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품격 - 말과 사람과 품격에 대한 생각들
이기주 지음 / 황소북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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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새벽마다 눈이 번쩍!하고 뜨인다. 그리고.....꽤 오랜 시간 잠을 못잔다^_T. 집나간 잠을 돌아오게 하려고 이런 저런 방법을 써봤지만 실패. 그러다 신랑이 책을 읽어보라길래, 이번엔 그 새벽에 책을 집었다. 왠걸. 잠은 더 달아나고 그냥 다 읽었다. 그렇게 새벽녘에 읽은 책이 「말의 품격」. 하하하. 역시 밤에 책 읽으면 잠이 더 달아다는 건 국룰................은 개뿔. 다음 새벽엔 「코스모스」를 봐야겠다. 그정도면 다시 잠들겠지....




그나저나 오랫만에 읽은 「말의품격」은 한 밤중에 내 잠을 깨운 것은 물론이요, 내 자신을 반성하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하나 같이 맞는 말 투성이에다가, 읽으면 읽을수록 내 지난날의 언사가 계속해서 떠오르기 때문이다. 말은 글과 달리 내뱉으면 주어담을 수 없다. 그래서 말을 할 때는 한번씩 생각하고 말해야하는데, 하. 그게 정말 어렵다. 



무심코 내뱉은 말은 누군가를 할퀴는 칼이 될 수도 있기에, 말하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한다는 사실을 안다. 해서 격식을 차리고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는 그게 가능하다. 하지만 반대로 나와 친한 사람들과 마주하면, 이상하게 잘 안된다. 나와 평생 갈 사람들이기에, 그래서 더욱 말할 때 예를 갖추고 조심스레 대해야하는게 맞는게 그게 어렵다. 그래서 때로는 악의 없는 내 말 한마디에, 내 주위 사람이 상처를 입기도 한다. 이게 참, 반성을 하는데도 고치기가 어렵다. 하, 나이를 먹어도 이러니 원. 앞으로 우리 뿡뿡이가 이런 엄마를 보고 뭘 배울지T_T..



옛말에 이청득심耳聽得心이라 했다. 귀를 기울이면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일리가 있다. 독일의 철학자 게오르크 헤겔은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바깥쪽이 아닌 안쪽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상대가 스스로 손잡이를 돌려 마음의 문을 열고 나올 수 있도록,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해야 한다. 그런 뒤에야 마음을 얻는 것도 가능하다. 이는 얼핏 교과서적인 얘기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다양한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수많은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적절한 말과 행동을 건네야 하는데, 이때 본질적인 해결책은 다름 아닌 상대방의 말속에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p 025-026


중용은 기계적 중립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용은 단순히 중간 지점에 눌러앉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여건에 맞게 합리적으로 위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유연한 흔들림이라고 할까. (생략) 절충과 협상 과정에서 나름의 전제 조건이 있을 거란 생각도 든다. 무엇일까? 상대에 대한 완벽한 이해일까? 글쎄다. 각기 다른 두 사람의 만남은 서로 다른 우주의 충돌이다. 충돌은 두 주체가 서로 맞부딪치고 맞서는 것이다. 갈등을 낳는다. 나와 생각이 다른 누군가를 향해 내뱉는 “내가 당신을 이해할게요” 라는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완벽히 뿌리내리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p 064-065



이 구절들을 요약하자면, 결국 ‘존중’과 ‘경청’ 이다. 존중과 경청은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에 제일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서로 존중할 줄 안다면 아주 자연스레 혐오는 사라진다. 모름지기 존중이란 서로가 같은 인간임을 알고,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그 다름을 인정할 수는 있게 한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에, 경청도 가능해진다. 경청이 가능해지므로써 불통은 소통이 되고, 불통으로 인한 감정소모도 사라진다.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만약 존중과 경청이 아주 당연한 사회적 가치가 된다면, ‘다름’이라는 이유 하나로 쏟아지는 혐오범죄와 마녀사냥은 자연스레 사라지지않을까.




삶의 지혜는 종종 듣는 데서 비롯되고

삶의 후회는 대개 말하는 데서 비롯된다.

-말의품격 p 018



살다 보면 크리스 가드너의 사례처럼, 긍정적인 말 한마디에 절로 미소를 짓게 되는 순간이 있다. 말에는 분명 모종의 기운이 담긴다. 그 기운은 말 속에 씨앗의 형태로 숨어 있다가 훗날 무럭무럭 자라 나름의 결실로 이어지기도 한다. 말은 오며하다. 말은 자석과 같다. 말 속에 어떤 기운을 담느냐에 따라 그 말에 온갖 것이 달라붙는다. (생략) 반대로 긍정적인 생각이 모두 걸러진 말, 비판론과 염세주의로 똘똘 뭉쳐진 언어만 내뱉는 사람은 사회 관계망 속에서 고립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p 099 - 100



말과 글에는 사람의 됨됨이가 서려 있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사람의 품성이 드러난다. 말은 품성이다. 품성이 말하고 품성이 듣는 것이다. 격과 수준을 의미하는 한자 ‘품品’의 구조를 뜯어 보면 흥미롭다. 입 ‘구口’가 세 개 모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말이 쌓이고 쌓여 한 사람의 품성이 된다는 뜻이다. 사람의 체취, 사람이 지닌 고유한 ‘인향人香’은 분명 그 사람이 구사하는 말에서 뿜어져 나온다. p 137-138



타인을 향해 생각을 표현하고 감정을 전달하는 행위는 만인이 고민하는 숙제다. 그 과정에서 혹자는 상대의 의표를 찔러야 한다는 부담을 떨치지 못하고, 혹자는 누군가의 화법과 말투를 무작정 따라 하다가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우린 그렇게 살아간다. 말에 비법은 없다. 평범한 방법만 존재할 뿐이다. 그저 소중한 사람과 나눈 대화를 차분히 복기하고 자신의 말이 그려낸 궤적을 틈틈히 점검하는 것, 그리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화법을 찾고 꾸준히 언품을 가다듬는 수밖에 없다. p 153



말에는 힘이 있다고 한다. 비슷한 의미로 옆나라 일본에는 언령言靈(코토다마)이라는 말도 있다. 나역시 말에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매일을 긍정적인 말을 쓰는 사람과, 부정적인 말을 쓰는 사람은 행동부터 분위기, 주변사람들까지도 판이하게 다르지않나. 특히 부정적인 말을 쓰는 사람들 주변에는 제대로된 사람이 없기도 하다. 끼리끼리는 과학이니까.



본인도 모르게 부정적인 말, 뾰족한 말, 험한 말을 쓰다보면 그로인한 부정적인 영향은 생각보다 크게 돌아온다. 그 영향이 본인에게만 한정된다면 ‘똥 묻은 개’라 생각하고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다. 특히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원치 않아도, 부정적인 말만 쓰는 사람들을 만나기 일쑤다. 회사에서, 거래처에서, 혹은 학교에서. 분명 기분이 정말 좋은 하루였는데, 부정적인 말만 하는 사람이 나타나서 네발내발하면서 욕짓거리를 내뱉는다면 어떠겠는가? 말이 누군가를 해치는 무기가 되는 극단적인 상황도 있다. 누군가를 비난하는 무분별한 악플들을 보자. 우리는 여러차례 뉴스에서 본 적이 있다. 무분별한 악플에 못이겨 생을 뒤로한 사람들을. 부정적인말은 그 자체 만으로도 누군가의 인생을 처참하게 무너뜨리는 무기가 된다.



나는 왠만하면 긍정적인 말을 쓰려고 노력한다. 욕같은 험한말은 왠만하면 사용하지 않는다. 이건 학창시절부터 그랬던 것 같다. 중학생 때였나, 네발내발하면서 욕하는 동급생들을 보면서, 꼭 뇌 텅텅인 것 처럼 보였다. 그전에도 욕을 잘 하지 않는 나였지만, 이 이후로는 더더욱 안하게되었다. 물론 운전을 하다가 가끔 만나는 김선생님(^^)들로 인해 자그맣게 욕을 하는 경우가 있긴 한데, 그건 뭐 차에 나 혼자있을때니까!



우리 뿡뿡이에게도 말에 대한 교육을 잘 해줘야할텐데. 휴. 요즘은 뭐 어린애들도 밖에서 뛰어놀다가도 네발내발 하고 있으니, 이런 험한 욕의 파도에서 우리 뿡뿡이에게 어떻게 교육을 해야할지 고민이 많다.



사람이 지닌 고유한 향기는

사람의 말에서 뿜어져 나온다.

-말의품격 p 132



정신과 의사이자 저술가인 아론 라자르에 따르면, ‘사과는 곧  솔루션’ 이다. 용기에 바탕을 둔 진솔한 뉘우침이야말로 상대망의 마음을 움직이는 유일한 해결책이며 이해 당사자들이 갈등과 불신을 해소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의사소통 도구라는 것이 그의 논리다. 일리가 있다. 사과는 갈등과 갈등 사이에 유연함을 스며들게 한다. 사과는 틀어진 관계를 복원하는 기제機制로 작용한다. (생략) 지는 법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지는 행위는 소멸도 끝도 아니다. 의미있게 패배한다면 그건 또 다른 시작이 될 수 있다. 상대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인정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p 187-188



이 구절을 읽었을 때, 요즘 뉴스를 도배하고 있는 두 사건이 떠올랐다. 카카오 먹통 사건과 SPC그룹 제빵사 사망 사건. 두 사건 모두 워낙 어마어마한 사건이었기에, 국민의 지탄을 받았다. 자, 그럼 잘못을 일으킨 두 그룹의 대표는 사과와 이후의 행동은 어땠을까? 



카카오 대표가 사과할 당시에는 자신들의 잘못을 인지한 듯 했으나, 이후 국감 및 과기부에 제출한 사고 보고서등에서는 본인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식으로 말을 바꿨다. 카카오 먹통으로 인한 소상공인, 카카오 유저들에 대한 피해보상에 대해서도 매우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SPC그룹 대표는  유가족들에겐 사과 한마디도 없었지만, 기자들 앞에서 대국민 사과를 했다(대체 왜??). 심지어 고인의 장례식장에 삼립 빵을 무더기로 보내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사망사건이 일어난 공장은 계속 가동되었고, 불과 몇일 안지나서 또 다른 SPC 계열사 직원의 안전사고가 발생했다(하지만 SPC그룹에서 만드는 포켓몬빵은 지금도 잘팔린다^^).



이는 비단 카카오나 SPC 문제만이 아니다. 수많은 기업들은 돈으로 덮기 어려운 사건이 발생했을 때, 언제나 피해당사자가 아닌, 대국민 사과를 한다. 미리 입이라도 맞춘것처럼, 하나같이 다 똑같다. 이는 범죄자들이 피해자가 아닌 판사들에게 반성문을 제출하는 것 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거기다 재발방지, 후속조치라고 하는 것들도  피해당사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이 아닌, 어디까지난 기업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한다.



잘못을 했으면 깔끔하게 인정하고, 사과하고, 보상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것일까. 어른들을 보고 자라는 우리 아이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무엇을 배울까? ‘돈 있으면 잘못을 저질러도 괜찮구나, 내 잘못이아니라고 잡아떼도 되는구나’ 라고 배우는 건 아닐까. 씁쓸하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우주를 얻는 것과 같다.

-말의품격 p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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