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한번씩 블로그에 서평을 올렸던 역사책 중 일제강점기 관련 역사책 몇 권을 다시 꺼내어 읽었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암흑기와도 같은 바로 그 시대이다. 암흑기인 일제강점기를 그린 책은 크게 독립운동과 일제의 만행으로 나뉠 수 있는데, 이번에는 내가 소개하려는 책은 일제의 만행과 관련된 책이다. 이 역사책은 그 내용도 탄탄하거니와, 우리가 절데 잊어서는 안될 역사이기에 과거에도 여러차례 블로그에 소개했던 책이기도 하다.
물론 이 역사책들은 일제의 만행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보니, 가벼운 맘으로 읽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 무겁다. 하지만 그렇다고 평생토록 모르고 살면 안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가해자인 일본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역사이다보니, 당시 피해자였던 우리마저 이 역사를 잊는다면, 지난날 일제의 만행은 없던일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혹시나해서 덧붙이지만, 난 반일을 하자는 이야기도 일본을 가지말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나만해도 시간만 되면 일본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고, NHK채널을 자주 보고, 일본원서를 자주 읽는 사람이니까. 그저 많은 사람들이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알고, ‘기억’했으면 좋겠다. 적어도 매번 무슨 이슈가 있을 때마다 갑자기 ‘반일’, ‘불매’를 들고 일어나서 씩씩거리다가, 어느 순간에 슉 가라앉아서 ‘반일이 무엇? 불매가 무엇?’ 하며 모르쇠하는 그런 상황도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특히 어떠한 이슈로 인해 반일, 불매를 외치면서 누군가를 ‘매국노’라고 마녀사냥하는 행위는 정말-.. 일제와 다를바가 하나도 없다. 그렇게 누군가를 매국노라고 칭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애국자이고 깨끗한지 본인을 돌아봤으면 좋겠다. 과연 본인들은 일제의 잔재가 남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일본음식을 먹지 않고, 일본제품을 하나도 쓰지않는지, 경술국치일이 언제인지, 아니 경술국치가 어떤 의미인지는 아는지, 수백명의 독립운동가들 중 이름과 그의 행적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되는지, 매 국경일마다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는지, 순국선열을 위한 묵념을 하고 있는지를 물어보고 싶다.
이렇게 쓸데없기 길게 말한 이유는 단 하나다. 저렇게 누군가를 탓할 시간에, 혹은 어떠한 이슈가 있을 때마다 냄비처럼 들끓었다가 가라앉을 시간에, 차라리 한일근대사에 대해 정확히 알고 기억하기를 바란다. 눈앞에 있는 일본인들이 똥베짱 부리면서 자기네 조상들은 잘못없다고 말할 때, 왜곡으로 점칠된 역사를 배우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때, 그들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요목조목 냉정하게 지적할 수 있기를 바란다. 현대에도 곳곳에 남아있는 친일파들이 백년전 그 때처럼 기승할 생각을 못하도록 매섭고 날카로운 눈으로 감시할 수 있기를 바란다.
1) 일본이 찾아낸 침략과 식민지배의 기록: 우리는 가해자입니다
지은이: 아카하타신문편집국 기자들
출판사: 정한책방
이 책은 일본 기자들이 기록한 책이다. 제국주의 시절 자기의 조상들이 어떠한 만행을 벌였는지 직접 보고, 듣고, 두 발로 뛰어가며 목숨 걸고 취재하여 남긴 기록물이다. 이 책 안에는 일본이 제국주의시절 자행한 모든 불법행위에 대한 증거와 증언(녹취록)이 그대로 담겨있다. 이 책의 서문은 이렇게 쓰여 있다.
이 책은 침략 전쟁의 역사와 상황을 규명하고, 기자들이 한국, 중국 등에서 피해를 입은 현지 주민들로부터 직접 들은 증언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는 1부 '청일/러일전쟁에서 패배 전까지의 51년'과 '한국병탄과 식민지 지배'에서 다룹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한 것은 청일/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주된 목적이 한반도의 국민과 자원에 대한 '강탈적 지배'에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일본군의 개입/군사지배에 저항하며 일어난 동학농민혁명, 항일의병운동 등과 같은 한국의 민중 운동, 특히 3.1 독립운동이었습니다.
한일 관계의 초점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는 위안부 피해자를 직접 취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의 통제 아래 벌어진 수 많은 여성 인권 유린 행위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중략)
실제로 천황 절대의 암흑 정치 세력에 의해 불법화된 당 기관지 <세스키>는 '조선 독립운동 3.1기념일 만세!', '일본, 조선, 대만, 중국 노동자/농민의 단결!', '조선의 토지를 조선의 농민에게!' 등의 구호를 내걸었습니다. 그리고 수 많은 우리의 선배들이 탄압받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투쟁은 미래를 향한 한일 두 나라와 두 나라 국민들의 우호에 있어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고 확신합니다. 한국의 독자 여러분께서. 부디 이 책을 읽어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한국 독자에게 전하는 글 - 아카하타 신문 편집국장>
이 책을 쓴 일본 기자들은 자기 조상들의 신념을 따랐다. 식민지배를 하던 민족이었음에도, 당시 식민지 노동자들의 편에 섰던 그 조상들의 신념을 말이다. 그래서 과거의 그 조상들처럼, 이들도 일제의 만행을 취재하는 내내 수많은 반대와 살해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일제의 만행을 알리고자 이 책을 썼다.
당시 식민지배를 당했던 조선과 우리 조상들. 백여년이 지난 현재 우리는 그 땅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식민지배 당시 일제의 만행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조상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있나? 이 책을 읽다보면 머릿속에 이런 질문들이 떠다니기 시작한다. 가해국가의 기자들은 자국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책까지 내었는데, 당시 피해국가의 후손들인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 14살 때 강제 동원된 한국의 근로정신대 피해자, 양금덕
초등학교 일본인 교장과 헌병은 "정신대로 일본에서 일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여학교도 갈 수 있다." 라며 학생들을 속여 양씨 등 10명을 지명했습니다. 나중에 부모들이 반대한다고 하자, 교장은 "네가 안 가면 경찰이 너희 부친을 잡아갈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렇게 끌려가게 된 곳은 미쓰비시 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의 도우도쿠 공장이었습니다. 삼엄한 감시하에서 거대한 비행기 부품에 도장작업을 했습니다. 당시 페인트가 자주 눈에 들어갔던 탓에 지금도 눈이 아프다고 합니다. (중략) 양 씨는 일본이 패전을 맞은 뒤인 1945년 10월에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급료는 받지 못한 상태였고, 한국 사회에서는 일본군 위안부로 오해받았습니다. 정신대였던 것을 숨긴 채 결혼했는데, 남편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되자 "더러운 여자"라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 P 100
-위안소를 전전하며, 김복동
김 씨가 14살이던 당시 마을의 구역장과 반장이 일본인과 함께 찾아와 "딸을 군복 만드는 공장에 보내라. 거부하면 반역자다" 라며 가족들을 위협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끌려간 곳은 중국 광둥성에 있던 위안소였습니다. 일본군의 성 노예가 되어 하루 15명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주말에는 50명이 넘었습니다. 5년간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 등을 전전했습니다. 외국에 가면 일본 정부가 이 문제를 이미 해결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보니 이야기를 하면 다들 놀라면서 이대로는 안된다고 많이 공감해주십니다.
-중국 후난성, 창지아오 학살사건
쟝야오메이 증언) 일본군이 창지아오에 왔을 때 쟝씨는 생후 1개월이 된 작은 딸과 집에 있었습니다. 세 사람의 일본군은 쟝 씨를 발가벗겨 이웃집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들은 부엌에 이불을 깔더니 당시 15살 정도이던 그 집 소년에게 쟝씨를 강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호통을 들은 소년은 얼떨결에 쟝 씨를 덮쳤지만 공포로 떨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화가 난 일본군은 나무 막대기를 쟝 씨의 하반신에 쑤셔 넣고 30분 이상 고통을 주었습니다.
런더바오 증언) 일본군이 집에 들어와서 총검으로 런 씨의 머리를 가격하고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다음 날 출산 예정이던 모친은 거동조차 힘든 몸으로 침대에 누워있었는데, 일본군이 총검에 2번이나 배를 찔려 태아와 함꼐 목숨을 잃었습니다. 일본군은 이에 멈추지 않고 모친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낸 뒤 총검으로 찔러 높이 내걸었습니다. 주변에 있던 동료 일본군들이 웃으며 박수를 쳤습니다.
-정의감 강하던 아버지도 결국 가해자
고바야시의 차녀 노자키 요시코가 <아카하타신문>에 아버지, 고바야시 다로 당시 상등병의 일지를 제공했습니다. "가족으로서는 가해 사실을 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요. 그러나 침묵하고만 있으면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 되어버리잖아요. 괴롭더라도 진실을 말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중략)
난징점령 (1937년 12월) 까지의 행군과 일본 육군 최대 규모 작전인 '쉬저우 작전'의 경로를 기록한 일지입니다. "병사는 칼로 머리를 벤다. 토민(민간인)은 총살"등의 기술이 남아있습니다. 일지의 기술만 봐도 살해당한 민간인이 15명 입니다. (중략)
포로 살해 관련 일지에는 제16사단의 나카지마 게사고 사단장이 "돼지 같은 놈들은 주저 없이 죽여도 된다"고 명령한 내용도 적혀있습니다. (중략)
고바야시의 차녀 노자키는 고등학생 시절에 처음 일지를 읽었을 때, 기록되어있는 가해의 참상을 접하고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가족의 입장에서 볼 때는 늘 성실하고 정의감이 강했던 아버지였기에 더욱 무서웠고, 전쟁의 끔찍함 또한 통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베 총리는 중일전쟁이 침략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아버지의 일지를 보면 애초부터 침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대신해 희생자 유족에게 사과한다고 바뀔 것은 없겠지만, 스스로 가해를 저질렀다는 진실과 마주할 수는 있겠지요. 이 일지가 평화를 위해 작게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합니다."
2)분노하기 전에 알아야 할 쟁점 한일사
지은이: 이경훈
출판사: 북멘토
이 책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의 만행과 그 만행들을 왜 지금까지 풀지 못하고 있는지를 요목조목 밝히고 있다. 총 아홉가지 문제를 이야기 하고 있으며, 그 아홉가지가 바로 “일본군 성 노예, 강제동원, 사할린 한인, B·C급 전범, 야스쿠니 신사, 재일 한국인, 독도, 문화재 환수, 역사교과서” 문제이다.
이 아홉가지 문제를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하는 제일 큰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한일기본조약’이다. 1965년 박정희 정권 당시 한일국교가 정상화 되었는데, 이 때 체결한 ‘한일기본조약’이 바로 일제의 만행에 대한 면죄부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는 1910년 8월 22일 이전에 체결된 조약·협정은 ‘이미 무효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라는 조항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은 일본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강요된 한일병합 이전의 모든 조약이 무효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체결은 합법이었으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무효가 되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 중략 … 청구권협정으로 일본이 한국에 제공한 무상 3억달러, 유상차관 2억달러의 성격에 대해서도 한국은 배상금이라고 주장하지만 일본은 ‘독립축하금’이라고 하여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한일 간의 재산·권리 등에 대한 청구권에 대해서도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음을 확인한다’라고 하여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에 따른 한국국민들의 개인청구권 문제를 모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나마 일본군 위안부, 사할린 한인, 원폭피해자 문제 등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B·C급 전범으로 몰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한국인들에 대한 피해보상에 관해서도 일본 측은 한일청구권협정을 내세우며 한국 측에 보상책임을 떠넘겼습니다. 졸속으로 체결된 재일한국인협정은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와 민족차별 문제를 매듭짓지 못하였습니다. 어업협정에서는 독도문제를 협정문에 명기하지도 않았고, 문화재 협정에서는 협정 이후 새롭게 드러나는 일본인 개인이 소장한 한국 문화재의 환수에 대해서 한국정부에 '기증되도록 권장'한다고 하여 이후 약탈당한 문화재 환수에 적극적으로 나서가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_ P 016
심지어 박정희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던 그의 딸은 일본군 성노예 문제와 관련하여 일본과 밀실협약을 맺기도 했다. 거기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소송은 사법농단과 재판거래등으로 무기한 연기되기도 했다. 이후 정권이 두 차례나 바뀌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변한 것은 없다. 아, 생각해보니 변한 것이 하나 있긴 있다. 당시 생존해계셨던 피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돌아가셨다는 것. 이제 정말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아야 할 당사자인 피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몇 안계신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정부나 일본 정부는 변한 것이 없다.
3)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지은이: 강덕상
출판사: 역사비평사
이 책을 쓴 사람은 얼핏 보면 한국인이지만, 사실은 일제강점기 당시에 태어난 황국신민이었다. 당시 지도상에 ‘조선’은 없었으므로, 그는 일본어를 쓰고 일본문화를 향유하던 일본인이었던 샘이다. 심지어 일본에서 살았으니, 조선에 대한 기억이나 향수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하지만 그의 뿌리는 어디까지나 조선이었다. 그런 그가 역사를 전공하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한반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렇게 관동대지진에 대해 알게되었다. 그리고 당시에 있었던, 조선인을 상대로한 관동대학살을 마주한다.
저자는 책에서 이리 말했다. ‘왜, 어째서, 무엇때문에, 관동대학살의 피해국인 한국정부는 이 일에 대해 언급이 없고 무관심한건가?’.
그래서 관동대지진과 관동대학살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기록물을 찾아다니고, 증거, 증언 등 수 많은 자료를 모았다. 그리고 이 책에 실었다. 그 수많은 사진과 기록, 자료들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심지어는 눈 뜨고 보기 힘든 일본인이, 조선인을 학살하는 사진들도 게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렇게 관동대학살을 샅샅히 밝힌 책이 발매되었어도, 슬프게도 한국 정부는 여전히 무관심하다. 심지어 관동대학살이 있었던 1923년 9월 1일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은, 그 의미가 바뀌었다. 2011년 3월 11일 원전사고를 일으킨 동일본 대지진으로 말이다.
내지인과 조선인을 구분하기 어려우므로 말씨가 분명치 않은 자를 조선인이라 하고, 무리를 이룬 피난민을 보고서는 ‘불령선인’ 단체라고 속단했으며, 조선인 노동자가 고용주의 인솔하에 작업장으로 가는 것을 ‘조선인 무리의 습격’ 이라고 잘못 믿어리는 등의 사례가 많았다. 9월 2일 오후 3시경 자경단원이 고마고메 경찰서로 끌고가 폭탄과 독약을 소지한 조선인을 조사해본 겨로가, 폭탄이라고 한 것은 파인애플 깡통이었고 독약이라고 한 것은 사탕이었다. P 108
이처럼 불안에 떠는 일반 시민을 동원한 권력은 어떤 행동요령을 내렸을까? 앞서 살핀 것처럼 경시총감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요시찰인, 사회주의자, 조선인의 책동에 특히 주의하시오, 방화에 주의하시오” 등의 말을 했을 것은 분명하다. 일반 심니이 점점 더 암시에 사로 잡혀갈 때, 이런 종류의 예단이 실제로 원인 불명의 화재와 겹쳐 민중을 더욱 흥분시키면서 “방화다!”, “불 지르는 것을 보았다!”, “조선인이다!”라고 외치게 만들었다. P 113
지침으로 “일부 조선인과 사회주의자 가운데 불온을 꾀하는 자 있으니 저들에게 빈틈을 엿볼 기회를 주지 않도록 시민 여러분은 군대·경찰과 협력하여 충분히 경계토록 할 것이며, 우물에 독을 투입하는 부녀자도 있으니 우물물에 주의할 것” 등의 지령이 있었던 것은 뒤에서 살필 사이타마현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다. “그 당시 ‘조선이니 습격해온다’라는 전단지를 신문사 이름으로 게시했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P 126
일본 국회의원 인 육군소장 쓰노다 고레시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집 부근에서도 매우 소란스러워 문밖으로 나가보았더니 무장한 군대가 있었다. 그리고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적은 지금 하타가야 방면에 나타났다”라고 호령하고 있어 그 장교를 붙들고 “적이란 누구인가”라고 질문했더니 “조선인이다”라고 답했다. 내가 다시 “조선인이 어째서 적인가” 라고 묻자 “상관의 명령일 뿐 알지 못한다”라고 대답했다. P 181
지바가도로 나오자 1,000명 가까이 될 것으로 여겨지는 조선인이 4열로 늘어서 있었습니다. 가메이도 경찰서에 일시 수용되어 있던 사람들입니다. 헌병과 군대가 얼마간 붙어 나라시노 방향으로 호송하는 중이었습니다. 물론 걸어서였지만요. 행렬에서 벗어나면 구타하는 등 포로처럼 다루었으며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헌병은 2명, 병사와 순사가 4,5명이 동행했습니다. 그 뒤를 사람들이 우르르 뒤쫓아가면서 ‘우리 원수를 내놔라’ 하며 흥분하고 있었습니다. (헌병은) 군중들을 쫓아내고 조선인들을 목욕탕에 넣었지요. …(중략)… 군대와 수사는 뒷일은 알아서 하라는 듯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자, 이제 그 다음에는 베고, 찌르고, 때리고, 차고 … 총은 사용되지 않았지만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P 278
4) 흔들림없는 역사인식
지은이: 다카자네 야스노리
출판사: 삶창
이 책의 저자는 일본인이다. 맨 위에 소개한 일본 기자들처럼, 이 책의 저자도 일제의 만행을 파헤치기 위해 당시 식민지배의 피해자들의 곁에 서서 목소리를 냈던 사람이다. 뿐만아니라,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올바른 역사 인식을 지니기 위한 역사윤리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역사왜곡이 만연한 일본에서, 일본인이 이런 책을 출간했다는 사실은 놀랍기도 하지만, 어느 한 편으론 부럽기도 하다. 과거에는 남의 일이라 생각된 역사왜곡이, 실은 우리나라 안에서도 자행되고 있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있노라면, 대체 일제와 우리가 다를게 뭐가있나 싶기도 하니 말이다.
일본의 근대사를 둘러싼 역사 인식이 문제가 된 지 오래다. 최대 논점은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의 대립으로 볼 수 있는데, 사실의 검증과 교육을 중시하는 사고방식 대 사실 검증에는 관심이 희박한 채 근대를 미화, 정당화하는 데 중점을 둔 입장이다. 전자는 후자를 역사 왜곡이라 비판하고, 후자는 전자를 자학사관이라 비판한다. 이러한 대립은 역사교육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교과서 검정 과정에서 전자는 점차 축소되고 후자 쪽이 증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과서에 따라 강도의 차이는 있으나 사실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교육함으로써 현대를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역사교육이 약화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런 흐름은 제2차 아베정권에 의해 한층 강화되고 있다. p 035
역사윤리란 ‘역사에 책임을 지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역사 용어로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개념으로서는 전혀 드물지 않다. 역사상 자주 볼 수 있고 국제 관계에서 많은 국가가 역사윤리의 과업을 다해왔다. (……)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인간의 길’에 어긋나는 행위가 없었는지를 따져보고, 만일 있다면 반성하고 사죄와 배상, 처벌 등의 과정을 통해 청산할 의무가 발생한다. 또 항상 이 ‘역사윤리’를 의식하며 정치와 사법에 임해야 한다는 뜻도 포함한다. p 036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의 책임을 묻는 이른바 전후 보상문제에 대하여, 일본 정부는 국가 간의 ‘해결’이 끝났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완전히 무시했다. 하지만 ‘해결이 끝난 문제’라는 일본 정부의 주장은 핑계에 불과하다.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고, 국가 간에도 배상을 한 것이 아니라 한일 경제협력협정을 맺고 청구권을 방기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는 피해자의 배상 청구를 모조리 거부했다. 그런 까닭에 배상 청구는 사법의 장에서 다툴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사법 역시 하급심에서 드물게 원고가 승소하는 일은 있어도 최고재판소에서는 전부 패소 확정을 강요받았다. 사법이 정치권력을 추종하는 소위 어용 기관이 된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p 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