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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빅토리아 여왕과 귀족 문화 ㅣ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무라카미 리코 지음, 문성호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1월
평점 :
일전에 영국 귀족문화에 대한 세계사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이번에 같은 출판사에서 또 다른 영국에 대한 책을 출판했는데, 이번에는 무려 영국 여왕이다. 정확히는 대영제국의 최전성기 여왕, 그녀 재위했던 시기를 ‘빅토리아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유명한 여왕, 바로 빅토리아 여왕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그 어떤 유럽의 여왕 중에서도 유명세로 탑 파이브에 들지 않을까? 여튼 그정도로 빅토리아 여왕은 유명하다. 그녀가 유명한 이유는 대충 네가지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1. 빅토리아 시대, 해가지지않는나라, 대영제국의 최전성기: 대영제국, 아일랜드 연합왕국과 인도의 여왕
2. 그녀의 자손들이 유럽 왕실 곳곳으로 퍼져있어서, 일명 ‘유럽의 할머니’.
3. 영국 왕실의 전통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를 만든 여왕.
4. 유럽 왕실에 혈우병을 퍼트린 사람.
빅토리아 시대는 제국주의가 최고조를 달렸던 시기이다보니, 세계 곳곳에 대영제국 식민지가 있었다. 영국의 반대편에도 있었다. 그렇기에 대영제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 따라서 이 시기가 영국에게는 제일 리즈시절이라 할 수 있지만, 그만큼 그림자도 많던 시기였다. 식민지가 많았다는 이야기에서도 충분히 추정할 수 있지 않은가. 간혹 tvN 프로그램인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영국아저씨가 출현하면, 그렇게 입이 마르도록 사과하는 이유가 바로 대영제국 시절의 영국의 그림자 때문이기도 하다.
‘유럽의 할머니’와 ‘유럽 왕실에 혈우병을 퍼트린 사람’은 그 궤가 같다. 빅토리아 여왕의 자녀는 9명이었는데, 그 중 딸들이 여러 유럽 왕가와 결혼했고 그 사이에서 42명의 손자녀를 두었다. 이 42명의 손자녀 중 손녀들도 역시 또 여러 유럽왕실로 시집을 갔다. 문제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혈우병 인자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 책에 따르면 혈우병은 여성을 통해서만 유전이 되고, 남자만 발병한다고 한다. 즉, 빅토리아 여왕에게서 시작한 혈우병은 그녀의 딸, 손녀들을 통해 유럽 왕실 곳곳으로 퍼저나갔다. 빅토리아의 아들부터 시작해서, 손자, 증손자 등등. 혈우병은 계속해서 그녀의 피를 이은 유럽 왕실 남자들을 덮쳤다. 무엇보다 빅토리아에게 시작된 혈우병으로 인해 러시아 왕가가 몰락했다고 하니, 여러모로 그녀의 존재감은 대를 끊이지 않고 유럽왕실에 드리워졌다고나 할까?
‘군립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를 영국 왕실의 전통으로 만든 빅토리아. 그 덕분에 군주제가 몰락하는 시점에서도 영국 왕실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제 2장 정치편에서 이 부분에 대해, 빅토리아의 일기와 그녀의 정치력을 보여주며 설명한다. 말 나온 김에 이 책의 목차를 보면, 빅토리아의 유년시절을 시작으로, 여왕으로 즉위하고, 그녀의 사랑인 알버트와의 결혼, 그녀의 사생활과 정치, 최전성기였던 대영제국의 영광, 그녀의 사망까지를 이야기한다. 빅토리아 여왕의 일기와, 당대의 신문기사,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자서전등을 전부 망라해서 말이다. 소설이 아닌, 오롯이 사료에 의거한 영국사, 세계사책이다. 영국사, 특히 대영제국 시기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제 1장 즉위준비 1819-1837
제 2장 대관식과 정치 1837-1839
제 3장 빅토리아의 왕궁 1837-1880
제 4장 결혼으로 가는 길 1828-1840
제 5장 여왕의 주거와 가정생활 1837-1860
제 6장 만국박람회와 전쟁 1851-1858
제 7장 상복을 입은 여왕과 남자들 1861-1883
제 8장 제국의 영광 1868-1899
제 9장 끝날 때 1900-1901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빅토리아 여왕과 관련된 각종 삽화가 정말 많이, 아주 많이 실려있다는 점이다. 올컬러로! 물론 처음부터 흑백인 삽화는 어쩔수 없지만, 그를 제외하면 올컬러다. 만약 글만 있었다면 다소 지루했을지도 모르는 이 세계사책은, 올컬러 그림자료를 넣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읽는 즐거움 뿐만 아니라 보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아래에 이 책의 일부를 발췌하였다.
▶ 제 1장 즉위준비 1819-1837
6시에 어머니가 깨워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하울리와 커닝엄 경이 와서 내게 면회를 요청했다고 했다. 커닝엄 경은 유감스럽게도 나의 할아버지, 국왕께서 이미 세상에 없다는 것, 오늘 새벽 2시 12분에 숨을 거두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내가 여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고했다. p 012, 빅토리아의 일기 中
(빅토리아가)탄생한 시점에 아버지 켄트 공에게는 세 사람의 형이 건재했으나, 모두가 정식 결혼에 의한 자식이 없었다. 만약 이 백부들 중 누군가가 적자를 얻었거나, 아니면 선왕이 살아 있는 동안 빅토리아에게 동생이 생겼다면 남자 우선인 계승 순위 때문에 왕위가 돌아오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빅토리아가 겨우 8개월이 됐을 때 아버지 켄트 공이 세상을 떠나 동생이 태어날 가능성은 사라졌으며, 백부의 자식들도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빅토리아는 겨우 18세의 나이로 영국의 군주가 된다. p 012
모친인 켄트 공 부인은 세상을 떠난 남편의 시종무관이었다가 자신의 회계관으로 등용된 존 콘로이와 함께 딸이 세간의 눈을 최대한 피하게 하고, 동시에 모랄면에서의 의심스러운 왕궁 사람들과도 심리적으로 깊게 엮이지 않도록 켄싱턴 궁전에 격리하듯이 키웠다. (…) 켄트 공 부인의 동생 레오폴드는 빅토리아에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는 사모의 대상이었으며, 동시에 지적인 인도자이기도 했다. 그는 세계 각지에서 현지의 정세를 적어 보내주었고, 편지를 통해 지리와 정치, 국제 정세의 지식을 전수했다. 자신이 여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녀가 아직 모르던 시절부터 빅토리아는 어머니와 콘로이, 레오폴드의 유도로 ‘그날’을 위한 준비를 착착 쌓아가고 있었다. p 019
1832년 7월, 13세일 때 어머니가 일기장을 준 일을 계기로 빅토리아는 더욱 구체적으로 하루하루의 기록을 일기로 남기기 시작했다. 이 일기는 가족의 죽음 등 도저히 말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중대한 일이 일어났을 때 중단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반드시 제개되었고,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계속 기록되었다. 또 언니, 숙부, 아이들, 가족과 친척에게는 대량의 편지를 썼다. p 021
빅토리아가 어른이 되어 남편과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보낸 건실하고 도덕적인 삶은 19세기 중류 계급 사람들에게 가정적 도덕의 모범이 되었다고 평가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 원점에는 가족이 없던 왕녀가 도덕 교본과 인형놀이로 생각해낸 공상의 가정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면, 참으로 얄궂은 상황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적은 것들은 모친이 매일 체크했고, 당연하지만 왕녀가 읽는 것들도 엄하게 제한되었다. 켄트 공 부인은 침실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 딸이 하인이나 여관과 필요 이상으로 잡담을 해 영향을 받지 않도록 가정교사에게 트리머 부인의 도덕 교본을 낭독해 들려주도록 명령했다. 당사자의 시점으로 생각한다면 모든 면에서 모친의 간섭과 제한이 많았던 소녀 시대였음을 엿볼 수 있다. p 023
켄트 공 부인은 빅토리아가 즉위할 때까지 같이 침실에서 자고, 가능한 딸을 자기의 컨트롤 아래에서 키우려는 의도가 있었다. 하지만 사교 행사로서의 정찬에는 적극적으로 출석시키지 않았다. 이때의 의도는 어른으로 취급하지 않고, 아이인 채로 머물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머니인 켄트공 부인과 측근이자 브레인인 존 콘로이에 대해서는, 빅토리아를 세간과 격리해 아이 취급을 했다는 점에서 역사가나 전기 작가들의 견해가 일치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아가서는 콘로이는 사설 비서, 모친은 섭정으로 지명되어, 즉위 후에도 영향력을 확보하려 했다. 장사자의 생각은 당연히 별개였다. p 031
빅토리아가 자신이 여왕이 될 것임을 안 것은 1830년 3월 11일, 10세 때였다고 한다. 위의 인용은 즉위 50주년과 60주년 시기에 대량으로 제작된 저렴한 기념 책자 중 하나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 ‘좋은 사람이 되겠다’라는 대사는, 그녀의 성격의 핵심을 나타내는 일화로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말했는지 디테일은 달라지지만, 다양한 종류의 여왕 전기, 회상록, 기사 등의 초반 하이라이트에 대부분 등장한다. p 038
신의 뜻에 따라 이 지위에 오른 이상, 나는 전력을 다해 나라를 위한 의무를 다할 것이다. 나는 너무나 어리고, 전부라고까진 하지 않더라도 많은 부분에서 경험이 부족할 테지만, 지금의 나만큼 올바른 일을 하겠다는 진정한 선의와 열의를 품은 사람은 없으리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p 040, 빅토리아의 일기 中
▶ 제 2장 대관식과 정치 1837-1839
그것은 빅토리아의 어머니 켄트 공 부인의 여관인 레이디 플로라 헤이스팅스에 관련된 사건이었다. 당시 빅토리아와 켄트 공 부인의 모녀 관계는 더욱 험악해져갔으며, 이렇게 사이가 나빠진 원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너무나도 싫어하는 콘로이와도 친하게 지냈던 여관 플로라는 그들의 스파이처럼 느껴졌다. 빅토리아는 그녀를 ‘엄마의 느낌 좋은 레이디’라고 일기에 적었지만, 당연히 비꼬는 것이었다. p 056
여관과 총리를 둘러싼 문제는 같은 시기에 하나 더 더해졌다. 1839년 5월, 휘그파의 멜번 총리가 식민지 자메이카를 둘러싼 법안에서 패배하고, 반대파인 토리파로 정권이 교체되게 된다. 이 시기까지 빅토리아는 정치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멜번총리에게 의지하고 있었으며, 그와 빅토리아는 아버지와 딸 같은 관계를 쌓고 있었다. 대관식 날의 일기에는 자신을 지켜보는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던’ 것을 네 번이나 되풀이해서 적었을 정도로. 여왕은 마지못해 토리파의 원로 정치가 웰링턴 공작을 불러 총리가 되기를 요청했으나, …. 필은 빅토리아의 침실 여관 중 ‘몇 명인가를 변경’할 것을 요구했다. 이 여관은 전원 휘그파 정치가의 아내들 중에서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 빅토리아는 ‘전원을 바꾸라고 강요당했다’고 해석해 강하게 반발했으며, 일체의 변경을 거절한다. 결과적으로 필은 내각을 조직하는 것을 단념하고 멜번이 돌아오게 되었으며, 여왕은 만족했다. 하지만 정치에서 구심력을 잃었던 멜번 총리의 명운은 금방 다했고, 2년 후에는 사임하는 사태로까지 몰리게 된다. p 058 ~ 061
빅토리아의 치세는 길었다. 경험을 쌓은 그녀의 의견은 존중되었고, 발군의 기억력을 기초로 제시되는 과거의 지식은 대신들에게도 나름대로 존중받았다. 하지만 편지나 총리와의 회견을 통해 매일 영향력을 발휘한다 해도, 최종적인 결정에는 의회의 의향이 우선시되었으며, 정치나 외교, 군사에 관한 커다란 문제에 여왕 개인의 의견을 밀어붙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한 입장으로 서서히 물러났기때문에, 수많은 나라에서 군주제 그 자체가 폐지되던 역사적 흐름 속에서도 21세기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영국 왕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p 066