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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근대인물 기행 - 한일 근대사 속살 이야기
박경민 지음 / 밥북 / 2022년 12월
평점 :
오랜만에 내 주 관심사인 한일관계사 역사책을 들고 왔다. 물론 서평은 오랜만이고, 근래까지도 한일고대사책은 종종 읽었다. 서평만 안했을 뿐!
이 책은 한일관계사 중에서도 근대사를 다룬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암흑기이자 떠올리고 싶지 않은 역사인 근대사를 말이다. 단, 일제강점기까지는 가지 않는다. 일제강점기까지 가는 과정을 그릴 뿐이다. 그 과정을 그리는데 있어서 중심은 인물이다. 한일 근대사에 있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흐름을 만든 조선인과 일본인을. 그 인물들 중에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을 법한 인물도 있다. 반면에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인물들도 있다. 한, 일 양 국가간의 인물 모두 말이다.
우리는 조선이 어째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는지를 알고 있다. 다만 ‘제대로’ 알고 있는게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가 국사, 근현대사를 배웠을 당시에는 그 유명한 순/헌/철 시대의 세도정치와 나쁜 일본인들에 의해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정도만 배웠다. 약간 ‘남탓’ 위주였다고 해야할까? 여튼 그렇게 배웠다. 반대로 우리에게는 자랑스러운 역사인 독립운동사는 아주 세세하게 배웠다. 이름이 비슷비슷한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을 하나하나 외우면서. 이 당시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 국사, 근현대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오로지 수능 때문이었으니까. 그냥 가르쳐주는 대로 배웠고, 수능을 봤으며, 한 문제 틀린걸로 분노했었더랬다. 뭐 여튼, 그랬다.
그리고 꽤 오랜시간이 흘렀다. 언제부턴가 역사책을 읽는데, 특히 한일관계사 관련 역사책을 읽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임진왜란이 오롯이 왜놈들 탓인가? 2백년간의 평화에 도취되어, 국방력을 조금씩 조금씩 줄여나간 조선의 위정자들은 문제가 없었나?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선조의 리더십은 문제가 없었나? 일제강점기가 온게 오롯이 나쁜 왜놈들 탓인가? 당시 조선의 왕과 조선을 주름잡던 노론세력들은 정말 문제가 1도 없었나?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는 어두운 역사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어찌보면 부끄럽고, 창피하지만 엄연한 우리의 역사를 말이다.
우리 조상들의 어두운 역사를 이야기하면, 식민사관이다 뭐다해서 마녀사냥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내 블로그에도 그런 덧글들 꽤 있었음^^). 그나마 다행인 건 요즘은 시대가 변해서, (학교교육은 몰라도) 예전처럼 빛나는 역사만 이야기 하지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얼마나 다행인지. 몇 백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류성룡의 『징비록』이 빛을 발하는건가 싶기도 하다. 확실한 건 요즘은 서점에서도 ‘징비’를 하는 역사책들이 왕왕 보이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박종인 기자님의 「땅의 역사」 시리즈 같은?
‘징비’란 지난 일의 잘못을 후회하여, 후에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한다는 뜻이다. 즉, 나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정확히 파악하여 대비한다는 뜻이다. 고로 징비를 하기 위해서는, 지난 잘못에 대해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를 명확하게 알아야 하는게 우선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한일 근대인물 기행」도 ‘징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
저자는 조선후기부터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까지, 조선과 일본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미화도 생략도 없이 사실에 기반하여 책을 썼다. 특히나 동시간대의 일본과 조선의 위정자들이 어떤 행보를 보였는지, 그 행보의 결과가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를 말이다. 그러다보니, 한일근대사를 학교에서만 배우고 끝난 사람들에게 이 책은 배신감을 주는 책일 지도 모른다. 왜? 학교에서는 남탓(일본) 위주로 가르쳤으니까.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내가 배웠던 교육과정에 한해서지만. 거기다 일본이 조선을 야금야금 집어삼킬 수 있었던 이유조차도 대게 가르쳐주지 않기도 했고. 그렇기에 난 한일근대사 역사책으로 이 역사책을 추천한다. 정확한 내용을 알아야,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고, 그래야만 반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류성룡이 『징비록』을 썼으나, 조선의 위정자들은 이를 무시했고 결국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이러한 일이 또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장담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에 알아야만 한다. 임진왜란 이후 왜 같은 일이 반복되었는지를 말이다. 그게 바로 이 역사책을 추천하는 이유다.
조선과 일본,
근대화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일본은 그 기회를 잡았고
조선은 그 기회를 철저히 무시했다.
조선과 일본, 일본과 조선. 근대화의 시작.
조선과 일본. 서구열강의 눈에는 두 나라 모두 먹기 좋은 살구였다. 어떻게든 개항을 하게 하면 되는 거였다. 다만 서구열강에 비해 조선과 일본은 힘이 없었으니, 당연히 불평등한 시작이었을테지만 말이다. 확실한 건 불평등이라 할지라도, 개항을 해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화를 하느냐 마느냐이다.
미국은 함대를 이끌고 일본의 해역으로 들어갔다. 조금의 시차는 있으나, 미국의 배는 조선의 해역으로도 들어왔다. 하지만 조선과 일본의 반응은 달랐다. 일본은 미국을 받아들였고, 조선은 거부했다. 그것도 아주 극렬하게 거부했다. 여기서부터 조선과 일본, 일본과 조선의 평행선은 끊어졌다. 일본은 빠르게 서구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룩한다. 반면에 조선은 강력한 쇄국을 단행한다.
조선과 일본의 서로 다른 선택의 배경은 어디서 나온 걸까?
시마바라의 난을 계기로 천주교가 가공할 단결력을 가졌음을 절실히 깨달은 막부는 천주교에 대한 단속과 탄압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쇄국정책을 ‘조법’이라며 막부 말기까지 약 250년간 엄격하게 유지했다. 이와 같이 에도막부는 엄격한 쇄국정책을 오랫동안 흔들림 없이 시행했지만, 조선의 쇄국과는 개념상 많이 달랐다. 즉 서구문물과 기술에 호의적인 반면 천주교에는 폐쇄적이었고, 무역의 효용성은 잘 알지만 막부 외의 다이묘와 상인들이 활용하는 것을 엄금했다. 정리하면 에도막부의 쇄국정책은 막부가 허용한 다음과 같은 4개의 제한된 문을 통해서만 바깥세상과 교류할 수 있었다.
나가사키의 데지마를 통한 네덜란드 상인과의 독점무역
쓰시마번을 통한 조선 왜관에서의 독점무역
사쓰마번(현 가고시마현)의 류쿠왕국에 대한 편취무역
마쓰마에번(현 마쓰마에군)의 에조치현(현 훗카이도)에 대한 독점무역 . p 029
일본 도쿠가와 막부는 쇄국을 하면서도, 기본적으로 서구문물(네덜란드)이 들어오는 창구 하나는 계속해서 유지했다. 즉, 본인들의 사상에 걸림돌이 되는 종교는 반대하지만, 본인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기술이나 문물은 끊임없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달랐다. 조선은 서구의 문물도, 서구의 종교도 전부 반대했다.
개별적인 수탈 외에 탐학한 관리들은 교묘한 수법으로 삼정의 제도를 이용한 시스템적인 수탈을 가장 많이 활용했다. 전정은 경작하는 토지에 부과되는 세금이다.농민들은 원래 수확량의 1/10 정도를 내면 되었으나, 지방 수령들이 여러 가지 명목의 부과금을 붙이며 점점 늘어나기 시작해 심한 경우 수확량의 1/2까지 수탈당했다. 군정은 16~60세의 남자가 군역 대신 군포 또는 쌀로 내는 세금이다. 18세기 중반 균역법의 시행으로 부담이 절반으로 줄었으나 군포를 면제받는 양반 수가 늘어나자 그 부족분이 농민에게 전가되었다. 지방관들은 죽은 사람에게도 부과하거나(백골징포), 어린이에게도 부과하고(황구첨정), 친척들에게까지 세금을 내게 했다(족징). p 065
정조는 죽기 직전 세자와 김조순을 불러 세자에게 옆에 있는 김조순을 가리키며 그의 보필을 받으면 절대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 않을 것이라는 유훈을 남겼다. (…) 딸이 순조의 왕비(순원왕후)로 책봉되자 그는 영안부원군에 봉해졌으며…. 1804년 정순왕후가 수렴첨정을 거두자 어린 순조를 대신해 섭정했다. 김조순은 정순왕후가 승하한 1805년 막후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p 071
김조순의 막내아들 김좌근은 초고속 승진을 통해 명실상무하게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핵심이 되었다. (…) 1862년 삼정의 문란 등으로 발생한 각지 농민봉기의 대책으로 설치된 삼정이정청의 총재관을 겸했다. 농민봉기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할 삼정이정청에 농민봉기에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세도정치의 원흉을 앉혔으니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올 수 있을까? 조선 말기의 정치가 늘 이런식이었다. p 074
조선은 세도정치로 망해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세도정치를 하던 당시 집권여당(안동 김씨 등)을 탓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세도정치를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준 사람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고 일컫는 정조다. 정조는 안동 김씨의 좌장 김조순을 직접 국구로 만든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조는 외척의 위험성을 잘 아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조순에 힘을 실어주었다. 김조순은 내 사람이니 안그러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이 문제였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제일 큰 문제는 정조의 조선은, 오로지 정조 한 사람 덕분에 굴러갔던 것이다. 시스템에 의해 잘 굴러가는 조선을 만들었어야 했으나, 정조의 조선은 시스템이 아닌 사람, 즉 정조 한 사람이 움직이는 나라였다. 그렇기에 정조가 죽자마자, 정조라는 한 사람 때문에 숨죽이던 간신들이 여기저기 몰려나와, 조선을 갉아먹기 시작 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구 열강이 앞다투어 조선으로, 일본으로 밀고 들어왔다.
(일본) 2개월이 넘는 협상 끝에 1854년 3월 31일 역사적인 미일화친조약을 맺었다. 막부는 일단 개항해 전쟁을 피하되, 시간을 벌어 서양을 이길 국방력을 키우자는 심산이었다. 역사적인 조약의 체결로 일본은 개국으로 나아가는 첫발을 내디뎠다. 통상조약은 아니지만 일본이 서양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다. 이 조약을 모델로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와도 조약을 체결했는데, 최혜국조항 등 일본에 불리한 조항을 뒤늦게 깨닫고 나서 후일 메이지 신정부가 오랫동안 불평등조약 개정이라는 숙제를 떠안게 된다. p 034
(조선) 프랑스군과의 병인양요에 이어 신미양요에서 미군이 물러나자 대원군은 더욱 확고한 쇄국으로 치닫게 된다. 일본이 이미 개항했다는 것과 개항 이후 벌어지는 일본 사회의 격렬한 변화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국제정세 파악에 소홀하고 시대적 소명을 통찰하지 못한 ‘우물 안 개구리’ 조선호는 시대의 조류와는 역방향으로 더욱 강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p 133
일본은 미국에 개항했다. 당연히 불평등한 관계였으나, 일본은 개항했다. 당시 청나라 이홍장과 주중 일본공사 모리 아리노리의 대화에서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이홍장이 물었다. “왜 귀국은 서양옷을 입는가.”
모리가 대답했다. “옛날 옷은 놀기에 좋았지만 열심히 일하는 데는 절대 맞지 않는다. 우리는 가난하고 싶지 않다. 부자기 되기 위해 옛것을 버리고 새 것을 취했다.”
이홍장이 반격했다. “의복 제도는 조상에 대한 존중 표시다. 만세 후대에 이어야 한다.”
모리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조상이 살아 있어도 똑같이 했을 것이다. 천 년 전 조상들은 중국 옷이 당시 일본 옷보다 우월해서 중국 옷을 택했다. 남의 나라 장점이 보이면 일본은 어떻게든 배워서 따라한다. 그게 일본의 미풍양속이다.” _P 287 (「대한민국 징비록」 中 모리 아리노리 전집 일부, 박종인 」
조선은 미국이 이 땅에 들어오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했다. 그렇기에 조선의 백성들을 사지로 밀어넣었다. 무기에서부터 이미 엄청난 차이를 보인 미군과 조선군이었음에도 말이다. 결국 조선 군은 미군에 의해 무참하게 학살당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딱 48시간만에 종료된 이 날, 미국 전사자는 단 3명인 반면, 미군측에서 작성한 기록이긴 하지만 조선군은 최소 300명 이상이 죽었다. 헌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날의 전투는 조선의 ‘승리’로 둔갑했다. 이유는 단 하나다. 미국이 조선의 해역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그저 미국이 조선의 개항을 ‘포기’하고 돌아선 것인데도,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조선의 위정자들은 조선이 승리했다고 자축했다. 조선군은 전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조선은 완벽한 쇄국을 선언하며, 조선 땅 곳곳에 척화비를 세웠다.
신미양요 4년 뒤, 일본 운요호가 미국이 했던 것 처럼 강화도로 쳐들어왔다. ‘개항’을 빌미로 말이다. 과거 미국이 일본에 그러하였듯이. 이 때의 일본은 이미 근대국가로 돌아선 뒤 였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열강에 문호를 개방하고, 먹는 것 부터 입는 것 까지 모든 것을 서구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본은 근대국가로 나아가고 있었다.
1863년 봄 5명의 조슈번 청년들이 밀항해 영국 유학을 가기 위해 영국 범선의 석탄 창고에 숨어 요코하마에서 출발했다. 이들은 ‘서구의 해군과 국방기술을 배우고 온 후 제대로 된 양이를 하겠다’고 번주를 설득했고, 당시 번의 실세 다카스키 신사쿠의 지원으로 유학이 결정되었다. 유학이 불법이었기에 번주는 모르는 체 하되 사적으로 경비 지원을 해주었다. p090 (유학생 중 한명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
메이지 신정부는 선진국의 근대문물을 직접 시찰하고 이를 개혁에 반영하고자 용단을 내렸다. 오늘날 장차관과 국장 등에 해당하는 상당수의 핵심 인력이 무려 2년 가까운 기간에 걸쳐 구미 12개국을 순방했다. 이들의 또 하나의 숨겨진 임무는 서구와 맺은 기존 불평등 조약의 재협상이었다. (…) 당시 신정부의 실세 및 정부 각 부처의 중견 관리 41명, 수행원 18명, 유학생 43명 등 100명이 넘는 대규모였다. 이들의 장기 공백으로 정무에 큰 차질이 빚어졌으니 메이지 신정부의 서구 따라잡기를 통한 근대화의 의지와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p 112
이렇게 말이다. 이 때 서구에 유학을 갔던 유학생들이 훗날 메이지유신을 주도하고, 근대 일본의 권력층에 선 사람들이며,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데 일조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우리에겐 ‘원수’라는 말로도 부족하나, 일본에서는 나라를 발전시킨 애국자였다.
조선은 세도정치 후에 또 다른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그저 성씨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거기다 왕실은 황제국을 자칭했다. 물론 일본도 만세일계라는 허황된 말로 (천황)제국주의로 나아갔지만, 적어도 일본은 근대국가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오로지 황제를 위한 헌법을 만든 대한제국과는 달리, 일본은 천황제를 명시하긴 했으나 적어도 서구열강의 헌법을 조사하여, 외적으로나마 입헌군주제의 면모를 갖춘 근대헌법을 만들었다.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탕평책을 추진해 그간 소외되어 있던 남인과 북인등을 골고루 발탁했다. 아울러 역량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탈세와 당쟁의 온상이자 유림의 사권력으로 뿌리내린 서원을 정리했다. (…) 백성들에게 피해가 컸던 환곡제를 폐지하고 사창제를 시행했고, 지방특산물의 진상제도를 폐지하는 등 백성들의 잡세를 없앴다. 양반과 토호의 세금 등을 철저히 조사해 양반에게도 세금을 부과했다. 호포제를 시행해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했고, 양전을 통해 토호와 양반의 누락 토지를 발굴해 전정을 개선했다. 또한 은광 개발을 허용하는 등 나라의 재정확충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p 127
1865년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확실히 세우기 위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의 중건 공사를 시작했다. (…) 양반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원성이 높아져 대원군 몰락의 한 원인이 된다. p 128
물론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고 개혁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희망은 있었다. 하지만 그 개혁의 중심이 왕권강화였기에, 결국 그 개혁도 경복궁 중건이 시작되며 빛을 바랬다. 거기다 천주교 박해는 계속 되었고, 쇄국 역시도 계속되었다. 심지어 아들인 고종은 아비를 못마땅해하면서, 부자간의 권력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그 사이에는 고종의 부인인 민비가 있었다. 고종이 권력을 잡았을 때, 민비도 권력을 잡았다. 그렇게 조선에는 또 다른 세도정치가 시작 된 것이다. 여흥 민씨라는 성씨만 바뀐 세도정치가.
근대화의 기회를 무시하고
철저하게 ‘황제국’을 선언한 조선은
망국행 급행 열차에 탑승했다.
물론 조선에도 근대국가로 나아가고자 했던 사람들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그들은 실패했다.
아시아에서는 제일 빠른 근대국가가 된 일본은 아래와 같이 차근차근 조선을 식민지화 시키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준비 과정에서 보다 원활하게 조선을 식민지화 시키기 위해, 고종을 비롯한 대한제국 황실을 위한 당근도 차근차근 준비되고 있었다는건 안비밀.
ㆍ1904년 한일 의정서 및 제 1차 한일협약 - 조선을 일본 군사기지로 사용, 고문 정치, 그리고 대한제국 황실 보전 및 보증
ㆍ1905년 제 2차 한일협약 (을사늑약) - 외교권 박탈, 그리고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 유지 보증
ㆍ1907년 한일신협약 (정미7조약; 정미늑약) - 차관정치, 고종 강제퇴위 및 조선 행정권 등 박탈
ㆍ1909년 기유각서 - 사법권 박탈
ㆍ1910년 6월 - 경찰권 박탈
ㆍ1910년 한일병탄 - 국권피탈, 그리고 한국 황제 및 그 일가의 존엄과 명예 향유 보존 및 충분한 세비 지원
또 다시 이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과연 장담할 수 있을까? 우리 해군이 욱일기를 단 일본 전함에 경례를 한게 불과 최근이다. 욱일기를 단 일본 해군이 독도 인근에 들어온 게 얼마 안된 일이다.
류성룡이 말한 ‘징비’를 우리는 얼마나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