던 것은 뒤에서 살필 사이타마현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다. “그 당시 ‘조선이니 습격해온다’라는 전단지를 신문사 이름으로 게시했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P 126



일본 국회의원 인 육군소장 쓰노다 고레시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집 부근에서도 매우 소란스러워 문밖으로 나가보았더니 무장한 군대가 있었다. 그리고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적은 지금 하타가야 방면에 나타났다”라고 호령하고 있어 그 장교를 붙들고 “적이란 누구인가”라고 질문했더니 “조선인이다”라고 답했다. 내가 다시 “조선인이 어째서 적인가” 라고 묻자 “상관의 명령일 뿐 알지 못한다”라고 대답했다. P 181



지바가도로 나오자 1,000명 가까이 될 것으로 여겨지는 조선인이 4열로 늘어서 있었습니다. 가메이도 경찰서에 일시 수용되어 있던 사람들입니다. 헌병과 군대가 얼마간 붙어 나라시노 방향으로 호송하는 중이었습니다. 물론 걸어서였지만요. 행렬에서 벗어나면 구타하는 등 포로처럼 다루었으며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헌병은 2명, 병사와 순사가 4,5명이 동행했습니다. 그 뒤를 사람들이 우르르 뒤쫓아가면서 ‘우리 원수를 내놔라’ 하며 흥분하고 있었습니다. (헌병은) 군중들을 쫓아내고 조선인들을 목욕탕에 넣었지요. …(중략)… 군대와 수사는 뒷일은 알아서 하라는 듯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자, 이제 그 다음에는 베고, 찌르고, 때리고, 차고 … 총은 사용되지 않았지만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P 278



4) 흔들림없는 역사인식


지은이: 다카자네 야스노리

출판사: 삶창


이 책의 저자는 일본인이다. 맨 위에 소개한 일본 기자들처럼, 이 책의 저자도 일제의 만행을 파헤치기 위해 당시 식민지배의 피해자들의 곁에 서서 목소리를 냈던 사람이다. 뿐만아니라,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올바른 역사 인식을 지니기 위한 역사윤리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역사왜곡이 만연한 일본에서, 일본인이 이런 책을 출간했다는 사실은 놀랍기도 하지만, 어느 한 편으론 부럽기도 하다. 과거에는 남의 일이라 생각된 역사왜곡이, 실은 우리나라 안에서도 자행되고 있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있노라면, 대체 일제와 우리가 다를게 뭐가있나 싶기도 하니 말이다.


일본의 근대사를 둘러싼 역사 인식이 문제가 된 지 오래다. 최대 논점은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의 대립으로 볼 수 있는데, 사실의 검증과 교육을 중시하는 사고방식 대 사실 검증에는 관심이 희박한 채 근대를 미화, 정당화하는 데 중점을 둔 입장이다. 전자는 후자를 역사 왜곡이라 비판하고, 후자는 전자를 자학사관이라 비판한다. 이러한 대립은 역사교육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교과서 검정 과정에서 전자는 점차 축소되고 후자 쪽이 증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과서에 따라 강도의 차이는 있으나 사실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교육함으로써 현대를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역사교육이 약화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런 흐름은 제2차 아베정권에 의해 한층 강화되고 있다. p 035



역사윤리란 ‘역사에 책임을 지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역사 용어로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개념으로서는 전혀 드물지 않다. 역사상 자주 볼 수 있고 국제 관계에서 많은 국가가 역사윤리의 과업을 다해왔다. (……)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인간의 길’에 어긋나는 행위가 없었는지를 따져보고, 만일 있다면 반성하고 사죄와 배상, 처벌 등의 과정을 통해 청산할 의무가 발생한다. 또 항상 이 ‘역사윤리’를 의식하며 정치와 사법에 임해야 한다는 뜻도 포함한다. p 036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의 책임을 묻는 이른바 전후 보상문제에 대하여, 일본 정부는 국가 간의 ‘해결’이 끝났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완전히 무시했다. 하지만 ‘해결이 끝난 문제’라는 일본 정부의 주장은 핑계에 불과하다.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고, 국가 간에도 배상을 한 것이 아니라 한일 경제협력협정을 맺고 청구권을 방기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는 피해자의 배상 청구를 모조리 거부했다. 그런 까닭에 배상 청구는 사법의 장에서 다툴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사법 역시 하급심에서 드물게 원고가 승소하는 일은 있어도 최고재판소에서는 전부 패소 확정을 강요받았다. 사법이 정치권력을 추종하는 소위 어용 기관이 된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p 04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발칙한 이솝우화 - 삶의 자극제가 되는
최강록 지음 / 원앤원북스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솝우화, 아주 어린 시절 읽었던 책이다. 그냥 어렸을 때도 아니고, 한창 동화책을 보던 코흘리개 시절말이다. 그래서 이솝우화는 당연이 아이들이 읽는 책이라는 인식이 있었고, 머리통이 커진 이후로는 더더욱 읽어볼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이솝우화의 ‘이솝’이 저자라는 것도 몰랐다. 거기다 이솝우화가 고전소설 이라는 인식도 없었다. 그정도로 나에게 이솝우화는 그저 어린아이들이 읽는 책이었고, 앞으로도 읽을 일이 없던 책이었다. 




이솝우화에 대한 나의 인식이 저 정도였기에, 이 책을 받았을 때는 좀 반신반의 했다. 어른들을 위한, 어른을 독자로한 이솝우화라, 어른에게 이솝우화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래도 도움이 되겠지? 라고 생각하며, 이 책 「삶의 자극제가 되는 발칙한 이솝우화」를 읽기 시작했다. 



※이솝에 대해서


『이솝우화』의 저자는 고대 그리스의 ‘아이소포스(기원전 620년~564년)’입니다. ‘이솝’은 아이소포스의 영어식 발음이죠. 그에 관해 알려진 정보는 매우 적습니다. 입담은 재치 있었으나 외모가 흉측스럽고 말을 더듬었따는 설이 있습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따르면, 이솝은 도시 국가인 사모스 시민 이아드몬의 노예로 이야기를 잘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어 주인을 많이 도와줬다고 합니다. 훗날 자유인이 된 그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지혜가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환영을 받았으나, 그를 질투한 델포이의 시민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집니다. 그가 남긴 우화는 구전으로 전해지다가 후대에 문서로 만들어졌습니다. 노예 출신이었으니 우리가 알고 있는 고전의 저자 중 신분이 가장 낮은 사람이었던 거죠. 그래서인지 그의 우화는 매우 실제적입니다. 착하고 바르게 살라는 도덕적인 교훈만 담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칠고 잔인하며 처절하기까지 한 현실적인 이야기가 많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사형 집행을 앞두고도 탐독했을 정도니까요. p 007~008



놀랍게도 태초에 이솝우화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고전이 아니었다. 이솝이 만든 우화는 이솝이라는 노예가, 생존을 위해서 자신이 쓸모를 알리는 수단으로 사용한 도구였던 것이다. 처음부터 이 우화의 독자는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었다. 그저 시간이 지나면서 잔혹한 마더구스나 그림형제 이야기가 어린이 동화가 되었듯, 이솝우화도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동화가 되었던 것이었다.



이솝의 배경을 알고나서야, 저자가 이 책의 책머리에 쓴 이솝우화에 대한 말이 이해가 되었다.


정치인이 읽으면 예민한 민심을 포착하는 심리서로, 


사업가가 읽으면 세상의 흐름을 짚어내는 경영서로, 


종교인이 읽으면 내면을 들여다보는 거울로, 


교육자가 읽으면 배움의 이치를 깨닫는 교과서로…


 


그저 동물들이 나오는 이야기라, 막연하게 아이들의 동화책이라 생각했던 이솝우화는 놀랍게도 일종의 풍자소설이었다. 노예였다가 훗날 자유인이 된 이솝은 분명 갖은 고생을 했을 것이고, 살면서 만났을 수 많은 인간들을 만났을 것이다. 특히 노예 때 만난 인간들, 자유인이 되어서 만든 인간들, 바운더리가 다른 인간들을 수 없이 만났을거고, 자신이 보아온 인간들의 삶을 이야깃거리로 만든 것이 아닐까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이 책의 저자는 이솝의 이야기를 말그대로 ‘인간’에 빗대서 해설한다. 정확히는 인간의 ‘군상’, ‘심리’등을 통해서 말이다. 저자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여서 그런건지, 우리 주위에 있을 법한 인물 군상들이 이솝우화에서, 저자게 해설해주는 여러 일화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이솝우화는 그저 아이들의 동화책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된 고전인 동시에, 살면서 있을 법한 여러 상황을 지혜롭게 헤쳐나갈 수 있는 힌트를 제공해주는, 어른을 위한 이야기책이었다.




 




이 책은 여러 이솝우화를 총 4개의 챕터로 구분했다. 각 챕터 속에서도 또 여러 소주제가 있어서, 내가 원하는 이야기만 골라 읽는 것도 가능하다.



1. 내 마음의 주인이 되는 이솝우화: 불안


2. 좀더 성숙한 어른을 위한 이솝우화: 성장


3. 전환점을 마련하고 싶을 때 이솝우화: 성숙


4. 복잡한 삶이 홀가분해지는 이솝우화: 활기




아래는 이 책에 실려있는 이솝우화와 저자의 해설을 일부 발췌하였다.




▶내가 먼저 물러나는 건 결국 나를 위한 일이다: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 두 염소



실제로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골목이나 시골 마을 오솔길 혹은 외진 산자락에 난 협로에서 마주 오는 차와 맞닥뜨리면 곤란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어느 한쪽이 두 차가 비켜갈 만큼 넉넉한 공간이 나올 때까지 뒤로 물러나줘야만 평화롭게 해결이 날 수 있습니다. 두구든 먼저 양보하는 게 가장 빨리 가능 방법입니다. 그런데 왜 이게 어려운 걸까요? 비단 운전만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또는 각종 단체나 모임 등에서 나와 타인 사이에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질 때가 많습니다. p 063



‘양보하면 지는 거야.’,  ‘여기서 물러서면 나만 바보 되겠지?’, ‘조금만 더 버티고 밀어붙이면 내가 이길 수 있어.’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이런 생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대인관계에서 벌어지는 일을 두고 승부를 가리는 게임 혹은 승패가 판정나는 경기로 생각하는 것이죠. ‘양보=패배’, ‘고집=승리’라는 편견에 사로잡혀있는 것니다. (…) 손해보고 싶지 않는 마음, 양보를 꺼리게 만드는 심리를 ‘손실회피편향’ 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대부분 내가 얻게 될 이득보다 내가 보게 될 손해에 더 주목하며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합니다. 이득으로 인한 기쁨보다 손해로 인한 두려움이 크다는 것이죠. 기쁨은 순간이지만, 쓰라린 기억은 상당히 오래갑니다. p 064~065



내가 먼저 물러서고 양보하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하면, 지금 당장 손해인 것 같아도 결국은 그 영향이 내게 긍정적 결과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두 염소 중 한마리가 이렇게 말했더라면 어땠을까요?


“내가 뒤로 물러날 테니 네가 알고 있는 맛있고 싱싱한 풀 있는 곳 한 군데를 알려줄래?” 


그랬더라라면 맞은편 염소도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을까요?


“좋아, 알려주지. 그리고 다음에 외나무다리에서 또 만나면 그땐 내가 먼저 물러날게.”


두 염소 모두 죽지 않고 맛있고 싱싱한 풀을 나눠 먹는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작은 것 하나를 더 얻으려다 큰 것까지 전부 잃게 되는 건 알량한 이기심과 욕심 때문입니다. p 066~067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며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개구리와 황소



우화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새끼 개구리들에게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엄마 개구리의 눈물겨운 모성애는 한편으로 이해되는 측면도 있으나 아무리 그래도 개구리가 황소만해지려 했다는 건 용기보다 만용에 가깝습니다. 전혀 근거 없는 잘못된 믿음을 ‘망상’ 이라고 합니다. 상황이나 사태를 잘못 해석해 갖게 된 지각이나 경험을 두루 포함합니다. p 126



엄마 개구리는 자신이 황소처럼 커질 수 없단느 사실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새끼 개구리들의 기대와 응원을 받으며 ‘그까짓 것 왜 못해?’, ‘그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지.’ 하고 한껏 부풀려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과대망상에 빠진 것이죠. 그런 다음 헤어나지 못하고 실제 행동으로 옮긴다.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이런 증상은 열등감, 패배감, 불안감 등을 보상하고자 노력하다가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스로 보상받기 위해 현실을 왜곡시키고 강하게 믿으면서 결국 현실 감각을 잃어버리는 것이죠. p 129



과대망상을 치료하려면 약물 치료와 심리 치료를 병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며 현실을 직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평소 현실 감각을 잊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고민과 걱정은 적정한 선에서 멈춰야 하며, 적당한 자신감은 필요하지만, 지나친 자만심은 경계해야 합니다. 과대망상에 빠진 사람이 가족이나 친구 혹은 동료일 경우 지나치게 나무라거나 야단쳐서 고쳐보겠다고 나서는 건 위험합니다. 그가 과대망상에 빠지기까지 겪어야 했던 쓰라린 열등감, 깊은 패배감, 힘겨웠던 불안감 등을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진정한 공감과 위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p 131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깊이 공감하는 태도: 고깃덩어리를 입에 문 개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다른 개라고 착각해 입에 문 고깃덩어리를 뺴앗으려다 자신의 고깃덩어리마저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개에 관한 우화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거나 들으면 누구나 개의 어리석음에 혀를 찹니다. 그리고 과도한 욕심을 경계하죠. 하지만 현실로 돌아와 나 자신을 돌아보면 어리석은 개처럼 과도한 욕심과 지나친 탐욕에 사로잡힐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p 166



없어서 소유를 갈망하는 게 아닙니다. 충분히 있지만, 타인이 가진 게 더 좋고 멋지고 탐스러워 보여 그것까지 다 갖고 싶은 욕심을 내는 겁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심리로 개인이 불행에 빠지고, 가정에 불화가 생기며, 사회에 불안이 잉태됩니다. 부족과 부족,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사이에 다툼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 내가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 하기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내가 장남아니까, 내가 모셨으니까, 내가 제일 친하니까, 내가 제일 가난하니까 더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이유는 차고 넘치지만, 속내는 욕심 뿐 입니다. p168



정신분석학에선 자신에게 지나치게 애착을 갖는 태도를 ‘나르시즘’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리비도(인간의 생물학적인 성적 에너지)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우리말로 ‘자기애’라고 번역합니다. p 169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내가 아닌 타인과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정서와 태도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긴 하지만, 내 부족한 점을 깨닫고 인정하며 늘 겸손한 자세를 갖추는 건 오랜 훈련과 연단이 필요한 일입니다. 과도한 욕망과 탐욕을 내려놓고 현재에 자족할 줄 아는 지혜 역시 쉽게 얻어지지 않습니다. p 171



‘소탐대실’이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작은 걸 탐하다가 큰 손실을 당한다는 뜻이죠. 내 재주와 노력과 능력과 분수 이외의 것을 과도하게 욕심내거나 지나치게 추구하다 보면 낭패를 보기 십상입니다. 자족할 줄 아는 게 행복한 인생을 사는 지혜입니다. p 172



다시금 깨닫는다. 이솝우화는 어린이 동화책이 아니라, 삶의 이치와 깨달음을 담고 있는 고전이라는 사실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루하나 365일, 챌린지 인생 문장 - 1년은 사람이 바뀔 수 있는 충분한 시간
조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번에도 어김없이 하루 1 페이지씩 읽어나가는 책을 읽어버렸다. 물론 책의 모토와는 달리, 하루만에 다 읽었다는게 함정이지만.




이 책 「하루하나 365일, 챌린지 인생문장」은 방대한 양의 독서를 한 저자가, 지금까지 만난 책 속의 명언들을 하나 둘 모아두었다가,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보따리를 풀 듯이, 그 많은 독서명언들 중에서 추천하고픈 365개의 명언을 선정하여 이 한 권에 꽉꽉 담았다. 뿐만 아니라 명언과 함께 독자로 어떤식으로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첨언을 실었다. 책 제목만 봤을 때는 독서 명언집 정도라고 생각했었는데, 읽고보니 이 책은 자기계발서였다. 자기계발서는 자기계발서 이상의 매력이 없으면 잘 안읽는 편인데, 다행스럽게도 이 책은 자기계발서 이상의 매력이 있었다. 그 매력은 바로 독서명언!



어쩌면 누군가는 평생토록 읽지 않았을 책 속의 명언 한 줄, 그 명언들이 이 책 덕분에 세상 밖에 나온 것이다. 무엇보다 ‘누군가는 평생토록 읽지 않았을’은- 바로 나다. 정말 내가 평생토록 읽지 않았을 법한 책의 존재가, 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충격적이게도 이 책에 나온 수많은 명언을 품은 책들 중, 내가 읽은 책은 단 한 권이다. 그 단 한권은 박종인 기자님의 「행복한 고집쟁이들」. 자타공인 박종인 기자님 팬이다보니, 기자님의 저서는 거의 다 가지고 있는 편이다. 뭐랄까, 기자님이 쓴 한 줄이 나 뿐만 아니라, 이 책 저자의 마음도 울렸던 것이다. 역시 달라!(전지적 더쿠마인드ㅋㅋ)



흠흠흠. 결과적으로 이 책 속의 독서명언들은 내가 읽은 책 단 한 권을 제외하면, 내가 읽지 않은 책들의 명언들이다. 덕분에 난 이 책을 독서명언, 자기계발서로 보기보다는 ‘어떤 책을 읽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읽게 되었다. 적어도 이 책 속에 실린 수 많은 책들은, 저자가 믿고 추천하는 그런 책들일테니까.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 스쳐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이 책의 저자도 나 못지 않게 독서편식이 있는게 아닐까 하는! 보아하니 이 책 「하루하나 365일, 챌린지 인생문장」 속에 실린 수 많은 명언들이 나온 책들은, 대다수가 자기계발서다(저자의 독서편식..?). 아 물론! 이 책에 제목이 실린 자기계발서들은 베스트셀러에 손꼽히고,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대표적인 자기계발서 추천도서다(특히 직장인들에게). 나 역시도 제목들은 거의 다 아는 책들이었으니까. 거기다 자기계발서 중에서도 대체로 성공/자기관리/경영/리더쉽/처세 관련한 자기계발서들이 많아보였다. 직장인들이라면 한 권 이상은 읽었을 법한, 회사 추천 도서로 억지로 읽었을 법한 책들도 있어보였다. 우리 회사 독서통신에도 있는 책들이 꽤나 많기도 했고. 물론 나 역시 이 책들 중 일부는 읽어보려고 손까지 댔으나, 완독은 못했다(이건 아무래도 내 독서편식 성향때문인듯T_T). 여튼, 이 책 덕분에 조금이나마 그 책들의 속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되어, 그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것에 만족을 표하고 싶다.



이 책은 총 4개의 챕터로 명언들을 구분해놨다. 


1. 운명에 맞서 개척하는 인생, 도전의 계절

2. 달콤한 환상 꿈같은 사랑, 열정의 계절

3. 어떨 때는 배반하는 인생, 인내의 계절

4. 흐르는 시간 영원한 사랑, 이성의 계절



뭔가, 챕터만 봤을 때는 굉장히 감성적(?)인 듯한 느낌이 들지만, 꼭 그렇지많도 않다. 특히나 잊을만 하면 나오는 뼈를 때리는 듯한 문장들은, 나를 반성하게 만든다. 



아참참!! 이 책 초입에는 사용설명서가 있다. 뜬금없이 왠 사용설명서인가? 싶을지도 모르지만, 사용설명서가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보통 1일 1페이지 읽는 책들은 대충 읽고 덮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은 그런 단점을 보완하기라도 하듯 ‘챌린지 미션’을 숨겨놓았고, 그 미션 달성을 위한 사용설명서를 책 속에 실은 것이다. 덧붙이자면, 이 미션은 일종의 출판 이벤트다. 미션완수 후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상품★도 있다. 이 책의 미션, 즉 사용설명서 내용은 생각보다 쉽다. 



매 페이지, 그러니까 한 주제당 세 개의 체크박스가 있는데, 이 체크박스들은 이 책을 보다 효과적으로 읽게 하기 위한 수단이다. 세 개의 체크박스는 ‘읽기’, ‘결심하기’, ‘인생문장’ 으로 구분되어 있다. ‘읽기’ 는 말 그대로 읽었는지를 체크하는 것이며, ‘결심하기’는 해당 주제를 읽음으로써 내 마음상태의 변화에 대해 체크하는 것이고, ‘인생문장’은 이 책에 실린 365개의 문장 중 유독 맘에 드는 문장을 체크하는 것이다. 인생문장 체크까지 끝났다면, 이 책 마지막에 실려있는 <부록>에 본인이 선정한 인생문장 중 20개를 선정해서 필사를 하고, 이를 출판사에 인증하는 것!



하지만 난.... 책은 깨끗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옛날마인드를 가진 사람인지라(메모조차도 안함) 미션완수는...포기하는 걸로^_T.


미션 완수는 못하지만, 그래도 기록삼아 내 뼈를 때리고,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그런 문장 몇가지를 옮겨본다.




▶ DAY16 어떤 대가를 치를 것인가


좋은 습관을 지키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때론 쾌락과 기회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나는 오늘부터 달라지기로 결심했다_그레첸 루빈>


과정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이란 쉽지 않은 대가를 요구하죠.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당장은 쉬운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선택에서 등을 돌려야 비로소 좋은 습관을 들일 수 있습니다. 오늘은 달라지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를 것인지 생각해보세요. 결과만을 원하지 말고 그 과정을 받아들이세요. p 029



▶DAY21 지속성의 힘


꾸준한 지속성이 실력입니다. <나를 천재로 만드는 독서법_서상훈>


꾸준하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꾸준함과 동일어는 매일매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일매일에 충실할 수 있을 때 실력을 갖출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지속성은 쉽게 갖출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꾸준한 노력과 주의를 기울여야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매일 약간의 고통을 뛰어넘어 실천할 수 있다면 당신도 당당한 실력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p 034



▶DAY39 바다처럼 넓은 마음으로


물처럼 사는 인생이 가장 아름답다. <도덕경_노자>


물처럼 사는 인생이란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 의미는 바로 낮은 곳을 향해 흐른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들은 낮은 자리를 싫어합니다. 하지만 물은 기꺼이 그 낮은 곳을 향해 흐르죠. 낮은 곳을 향해 흐르는 삶은 아름답습니다. 바다가 넓은 것은 모든 물을 포용하기 때문이죠. 오늘은 바다처럼 넓은 마음으로 너그럽게 타인의 실수를 용서해보세요. p 052



▶DAY58 제물되지 않기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증명하려는 순간 그들의 제물이 되기 쉽다. <모두에게 사랑받을 필요는 없다_웨인 다이어>


인정 욕구는 부모의 재롱 욕구에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면 부작용이 발생하죠. 모든 행위의 기준이 나의 만족이 아니라 남의 만족이 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는 남에게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눈치보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보세요. 충만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p 071



▶DAY82 최악을 가정하라


최악의 경우를 예상하고 있으면 막상 일이 닥치더라도 견뎌낼 수가 있다. <거래의 기술_도널드 트럼프>


우리는 긍정적인 사고를 무조건 좋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사고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사고 역시 중요합니다. 그것은 일의 거래에서 특히 필요한 일이죠. 최악의 경우의 수를 예상하면 상황이 나쁘게 흘러가더라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최악의 경우부터 예상하세요. 당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줄테니까요. p 095



▶DAY93 친구라는 착각


회사에서 같이 근무하는 동료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 혼자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커리어 독립 플랜_김경옥>


사람들과의 관계 설정은 처음에 어떤 사이로 시작했느냐가 아주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물론 우정이 사랑으로 발전할 수도 있고, 회사 동료가 어려움을 함께 헤쳐나가는 친구가 될 수도 있죠. 하지만 친구가 연인이 되는 것보다 회사 동료가 진정한 친구가 되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부터는 회사 동료가 나를 배신하더라도 덤덤하게 이겨내세요. p 107



▶DAY101 공짜는 없다


자신감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다. 피나는 노력으로 기본기를 채워갈 때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이다. <잠깐 멈춤_고도원>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을 보면 부럽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자신감을 가질 수 있나 궁금합니다. 하지만 그 자신감의 밑바탕에 얼마나 많은 연습과 노력이 있는지 알고 나면 그렇게 부럽지만은 않을거에요.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실력이 있습니다. 수많은 연습과 노력으로 땀방울을 흘렸기에 얻을 수 있는 실력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실력을 쌓기 위해 분투하는 노력을 배워야 합니다. p 115


▶DAY113 투자의 본질


자산을 늘리는 힘은 현재 시장의 분석이 아닌, 더욱더 폭넓은 세계사 지식의 ‘축적’과 ‘응용’이라는 사실이다. <최고의 투자자는 역사에서 돈을 번다_ 쓰카구치 다다시>


역사의 흐름을 알면 돈을 버는 방법은 저절로 보입니다. 아시아 금융 위기 때 막대한 부를 거머쥔 조지 소로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 때 150억 달러라는 엄청난 수익을 올려 유명해진 존 폴슨은 하락 국면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성공을 거머쥐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힘은 바로 거시적 안목으로 현재를 분석하는 힘, 즉 ‘세계사관’에 있습니다. 오늘부터 세계 경제 뉴스에 관심을 가져보세요. p 127



▶DAY119 손이 없는 삶 속에서


손이 없는 대신에 사랑을 알았고, 마음의 변화를 가져왔고, 새롭게 살게 되었다. <행복한 고집쟁이들_박종인>


소금장수 강경환 씨는 손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손이 없다는 것에 대해 절망하지 않고 세상에 감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손이 없는 대신 사랑을 알았다는 말은 그의 깨달음을 나타냅니다. 손이 없는 삶 속에서 그는 한결 성숙해질 수 있었고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 있었고 한 번 더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부터는 인생에 닥친 불행을 불행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내 마음을 바꾸는 계기로 삼아 한 걸음 더 나아가세요. p 1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